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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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삶에는 규정된 틀이 없다 댓글:  조회:335  추천:0  2021-07-14
삶에는 규정된 틀이 없다 박일 고령화시대, 백세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 로년세대의 삶의 양상은 퍼그나 새롭게 변해가고 있고 그에 따른 로인들의 행복지수도 날따라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군체적인  변화중의 하나는 자녀들과 갈라져서 따로 사는 로년세대의 단독거주(독립거주) 현상을 들수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늙으면 어쩔수 없이 자녀들에게 의지하고 자녀들한테 얹혀사는것이 기본 선택이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요즘 로인들은 건강에 대한 자신심, 자립을 뒤받침할수 있는 경제력, 거기다 만년에 개인 생활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더해지면서 아예 늙어서는 자식들과 떨어져 따로 사는것이 편안하고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로인들이 다 생각이 같고 움직임도 비슷한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주변을 두루 살펴보면 오늘도 적지 않은 로인들은 의연히 자식들과 한집에서 같이 사는 모습을 볼수 있다. 물론 이 가운데는 건강문제로 인해, 경제문제로 인해 또는 말못할 개인 사정으로 인해 어쩔수 없어 자식과 같이 살아야만 하는 로인들도 더러 섞여있겠지만 또 일부 로인들은 자식들과 같이 사는게 즐겁고 좋아서, 자식과 떨어져서는 못살것 같아서 한집에서 삼세대가 오손도손 같이 사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운다. “드나 놓으나 피붙이라고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따로 살아요?”이러는 로인부부가 있는가 하면 1년은 아들집에 가 살고 또 1년은 딸네 집에 가서 산다고 자랑을 한광주리 늘어놓는  로인들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는 이렇게 자식들과 같이 사는 로인들을 비웃고 손가락질 하고 아예 바보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두루 나타난다는 그것이다. “아니,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내가 좋아서 아들네와 같이 사는데 옆에서들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 당쳐 모르겠어요.” 공연히 말밥에 오르는 로인들의 한결같은 볼멘 소리이다.   그런가 하면 요즘 세월, 적지 않은 로인들은 퇴직후에 자식들의 집에 가서 손군을 봐주는 일이 류행처럼 보편화되고 있는데 그일을 두고도 옳네 그르네 하며 떠드는 소리 또한 요란하다고들 한다. 옛날에는 전혀 볼수없던 “손군보는 바람”이 요즘 로인들의 신변에 들이닥쳐 만년을  즐겁게 보내야 할 로인들을 공연히 고생시킨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는데 필자가 보기에도 자기들이 절로 해야할 임무를 부모세대에 마구 떠맡기는 요즘 젊은 세대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허리가 꼬부라들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손군을 보느라 고생만 할거냐?... 죽을 때 후회하지 말고 당장 그 일에서 손을 떼!”하며 친구, 친척, 이웃들이 바보라고 야단을 치는 소리가 더 귀아파서 못 살겠다고 하는 일부 당사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필자도 머리를 가로젓게 된다. 손군을 보는 “보모”행렬에는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아니될 이런저런 피치못할 사정으로 발목잡히는 로인들도 있는가 하면 또 일부 로인들은 “돈팔며 가정보모에게 손군을 맡기면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하면서 아직도 얼마든지 움직일수 있는 몸이기에 자기가 하고싶어서 달갑게 손군을 보는 로인들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여러해전의 일인데 필자는 어느 중학교의 한 반급 학생들이 쓴 작문을 읽어보고 저으기 놀란적이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작문 수준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반급 어문교원이 매긴 점수때문에서였다. 이 교원은 자기의 취미와 생각대로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고 그 요구에 맞게 글을 쓴 학생들은 점수를 높게 주었고 그 요구에서 생각이 벗어난 학생들의 작문은 점수를 낮게 주고있었던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점수를 아주 낮게 맞은 한 학생의 작문은 개성이 뛰여나고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신선한 글이여서 그 반급 학생 작문들중에서는 우수한 점수를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필자는 후에 이 일을 우리 신문의 교육면에 엄히 지적한바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상도 바로 그러하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살아가는 경력, 환경, 경제,문화 등등 상황이 다름으로 하여 각자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천태만상일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래야 하거나 또 저래야 하는 규정된 틀이 따로 없다는것이다. 하긴 세월의 변화에 따른 삶의 추구나 추이같은건 있겠지만 어떻게 살던 자기 나름대로 편안하고  즐거우면 만족한 삶이고 또 자기가 만족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인것이다. 어떤 보약이 먹어보니 몸에 좋더라고 다른 사람한테도 구태여 그 보약을 사서 먹으라고 강요해서는 아니되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하얗게 변해가는 흰머리 또한 어른스러운 성숙미가 흐르는데 그래도 머리는 검은 색이여야 젊어보인다고 옆에서 한사코 떠드니 억지로 보기 좋던 흰머리에 검은 물감을 바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만화 한폭이 있다. 한 사람이 아리비아 수자 9자를 크게 쓴 종이장을 땅에 놓고 9자라고 하니 그와 마주하고 선 사람은 그것은 9자가 아니라 6자라고 한사코 고집한다. 서로 상대방의 립장에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달이다. 우리는 자기의 흥미, 지향을 비롯해 자기의 개성을 떳떳이 지키고 살려가는것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처한 형편이나 자기와 다른 독특한 개성도 충분히 리해해줄줄 알아야 하고 또 될수록이면 자신의 생각, 또는 자기가 사는 모습과 다르다고 하여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배척하거나 강요해서는 아니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삶과 같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도 충분히 리해하고 존중하는 그런 미덕을 갖추어야 할것이다.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37    병마가 친구로 될수는 없을가 댓글:  조회:337  추천:0  2021-05-17
병마가 친구로 될수는 없을가 박일 몇개월 전, 필자는 고향친구 A군이 림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었다. 필자와 A군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지만 퇴직후에도 여러번 만났고 자주 전화를 하면서 가깝게 지내오는 사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A군에게 직접 위문전화도 하고 성의껏 위로금도 보내면서 조만간에 꼭 한번 찾아가 뵙겠노라고 아이들이 깍지 걸듯 약속도 했었는데 어쩌면 거퍼 한달도 안되여 그이가 사망하였다는 놀라운 비보가 날아왔다. 그보다도 충격적인 일은 A군은 림파암 말기란 진단이 나오자 아예 맥을 놓으며 음식을 전페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암이 급속히 악화되여 잘못된 것이 아니고 겁에 질려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친구 A군이 그렇게 떠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가슴이 먹먹해난다.   사람이 살다보면 정해진 시간이 따로 없이 몸이 아프거나 심신에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이런저런 병이라는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찌보면 병이라는 악마는 행복이라는 기쁨이 우리 몸에 찾아오듯 마시는 공기처럼, 그림자처럼 붙어다니고 또 우리 몸에 침투되여 나쁜 피와 살을 만들려고 애를 박박 쓰는 마귀인 것 같다. 그래서 보면 몸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여기저기가 아파나 약을 먹고 병원을 찾아 의사의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 다시 건강을 찾으며 사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 또는 삶의 한부분으로 되고있다. 그러니 아무리 밉고 짜증이 나더라도 어쩔수 없이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쩔수 없이 그러한 병마와 싸우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진 모습, 또는 삶의 내용중에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일환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나 젊은 세대가 아니고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우리 로인세대의 경우에는 더구나 그러하다. 로인세대는 젊은이들과 달리 인간생물체가 발육이 완성된 성숙기 이후에 생기는 신체로화, 즉 신체의 여러가지 기능이 쇠퇴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그런 신체의 로쇠현상으로 말미암아 년세가 많아질수록 신체의 전반적인 기능감소가 심각해지고 더불어 퇴행성 질병이 몸의 이곳저곳을 부식시키는 것이다. 이는 생, 로, 병, 사의 자연법칙이므로 한해가 지나면 나이가 한살 더 먹듯 누구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보면 우리 로인들은 관절염,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치매, 골다공증 같은 전형적인 질병이 몸에 생기게 되는데 이런 질병은 조기발견이 어렵고, 만성적이며 허다한 로인들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질병을 복수로 가지고 있는가 하면 대부분 질병은 또 완치가 거의 불능이란 특성까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무더운 폭염속에서 두 사람이 사막을 걷다가 몸에 지닌 먹을 물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들여다 보게 된다. 물은 딱 반병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사람은 “물은 아직도 반병이나 있네”하고 말하는데 다른 한사람은 “물이 겨우 반병밖에 없네”하고 대답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생각이 부동함에 따라 이어서 나타나는 자세와 기분도 완전히 달라진다. 물이 아직도 반병이나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심과 용기가 생겨 몸에서 힘이 솟아나는데 반면 물이 겨우 반병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만과 실망이 몸에 밀려들어 어깨가 처지고 맥이 빠지게 되였던 것이다.   이는 무슨 일이나 마음가짐에 달렸음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실례다. 우리가 병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몸에 병이 생겼다고 덮어놓고 두려움부터 앞서고 겁이 나서 쩔쩔매고 소극적이고, 귀찮고, 싫어서 뒤걸음질만 친다면 병이란 악마도 당신을 얕잡아보고 업신여기게 되여 더 포악스럽고 더 기세 사납게 당신의 육신을 아프게 만들 것이고 괴롭히고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던 질병이 몸에 생겼다 하더라도 “밥을 꿍꿍 챙겨먹고 정신을 버쩍 차리노라면 나아질 거야.” “약을 먹고 주사 맞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완치될 거야.” “좋은 약, 좋은 의사, 좋은 병원에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자세로 밝은 생각을 가진다면 당신은 기필코 그 질병이란 악마와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적극적인 자세와 바른 마음가짐이 있음으로 하여 암과 같은 무서운 질병도 떳떳이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는 환자들이 기수부지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질병은 우리의 몸을 해치는 악마라고 한곬으로만 생각하며 그냥 등 돌리고 배척하려고 애 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그래서라도 질병이 사라지고 도망간다면 몰라도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하여 절로 피하고 없어질 물건도 아니지 않는가? 우에서도 언급했듯이 로인들의 관절염, 고혈압, 당뇨 같은 질병은 대부분 만성병일뿐만 아니라 완치는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이 미워하던 고와하던 그 병은 병대로 그냥 몸에 혹처럼 붙어있을 것이다. 그럴바 하고는 마음을 크게 먹고 그 병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 어떠냐 하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몸에 있는 질병과 공존하며 같이 살아가는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사는게 쉽고 사는게 상대적으로 힘이 적게 든다는 것이다. 흔히 로인들의 몸에 생긴 병은 하루 이틀 사이에 걸린 병이 아니여서 그놈이 발작할라치면 얼마나 아프고 어떻게 괴로운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있는 경험자들이다. 그래서 아픈 것이 낯설지가 않고 아픈 것이 습관이 되여오고있다. 그렇다고 할때 머리가 아프면 이마를 짚고, 심장이 아프면 가슴을 누르며 “야, 너 그쯤에서 좀 멈추면 안되겠냐?” “고맙다, 너 오늘은 나를 별로 귀찮게 굴지 않아주어서” 하고 속으로 대화도 하면서 그 병과 다정한 친구로, 같이 가는 길동무로 지내자는 그얘기다. 그러면 그 병때문에 늘 불안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일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마음이 편안해서 식욕도 늘고 잠도 잘 오고 절로 움직임이 많아지며 무엇을 하고 싶은 충동도 커지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래서 병이란 “병”자에다 마귀라는 “마”자를 붙여 원쑤 같은 “병마(病魔)” 라고 욕설만 퍼부을 것이 아니라 그 “병” 자에다 친구라는 “우”자를 붙여 길동무인 “병우(病友)”라는 신선한 이름도 불러볼줄 알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자의 고향친구였던 A군도 만약 림프암 말기란 진단을 받고 지레 겁에 질려 무너지지만 않았더라면, 한발 더 나아가 그 림프암을 인정하고 그 암과 친구 되여 같이 살아가는 밝은 마음을 가졌더라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펄펄 숨을 쉬며 이 세상에 살고있지 않았을가?!   흑룡강신문
36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박일) 댓글:  조회:445  추천:0  2020-06-19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남영전선생의 를 읽고 박일   남영전선생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걸출한 시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이다. 그는 우리 글은 물론 중문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국의 주류사회, 주류문단에서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에, ‘중국의 10대 걸출한 민족시인’에 떳떳이 이름을 올린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고 문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을 꾸준히 인류문화의 원천이고 뿌리인 토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쌓고 있는 존경스럽고 돋보이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근 남영전선생이 《길림신문》에 펴낸 는 글 역시 무게 있고 폭이 넓으면서도 아주 재미나게 엮어 애독자들의 큰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글은 원시 인류문명의 발단인 토템의 출현, 토템숭배로부터 인류, 민족, 력사, 문화, 종교 등 넓은 령역을 고루 살펴보면서 원시문명과 현대문명이 의존하고 발전하게 된 토템이란 원초적 문명의 씨앗을 생동하고 체계적으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아츨하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여서 퍼그나 어렵다면 어렵고 난해하다면 난해하기도 한 전통적인 뿌리문화인 토템 명제를 우리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흥미를 가지도록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그것이다.   남영전선생이 엮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행,어 문화개념을 풀이도 해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을(문화가 있냐 없냐) 비교도 해보면서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임을 알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혼례, 장례풍속…지어는 결혼식 때 왜 큰상에 수탉이 오르고 수탉의 주둥이에 고추를 물리우느냐는 등 구체적인 세절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며 형상적으로 생동하게 설명해주고 또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그럴듯 퍼그나 엄숙하고 퍼그나 딱딱하게 안겨올 수도 있는 토템이란 문화지식을 독에서 푹 익어 나오는 김치처럼 대가 다운 목소리로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이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템문화에 접촉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마저도 가슴에 와 닿고 실물을 보듯이 그 륜곽과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도록 한다. 이는 글을 다루고 주무르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문인, 학자들이 따라 배울바라고 본다. 이 또한 덕망높은 남영전선생이 우리 독자들을 배려하는 어진 성품이고 덕량이 아닐가 생각한다.   길림신문
35    입을 봉해라 댓글:  조회:489  추천:0  2018-08-03
이상하게도 서울에서 가지는 고중졸업 서른돐 기념 동창모임에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단위에 일이 많아 몸을 뺄 수가 없다고 핑게를 댔다. 그랬더니 벌둥지가 터졌다. “지질국 국장이 그렇게 대단하냐? 네 눈엔 옛날 고중동창들은 다 시시해보이겠구나?” “야 최진수! 너 이번 행사 파토 놓을 작정이야? 글쎄 우리 반 반장이였던 니가 안 온다는 게 말이 되니?” 하는수 없어 나는 점심만 먹고 돌아서려고 오전에 서울로 날아가서 저녁에 할빈으로 돌아오는 당일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 인천공항에 이르니 덕호가 마중나와있었다. 옛날 중학교 다닐 때 덕호, 나 그리고 성규 셋은 문학동아리 성원들이였다. 거기에 지금은 성규의 안해로 된 아래반 민자도 있었다. “진수야, 너 요즘 성규하고 련락이 있니?” 덕호가 자가용승용차를 운전하며 나한테 묻는다. “없어,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위챗에 글을 띄워도 대답이 없어.” “그럴 것 같아 물어본 거다. 얼마 전에 성규하고 술을 마셨는데 걔 너한테 많이 서운해하더구나… 재작년에 너의 딸 대학 간다고 너 마누라와 딸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성규네 부부가 울릉도요, 제주도요 하며 일주일이나 함께 다닌 걸 너도 알지?” “알구말구, 그때 우리 집사람이 유람경비를 주려고 해도 한사코 받지를 않고 몽땅 걔들 부부가 돈을 썼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얼마 전에 민자가 시어머니, 그러니까 성규 어머니를 모시고 네가 사는 할빈으로 갔었다며?…” “잠간! 성규 어머니도?… 그 말은 너한테서 처음 듣는다. 민자 혼자 나를 찾아온 적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단위에 급한 일이 생겼고 집사람도 의료봉사대로 어느 시골에 내려가 있다보니 성규 처 민자한텐 정말 미안하게 됐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덕호를 따라 모임 장소라는 대림동의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한구들 앉아있던 동창들이 반갑다고 란리였다. 그런데 성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성규는?…” “글쎄다. 그 녀석 사는 집은 여기서 멀지도 않은데…” 동창들은 성규네 부부는 금슬이 좋아 대낮에도 끌어안고 자는지 모르겠다며 떠들어댔다. 연회가 시작됐다. 덕호가 사회를 맡고 내가 첫 사람으로 발언을 했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며 방이 떠나가게 “위하여!”를 웨쳤다. 이때 성규가 방에 들어섰다. “지질국인지 지랄국인지 왔구나!” 성규는 어디서 술을 잔뜩 마신 것 같았다. 그는 곧추 나한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최진수! 너는 의리가 없어!” 동창들이 욱- 일어나며 말리려 하자 성규는 맥주병을 쳐들고 누구든 말리는 놈은 대갈통을 묵사발 만들겠노라고 했다. 내가 모두들 자리에 앉으라고 눈치를 주는 순간, 성규는 상 우에 있는 컵을 손에 들더니 그 속에 그득 담긴 맥주를 내 얼굴에 쫙- 뿌렸다. 내 얼굴은 단통 구정물에서 꺼낸 걸레가 되여 거품이 묻은 맥주물이 구질구질 흘러내렸다. 성규는 그 다음은 자기 머리를 나의 턱밑으로 들이밀었다. “너도 한매 때려!… 안 때려?… 그럼 나 간다!” 성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자 무슨 술 저렇게 마셨다니?” 동창들이 혀를 차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괜찮다고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세면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콸콸 나오는 물에 머리를 통채로 들이밀었다. 두달 전 어느 날, 성규 부인 민자가 갑자기 나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오빠!” “어?…” 나는 손을 뻗어 민자와 악수를 청하려는데 민자는 향수냄새를 풍기며 나의 품에 와 안겼다. “어쩌다가 기별도 없이 이렇게?…” “호호… 오빠 보고 싶어 왔지!” “이거 어쩌지, 집사람이 지금 외출해서… 그렇지 않으면 곧추 우리 집 가면 되겠는데…” “호호, 난 무조건 오빠네 집부터 구경할 거야.” 이때 사무상 우의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그 벨소리가 구명은인이 부르는 소리처럼 반가웠다. 그렇게 얼굴이 뜨겁던 사무실에서 나왔다. 순간, 지난 겨울 서울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그날 저녁 성규네 부부가 나를 초대했다. 우리 셋은 반가워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런데 성규가 화장실로 간 사이 민자가 나의 곁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오빠! 난 기실 옛날부터 우리 봉이 아빠보다 오빠를 더 좋아했어요”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왜 갑자기 오빠로 변했지? 민자 술이 과했네.” 하면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는 성규와 어깨겯고 술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시골로 의료봉사를 내려간 안해에게 성규 부인이 왔다고 했더니 안해는 오늘은 안되고 래일 돌아오겠노라고 했다. 뜸을 들여 사무실의 쑈류란 처녀애를 뒤에 달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선 나는 민자를 보고 상급에서 갑자기 조사조가 와서 오늘은 몸 뺄 수가 없으니 이 애가 호텔도 잡아주고 식사도 같이 할 거라고 말했다. 이튿날 안해가 돌아왔다. 그런데 민자의 폰은 꺼져있었다. 쑈류가 마련한 호텔로 가봐도 민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쳐들고 마주 있는 거울을 보았다. “이런 말을 내가 성규한테 할 수 있냐? 없지?? 그지?!… 동창들한텐 더구나 할 수 없는 거고… 맞지?? 그지?!”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거울 속에서도 머리를 끄덕였고 내가 머리를 가로 젓자 거울 속에 있는 나도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덕호가 웬일이냐 싶어 세면실로 찾아왔다. “저런 봉변을 당하고도 찍소리 못하는 걸 보면 진수 쟤가 무슨 죄를 져도 단단히 진 게 분명해!” “전에부터 급이 높아지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 있잖아.” 최진수란 내 이름이 술상의 안주가 되고 있었다. “무슨 허튼 소리들이야!” 덕호가 동창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나는 웃었다. 동창들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이윽고 나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뜯어보는 동창들과 리별하고 택시에 앉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연변일보 
34    어머니의 성씨는 무엇이었을까 -박일 댓글:  조회:685  추천:0  2018-06-13
어제 나는 신문에서 항일 여전사 리재덕 여사 백수연 기념행사를 베이징에서 가졌다는 기사를 감명깊게 읽었다. 그래서였던지 지난밤 꿈에는 저 세상으로 가신지 20년이 되는 어머니를 보았다.    나의 어머니는 항일 투사가 아니다. 그저 한평생 농사일을 해온 평범한 시골 부녀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에는 진한 피처럼 그럴만한 이야기가 묻어있었다.    나의 어머니의 성은 주(朱)씨였다. 그런데 이 주씨 성은 어머니를 이 세상에 데려온 생부한테서 이어받은 성이 아니라고 옛날 내가 자라날 때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한구들 앉혀놓고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1930년쯤 어머니는 흑룡강성 동부 지역의 어느 산간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어릴 때의 기억으로 나의 외할아버지는 가끔 한밤중이면 허리에 권총을 차거나 또는 어깨에 긴 총을 메고 집으로 오군 하셨단다. 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네 집으로 오는 사람 모두가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외할아버지가 금방 집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숱한 일본놈들이 어머니네 오두막집을 포위했다. 그바람에 외할아버지는 어쩔 사이도 없이 적들한테 잡혀 두팔을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밖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도 도망을 가려 했든지 아니면 결사적으로 대항을 했든지 놈들은 문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외할아버지를 군도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죽였던 것이다.    그해 어머니 나이는 일곱살이었다. 그런 충격에 놀란 나의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쓰러졌는데 조금 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맥잃고 앓다가 결국 한달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양친 부모를 잃은 어머니는 어떤 마음씨 고운 사람들의 알선으로 밀산현의 어느 마을에 사는 성이 주씨라는 지주집의 (역시 조선족이었음) 양딸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 성은 그때부터 주씨로 변했다.    어머니는 위로 오빠들이 셋이 있는(그들은 모두 서울에 나가 공부를 하였음) 주씨 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16세 나던 해(1946년) 그 집에서는 어머니를 부랴부랴 지금 나의 부친한테 시집을 보내고는 서둘러 한국 서울로 떠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외할아버지는 옛날 만주벌에서 일본침략자들과 피 흘리며 싸운 항일연군 전사, 또는 항일유격대 대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가 어렸던 탓에 외할아버지의 정확한 신분은 밝힐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나어린 어머니를 가정 형편이 좋은 주씨집에 보내준 그 ‘고마운 사람들’은 혹시 외할아버지의 전우들이었고 그래서 희생된 전우의 딸애를 그런 가정에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가 나의 부친과 결혼한 뒤 한달도 안되어 부친께서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가 되어 요심전역, 평진전역, 후에는 조선전쟁에까지 나갔다가 1952년에야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분은 그때서야 진짜 가정을 이루게 되어 우로는 누나, 그 다음은 나, 나밑으로 동생들도 줄줄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부친께서는 나의 외할아버지의 신분을 밝혀내려고 흑룡강성 동부지역은 물론 연변일대와 베이징에도 다녀왔었다고 했다. 그랬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본래 성씨를 정확이 기억 못하는 탓에 신통한 단서는 잡지를 못했었다.    문화대혁명시기 체구가 작고 약한 어머니는 “오류분자”들 속에 끼어 투쟁도 맞았었다. 지주집 ‘양딸’이어서 그랬다. 홍위병들이 어머니의 머리를 마구 쥐어뜯어 오리오리 헝크러진 머리 맵시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만...    아버지만 찾았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을텐데...” 하면서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대학공부를 하던 1980년, 금방 쉰고개에 오른 부친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생전에 어머니가 자라던 주씨네 집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의 신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 사람들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 하셨다. 그 세월이 오늘 같은 세월이었다면 아마 당신께서는 한국 KBS방송국에 사람 찾는 편지만도 수없이 띄웠을 것이다.    하긴 나도 부친의 뒤를 이어 외할아버지 신분을 밝혀내리라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맏아들인 나를 아침에 낳았던지 저녁에 낳았던지조차 아물거린다는 어머니께선 주씨 집 사람들의 이름은 그만두고 그 집이 밀산현 어느 향에 살았던지도 기억을 못하고 계셨다. “니들 아버지만 살았어도 그런 건 잘 알고 있을텐데...”하고 낙루하시며 한숨 짓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부친 생전에 미리 물어 챙겨두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신분을 찾는 일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랬어도 한때는 무엇을 먹다 목에 걸린 사람처럼 억울한 현실이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았고 또 이러다도 혹시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책이나 영화를 보다가 희생된 조선족 항일투사의 이름이 나오면 혹시 저분이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몰래 혼자서 좋은 꿈을 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차츰 그런 생각마저도 접고 말았다. 하긴 흐르는 세월과 함께 간절하던 마음이 무뎌져버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글 신문사 기자로 수십년간 조선족사회를 요해하고 익혀 온 몸이다보니 내 어머니 한분만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살아온 것이 아님을 나는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삼강평원의 한 국영농장의 마을뒤 구릉에는 옛날 항일시기 희생된 이름 모를 투사들의 무덤이 나란히 세개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제는 무덤이 흔적조차 없어졌다. 당지 한 간부는 나를 보고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그 투사들은 모두 당신 같은 조선족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머리를 세차게 가로 젓듯 무성한 풀들만 바람에 설레이는 그곳을 오래도록 지켜본적 있었다. 나는 또 벌리현의 한 조선족마을에서 남편은 일찍 항일투사로 희생되었고 금쪽같은 외동 아들마저 토비숙청에 나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몰라 그냥 애타게 기다리다가 두 눈마저 멀어버린 한 맹인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할머니를 취재한 적도 있었다.   하얼빈시에 있는 동북혁명열사기념관에는 항일열사들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는데 동북지역에서 항일 초기에 희생된 열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선족이었고 전반 항일시기 열사들을 통틀어 보아도 조선족열사는 무려 60%를 차지했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연변자치주도 그러했다. 공산당을 따라 항일, 해방전쟁에 참가한 조선족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으면 연변을 이르러 ‘마을마다 기념비요. 산마다 진달래’라 하는 시귀가 그것도 타민족의 붓끝에서 나왔겠는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일찍 이 땅에서 혁명을 한 선배님들의 이야기었고 이것이 곧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의 역사였다. 그러고보면 어머니의 본래 성이 무엇이었던지는 몰라도 괜찮다.    그저 나의 외할아버지는 수많은 조선족 항일투사들중의 의젓한 한분이었으리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자랑스럽다. 그러니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부디 삼가 나무를 베이라/ 우리 선렬의 영을 그 나무 지키고 있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 옆에 놓인 돌을 차지 말라/ 우리 선열의 해골이 그 돌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오늘따라 조기천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위챗계정
33    고운 눈길 좋은 생각 댓글:  조회:530  추천:0  2018-05-28
    현태석교원의 계렬교육수필을 보면서   (흑룡강신문=하얼빈)박일 본사 론설위원= 두부를 사려고 아침시장에 나갔더니 앞에서 두부를 먼저 사던 한 중년녀인이 위챗으로 결산하는데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제대로 되지 않아 스마트폰과 씨름하고 있었다. 녀인은 뒤에 서있는 필자한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장치가 달라서인지 필자가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 눌러봐도 역시 안되는건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돈을 받으려고 스마트폰화면에 자기 큐알코드를 드러내놓고 기다리고 있던 두부파는 아저씨의 차례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도리머리를 젓는 재간을 피울뿐... 이때 한 열둬살쯤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책가방을 메고 우리 옆을 지나가기에 녀인은 그 애한테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어린애는 잠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더니 제꺽 해결해냈다. 실로 신생사물에 접수가 빠른 지금의 아이들이라 탄복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 가끔 어른들보다도 아는것이 더 많은 지금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건가? 우리 교원들의 어깨를 무겁게 해주는 이런 물음이 나오지 않을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요즘들어 이런 물음에 조목조목 시원한 해답을 주기라도 하듯이 퍼그나 신선하고 깜찍한 글이 흑룡강신문 교육면에 련속 어어져 독자들의 눈길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그 글이 바로 할빈 조선족 제1중학교 현태석교원이 한창 펴내고 있는 계렬 교육수필이다.   우선 이 계렬수필은 무릇 교육을 론하는 글이라하면 장황하게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일부 그릇된 문풍부터 우습게 풍자하는듯 매편마다 길어서 1500자를 초과하지 않는 아주 짧게 만든 글들이다. 변하는 세월과 더불어 일상이 바쁜 우리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줄 아는 그 자세부터 반갑고 예쁘다. 그렇게 짧은 글이지만 글마다 통통 영근 낟알처럼 무게있고 생동하고 또 읽고난 뒤에는 긴 여운을 남겨주어 두툼하고 길게 늘어놓은 글들이 왔다가 울고갈 일이다.   두번째는 현재 우리 교육에서 존재하는 문제들을 작자의 눈길이 미치는데까지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는 그점이다. 이를테면 "일기쓰기 단상"에서는 일기를 숙제화하는 경향, 맹목적인 경향 등 문제들을 짚어낸후 비밀일기책과 숙제일기책을 나누어야 한다는것, 거창하게 가르칠것이 아니라 순차적이고 계통적으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가르쳐야한다는것 등 일련의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키워새가 주는 계시"에서도 그러했다. 글에서는 우리애들이 "날지 못하는" 키워새로 변하고 있는 문제점을 아프게 느끼고 있을뿐만 아니라 집중화 전략, 좌절교육과 정면교육을 통해 애들을 평형감있게 성장시키는 전략 등 일련의 실속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흔히 문제와 부족점은 누구의 눈에나 다 보일수있다. 관건은 그런 문제들을 풀어나갈수있는 방향 또는 길까지 제시해줄때야만이 비로서 깊은 고민이고 좋은 생각이라고 할수있는것이다.   세번째는 빨리 변하고있는 세상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그 변화를 터득하려고 애쓰면서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하고있다는것이다. 이를테면 죽은 글이 아니라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공부와 배움의 차이", 우리 아이들이 몸부림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분출구를 마련해주자고 호소하는 "분출구를 열어주자"등등 수필이 모두 그렇게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는 교육수필들이다.   언젠가 한 중학교교원이 "학생들을 바르게 키우자"는 교육론문을 들고 수개의견을 청취하려고 필자를 찾아온적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착하게 키우고, 개성있게 키우고 지어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줄 아는 능력을 키워주자는 등등 가지가지 좋은 생각들을 한광주리나 내놓았는데 그것은 모두가 근근히 희망사항일뿐 그 벅찬 꿈에까지 다달을수있는 길들은 전혀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속이 익지 않은 수박처럼 빈 글이여서 그저 요란한 구호처럼 느껴질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꿈에 이르는 그 길들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길은 바로 실천중에서 얼마던지 성사가 가능한 하나 또 하나 구체적인 일들이 모여져서 이루어지는것이다. 마치도 여기 계렬교육수필에서 나오는것처럼 "애들이 일기쓰기 지도를 할때 숙제화하지 말고 비밀일기책과 숙제일기책을 갈라놓아야" 하듯이, 마치도 "분출구를 열어주어 애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공부와 배움의 차이를 알려주듯이"... 그런데 이러한 구체적인 일들은 언제나 반듯한 자세로 고민을 거듭 할때만이 눈앞에 보이게 되는것이다.   지난세기90년대에 "분필례찬"이란 교원수기 여러편으로 책을 펴내여 우리 민족교육의 1선에서 반짝이는 새별로 알려졌던 현태석교원, 이제 뒤에는 또 어떤 글들이 이어질런지 무척 기대된다.
32    론평:얼어붙은 3.8선에 봄소식 반갑다 댓글:  조회:644  추천:0  2018-04-27
  조선반도의 한 허리를 뭉청 잘라 두 토막을 낸 곳, 그래서 동족을 남과 북, 두나라로 갈라놓은 3.8군사분계선이라 하면 서슬이 찬 철조망을 가로 놓고 서로 총대와 대포를 마주 겨누고 있는 한낱 삼엄한 지대이다. 하여 그곳은 해해년년, 사시장철 춥고 차거운 '겨울바람'만 부는 줄로만 알아왔다. 그런데 올해는 아니다. 년초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을 한옆으로 밀어제치며 훈훈한 봄바람을 몰고왔던 것이다. 몇달째 쉬임없이 이어오는 그 따스한 바람은 차츰 뜨거운 열풍으로 번저져 조선반도 전체를 뜨겁게 달구더니 드디어 오늘, 그 옛날 정전협정이 있었던 바로 그 판문점에서(남측 평화의 집) 세계가 주목하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북에서는 또 조만간에 미국과도 정상회담을 가진다고 한다. 실로 꼬리를 물고 날아오는 반가운 소식이다.   오래전부터 뒤틀려진 남북관계를 안타깝게 보아온 필자는 비둘기가 자유롭게 창공을 날듯 저곳에도 평화로운 하늘이 보였으라면... 원쑤가 되어 매일같이 서로 눈에 쌍불만 켜지 말고 한핏줄인 원래 형제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리를 쭉쭉 펴고 발편잠을 자는 그런 날이 있었으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슴쓰린 실망의 반복으로 늘 도리머리만 젓게 했다. 물론 그사이 두번인가 두 나라 정상이 만나는 모습도 보이길래 "혹시 이번에는?..."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그 빛은 잠깐, 잠깐 그 당시만 비쳤을 뿐,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마냥 희망보다 더큰 실망덩이만 따르군 했었다. 그런 모순이 쌓이고 커져 나중에는 분노가 정점으로 치달으며 네죽고 내죽는 전쟁소리까지도 귀아프게 들려왔다... 그때마다 어른들께서 "제발 주먹을 휘두르지 말고 말로 하거라!", "네말만 옳다말고 상대측의 말도 귀담아 들어보거라!"하시던 말씀이 귀전에서 맴돌았다. 그 말씀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엄청 큰 정당이나 국가들 사이에도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사리 깊은 명담이 아닐가?! 그것도 동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경우임에랴!... 필자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날줄 몰랐다...    하던것이 올해는 달라졌다. 남측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이 계기가 되여 3,8선이 가로놓인 조선반도에는 평화의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남북팀이 하나되여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입장을 하는 다정한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어떤 경기종목에서는 두 선수단이 단일팀을 뭇기도 했었고 북측에서 고위급 대표단에 이어 방대한 규모의 응원단, 공연단을 보내자 그 보답으로 올림픽이 끝나기 바쁘게 남측에서도 꼭 같은 대표단들을 보내여 북측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뒤를 이어 분단 70년만에 남북정상을 잇는 직통전화가 놓이는가 하면 남북간, 북미간 정상회담준비 등으로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녘 땅, 북녘 땅 할것없이 전 반도가 흥분으로 들끓는 기꺼운 뉴스들을 만들어냈다.    반가운 소식은 그뿐만 아니였다. 솔직히 말해서 한때 필자는 엄한 제재를 받고 있는 북측을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쥘때도 많았다. 그런데 지난 3월말, 북측의 김정은국무위원장이 첫 외국방문차로 중국을 찾았다. 그래서 습근평주석을 비롯한 우리 당과국가 지도자들의 환대를 받으며 다시 한번 친선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4월20일, 북에서는 또 이튿날부터 핵실험 중단,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선언과 동시에 모든 힘을 다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제고시킬것이라고 선포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뻐꾹새가 울듯 이제 금방 새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소식들이니 아직도 뜨거운 여름을 겪으며 주렁진 열매를 수확하는 풍요로운 가을을 맞으려면 남북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먼 것 같다. 그리고 입으로 하는 말들이 속속 실천으로 옮겨져 과연 이 봄에 좋은 씨앗을 옥답에 뿌릴 수 있을런지? 또 봄이 지난 여름에는 뜻하지 않던 장마나 홍수가 덮쳐 익어가는 곡식을 해치지는 않을런지? 아직은 모든것이 그림의 떡 처럼 보여지고 확실성을 기대하기는 너무나 거리 먼 미지수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다 못해 당금 엉망으로 갈라터질것만 같던 3.8선에 온 세상이 귀 기울려 듣고 있듯이 따사로운 평화의 봄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박수갈채를 보낼 일이다. 그러니 더는 뒤걸음질 치지 말고 또 그자리에 멈춰서 있지도 말고 그냥 오늘처럼 손에 손을 잡고 실속있게 한가지 또 한가지 일을 성사시키며 더 크고 알찬 꿈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갑다. 철조망을 녹여주는 3.8선의 훈훈한 봄바람이여!   /흑룡강신문 론설위원 박일 
31    [500자소설]그때 그 할머니(외 1편) 댓글:  조회:348  추천:0  2017-10-09
    딸애가 고중 다닐 때다.   어느 하루, 나는 학부모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주석대엔 할머니 한분이 앉아계셨다. 교장선생은 십여년전 이 학교를 졸업한 할머니의 두 아들이 모두 청화대학을 나왔고 박사가 되였는데 현재 큰 아들은 미국에, 작은 아들은 캐나다에 있다고 소개를 한후 할머니의 경험담을 경청한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 말은 엉뚱했다.   -에그, 자식은 공부는 잘 하지 못해야 좋수다!   -제가 제일 후회하는게 뭔지 아세요? 두 자식 공부 너무 시킨겁니다.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입니다. 못난 나무 산을 지킨다고 공부를 수수하게 하는 자식들을 보면 거의가 부모곁에 있더군요.   -저런 허튼 소릴 들으라고 우리를 불렀나?   그날 나와 여러 학부모들은 교장선생을 찾아가 항의했다.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내 딸도 명문대를 나와 독일류학을 갔었고 후에는 그곳에 남아 독일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멀리 있으니 친 딸이 아니라 그저 반가운 '해외동포' 같았다. 이젠 외손주도 열살이나 되는데 그사이 딸네가 한번 놀러왔고 우리 부부가 한번 놀러가니 그만이였다.   언제부턴가 그때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고험     대학을 나온 딸애가 택시 모는 총각하고 사귄다기에 나는 그 녀석을 한번 만나보려고 마음먹었다.   어느 겨울 밤, 나는 술에 취한척 하고 그 녀석의 택시에 올랐다.   얼마쯤 가다가 오줌이 나오니 차를 세우라고 했다. 또 얼마쯤 가다가는 배설물이 올라오니 차를 멈추라고 했다.   녀석은 좋다궂다 말이 없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입으로 왝왝 거리는척 하다가 눈판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녀석이 차를 몰고 도망을 쳤던것이다...   -그런 못쓸 놈하고 더는 사귀지 마!   내가 딸애한테 호통을 쳤다.   -듣고보니 아버지가 잘못하셨네요.   딸애가 머리를 저었다.   -아무리 어째도 이 추운 겨울에 손님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놈 이디있어?!   -아버지가 사람을 낮잡아보니 제가 전화로 도망가라고 시킬수밖에 없지요.   -뭐야?   -전 아버지가 그렇게 시시하게 면접시험을 보리란 걸 벌써 짐작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사진도 보여주었구요.   -고얀 놈들!   딸년은 이 애비보다 한수 우였다. 흑룡강신문
30    연변축구, 관심은 높게 기대는 낮게 댓글:  조회:657  추천:2  2017-06-02
      지난 20일, 연길 홈장에서 펼쳐진 연변부덕팀 대 산동루넝팀 경기에서 두팀은 1:1로 비겼다. 아쉽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1점을 버는 경기였다. 올들어 연변팀은 슈퍼리그에서 상대팀을 이긴 경기는 1게임, 진 경기는 5게임이나 되였다.(4게임 무승부) 그래서 지금까지 치른 10게임의 성적을 보면 연변팀은 점수를 7점밖에 얻 지 못해 16개 팀중 마지막 꼴찌선에 머물러 있다. 안타깝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연변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지난해와는 다른게 문제다. 지난해엔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팬으로 나섰다면 올해는 그런 팬들은 썰물처럼 많이 물러선 상황이고 지난해엔 경기에서 져도 열띤 응원이 이어졌다면 올해는 도처에서 김빠진 소리가 나오고 경기가 졌다 싶으면 아예 등을 돌리고 경기장을 나가거나 보고있던 텔레비전, 스마트폰을 마구 꺼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슴아픈 일이다.   여기에는 이런 두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첫째는 연변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에 실망도 그렇게 커졌다는 것이다.   얼마전, 연변의 전문가들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 팬들 중에는 지난 시즌 연변팀이 거둔 9위 성적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난해에 거둔 좋은 성적에 그만 눈이 가리워져 연변팀에 거는 기대치가 엄청 높아졌던 것이다. 그래서 경기가 펼쳐지면 연변팀은 이젠 강팀인 줄로 알고 혹은 강팀은 아니더라도 중간쯤은 가는 팀으로 착각하여 몇몇 손꼽히는 최강팀을 제외한 기타 팀들에는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정말로 지는 현실을 맞으면 실망을 하고 등을 돌리는 배척 심리가 생겨났던 것이다.   기실 지난 시즌 연변팀의 9위 성적은 실제 실력보다 높이 받은 성적이였고 운이 좋았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프로축구 16개 팀의 실력을 상, 중, 하로 나눈다면 연변팀은 하에 속하는 약한 팀이다. 이렇게 약할 수밖에 없는데는 우선 팀의 실력을 키우는 자금 투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다른 팀들은 저마다 자금을 수십억씩 투입하였다는데 연변팀은 고작 2억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강팀들을 보면 세계 스타급 외적공격수들을 다투어 스카우트해 그들이 팀의 득점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연변팀은 돈이 없어 그런 용병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국내선수 영입에서도 다른 팀에서 "자리가 없거나 출전 기회를 못 갖는" 선수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연변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최고 강팀들속에 합류할 수 있는 슈퍼리그 "보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약한 팀이 현재 꼴찌에 머물러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분하고 억울해서 실망을 하여 등까지 돌릴 정도란 말인가.   다음은 연변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무뎌지고 사회적 관심이 못해져가는게 문제이다. 그렇게 기대치가 높았던 탓에 "자꾸만 지는 것이 보기 싫은데다" 지난 해를 보내고 올 시즌을 이어오며 시간이 차츰 오래 지나자 연변축구가 처음 프로급에 올랐을때 느꼈던 그러한 신선도와 호기심은 많이 사라졌고 따라서 우리 축구에 대한 참여의식과 응원 열기도 점점 식어져가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눈만 뜨면 손에 들고 보는 위챗만 들여다 보아도 지난해에는 언제 어디서 연변팀 경기가 있다 하면 위챗에서는 열띤 응원이 뜨겁던 것이 지금은 그런 소리가 가물에 콩나듯 간간히 들려온다. 하긴 무슨 일이나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잃음속에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어서 사람들의 가슴, 가슴을 뿌듯하게 하던 그런 긍지감마저 흘러보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모두가 알다 싶이 지난해부터 중국의 프로축구에 당당히 나선 연변축구는 전반 중국 조선족의 축구가 되었으며 우리 조선족의 영광이고 자랑이였다. 그렇게 우리는 연변축구가 있어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것이고 연변팀이란 '우리 편'이 있어 오늘도 볼 것이 있고 기다릴 것이 있고 함께 응원할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연변팀과 한몸이 되어 같이 울고 웃어야 할 일인데 질라면 지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무관심해서야 되겠는가. '있을때 잘해'란 노래가 있듯이 후회에는 약이 없음을 미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이 분석하다 싶이 연변부덕팀의 우세는 감독으로부터 선수들에 이르기까지 똘똘 뭉쳐진 단합과 투혼을 불사르는 정신력에 있다. 그래서 보면 별로 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팀들과도 겨룸에서 이기기 힘들어 할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막강하다고 손꼽는 강호들과도 당당하게 맞서 이기거나 비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제 10라운드 경기만 보아도 전통강호인 산동루넝팀에 먼저 선제 골을 넣고 후에 비겨서 오히려 우리가 아쉬웠던 것이다. 바로 이런 우세로 하여 연변팀을 얕잡아 보고 접어들다가 골탕을 먹은 팀들이 한두팀만이 아니였던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우세를 살리고 새로운 변화를 꾀하며 맞아올 라운드마다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타당한 전술로 싸운다면 승산은 어디까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올시즌 경기는 이제 10게임을 치러 아직도 20게임이나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벌써부터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현재 연변팀과 동점(7점)으로 꼴찌에 있는 팀은 세팀이나 된다. 그리고 기타 후진 팀들과의 점수 차이도 별로 크지 않아 당장 한경기만 이겨도 서너팀은 뒤로 따돌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겨도 내 형제, 져도 내 형제!" 연길 홈장에서 연변부덕팀의 경기가 펼쳐질때마다 축구팬들이 내 든 이 구호가 언제봐도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사회가 연변축구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기에서 이기기만 바라고 만세를 부를 준비만 할 것이 아니라 경기에서 지더라도 심지어는 재수없이 자꾸만 지더라도 자랑스런 우리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신문사 기자의 인터뷰에서 "경기가 지는 것 같으니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조선족) 태반이나 되더라..."고 하던 박태하 감독의 말이 가슴에 걸린다.  흑룡강신문 2017-6-1
29    노예근성- 돈 줄 가로막는 걸림돌 댓글:  조회:561  추천:0  2017-04-04
노예근성- 돈 줄 가로막는 걸림돌 박일        노신은 중국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열근성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남의 눈치나 보며 사는 노예근성이라고 지적하였다. 중국인들의 허물을 비판한 "추악한 중국인"이란 책에서도 노예근성은 "중국사람들의 뿌리깊고 보편화된 생존 방식"이라고 꼬집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해 옛날의 고정된 눈길 그대로 보아서는 안될 것 같다. 적어도 발달한 지역과 낙후한 지역을 꼭 같게 보아서는 안되며 앞서가는 사람과 뒤처진 사람도 각기 분별하여 다르게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날따라 강대해지는 중국이란 이 나라처럼 머리가 해방되고 빠르게 각성하는 중국사람들의 몸에도 퇴폐한 노예근성이 아니라 분발하는 진취심, 과감한 모험정신, 그리고 상대를 이기려는 이글거리는 승부욕이 불타고 있어 중국 땅 곳곳에 신선한 물결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잇따라 거듭 4-5 년 전까지만 하여도 국영기업인 우체국이 아니고는 어디가서 소포를 부칠 수가 없던 것이 어느사이 편리하고 신속한 택배업이 전국 곳곳에 스며들어 현재 중국사람들은 신식 택배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와 더불어 사통일달(四通一达) 즉 신통택배(申通快递), 원통택배(圆通快递), 중통택배(中通快递), 백세회통택배(百世汇通), 그리고 운달택배(韵达快递)라 하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 5개 민영택배회사의 연 매출액은 약 300억위안이 됨으로써 전반 중국 택배시장(국영 우체국 포함) 총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5개 택배회사 사장들은 모두 절강성 항주시 통로현 종산향이란 한 고장의 사람들이란 것이다. 흔히 보면 한 지방에서 큰 기업인 한사람이 나타났다 하면 당지 사람들은 그 혜택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 밑에 들어가 일을 하려 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였는데 위에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너도 나 같은 시골사람이였는데 네가 하는데 나라고 못할가?"하는 승벽심과 도전정신으로 한사람이 택배회사를 꾸리자 너도나도 다투며 같은 택배업을 시작했고 또 서로 뒤질세라 분발하고 경쟁을 하다보니 오늘은 한 향에서 생겨난 다섯 회사 모두가 온 나라 국민이 다 잘아는 거물급 회사로 커졌던 것이다. 이처럼 하루가 새롭게 노예근성을 짓밟고 일어서는 시대 정신은 연해도시를 비롯해 발전한 지역일수록 사회적인 주류의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발전한 지역은 더 빨리 발전하고 돈 많은 사람이 돈을 더 잘 버는 국면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중국에서 돈 잘 번다고 소문난 "온주상회"(전국 각지에 있는 온주사람들의 기업단체)들이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이 직업을 선택하거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때 "용꼬리가 되느냐?" 아니면 "닭머리가 되느냐?" 하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데 어찌보면 이것이야 말로 앞으로 양자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을 판이한 선택인 것 같다. 용꼬리를 선호하는 사람은 좋은 회사를 만나 그 회사의 등에 기대려 하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누리는데 만족하여 남에게 허리를 굽히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쯤은 달갑게 받으려 하는 것이고 닭머리가 되려는 사람은 외계의 도움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믿으려 하기에 모험이나 난관 앞에서도 가슴을 내밀고 "하면 될 것이다"는 긍정적인 사유로 늘 부푼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현재 칭다오, 선전을 비롯한 중국의 연해도시들에는 저마다 번듯한 회사에 많은 부를 창조한 조선족기업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그중의 대부분 사장들은 처음엔 한국 또는 일본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차츰 시야를 넓히고 시장을 익히며 일정한 기초를 닦은 다음 떳떳이 "닭머리"가 되여 절로 자기회사를 차린 사람들이였다.     사람은 높은 곳에 설수록 더 멀리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큰 회사라 해도 만약 말단직원이라고 할 때 그사람은 회사의 밑바닥에 서 있는 것이고 아무리 작은 회사라고 해도 1인자라고 할 때 그사람은 회사의 제일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단직원은 시키는 일을 잘하여 윗사람한테서 칭찬을 받고 장려금을 더 많이 타는 것이 목표라면 1인자는 매일같이 회사가 나갈길을 모색하며 실패하면 성공을, 성공하면 더 큰 성공을 바라보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한사람은 어떤 회사의 직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크든 작든 자기회사를 차린 사장이라고 할 때 처음엔 경력이나 문화수준이 비슷하다 할지라도 시작부터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차츰 독립사고능력, 판단분석능력, 임기응변능력, 교제능력, 경영관리능력, 등등 다방면에서 큰 차이가 생기게 된다. 앞사람은 키가 더 자라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뒷사람은 키가 성큼성큼 자라고 또 자랄 수가 있고 심지어는 거인으로 커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학교 영어교원이였던 마윈(马云)이 만약 아내와 같이 둘이서 "아리바바"회사를 창립하지 않았더라면 세계급 거목으로 자란 오늘의 마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였겠는가. 그러니 남의 밑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건 현실이 아닌 꿈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사람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체력노동을 해서 일당, 또는 월급을 받는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노무일꾼들 가운데는 젊은이들도 많고 중소학교 교사, 향촌간부경력자를 비롯해 일정한 문화수준 또는 기타 이런저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몰밀어 남의 밑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중국에 있을 때보다 근근히 월급을 얼마 더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이중에서 나이가 한창이고 자기 능력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런 현실에 수긍하거나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알맞는 기술, 경영관리, 또는 기회를 손에 쥘 줄 아는 이런저런 능력을 배워 자영업을 하거나 자기가 회사 사장이 되는 꿈을 키워야 할 것이다.     원래부터 돈이란 물건 옆에서 멀쩡히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팔을 걷고 뛰어드는 사람을 따르게 되어있다.         흑룡강신문 2017.3.31
28    '아리랑꽃'은 왜 이렇게 고울가 댓글:  조회:778  추천:2  2016-08-26
     (흑룡강신문=하얼빈)'아리랑꽃'을 그 이상 더 없는 정상에서 피게 하려고 요즘 모바일 조선족사회가 펄펄 끓고 있다. 올해 연변프로축구 응'아리랑꽃'은 제5회 전국 소수민족 문예공연에 내놓은 연변조선족의 무용극이다.(길림성을 대표) 장고춤, 부채춤, 가면춤 등 조선족의 무용원소를 충분히 동원하면서 한 무용수가 사랑하는 련인을 전쟁터에 보내며 생사고락을 겪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굴함없이 꿋꿋이 살아가는 민족의 절개, 조선족예술인들이 민족문화예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투신하는 헌신적 정신과 절절한 정감을 그리고 있었다. 하여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중국 조선족의 예술은 중화대지에 피여나는 한떨기 아름다운 민족의 꽃임을 잘 보여주는 무용극이였다. 그래서 '아리랑꽃'은 조선족의 꽃이요 한폭의 아름다운 조선족의 '민속도'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으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민족의 독창적인 예술과 정서가 잘 어울린 작품이였던만큼 '아리랑꽃'은 관람자들의 강렬한 공명을 자아냈고 타민족들로 하여금 우수한 조선민족의 문화 예술과 인정풍토를 더 깊이 료해하게 했으며 아울러 조선민족의 형상을 널리 홍보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던것이다.원에 이어 또 한차례 중국 조선족의 뭉친 힘을 보여주는 반가운 모습이다.    현재 1등을 달리고 있는 '아리랑꽃'에 투표중.   뒤이어 관계부문에서는 각 성(시)에서 추천한 제5회 전국 소수민족 문예공연 종목을 온라인투표를 통해 순위를 결정하는 활동을 벌렸다. 그속에 '아리랑꽃'이 있었고 그래서 전국의 조선족들이 다투어 투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던것이다. 투표 기간은 지난 7월 21일부터 오는 9월 15일까지 도합 56일로 정해졌다.(56개 민족을 뜻하는듯) 이는 마치 장거리달리기 경주와 흡사했다. 그사이 '아리랑꽃'의 투표상황을 살펴보면 첫 시작엔 뒤쳐졌다가 8월 6일 11시에 이르러 1등이란 제일 앞자리에 나서게 되였고 그로부터 보름동안 쭉 행복하게 선두를 달려왔다. 그러다가 뒤를 바싹 추격하던 2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다 8월21일에 이르러서는 아쉽게도 1등 자리를 내주고 두번째 자리로 뒤쳐지게 되였다. 한데 기적은 또 생겼다. 8월 24일 오전 8시경에 이르러 우리의 '아리랑꽃'은 재차 또 1위를 차지하게 되였던것이다. 과연 긴장하고 피 말리는 격전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모바일 세계에서는 조선족 문인들, 기업인들, 학자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일떠나 하루에도 수없이 '아라랑꽃'에 소중한 한표를 찍어라고 목이 터지게 웨치고 있었고 월드조선족 위챗 방주련합회에서는 무릇 조선족 위챗 모임방마다 투표에 최선을 다하자고 호소에 호소를 거듭하고 있다. "앉으나 서나 투표 생각..."매일마다 빠짐없이 모멘트에서 투표 홍보하고 있는 조선족들.   혹자는 고작 문예공연종목을 온라인에서 투표하는 작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고 분주할것까지 있겠냐고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하긴 투표를 통해 이기고 지고가, 또는 1등이냐 몇등이냐가 그렇게 대단하고 중요한 일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중국의 방방곡곡에 헤여져 사는 조선족들이 올해 슈퍼리그에 출전한 연변축구팀의 응원에 힘을 모으듯이 한표 한표 투표를 통해 조선족들이 개개인으로부터 방대한 대오로 단합되여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순 민간의 노력으로 뭉친 힘을 만들어 엄청 큰 일을 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런 투표 과정을 통해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군체의 리익 혹은 영예를 위해 힘내고 노력하는 주인공의식과 책임감을 키워주고 더불어 뿌듯한 긍지감을 갖게 하는 뜻이 있고 보람있는 행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중시하게 되는것이고 그래서 너도 나도 서슴없이 동참하게 되는것이다.    아침부터 '아리랑꽃' 투표로 가득 채운 모멘트.   혹시 어떤 이는 '아리랑꽃'이란 무용극을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투표를 하겠냐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기실은 필자도 아직 그 무용극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리랑꽃'에 대한 자랑스런 소개만 듣고도 우리 민족의 예술가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두르게 되고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러니 '아리랑꽃'은 우리 민족의 '꽃'이고 그 '꽃'이 전국범위의 온라인 투표 경쟁에 나섰다는것만 알게 된다면 관람했건 안했건을 떠나서 자연히 마음부터 쏠리게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치도 멀리에 있는 가족중의 누군가가 어떤 시합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자 제발 내 식구가 잘했으면, 이겼으면 하고 애타게 손을 비비듯이… 또 혹시 어떤 이는 몸담고 하는 일이 바빠 위챗에서 투표 찍는 일을 잊어버렸거나 또는 투표를 찍을줄 몰라 투표를 하지 못하고 있을수도 있는데 이런것 쯤은 너무도 간단한 일들이다. 전자의 경우, 명심하고 눈에 잘 띄우는 곳에 '투표!'라는 두글자를 적어만 놓는다면 잊었다도 생각날것이고 후자의 경우, 위챗에 능숙한 주변의 젊은이들을 찾아가면 투표하는 방법쯤은 쉽게 배워낼수 있을것이다. 문제는 마음먹기에 달린것이고 내일처럼 중시하느냐 않느냐에 있는것이다.   숨가쁜 장거리달리기 경주와도 같은 제5회 전국 소수민족문예공연 온라인 투표 기일은 오는 9월 15일까지다. 아직도 20일이 남았다. 용케도 뒤쳐졌다가 또 다시 가슴을 내밀고 제일 앞에서 달리는 우리의 '꽃', 기특하고 예쁘기 그지없으면서도 끝까지 힘이 될가 저으기 걱정되는 '아리랑꽃'이 우리 민족의 힘찬 성원을 기다리고 있다!   흑룡강신문   2016-8-26  
27    위챗의 파워 실감케 하는 창의적 이벤트 댓글:  조회:612  추천:1  2016-08-13
      흔히 이벤트라 하면 긴장감과 승부욕 그리고 재미로 엮어지는 어떤 경기의 종목이나 시합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이벤트는 그러한 보통 상식을 뛰어 넘어 뭇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고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 모바일 시대에 사는 "오늘"이란 이 놀랍고도 황홀한 현실을 실감하게 하고 너나없이 현대문명의 마력에 깊숙이 빠져들게 하고 있다. 최근 흑룡강신문사에서 조직한 특별 이벤트- 제1회 월드 조선족 대박 위챗방주 추천행사가 바로 그러했다.   위챗 플래폼에서 온라인 추천 투표를 통해 위챗채팅방의 대박 방주를 뽑는 이한 이벤트는 시작부터 모바일 조선족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지난 8월 1일부터 10일까지) 신청한 80여명 방주들 중에서 회원수를 많이 거느린 방주를 우선 입선조건으로 하고 그밖에 위챗방의 조선족비례, 신청 선착순, 공익비중 및 투표응원의 편의성 등 여러 형평성을 고려하여 투표에 참가하는 입선정원을 최종 30명으로 정하였는데 행사 내내 매 입선 방주들에게는 최저 2천명 이상의 추천자들이 투표를 해주었고 1등으로 선발된 대박 방주한테는 매일 6천5백여명이나 되는 응원자들이 열심히 투표를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국내는 물론 한국 일본을 비롯해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이번 이벤트를 "관람"한 조선족방문자 수가 무려 8만여명이나 되였던 것이다. 이한 수치를 알아듣기 쉽게 우리가 늘 보아온 전통적인 종이 신문에 비유한다면 매일 수천명 (곱하기 30)에 달하는 사람들이 신문에 글을 올렸고 더불어 8만여명에 달하는 세계 각국의 조선족독자들이 동시에 그 신문을 들여다 보았다는 말과 흡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는 모바일 시대에 나타나는 위챗의 엄청난 힘과 위력을 사람들로 하여금 절실히 체험하도록 하는 놀라운 사건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그런만큼 금번의 이벤트를 그저 위챗에서 우리글로 벌어지는 간단한 오락이나 유희따위로만 착각한다면 그 속에 숨어있는 풍부한 매력은 미처 보아내지 못하고 아쉽게 흘러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금번의 이벤트 또한 절대 우연히 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에 따라 쉽게 조직된 행사가 아니라 흑룡강신문사의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는 계획있고 준비가 충분한 사업의 일환이였겠다고 필자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I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종이 매체는 엄중한 위기와 생존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선천적으로 몸집이 작고 시장도 작은 조선족 종이 신문은 더구나 그러했다.) 그러므로 급속히 변화되는 시대를 빨리 읽고 그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야 말로 바람직한 자세였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60년 력사를 자랑하는 "흑룡강신문"(종이 신문)을 알차게 잘 꾸리는 한편 "인터넷 흑룡강신문"에 이어 2009년에는 CCTV한국어방송을 공식 개통했고 근년에는 또 스마트폰의 보급과 위챗의 파워를 감안해 모바일전자판 신문을 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발빠른 행보는 멈출줄 모르고 계속되어 "월드 조선족","좋은 글방" "흑룡강신문 사랑방" "흑룡강신문 문학살롱"하면서 저마끔 회원수가 수백명씩 되는 자체의 위챗채팅방을 여러개 보유하고 있는가 하면 회원수가 많은 한국, 일본 등 국내외 조선족 위챗 채팅방들과도 긴밀한 뉴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본사 산하의 청도지사에서 "신문을 사랑하는 모임"(략칭: 신사모)라는 이름으로 위챗채팅방을 동시에 3개를 건립하자(회원수 1400여명) 신문사의 1인자(한광천 사장)는 직접 청도로 찾아가 가족식구들을 대하듯이 회원들을 뜨겁게 만나주고 축하를 해주는 등 앞서가는 모습을 쭉 보여왔다. 이런 와중에 이번엔 위챗 플래폼을 통해 "대박 방주"를 찾는, 재미속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특별 이벤트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위챗(워이신)은 중국최대인터넷 기업인 텐센트가 서비스하는 모바일 메신저인데 지난해에 이르러 그 사용자 수는 무려 10억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상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조선족은 전부가 위챗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국경을 뛰어넘는 광활하면서도 방대한 시장이고 동시에 간편하면서도 번개처럼 속도빠른 통신망인 것이다. 전통매체는 정보전달에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런 한계를 오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뉴미디어중의 하나의 플래폼인 위챗이 손쉽게 해결해주고 있다. 그래서 위챗이란 이 온라인 공간에서 조선족끼리의 끈끈한 뉴대관계와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민족 사회 여러 단체와 모임들의 취지와 행보를 최대한 노출시켜 공감대를 형성하고 보다 긴밀한 상호협력의 장을 마련하려고 선뜻이 이러한 창의적인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 바로 본사의 깊은 속셈이 아니였겠는가.   세상에 처음 사과를 먹어본 사람이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사과를 먹게 되고 또 그 맛을 알게 되듯이 무릇 새로운 일이나 현상이 나타날때 앞서가는 창의적인 실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어 신선한 느낌과 깨달음을 얻게 함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보는 또 다른 눈이 생기게 한다. 얼핏 보면 간단한 "오락이나 유희"같은 금번의 이벤트는 뉴미디어시대 우리 언론매체의 향후 발전, 나아가서는 조선민족끼리의 소통과 단합에 엄청 큰 영향을 미칠 그런 멋진 스타트, 또는 파장 큰 메아리 같은 울림으로 들릴수도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였을가고 생각해 보게 된다. 흑룡강신문 2016-8-11  
26    연변축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댓글:  조회:933  추천:3  2016-04-10
  (흑룡강신문=하얼빈) 요즘은 어디를 가나 연변프로축구가 가장 큰 이슈다. 그에 따라 몇점의 불꽃으로 알려지던 응원바람도 어느사이 거센 열풍으로 번져지며 연변조선족자치주뿐만 아니라 전반 조선족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매번 연변부덕팀의 경기가 펼쳐질때면 우리의 언론매체들에서는 시간과 지면을 아끼지 않고 다투어 실시간 생방송에 대서특필하는가 하면 제3라운드인 연변 홈장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1, 2라운드 원정경기만 보아도 수천명에 달하는 팬들이 현장을 찾아 열띤 응원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항이시엔 연변축구팬클럽까지 설립되었는데 그 회원수가 1200명이 넘었고 베이징, 톈진, 광저우, 청두하며 이제 펼쳐갈 연변팀의 원정경기를 대비해 벌써부터 당지 조선족들은 현장응원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가정에서, 친구들의 모임, 그리고 회사에서 또 멀리있는 사람들은 전화로, 메일로, 위챗으로 온통 연변축구로 요란스럽다. TV에서 축구라고 하면 채널부터 바꾸던 아내가 연변팀 경기가 펼쳐지자 텔레비젼 앞에 두 주먹을 움켜쥐고 응원을 해대는데 소리를 얼마나 요란하게 지르는지 부부가 싸우는 줄 알고 옆집에서 놀라서 문을 두드리더라는 이야기, 제2라운드에서 연변부덕이 1:2로 강소소녕에 패하자 상대방 선수들의 몸값은 우리 선수들의 25배나 된다면서 "이 경기가 어디 진 경기냐?"며 연변팀을 두둔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웠다는 친구들, 제3라운드 홈장 경기에서 연변팀이 1:0으로 베이징국안을 꺾자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모태주, 위스키 하며 숨겨두었던 좋은 술 십여 병을 몽땅 꺼내 병마다 마개를 열어놓았다는 사람...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한두사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근간에는 위챗이 유행인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연변팀을 위해 원정응원을 떠나자고 친구들을 동원하는 소리, 십시일반으로 응원자금을 모았으면 좋겠다는 제의, 심지어는 기분이 새롭게 각자 저마다 텔레비젼을 보더라도 통일로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보자는 재미나는 아이디어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응원열풍은 2002년 한일 월드컵때 세계를 놀라게했던 한국의 붉은악마들을 연상시킬정도다. 그러면서도 한술 더 떠 요즘 우리 민족사회를 달구는 응원열풍은 당시 '붉은 악마'보다도 더 재미나고 그 형식과 내용도 더 풍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당시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거리응원을 한 것이 특징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현장은 물론 각자가 주택에서, 회사에서, 또 약속한 장소에 모여서 그리고 한국 서울을 포함하여 조선족들이 사는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다양하게 펼쳐지는 색다르고 다른 진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찌하여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걸까? 우선 축구란 이 스포츠의 매력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축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임이 틀리없다. 힘, 속도, 리듬, 영감, 격정이 주는 미적향수, 골을 넣으려고 골을 먹지 않으려고 서로가 결사적으로 싸우는 치열한 박투, 또 팀마다 여러 선수가 함께 뛰는 단체경기라 집단의 영예를 중시하는 등 축구 자체의 정신이 있는가 하면 볼이 둥근 것처럼 예측이 어렵고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주는 경기이기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재미나고 긴장하여 경악을 금치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기가 종료된 후에도 즐겁거나 아쉽거나 슬픈 여운을 남기며 오래도록 흥분을 삭이지 못하게 하는 스포츠인 것이다. 한데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여러가지 구기운동 중에서도 축구를 특별히 좋아하였다. 그래서 마을운동회나 어디에서나 민족운동대회가 열리면 축구경기가 가장 인기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반가움에서 일 것이다. 지난 세기말이었던 1999년, 연변오동팀(한국 최은택감독)이 중국FA컵에서 4강 진출에 성공하여 당시 우리 민족사회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적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내리막 길을 걸어 장장 18년이나 물밑에서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것이다.(그 사이 가수들을 포함해 국내외에서 히트친 유명인물들이 더러 나왔지만 그 영향력이 축구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중국프로축구 2부리그인 갑급리그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연변팀이 승승장구하며 우승컵을 안게 되어 올부터는 국내 최고의 강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슈퍼리그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민족으로서는 참고 참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즐거움이고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연변축구와 우리 조선족단체 사이에 상호 마음이 끌리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변부덕팀에는 우리 조선족선수들이 많이 들어있고 중국 조선민족의 수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대표하는 팀이어서 "우리의 축구팀"이고 "우리 편"이라는 친절감이 있는데다 그외에도 연변축구의 운명은 어찌보면 중국 조선족의 운명을 닮은데가 많아 심리적으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일면도 보여진다. 이를테면 중국의 조선족은 13억이 넘는 대국에서 2백만도 안되는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고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자치구가 있는 민족들보다는 몸뚱이가 많이 작아서 목소리도 가늘고 힘도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편"인 연변축구가 바로 그런 모습이다. 비록 올해부턴 슈퍼리그에 출전했지만 슈퍼리그를 처음 경험하는 선수들이 많았고 거물급스타도 없는가 하면 화려한 개인기도 없었다. 그래서 팀의 실력이 이젠 여러해째 슈퍼리그에서 몸을 키워온 강팀들에 비해 약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유사한 점들이 쉽게 가슴에 와닿아 서서히 피와 살속에 용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변팀은 강팀들에게 밀리지 않고 경기마다 강한 자신감과 불사적 투혼으로 잘들 싸우고 있다.(4월2일 연변부덕대 북경국안 경기를 보면 시작부터 경기 종말까지 시종 우세를 보여줬다.) 이것이 더욱 눈물이 나게 고맙고 가슴이 찡한 감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폭발적인 인기가 터지는 것이고 그래서 뜨거운 사랑이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변축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것 또한 요즘들어 생각이 깊어지는 즐거운 고민거리다. 연변축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넘어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축구가 되었다. 이런 "우리"의 축구가 자랑스럽게도 중국축구의 1부리그인 슈퍼리그에 출전했고 오늘은 백두호랑이 같은 당당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러니 연변축구는 중국 대지에 크게 자랑하고 싶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우리 민족의 떳떳한 명함장인 것이다.    전반 조선족사회가 요즘처럼 자연스레 마음이 한곳으로 흐르고 자각적으로 똘똘 뭉쳐지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든 일이다. 바로 연변축구가 프로급으로 우뚝 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변축구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북돋우어 주고 응집력을 키워주는 소중한 매개체인 것이다.    사람마다 요즘은 연변축구가 있어 너무 즐겁고 너무 행복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경기가 펼쳐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고 경기가 시작되면 손에 땀을 쥐고 제발 이기기만을 기도하게 되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기뻐서 흥분을 삭이지 못하거나 슬퍼서 가슴을 치며 펑펑 울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연변축구는 우리에게 친인 같고 연인 같은 반가운 손님이고 들을수록 흥겨운 구성진 노래이고 흥분과 낭만으로 몸도 마음도 한껏 취하게 하는 독한 술인 것이다.    이밖에도 이런 저런 이름을 더 지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오늘 연변축구가 우리 조선족사회에 몰고오는 파장은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민족의 자부심과 응집력을 키워주는 등 연변축구는 우리 민족사회에 아주 유익한 일을 하고 있고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변축구가 있어 우리 민족이 살고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자발적으로 동시에 응원을 펼치는 '중국 조선족식' 새로운 스포츠문화도 만들어가고 있다.    참으로 보기 좋아도 너무 좋다. 이런 모습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려면 연변축구가 오래도록 슈퍼리그를 지키고 있어야 할텐데... 2016-4-8
25    너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댓글:  조회:1458  추천:2  2016-01-18
       희망으로 벅찬 새해를 맞은 요즘, 주위를 살펴보면 너나없이 타지에 있는 친지들과의 전화통화가 부쩍 잦아지고 있다. 올 한 해도 부디 건강하라고,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라고 그리고 소망을 이루라고... 서로 상대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푸근한 덕담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정과 사랑이 넘치고 성의와 배려가 그득 담긴 덕담은 이제 다가오는 병신년 설까지 우리 겨레의 가정들에 쭉 이어질 것이다.   어제 필자는 뜻밖에도 수십년간 소식을 모르고 지내던 옛 고향친구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고향마을에서 줄곧 농사일을 하다가 한국문이 열리자 한국나들이도 여러번, 그러다가 이젠 몇년째 자식따라 강소성 소주시에서 산다는 친구는 필자가 신문사에 근무한다는 귀동냥으로 신문사에 수소문을 하며 요행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실로 옛정이 묻어나는 그리운 목소리였다. 우리는 오래도록 모르고 지냈던 상대의 신상을 서로 묻고 알려주느라 통화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친구야, 우리 어디서 살던...잘 살자!" 그 친구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디서 살던..." 필자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마친 후에도 그가 했던 이 말을 여러번 새김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이 말은 필자와 친구처럼 몇몇 개별적인 사람들 사이에만 통하는 말이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인 우리 조선족의 가가호호에도 널리 통하는 말이고 또 전반 우리 조선족의 군체에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 조선족 가정들을 보면 손발에 흙만 묻히는 농부만이 아닌 또 다른 멋스럽고 색다른 직업을 찾으려고(시골의 경우), 같은 값이면 농사에서 나오는 수입이나 다달이 받는 노임보다는 더 많은 소득을 챙기려고 식구들 중의 주요노력은 집을 떠나 연해도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로, 문이 열린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 마치도 밀려가는 파도마냥 줄기차게 흘러나갔다. 2000년대 초, 흑룡강성 조선족 초,중학교 학생들에 대한 조사통계표를 다시 들여다 보니 부모가 곁에 없는 편부모가정 학생이 도시학교는 50%, 현이나 향촌학교 경우는 80%안팎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아빠 엄마는 한국에, 누나는 청도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향마을에 그리고 나는 아무 조선족중학교의 기숙사에... 이런식으로 한가족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정이 한두 가정이 아니라 조선족가정의 반수를 훌쩍 넘겼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들은 좋게 말하면 "모던 가정"이요, 슬프게 말하면 "이산 가정"이란 말도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돌게 되었다.   우리 조선족의 군체상을 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2백만을 헤아리는 조선족의 다수 인구가 동북3성의(내몽골 일부지역까지) 너른 향촌에 집중되어 살던 것이 현재 이런 향촌들에는 4분의 1, 혹은 5분의 1 안팎의 인구만 남아있고(그것도 연세 많은 노인들이 대부분) 약 60만을 웃도는 인구는 한국에, 그밖에는 거의 다수가 중국의 여러 도시들로 흩어져 나가 사는 실태다.   무릇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변화된 조선족의 생존 형태와 인구분포 구조를 두고 잘된 일이냐 잘못된 일이냐를 운운하기 보다는 현실을 정시하고 이런 곳, 저런 곳에서 서로 다르게 사는 구체적인 환경에 따라 부동한 눈길로 그들의 삶을 지켜봐야 할 일이고 그런 토대 위에서 신선한 아이디어, 알맞은 제시나 건의, 또는 유익한 방법들을 내놓으면서 전반 우리 민족의 운명을 걱정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던 이런 한가지만은 변함없이 꼭 같을 것이다. 그것인즉 만약 해외에서 산다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에선 근근히 손님이 될 뿐 국적은 여전히 중국이어서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는 중국 공민이라는 것, 만약 중국에서 산다면 주류언어인 중국말과 한자 밖에 우리글도 쓸 줄 알고 우리말도 할 줄 알며 한국 노래, 조선 노래, 중국 노래를 부를 줄 알뿐만 아니라 조선족자치주인 우리 연변의 노래도 곧잘 부른다는 것, 그렇게 우리의 역사가 있고 우리의 문화가 따로 있는 꼭 같은 "조선족"이라는 그것이다. 바로 그래서 한국에 나가 식당일을 하는 조선족여성들이 전에는 하루 종일 그릇이나 닦고 심부름이나 하던 것이 언제부턴가 너도나도 앞다투며 식당의 권위인 주방장 자리를 차지해 앉는다고 하니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 모두가 자기집 일처럼 기뻐서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또 흑룡강신문 주간지에 "10만명 청도 조선족이 새소식 전합니다"하며 그곳에서 똘똘 뭉쳐 즐겁고 신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할때마다 서울에 사는 조선족들도 시골에 사는 고향사람들도 "저곳엔 우리 고모네도 사는데..." "청도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여러집 잘 되는데..."하며 마치도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재미나고 신기해들 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사이 2016년 새해가 왔다. 병신년 설날도 가까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설이 오면 오랜만에 가족을 찾은 식구들은 오손도손 모여앉아, 그리고 멀리있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전화로, 인터넷으로 뜨겁게 덕담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러한 덕담은 그대로 응원이 되어 올 한 해 우리 겨레 모두를 다시 뛰게 할 것이다. 그렇게 응원하는 가족이 있어, 그렇게 반가워하는 겨레가 있어 우리는 또 한 해 살아가는 흥과 낙을 누리게 될 것이고 거친 세파와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제 설이 오면 혹자는 저 멀리 한국 서울에 있는 누나와 동생에게, 혹자는 고향마을에 계시는 할머니와 삼촌에게 그리고 중국의 방방곡곡에 사는 친구들과 옛 동창들에게 반가운 설 인사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너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흑룡강신문 
24    바다의 물고기도 여권이 있는가 댓글:  조회:1238  추천:2  2015-12-17
       (흑룡강신문=하얼빈) 한국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친구가 인천에서 필자를 초대한적 있다. 그는 필자를 끌고 값비싼 횟집으로 갔다.   그런데 메뉴를 번지며 맛좋은 회를 주문하던 그는 주인집 아줌마와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여기야 인천이니 어떤 바다고기도 '중국산'은 아니겠죠?" "그럼요, 아니예요" "그렇겠지, 오케이!" 두분 한국인 사이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필자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보게, 바다에서 헤염쳐다니는 물고기마저 꼭 '한국산' '중국산'을 가려야 하는가? 그래 물고기도 목에다 여권을 걸고 국경선을 넘나드는가?" 그때 필자는 이렇게 쓴말 한마디 했었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인들이 고쳐야 할 잘못된 인식중의 하나가 "중국제품"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다. 한국상품에 비해 중국의 상품들은 흔히 원자재 구입의 편리, 대량적인 생산라인, 그리고 인건비 절감 등으로 동등한 상품도 가격이 싼것이 우세이고 특점이다. 하여 중한수교 이십여년래 중국의 상품들은 거센 파도마냥 대거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복장이나 식품, 야채같은 일상생활소비품은 한국시장을 거의 도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상 싶다. 하다보니 초기에는 질이 차하거나 모조품 같은 불량상품도 눈에 뜨이게 나타나 한국인들의 불만을 야기시킨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물론 지금도 어쩌다 저질이나 불량품이 나타날수도있겠지만 그것은 절대 기준치를 초과하는 범위가 아닐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런 불량품이 마구 범람했다면 정부차원에서부터 벌써 수입을 차단했을 일이 아니겠는가. 차츰 국제시장과 눈높이를 맞춰가고 있는 중국의 기업인들도 현재는 상품의 질이 곧 생명이고 신용이 곧 명줄이란것을 깊이 터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어느 수출회사를 막론하고 검사에서 질이 좋은 상품은 해외로 수출하고 질이 떨어지는 상품은 국내에서 판매하는것이 관례로 되고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도 덮어놓고 '중국산'이라하면 비웃으려 하고 배척하려 하고 또 내리깎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지어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산 복장으로 몸을 감고 중국산 음식으로 배를 불리우면서도 마치 못 입을걸 입고 못먹을 걸 먹은것처럼 부끄럽고 못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린다고들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눈엔 아직도 '중국산'은 저질상품, 모조상품 불합격상품의 대명사처럼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서 이럴가? 필자가 보기에 첫째 원인은 한국의 일부 언론매체들의 거듭되는 오도가 국민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한국언론보도의 폐단중의 하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전면성, 정체성 파악보다는 매체들간의 독점기사 경쟁에만 급급하다 보니 나무로 말하면 나무잎 같은 아주 작은 일들도 "내가 먼저 발견하거나 보았다 하면" 확대경을 들고 더 굉장하게 더 요란하게 떠들지 못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사는 하얼빈에서는 수도물공급 관련시설을 보수하느라 일부지역에서는 통지를 발부한뒤 이삼일간 수도물공급을 끊은적이 있었다.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헤이룽쟝 하얼빈시에서는 수도물이 끊겨 시민들이 쩔쩔"이라고 기사를 냈다. 마치도 하얼빈시민들은 먹을 물이 없어 당장 큰일이라도 나는것처럼…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수십년째 다종다양한 식품들이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있는데 어느날 어쩌다 어느 통졸임에서 머리카락 하나 발견했다고 중국산 통졸임에서는 또 길이가 얼마나 되는 머리카락이 나왔노라고 대서 특필하고 그것이 재빨리 여러 신문들에 게재되는것을 본 기억도 난다. 그래서 중국을 자주 다니고 중국을 잘아는 한국인들은 생각이 많이 변하고 있지만 중국을 몰라서 아직도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는가?" "중국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탈줄 몰라 엘리베이터마다 전문일군 한사람씩 붙어있다며?"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한 인상은 TV나 신문보도에 얽매일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한국언론들에서 '중국산'이라고 꼬집으며 폄하보도만 내보낼수록 한국인들은 '중국산'에 대한 오해가 더 커지게 되는것이다.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는 체면 세우기 좋아하고 자아감각이 좋은 한국인들의 고정된 의식의 발로이고 작간인 것 같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은 무엇이나 국산이 최고여서 다른 나라건 모조리 국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설사 낫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한국의 한 교수는 중국의 교수를 보고 아직도 한국은 중국보다는 월등하게 더 잘산다고 말했다가 중국교수가 "한국의 인구는 다 해야 4천여만인데 중국은 아주 돈많은 부자들만도 4천만이 넘는다"고 말해서 크게 망신당했다는 이야기도 이래서 나온것 같다. 이처럼 "우리 국민들은 날이 갈수록 한국밖에는 관심이 적어서 이웃나라, 특히 중국의 변화에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한국 어느 신문사의 사설중의 한 대목임)   벌써 여러해전부터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무역파트너, 가장 큰 수출시장, 가장 큰 수입래원국, 또 가장 큰 해외투자대상국으로 되고 있다. 한국의 대외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1998년의 7.7%에서 2013년에는(2700억달러) 58.8%로 올랐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중국에 많이 의뢰하고 있고 또 양국은 명실상부한 리익의 공동체로 되고있어서 중한자유무역협정(FTA)까지 정식 효력을 발생하면 세금 감면이란 날개를 단 중국의 상품들은 현재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고 풍부하게 한국인들의 곁으로 다가설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파악은 없이 덮어놓고 '중국산'을 부정하려고 고집만 부리는 한국인들은 자연히 처처에서 피동에 처하게 되고 절로 파놓은 '배척'이란 함정에 빠져 선택의 구속과 제한을 받게됨으로써 좋고, 값싸고, 알맞는 것마저 놓치거나 흘려버리고 마는 불필요한 손실을 빚어내게 된다. 남이 주동이 될때 피동에 처하고 남이 리익을 챙길때 전혀 없어야 할 불필요한 손실까지 본다면 그 쌀독에, 그 돈지갑에 이보다 더 큰 구멍이 또 어데 있을가. 심히 그런 자세가 걱정스럽다.   그래서 언젠가 한국의 기자친구에게 했던 말을 여기서 다시 한번 꺼내고 싶다. 과연, 바다의 물고기도 여권이 있는가?
23    [미니소설] 얼굴 없는 녀인 댓글:  조회:915  추천:1  2014-10-16
[미니소설]   얼굴 없는 녀인      박 일   K현 대학입시현장. 오늘은 조선어문시험을 치는 마지막 날이다. 아침 일곱시가 넘으니 대문밖엔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큰대문에는 어제 그제를 이어 오늘도 누군가 찰떡처럼 대학에 잘 붙으라고 햇솜처럼 흰 찰떡을 세덩이나 더덕더덕 붙여놓았다. 춘님이는 시험장소와 좀 떨어진 곳에 있다. 아름드리 백양나무뒤에 몸을 숨기고 애처로운 눈길로 누군가를 찾고있었다. 아들 동길이다. 이틀째 동길이는 이맘때면 아버지, 계모 그리고 소학교에 다니는 녀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웬 일인지 동길이도 그리고 동길이네 식구들도 전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동길이 왜서 안 올가?…) 시간이 흐를수록 춘님이는 초조해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이때 멀리서 동길이가 나타났다. 동길이는 채양이 긴 모자를 벗어 얼굴의 땀을 닦으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대문쪽으로 들어가고있었다. 백양나무에 등을 기댄채 두손을 꼭 잡고있는 춘님이는 그제야 호―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우리 동길이, 제발 오늘도 덤비지 말고 시험을 잘 치게 해주소서!) 수험생들이 무리 지어 시험장으로 들어가자 춘님이는 념불을 외우듯 두눈을 꼭 감고 합장한 두손을 살살 비벼댄다. 백옥같은 얼굴에 몸매 또한 쭉 빠진데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불러 춘님이는 마을에서 일등처녀로 소문났었다. 그래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소학교에 배치를 받아온 월급쟁이― 지금의 동길이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러던 춘님이는 동길이가 소학교에 금방 입학하던 그해 가을에 한국으로 나갔다. 한국에 가서 그만 남편을 배신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돈을 벌어 남들 못지 않게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나갈 때만 해도 불륜을 저지를 생각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정작 한국에 나가 홀몸으로 세월을 보내려니 밤이면 남편이 사무치게 그리운데다 성문화 또한 눈 띄게 개방된 환경이니 그런 유혹을 도저히 물리칠수 없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물에 밀리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말았다. 처음에는 일하는 음식점 사장하고 눈이 맞았고 두번째는 이를 치료하러 치과의원 출입을 자주하다가 나이 지긋한 치과의사하고도 좋아했으며 나중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한 외토리 남성하고 동거했다. 춘님이가 서울에서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은 종이에 불이 붙듯 고향마을에 쫙 퍼졌다. 그러니 부옇게 배신을 당한 남편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남편은 리혼하자고 전화를 걸어왔다. 춘님이는 창피스러운 나머지 남편과 대화를 나눌 용기조차 없어 휴대폰번호마저 바꿔버렸다. 하는수없이 남편은 현법원에 단독 리혼신청을 했다(춘님의 불출석으로 반년후 두 사람은 자동리혼이 되였음). 불륜녀로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된 춘님이지만 한 아이 어머니로서의 절절한 모성애만은 유별나게 끔찍했다. 춘님이는 서울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자기 배속에서 나온 아들 동길이가 너무 보고싶어 울고 또 울었다. 동길이가 소학교 5학년인가 다닐 때 춘님이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친정오빠에게(춘님의 친정집은 시집마을에서 60리 상거해있었음) 책가방이며 겨울 외투며 그밖에 용돈도 푼푼히 봉투에 넣어보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마을 소학교에서 교장으로 승급한 동길의 아버지가 한사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젠 동길이한테 새어머니에 녀동생까지 생겼는데 왜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이한테 마음의 혼란을 주려고 하느냐며 펄펄 뛰더라는것이다. 그럴수록 춘님이는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듯 하냥 아들 생각뿐이였다. 서울거리에서 동길이만한 사내애들이 옆으로 지나가는것만 봐도 춘님이는 동길이가 떠올라 가던 걸음까지 멈추군 했다. 《우리 동길이를 한번 품에 껴안고 자봤으라면… 내 손으로 동길이한테 따뜻한 밥 한끼 지어 먹여봤으면…》 이런 말이 그녀한텐 입버릇이 되였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마침내 춘님이는 마음먹고 한국에서 아들을 만나보러 왔었다. 그때 동길이는 벌써 초중 2학년이라 현성에 올라와 기숙사생활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동길이를 직접 만나는 순간, 그녀의 달콤한 꿈은 그대로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어느 사이 아버지 키보다도 더 자랐고 코밑에도 수염을 깎은 자리가 시꺼멓게 난 동길이는 춘님이를 마주보는 그 눈길부터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동길아 내가 누군지 알아볼만 하니?》 《?…》 《엄마다! 너의 엄마!》 《누구신지 사람 잘못 찾으신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지금 집에서 녀동생을 돌보고계십니다.》 동길이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등을 홱 돌린다. 그리고는 씨엉씨엉 몇걸음 걷더니 등을 돌리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십시오.》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동길이한테 랭대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나간 춘님이는 손맥이 풀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반시간이고 한시간이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기가 일쑤였고 밤이면 수면제를 한줌씩 먹어도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심한 우울증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백 하고도 열몇근 되던 몸무게가 거퍼 팔십근도 채 되지 않았다. 역시 한국에 나가있는 친정오빠가 이 일을 알고 《가만히 놔뒀다가는 사람 잡겠다》며 무작정 춘님이를 끌고 중국으로 돌아와 친정집 부모들과 함께 있게 했다. 그런데 마음 편한 친정집에 와있으면서 좋다는 보약은 다 써도 춘님이의 몸은 전혀 호전될줄 몰랐다. 《휴― 저의 병은 제가 알아요. 매일 동길이 얼굴만 볼수 있다면 병이 뚝 떨어질것 같아요.》 춘님이가 하는 말에 친정집 식구들은 큰 계발을 받았다. 그래서 동길이가 공부하고있는 현성에 춘님이한테 자그마한 음식점을 차려주었다. 그때부터 춘님이는 거의 매일 한번씩 동길이 몰래 공부하는 학교주위를 돌군 했다. 시간이 흐르자 춘님이는 오전 사이체조시간이면 천여명 학생들중에서도 동길이가 몇번째 줄 몇번째에 선다는것까지 알수 있었고 매주 화요일 오전 제4교시와 목요일 오후 제6교시는 체육시간이여서 동길이가 뽈을 차고 배구를 치는걸 실컷 볼수 있었다. 미상불 겨릅대같이 바싹 말랐던 춘님이의 몸에는 어느새 다시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침내 동길이가 대학시험을 치는 날까지 오게 되였다. 시험장 큰대문에다 햇솜같은 찰떡을 세덩이나 붙여놓은것도 춘님이가 련속 사흘째 이른새벽에 남몰래 나와서 한 일이였다. 그랬다. 이제 동길이가 대학에 붙으면 그 대학이 어느 도시에 있든 춘님이는 바로 그 도시로 쫓아가서 음식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멀리서 사람들이 왁작 떠드는 소리가 났다. 백양나무뒤에 몸을 숨긴 춘님이가 고개를 쳐들고 보니 시험을 다 친 수험생들이 밀물처럼 밖으로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춘님이는 그속에서 동길이를 찾으려고 고개를 점점 높이 쳐들었다. 바로 그때다. 《어머니!》 등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춘님이는 그만 심장이 멎는듯한 충격에 돌부처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글쎄 아들 동길이가 지금 지척에 와 서있었다. 《너… 동… 동길이…》동길이는 후들후들 떨고있는 춘님이의 팔을 두손으로 꼭 잡는다. 《어머니!》 《어허헉… 어허헉…》 춘님이는 소리내여 울었다. 《이 엄만 너를 볼 얼굴이… 얼굴이 없어 허헉… 이 엄마 밉지?…》 눈물범벅이 된 춘님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아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친어머니의 정겨운 눈길이 아들 동길이의 얼굴에 오랜만에 와닿는 순간이였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 배가 고픕니다. 빨리 어머니의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고싶습니다.》 《내가 꾸리는 음식점 너도 알아?》 순간 춘님이의 두눈은 휘둥그래졌다. 《전 정말 어머니가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자습시간만 끝나면 음식점문앞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보군 했습니다.》 《그래?…》 춘님이의 두눈은 당금 튀여나올것 같았다. 《너의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날텐데…》 《아닙니다. 실은 아버지께서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전부터 저더러 어머니를 만나라고 하셨거든요. 그런걸 제가 이제 대학입학시험이 끝나면 만나겠다고 했지요.》 동길이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춘님이는 사랑하는 아들을 두손으로 와락 끌어당겨 자기의 따뜻한 품속에 꼭 껴안았다. 
22    [소설] 반장선거 댓글:  조회:662  추천:4  2014-08-30
소설 반장선거 박일   내가 쓴 글이 신문에 실렸다. “편부모 가정의 자녀교육 중시하자”는 글이다.   나는 아침에 신문을 받자 단숨에 세번 읽었고 오후 공원에 나가 장기를 두고 와서도 또 련거퍼 두번이나 읽었다. 나 절로도 자랑스럽고 큰일을 한것 같았다. 그러노라니 신문사 편집부에 조금은 불만도 생겼다. 내 문장은 교육면의 중간쯤에 박아넣고 톱에는 “귀한자식 매 한대 더 때려야”란 글을 실었다. 그러루한 말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건데 왜 생각이 깊은 내 글을 톱에다 올려놓지 않았냐 하는 그런 불만이였다.   “미애야, 할아버지 쓴 문장 신문에 났다.”   나는 하학하고 집에 오자부터 꿩처럼 머리를 틀어박고 무언가 쓰고있는 손녀에게 신문을 주었다.   “축하해요. 할아버지, 저 좀 있다 볼게요.”   손녀는 신문을 한옆으로 밀어놓는다.   “너는 뭘 쓰고있냐?”   나는 기분이 좀 그랬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자애들처럼 성격이 활달한 손녀는 한창 쓰고있던 종이장을 들어 나한테 보인다.   “내가 만약 반장이 된다면”이란 제목이였다. 보아하니 초중2학년에 다니는 손녀는 반장경선에 나가려고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는중이였다. 그러니 손녀의 립장에서 보면 할아버지가 신문에 낸 글 한편 보다는 반장으로 당선 되냐 못 되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인것 같기도 했다.   “그래 너처럼 반장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은 몇이냐?”   “지금 후보가 넷이래요. 이제 1차 경선에서 두 사람이 떨어지고 입선된 두 사람은 2차 경선을 치러 최후 승부를 가르게 돼요. 그때는 전반 학생들뿐만 아니라 가정마다 학부모대표도 한분씩 학생들과 같이 투표에 참가해요.”   듣고보니 장난이 아니였다. 나는 반장경선에는 단결, 우애, 호상방조, 뭉친 힘, 이런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손녀는 그런 말은 소학생들의 반장선거에서나 나올 말이라며 우습다고 야단이다. 지금 애들은 왜 이렇게 제 잘난척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며칠후였다.   내가 공원에 나가 장기를 두다가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오니 미애가 자기 방에서 혼자 쿨쩍쿨쩍 울고있었다.   “음- 보나마나 1차 선거에서 락선된 모양이구나.”   “아니래요.”   “아니면?...”   “전 1차 선거에서 입선 됐어요.”   “그런데 울긴 왜 우냐?”   “동수가 너무 사람을 헐뜯는게 괘씸해서 그래요.”   동수라는 남자애는 이번 반장선거에서 미애와 최후 승부를 겨루게 될 적수였다. 그런 동수는 1차 경선부터 미애를 넘어뜨리려고 미애의 흉허물을 전 반 학생들 앞에서 까밝아 놓았다. 그것인즉 미애는 득표를 많이 얻기 위해 녀자애 몇을 데리고 음식점에 가서 식사대접을 시켰다는 것, 또 수철이라는 남자애한테는 인심 쓰며 핸드폰도 선물로 주었다는것.   “며칠전에 순애 생일이여서 우리 몇은 음식점놀음도 했고 제가 돈을 낸것도 사실이예요.”   “왜서 그런 일 했지?”   “지난달 저의 생일때 순애가 돈을 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제가 낸거래요.”   “그럼 핸드폰을 선물로 주었다는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 반의 수철이란 남자애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길래 저한테 전에 쓰던 핸드폰이 있는걸 가져다주었는데 그것도 회뢰라고 하니 전 억울해서 못살겠어요.”   듣고 보니 손녀가 덮어쓴 루명이 애매한건 확실했다.    “그 동수란 애는 원래 심보가 그렇게 고약하냐?”   “아니요, 전엔 그런줄 몰랐어요. 공부도 잘하고 마음도 착한줄만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 속다르고 겉다른 애였어요.”   “그럼 그 애 부모는 뭘 하는 사람들이냐?”   “걔 부모는 리혼을 했대요. 아버지는 한국에 나갔는데 별로 련계가 없고... 지금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어머닌 음식점을 차린대요.”   “어허, 부모가 리혼한 편부모 가정 자식이라... 그러면 그렇겠지.”   나는 신문에 낸 내 문장이 떠올라 무릎을 탁 쳤다.   “최후 경선연설문은 이렇게 쓰면 어떠냐?”   “어떻게요?...”   손녀가 귀를 기울인다.   “너는 어려서부터 기형적인 편부모사랑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거기다 할아버지까지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자라고있다는걸 모박아 쓰거라.”   “그런 다음엔요?”   “그렇게 자란 너였기에 차츰 친구들을 사랑하고 베풀줄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되여 핸드폰을 잃어버린 애한테는 자기 핸드폰을 선뜻 줄줄도 알게 되였고 또 친구가 그랬듯이 너도 친구의 생일을 명심하고 성의를 베풀었다고 하거라. 이러면 너의 루명도 벗겨지고 또 은근 슬쩍... ”   “OK!”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미애가 손벽을 친다.   “호호 옛날 소학교 교장선생님이 다르긴 다르네요.”   미애는 좋아서 두 팔로 나의 목을 칭칭 감으며 볼에다 키스까지 한다.   드디여  최후 선거 날이 왔다.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인 내가 아들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녀의 경선에 참가하게 되였다.   시 조선족중학교 초중2학년 1반교실에는 40여명 학생에 40여명 학부모들로 빼곡이 자리를 하고앉았다. 중학교 교장선생님과 교무주임까지 렬석으로 참가한걸 보면 시골마을의 촌장선거 못지 않게 치렬할듯 싶었다.   담임교원이 사회를 했다. 반장 후보인 동수와 미애학생이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전에 제비를 뽑은 결과에 따라 미애학생이 먼저 경선연설을 하게 된다고 했다. 미애는 제일 뒤줄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핼쭉 웃었다. 나도 의미있게 미애한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바로 이럴 때 갑자기 앞에 나와 미애와 나란히 서있던 동수가 손을 들었다.   “경선연설을 시작하기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동수는 이러면서 담임선생을 쳐다본다. 담임선생이 머리를 끄덕인다.   (어린 애가 수작도 많구려.)   나는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여기서 먼저 미애학생에게 잘못을 승인하려고 합니다.”   실내는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저는 조사연구도 없이 누구한테 얼핏 들은것만 가지고 지난번 1차 경선에서 미애를 헐뜯는 발언을 했습니다. 순애의 생일날에 미애가 돈을 낸것은 친구들간에 서로 우정을 나누는 일이였습니다. 그런것도 모르고 어리석은 저는 돈으로 경선표를 사려고 한짓이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곰곰히 살펴보니 미애는 전에부터도 남을 잘 돕는 애였습니다. 그랬기에 수철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소리를 듣자 누구먼저 도움의 손길을 보냈던것입니다. 이런 학생은 비난이 아니라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미애야 죄송하다!”   동수는 옆에 서있는 미애를 바라보며 정중히 사과를 한다.   “이상입니다.”   동수의 발언이 끝났다. 실내는 얼마간 숨소리마저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어느 학생인가 먼저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학생들이 요란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학부모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났다. 편부모가정의 자녀교육은 몰밀어 비뚤게만 봐온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저도 할말이 있습니다.”   이번엔 동수와 나란히 서있던 손녀 미애가 손을 들었다.   “저는 경선연설을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반 반장자리는 동수가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동수야 너 꼭 잘할수 있을거야. 화이팅!”   미애는 남자애들처럼 동수의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경례를 굽석 하더니 자리로 들어간다. 약속이나 한듯 이번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애를 향해 기립 박수를 친다.   순간, 손녀 미애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다 자란 처녀 같아 보였다. 어쩌면 15살난 애가 75살먹은 이 할아버지 보다도 경우가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내 앞줄에 앉은 몇몇 아낙네들이 수군거렸다.   “오늘 신문에 실린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때려야’란 문장 봤지?! 그 문장 저 동수엄마 쓴거래.”   동수어머니 어디 앉았을가? 나의 눈길은 동수어머니라는 그 녀인을 찾아 헤맸다.               료녕신문 2014.8.26
21    [장편] 안개 흐르는 태양도 20 댓글:  조회:748  추천:18  2011-03-01
제 4장  태양도의 풍경 (8) 정자아래에서          강현수와 최윤희는 동창무리를 따를수가 없었다. 강현수가 핸드폰으로 구금자한테 전화를 해보니 동창들은 놀이기차에서 내려 한창 도보로 송화강 언제를 거닐고 있다고 했다. 태양문에서 송화강 언제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다 되여 별무리호텔로 돌아갈 시간도 반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태양문에서 호텔로 가는 동북방향으로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20미터쯤 사이둔 잔디밭 한가운데 버섯모양으로 깜찍하게 지은 정자 하나가 서있었는데 그 정자아래에서 대머리 리수길이 강현수네를 보고 손짓하고 있었다. 대머리 곁에는 머리가 새하얀 김만융교수도 앉아있었다.  “두분은 왜 여기에 계십니까?”  “교수님한테 내 소설에 대한 평론을 좀 해달라고 조용한 곳으로 모시고 온거야.”  “글쎄 나같이 다 늙어 송장냄새가 나는 귀신한테 무슨 들을 말이 있겠다고 자꾸 이렇게 졸라대는지 모르겠네...”  말은 이렇게 하시지만 오늘 하루 종일 어디로 가나 김만융교수의 손에는 그냥 대머리가 쓴 ‘신비한 길’이라는 중편소설집이 쥐여있었다. 어제 밤에도 연회석이 파하고 동창들이 오락을 시작하자 로인은 제자들이 노는 장소를 피해 호텔로 돌아와 늦은 밤까지 돋보기를 끼고 대머리의 소설책을 읽었던것이다.  “그런데 현수, 넌 커플을 찾아도 면바로 찾는구나.”  “커플이라니? 나하고 윤희도 너처럼 어데 가서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줄 알어?”  “그런 말이 아니고 넌 키가 작으니깐 키가 큰 윤희와 같이 다니면 좋겠다는 말이야.”  “키가 작고 크고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윤희와 마주서서 눈길을 앞으로 곧추 보렴. 신통히 윤희의 젖가슴만 보일테니까.”  “이 자식 입에선 전탕 허튼 소리뿐이야.”  강현수는 정자아래에서 요리조리 도망가는 대머리를 쫓아가면서 주먹으로 옆구리를 한매 박는다.  “허허, 그 말을 허튼 소리로만 들을수 없네. 그것이 바로 수길이만 말할수 있는 천재적인 언어감각이란 걸세.”  김만융교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강현수와 대머리는 장난을 멈추고 교수님의 곁에와 좌우로 앉았다. 최윤희도 간격이 멀지 않은 돌걸상에 마주앉아 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다.  “이 수길의 소설집에 담은 여섯편 중편소설중에서 이미 네편을 보았네... 이걸 보고 첫째로 받은 감수는 작가의 언어가 아주 감칠맛 난다는거였네. 수길이는 세간에서 수집한 생활언어도 풍부하거니와 보통사람들이 잘 모르는 우리말 고유어를 많이 알고 있었네. 수길이가 쓴 ‘수양버들’이란 소설에는 돼지고기장사를 하는 한 할머니가 이웃집에서 고기를 사가고는 며칠째 돈을 갚지 않자 이 할머니가 찾아가서 돈을 내라는 한구절 대화묘사가 나오는데  그런 묘사들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게 되네. ‘이 집에서는 우리 돼지고기를 먹은게 아직도 소화가 채 안됐수?’ 이렇게 민간의 생동한 언어로 소설들이 엮어지는가 하면 두툼한 우리말 사전의 어느 한 구석에 숨어있을 순수한 고유어를 참 잘도 끄집어낸다는 거네. 시골에 가면 사람들이 펌프로 물을 자아 올릴 때 먼저 바가지로 물을 펌프에 부어 넣지 않는가? 여기 현수와 윤희는 그렇게 먼저 바가지로 펌프에 부어넣는 물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는가?”  김교수가 강현수와 최윤희를 바라보며 묻자 둘은 설레설레 도리머리를 젓는다.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네. 하긴 이 늙은것도 오늘에야 수길이한테서 하나 배운거네.”  “아니, 교수님도, 짜른 바질 너무 춰올리지 마세요. 기실 우리 언어에서 고수야 교수님이시지요. 교수님은 우리글의 내리 금, 가로금 하는 글자의 형태까지도 깊이 연구하시지 않아요. ‘님’에다 가로 금 하나 넣으면 ‘남’이 되고 그 ‘남’자를 엎어놓고 번져놓으면 ‘놈’이 된다고 이야기 하신적 있지 않아요. 또 ‘백’씨 성에서 작대기 같은 내리 금 하나 빼면 ‘박’씨로 변하고 얼마나 묘해요.”  “그보다도 우리 교수님은 고사성어를 특별히 많이 장악하고 계시거든.”  이번엔 강현수가 부러워서 하는 말이다.  “달걀속에서 병아리가 나올 때 주둥이로 껍질을 톡톡 치면 밖에 있던 에미닭도 새끼가 빨리 나오게 마주 껍질을 쫏는다는 ‘줄탁동기(茁𠸌同機)’, 교수님한테서 배운 이 고사성어를 저는 우리 민족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신문론평을 쓸 때 아주 멋있게 써먹었거든요.”  “으흠, 그 다음 이 늙은이가 또 감탄을 한건 수길이는 불덩이처럼 격정이 넘치는 소설가라는거네. 그런 격정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넘겨주어 독자들의 공명을 일으키게 하는 그 재치가 참으로 대단하네.”  김만융교수는 제자들이 춰주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지 대머리의 소설에 대해서만 계속 말씀을 이어간다.  “그런데 이 늙은이의 눈엔 소설에서 허점이라 할가 좌우간 그런것이 더러 보이는것 같네.”  “예! 제가 듣고 싶은것이 바로 그런 문제점들입니다.”  “수길이는 소설에서 남녀 이성간의 성생활을 너무 지나치게 다루는것 같네. 합법이든 불륜이든 남녀간의 성관계가 많은 편폭을 차지하고 그것으로 독자들을 끌려는건 속되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인간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걸 말하네. 인간의 삶에서 성생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가? 그 비중만큼 다루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보네. 이성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고 할지라도 그럼 그 인간들은 밥은 안 먹고 성만 파먹고 사는건가?”  그 소리에 강현수와 최윤희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대머리는 웃지 않고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교수님의 그 관점은 저는 동의할수 없습니다. 첫째, 공자는 먹는것과 성생활은 동물과 다를바 없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먹는것처럼 중요한 성생활을 소설에서 무엇때문에 적게 취급해야 한다는 겁니까? 둘째, 교수님도 저의 소설을 보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각자가 처한 환경과 취미에 따라 연구하는 분야도 다르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로 력사소설을  쓰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가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데 저는 ‘정’이라는 이 한자로 세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저의 소설은 거의가 애정소설입니다. 그럼 남녀간의 애정에서 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봅니까? 문제는 제가 쓰는 소설은 어른 소설이기에 될수록이면 어린애들은 보지 못하게 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게 어디 될 말이야? 너의 책뚜껑에다 ‘18세미만 열독 불허’ 그렇게 써봐라 젊은애들이 더 보려고 눈을 밝힐걸. 그리고 대머리, 네가 그렇게 고집을 써도 내가 보기에도 너의 소설엔 성묘사가 너무 지나치는것 같애. 야, 성묘사가 아니고도 네놈의 재간으로는 얼마든지 독자들을 끌 다른 재미거리를 많이 만들어낼것 같은데 말이야.”  강현수도 로인의 편을 들어 대머리를 비난한다. 유독 최윤희만은 그렇게 떠들어도 그냥 입을 꼭 다물고 귀로 듣기만 한다.  “수길이가 분명 그렇게 나오리라고 내 짐작을 했네. 이 문제는 두고두고 쟁론거리라고 생각하네.”  로인은 말을 하다 말고 먼산을 쳐다본다.  “교수님 계속 말씀 하십시오!”  “네가 그렇게 반발이 거세면서 뭘 또 말씀하시라고 그러냐?”  “그럼 이번엔 어떤 말씀을 하시던 가만히 있겠습니다.”  “아니네. 그런 반발이 있어야 평론할 멋이 나는거네. 아까 수영장에서 어느 제자든가 ‘기왕 칼을 뽑았으면 하다못해 발톱이라도 깎아야 한다’고 말했지? 이 늙은이도 기왕 말을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겠네... 수길의 소설에서 이성문제보다 더 중요한건 얼굴이네.”  “얼굴?...”  “그래 얼굴! 소설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의 얼굴이 빨갛지 않으면 희고 희지 않으면 검고...여하튼 얼굴이 너무 단일한 한쪽밖에 없다는 말일세. 내가 보기엔 자네 같은 문학가들은 인간의 진면모를 그대로 그려내는 력사학자들을 많이 따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네. 소설책 ‘삼국연의’와 력사책 ‘삼국지’를 좀 대조해 보게나.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류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고 조조는 천하에 나쁜 놈이고 제갈량은 머리가 비상하기로 이 세상사람들의 머리를 다 합쳐도 따를수 없는 천재적인 인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래서 로신선생도 ‘류비는 사람이 너무 좋아 거짓에 접근하고 제갈량은 너무도 총명해서 요귀에 가깝도다’하고 날카롭게 비판한적도 있네. 그러나 력사책 ‘삼국지’나 ‘위서’를 보게나. 특히 조조라는 인물은 교활하기 그지없는 일면도 있지만 그릇이 크고 호기 있고 수재이고 또 충성심과 반역정신이 한데 엉킨 복잡한 인물인것일세. 조조는 언제 어디서나 충성을 다해 황제를 받들었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는 은근히 황제를 뒤엎기를 바라는 심성을 내비치고 있네. 이렇게 한 인간의 얼굴은 절대 한쪽만이 아니라 두쪽, 세쪽 지어는 력사에서 나오는 조조처럼 다섯쪽, 여섯쪽 얼굴이 될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또 이렇게 되여야만이 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주인공 한두사람뿐만 아니라 무릇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인물이라면 될수록이면 그런 눈길을 가지고 써야한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지금 수길의 소설에서의 주인공들은 얼굴이 몇쪽일가?”  대머리는 점점 고개를 떨군다. 강현수도 심중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이 자리에 면바로 이름있는 소설가와 저명한 신문기자가 있는데 내 이번엔 기자 어르신께 한마디 할가?”  “아니, 아니, 기자 올챙이에게 훈시하십시오.”  강현수는 발딱 하고 작은 키를 올리 세웠다 다시 제자리에 궁둥이를 붙이며 달싹 앉는다.  “신문에서 기자 강현수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으로 명인이니 좋은 소리도 많네만 더 꺼내지 않겠네... 오늘 오전에 어느 마을의 촌장인가 하는 사람이 상주를 서라고 야단을 치는 전화가 왔었지?...”  “예!...”  “그럴 때 현수는 땅은 우리 민족의 어마어마한 밑천인데 농민들은 몇푼 아니 되는 자기 땅에만 눈길이 가고 촌간부들은 또 토지는 개방하고 마을은 봉쇄하고 있는다고 비판했었지?...”  “예, 그런데 그게 잘못 됐는가요?”  “아니, 거기까지는 면바로 보고 말을 잘 한거네. 그런데 현수의 눈에 거기까지만 보인다면 문제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걸세. 우리 농민들의 토지가 우리 전반 민족의 밑천이라고 한다면 그런 밑천을 불쌍한 농민들에게만 지켜라 어째라 훈계할 일인가? 전 민족사회가 동원돼야 할 일은 아니구? 왜 자금유치란 말을 도시나 어느 기업에만 련결시키려 드는가? 가장 큰 밑천이라는 우리 토지에는 자금유치란 말을 쓰면 입이 부르트는가?...문제의 절반밖에 못 보는 현수나 여기 수길의 소설에서의 한쪽얼굴문제나 날카롭게 지적한다면 철학의 빈곤이란 말일세.”  “가끔 나도 집에서 신문을 보면 강현수라는 기자는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바람에 일어나는 자녀교양문제, 가정파괴문제 등등 많은 사회문제들을 신문에다 펴내고 있는네 그저 지금 이렇다고 사회문제를 폭로만 하면 그만인가? 그 뒤엔 해결책을 연구하는 글들이 따라 서야지 않느냐 말일세... 어떤 사건이 터지면 ‘좋다!’ 혹은 ‘엉망이다!’고 덮어놓고 감탄부호를 칠 일이 아니라 좋은 뒤에는 어떤 부면 영향은 없을가? 엉망인 뒤에는 어떤 반짝이는 희망의 불씨가 없을가를 철학적으로 사색해 보아야 명실상부한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일세.”  “... ...”  제자들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다.  “‘토지에다 투자해라!’ 현수가 한 말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네. 그런데 토지는 누가 다루는가. 사람이 다루지 않는가? 기업은 누가 꾸리는가. 역시 사람이 꾸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투자는 어디다 해야 하는가? 두말 할것없이 사람에게 해야 하는것일세...   이건 현수가 쓴 기사는 아니네만 여하튼 자네신문에서 본 글인데 ‘이들 부부는 한평생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살아온다.’... 세상에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사는 부부가 있을가? 수길이가 쓰는 소설에서는 이런 말이 통하지. 소설은 현실 생활의 진실이 아니라 그 인간생활의 본질을 추구하니까. 그러나 현실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신문기사에서 이런 글들이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뻔뻔스럽게 나가기때문에 사람들이 ‘신문은 다 거짓말이다.’고들 하게 되는게 아니겠는가. 옛날 문화대혁명때 전형인물은 반드시 사상이 붉게 만들어야 하고 반드시 무슨 일을 하나 다른 사람들 보다 우수해야 하고 또 반드시 전면적으로 훌륭해야 한다는 ‘3돌출’이란 그 절대화 그늘이 세월이 많이 개방된 오늘에도 채 가셔지지 않은거라고 보여지네. 그리고... 하긴 난 신문은 잘 모르네만, 역시 문화대혁명때는 ‘당보’라고 하면 유일한 당의 선전도구로 간주해 왔는데 신문의 기능은 여러가지가 있는것이 아닌가? 물론 당의 방침 정책을 선전하는것이 ‘당보’의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로는 되겠지만 그밖에도 정보전달기능, 취미오락기능 뭐이 많을것 같은데 어떤 기사들을 보면 어느 당위 선전부에서 내려보내는 문건들처럼 너무 엄숙하고 너무 훈계식, 명령식이란 말일세...”  “그런데 교수님, 한가지 물읍시다. 우리 신문이 세월의 변화와 함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보시지 안습니까?”  “말은 바른 대로 세월만큼은 달라졌다고 봐야하지.”  “그러시다면 교수님이 뒤부분에서 말씀하신 ‘3돌출’의 그늘문제, 신문의 기능문제 같은건 매일 신문을 연구하는 우리도 알고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까?”  “?... ...”  “그래요. 현수 말이 맞아요. 아무리 좋은 강연도 너무 길게 하시다보면 듣는 사람이 지루하고 필요가 되지 않는 말도 많이 첨가되거든요. 안 그래요. 교수님?”  생각밖으로 조용히 앉아 듣기만 하던 최윤희가 강현수를 두둔해 나선다.  몇해전부터 퇴직을 한 김만융교수는 최윤희의 소개로 산 좋고 물 좋은 림구현의 어느 시골에 가 살고 있어 그런지 최윤희와 김교수는 아무 말이나 허물없이 할수 있는 사이인것 같다.   “교수님 제가 옛말 하나 할가요?”  조용하던 최윤희가 자기 손을 들어주자 강현수는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아흔살 나는 아버지가 일흔살 먹은 아들을 앞세우고 도랑을 건너게 되였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뒤에서 하는 말이 ‘아가야 조심해서 디딤돌을 밟거라. 엎어질라!’ 이러더랍니다.”  “에끼, 내가 주책머리 없다고 자네들이 골려주는군. 됐네, 나도 이젠 더 할말이 없네.”  손을 홱 젓던 김만융교수는 그 손을 뒤로 가져가 허리를 짚더니 버섯모양의 정자에서 밖으로 씨엉씨엉 걸어나간다. 그러자 강현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두 동창에게 소곤거린다.  “저 백발 령감이 머리에 드신건 많은데 나이는 못 속이지?!”  그러자 이번엔 대머리가 허리를 굽히며 소곤거린다.  “우리 ‘백모남’스승님이 뭐 같아 보이는지 알어?”  “뭐 같은데?...”  “백년 묵은 구렝이!”  “확실히 구렝이는 구렝인데 이젠 조금 주책 없는것 같아.”  “조금 치매가 온 구렝이는 아니고요?”  제자 셋은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김만융교수의 뒤에서 입을 싸쥐고 네 한마디 내 한마디 비쭉거린다.  
20    [장편] 안개 흐르는 태양도 19 댓글:  조회:469  추천:22  2011-03-01
제 4장  태양도의 풍경 (7) 배놀이         ‘한근짜리’ 김성만이와 ‘비아바이’ 박재동은 소형기차를 타고 얼마쯤 가다가 ‘러시아’란 역에서 내려버렸다. 이런 장난감 같은 기차야 코흘리개 어린애들이나 그런 애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나 타는 놀음이지 반백이 되여 가지고 그런 조무래기들 속에 끼여 앉아있자니 싱겁고 멋적기 그지없었다. 아까 강현수를 따라 러시아 소도시를 지날 때 어느 길목에선가 낚시대를 세준다는 간판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디가서 낚시대를 세내여 한두 시간이라도 낚시질을 하려고 둘이 약속했던것이다.  소형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낚시대 세주는 곳을 찾느라고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눈앞에 문득 ‘러시아기념품상점’이란 간판이 나타났다.  “여기 들어가 러시아 물건이나 구경 좀 해볼가?”  “러시아 물건들은 우둔하게 만들었지만 든든 하다구.”  둘은 호기심에 러시아기념품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상점안에서 김순애를 만났던것이다.  권총라이타 하나를 손에 든 김순애는 값을 흥정하느라고 매대주인녀와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25원에 하나 줘요.”  “30원에서 28원으로 내려줬는데 이젠 더 못내려요.”  “그럼 26원!”  “안된다는데...”  “그럼 27원!”  “이거 참, 안된다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나? 돈이 없으면 만져도 보지 말거지...”  아까부터 1~2원을 가지고 싱갱이질 하는 김순애를 갖잖은 눈길로 흘겨보던 매대주인녀는 퍼러딩딩 해서 김순애가 손에 들고있는 권총라이타를 홱 나꿔채갔다.  “뭐, 어쩌고 어째?”  김성만이가 먼발치에서부터 표독스러운 매대 주인녀를 손가락질하며 김순애 곁으로 다가왔다. 비아바이도 뒤따라 왔다.  김성만이는 한근짜리 코를 벌름거리며 겨드랑이에 꼈던 검은 핸드빽 쪼르래기를 쫙- 당기더니 그 속에서 인민페 만원짜리 묶음을 하나 꺼내 매대우에 탕 소리나게 메쳤다.  “여기에 있는 라이타를 몽땅 줘!”  난데없이 나타난 김성만이가 고함을 지르자 그 매대 주인녀도 가만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지금 이 녀자와 말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이 녀자? 이 녀자는 내 안해야?”  김성만이는 이번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더 꽥 소리를 지른다. 그제야 그 주인녀는 기가 팍 꺾여 찍소리도 못한다.  “이러지 말아요. 성만이! 안 사면 그만이 아닌가요.”  “안 사기는 왜 안 사! 이렇게 덜돼먹은 간나새끼들은 혼을 좀 단단히 내줘야 해!”  성만이는 팔을 잡고 말리는 김순애를 한옆으로 밀어놓으며 주먹으로 매대 유리를 탕탕 두드린다.  “왜 이 돈만큼 달라는데 말이 없어?”  “그렇게는 물건이 없어요...정 사려거든 래일 오세요.”  “물건도 없으면서 큰 소리야? 그럼 여기에 있는 라이타가 모두 몇가지 종류야?”  “권총, 로케트, 땅크, 승용차...모두 스물한가지 종류래요.”  “그럼 같지 않은 라이타를 하나씩 사겠으니 얼른 계산해봐!”  매대 주인녀가 고개를 숙이고 돈을 계산하는 사이 김순애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냥 말린다. 그러는 김순애를 이번엔 비아바이가 곁에서 옷깃을 잡아당긴다. 김성만이는 돈 많은 기업인이니 이런것쯤은 너무 부담가지지 말라는 귀띔이다.  라이타 21개 값이 도합 530원이라고 했다. 김성만이는 만원짜리 돈 뭉치에서 백원짜리 다섯장을 뽑아냈다.  “전 세계에서 제1갑부인 빌 게이츠란 사람도 말이야, 상점에 가선 1전, 2전 다툰다는 소릴 들어봤겠지? 이 돈이면 덮어쓰고도 남을거네.”  성만이는 그 주인녀에게 5백원만 던져주고는 김순애와 비아바이를 데리고 상점을 나왔다...  “집에서 누가 라이타를 수장하는 모양이구만.”  “아니, 우리 아들에게 주려구요. 그 애는 하루 종일 라이타만 가지고 놀아요.”  김순애는 몇해전에 학부모들이 차리는 어느 연회에 참석했다가 술을 포장한 곽에서 술병과 같이 나오는 오또기처럼 만든 라이타가 희구하여 그걸 가져다 스무살 나는 아들에게 준적 있었다. 그 아들은 태여날 때부터 말못하고 사지를 바로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 애였다. 그런데 그 라이타가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불을 켰다 죽였다 하며 그것만 가지고 놀던 아들은 밤에 잠잘 때도 그 라이타를 손에 꼭 쥐고 자는것이였다. 그때부터 김순애 부부는 술병에 묻어 나오는 라이타만 보면 모두 얻어다 아들에게 주군 했는데 그렇게 모인 라이타가 이제는 백개도 넘었다. 이번 동창모임에 오면서도 김순애는 기회가 있으면 할빈의 기념품상점들을 다니며 특별하게 만든 라이타를 사서 아들에게 기념으로 주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동창들이 모두 태양도 폭포를 구경하러 갈 때 김순애는 슬그머니 혼자 떨어져서 한창 태양도에 있는 기념품상점들을 돌고있던 중이였다.  “순애도 여기서 만났는데 우리 낚시질 가지 말고 저기 보이는 고니호수에 가서 배놀이나 할가?!”  “그것도 좋겠어.”  세 사람은 배놀이를 하려고 고니호수로 갔다. 바람 한점없이 고요한 호수엔 뜨거운 해살이 내리 퍼부어 수억만개의 황금빛이 수면우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호수엔 쌍쌍의 련인들, 한 가족인듯 싶은 아이 어른들이 저마끔 즐겁게 노를 저으며 배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셋이 함께 배를 타려고 보니 세 사람이상 타는 배는 다 세내가고 사람 둘씩만 앉을수 있는 배만 몇척 있었다.  “형은 노를 저을줄 아오?”  다른 남성동창들은 박재동이를 ‘비아바이’라고들 했지만 성만이는 대학다닐 때부터 형이라고 불렀다.  “난 잘 몰라...”  “그럼 혼자 하나 가지고 노오. 내 순애와 같이 하나 탈게.”  성만이는 김순애든 누구든 녀자와 단둘이 가질수 있는 기회라면 덮어놓고 좋았다. 그래서 속으로 은근히 쾌자를 불렀다.  둘은 빨간 구명조끼를 하나씩 껴입고 배에 올랐다. 과연 성만이는 량손으로 노를 젓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비아바이는 아직도 호수 변두리에서 좌충우돌하며 맴돌고 있는데 성만이네가 탄 배는 씨엉씨엉 속력을 내며 어느 사이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고 있었다.  “배를 많이 타봤네요. 노를 잘 젓는 솜씨를 보니...”  “마누라의 몸종으로 살다나니 그렇게 된거요.”  성만이는 고위급간부네 집 사위로 몇십년 머리숙이고 살아서 배를 탈 때면 노를 젓고 승용차를 탈 때면 핸들을 잡고 비행기를 탈 때면 짐을 들고 다니는 일은 무조건 그의 몫이였었다.  성만이는 어제 밤에 맥주병밑굽한테 안해와의 ‘악연’을 털어놓듯이 자기가 얼굴 없이 자존심 구기며 살아온 경과사를 대충대충 김순애한테도 들려주었다.  “내 얘기는 들어봤자 ‘현대판 노예사회의 력사’밖엔 없다니까. 이제부턴 순애 얘기나 들어 보기오.”  “저한텐 들을 얘기가 더 없거든요.”  “순애네 아들은 태속에서부터 그렇게 잘못 된게요?”  “아니래요. 해산을 할 때 아이 머리가 귀우까지는 나왔는데 더 나오지 못하고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머리뼈가 졸리면서 뇌가 잘못됐어요.”  “어- 그랬구만. 그럼 집엔 그 아들 하나요?”  “밑으로 딸애 하나 또 봤어요. 인제 초중에 다녀요.”  “듣자니 순애남편도 몸이 좋지 않다는것 같던데?...”  “호- 쌍지팽이가 두 다리를 대신해요.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리됐어요.”  “남편은 원래 무슨 일을 했소?...”  “저와 같이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요. 그렇게 사고를 친 다음부턴 교수는 못하고 저녁마다 학교에 나가 밤 보초나 서요.”  “그럼 달 로임도 말이 아니겠구만.”  “예, 저는 언녕 중학교 고급 직명을 가졌는데 그 사람은 그냥 중학교 2급에 머물러 있어서 달마다 로임이 한 7백원씩 나오는가 그래요.”  “아, 그러니 생활은 말이 아니겠구만... 그럼 그 장애인 아들은 누가 보살피오? 낮에는 아버지가?...”  “호- 저의 집에는 또 애들 할머니가 두분 계시거든요.”  “무슨 할머니가 둘씩이나 되오?”  “친정 어머니에 시댁 어머니까지 모두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그건 왜?...”  “호- 두루두루 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시댁 어머니는 결혼해서부터 저의 집에서 살았는데 몇해전에 친정 오빠와 올케가 한국으로 가게 되여 오빠네 집에 계시던 친정 어머니도 제가 모셔왔어요.”  “어허, 들을수록 캄캄해지는데. 아들, 남편 모두가 장애인들인데 거기다 시댁, 친정하며 로인도 두분이나 모시다니 순애 그 어깨를 누르는 짐이 무거워도 이만저만 무거운게 아니구만.”  “호-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렸어요. 어찌 보면 어머니 두 분을 모신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내가 오히려 우리 아들을 돌봐주는 두 분 로인의 로후를 도적질한다고 생각할수도 있는게 아니겠어요.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져요.”  “그나저나 순애는 생활이 어렵기로 말이 아니겠는데...”  “괜찮아요. 그래도 밥먹고 살만은 해요.”   성만이는 측은한 눈길로 순애를 바라본다. 어제부터 동창들이 김순애네 가정살림이 구차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한심할 줄은 생각밖이였다.  그는 젓던 노를 홱 팽개치고 김순애의 팔목을 덥석 움켜쥔다.  “내 이 김성만이란 동창생은 다른건 없어도 돈은 수백만원 모여두고 있는 사람이요. 순애! 너무 돈걱정 마오. 내가 도와줄테요!”  성만이의 집게 같은 손은 순애의 보들보들한 팔목을 점점 더 힘있게 움켜쥔다.  “호호 정말이래요. 눈물이 나게 고맙기는 하지만 그건 싫어요.”  “왜?...”  “그럼 저는 죽을 때까지 무거운 인정 빚에 시달리지 않겠어요?”  “어허, 빚이 아니라 채권에 당첨되듯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되는거 아니겠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 일을 모래밭에다 써놓아야 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돌 바위에다 새겨두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 둘은 동창생 사이니까 이건 다르오. 거짓말 같이 들리겠지만 나는 다른건 부러워도 돈만은 부럽지 않다니깐.”  “호호호... 세월이 많이 흐르니 별난 동창 다 만나네요. 그럼 성만이가 부러운건 뭔가요?”  성만이의 불타는 눈길은 김순애의 얼굴을 참빗질하고 있다. 고생을 겪어온 흔적으로 얼굴 구석구석엔 가는 잔주름들이 서려있지만 눈섭부터 입술까지 가맣고 빨갛게 화장을 한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자연미에 그 속엔 또 지식인의 성숙함이 받쳐있는 얼굴이다. 실로 지금 세월에 돈을 주며 찾으라 해도 이런 녀성은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나는 녀자가 부럽소!”  “호호, 이 세상에 흔한게 녀자가 아닌가요. 게다가 성만이는 돈도 많겠자...”  “난 돈만 주면 바지를 벗는 눅거리 녀자들은 별로 재미가 없소. 또 조건이 우월하거나 제가 잘났다고 턱을 쳐들고 다니는 녀자들도 이젠 신물이 날 지경으로 질색이요. 순애처럼 딱 순애처럼 고생을 많이 한 녀자, 그러면서도 청순한 녀자가 부럽단 말이오.”  성만이는 키퍼가 굴러오는 축구공을 덮치듯 와락 순애를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순애의 입에다 키스를 퍼붓는다. 그 바람에 배가 량쪽으로 기우뚱거린다.  “제발 이러지...”  순애는 안깐힘을 쓰며 성만이를 밀어낸다. 그렇게 순애가 한사코 몸부림치는 바람에 성만이는 아쉬운대로 순애의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내리는 찰나, 순애가 두손으로 밀어놓는 그 힘에 성만이는 허망 뒤로 넘어가는데 어깨와 머리는 배 밖으로 나가 하마트면 배에서 떨어질번 했다. 그 바람에 작은 배도 뒤엎어지기가 일보직전으로 더 세차게 기우뚱거렸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였다.  “호, 미안해요. 그런데 인제 보니 성만인 돈 많은 비렁뱅이로 변했네요.”  “누군가 녀자가 고우면 때리고 꼬집어도 곱다고 하더구만. 그러니 지금 순애가 어떤 소릴 해도 난 다 좋다니까.”  “그래요? 그럼 옛말 하나 들려줄가요?”  “옛말 좋-지!”  “우리 학교에 길교장이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수년간 저와 저의 남편을 많이 보살펴줬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늘 고맙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제가 큰아들과 둘이 집에 있는데 그 사람이 불쑥 우리 집에 뛰여드는게 아니겠어요. 어디서 마셨는지 술도 한잔 잘 되였더구만요. 그런데 마치도 저의 남편이나 되는것처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저와 같이 이불을 펴고 누워 자자는거래요. 제가 언제 봐도 감지덕지해서 고맙게 인사하는데다 남편까지 불구자이니 아마 제가 순순히 몸을 허락할줄로 알았던 모양이래요.”  “그래서?”  “저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길로 연거퍼 그 사람의 귀쌈을 불이 번쩍나게 후려쳤어요. 호호... 못난 이 김순애는 그렇게 봉건통이래요. 저의 옛말은 다 끝났어요.”  “그럼 후에는 그 교장이 어쩌는데?...”  “사람이야 성만이처럼 참 좋은 분이지요. 지금도 우리 가정을 말없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나도 그럼 순애한테 귀쌈을 한대 얻어맞은 셈치고 아까 말한대로 앞으로 도와주지...”  “호호호... 성만인 저한테 어찌지도 않았는데 뭘요? 허물없는 동창들 사이에 키스 같은건 할수도 있는거지요. 안그래요? 그런데 제발 앞으로 도와주겠다는 말만은 더 꺼내지 말아요. 성만이가 세상 뜬 마누라한테 자존심이 다 구겨졌다고 했지만 저도 그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다 구겨져요.”  “허허, 계집이 천명이면 마음도 천가지라더니 순애는 내가 처음 보는 또 다른 녀자구만...”  “호호호 그래요?”  둘은 마주보며 통쾌하게 웃는다.  고니호수에 뜬 수십척 배들중에서 한 사람만 홀로 배에 앉아 외롭게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은 유독 비아바이 혼자뿐인것 같다. 그래서 심심하고 재미없는지 멀리에서 성만이네 배를 향해 자꾸만 팔을 내젓는다. 무슨 놈의 재미는 둘이서만 보느냐는 볼멘 심술인것 같기도 하다...    
19    [장편] 안개 흐르는 태양도 18 댓글:  조회:488  추천:15  2011-03-01
제 4장 태양도의 풍경(6)박화        똑, 똑, 똑...  밖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오게!”  방안에서 나는 그 응답을 기다렸다가 몸매가 날씬한 단발머리 처녀애가 백일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석사연구생 박화였다.  “반갑네. 거기 쏘파에 앉게...”  백일호의 마음은 지금 소용돌이치는 강물처럼 뒤번져지고 있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짐짓 태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때 왕주임이 사무실로 들어와 커피 두컵을 타서 백일호와 박화학생의 앞에 놓고 다시 조용히 물러갔다.  “커피를 들게.”  “예, 고마와요.”  물찬 제비처럼 곱게 몸을 세웠다는 다시 제 자리에 사뿐 앉는 처녀애다.  반듯하게 잘도 자라준 처녀애, 어쩌면 말쑥한 얼굴은 봄꽃처럼 저리도 싱싱할가. 박화의 얼굴을 바라보는 백일호의 눈에는 흐뭇한 미소가 어리여있다.  (곧고 바른 코날, 뚜렷한 선을 가진 저 입은 제 에미를 많이 닮은것 같네... 몇오리 아래로 드리운 머리카락 사이로 환히 드려다 보이는 저 이마, 영채 도는 저 눈매는 나와 비슷한거 아닌가?!... 그런데... 그런데 저 애는 키가 왜 저리도 작지? 윤희도 나도 키는 껑충 큰데...)  “교수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죠?”  백일호를 바라보는 박화의 밝은 눈은 그냥 생글생글 웃는다.  “어, 참 박화에게 미안해서 한번 조용히 불렀네.”  “?... ...”  “내가 자네와 같은 조선족이면서...명색이 이 북방사범대학의 부총장이고 교육심리학원의 원장이란 사람이 자네가 떳떳하게 독일로 박사공부를 갈수있는것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네...”  “호- 그렇지 않아요. 교수님이 저의 일로 성교육청에 가서 책상을 두드리며 싸우셨다는 일도 저는 들어 알고있어요. ”  “내가 무슨 도움될 말 한거있다고 그래?”  “교수님께서 대노하며 책상을 내리치자 그 교육청 청장이란 사람은 ‘당신은 자기 민족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이 깊은것 같구만. 그러나 당신은 우선 공산당원이란것을 명기해야 하오. 조직의 안배에 복종하는것부터 다시 배우란 말이오.’ 이렇게 말하니 교수님께서는 맞받아 ‘청장 어르신님이 말 한마디는 참으로 수준없이 하는구만. 내가 어떻게 먼저 공산당원이고 후에 조선족이 될수가 있소?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조선족이니 난 태여날 때부터 조선족으로 태여났고 공산당원은 스물한살에 든거요. 알겠소?’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디다.”  “허허, 그 청장하고 난 석사연구생시절 동창생이여서 아무소리나 한건데 누가 그런 말까지 자네한테 알려주던가?”  “어쨌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길 듣고 저는 가슴이 막 후더워 났어요. 곁에서 저를 지켜주는 존경스러운 분도 계신다는 생각에서요.”  박화는 해빛 같이 밝게 웃는다. 그러는 박화를 바라보는 백일호의 눈에서는 용선로속의 쇠덩이라도 녹일듯한 뜨거운 정열이 이글이글 타번지고 있었다.  “그럼 자넨 박사공부는 어디서 할 타산인가?”  “이 학교에서 그냥 할 생각이래요. 호- 어떤 분들이 반대도 하지만요.”  “누가? 왜서 반대하는가?...”  “그런 분들이 더러 곁에 있어요. 저를 관심해서 더 훌륭한 환경을 찾아서 공부해라는 착한 마음에서겠지요. 그러나 괜찮아요. 저의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선택해야지요. 그리고 저의 도사를 맡게 되는 류교수님도 아주 훌륭하신 분이래요.”  “자네 생각이 바른것 같네. 우리 대학 박사생들은 1년간 해외에 내보내 견학도 시키고 있네. 그러노라면 미국이나 유럽쪽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할 기회가 생길수도 있고...”  기실 백일호는 지금 자기가 돈을 내여 이 처녀애를 해외 명문대학으로 류학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런데 자넨 어찌하여 우리 집엔 딱 한번 놀러오고는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는건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우리 집사람도 그렇고 상해에서 공부하는 청아 그 녀석도 자네를 아주 반가와하는 눈치던데...”  “예, 알아요. 앞으로 시간나는 대로 자주 찾아 뵙겠어요.”  백일호는 지금 이 처녀애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아까는 수년간 곁에서 보아왔고 지어는 며느리감으로 점을 찍었던 이 처녀애가 최윤희와 자기의 딸이라는 놀라운 충격에 무작정 만나보고 싶어 태양도에서 달려왔지만 정작 만난후에는 한껏 부풀었던 마음을 스스로 자꾸만 억제하고 있다. 그러노라니 이 처녀애는 그 비밀을 알고 있을가 하는 궁금증이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그런데 박화는 묻는 말만 조심스레 대답할뿐 다른 말은 일언반구도 더 꺼내지 않고 있다.  (어제 오후 최윤희와 이 애가 망강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걸 왕주임이 보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이 애는 나와 최윤희 모두 태양도에서 대학동창모임에 참가하고 있다는걸 번연히 알고 있을것이다.  그래, 언젠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왔을때도 이 애는 집사람이 꺼내놓는 사진첩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것 같았다. 그 사진첩엔 분명 우리 동창들이 함께 찍은 졸업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엔 최윤희도 있고 나도 있고 집사람인 구금자도 있다.  그런데 이 애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걸가?)  백일호는 처녀애의 눈길로부터 얼굴 기색, 그리고 손가락을 놀리는 작고 미세한 움직임들까지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참으로 령리하면서도 나이보다는 성숙미가 은은히 얼굴에서 흐르는 어른스러운 애다.  “자넨 요즘 석사졸업과 박사생입학이 겹쳐서 몹시 바삐 보내겠군.”  “예, 조금은 바삐 보내요. 오늘도 류교수님께서 저보고 자료 하나 쓰라고 하셔서 정신없이 그 자료를 쓰다가 여기로 오는 길이예요.”  “그래? 그럼 오늘 이야긴 이만하고 어서 가보게.”  “호호, 괜찮아요.”  “아니, 자네도 바쁘고 나도 바쁜 사람이네.”  “그러세요, 그럼 교수님 안녕히!”  박화는 방금 들어올 때처럼 허리를 곱게 굽혀 보이고는 백일호의 사무실을 조용히 나가려고 한다.  “자네, 잠간!”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려는 박화를 백일호는 다시 부른다.  “내 집사람한테서 들을라니 자넨 우리 아들 청아와 매일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며?...”  “예, 청아는 정말 총명하고 웅심이 깊은 애래요.”  “그럼 그 애와 친구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호호 청아는 저보다 한살 어려요. 전 앞으로도 청아의 누나로 지내고 싶어요.”  “오- 그래?! 알았네 어서 가보게.”  백일호는 박화에게 그 어떤 부담감도 주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담화를 다 나눈척 하다가 슬쩍 이 말을 꺼내보았던것이다.   백일호가 박화와 마주앉아 담화를 나눈 시간은 거퍼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일호는 충분히 만족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그 짜릿한 순간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던것이다. 한편 그 짧은 사이, 심리학 전문가로서 역시 심리학을 전공하는 박화의 몸에서 적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어냈고 해명했고 또한 박화도 분명 이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닌 현실로 더 실감나게 안겨왔다.  백일호는 답답하던 가슴이 뻥 구멍이 뚫린것처럼 후련해졌다.  하면서도 아직도 수수께끼 하나는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박화의 키였다. 얼핏 눈짐작으로 보아 박화의 키는 최윤희의 어깨에 밖에 오지 않을것 같았다.  (하긴 박화가 키만 컸더라면 내가 언녕 벌써 최윤희와 련결시켜봤을거야. 나뿐만 아니라 구금자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을런지도 모를 일이야. 그러니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인상만 받았을뿐 최윤희하고 모녀사이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것이 아니겠는가...)  백일호는 이런 생각을 굴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동창들이 태양도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별무리호텔로 먼저 가 있어야 했다.  그는 서둘러 핸드폰으로 사무실 왕주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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