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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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의 품으로 여행을 떠나다 댓글:  조회:995  추천:1  2017-09-20
여행의 시대가 열렸다. 2011년부터  북경자금성의 일일 여행객 방문수를 부득이하게 8만명으로 제한을 했다. 제한하지 않으면 자금성에 매일매일 세계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얼마나 들이닥칠지 모를 지경이다. 그도 그럴것이 자금성의 한해 방문객수는 1500만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자금성만 그렇겠는가. 서안 병마용은 2015년 한해만 해도 560만의 관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번에 갓 지난 청명휴가때 위챗에 올라온 태산여행지 등반사진을 보니 사람들의 빽빽한 정도가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태산자락에서 공중부양을 하는듯 인간파도에 밀려서 출렁이였다. 위태롭고도 행복한 여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국은 지금 여행의 시대가 열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적이고 생산적이던 사람들은 이젠 향락과 탐구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높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들처럼 사람들은 너도나도 여행을 떠난다. 우리 주위를 보더라도 휴가철만 되면 친인척들한테 연락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족단위로, 부부동반으로, 협회모임으로, 단촐한 배낭여행으로 형형색색의 여행으로 위챗모멘트를 도배를 한다. 지인들의 가족들이 황산으로 유럽으로 일본으로 한국으로 유명한 명승지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찍은 가족사진을 볼 때마다 너무 부럽다. 이 와중에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것은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이다. 그럴듯한 유람지 풍경은 내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한테 안겨오는것은 환하게 웃는 사진속의 가족들의 얼굴이다. 그들은 식구들이 함께 날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가. 나도 새처럼 가족과 함께 여기저기  높이 날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갓 결혼하고 애들이 어릴 때 자기일에만 집중하고  여행을 극도로 싫어하던 남편은 항상 휴가때마다 바이어접대에 친구의리에  가족여행은 뒤전이였다. 언제나 나혼자 애들을 데리고 애기엄마들과 같이 팀을 묶어서 가까운 곳으로 자녀동반 여행을 떠나곤했다. 그리하여 마음 한구석은 남편과 같이 네식구 어디론가 가서 진정한 여행을 다녀보고 싶었다. 콩밭에 소 풀어놓고도 할말이 있다고 남편은 항상 이제 여유가 생기면 시간이 나면 꼭 같이 가주리라고 얼렁뚱땅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내가 애들을 데리고 여행을 간적도 있었고 나랑 남편이랑 둘이서 출장을 겸해서 여행을 한적도 있었지만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다 못 채운다고 나는 그래도 우리 네식구가 정말 여행이라는 이름 두글자를 신성하게 내걸고 참다운 여행을 하고 싶은것이 소원이였다. 여태 풀리지 않은 이 소원은 애들이 성큼 커버린 오늘 또 다른 변고가 생겼다. 머리가 커지고 목젖이 두툼히 나온  우리 애들은 이젠 엄마 아버지를 찾지도 않고 잘 다니던 잔치집 환갑집도 같이 가주지를 않고 여행을 가자고 하면 사시나무 떨듯  신나게 손사래를 친다. 같이 가자고 애걸복걸해도 눈빛이 컴퓨터에만 꽂혀있다. 귀찮다고 자기네 친구들하고 노는게 제일 재미있단다. 그렇다면 나의 가족여행은 이젠 다 물건너갔단 말인가. 여행을 가서 온집식구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일은 물거품으로 되였단 말인가. 실망에 포기에 두루 마음을 접고 있던 어느날 집 정리를 하다가 두툼한 사진첩을 찾아냈다. 우리집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묵직한 사진첩이였다. 펼쳐서 보니 가족사진도 꽤나 있었다. 그것은 설때마다 고향에 있는 시댁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였다. 애들이 서너살쯤 되던 설날에 동북시골의 찌그러져가는 오두막집앞에서 우리 네식구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며 집안 부뚜막에 앉아서 불을 때고 있는 우리식구 사진도 있었다. 그때 우리 애들은 석탄을 때고 풍구를 돌리는 일이 재미가 나서 하루종일 석탄을 퍼넣고 재를 퍼내는 일을 했었다. 펌프물을 시도때도 없이 잦기도 했다. 어느 한해는 우리가 청도에서 해물을 한박스 준비해서 간적이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뻐스를 환승하고 또 택시를 바꾸면서 강풍과 추위를 무릅쓰고 나이 어린 애들 손을 잡고 힘겹게 그믐날 시댁에 도착했다. 이튿날 설날 아침에 대게며 새우며 참치며 조개며 청도에서 가져간 해물에 또 시어머니가 준비한 여러가지 푸짐한 설 음식들로 상다리는 부러질것만 같았다. 그 상을 중심으로 우리식구는 물론 대 가정이 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로 사진첩 여러장을 메웠다. 아주버님들과 그리고 형님들과 조카들이 마작을 하는 사진들도 있었다. 돈을 땄는지 다들 싱글벙글 웃고 계셨다. 남편의 효성을 본받아 설마다 할머니를 찾아뵙는 우리 애들도 이젠 설이 되면 의례 할머니 보러 가야 하는줄로 알고 있다. 세월이 흘러 최근 3년은 설마다 한국에 부모형제들이 모여서 설을 쇠고 있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시어머니와 우리 남편 삼형제의 가족과 그리고 시댁친척들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모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설날 아침 20여명이 총동원하여 사진관에 호호탕탕 쳐들어가서 처음으로 제일 완벽한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날 78세의 시어머니도 립스틱을 빨갛게 칠하시고 큰 손녀가 발라주는 분을 곱게 바르시고 만족하고 행복한 웃음으로 가운데 앉아서 자녀들의 포위속에 찰칵소리를 들으면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가족여행을 전혀 아니 다녀온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해마다 가족의 품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던셈이다. 여행이란게 따로 있는가?! 도시에서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는 아마도 설이라는 축복의 티켓으로 가족여행을 해마다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설날의 여행속에서 멋있는 풍경보다는 효도로 우리의 에너지는 더 충만되였다. 하늘을 높이 나는 새도 먹이는 땅에서 얻는다고 설날의 여행속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멀리 떨어진 친인들과의 그리움을 달래고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사회 각곳에서 부딪치는 희로애락을 들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슴으로 느끼고 맛있는 엄마표 고향 음식을 해먹음으로써 우리는 허기진 마음을 탄탄하게 하였다. 우리가족은 올해도 여행을 간다. 설쇠러 가는 여행길에  높이 하늘을 날을것이다.
2    초원의 품격 댓글:  조회:1327  추천:1  2017-09-20
지난 7월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일행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청해성으로 문학탐방을 떠났다. 청해성 수부 서녕공항에 도착하니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홍철작가가 이미 마중을 나와계셨다. 서녕은 청해성의 성도이며 면적이 7000여 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데 비해 인구는 겨우 220만에 불과했다. 산동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청도는 면적이 11000평방키로메터에 인구가 900만을 웃돌고 있으니 서녕은 그야말로 한적한 동네라고 할 수가 있겠다. 서녕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물에 씻은 듯한 흰구름들이 따가운 해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흘러다녔다. 첫날인만큼 고산반응에 적응하고자 가볍게 이홍철작가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회포를 풀기로 했다. 우리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친히 연어회까지 두둑히 떠놓은 상황이였다. 해발이 3000메터를 웃도는 청정지역에서 자란 연어회는 그야말로 별맛이였다. 입에 들어가는 즉시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뭐니뭐니해도 서녕에 왔으니 양고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우리는 한가득 삶아놓은 양고기를 맛보며 찰칵찰칵 소리와 함께 즐거운 기념사진을 남기면서 서부문학탐방의 문을 두드렸다. 이틑날부터 청해성을 알기 위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였다. 이틀동안 청해성을 종횡무진하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과 구릉지대 그리고 드넓은 사막이 인상적이였다. 소형 도시가 오아시스마냥 가끔 나타나서 인기척을 알려 마냥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들린 곳이 타얼사(塔尔寺)였다. 라마승들의 빨간 누데기승려복이 인상적이였다. 머리는 까까머리였고 긴 도포처럼 온몸을 감싼 빨간색 승려복은 고온의 날씨에 아주 더워 보였지만 하나같이 단정하게 옷매무시를 해서 입고 다녔다. 타얼사안에는 장족의 민족복장을 입은 현지인들을 많이 볼수 있었는데 녀자들은 치렁치렁 쌍태머리를 길게 드리워서 끝부분에서 한줌으로 묶고 머리우에는 각종 짐승뿌리로 만든 장신구들을 알록달록 달고 다녔다. 까만 두건을 두르고 얼굴만 내놓고 다니는 녀자들도 많았다. 우리는 타얼사에서 여직 말로만 들어왔던 오체투지(五体投地)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오체투지는 중생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예법이다. 스스로 고통을 겪으면서 수행을 하는 방법으로써 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땅에 엎드려 이마까지 땅에 닿게 하는 절이다. 서장에서는 매년 신도가 오체투지를 하면서 몇십킬로를 수없는 날을 견디며 성지에 순례를 하러 다녀온다고 한다. 타얼사에서 본 오체투지는 많은 중생들이 얼굴에 참뜻을 내비치며 불상이 있는 곳을 향해 오체투지 절을 행하는데 매일 삼천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백팔배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은 한번을 와서 며칠씩 심지어 몇달씩 례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배를 통해 가족이 평안하고 초원이 평화로우며 양떼들이 씨엉씨엉 자라나기를 기원한다. 신앙의 힘이란 어마어마한 것이다. 타얼사의 묵직한 믿음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해발 3200메터우에 덩그러니 떠있는 면적이 싱가폴의 4배가 되는 거대한 청해호를 향해 떠났다. 멀리서부터 파아란 바다수평면처럼 흐늘흐늘 춤을 추는 보일락말락 청해호가 보였다. 그렇지만 다가가려면 쉽지 않았다. 장장 세시간남짓이 초원을 달려서야 청해호의 진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새노란 유채화가 띠를 두른 듯 해빛의 세례를 잔뜩 받고서 아름다움을 출렁이였다. 청해호의 파란 수면은 거대한 초원우에 박아놓은 푸른 진주마냥 반짝이였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안스럽게 낮게 자라난 풀들이며 가파로운 돌산우에서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전긍긍하는 양떼와 야크무리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장막을 띄염띄염 지어놓은 숙박촌들을 많이 보였다.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장족처녀가 시집을 가려면 가족의 장막외에 작은 장막을 옆에다가 지어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길가던 남자가 들어와서 하루밤을 같이 보내고 마음에 들면 데려가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번을 거쳐서 시집을 가는 경우가 많아서 그사이 애들도 태여날수도 있다. 당연히 결혼할때는 애도 같이 데려가는데 친자식처럼 잘 키운다고 한다. 아마도 드넓은 초원에서 살아가려고 원초적인 삶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사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미리 듣고 아주 마음이 아프고 고민스러웠다. 인간의 품격은 어디 갔냐고. 당나라때 라싸지역의 토번이 번성해지자 당태종이 부득이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시집보내야 했을 때 지나갔다던 서녘땅의 초원이다. 문성공주는 장안에서 여러달을 거쳐 서녕 일월산에 도착한 후 장안을 뒤돌아보며 울었다고 한다. 그곳은 청장고원과 내륙을 잇는 중요한 전략위치에 처해있다. 번화하고 문명한 장안에서 온 문성공주도 나처럼 이런 생각때문에 가슴이 아파서 울었을가. 하지만 청해호를 본후 내 생각은 달라졌다. 핸드폰 신호마저 없는 척박한 초원의 품에서 청해호는 청해의 품격이였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가 갔을 즈음 세계자전거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세계 방방곳곳에서 알록달록한 선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360킬로메터나 되는 청해호 해안선을 둘러싸고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흥분하거나 뜀박질을 해도 숨이 차서 고산반응이 심한 그곳에서 선수들은 열흘남짓한 시간을 들여 완주를 해야 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르른 하늘과 청해호 그리고 띠를 두른 유채꽃만이 보이는 그곳에서 구름떼와 양떼들의 주목하에 환상의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날 찾아간 곳은 차카염전이였다. 조물주는 여러가지 색갈을 가지고 부동한 작품을 내놓았다. 눈부시게 반짝반짝거리는 소금천지 차카염전은 그야말로 일망무제하다. 그 일망무제한것이 다 소금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찢어버렸다. 마치 할빈의 눈조각공원에 들어온 느낌이였다. 흰 소금으로 녀신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작은 산봉우리 심지어 궁전도 지어놓았다.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산에 가면 케블카를 타듯 염전안에서는 기차로 손님들을 부지런히 실어날라야 했다. 사람들은 새하얀 소금을 배경으로 새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찐한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해볕도 쨍쨍 내리 비추고 거기에서 염전이 반사되여 눈이 부셨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을 못뜰 정도였다. 우리에게 너무 멀고 생소했던 청해성이고 서녕시였다. 이번 탐방을 통해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우량이 적고 해발이 높은 관계로 알칼리산이 많은 이곳에 의외로 그 품격을 지키고 있는 지존의 경치가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 만족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여러가지 색갈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제일 알맞게 색칠하고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은 존경받을 일이다. 그러기에 열심히 우주에 자기의 발자취를 남기려 노력하는 모든 사물은 자신의 품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칼있으마 댓글:  조회:1974  추천:2  2017-09-19
수필 칼있으마 김영분 “카리스마”라는 말이 있다. 흔히 리더를 평가할 때 이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고 집행력이 뛰여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신의 은총”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을 말한다. 어느 특정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게 하는 특징으로써 한마디로 남들보다 정의롭고 끌어당기는 힘이 세고 강하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 세대 위주로 “카리스마”가 우리 말로 “칼있으마”로 변형되여 유행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경한 느낌이였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마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카리스마”가 그리스어라면 “칼있으마”는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이다. “칼있으마” 는 더 형상화하게 우리말 풀이로 그의 참뜻을 나타냈다. 글귀가 반영한 그대로 칼을 거머쥐고 결단력있고 막강한 힘으로 팀을 끌어가고 있는 모습이 한편의 액션영화처럼 한눈에 안겨온다. 나한테 이런 “칼있으마”가 있을가. 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싶어했을가. 마흔에 들어서면서 젊어서 누리지 못했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풀쩍이는 메뚜기처럼 툭툭 튀여나온다. 특히 카리스마를 가지고 싶었다. 어릴 때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가. 걷잡을수가 없다. 어릴 때 고분고분하기로 유명했던 나, 평범하기로 청도 바다가의 백사장에서 움켜쥐면 실실 빠져나가는 한톨의 모래와 같았던 나다. 외우기를 잘해서 문과는 자신이 있었지만 틀려서 남들이 웃으면 어쩔가 하는 생각에 손도 못들었던 나다. 수학이 너무 어려워 수학선생님을 만나면 가던 길도 에돌아 갔던 나다. 혹여나 선생님이 관심을 보이면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쥐구멍에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었던 그때 그 심정을 한폭의 그림으로 표현을 한다면 아마도 큰 산앞에 왜소하게 서서 죄없는 돌맹이들을 애매하게 툭툭 걷어차고 있는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 아닐가 생각을 해본다. 가난한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잦은 다툼, 사춘기 때엔 온 얼굴에 퍼진 주근깨와 다른 애들처럼 찰랑거리는 머리결을 가지지 못한 것이 내심 못마땅해 스스로 자신을 구석에 가두고 좀처럼 세상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주눅이 들어있으면서 언제나 밝게 웃으며 즐겁게 지내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왜 저들처럼 사랑을 받지 못할가?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원망만 할 뿐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당당함을 표현할 줄 몰랐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저 성실하게 정해진 규률에 따라 고분고분 살아가는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 덕분에 나는 늘 주위 사람들로부터 참하다는 평가를 듣고 살았다. 종래로 누구랑 다툰적도 없고 얼굴을 붉힌적도 없는것 같았다. 그저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나는 내면의 공격성을 꽁꽁 짖누르면서 나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이 모든것이 때가 되면 바뀌는 사계절처럼 내안에서 봄바람이 불고 가을 단풍이 여러번 우수수 흩날리면서 슬슬 변화가 온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해내고 싶었고 나를 인정해주고 싶었다.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책속의 인물들과 수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일제히 내게 평생을 행복해지게 하는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그중에서도 심플하게 살아야 한다는 프랑스작가의 말이 아주 인상깊다. 추구해야 하는 물질도 감정도 모두 심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많이 추구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여서 사람이 도리여 물질을 위해 헌신을 해야한다고 했다. 감정을 억누르면서 내가 하고싶은 말과 일을 남의 비위 맞추는데 사용한다면 자기 마음을 바줄로 동여매여 숨가쁘게 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했다. 심플한 감정패턴은 자기감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자기감정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이 점점 편안해진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원치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 자신이 생겼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해나가는것이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일인지 깨달았다. 나 자신을 긍정하고 응원하는 힘이 생겼다. 어릴 때의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웠는지 예전의 나를 꼭 안아주고 훨훨 날려보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도 매우 바쁘다.누가 남의 일에 관심이 그리 많으랴.비로소 내가 무엇을 하든, 잘하든 못하든 비웃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것을 알았다. 재미의 세계가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는 많아지고 소심한 감정의 지배를 덜 받게 되였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인 동시에 감독이고 관객이다. 나부터 나에게 박수를 보내니 점점 나를 위해 응원해주는 관객들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강사공부도 곁들였다. 얼마전에 육아에 관한 주제로 여러 엄마들에게 두시간동안 씩씩하게 아이의 애착에 초점을 두어라는 강의도 했었다. 내가 강단에 섰다고 하니 학교시절 친구들이 나의 새로운 모습에 많이 놀라는 것이였다.그들뿐만아니라 사실 나자신도 놀랐다. 수업시간에 손 한번 들어도 식은 땀을 쏟던 나였기에,나는 나안에 이런 용암처럼 뿜어져나오는 용기가 있을줄 생각도 못했었다. 웅크렸던 세월만큼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동기는 강했다. 내가 살아온 매 한순간이 헛되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 쏟아붓고 있는 이 열정은 아마도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놓친 노력의 순간들을 보상하고 싶어서가 아닐가.주눅든 세월을 보내고나니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졌다. 온화해졌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끝없는 활기가 생겼다. 문득 누군가가 나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여유롭게 온유하게 그리고 “칼있으마”가 넘치게. 뭐라고. 나에게 “칼있으마”? 에이. 설마 하면서도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칼은 최대한 작은 면에 힘을 집중하여 자기가 자르려고 하는 것을 자르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무에게도 쉽게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것에 열정을 집중해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성실하고 꿋꿋한 모습이라면 나 역시 “칼”과 조금은 닮은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으리으리하고 권력있는 집에서 태여난 아이를 “금수저를 물고 태여났다”고 한다. 금수저는 참말로 신의 은총이였을가. 나한테는 은총이 없었던것일가. 아니였다. 신은 금수저대신 나에게 나만의 칼을 쥐여주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그 “칼”을 좀 늦게 찾았을 뿐이다. 신은 오래전부터 매사람마다 칼을 다 주셨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기에게만 속하는 성공으로 이끌어갈수 있는 “칼”이 보일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은총을 빨리 찾아내길 바란다. “칼있으마”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나만의 특유한 부드러운 “칼있으마”를 계속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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