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신문에서 항일 여전사 리재덕 여사 백수연 기념행사를 베이징에서 가졌다는 기사를 감명깊게 읽었다. 그래서였던지 지난밤 꿈에는 저 세상으로 가신지 20년이 되는 어머니를 보았다.
나의 어머니는 항일 투사가 아니다. 그저 한평생 농사일을 해온 평범한 시골 부녀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에는 진한 피처럼 그럴만한 이야기가 묻어있었다.
나의 어머니의 성은 주(朱)씨였다. 그런데 이 주씨 성은 어머니를 이 세상에 데려온 생부한테서 이어받은 성이 아니라고 옛날 내가 자라날 때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한구들 앉혀놓고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1930년쯤 어머니는 흑룡강성 동부 지역의 어느 산간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어릴 때의 기억으로 나의 외할아버지는 가끔 한밤중이면 허리에 권총을 차거나 또는 어깨에 긴 총을 메고 집으로 오군 하셨단다. 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네 집으로 오는 사람 모두가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외할아버지가 금방 집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숱한 일본놈들이 어머니네 오두막집을 포위했다. 그바람에 외할아버지는 어쩔 사이도 없이 적들한테 잡혀 두팔을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밖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도 도망을 가려 했든지 아니면 결사적으로 대항을 했든지 놈들은 문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외할아버지를 군도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죽였던 것이다.
그해 어머니 나이는 일곱살이었다. 그런 충격에 놀란 나의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쓰러졌는데 조금 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맥잃고 앓다가 결국 한달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양친 부모를 잃은 어머니는 어떤 마음씨 고운 사람들의 알선으로 밀산현의 어느 마을에 사는 성이 주씨라는 지주집의 (역시 조선족이었음) 양딸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 성은 그때부터 주씨로 변했다.
어머니는 위로 오빠들이 셋이 있는(그들은 모두 서울에 나가 공부를 하였음) 주씨 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16세 나던 해(1946년) 그 집에서는 어머니를 부랴부랴 지금 나의 부친한테 시집을 보내고는 서둘러 한국 서울로 떠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외할아버지는 옛날 만주벌에서 일본침략자들과 피 흘리며 싸운 항일연군 전사, 또는 항일유격대 대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가 어렸던 탓에 외할아버지의 정확한 신분은 밝힐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나어린 어머니를 가정 형편이 좋은 주씨집에 보내준 그 ‘고마운 사람들’은 혹시 외할아버지의 전우들이었고 그래서 희생된 전우의 딸애를 그런 가정에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가 나의 부친과 결혼한 뒤 한달도 안되어 부친께서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가 되어 요심전역, 평진전역, 후에는 조선전쟁에까지 나갔다가 1952년에야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분은 그때서야 진짜 가정을 이루게 되어 우로는 누나, 그 다음은 나, 나밑으로 동생들도 줄줄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부친께서는 나의 외할아버지의 신분을 밝혀내려고 흑룡강성 동부지역은 물론 연변일대와 베이징에도 다녀왔었다고 했다. 그랬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본래 성씨를 정확이 기억 못하는 탓에 신통한 단서는 잡지를 못했었다.
문화대혁명시기 체구가 작고 약한 어머니는 “오류분자”들 속에 끼어 투쟁도 맞았었다. 지주집 ‘양딸’이어서 그랬다. 홍위병들이 어머니의 머리를 마구 쥐어뜯어 오리오리 헝크러진 머리 맵시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만...
아버지만 찾았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을텐데...” 하면서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대학공부를 하던 1980년, 금방 쉰고개에 오른 부친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생전에 어머니가 자라던 주씨네 집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의 신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 사람들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 하셨다. 그 세월이 오늘 같은 세월이었다면 아마 당신께서는 한국 KBS방송국에 사람 찾는 편지만도 수없이 띄웠을 것이다.
하긴 나도 부친의 뒤를 이어 외할아버지 신분을 밝혀내리라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맏아들인 나를 아침에 낳았던지 저녁에 낳았던지조차 아물거린다는 어머니께선 주씨 집 사람들의 이름은 그만두고 그 집이 밀산현 어느 향에 살았던지도 기억을 못하고 계셨다.
“니들 아버지만 살았어도 그런 건 잘 알고 있을텐데...”하고 낙루하시며 한숨 짓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부친 생전에 미리 물어 챙겨두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신분을 찾는 일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랬어도 한때는 무엇을 먹다 목에 걸린 사람처럼 억울한 현실이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았고 또 이러다도 혹시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책이나 영화를 보다가 희생된 조선족 항일투사의 이름이 나오면 혹시 저분이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몰래 혼자서 좋은 꿈을 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차츰 그런 생각마저도 접고 말았다. 하긴 흐르는 세월과 함께 간절하던 마음이 무뎌져버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글 신문사 기자로 수십년간 조선족사회를 요해하고 익혀 온 몸이다보니 내 어머니 한분만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살아온 것이 아님을 나는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삼강평원의 한 국영농장의 마을뒤 구릉에는 옛날 항일시기 희생된 이름 모를 투사들의 무덤이 나란히 세개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제는 무덤이 흔적조차 없어졌다. 당지 한 간부는 나를 보고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그 투사들은 모두 당신 같은 조선족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머리를 세차게 가로 젓듯 무성한 풀들만 바람에 설레이는 그곳을 오래도록 지켜본적 있었다. 나는 또 벌리현의 한 조선족마을에서 남편은 일찍 항일투사로 희생되었고 금쪽같은 외동 아들마저 토비숙청에 나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몰라 그냥 애타게 기다리다가 두 눈마저 멀어버린 한 맹인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할머니를 취재한 적도 있었다.
하얼빈시에 있는 동북혁명열사기념관에는 항일열사들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는데 동북지역에서 항일 초기에 희생된 열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선족이었고 전반 항일시기 열사들을 통틀어 보아도 조선족열사는 무려 60%를 차지했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연변자치주도 그러했다. 공산당을 따라 항일, 해방전쟁에 참가한 조선족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으면 연변을 이르러 ‘마을마다 기념비요. 산마다 진달래’라 하는 시귀가 그것도 타민족의 붓끝에서 나왔겠는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일찍 이 땅에서 혁명을 한 선배님들의 이야기었고 이것이 곧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의 역사였다. 그러고보면 어머니의 본래 성이 무엇이었던지는 몰라도 괜찮다.
그저 나의 외할아버지는 수많은 조선족 항일투사들중의 의젓한 한분이었으리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자랑스럽다. 그러니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부디 삼가 나무를 베이라/ 우리 선렬의 영을 그 나무 지키고 있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 옆에 놓인 돌을 차지 말라/ 우리 선열의 해골이 그 돌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오늘따라 조기천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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