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문:윤동주 동요시의 한국 동시문학사적 의미 저자: 김 용 희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전임 연구원
1. 머리말
윤동주(1917~1945)만큼 우리 청소년들에게 사랑 받은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스물아홉 살의 짧은 삶을 살다간 순정한 생애와 시대를 고뇌하며 참회하듯 진실하게 남긴 시에 의할 것이다. 곧 나라를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시대에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고뇌에 찬 젊음과 시정신이 많은 이들에게 한번쯤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을 주었던 까닭이다.
바로 동요시와 시를 함께 써온 윤동주의 청정한 삶이 순수한 동심에 발현되었듯, 그 시심의 원천도 맑은 동심에 근거한 시인이었다.1) 하지만 한국 시문학사에서 윤동주 시에 대한 성찰은 심도 있게 다루어 왔으나2) 대략 35편3)에 달하는 그의 동요시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형편이었다.4) 대체로 윤동주 시의 연구자들은 동요시를 단순히 시를 쓰기 위한 습작기의 한 과정으로 치부하거나 시를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혹은 그런 맥락 안에서 동요시를 다루어 왔을 뿐이다. 그것은 동시문학이 자립적으로 형성되고 자체적으로 존립해온 문학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동시문학 자체를 폄하한 결과이다.
한국 동시문학사는 시문학사와 그 출발을 같이한다. 곧 동시문학사도 1908년 11월 열아홉 살 소년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합지 《소년》을 발간하며 권두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에 두고 있다. 그 《소년》지야말로 한국 아동문학의 들머리 잡지였으며, 우리의 전통적 정형시형을 깨뜨린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신문학뿐 아니라 새 시대 동시문학의 한 좌표였다. 최남선은 1911년 『소년』지가 폐간 당하자, 다시 1913년 1월에 순한글 표기의 어린이잡지 《붉은저고리》를, 9월에 《아이들보이》와 《새별》을 연이어 발간했다. 그는 여기에 창작동요 「바둑이」 등을 발표하며 아동문학을 신문학 일선에 올려놓았다. 최남선의 뒤를 이어, 방정환은 1923년 3월 《어린이》지를 창간하며 본격적으로 어린이문학을 개척해 나갔다. 다시 말하면, 초창기 동시문학은 당대 지식인층 일반에 보편적으로 유포되었던 신문화 건설의 욕망, 아동의 발견이라는 시대정신 속에 강하게 일어났던 어린이문화 운동과 그에 기반이 된 창조충동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 《어린이》지가 1920년대 중반 창작동요의 전성시대를 이끌어낸 것도 그런 어린이문화 운동과 창조충동에 의한다. 그 이후 동시문학은 1930년대 동요, 동시, 동시요의 장르 개념에 대한 혼란 과정5)을 거쳐, 해방 후 다양한 시적 실험과 양식의 확장을 이룩하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자립적으로 존속해온 동시문학은 시의 하위갈래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잠재적 독자인 어린이를 염두에 둔 시창작 방법론상의 변별성을 지닌 시문학의 한 갈래였다. 곧 동시문학은 시인에게 내재한 동심으로, 혹은 어린이의 화법이나 시점으로 비인격물을 인격화한다거나 시적 상상력에 동화적 상상력을 끌어들여 대상을 의미화하는 독창적인 양식이며, 단순 간결 명쾌한 시적 구조 속에 호기심어린 눈으로 대상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내는 독자적인 미학을 갖고 있다. 이때 동시문학 속에 잠재해 있는 동심은 삶의 순수한 원형이자 시심의 원형질이다.6) 그만큼 동시문학은 어린이의 호기심어린 눈과 마음으로 바라본 세계이며, 그렇게 세계를 보는 것은 마음의 원형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윤동주의 동요시는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존립해온 동시문학사 안에서 그 시적 의미를 성찰해 보아야 합당하다. 그것은 윤동주의 동요시를, 단순히 시 쓰기를 위한 습작기의 한 과정으로 폄하하거나 시 해석의 한 방편으로 다루는 데에서 벗어나, 그의 동요시 자체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한국 동시문학사 안에서 윤동주의 동요시를 살필 때 비로소 윤동주 동요시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2. 1910~1930년대 한국 동시문학사와 새로운 시형의 출현
윤동주는 1932년 4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시절 윤석중의 동요와 동시에 심취하고, 1935년 숭실중학교로 옮긴 뒤에는 백석의 시집 『사슴』,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등을 탐독한 문학 소년이었다.7) 이듬해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할 무렵, 윤동주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가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투고할 만큼 동시 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바로 윤동주는 1936년부터 1938년에 이르는 약 3년 동안 20편의 동시를 집중적으로 창작하였다. 이처럼 윤동주가 동요와 동시에 깊은 관심을 가질 무렵의 한국 동시단은 동요․동시 장르에 대한 인식이 불분명한 시기였고, 가창 동요에서 동요시로의 이행과정 속에 놓인 과도기였다. 1910년대 초창기에서 윤동주가 동요시를 집중적으로 창작한 1930년대 말까지의 동시문학사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동시문학의 뿌리는 동요(童謠)이다. 동요란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 곧 아동가요가 그 어원이다.8) 초창기 동시문학은 시문이기 이전에 노래로써 운율적 흥미와 더불어 개인 감정과 집단 공동체적 공감의 정서가 공존하는 원시예술적 맥락에 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1920년대 창작동요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서동요」로부터 구한말 「녹두새요」에 이르는 문헌기재동요나 전래동요들과 그 역사적 계보를 잇는, 이른바 ‘사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다. 시대가 다르고 삶과 가치관이 달라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온 그 요적 속성이 동시문학의 본디 모습인 것이다.
신문학 초기, 어린이에게 주는 노래로 처음 등장한 것은 최남선의 「경부철도노래」(1908. 3. 20)였다. 이 「경부철도노래」는 7․5조 4행을 1절로 하여 모두 67절로 이루어졌고, 마지막 67절 여백에 “삼가 이 노래를 어린 학생 여러분에게 드리옵내다”고 적어 놓았다. 하지만 「경부철도노래」는 계몽적 목적성을 담고 있어 창작동요와 그 성격을 달리했다. 창작동요의 형태를 처음 선보인 것은 1913년 《붉은저고리》(제1년 제2호)에 실린 최남선의 「바둑이」이다.
우리집 바둑이는 어여쁘지요./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때 되면/문밖에 대령했다 앞장나서서/겅 둥둥 동구까지 뛰어나와요.
―최남선, 「바둑이」 1연
「바둑이」는 어린 화자와 강아지와의 친밀한 유대감이 잘 나타난 동요이다. 화자가 바둑이를 어여삐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 놓았다. 아침마다 화자가 학교에 갈 때 강아지가 먼저 알고 동구까지 앞장서서 뛰어나간다는 정황은 바로 천진한 동심의 포착이며 시적 진실이다. 특히 이 동요는 “앞장나서서”, “겅둥둥 동구까지”에서 보듯, 최남선이 고집스럽게 고수해온 7․5조의 음수율을 의도적으로 맞춰놓은 특징을 보여준다. 이 7․5조 형식은 서양 멜로디에 가락을 맞추기 위해 도입된 것인데, 1920년대 중반에 출현한 창작동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남선의 어린이문학 활동은 그 후 방정환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1923년 3월 방정환은 《어린이》지를 창간했고, 그 잡지는 창작동요의 붐을 조성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어린이》, 《동아일보》 등은 ‘독자투고란’을 독자적으로 상설하여 동요 창작을 적극 장려하였는데, 이 독자투고란을 통해 서덕출, 윤복진, 최순애, 이원수 등 많은 동요 시인들이 등장했다. 반면 한정동은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창작동요 「소금쟁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춘문예 출신 동요 시인이었다. 한때 「소금쟁이」의 표절 시비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대부분 동요 시인들이 창작동요에서 다른 양식으로 발길을 옮길 때, 그는 평생을 동요 창작에만 일관한 동요 시인이었다.
무엇보다 창작동요의 매력은 작곡가에 의해 신선한 곡이 붙여져 널리 애창되었던 점에 있다. 어린이문화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색동회》의 일원으로 정순철, 윤극영 등 음악 전공자가 합류하여 동요의 작곡과 보급에 앞장서면서 창작동요의 전성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윤극영은 동요 「반달」을 직접 작사 작곡했을 뿐 아니라, 한정동의 「두룸이(따오기)」, 유지영의 「고드름」 등에 곡을 붙여 《다알리아회》라는 창작동요 보급 단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동요를 가르치고 보급했다. 1926년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윤극영의 동요곡집 『반달』은 그 결실이었다.
당대 최고의 동요 시인인 윤석중의 문학적 출발도 노랫말로서의 동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1921년 교동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서 생전 처음 배운 노래가 「하루(春)가 기다(봄이 왔네)」라는 일본 창가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우리나라에도 버젓한 봄이 있는데도 「하루」라는 일본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라는 분한 생각에서 「봄」이라는 작품을 지어 《신소년》지에 투고 입선했다고 한다.9) 그 후 그는 글동무를 모아 《기쁨사》라는 모임을 만들고 작곡되어 노래로 불러질 것을 목적으로 한 동요를 창작해 쉴 새 없이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 등 당대의 쟁쟁한 작곡가들을 찾아다녔다. 윤극영의 「흐르는 시내」,「제비 남매」, 박태준의 「맴맴」, 「중중 때때중」, 「오뚝이」, 홍난파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달마중」, 「휘파람」 등 그의 동요가 이때 주옥같은 멜로디를 만나서 널리 애창될 수 있었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대체로 당시 창작동요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자아와 세계가 일원화되기를 갈망하는 슬픈 서정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 속에 모든 대상은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되고, 이야기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一.나의살든고향은/피는산골/복송아살구/아기진달내/울긋붉읏대궐/차리인동네/그 속에서놀든가/그립슴니다.
―이원수, 「고향의 봄」 1연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1926년 4월 《어린이》(제4권 제4호)지에 최초로 입선된 작품으로, 홍난파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불리어진 국민동요이다. 이 창작동요에서는 내가 살던 고향이 “복송아살구/아기진달내”가 피어 “대궐/차리인” 세계이며, “그속에서놀든가” 그리워지는 양자 간의 분열과 갈등 없이 하나가 되어 있다. 이 같은 자아와 세계의 일원화는 우리 인간이 지닌 원초적 향수이며, 시인이 꿈꾸고 갈망하는 고향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립슴니다”라는 서술어가 시인이 처한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창작동요는 현실 상황에 대해 감정어린 슬픈 정서와 이야기적 요소를 담고 있고, 형식면에서 최남선의 영향을 받은 7․5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의 동시문학은 시적 실험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이 곧 ‘동시(童詩)’이다. 동시라는 장르 명칭이 《어린이》지에 등장한 것은 1926년의 일이다. 《어린이》(4권 1호)지가 손진태의 산문시 「옵바 인제는 돌아오서요」를 동시라는 장르명을 붙여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동요의 정형성을 벗고 동시의 면모를 일신시킨 작품을 처음 선보인 시인은 정지용이었다. 그는 1926년 6월 《학조》 창간호에 「서 한울」, 「」, 「감나무」, 「한울 혼자 보고」, 「레(人形)와 아주머니」 등 5편으로 이루어진 동요시편을 발표했고, 1926~27년 『신소년』에 집중적으로 동시를 발표하였다.10) 이때 그가 발표한 작품은 전부 ‘동요’라는 장르 명칭이 붙여졌지만, 발상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동시의 면모를 갖춘 작품이 많았다.
해바락이 씨를 심./담모퉁이 참새 눈숨기고/해바라기 씨를 심.//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바둑이는 압발로 다지고/광이가 리로 다진다.//우리가 눈감고 한밤 자고나면/이실 이 나려와 가치 자고가고/우리가 이우세 간동안에/해ㅅ비치 입마추고 가고.//해바락이는 첫시약 씨 인데/사흘이 지나도 북그러워/고개를 아니 든다.//가만히 엿보러 왓다가/소리를 객! 지르고 간 놈이―/오오 사철나무 니페 숨은/청개고리 고놈이다.(1925. 3月)
―지용, 「해바락이 씨」 전문11)
「해바락이 씨」는 1920년대 중반 동요 전성기 시대에 발표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적 이미지에 동화적 상상력을 수용한, 동시의 전형적 형태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이 「해바락이 씨」는 해바라기 씨 하나 싹 틔우기 위하여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힘을 모으는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하고 있다. 바로 누나, 바둑이, 고양이, 이슬, 햇빛의 힘에 청개구리와 화자의 기원까지 한데 어울려 있다. 이 「해바락이 씨」는 외형적인 자수나 행수의 고려가 억지스럽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화자가 동심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며 비인격물을 인격화하는 물활론적 사유로 시적 의미를 생성해내었다는 점에서 동시의 표본이 되는 작품이다. 그 이후 1930년대 들면서 동시는 동요 시인들에게 지대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특히 윤석중은 『잃어버린 댕기』(계수나무회, 1933)를 동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며 정형률을 깨드리는 시적 실험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잃어버린 댕기』는 창작동시 20편, 번역동시 10편, 동화시 5편을 묶어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지만, 시적 성취 면에서 정지용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KAPF가 해체된 1930년대 중반, 다시 창작동요에 새로운 시적 성찰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노래로 불리어지는 노랫말 가창 동요에서 음미하며 읽는, 시적 속성을 띤 시적 동요, 즉 동요시였다. 동요시는 형식적으로 1연과 2연에 같은 글자수를 맞춘 대구의 정형률을 가졌지만, 내용적으로는 대상을 시적 비유로 표현하거나 이미지로 포착한 새로운 시형이다. 곧 동요시는 단순 간결 명쾌하면서 동심의 발현, 이미지의 선명성,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발견 등을 정형적 형태에 담아낸 동시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형은 정지용 이후 강소천, 박영종(목월) 등에 의해 촉발되었다.
물/한 모금/입에 물고//하늘/한번/쳐다 보고//또/한 모금/입에 물고//구름/한번/쳐다 보고
―강소천, 「닭」 전문12)
음수율을 지키면서 이야기성보다 이미지에 중점을 둔 강소천의 「닭」은 시적 동요, 곧 동요시의 정점을 이룬 작품이다. 닭이 물을 먹는 형상을 이미지로 포착한 이 동요시는 4․4조를 취하고 있지만, 단순 간결 명쾌하면서 참신하게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동심의 직관을 통해 대상을 유추적으로 발견한 결과이다. 이처럼 이미지는 사람이 감각을 통해 체험한 것을 언어로 재현하여 사물의 구체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강소천은 「닭」을 포함한 33편의 동요시, 동시와 1편의 창작동화를 한데 묶어 1941년 ‘동요시집'이라는 이름으로 『호박꽃 초롱』(박문서관)을 간행했는데, 이것은 일제 말기 혹독한 우리말 탄압 정책 아래에서도 한국 동시문학의 새로운 시형을 제시한 귀중한 동요시집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실험적으로 선보이던 이러한 동요시편들은 시적 형태의 자유로운 변이와 사유의 깊이를 꾀하는 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동시문학의 새로운 시적 이정표 구실을 하였다.
3. 윤동주 동요시의 동시문학사적 의의
윤동주가 동요시를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의 한국 동시문학은 이렇듯 노랫말 중심의 가창 동요에서 벗어나 형상 동요가 출현한 시기였다. 곧 이 무렵은 가창 동요, 동요시, 동시라는 시적 양식이 혼재한 과도기요, 동요 시인들이 창작동요에서 동요시, 동시로의 시적 탐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던 때였다. 윤석중, 정지용, 백석 등의 동요, 동시, 시 등을 탐독하며 시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윤동주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특히 동요․동시의 시적 사유 방식과 시형을 익혀나갔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울 언니 바닷가에서/주워온 조개껍데기//여긴여긴 북쪽 나라요/조개는 귀여운 선물/장난감 조개껍데기//데굴데굴 굴리며 놀다/짝 잃은 조개껍데기/한 짝을 그리워하 네//아롱아롱 조개껍데기/나처럼 그리워하네/물 소리 바닷물 소리//
―「조개껍질」 전문
「조개껍질」은 윤동주가 1935년 처음 쓴 요적 동요로 모두 3(4)․5조의 3행 4연으로 이루어졌고, 그 내용은 전달에 용이하게 직설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조개껍질은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워 북쪽 나라에까지 가지고 와 화자에게 준 귀여운 선물이었는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그만 한 짝을 잃어버리고 화자가 그리워한다는 것과 그 조개껍데기도 화자처럼 바닷물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동요이다. 동요가 직설적인 내용을 지닌 이유는 노래로서 갖는 중요한 특성인 친숙함 때문이다. 친숙해지는 전제조건은 쉬워야 한다는 것에 있다. 시는 어렵더라도 여러 번 다시 읽고, 여러 가지 뜻으로 의미를 따져 보면 이해가 가능해질 수 있지만, 노래는 그렇지 못하다. 멜로디에 노랫말을 따라 듣다가 중간에 의미 파악을 놓치면, 그 뒷부분을 앞의 내용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동요는 동시처럼 이미지, 상징, 은유가 깊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보다 전달에 용이한 이야기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동요의 숙명적 체질이다.13) 좋은 노랫말은 노래하는 동안 그 내용이 이해되고 마음으로 전달된다. 이 「조개껍질」은 시적 이미지나 비유에 의존하기보다 내용 전달이 용이한 이야기가 전제된 전형적인 요적 동요이다.
윤동주는 이듬해인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동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점차 정형률을 가진 요적 동요에서 벗어나 이야기성과 형상성을 중시한 시적 동요, 즉 동요시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이때 윤동주의 동요시는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집약된다. 하나는 「개」등에서 볼 수 있듯, 하나의 문장으로 이미지를 포착하거나 장면화한 동요시형이다. 다른 하나는 「겨울」, 「거짓부리」 등에서 살필 수 있듯, 대구를 이룬 두 개 내지 세 개의 연으로 구성하여 이야기나 의미를 전달하는 동요시형이다. 전자가 당시 동요시로 특수한 경우라면, 후자는 당시 널리 유행하던 창작동요 형식을 빌린 일반적인 유형이다.
눈 위에서/개가/꽃을 그리며/뛰오.
―「개」 전문
「개」는 선명한 이미지와 종결어미 ‘~오’로 끝맺은,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유형의 동요시이다. 이런 동요시형은 「가을밤」, 「나무」, 「사과」, 「눈」, 「할아버지」 등 1936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 몇 편의 작품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종결어미 ‘오’는 평서형이나 의문형 어미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뛰오’, ‘~보오’, ‘~푸르오’ 같은 어간이나 ‘~보이오’, ‘~쓰이오’, ~웃기오‘처럼 접미사 아래에 쓰인다. 당시 동요․동시의 표현법은 주로 어린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ㅂ니다‘, ’~어요‘ 등 경어로 쓰였다. 평서형 어미로 ’~오‘가 사용된 윤동주의 동요시는 특수한 경우로, “별똥 떠러진곳/마음에 두었다/다음날 가보려/벼르다 벼르다/인젠 다 자랐오.”에서 보이는 정지용 동요시 「별동」의 종결어미와 닮아 있다. 곧 이런 유형의 윤동주 동요시는 형태면이나 발상법에서 정지용 동시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1935년 10월 27일 간행된 『정지용 시집』은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시집이었다. 윤동주의 유품 중 하나인 그 『정지용 시집』에는 속표지에 ’1936. 3. 19‘라는 책을 구입한 날짜 사인을 기록해 둘 만큼, 그가 애지중지하며 정지용의 표현법을 배우고 익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흰 눈발에 찍힌 개의 발자국을 꽃으로 표현한 「개」와 같은 유형의 동요시는 짤막한 내용 속에 상상이 가능한 이야기가 잠복해 있거나, 독자가 수긍할 만한 이미지의 선명성이 담겨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처마 밑에/시래기 다래미/바삭바삭/추워요.//길바닥에/말똥 동그라미/달랑달랑/얼어요.
―「겨울」 전문
똑, 똑, 똑,/문 좀 열어주세요/하룻밤 자고 갑시다/밤은 깊고 날은 추은데/거 누굴까?/문 열어 주고 보니/검둥이의 꼬리가/거짓부리 한걸.//
꼬기오, 꼬기오,/달걀 낳았다./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간난이가 뛰어가 보니/달걀은 무슨 달 걀,/고놈의 암탉이/대낮에 샛빨간/거짓부리 한걸.//
―「거짓부리」 전문
「겨울」은 1936년에, 「거짓부리」는 1937년에 각각 씌어진 작품으로 추정되는 동요시이다. 「겨울」에는 동요적 외형률 속에 동심적 발상이 잘 담겨 있다. 그 동심적 발상이 화자의 눈에 비친 겨울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그려내게 했다. 그것은 겨울의 연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친 그대로의 풍경이 계절의 감각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처마 밑에 다래다래 매달아 놓은 시래기와 길바닥에 달랑달랑 언 말똥으로 인해 겨울이 더 추워 보이는 겨울날 동심의 감각을 표현해 놓았다는 뜻이다. 「거짓부리」는 검둥이가 꼬리로 문을 열어달라고 ‘똑 똑 똑’ 두드린 행위와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꼬끼오’ 하고 운 행위에 모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동요시는 두 동물의 행위와 그 행위에 속은 화자의 이야기를 1연과 2연의 대구로 짝을 맞추어 놓았다. 이 같이 대구의 짝을 이루는 형식으로 감각이나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동요시는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던 일반적 유형이다. 윤동주는 이 같은 형태의 동요시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폭넓게 창작해 왔다. 「기왓장 내외」, 「버선본」, 「산울림」, 「애기의 새벽」, 「햇빛 ․바람」, 「해바라기 얼굴」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동요시는 동요 양식에 동시적 기법이 혼재된 당시의 새로운 시적 양식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이 두 양식의 형태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자신의 시적 특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동요시로 「호주머니」를 꼽을 수 있다.
넣을 것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이 되면/주먹 두 개/갑북갑북
―「호주머니」 전문
「호주머니」는 1936년 4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7개월을 보내다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면서 왕성하게 동요시를 창작하던 무렵에 씌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때 연길에서 발간되던 『가톨릭 소년』에 「병아리」(1936. 2), 「빗자루」(12월호) 등을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투고할 만큼, 1936년대는 윤동주가 동요시를 활기차게 창작하던 시기였다. 윤동주가 남긴 대략 35편의 동요시 중, 이 한 해에만 절반이 넘는 20편의 동요시를 쓴 것을 미루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호주머니」도 시간적 배경이 겨울이다. 겨울은 북방의 혹독한 추위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결부되어 비극적 정황을 연상시키는 계절이다. 이 동요시는 그런 지역적, 시대적 혹독한 추위를 녹여주는 따듯한 동심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대칭되는 대구(對句)적 방식에서 벗어나 내용을 장면화한 특성까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호주머니」는 평상시 넣어 둘 것이 없는 가난한 시적 화자의 호주머니도 겨울이 되면 오히려 두 주먹을 넣어 풍족해졌다는 역설이 빛나는 동요시이다. “주먹 두 개/갑북갑북” 할 때의 앙증스러운 질량감이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극도로 맑고 섬세한 심성을 담아 놓은 윤동주의 이 동요시는 시심의 바탕이 바로 동심의 세계이다. 그 이후 윤동주의 동요시는 점차 시성을 회복하면서 자유로운 형식에다 대상의 의미를 이야기성으로 드러내는 시형으로 나아갔다. 이렇듯 윤석중과 정지용 등의 동요․동시를 답습해 오던 윤동주가 「호주머니」를 통해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지닌 동요시를 선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귀뚜라미와 나와」도 그 좋은 예에 속하는 동요시이다.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귀뚤귀뚤/귀뚤귀뚤//아무게도 아르켜주지 말고/우 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귀뚤귀뚤/귀뚤귀뚤//귀뚜라미와 나와/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 「귀뚜라미와 나와」 전문
모두 5연으로 이루어진 「귀뚜라미와 나와」는 1938년에 쓴 동요시로 정형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 위에 어떤 시적 의미를 제기하고 있다. 귀뚜라미는 반가운 가을의 전령이다. 푹푹 찌던 무더위가 끝날 무렵, 슬며시 우리 곁을 찾아와 가을이 오는 것을 제일 먼저 알려준다. 귀뚤귀뚤 울음소리는 제 짝을 찾는 소리 신호이지만, 우리 귀에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들린다. 가을밤이 되면, 방안에 있어도 맑은 선율이 창틈으로 날아든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무슨 영문인지 달 밝은 밤 잔디밭에 나가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 아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또 서로 나눈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말고 오로지 둘만 아는 비밀로 해두자고 약속까지 해둔다. 귀뚜라미와 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토록 은밀히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이 동요시는 ‘귀뚤귀뚤’ 고요를 깨우는 의성어가 2연과 4연에 반복되면서 정말 귀뚜라미와 나와 밀담을 나누는 듯하다. 마음 놓고 별을 노래할 수 없었던 시인이 달밤에 잠들지 못하고 가을의 전령에게 무엇을 그렇게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라를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뇌하던 시대,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랐고,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고대했었다. 아마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던 시인이 일경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하다 해방을 앞두고 29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만 사실을 상기한다면 가을밤 그 은밀한 사연이 더욱 가슴 아리도록 아프게 다가올지 모른다. 가을밤이 깊어갈수록 그 작은 생명이 내는 맑은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오는데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서울 생활을 하던 윤동주는 그 뒤―1941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못 자는 밤」 1편을 남기고―더 이상 동요시를 쓰지 못한다.
작품 연보에 따르면, 윤동주는 겨울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많은 동요시를 창작한 특징을 보여준다. 제재 또한 겨울이라는 계절의 정황을 정서적으로 담은 동요시가 유독 많다. 아마도 그것은 겨울이 되면 혹독한 추위를 몰고 오는 용정이라는 북방의 지역적 특성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따뜻한 동심으로 녹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만큼 천진무구한 동심은 겨울이란 비극성까지 무장 해제시키며 깊은 울림을 준다. 윤동주 시에 나타난 현실을 직시한 진솔함도, 생명과 자연을 바라보는 깊은 눈의 형성과 자아 성찰도 그런 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동심은 삶의 순수한 원형질인 까닭이다. 이처럼 순수한 동심의 눈으로 시적 사유를 담아낸 단순 간결 명쾌한 윤동주의 동요시는 해방 이후 한국 동시문학에 형태의 자유로운 변이와 사유의 깊이에 대한 시적 충동을 불러오며, 최계락 등의 형상 동시가 출현하는 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
5. 맺음말
한국 동시문학은 최남선의 《소년》지로부터 100년의 문학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동시문학 100년은 양식화의 과정이며 시적 실험의 역사라 평가할 만큼 다양한 시적 성찰로 이루어졌다. 그 시적 성찰은 1920년대 중반 창작동요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창작동요는 가창 동요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 뒤 1930년대 가창 동요에서 동요시, 동시, 동화시 등 새로운 시형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분출시켰고, 독자 연령층을 고려하여 1926년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년시라는 용어도 생겨났으며, 1930년에는 유년동요, 유년동시로도 분화되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시적 성취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윤석중의 동요와 정지용의 동시로부터 1930년대 중반 새로운 정형시형인 동요시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윤동주는 1936년부터 1938년에 이르는 시기, 꼭 3년간 집중적으로 동요시를 쓴 시인이다. 그 무렵은 가창 동요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형의 동요시, 동시, 동화시가 함께 선보이던 시기였다. 윤석중, 정지용, 강소천, 박영종 등과 더불어 윤동주의 동요시는 해방 이후 한국 동시문학에 강한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시적 실험과 시적 양식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동요시가 동요와 동시의 장르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 동요 양식에 시적 성찰의 전기를 마련해준 까닭이다. 곧 동요시는 정형률 안에서도 대상이나 정황을 이미지화하거나 장면화하는 시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해방 이후 최계락 등의 형상 동시가 등장하게 하는 가교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30년대에 촉발된 동요에의 시적 충동이 해방 후 다양한 시적 실험과 시적 양식의 확장으로 이어졌는데, 바로 윤동주의 동요시는 1930년대 한국 동시문학사의 시적 성취의 그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동주가 남긴 동요시가 비록 강소천의 『호박꽃 초롱』같이 한 권의 동요시집으로 묶여 세상에 널리 알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동요시를 단지 습작기의 한 과정으로 치부하거나 그의 시 해석의 한 방편으로 혹은 그런 맥락 안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더더욱 “유아기에로의 퇴행”14)이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한국 동시문학도 자립적으로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엄연히 존재해온 시문학의 한 갈래이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시문학사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주:본문은 윤동주 옥사 65주년 기념 윤동주시포럼(2010.6.27.중국연길)에서 발표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