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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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참된 갑 댓글:  조회:548  추천:0  2020-03-19
수필 참된 갑 김영분     제조업에 몸 담은지 거의 스무해가 되여간다. 그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품들이 우리 회사 동료들의 손을 거쳐 세계 방방곡곡으로 전해졌다. 제품 하나를 기획하고 샘플을 만들어 그 효과를 가시화하고 그 뒤엔 바리바리 생산을 해서 소비자의 손에 전달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어린 정성과 숨겨진 노고가 스며들어있다. 소비자는 상품이 필요하고 상품을 만들려면 제조업체가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 그런데 량자는 보통 강을 사이 둔 련인처럼 에이젠트라는 건널목 회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만나게 된다. 즉 우리가 흔히 부러워하는 갑질하는 바이어이다.  바이어는 제조업체에 오더를 주고 제품을 받아서는 소비자에게 파는 일을 맡아한다. 제조업을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바이어가 상전이다. 왜냐 하면 바이어가 내려주는 오더는 우리 몸에 흐르는 피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더가 많이 내려져 계곡물 처럼  콸콸 흐르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일인지라 미지근하게라도 가늘게 길게  흘러주길 바랄 뿐이다. 그것마저 파투가 나서  흐르다가 물줄기가 마르게  되면 회사는 기름 떨어진 자동차가 되여 끽하고 멈춰야 한다. 회사의 이런 난감한 상황을 꿰뚫기라도 한 듯 밉상인 바이어가 한 둘이 아니다. 샘플만 가득 시켜놓고 컴품이 합격되여 오더가 성사되면 가격을 더 깎으려 드는 바이어는 아주 량심이 있는 편에 속한다. 가격을 좀 내려주소 하고 일정한 실랑이를 벌인 뒤에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오더는 그나마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샘플 만들 때부터 눈여겨 온 제조과정에서 불거져 나올 여러가지 미쓰들을 미리 념려해두었기에 생산 도중에서 꼼꼼히 체크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제조업체는 오더 가격은 다소 섭섭하더라도 생산의 의무를 다 할 수 있어 뿌듯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샘플개발비를 뺀 싼 가격에 오더를 진행하고 자기 리익을 더 많이 챙기려는 치사한 사람도 있다. 내가 저주를 퍼부은 건 아니지만 이런 바이어와는 이상하게도 새끼처럼 일이 자주 꼬인다. 샘플개발은 한 사람의 몸에서 머리에 해당한다. 만드는 법과  자재 사용의 적절한 도를 머리가 알고 있다. 팔 다리가 아무리 날렵해도 머리를 쓰지 않고서는 날아가는 새를 잡지 못하는 법이다. 근육질이라 건장하다고 믿었던 팔 다리를 허우적대다가 날이 가고 밤이 깊어간다. 불량품이 산출되고 납기가 지연된다. 그러면 저 멀리 바다 건너  바이어한테 묵직한 박스들을 비행기에 태워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운송비용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른다. 제조업체는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식이 되여 맹랑하고 바이어는 지붕에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허공에 몸을 던진 닭이 되여 푸드득거리다 맨땅에 헤딩하고 만다. 요즘 처럼 윈윈하는 세상에 맛있는 커피잔을 부둥켜 잡고 있다가 떨어뜨려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안타깝다고 하면 무드있는 표현이고 실제로는 아주 배 아프고 꽤씸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외에는 일을 잔뜩 시켜놓고 결재를 차일 피일 미루는 밉상 바이어도 있다. 그나마 그룹이라는 명칭을 내건 큰 회사라면 비교적 후날에라도 결재를 후딱 해준다. 부자는 망해도 삼년 먹을 것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헌데 운이 밑바닥을 내리 칠 때는 제일 밉상 바이어를 만난다. 작정하고 잠적하거나 련락 두절이거나 경기 탓으로 돌리고 부도내는 회사들이다. 길 가다가 돌을 걷어찼다고 혼자 발을 끌어안고 호호 거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조심했어야지 하는 자책감때문에 피고름을 짜내여 봉급을 다 주고도 힘들게 일한 동료들 보기가 미안해진다. 누구에게나 몰부었던 정성과 시간들은 누구한테나 모두 값진 것이다. 그 대가가 가시화 되지 않을 때는 정말 화가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훌륭한 바이어는 조용하다. 두터운 얼음 밑의  물처럼 쉴새없이 흐르지만 넘쳐나거나 멈추는 법이 없다. 얼음장 속으로 정겹게 흐르는 한겨울의 시내물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회사는 물론 그 일을 에워싸고 작업을 하는 동료들의 삶에 안정제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일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가족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정된 령혼은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어낸다. 샘플지시도 프로답게 간단명료하다. 가격도 너무 싸면 그쪽에서 되려 긴장한다. 행여 싸구려 제품을 내여줄가봐 은근히 걱정한다. 생산 도중에 문제점을 미리 보고하면 끄트머리를 잡았다고 으시대며 훈계에 급급한 밉상 바이어들과는 달리 충분히 검토하고 같이 해결방법을 모색해준다.  결재도 종종 선불금으로 보내준다. 무릇 재정상황이 안정돼야 자기 제품에 들어가는 자재도 좋은 거로 사들이지 않겠느냐 하는 진실을 꼬집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내기도 한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이런 바이어들이 있어 퍽퍽한 일상에 따뜻한 위로가 감돌기도 한다. 이 상황들을 2대8원칙으로 생각하면 그리 신기할 일도 아니다. 무릇 바이어가 열이라면 둘은 상전 처럼 대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훌륭한 바이어인데다가 매출의 80프로를 거뜬히 차지한다. 나머지 여덟은 매출의 20프로를 겨우 메워주는 대신 엉겨진 실타래 처럼 잘 풀려지지 않는 고민거리를 80프로나 던져주는 일명 밉상바이어이다. 우리는 매일 갑과 을 사이를  실북처럼 드나든다. 우리가 갑질을 하는 바이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2대8원칙을 빌려 어떤 갑을 선택하고 어떤 제스츄어를 취 할 것인지 뒤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갑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만큼 갑에게는 권위가 있고 남다른 능력이 있다. 갑은 소수고 을은 다수다. 갑은 을을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기도 한다. 을에게 희망과 안정을 주기도 하고 더러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 소수가 다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갑이 되였을 때 훈훈한 파문을 일으켜야 행복한 소용돌이로 거침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켜 먹을 때, 옷 가게에서 옷을 살 때, 택시를 탈 때,우리 아이들을 훈계 할 때 우리는 어떤 갑이였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짝이는 반디불처럼 잠간이 아니라 두터운 얼음밑에서 쉬지 않고 흐르는 겨울 시내물처럼 다른 사람에게 안정감과 푸근함을 선사할수 있는 갑이면 좋겠다.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거늘 습관이 축적이 된 참된 갑으로 가는 길을 택하면 좋겠다. 신뢰와 행복이 춤추는 소용돌이로 퍼질수 있게 작은 돌맹이도 신중하게 호수에 던져주면 좋겠다.
42    바람 맞받아 나는 연 댓글:  조회:604  추천:0  2020-03-04
 바람 맞받아 나는 연 김영분   연말이 되니 회사는 무척 바빠졌다. 주문수량을 다 채워서 제품을 출고시켜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삐걱거렸다. 소형 하청업체들은 직원들이 하나둘 빠져 미리미리 고향에 설 쇠러 떠나다 보니 생산자가 턱없이 줄었고 남아있는 직원들은 급한 마음을 간신히 달래며 미싱을 돌려서 그런지 불량제품도 여기저기서 불거져나왔다. 다같이 협동을 생명으로 간주하며 일해왔을 협력업체들은 어쩌라고 자기 급한 것만 생각하고 시원히 협조도 해주려 하지 않는지 정말 애간장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그 와중에 어렵게 다 만든 제품도 검품을 거쳐야 배를 태워 내보낼 수 있는데 검사소에는 일정이 다 잡혀 우리 제품검사를 새치기해서 넣으려고 하면 하늘에 별따기였다.  어쩔 수 없이 얼굴에 기한이 다 돼가는 영양크림을 바르듯 웃음을 듬뿍 바르고 관리자가 아닌 현장 실무자에게 사정사정하면 큰 인심을 베푸는 것처럼 분명히 일이 바빠서 감지도 못했을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귀찮다는 듯 다음번에는 이런 편의를 절대로 봐줄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정말 다음 생에는 내가 출세해서 바이어 노릇을 하든지 검사소를 하나 차리든지 해야지 이런 눈치를 보면서 일을 계속 하나 두고 봐라 하면서 이를 부드득 갈아보지만 새날이 밝으면 또 비슷한 내용으로 전화를 받고 메일을 확인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정말 회사 일은 구만리 밖으로 차버리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앉아 살림만 하면서 알콩달콩 살아봤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들게 하는 연말이다.   드디어 한해 마무리를 불에 콩 볶 듯 투닥거리며 부산스레 짓고 설 휴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에 대한 근심과 고민은 많이 덜었고 쥐처럼 벌어 부자되는 경자년이 왔다고 서로서로 새해 인사를 나누며 설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한시름을 놓고 나니 어깨에 힘이 풀리면서 한해 동안 열심히 달려온 덕에 두 손도 마음도 한가득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 간만에 눈가에 웃음이 걸렸다.   헌데 기쁨도 잠시, 설레이는 설과 함께 뜬금없이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홍두깨마냥 우리 곁으로 불쑥 다가왔다. 바로 무한발 코로나 신종 바이러스이다. 한해 마무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느라 신종 페염이 어쩌고저쩌고 텔레비전이며 핸드폰에서 뉴스로 보내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흘끔거리기만 했지 이 신종 바이러스 사태가 전국 심지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중국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설기간에 빠른 속도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한을 전면 봉쇄 한다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한국영화 "감기"에서 분당에 흘러들어온 인플루엔자 감염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극단적으로 도시를 철통 봉쇄하는 대목을 보고 바이러스가 퍼지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 쯧쯧거렸는데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상주인구 천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실제로 봉쇄한다니 참말로 믿기지가 않았다.   무한을 전면 봉쇄하고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마스크가 패션이 된 듯 모두 얼굴을 감싸고 뜨거운 숨을 쉬며 집에서 조용히 격리하도록 권유하는 강력조치들을 바라보며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섬뜩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영화관이나 공원, 마트나 시장, 학원은 물론 커피숍, 식당 모두 예외 없이 영업을 중지했다. 아파트를 나서려 해도 방역복을 입은 경비들의 체온 체크를 받아야 하고 발열이 있으면 곧바로 집이 아닌 병원으로 보내진다니 서뿔리 바지가랭이 펄럭이며 다닐 처지도 안되었다.   어디에도 다니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있어라. 휴가도 나라에서 연장해줄 테니 안심하고 놀아라. 사람을 만나지 말고 자가 격리하는 것이 나라를 도우는 일이라니 두 눈과 두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당당하게 한가해지라는 요구는 또 처음인지라 어리둥절하고 의심스럽다가 나가지 말라는 말만 각인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며칠 전까지도 내가 그처럼 원하던 놀고 먹는 세상이지 않던가. 일이 바쁘고 눈코 뜰 새 없을 때는 모든 걸 확 제쳐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세상일 보지도 듣지도 않고 놀기만 하면 원이 없을 거라고 내내 중얼거리지 않았던가.   꿈꾸던 세상이 왔는데 손발이 묶인 것처럼 갑갑하고 불안한 이 기분은 왜일까. 정작 집에 한가히 앉아있으라고 하니 더 밖으로 향하고 싶어졌다. 임신 때 콜라가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바이러스가 살판을 친다고 하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 박혀 여유롭게 맛있는 밥 끓여먹고 위쳇 검열에 밀린 드라마까지 원 없이 보고 또 봤다. 꽉 조이는 외출복 입을 필요도 없이 헐렁한 잠옷에 허리가 늘어지도록 침대에 누워있으니 배불리 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잠도 실없이 찾아왔다.   얼마 안 지나 낮과 밤이 뒤바뀌고 하루가 48시간이 된 듯 더디게 지나갔다. 책을 봐도 흐리멍텅해서 무슨 내용을 봤는지 기억에 잘 남지가 않고 눈길은 왠지 모르게 자꾸 베란다쪽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하늘이 새파랗기로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공기도 상큼하고 쨍해서 손에 한웅큼 잡힐 것만 같았다. 마음은 밖을 향해 훨훨 날았다.   원하던 세상을 만났지만 즐겁지가 않고 밥맛을 잃을 정도로 별로였다.   의욕을 잃어버린 두 눈은 정기가 없이 흐릿해졌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은 줄 끊어진 알록달록한 연이 나무가지 위에서 힘없이 펄럭이듯 생기를 잃었다. 바람을 맞받으면 연은 힘겨워도 높이 날 수 있지만 줄이 끊어지고 바람이 잦아들면 땅으로 추락한다. 연이 연답게 살아가는 조건은 바람과 조여주는 줄이 있어야 한다.    며칠 안되는 시간이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설 전에 채바퀴 돌듯 바삐 보내던 시간들이 그리워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편히 쉬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지독한 허무함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힘들고 고민스러운 일이 많은 직장이지만 그 직장에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찾고 자기가 서있는 좌표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자기의 자리를 든든히 밟고 있어야 높이 솟고 멀리 뛸 수 있다. 남을 배려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으며 생동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조용히 구석을 지키고 있을 때는 몸은 편할 수 있지만 추락을 의미한다. 연도 나처럼 바람이 그리웁고 조여주는 줄이 고마웠을 것이다.   외부와의 관계 단절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온통 의문투성이로 만든다. 그래서 우울하고 방황하고 목표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게 된다.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사람은 관계망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지금도 뉴스 곳곳에서는 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의료일군들의 감동적인 사연들이 쏟아져나온다. 방호복을 오래 입고 있어서 땀투성이인 잔등과 땀에 허옇게 퍼진 두 손바닥을 보며 환자들을 위해 싸울 수 있어서 보람이 있다고 웃고 있는 병원 천사들은 이 시대의 영웅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오래 쉬고 있어서 한가하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일 텐데 이 설에 얼마나 식구들이 그리웠을까.    그들의 하루 빠른 일상 복귀를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바이러스전파를 막는 작은 일에 열심히 동참을 해야겠다. 집에서 방콕한다고 지루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의미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야겠다. 해보고 싶었던 요리도 만들어보고 요가도 따라해봐야겠다. 내 가족의 건강을 잘 지켜내고 이웃에게 병균을 전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우리가 다같이 이렇게 행동할 때 코로나 바이러스는 머지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이제 출근이 기다려진다. 바람 맞받아 날아오르는 연처럼 일하는 관계 속에서 활력을 얻고 더 탄탄해지리라.   (연변일보 2020년 2월)
41    바람 부는 날엔 산에 가지 말아라 댓글:  조회:615  추천:0  2020-03-04
 언제부터인지 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여가시간만 되면 산행팀을 따라 여기저기 산을 누비고 다녔다. 처음에는 야트막한 산도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올랐는데  차츰 다리에 힘이 붙었는지 꽤 높다하는 산도 거뜬히 오를 수 있었다. 산은 갈 때마다 천만가지의 얼굴을 가진 녀인처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봄에는 거무죽죽한 나무가지들에서 싱그러운 새움들이 발돋움을 하였고  울창한 숲 속에서 매미들이 넋 놓고 울어대는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었다. 가을에는 울긋불긋 수줍게 물이 든 단풍이 나무 잎을 불태우며 우리를 맞이했고 눈바람 흩날리는 겨울에는 우뚝 솟은 새하얀 동화세계를 두눈을  휑하니 뜬 채로 꿈꾸게 하였다. 산을 누비면서 장엄하고 푸근한 산 구경은 물론 울적해진 심경도 치유하고 힘들게 정상에 오른 후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겠다는 자부심도 생겨났다. 구슬땀을 흘린 후에 다정하게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참을 먹을 때는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는 흥분이 가슴을 맴돌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것 또한 하나 있으니 바로 산의 구석구석에 널부러진 쓰레기들이다. 산에 오를 때는 체력 보충을 위해 일정한 음식을 싸서 가는 경우가 많다. 소시지, 과자, 사탕, 음료수 등이다. 천근만근 누르는 몸을 움직여 산을 오르다 보면 체력이 금방 바닥이 나기도 하고 땀을 동이 처럼 쏟으니 갈증이 나는 것도 너무 당연하다. 그리하여 먹을 거리들을 가방 두둑히 싸서 가는데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다나면 이것저것 간식거리들을 가방에서 위장으로 이사를 간다. 그러다나면 자연히 플라스틱 포장지들이 쓰레기로 나온다. 거기다가 점심상으로 푸짐히 차려놓고 먹고 나면 더 많은 쓰레기들이 줄쳐서 나온다.  우리 팀원들은 자체 쓰레기 봉투를 준비해서 하산할 때까지 귀찮아도 들고 다닌다. 그리고는 적절한 장소에서 쓰레기를 처분한다. 우리 팀원들 처럼 자체 쓰레기를 깨끗이 관리해주는 팀들도 무수히 많겠지만 구석구석에 흉물스럽게 버려진 쓰레기들이 너무 많다 보니 산에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얄미운 생각도 슬그머니 들 때가 많다. 눈여겨 보니 장기적으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복장이나 장비도 잘 갖추었고 등산매너가 다소 훈련되여 있다. 어쩌다 산을 찾았다거나 상습적으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이라면 등산매너부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등산의 진정한 의미는 목적지에 서둘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려정의 매 순간을 즐기고 감동하고 느끼는데 있는데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는 것을 볼 때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 어느 분인지 안타깝게 공연히 힘만 빼고 갔구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소부가 아무리 부지런한 들 어찌 높은 산까지 와서 구석구석을 청소해주랴. 산길 또한 갈래갈래가 많기로 어찌 그 많은 곳을 샅샅히 살필 수가 있으랴. 가끔씩 산 구간마다 쓰레기통을 고풍스런 나무 모양으로 세워놓긴 했는데 쓰레기를 잘못 버렸는지 아니면 잘 버려진 쓰레기가 바람의 힘을 빌어 밖으로 기여나왔는지 그 주위가 스산하고 지저분하다. 푸른 숲에 흰 플라스틱봉지들이 게발려 유난히 사람들의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산에 쓰레기는 무겁지가 않다. 거의다 음식포장용 플라스틱이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쓰레기도 많다. 어느 나무가지에 볼썽 사납게 걸리면 그는 바람 불 때 마다 펄럭이며 쓰레기 버린 자를 성토하고 있다. 침 튕기며 어느 높은 산에를 다녀왔다고 자랑 할 때 만약 쓰레기를 그 산에 버리고 왔다면 바람 부는 날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에 높은 산에서는 쓰레기봉투가 나무가지에 걸려 거세게 펄럭거리며  량심의 성토를 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헌데 한국의 내장산을 다녀오고는 저으기 놀랐다. 그 산에는 쓰레기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산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숲과 청결한 오솔길만이 발밑에 펼쳐졌다. 풀냄새가 그윽한 맛 좋은 공기와 눈이 시원하도록 펼쳐지는 록색의 동산이였다. 그것도 산 밑에만 쓰레기통이 띄염띄염 보일 뿐 산길에는 쓰레기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등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쓰레기봉투를 가방 뒤 고리에 달고 다녔다. 옆구리가 터진 듯한 쓰레기통 주위 지저분한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황산은 중국의 5A급 풍경구로서 산경치도 천하제일이라는 명산에 걸맞게 장엄하고 준수했다. 굽이 굽이 산봉우리 사이를 감돌면서 겹겹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에 황홀한 마음을 쏙 빼앗기기도 했고 하늘을 찌르는 듯한 련화봉과 함께 두손을 들고 감탄을 쏟아내기도 했다. 등산길 내내 여느 산과는 달리 아주 깨끗했다. 청소부들이 자주 눈에 띄였고 아기자기하게 돌로 조각한 쓰레기통도 품위있게 여기저기 점잖히 앉아 등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상이 제일 깊은 것은 해발 1864메터인 황산에서 제일 높은 련화봉에까지도 깜찍한 쓰레기통을 돌로 조각해놓았다. 어느 황제 같은 손님이 황산 톱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왔을지 그리고 힘겹게 청소하려 올라오는 청소부아저씨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올라야 거기까지 올 수 있는지 참으로 아이러니 했다. 무거운 짐도 아니고 산에 올라오는 사람은 자신의 쓰레기만 잘 관리하면 되는데 재력과 인력을 투입해 거대한 사업을 벌이는 것이 리해가 되지 않았다. 모기를 잡으려 기관총을 뽑아들었다면 비유가 걸맞을가 싶었다. 개혁개방의 힘을 입어 힘차게 경제를 발전시킨 대가로 지금 중국은 환경오염의 크나큰 열병을 앓고 있다. 하천은 물론 농경지까지 오염되였고 가축은 물론 사람도 그 피해를 입고 있는 중이다. 등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에는 등산이 사치였지만 지금은 차츰 문화와 스포츠로 눈길을 많이 돌리기에 등산인구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났다. 산마다 일요일이면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쓸어가고 있을 때 등산 매너 또한 시급히 보급해야 한다. 민간단체에서 띄염띄염 쓰레기수거라는 테마를 내걸고 등산을 조직하는 것을 보았다. 산마다 쓰레기통을 늘리고 청소부를 투입한다 해도 문제 해결에는 가뭄에 물 한잔일 뿐이다. 한국의 내장산은 쓰레기통이 하나도 없었지만 깨끗하기로 푸른 숲만 훼이훼이 펼쳐졌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소량의 쓰레기를 잘 관리해준다면 우리의 산은 아름다운 본연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펄럭대는 량심의 성토도 줄어들 것이고 쓰레기통 주위의 지저분한 양상도 개선될 것이다. 다 큰 아이에게 따라다니면서 밥을 먹여주는 것보다 혼자 먹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하 듯 등산객들도 누군가의 뒤치닥거리보다는 자률적으로 쓰레기를 관리함으로써 진정한 등산인으로 거듭난다. 그래야 바람 부는 날에도 산에 갔다 왔노라고 마음껏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40    불면의 밤 댓글:  조회:754  추천:1  2020-01-10
수필 불면의 밤 김영분     요즘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 드라마 방영중 화면 한켠으로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드라마내용에 대해 댓글을 달수 있었다.오래전부터 있었던 기능이였겠지만 드문드문 드라마를 접속하는 나에게는 꽤나 신선한 발견이였다. 내가 만약 드라마 시청중 이런 신기한 발견을 했다고 댓글을 달았다면 기필코 나이를 폭로하는 댓글이라고 재치있게 지적해주는 네티즌들도 있었을 것이다. 화살처럼 총총히 날아다니는 댓글중에 혹자는 어느 배우의 연기에 탄복한다느니 혹자는 어떤 인물이 눈이 뒤집혀지게 꼴불견이라는 네티즌도 있다. 착한 배역을 왜 죽게 놔두었냐고 격하게 항의를 하면서 질의하는 사람도 있으며 드라마와 상관없이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면서 용감하게 자막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현재 몇만명이 같이 시청하고 있다는 인원수도 제시하고 있으니 소속감이 중요한 이 세월에 외롭고 고독한 밤을 보내기에는 딱이였다. 혼자가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같이 한 배우에게 열광을 하고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스토리 전개에 골똘히 정신을 팔고 있으니 말이다. 나만 밤잠을 패면서 허무하게 드라마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수만명이 같이 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나름 허송세월에 대한 죄책감도 적어졌다.  아마도 고통은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눌 때 훨씬 작아져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댓글 기능이 신기하여 드라마를 보면서도 댓글을 슬쩍슬쩍 곁눈질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보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였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 댓글이 나타나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그런데 그것이 점차 습관이 되여 댓글창을 열어놓지 않고 드라마를 보면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다른 네티즌들은 내가 지닌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감동되는 장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지 코미딕한 배우의 등장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등 점점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심지어 댓글이 적으면 이 드라마가 별로일거라는 생각도 밀려왔다. 드라마가 끝나도 강물처럼 흘러가는 댓글들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배웅하는 습관도 생겼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대도 가만두지 않는다고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 스토리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의도치 않게 댓글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댓글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중요한 장면들을 놓쳐 다시 돌려보기도 여러번 했었다. 그런데 이 댓글을 보고 있노라니 멘탈이 약한 나에게는 보통이 아니였다. 네티즌들의 어떤 댓글에 수긍을 했다가도 눈쌀을 찌프리기게 하는 댓글이 올라오면 심하게 흥분까지 했다. 댓글 싸움도 수시로 일어났다. 서로 좋아하는 배우를 감싸고 돌면서 상대방의 악성루머도 서슴치 않고 퍼뜨렸다. 심지어 네티즌들끼리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라간의 악성비방도 스스럼없이 해대니 파장이 된 시골장터마냥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던 댓글들은 초심을 저버리고 양무리를 발견한 승냥이들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였다.  드라마를 늦게까지 시청한 날에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원래 여가시간에는 운동과 독서를 즐겨 했었다. 운동과 독서를 마음껏 한 날에는 까무룩히 잠도 잘 들었고  새벽알람이 울려야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헌데 네티즌들의 댓글 싸움을 지켜 본 날에는 액정화면앞에서 소리없이 훈수 드느라 피곤했는지 흥분해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드라마가 여운을 남기고 끝나서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그 얄미운 댓글들 때문에 한동안은 다시 새김질하는 소처럼 씩씩거렸다. 자다가 사나운 꿈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느라 목에 피대를 세우며 싸웠다. 꿈과 현실이 정 반대라더니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심통하게도 내가 미워하던 댓글속의 주인공이 되여 극중 배우를  해꼬지하기까지 하였다. 불면증이 생겼다. 무언가에 쫓기우는 사람처럼 부산하고 산만해졌다. 드디여 자주 밤잠을 설치는 나에게 가족들이 걱정스럽다면서 보약까지 지어주었다. 그지없이 미안하도록 말이다. 만약 드라마 댓글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는 것을 알고 나면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도 태연하게 모르는 체하고 응석을 부리며 약을 받아쥐고는 흠칫 놀랐다. 내가 정말 아픈거구나. 댓글병에 걸렸구나. 보슬비에 옷이 젖는다고 일개의 댓글이 생활에 이런 영향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뉴스에 보도한 바와 같이 어느 연예인이 악성 댓글 때문에 자살을 했다더니 마음이 약한 사람은 충분히 그럴수 있을 거 같았다. 남과 어울리고 닮아가려는 풍조가 만연하는 오늘날, 다른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조건 집단의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부동한 의견이 나오면 바로 치고 뭉갠다. 존중받지 못한 생각들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송곳들처럼 이리저리 마구 할퀴고 찌른다. 부조를 해도 다른 사람은 얼마나 했는지 신경이 쓰이고 아이 학원도 다른 애들은 어디를 다니나 궁금한 세상이다. 부자의 실없는 소리가 격언이 되여 추대받기도 하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 약소자들은 타매를 받기도 한다. 집단의식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즐거움이 반죽이 되여 한 곳 만을 응시한다. 댓글 싸움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그 속에서 누구는 승자가 되여 웃고 있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고 간신히 숨을 몰아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속에 속해야만 안전감이 있는 사람들,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가여운 사람들이 그룹을 묶어 자신을 과시한다. 뇌를 보하는 약을 먹어서 그러는지 지혜롭게 댓글창을 닫아서 그러는지 점차적으로 밤잠도 정상으로 되였다. 나는 조용히 드라마를 보면서 작가의 의도나 배우의 찐한 연기력을 흔상할 수 있었다. 연출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회의 암흑한 면이나 의지를 돋구어주는 격려의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다. 같은 드라마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댓글이라는 베일을 걷으니 그제야 드라마 본연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드라마도 인간세상을 조명한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진대 혼자 조용히 들여다봐야 잘 보인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 듯이 가장 강한 자신의 멘탈이 깨여났을 때  무너지지 않는 대가 세워진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수한 생각이 우주를 채우지만 그 생각들을 쫓아 가기 보다는 차분히 자신만의 판단력을 가져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사람은 그럴 때 제일 안점함을 느낀다. 집단의식에 빠져 여러 생각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면  물에 빠진 사람이 되기 쉽다. 세찬 파도에 묻혀 줄기차게 곬으로 흘러가거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허우적거리거나 할뿐이다.다른 사람에게 수용되고 싶은 바램과 배척되기 싫은 욕구가 언덕우의 상큼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베일처럼 가린걸 알면서도 벗기려 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가지고 의미를 찾아간다.
39    딸의 뺨을 친 늙은 남자 댓글:  조회:1060  추천:1  2019-11-05
수필 딸의 뺨을 친 늙은 남자   김영분     시간은 다시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른 즈음에 유치원 다니는 애 둘을 엄마한테 맡기고 남편과 회사 경영에 몰두하던 때였다. 경영 경자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덤벙거리며 시작한 회사는 바다 우에 돛 없이 떠다니는 배처럼 어려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제조업이라 산동성의 각 지방에서 올라온 미싱사 백여 명을 데리고 봉제 일을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이팔청춘의 애된 녀자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다 아줌마가 되여 회사의 중견을 맡고 있지만 갓 일을 시작할 때는 정말 코흘리개와 진배가 없었다. 집이 그리워 청가도 없이 훌쩍 사라지는 애, 숙소에서 남의 옷견지를 훔쳐 입고는 오리발 내미는 애, 한 마을에 있는 애가 왜 자기보다 봉급이 10원 더 높으냐고 훌쩍이는 애, 불량품을 무더기로 만들어 내놓고는 훈계가 무서워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나 몰라라 하는 애들로 그야말로 눈이 열 개라도 다 살펴볼 길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똘똘하고 책임성이 강한 아이들은 반장, 과장 직을 맡고 주축이 되여 회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때 서른을 좀 넘긴 나도 지금 생각해보면 새 색시의 아침상마냥 모든 게 너무 서툴렀다. 한국회사에서 몇 년 동안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경험으로 야무지게 관리하노라 했지만 짧은 옷처럼 들추기만 하면 팔꿈치가 보였다. 이거 하면 안 된다 저거 하면 벌금이다 이런 규장제도를 무조건 여러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소위 관리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 샐 틈 없이 관리하리라 다짐했던 야무진 꿈은 항상 조리로 모래 건지 듯 실실 새여버려서 맹랑했다. 화도 나고 애들이 밉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내가 위경련까지 일으키면서 싸운 일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모질었었다. 백여 명의 직원들이 건물 두 층을 차지하고 숙소생활을 하고 있었던 지라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 된다는 식의 숙소규범제도를 방마다 잘 보이게 걸어놓았다. 열시반 전에는 무조건 외부 출입 금지였다. 공장이 으슥한 동네에 위치해 있어서 가로등도 없는 밤길을 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였다. 그때는 봉급날을 노려 불량배들이 직원들을 폭행하여 봉급을 갈취하거나 녀자 직원들을 겁탈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꼭 밤 늦게 돌아다니는 애들이 있었다. 늦게 들어오면 경비실에서 한참 싱갱이질을 벌려야 했는데 어떤 욱하는 남자 직원들은 경비실 창문을 돌로 부시기도 했다. 그러면 이틑날 영낙없이 현지 관리인인 과장한테 훈계를 받거나 짤렸다. 과장은 골치거리 직원들을 윽박지르기고 하고 혼내주기도 하면서 회사 질서 유지에 안깐힘을 썼다. 악질이라는 리유로 남은 봉급을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에 걸린 직원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리익이 컸지만 요동치는 청춘들은 끊임없이 일탈을 감행했다. 열여덟 살 홍이도 그랬다. 예쁘장하게 생긴 홍이는 미끈한 체격에 갓 구워낸 두부처럼 야들야들한 피부를 가졌다. 시골에서 청정한 공기만 마셔서 그런지 두 눈은 호수처럼 그윽하고 청순했다. 한 마을에 사는 언니를 따라 우리 회사에 온지 반년 좀 넘었을가. 하루아침은 과장이 씩씩거리며 홍이를 짤라야겠다고 했다. 매일 밤 늦게 다녀서 경비 아저씨가 항의를 한다는 것이였다. 쉬쉬한 소문은 바람 탄 안개처럼 삽시간에 온 공장에 퍼졌다. 홍이는 며칠째 유흥주점에 야근하러 다니고 있었다. 그 때는 직원들 봉급이 6백원 좌우였던 거로 기억되는데 유흥업소에서 손님 옆에 앉아서 술만 마셔주면 팁이 백원이였다.  유흥업소에서 야근을 하고 낮에 공장 근무하려니 임무완성은 물거품이 되는 것은   뻔한 일이고 쉬쉬거리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눈총 받을 일만 남았다. 홍이의 팀에서는 홍이 때문에 팀원들의 일당 량이 많아지자 불만이 경칩에 돌아다니는 두꺼비들처럼 툭툭 튀여나왔다. 과장이 여러번 훈계를 하고 벌금을 했지만 홍이는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빠른 팁 문화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끝내 무단결근을 하고야 말았다.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벌써 두 세명이 홍이를 따라 야근을 나가는 애들도 있었다. 직원들은 적은 봉급을 홍이의 야근비와 비교하면서 일에 대한 욕망을 잃어갔다. 오랜 시간 연마해온 기술공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나도 짜증이 났다. 어린 것이 겁도 없이 설친다고 비난했다. 인간적으로 도덕의 벽을 지키지 못하고 회사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용서가 안됐다. 그러는 와중에 과장을 더 격분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글쎄 홍이가 유흥업소의 건달들을 시켜 매일 회사 주위를 맴돌게 한 것이다. 과장한테 전화를 해서 자기 봉급을 계산해달란다. 계산해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회사숙소를 털게 할 거라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밤마다 여러 사람을 시켜 과장에게 무차별 스팸전화를 해댔다. 과장은 현지인으로서 커쿨진 몸매에 배짱도 두둑하고 파출소 직원들과도 호형호제하는 사나이였는데 코딱지만한 시골 녀자아이한테 이런 릉욕을 당하자 분해서 길길이 날뛰였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당황하고 화가 났지만 무섭기도 했다. 공장 안의 백여 명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나는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던 걸로 마무리하자고 생각하여 홍이의 봉급을 계산해주고 다시는 회사 앞에서 얼쩡거리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이튿날부터 건달들이 철수했다. 안도의 숨을 잠시 내쉬고 다시 생산에 매달렸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며칠 후 홍이의 늙은 아버지가 회사를 찾아왔다. 달구지 같은 빵 차에 걸리는 삼촌 고모는 다 데려 온 듯 일 여덟 명이나 되였다. 초라한 행색에 아낙네들은 누르꾸레한 머플러를 뒤집어 쓰고 남자들은 밭고랑 같이 주름이 얼기설기 널린 얼굴에 검은 숯을 발랐는지 하나 같이 시커맸다. 머리 수는 어정쩡하게 많아도 간은 오히려 얼마나 작은지 사무실로 안내하자 하나 같이 누런 이발을 드러내 싱겁게 웃으며 잘못을 저지른 듯 손사래를 쳤다. 공장정원에 채소 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친근한 친구를 발견한 유치원생들처럼 채소밭 앞에 엉성하게 모여 섰다. 서있는 자세가 풍상고초에 시달려 쩍쩍 갈라지는 토담처럼 메마르고 헐거워 보여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쌀쌀맞은 표정을 하고 있는 홍이 아버지는 숙소에 있는 홍이의 짐을 가지러 왔노라고 했다. 홍이의 괴롭힘을 경험한 일이 있는 나는 빨리 가져가라고 했다. 촌티 나는 옷견지 몇 개가 대수겠는데 이렇게 호탕하게 흐지부지한 대부대를 거느리고 짐을 가지러 왔다니 헉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여나갔다. 과장이 보안을 위해 입술을 빨갛게 칠한 홍이를 데리고 숙소로 가더니 보따리 하나를 질질 끌고 내려왔다. 까만 머리 결이 혹은 노랗게 혹은 빨갛게 익은 홍이는 눈을 내리깔고 쌩 하며 아버지 곁을 지나쳤다. 이때다. 아버지가 철썩 하고 홍이 뺨을 쳤다. “이놈 가시나. 몹쓸 가시나!” 늙은 아버지의 안타깝고 기갈이 난 목소리가 왜소한 몸체에서 광분하며 터져 나왔다. 너덜너덜한 신발을 벗더니 홍이의 등짝을 세차게 내리쳤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데 친척들이 헐레벌떡 달려들어서 아버지를 뜯어말렸다. 상심한 아버지는 아예 먼지가 나뒹구는 세멘트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힘없이 머리를 떨구고 홍이의 등짝을 내리치던 신발짝으로 땅을 퍽퍽 두드리며 엉엉하고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친척들이 눈물범벅이 된 홍이를 부축하여 봉고차로 데려갔다. 과장은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회사를 떠나라고 손을 훼이훼이 저었다. 과장의 짜증난 목소리에 홍이 아버지의 눈길은 분노로 들끓었다. 나도 한시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공장 안에서 무리싸움이 일어나  인명 피해라도 날가봐 걱정이였다. 헌데 홍이 아버지가 갑자기 비칠비칠 일어서더니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새된 소리를 지른다. “보아하니 네가 사장이네. 네가 이러고도 사장이야. 어린 애를 맡겼으면 책임을 져야지 밤에 돌아다니게 놔둬. 무슨 회사가 이래. 이래도 되는 거야…….” 악에 받쳐 울부짖는 승냥이의 몸부림 같았다. 원망과 억울함이 교차하는 포효였다. 홍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인데 이제 와서 회사에 책임을 묻다니. 나도 약이 오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회사규정이 열시반 통금인데 번번히 홍이가 지키지 않는 걸 왜 회사 탓을 해요. 홍이가 보통 아이인가요. 그러는 아버지가 딸 관리를 잘 해보라고요. 여기서 시끄럽게 소란 피우지 말고, 짐도 찾았으니 빨리 가요. 110 부르기 전에.” 나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표정은 깨진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홍이는 아이인데 회사에서 관리해줘야지흐흑…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게 말이 되? 우리 동네 다른 아이들은 다 관리해주면서 왜 우리 홍이만 흑흑.. . 홍이는 이제 어쩌라고. 나는 이제 동네를 어떻게 들어가냐고 엉엉.”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논밭만을 열심히 전전했을 늙은 아버지의 남색 재킷이 꼬질꼬질한 앞섶을 헤치고 힘없이 바람에 나붓거렸다. 우르르 채소밭 앞에 모여 섰던 일행이 까칠까칠한 손을 내밀어 홍이 아버지를 부축하여 봉고차로 비틀거리며 데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릉 발동이 힘겹게 걸리고 봉고차는 슬픈 울음소리를 싣고 떠나갔다. 나는 쇼크를 받았는지 갑자기 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위가 포승줄 꼬이 듯 옥죄여 숨이 턱턱 막히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위경련이였다. 휑하니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 홍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사건이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나고 그 사이 우리 아이들이 성장해서 각각 고중과 초중을 다니고 있다. 열다섯 살 난 딸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예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들은 생명의 전부나 마찬가지이다. 아이들과 앙앙불락 하던 시기를 수도 없이 겪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다소나마 터득하게 되였다. 그 때 그 늙은 아버지의 절규가 새삼스레 자주 귀가에 들려온다. 내 딸 좀 지켜줬어야 했다는 그 질책이 시시때때로 가슴을 찌른다.   개혁의 바람이 그 동네의 들판을 슬그머니 살 찌울 때 그의 딸도 동네 밖의 세상을 꿈꾸었으리라. 평생 외지고 구석진 시골에서 밭고랑과 싸워온 정직한 아버지, 딸이 잘못된 길을 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착한 아버지, 동네의 고만고만한 녀자아이들처럼 소박하게 살기만을 바랬을 평범한 아버지, 여차여차하여 쉬쉬하는 동네아낙네들에게 주워들은 딸의 일탈에 혼겁을 했을 수치스럽고 억울했을 아버지. 그는 담력을 키우느라 삼촌 고모 할 것 없이 다 끌어 모아 어렵게 도회지의 으리으리해 보이는 회사로 용기 내여 찾아왔다.  과연 딸의 몇 푼 안되는 짐을 찾으러 왔을가. 아니면 억울해서 어디라도 향해 화풀이라도 해야 살 거 같아서 왔을가. 여유도 없고 철딱서니도 없었던 사장은 열여덟 살 당신의 딸 홍이를 보듬어주지 못했다. 홍이가 부른 건달들의 괴롭힘에 넌덜머리가 났고 당신의 질책에 억울하다 못해 위경련까지 일으켰다. 서른 즈음 그 때 내가 좀 더 큰 아량을 지녔더라면, 미리 아이 키우는 련습이라도 해봤더라면 당신의 억울한 절규를 따뜻한 눈길로 받아주었을 텐데.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서운 세상을 저울 질 하는 홍이를 한번이라도 불러서 따끔하게 지적해주었을 텐데. 당신의 딸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고 털썩 주저 앉은 늙은 당신을 부축했을 텐데. 마음의 쪽문에 서리를 치고 모질게 경찰을 부르겠다고 악악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합니다. 딸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 당신이시여. 정말 미안합니다. 아무 곳에서도 위로 받지 못한 늙은 아버지시여.
38    태풍속을 거닐다 댓글:  조회:764  추천:0  2019-10-14
수필 태풍속을 거닐다 김영분   8월에 들어서면서 매미소리가 요란해졌다. 찌는 듯한 더위와 더불어 찾아오는 것은 태풍 주의보이다. 태평양에서부터 뭉쳐진 두터운 구름덩이가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는 미친 바람을 만나 벌써 9호 레끼마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어마어마한 광풍으로 바다에서 대륙을 덮치고 있다. 무서운 속력으로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니며 광기부리는 여자가 머리카락 휘두르 듯 소란스레 지나가면 산간마을이 물에 잠기고 산사태가 난 곳은 도로가 붕괴된다. 도시의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져있고 차량들은 체면을 잃고 힘빠진 배처럼 둥둥 떠 다닌다. 실종된 사람들은 물론 사망자까지 속출한다.태풍을 정통으로 맞딱드린 곳의 참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한다. 저 멀리 절강바다로 부터 9호 레끼마가 산동으로 줄달음쳐오고 있다고 연이어 이틀째 주의보가 내려져있다. 학교는 물론 회사도 휴무 통지를 받았다. 아빠트 관리실에서는 실시간으로 주민들의 핸드폰으로 태풍소식을 전하고 될수록 외출을 금지하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알람을 보낸다. 위챗모멘트로부터 이미 피해를 크게 본 지역들의 물에 잠긴 참상이 리얼하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사는 도시로 침범해온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태산 같았다. 먼 바다의 비구름의 영향으로 물동이로 쏟아붓 듯 큰 비가 내리고 있은지 이틀째다. 당금이라도 태풍이 들이닥칠 기세에 헌 빨래처럼 축 늘어져 공손히 집에만 갇혀있으려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머리가 흐리터분하고 운동을 거르지 않던  몸은 근질근질하기까지 하였다. 휴일 이틀째 오전,태풍경로 사이트를 보니 태풍이 절강을 지나 강소성을 휩쓸고 있었다. 태풍중심을 표하는 팔랑개비는 강소성의 염성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청도바다에는 저녁 다섯시가 돼야 올 수 있다고 표시되여 있었다. 일요일이면 꼭 야외로 나가야 성이 차 하던 나 만큼이나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인 남편도 불안하게 비로 인해 눅눅해진 집안을 서성인다. “어디든지 가자.” 두 사람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생각해낸 것이 바다가로 가는 것이였다. 태풍이 들이닥치기 전의 바다를 구경하고 싶었다. “위험해,안돼.” 둘은 말로만 위험하다고 하면서 눈길은 재빠르게 태풍속보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보슬비로 잦아든 비줄기는 아마도 저녁이 돼야 거세질 것 같았고 바다풍랑도 아직은 집을 집어삼킬 것 처럼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자. 만약 태풍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면 인근 건물로 피신하자. ” 의견이 모아지자 엄마와 아이들에게 집에 꼭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는 회사에 일 보러 가야 한다고 선의적인 거짓말을 둘러대고 둘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정작 차 시동을 거니 걱정이 또 앞섰다. 야생화 같이 수수한 삶을 살아왔지만 늙은 부모와 한창 크고 있는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크거나 작으나 그래도 회사원들을 거느리는 두목이라는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러다가 나쁜 일을 당하면 그들은 어쩌나.우지끈 하고 넘어지는 나무에 차가 치이기라도 하면? 물에 잠긴 도로를 지나다가 배수구 뚜껑이 벌렁하고 뒤집혀지면?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영화필름처럼 잽싸게 눈앞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도 둘은 눈치껏 격려하고 결심을 내비쳤다. 괜찮을 거야. 요령있게 잘 보고 오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런 비장한 결심과 각오들이 머리 속을 빠르게 드나들었다. 부르릉. 우리 차는 태풍을 만나러 가는 무지하고 용감한 두 사람을 싣고 위험한 태풍과의 데이트의 길을 떠났다. 무섭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했다. 모험이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차츰차츰 굵어지는 비줄기와 바람에 산발을 하고 흔들어대기 시작하는 나무가지들을 뒤로 하고 드디어 저 멀리 으르렁거리는 바다가 화난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밖으로 바다 구경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비옷을 단단히 챙겨입고 아이들 손을 쥐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련인도 있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 운전자들도 많았다.백사장은 경계선으로 이미 막아놓았고 안전요원들이 두꺼운 비옷을 걸쳐입고 이러저리 순찰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우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전대비책이 없을 때 하는 말이였다. 정부도 개인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수위를 잘 리용하면 많은 사물을 더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커먼 구름 아래 바다는 휘뿌연 색으로 변하여 쏴쏴하는 역정스런 소리를 내며 백사장을 덮쳐왔다. 만경창파가 한겹 두겹 겹치더니 거대한 파도가 되여 제방뚝을 덮친다. 삽시간에 물보라가 기고만장하여 높이 치솟는다.파도가  지칠줄 모르는 고삐 끊어진 들말 처럼 마구 날뛴다. 바다가 무겁게 출렁이고 있었다. 파도는 백사장을 집어삼킬 듯 휩쓸며 지나간다. 성난 파도는 켜켜이 쌓여 있던 울분을 모두 씻어내려는 듯 제방뚝 구석구석을 핥는다. 모래는 빨려 들어갔다가 뒤따르는 파도에 또 씻겨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 밑에서 나 뒹군다.입에서는 어느새 와 하는 감탄이 저도 모르게 뿜어져나온다. 자연앞에 선 왜소한 사람들,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 같지만 태풍전의 바다앞에 선 나약한 인간들은 경이로운 감탄만 지을 뿐이다. 조용하고 푸르던 바다는 태풍을 무릅쓰고 쫓아온 나에게 또 이렇게 새롭고 들끓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격정을 한가슴 묵직히 선사했다.태풍전의 바다라니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듯한 짜릿함이 몸을 감돌았다. 여태 소가 새김질 하 듯 덤덤히 살아왔다. 위험하다 싶으면 손을 움츠렸고 어렵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자 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사는게 물에 물 탄 것처럼 재미가 없다고 한탄도 해봤고 그날이 그날이지 하면서 무료하게 나날을 보낸 적도 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니 태풍도 근사한 선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앞으로  살아 갈 날의  길이를 더 늘리기는 어렵지만 그 하루하루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는 있다. 안전이 제일이지만 가능한 위험수위안에서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히 스릴을 즐기고 정해진 울타리에서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삶의 생기를 찾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험하다고 꽁꽁 숨어다니면 젊음의 색갈과 생기를 잃을 수 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태풍전의 바다와 위험한 데이트를 즐기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한 마음을 눅잦히기도 전에 저 멀리 복건성에 사는 친구가 위챗으로 웃으면서 말한다. “정말 태풍을 경험하고 싶으면 복건으로 오셔. 복건에 덮친 태풍이 산동까지 갔을 때는 열대폭풍에 지나지 않아.” 9호 레끼마태풍 역시 절강을 덮쳐서 산동에 오기까지 이틀이라는 시간을 길에서 모름지기 용을 썼으니 청도바다까지 왔을 때는 위력이 이미 많이 감소되였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태풍을 너무 거창하고 장황하게 기다린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느닷없이 찾아오는 역경과 고민에 대한 태도도 그렇지 않을가. 너무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또 결코 그런 것도 아니다.   신은 사람들에게 겪을만큼한 시련을 주고 감당할만큼의 고난을 안겨준다. 혹자는 우리가 너무 부풀려서 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창하다고 생각하면 묵직하고 버거운 나날들이지만 가볍다고 생각하면 깃털처럼 자유로운 것 또한 우리의 생활이다.    태풍을 새롭게 정의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봄마다 껍질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나무처럼 마음이 끊임없이 젊어지고 생기를 되찾은 것 같다.
37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의 랑만 댓글:  조회:1201  추천:0  2019-10-14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불혹의 나이를 넘었다. 때맞춰 다니던 가족 외식도 뜸해졌고 쇼핑하러 다닌지도 오래되였다. 동창들과 번개팅을 즐기면서 스릴있는 모임을 가져본지도 지난해 망년회쯤이였던 거 같다.하이힐은 구석에 박혀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편안한 샌들과 운동화가 신발장을 가득 채웠다.열정과 모험으로 가득찬 30대를 겁없이 지나치고 나니 차분해지면서 자신은 대체 누구인지 무엇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갓 스무살을 넘겨 청도라는 낯선 곳에 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발버둥을 쳤다. 산동사람들의 특이한 높고 칼칼한 억양에 적응하느라 귀를 도사려야 했다.중국을 금방 알아가고 있는 급하고 답답해하는 한국 상사와 현지인들 사이에서 갈등과 서러움도 많이 겪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재간으로 새로운 세상을 넘볼 수 있었다. 십여 년전, 우리도 공장을 가동하고 무역을 한답시고 일본과 한국 등 여러 나라들을 자주 드나들었다. 아침에 별을 지고 나가면 저녁에는 달빛을 이고 퇴근을 했다. 토끼같은 자식들은 년로한 부모님이 허리 아프도록 보살펴주셨고 가족중 듬직한 년장자는 한적한 공장에 거취를 하면서 기꺼이 고독을 씹으며 사업체를 지켜주었다. 산동 각 농촌에서 오구작작 모여든 공인들을 얼리고 달래며 많은 일을 했다.어설프게 국제 형세 운운하면서 외국과 무역을 하고 있는 무역인이라고  난생 처음 명함도 가질 수 있었다.농민의 어진 품성을 이어받아 자기 본분을 지키고 바이어에게나 동료들에게나 신용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온 가족이 심혈을 기울이며 회사를 키워나갔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잘 되는 날에는 엎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진다고 나날이 발전하는 경제형세에 힘입어 유람 성수기 때 인파에 밀려가는 사람들처럼 자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물이 차면 배가 휘우뚱거리며 떠오르 듯 회사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간간히 누렸다. 덕분에 집도 마련하고 애들도 교육을 시키면서 평범한 백성들이 꿈꾸는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 해 나갔다. 하지만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사계절이 있어 날씨가 변하 듯 좋은 날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회사경영은 마치 패키지 려행상품처럼 근사한 경치를 보여주다가도 실망스러운 쇼핑을 들이대기도 하였다. 현재 어려워진 경영환경때문에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하루가 멀다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는 화려한 도시 겉 모습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도시가 발전하고 인프라가 완비해지면서 그에 따르는 물가 상승은 제조업에 큰 저애를 가져왔다. 원자재가격과 인건비 상승 등 원인으로 인해 제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빠른 변화에 적응하고 이 시대 경제흐름을 타야 한다는 재벌들의 껌 씹 듯 쉽게 내뱉는   문구들을 접할 때마다 제조업은 이미 향긋한 빵조각이 아니라 구닥다리처럼 한물 건너갔다고 원치 않은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흐름에서 멀리 떨어져있음을 자각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든다.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제조업이 이제는 뉘엿뉘엿 지는 저녁해처럼 그림자만 길게 뽑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신선이 바다를 날아넘는 재주가 제각각이 듯 회사들마다 부동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였다. 수심이 깊은 곳에 배가 거뜬히 떠있는 것처럼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여전히 요지부동하게 잘나가는 회사도 있지만 그래도 많은 회사들은 서서히 말라가는 호수 처럼 흉물스러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유능하고 야망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지난 세월 우리가 힘차게 경제흐름의 배에 올라 핸들을 잡았던 것처럼 새로운 력사를 써내려 갈 거라고 생각하면 이젠 정말로 앞서가는 사람이 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어른이 되였나 하는 조바심까지 소롯이 든다. 새로운 아이템과 비젼이 필요한 시점인데 그게 말처럼 쉽게 안되니 안타까울 뿐이다.무릇 여러사람보다 앞서가야 하는 발자취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눈에 비춰진 어른들의 모습은 아주 확신있고 견결한 모습이였는데 정작 자신이 어른이 되고보니 흔들림 그 자체다. 어쩌다가 어른이 되였는지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나그네의 코끝에서 너울거리는 담배연기처럼 가슴팍을 들락날락한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화산이 끓는 바다 밑굽처럼 뜨거운 물방울들이 연신 투두둑하고 터진다. 년로한 부모님과 성장중인 자녀들을 볼 때야만이 간신히 안개같은 난국을 헤쳐나갈 힘을 얻는 자신을 본다.이쯤 되고 보니 주위도 조용해졌다. 흥성흥성하던 모임도 줄었고 열정적으로 조언을 해주던 친구들은 신중하게 경청을 많이 하고 있는 모습이다.다 어른으로 치닫고 있어서 그런 것일가. 한뉘 농사를 짓던 부모세대가 개혁개방의 신호탄을 알아보고 낯설고 먼 이곳으로 달려왔을 때도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니였을가.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그들은 체면을 가릴 새 없이 회사 식당으로 경비실로 선뜻 들어섰다. 근면한 로동으로 고향에서 오막집을 지키는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들의 학비를 벌면서 춥고 비좁은 세집에서 도시에서의 부흥 드림을 꿈꾸었을 것이다.정작 자신들은 새 옷 한벌 제대로 사입지도 않고 맛있는 외식 한번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고향의 까마귀를 봐도 반갑다는 낯 선 곳에서 어른이라는 리유로 힘들고 서러운 타지생활을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세대는 우리보다 더 많이 힘들고 흔들렸을텐데 항상 우리에게 확신이 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지런히 일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또한 겁없이 청춘을 고스란히 불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가 한 몸으로 변화를 감내해야 할 시기가 왔다. 우리 자식들에게 꿋꿋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선조들이 배고픔을 피하고 항일을 위해 만주벌판으로 이주했을 때도, 개혁개방의 물살에 떠밀려 연해도시에 몸을 맡겼을 때도 그랬듯이 어른들은 힘들다고 포기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한몸으로 이겨내기에 급급했기에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다. 등 뒤에 것을 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생명의 본능이다. 우리는 안정을 원하고 정착하기를 바랄 때만 희망을 갖는다. 희망을 간직한 발자욱은 저도 모르게 힘이 실린다. 청춘은 덥지 않은 여름과 춥지 않은 겨울을 날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른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의 랑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시기인 거 같다. 어쩌다 어른이 되였다. 흔들리지 않는 씩씩한 어른으로 거듭나야겠다. 설령 힘들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랑만을 느끼는 어른이 되여야겠다.
36    조약돌은 왜 거기 있는가 댓글:  조회:685  추천:1  2019-09-02
수필 조약돌은 왜 거기 있는가 김영분   아이를 키울 때의 일이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 때문에 화가 꼭두까지 치밀어 애를 밀치고 당기고 할 때가 없지 않아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시간을 질질 끌면서 밥알을 어지러 놓을 때, 집에 무져놓은 놀이감이 넘쳐나는데 매장에만 가면 떼를 쓰며 바닥에 드러누울 때, 퇴근해서 집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옷장이 내장이 널부러진 생선처럼 왈칵 뒤집혀져 있을 때, 얼리고 닥치며 재주껏 달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분노가 들끓었다. 여기에다 손톱만큼이라도 심기불편한 일이 가세하면 그 분노가 아이를 향해 화난 샴페인 뚜껑처럼 펑하며 튀여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순간에는 얼굴에 붙인 팩을 확 떼여내 듯 친절을 팽개치고 아이 엉덩이를 후려친 적도 있었다. 치고 나면 잠시는 속이 후련했었다. 우는 아이를 흘겨보며 자기 화를 참지 못해 눈물이 핑 돌기도 했었다. 헌데 이때 만약 남편이나 할머니가 같이 아이를 때리면 상황은 또 달랐다. “아니. 아이를 왜 때려요. 말로 해야지.” 하면서 아이를 감싸고 훈계하는 어른을 흘겼었다. 거짓말처럼 폭풍 같은 분노는 스러지는 거품처럼 사그라들고 어른들의 처사가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내가 때리면 괜찮고 남이 건들면 괜히 미워진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내 몸의 분신으로 세상밖으로 나온 아이를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손끝 하나 터치하는 것에도 마음이 아프고 불쾌했다. 늦깍이 글쟁이로 문단에 발을 비스듬히 들여놓은 나는 우리 글이 곧 우리 아이처럼 사랑스럽고 정겹다. 우리 주위 작가들의 글을 읽노라면 친근한 이웃이 성큼 내게로 다가와 오늘은 지지미를 구웠으니 맛보시요 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것만 같다. 조선족이라야만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정서를 같이 공감하고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빛나는 보석이 아닌 내가의 조약돌처럼 소박하게 그려주고 기록해준다. 세상에 훌륭한 글들이 많고 많지만 우리 작가들의 글은 또 그들만의 토장국냄새처럼 구수한 맛이 있었다. 마치 스테이크나 고급양주도 일품이지만 보쌈과 막걸리를 더 자주 찾는 그런 심정이라 할가. 물론 나도 초보문학인이랍시고 마음 맞는 만만한 문학인들끼리 모여 우리 문단의 병폐에 대해서도 조심히 거론을 한적은 있었다. 그 때는 신나게 문단을 다 알은 것 처럼 평론 같은 평가를 해대기도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왜 글이 안 쓰여지는지 어떻게 하면 소재 발굴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침 튕기며 토론을 했었다. 입방아가 잘 찧어져 마음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때쯤이면 우리는 모두 알아챘다. 우리 글의 병폐에 대한 일부 비평도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허심탄회한 토론도 사실은 모두 우리 문학에 대한 애착때문이였다는 것을. 자아비평을 함으로써 우리 문학이 차지한 위치와 어디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점을 찍을 수 있었다. 앞으로 피 같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가 하는 기특한 생각도 삼천리 강산 수놓 듯 한땀한땀 넓혀갔다. 그런데 우리 문단의 글들이 읽을 재미가 없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문학그룹의 독자들이 대놓고 염장을 찌르는 댓글을 보았다. 나오지도 않는 글을 치약 짜듯 힘겹게 써내려가고 있는데 독자로부터 예리한 지적을 받으니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사실은 글 같은 글이 쓰여지지 않은지 오래된 나의 정곡을 찔려서 마음이 무지 아팠다. 보채는 아이를 혼신의 힘을 다해 얼리고 있는데 남편이 도와준답시고 팔을 걷어부치고 아이를 때리기라도 한 듯 심기가 불편해졌다. 남편도 애가 미워서 때렸을 리는 만무하다. 어쩌면 나보다도 아이를 더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데 도저히 박자에 맞춰주지 않고 칭얼거리니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200만을 웃돌던 우리 민족은 개혁개방의 세찬 파도를 타고 해외나 연해도시로 거침없이 흩어져 나갔다. 그 와중에 제일 만회하기 어려운 손실이 학생의 감원으로 민족학교가 하나 둘 사라져가면서 우리 글에 대한 아래 세대의 배움이 바위 만난 파도처럼 여기저기 부서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경제리익을 최대화하는 산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른들도 글 보다는 물질과 재부에 더 관심을 쏟는다. 특히 고향을 등지고 타향의 달을 자주 쳐다보아야 하는 세대로서 경제활동도 우리의 전통방식보다는 새로운 구도를 접하고 변화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문학과 문화생활 역시 자연스레 마트에 진렬된 상품처럼 인기상품만 판을 치는 모습을 암담하게 바라봐야하는 상황을 접하게 되였다. 원래부터 가냘프던 나무가 태풍을 만난 듯 우리 문학이 휘청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황한다고 길을 잃은 건 아니다. 신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읽을 거리가 식상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은 독자들의 우리 글에 대한 애착과 사랑의 회초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이 구상하고 신선한 글감을 위해 밤을 패는 작가들도 우후죽순마냥 키돋움을 하고 있다. 낮과 밤이 바뀌 듯 쉴새없이 변화하는 삶의 현장에서 소신껏 적응해나가며 가치를 창조해내고 또 그속의 소금같은 스토리들을 흘어진 보석을 꿰듯 차곡차곡 기록해나간다. 기록의 그 사명을 기꺼이 다해야 할 것이다. 민들레홀씨처럼 흩날려다녔지만 단단히 뿌리를 내렸던 그 사연들을 우리의 숨결로 다듬어야 할 것이다. 도로에 박힌 조약돌도 자기의 존재가치가 있다. 그 조약돌로 인해 도로가 한결 창조적이고 아늑하고 다정하다. 걷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고 발끝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우리 글이 세계 주류는 아니지만 많지 않은 우리 민족이 당당히 지구에 좌표를 찍을 수 있는 하나의 징표라고 감히 자부한다. 제일 완벽한 글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고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서툴고 미흡해도 우리 글로 계속 기록해 나갈 것이다.  
35    치사한 상처 댓글:  조회:762  추천:1  2019-08-08
수필   치사한 상처 김영분   큰 애가 고중을 가면서 숙소에 들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투당투당하는 발걸음소리와 함께 덩치 커다란 아들이 턱하니 집에 들어서면 일주일 모아두었던 빨래가 훌쭉해진 풍선이 다시 부풀 듯 집안이며 베란다를 가득 채운다. 덕분에 분주해진 세탁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돌아가고 주방도 뒤질세라 소란스럽게 치리릭치리릭 소리를 내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낸다. 평일에는 밋밋하던 밥상도 토요일만 되면 지갑을 흔쾌히 털은 티를 내며 먹음직한 갈비가 아니면 해산물로 격이 높게 바뀐다. 심지어 손이 많이 가는 물만두도 벌렁벌렁 끓고 난 뒤에는 덩그러니 밥상에 오를 때도 있다. 학교에서 일주일 내내 허접하게 먹고 다녔을 큰 애를 바라보며 연신 많이 먹으라고 권유가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때가 되면 애매하게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꼭 있으니 바로 작은 애다. “엄마는 왜 오빠가 오는 토요일만 맛있는 거 해줘요?” 마음이 전기에 덴 듯 화들짝 하고 놀란다. 나는 전혀 차별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매일 집에서 통학하는 딸애는 미묘한 차이를 느꼈나보다. 그러고보니 평일에는 집에 있는 반찬을 대충 떼워먹은 거 같기도 하다. 허나 큰 애가 숙소를 든 후 매주 토요일만 되면 안테나가 신호를 잡 듯 반찬부터 신경이 쓰이고 자연적으로 시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진다. 시장 보는 마음 자세부터 달라진다. 요리조리 살피고 같은 반찬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영양을 살릴가 고민을 한다. 매일 데리고 있는 작은 애는 평소에 맛있는 것을 많이 먹겠거니 하고 등한하지만 한주일에 한번 집에 오는 큰 애한테는 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작은 애의 꼬집는 말투도 잠시일 뿐 시간이 흘러 토요일이 다가오면 또 밥상을 향한 안테나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큰 애가 없는 동안 작은 애가 맛나는 음식을 해달라고 하면 핑계거리를 만들어 되도록 토요일에 같이 해먹자고 설득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을 거라고, 민주적이라고 자칭을 했던 자신도 큰 애의 숙소살이 한방으로 작은 애 앞에서 오빠만 편애하는 엄마로 서서히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회사 동료들과 재미삼아 했더니 생각밖으로 집안에서 먹거리 차별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는지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작은 애를 섭섭하게 한다고 난리다.  한 동료는 집에서 먹는 음식때문에 푸대접을 받았었는데 어른이 다 된 지금도 생각하면 서럽다는 것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어릴 때 조금씩 쌓인 원망이 큰 돌덩이가 되어 지금은 작은 불행도 그 때 서러움과 연결이 된다고 했다. 그녀는 좀 뚱뚱한 편이었다. 병약한 오빠가 있는 그의 부모는 항상 오빠만 많이 먹으라 하면서 자기더러는 좀 적게 먹으라는 말을 자주 했단다. 한창 식탐이 왕성한  어린 나이에 먹고 싶은 음식을 조금만 먹으라고 하고 오빠만 챙기는 부모에게 서럽다 못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에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그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른이 다 된 지금 자기절로 돈을 벌어 간식거리를 끊지 않고 사먹는다. 먹은 만큼 몸집도 튼실하지만 아직도 동료들이 좀 적게 먹으라는 농담을 하면 눈쌀이  꼿꼿해진다. 그리고 똑 부러지게 일은 잘해도 동료들 사이 양보정신이 결핍하고 참을성도 적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민감해져서 바로 싸울 태세다. 그만큼 어렸을 때 부모들로부터 받은 음식 차별이 큰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자고로 먹는 거로 사람을 차별하면 제일 치사하다고 했다. 동료의 말을 듣고서야 저도 모르게 작은 애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심히 별러서 꾸몄던 토요일 밥상이 누구에게는 이렇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흠칫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관심받지 못하고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토요일에 온 집식구가 숙소에서 허술하게 먹고 다녔을 큰 애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자 했던 바램을 작은 애가 지레 리해할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스러웠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으라고 애는 애일 뿐 어떻게 자기가 당장 먹고 싶은 걸 바로바로 해주지 않는 엄마를 리해해줄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애는 자신의 요구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여러번 그랬으니 섭섭함이 많이 쌓였을 것이다. 한 친구는 식당에 갔다가 시어머니가 당신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시켜서 그 섭섭함이 가셔지지 않는다고 몇번이나 외웠었다. 엉킨 실타리는 풀기 쉬워도 꼬인 노여움은 가시기 어렵다. 다 큰 어른도 먹는 차별을 받으면 치사하게 상처를 받는데 하물며 어린 애가 어떻게 리해를 한단 말인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할수 없이 차별 아닌 차별을 했다고 하지만  먹을 거리가 풍성한 오늘날 조금만 지혜로우면 상처가 아닌 사랑으로 온 집식구의 배를 달랠 수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할 만큼 먹는 것은 사람의 제일 원초적이고 강렬한 욕구가 아닌가. 큰 애를 위해 토요일에 맛있는 음식을 해 줬으니 평일에도 우리 작은 애만을 위한 아기자기한 밥상도 차려줘야겠다. 사랑은 많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작은 애가 좋아하는 귤을 사서 집에 들어간다. 이건 너만을 위해서 사온 거라고. 작은 것일지라도 깍듯하게 정중하게 건네봐야겠다. 무엇이든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바로 해줘야겠다. 더이상 토요일을 기다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한 치사한 상처는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34    편견의 마스크를 벗어라 댓글:  조회:1069  추천:0  2019-08-07
중국 속담에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백번을 들어도 한번 직접 보기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려행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려행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결혼초기에는 애 둘을 데리고 엄마부대와 같이 북경을 선두로 항주, 위해, 연태 등 여러 곳을 다녀보았고 출장으로 일본을 둘러보았는가 하면 등산팀 멤버들과 내몽골 가족여행도 다녀왔고 친구들과 한국에 빨갛게 불타는 내장산 단풍구경도 즐기고 왔다. 이외에도 할빈빙등이며 서북의 청해호며 계곡이 숨이 멎을 것처럼 아름다운 구채구 려행도 다녀왔다. 려행은 내가 질리도록 오래 머물던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게 살던 곳으로 떠난다는 말도 있다. 내가 생활하던 익숙한 생활패턴을 떠나 새로운 기운이 흐르는 곳으로 일탈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보면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있던 불행한 생각이라든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 등이 저도 모르게 사라진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감수가 페부 호흡과 함께 깊숙히 스며들면서 품었던 편견과 의혹들이 쉽게 풀어진다. 한국과 일본 무역을 많이 하는 우리 회사에는 황사철이 되면 손님들이 마스크를 끼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하지 않아도 너희들 나라 공기가 이 모양이니 우리가 이렇게 마스크 무장을 하고 왔노라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코 막고 답답한 손님들의 표정도 살필 수 없는 상황에 혼자 상냥히 웃으며 상담하는 것도 왠지 기분이 잡쳤다. 거기에다 식사시간이 되여 나름 장사 잘 되는 맛집으로 안내를 하면 흥성흥성한 장면에 피씩 웃음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식당분위기가 흥성의 수위를 넘어 시끄러운 건 나 자신도 수긍을 하지만 대놓고 피씩 거리는 모습은 바로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려행을 통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불만 아닌 다른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내몽골 옥룡사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막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사막이라면 황사가 먼저 떠오른다. 한국뉴스를 보면 봄 철만 되면 중국 황사가 한국까지 날려가서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졌다는 보도를 많이 한다. 정부에서는 왜 사막을 저리 방치해둘가 하는 고까운 생각도 잠시 했었다. 내 체면이 괜히 구겨지는 거 같아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안고 내몽골사막으로 향했던 나였는데 정작 거침없이 사막 속에 던져졌을 때는 그 누르꾸레한 황량함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헉 하고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티비에서나 보던 일망무제한 노란 모래가 끝도 없이 하늘 자락 까지 뻗었다. 사막은 노오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면서 흐늘흐늘 뱀혀처럼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정오의 해볕은 얼마나 따가운지 얼굴이 따끔거렸고 바람은 흥분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 듯  쉴새 없이 모래가루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일년 사시장철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자연환경 속에서 의리있게 사막을 지켜 내고 있는 것은 모래 뿐이였을 것이다. 모래도 얼마나 따갑고 고통스러울가 하는 생각에 불쌍하기 까지 했다. 면적이 자그만치 1만무가 된다. 표준화로 건설된 축구장 1000개 정도 남짓한 면적이였다. 그곳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려행객들의 락타 체험과 사막모터찌클 체험을 위해 세워진 자그마한 매표소가 눈에 띄울 뿐이였다. 사막은 계속 넓혀져 나가며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사막 변두리에는 국내외의 봉사자들이 힘겹게 나무심기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우량이 턱없이 부족한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정부에서 사막 록화사업을 부실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불만이 많았지만  사막을 한바퀴 걷고 온 후로는 이런 생각이 안개 걷히 듯 깡그리 없어졌다.   지금은 마스크 낀 손님들과 황사를 얘기할 때 아주 담담해졌다. 그 큰 사막을 관리하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고, 말 한 두 마디나 돈 몇푼 협찬으로는 대자연의 흐름을 막기는 어렵다고 말이다. 이것은 관리 문제도 있겠지만 대자연의 정상적인 발전과정이다. 사막에 비가 많이 내리게 하기 위해 전 세계가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 절대 누구를 탓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황사방지 마스크를 낀 손님들을 볼 때 이전처럼 고까운 생각이 적어졌다.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었다. 사막려행은 내 마음의 마스크를 벗겨줬다.그 덕분에 편견을 버릴수 있었다. 지적하는 말을 들었을 때 상대방을 탓하고 의심하기보다는 편안하게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볼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려행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서 다시 나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중국 속담에 당사자는 곤혹스러워도 방관자는 잘 알고 있다는 말이 있 듯이 한번쯤은 나자신의 방관자가 되여 자세히 살펴볼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다. 나는 려행이라는 처방으로 자신감도 찾았고 많은 편견을 버렸다. 
33    단 하루의 선생 댓글:  조회:1028  추천:0  2019-06-18
수필 단 하루의 선생 김영분   딸애가 다니는 학교는 집 근처에서 꽤나 유명한 공립중학교이다. 학교청사를 고래등처럼 크게 지어놓은 만큼 교수 실력 또한 쟁쟁하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여 입학등록을 할 때면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줄레줄레 늘어선 입학지원생들이 대문 밖까지 이어져있다. 흡사 매표구에 늘어선 대기 행렬 같았다. 딸애의 담임은 펑퍼짐한 몸매에 사각턱을 가진 30대의 녀교사이다. 무표정이 특기인 양 웃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성격이 급하기로 번개불에도 콩을 볶아 먹을듯 애들을 닥달한다. 천사처럼 따뜻하게 아이들을 대하던 지난 학기의 담임과는 사뭇 달랐다. 딸애가 집에 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네 담임은 칭찬은 가물에 콩 나듯 하는 반면 훈계는 하루삼시 밥 먹듯 한다는 것이였다.  까마귀도 이뻐보이는 정겨운 고향땅을 떠나 타지생활을 한 지도 어언 20년이 된다. 하다보니 몸에 배인 것이 조심성과 겸손이다. 딸애의 학교생활을 은근히 걱정스러워하면서 딸애의 선생님만은 시종일관 겸손에 또 겸손을 기울여 맞아주었다. 공립중학교의 담임은 명실공히 넘지 못할 큰 산이였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담임이지만 항의는커녕 우리 애한테만은 윽박지르지 않기를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매년 담임이 바뀌기 때문에 1년 뒤에는 좀 나은 선생님이 차례지겠지 하는 요행 심리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 부드러움 속에 원칙이 묻어나는 담임이 반을 위해 건설적인 의견을 제기하라고 했을 때 우리 학부모들은 오구작작 많이도 떠들었는데 이번 학기는 학부형 위챗그룹에서조차 모두 새 담임의 기압을 감지했는지 누구도 마른기침 한번 하지 않고 있다.  당신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자기도 엄청 힘이 들다고 직설적으로 하소연하는 마당에 명철보신의 능수가 된 학부모들은 담임의 격한 발언 마디마디에 찜질방의 안과 밖을 오가듯 비지땀과 식은땀을 쏟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담임으로부터 생뚱같은 문자를 하나 받았다.  “어머님, 제가 일주일 동안 연수를 가게 되는데 래일 학급으로 오셔서 규률을 지켜주세요.” “내가?” 갑작스런 제의에 나는 작은 감탄이 새여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어깨가 귀까지 치켜들렸다.  “청도시 중학교 교장단이 우리 학교를 시찰하러 오는데 제가 마침 연수를 떠나는 날이여서 애들 규률이 너무 걱정스러워 그럽니다. 하루만 시간 내서 규률을 봐주세요.” 엄격한 만큼 책임심이 강한 담임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타산인 것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천만번 거절을 웨쳤지만 머리는 제꺽 리성을 찾았다. 싫어도 가야 한다는 것, 걱정스러워도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 때 뇌리를 스치는 묵직한 기억 한편이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딸애의 담임 문자에 나의 소시적 꿈이 떠올라 심장이 고동을 치고 있었다. 나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였다. 마흔 고개를 넘기기까지 십여년을 공장에 출근하는 생활에 부대끼며 살다보니 소시적 꿈은 진작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되였다. 그런데 불쑥 딸애의 담임으로부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문고리를 받아쥘 줄이야. ‘꿈은 꾸어야 한다.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라는 말이 나의 사정에 딱 들어맞았다.   여러가지 애로사항을 겪으면서 교원이라는 꿈은 종착역 없이 떠도는 뭉게구름처럼 부서진 지 오래되였지만 담임의 뜻밖의 문자는 내면에 수그러져있던 소박한 꿈을 화들짝 흔들어 깨웠다.  평소에는 엄격하기로 무섭기까지 하던 딸애 담임이 너무 고마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실웃음이 절로 나갔다.  이튿날 아침 여섯시 반에 나는 딸애 손을 잡고 나란히 학교로 떠났다. 유치원선생님도 못해본 내가 갑자기 중학교 담임직을 하루 맡아야 한다니 가슴이 떨렸다. 세련되고 학식이 있어보이는 선생님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우아래로 양복을 맞춰입고 구두를 받쳐신고 머리도 잘 말려 한껏 도톰하게 부풀려올렸다.  단 하루의 선생님 자격이라지만 자상하고 친절히 미래의 씨앗을 보듬어주리라 뛰는 가슴을 달래고 또 달래였다.  복도에 들어서니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애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아침인사를 해왔다. 애들의 머쓱하고 착한 눈매, 조금은 경계하면서도 례의를 갖춘 웃음, 천진하고 밝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났다. 나도 웃몸을 약간 구부리며 따뜻하게 목례를 보냈다. 학생들의 인사에 감격하여 괜히 뒤돌아보며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눈으로 지켜봐주었다. 딸애는 쑥스러운지 키득키득 웃으면서 먼발치에서 서성이더니 먼저 교실로 달려 들어갔다. 이제 내가 학생들의 랑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저 교실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규률담임’이라는 신분으로 오늘 하루 강단에 올라서게 된다. 한발자국을 뗄 때마다 벅찬 설레임에 나는 하늘을 오르는 듯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할가 지난밤 내내 고민을 거듭하면서 여러가지 버전을 준비해두었다.  “어험!” 하고 마른기침 한번 하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성큼성큼 교실로 들어섰다.  수십쌍의 초롱초롱한 눈길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려왔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얼굴에 힘을 주어 웃었다.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송이 엄마입니다. 담임께서 연수를 간 까닭으로 오늘 저와 같이 하루 공부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함께 규률을 잘 지키면서 즐겁게 지냅시다.” 짝짝짝, 박수소리가 교실 여기저기에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아 목에 힘을 주면서 과문을 읽어댔다. 청소를 하는 아이가 스적스적 밀걸레질을 하고 숙제검사를 하는 학생이 왔다갔다하면서 책상 사이를 드나들었다.  나는 강단 오른쪽에 놓여진 선생님 자리에 앉아 반을 둘러보았다. 교실 뒤편 흑판보에 실린 흑세력을 물리치자!는 글과 함께 힘있게 그려진 커다란 주먹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러가지 록색식물이 흑판보 량켠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다육식물과 란은 창문턱에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바르고 씩씩한 아이들이 정의감 넘치고 아늑한 공간에서 한눈 팔지 않고 공부하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무언의 흥분이 가슴에 차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여서 어른 키를 자랑하는 아이들이지만 ‘규률담임’인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입을 떼였다. “선생님,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 받아쓰기를 하겠습니다.” “선생님, 청소를 다했습니다.” 나는 아주 로련한 선생님인 양 알았다고 머리를 연신 끄덕였다.  성취감이 피여올랐다. 아이들의 공손한 태도로부터 나는 형식이 아닌 진정한 선생님이 되였다. 선생으로서의 긍지를 느꼈다.  이 때, 핸드폰 액정에 문자가 떴다.  “어머님, 현재 아이들 규률 상황을 영상으로 찍어서 반 위챗그룹에 보내주세요.”  대놓고 사진을 찍으려니 학생들한테 미안해나 살며시 사진 몇장 찍어서 반 위챗그룹에 올렸다. “일곱시 넘어서 온 학생들은 지각생입니다. 지각한 학생 명단 올려주세요.” 나는 곱살하게 생긴 반장애를 찾아서 누구누구 아직 안 왔느냐고 물었다. 명단을 작성해서 올려야 한다고 전달하니 익숙한듯 흑판에 큼직하게 지각생 몇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나는 차마 그 명단을 반 위챗그룹에 올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담임 개인위챗에 보냈다.  “숙제는 다 바쳤는지요? 숙제를 완성하지 못한 학생 명단도 올려주세요.” 연수를 간 담임으로부터 업무지시가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걱정이 태산같은 담임이 당장이라도 반에 나타날 것 같이 불안해났다. 아침 자습시간이 끝날 때까지 보고해야 할 업무는 줄을 이었다. 푸주간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고발을 이어나갔다. 졸지에 꿈을 실현했다고 싱숭생숭했던 마음은 오간 데 없어지고 끝없이 아이들 허물을 보고해야 하는 고발쟁이선생으로 되여버렸다.  “오늘 외부 학교에서 우리 학교에 시찰하러 오기에 복도 규률을 엄수해야 합니다. 감점당하지 않게 큰소리로 말하거나 뛰여다니는 학생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네번째 수업시간에 자습을 합니다. 규률을 잘 봐주세요.” 한창 뛰여놀 나이에 수업시간 내내 꼼짝 않고 있다가 10분 휴식시간에도 잠자코 있으라니 애들이 측은하고 불쌍해보였다.   점심밥을 먹고 아이들은 또 금방 교실로 들어서서 점심자습에 들어갔다. 오전 내내 한번도 아이들에게 엄한 소리 내지 않은 탓인지 점심자습시간에는 교실 안이 웅성웅성했다. 그런데도 나는 말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은 며칠 뒤에 있는 학교 예술절 합창종목에 맞추어 필요한 복장을 선택하느라고 서로 자기 주장을 세우며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모아지니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교실 안이 웅웅거렸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세월의 턴넬을 지나 천진란만했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작은 일에도 열심히 토론을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구김살 없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노라니 30년 세월이 안개처럼 걷혀 눈앞으로 다가와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 반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갑자기 마른 나무가지가 퍽하고 끊어지듯 딱딱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퍼졌다.  반 뒤문에 어느새 안경을 건 중년의 남자선생님이 엄숙한 얼굴로 서있었다. 눈빛이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차거웠다. “너희 반 오늘 점심규률 5점 감점이야. 오늘 학교에 시찰하러 오신 외부 손님들도 많은데 이렇게 떠들어서 어떻게 하려구?” 돌개바람처럼 씽하니 나타난 호통소리는 메마르고 뾰족한 가시뭉치가 허공을 누비며 터지듯 온 교실을 메웠다. 웅성이던 애들은 불에 덴 것처럼 흠칫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하나, 둘 책을 펼치고 숙제를 하는지 쓱쓱 써내려갔다. 애들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 앉자 우뚝 서있는 내가 보였는지 남자선생님은 자못 놀라는 눈치였다. “학부모님이 계셨군요. 으흠. 애들 큰소리 내지 않게 규률을 잘 부탁합니다.” 안경을 추스르며 나가는 뒤모습을 보자 그제야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감점이라 했지? 안돼. 감점이라니. 담임이 감점당하지 말라고 학부모까지 내세웠고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임 하는 날에 감점이란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니.’   “잠간만요. 선생님.” 검은 쟈케트를 입은 남자선생님은 날렵한 걸음으로 옆반으로 건너가 창문가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급히 따라나온 나를 보더니 까치발을 내리우고 머뭇거리며 돌아섰다. “선생님, 애들이 정말 복장문제 때문에 토론을 했지 떠든 게 아닙니다. 제가 애들을 누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감점은 하지 않으면 안될가요?” “그게 으흠. 그래도 그게…” “제가 대리로 하루 담임을 맡았는데 감점당하면 담임한테도 면목이 없습니다.” “학부모님이 하는 일도 제쳐놓고 대리담임으로 규률을 봐주는 정성을 봐서 감점은 안하겠지만 오늘 외부 교장단 시찰이 있어서 우리 학교 이미지를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꼭 떠들지 않도록 잘 지켜주세요. 교장한테 들키면 나도 혼납니다.” 비는 데는 강철도 녹는다더니 남자선생님은 그래도 너무 각박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주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반 위챗그룹에 담임의 메시지가 떴다.  “오늘 송이 어머님 수고 많았습니다. 그런데 규률이 아주 나빴다더군요. 반장으로부터 보고를 다 받았으니 연수 끝나고 돌아가서 애들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한시도 신경을 늦추면 안됩니다. 자습시간 한시간을 놓치면 몇시간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더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힘내고 야단 맞은 기분이 들었다.  꽃이 아무리 빨리 무성히 피기를 바란다고 어찌 매일 물만 줄 수 있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맞춤한 습도를 유지해줘야 하고 간혹 가다가 비료 몇방울을 떨구어주어야 하고 따스한 해빛도 쪼여줘야 할 것이다.  매일 물을 쉴새없이 주고 있는 선생님과 수수방관하고 있는 학부모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이들, 단 하루의 선생이란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에구, 다음주 우리 또 죽었다, 죽었어.” 문자를 보던 딸애가 가볍게 탄식했다.  (《연변녀성》2019. 6월호)
32    웃음,그리고 그 뒤 댓글:  조회:977  추천:0  2019-05-22
수필 웃음,그리고 그  뒤 김영분   흥성흥성한 설이다. 비록 한국 수원의 반지하방에서 쇠는 설이였지만 시어머니가 계시는 큰 집으로 산지사방에서 가족성원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에서 힘들게 일하던 친척들은 물론 중국에서 출근하고 있는 우리 식구 그리고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맛있는 음식 한가득 차린 그믐날과  설날 아침 상을 물리고 나니 친정나들이 친척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 칸 남짓한 작은 방에 열몇 명이 모이니 신발 벗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오래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반가운 건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친척들이 들어서면 의례 술상이 새로이 차려지고 먼저 온 손님이 술을 다 마셨다 싶으면 또 한팀이 들어서는 풍경이였다. 머나먼 한국이고 또한 뒤돌아서기도 비좁은 반지하방에서 지내는 설이였지만 고향의 익숙했던 설 풍경은  얼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보는 듯 고스란히 펼쳐졌다. 거의 다 고달프고 지루한 중로동을 하는 친척들이 많은 터라 평소에 시간이 없어 만날 기회가 없던 친척들의 얼굴을 한꺼번에 볼수 있다는 것도 여간 기쁜 일이 아니였다. 그러니 권커니 작커니 술이 술술 넘어간다. 서러웠던 일은 우둑우둑 갈비 먹 듯  씹어버리고 즐거웠던  일은 냉면탕 마시 듯 시원히 들이켰다. 설이 되면 아낙네들은 주방에서 음식 장만하느라 진땀 빼지만 남정네들의 손님 술 접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모두가 얼굴이 화로불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술은 마음 약한 사람에게는 담력을 키워주는 활성제라더니 평소에 조심스럽고 경직되였던 마음을 유연하게 풀어준 모양이다. 모두  많이 마셔서 취했다. 술상을 어렵사리 물리고 의례 가족 오락이 시작되였는데 마작이 빠질리가 없었다.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느라 수고한 녀자들이 한 상 둘러앉아 마작판을 벌리자 남자들은 취기를 달래느라 방 구석을 차지하고 드렁드렁 한잠을 청했다. 마작판에서는 마작알들이 오갈뿐만 아니라 조카들의 취업상황이며 혼사며 여러가지 흥미로운 얘기들도 형님들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튀여나와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모두가 설의 분위기에 무르익어 있을 때 순간 창가쪽에서 잠을 청하던 고모부가 글쎄 우엑 하는 소리와 함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오바이트를 했다. 베게는 물론 자신의 웃옷도 흥건히 젖었다. 술에 어찌나 취했는지 잠에서 깨지 못하고 연신 토하는 것이였다. 작은 방에는 순식간에 술에 절은 구역질냄새가 진동했다. 비위가 약한 녀자들은 어마야 소리와 함께 모두 대문쪽으로 몰려갔다. 그래도 시어머니와 집주인인 아주버님이 성큼 고모부께 다가가서 일으켜세우고 이불도 걷었다. 어리둥절한 고모부를 이끌고 샤워실로 인도하고 뒤처리를 신속히 하셨다. 이런 풍경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신기한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앗, 내 가방.” 큰 조카가 자기 가방에 걸찍하게 오물이 묻은 것을 보고 덴겁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정쩡해서 황당과 놀라움이 반죽되여있던  애들이 급기야 모두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여러가지 뜻이 들어 있는 듯 했다.   설날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바이트를 하는 어른이 우스워 보였을 수도 있고 애지중지하던 가방에 오물이 묻은 것이 너무 맹랑해서 웃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작판에서 후다닥 일어선 엄마들의 집단적인 통일 액션도 얼마나 우스웠을가.  아무튼 보기 쉬운 풍경은 아니였을터. 남의 집 불구경 하지 않는 군자 없다더니 본능은 우리 모두를 웃게 하였다.                                                                                                그때,집주인이신 큰 아주버님이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따끔히 한마디 하셨다. “웃지마라. 너네 아버지도 술 마시고 그럴수 있어. ” 애들을 향한 훈계였지만 어수선하게 문가에 서서 웃고 있던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속이 뜨끔하였다. 당황했을 고모와 고모부에게 너무 미안했다. 술 기운에 하는 말이였지만 참말로 멋진 말씀이였다. 키득거리던 애들도 삽시에 정색해졌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휘청이며 집에 들어서서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오바이트를 하던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웃지마라. 너네 아버지도 그럴수 있어. ” 올 설에 애들에게도 나에게도 가슴깊이 새겨야할 한 마디였다. 대학을 가든 책을 보든 기계적으로 하는 공부보다 피부 깊숙히 와 닿는 마음이 움직이는 배움이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교육을 중요시해왔다. 입에 풀칠 하기 어려운 세월을 견뎌오면서도 예전에 부모님들은 몸소 대 가정속에서의 대인관계와 근면함, 그리고 양보정신과 례의범절을 가르쳐주었다.그 대신 요즘은 핵가족 시대에 들어서면서 핸드폰과 테블릿 영상내용이 아이들의 생각주축을 이룰 정도였다. 더 전면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시스템을 향수하고 있지만 우리의 배려와 관용정신은 가뭄을 맞이한 호수처럼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 매사에 조급하고 결과를 중요시하거나 귀차니즘을 쉽게 보이며 끈기를 잃어간다. 남의 아픔에 관심이 적거나 지나치게 확대하여 나는 다행이다라는 식으로  자기위로를  삼기도 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신세대의 양상이다. 설을 쇠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인성교육의 장을 연출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식구들은 아주버님의 그 한마디에 태도가 확 바뀌였다. 개그 보 듯 우스꽝스러웠던 생각은 어느새 전분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반바지하고 우에 티 널직한거 하나 있어요.그거 꺼낼게요.” 큰 형님이 부지런히 옷장을 뒤졌다. 그외 아낙들은 고모를 향해 그럴수도 있다고 고모부를 나무라지 말라고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오빠네 집에 와서 설을 쇠면서 이럴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추억이냐. 이제 두고두고 옛말 할수 있지 않느냐. 기억에 남는 설을 쇴다고 생각해라.” 아주버님은 연신 샤워실앞에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마냥 서있는 고모를 위로했다. 그날,모두에게 가족이란 포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겨줬다. 또한 허물은 모두에게 있을 수 있으니 함부로 남을 웃지마라는 철학을 알게 되였다. 겸손의 참 뜻을 알았다. 우리는 쉽게 남의 허물을 보고 비웃는다. 본인은 다행이 그 부류가 아니라고 자기위로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지극히 자신을 높이 올리 세운다. 남의 고통우에 서면 자신은 행복해지는 것 처럼 말이다. 오죽하면 젊은 층들에는  “너의 고통을 얘기해보거라,내가 즐거울수 있게.” 라는 문구도 생겼다지 않는가. 모든 사물 자체는 잘잘못이 없다고 본다. 술을 마시고 속이 부대끼면 당연히 오바이트 할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다를 뿐이다. 피하거나 코 싸쥐고 웃기를 선택할수도 있고 아주버님처럼 내 가족도 밖에서 저럴수 있으니 따뜻하게 감싸안는 아량을 베풀수도 있는 것이다. 그 날, 주방에서 바삐 돌던 엄마들은 물론 한창 성장중이고 생각이 바로설 아이들에게 참된 교육을 한 것 같아 너무 감개무량하다. 아이들이  받았을 마음의 울림은 평생 갈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감싸주고 실수했을 때의 당황함을 위로해줌으로써 성대하게 모인 우리 가족에게 따뜻한 가슴으로 남을 포용하는 보귀한 가족문화를 생생하게 퍼뜨려준 아주버님이 너무 고맙다. 좋은 씨앗을 심었기에 분명히 앞으로는 더욱 겸손하고 따뜻한 가족으로 거듭날 것이다. 올해는 정말 특별한 설이였다. 마음이 한층 따뜻해지고 겸손해지는 한해였다.  
31    집 잃은 흰둥이 댓글:  조회:815  추천:0  2018-10-18
소설 집 잃은 흰둥이 김영분     1흰둥이가 길을 잃다   흰둥이는 배가 너무 고파서 깨갱소리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산책을 나왔다가 꽃잎 주위를 맴도는 나비에 홀려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닌지 벌써 한달이 넘는다. 따뜻했던 보금자리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꼬리를 잔뜩 움츠리고 눈꼽이 덕지덕지한 두눈을 거슴츠레 뜨고 하염없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여기는 공단 같았다. 사면팔방으로 쭉쭉 뻗은 아스팔트길 량옆에는 네모반듯한 회색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대문들이 검은 흑대구아가리에 지퍼가 달린 모양으로 철썩하니 닫겨 져 있었다. 그래도 량옆에 도랑에는 시커먼 오물이 졸졸 술래잡기라도  하는듯 앞거니 뒤서거니 으슬렁 거리면서 흘러간다. 행여나 먹을 것이 있을려나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먹을 거는 고사하고 썩은 냄새만 코를 찔렀다. 쓰레기를 뒤지면서 연명해오던 이 나날속에 향긋한 샴푸에 샤워를 하고 드라이까지 받아보던 세월은 꿈속에서도 멀어져가고 한 여름의 쓰레기더미에서 풍기는 악취는 이제 흰둥이의 끔찍한 일상이 되여버렸다. 흰둥이는 삼검불처럼 헝클어지고 때국물이 쫄쫄 흐르는 두귀의 털이 자꾸 눈앞을 가려 짜증나 앞발로 치우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심해서인지 자꾸 자기 코를 긁지 않으면 눈을 내리 찍어서 괜한 아픔에 시달렸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신처를 찾아야 한다. 아니면 비참하게 유기견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거슴츠레한 눈에 힘을 주어 슴벅거렸다. 한 공장앞을 지나는데 대문이 버젓이 열려있었다. 차량이 들락날락 하는 광경을 보아서는 아마도 흥성흥성한 공장 같았다. 깨개갱! 흰둥이는 멍멍하고 힘차게 짖으려 했지만 깨개갱 소리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대문옆에 조그마하게 생긴 집을 향해 짖어댔다. 삐꺼덕하고 작은 집의 창문이 열리더니 밭고랑처럼 얼기설기 주름이 패여있는 늙은 할아버지가 머리를 내밀고 흰둥이를 쳐다보았다. “에이구. 어디서 밥도 못먹고 다녔구먼. 불쌍도 해라. 어서 오거라.” 흰둥이는 좋아라 힙겹게 꼬리를 흔들며 할아버지 발밑으로 다가가서 요리조리 캐갱캐갱하면서 돌아쳤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개밥그릇을 흰둥이 앞으로 가져왔다. 아마도 다른 개도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아침에 먹다 남은 찌꺼기밥이 어지럽게 개밥그릇에 달라붙어 있었다. 예전에 주인집에서는 전용 우유에다가 향긋한 과자 알갱이들을 먹었는데 이젠 누렁개의 찌꺼기 같은 개밥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며칠을 굶었는데. 흰둥이는 연신 코를 그릇에 방아 찧으면서 눈 깜짝할새에 다 먹어치웠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가 또 물도 부어주고 남은 빵도 부스려주었다. 흰둥이는 커억커억 트럼할 새도 없이 바삐 먹었다. 이제야 살 거 같다. 할아버지를 자세히 보니 실눈을 하고 희죽이 웃으면서 마치 손자가 맛잇는 음식을 게눈 감추듯 먹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흰둥이를 바라보면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어이구. 배가 많이 고팠구나. 천천히 먹으라구. 이젠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여기로 와서 먹어. 여기 검둥이도 있어. 친구도 하고 말이야. “ 할아버지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흰둥이보다 덩치가 조금 더 큰, 할어버지 무릎까지 오는 키를 한 검은 개 한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흰둥이는 검둥이를 보자마자 꼬리를 찰싹 내리우고 쏘옥 할아버지 발밑에 엎드렸다. “검둥아. 괜찮아. 얘는 배가 고파서 잠깐 들린거란다. 너도 친구도 하고 잘 지내보렴” 검둥이는 납작 엎드린 흰둥이를 둘러싸고 꼬리를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머리를 쪼아렸다가 궁둥이를 쳐들었다가 기분이 복잡한 듯 씩씩거렸다. 흰둥이는 쫓겨날가봐 무서웠다. 꾀죄죄한 모습이 수치스럽기도 했다. 검둥이는 반지르르한 윤기나는 털에 생긴 것이 여간만 멋있는 것이 아니였다. 아휴. 이 와중에 멋진 검둥이를 보니 괜한 수치심은 웬 일이지. (제발. 나 좀 있게 해줘. 나 얌전히 잘 있을게. 나 쫓겨나면 죽을지도 몰라. ) 흰둥이는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검둥이가 꼬리를 쳐세우고 코를 맞대고 냄새를 맡더니 입으로 흰둥이를 밀치고 닥치고 하면서 간지럼을 피워댔다. “에고고. 나 간지러워. ㅋㅋ” 흰둥이와 검둥이는 금세 좋은 친구가 되여 온 공장마당을 누비며 뛰여 다녔다. 여름이라 담장둘레에 할아버지는 작은 밭도 일구어놓았다. 모종을 했는지 비닐하우스도 여러개 있었다. 화단에서는 군자란처럼 생긴 기다랗게 생긴 꽃이 노란물감을 토해내듯 찐하게 피여있다. 차량들은 흰줄을 그은 선안에 차곡차곡 세워져 있고 자전거도 판자로 막은 그늘밑에 잘못을 저지른 애들마냥 조론히 서 있었다.   점심 종소리가 따르릉 울리면 공장 대문에서 우와하는 함성과 함께 어림잡아 백명은 될 듯한 노동자들이 식당으로 즐겁게 밀물 쓸듯 쓸어들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착하고 예쁘게 생긴 청이라는 녀직원은 흰둥이를 아주 귀여워했다. 청이는 드문드문 수도물가에 데려가서 흰둥이에게 깨끗하게 몸도 씻겨주었다. 사무실에는 항상 옷도 품위있게 입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악수를 하고 웃고 어깨를 타독거리면서 분주히 오갔다. 점심에 태양이 기염을 토해낼 때는 검둥이와 흰둥이는 시원한 담장 구석에 드러누워 한잠씩 늘어지게 자곤했다. 차량들의 빵빵 소리가 아니라면 그대로 하루종일 잘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오직 먹고 뛰놀다가 서먹한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오면 고작해서 멍멍하고 헛기침하듯 몇번 짖어대고 그늘을 찾아 잠자는 것이 일상이였다. 흰둥이는 새로 접하고 보는 광경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바쁜 나머지 처음에는 흰둥이가 왔는지 조차 주의를 하는 거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검둥이 그리고 청이만 흰둥이에게 관심이 있었다. 저녁에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면 청이는 종종 소세지를 들고 와서 흰둥이랑 검둥이랑 놀아주곤 했다. 차츰 지나자 깨끗하게 씻긴 흰둥이의 고급스런 자태가 금방 공장직원들한테 귀여움을 받았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털에 청이가 목에다 예쁜 딸랑방울까지 달아줘서 귀여운 강아지공주가 따로 없었다. “흰둥아. 정말 귀엽다. 처음에는 안쓰럽게 초라했는데 요즘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네. 나도 오도가도 없는 신세란다. 엄마 아빠가 없는 고모네 집은 이젠 가기도 싫고 여기가 제일로 편안하단다. 난 20세가 되기까지 이렇게 자유롭고 마음이 편안해보기는 처음이란다. 우리 잘 지내자. 가끔 찾아올테니 너무 외로워하지 마, 알았지.” 가끔은 청이는 혼자말처럼 흰둥이에게 주절거렸다. 함치르르한 생머리를 뒤로 묶어넘긴 탓에 앞이마가 톡 튀여나왔다. 코마루가 오똑 하게 서서 우수에 찬 두눈을 섯뿔리 바라볼 수가 없는 청이다. 흰둥이는 꼬리를 내흔들면서 날름날름 청이의 손바닥을 핥았다. 향긋한 크림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이 참 좋다. 이렇게 좋은 팔자가 다 있을가싶었다. 정말 개팔자 상팔자다.     2 할아버지   흰둥이와 검둥이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매일 공장마당에서 숨박곡질 하듯이 뛰여 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날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에 흰둥이가 하마트면 치일뻔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곱살스레 생긴 양홍이가 나오더니 할아버지한테 얼굴을 찡그리면서 호박 베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저씨. 이봐요. 오늘 거래처 사장님이 강아지를 칠뻔해서 너무 놀랐단 말이예요. 우리회사에 아주 중요한 손님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어떡해요. 오늘부로 흰둥이 검둥이 다 개집에다가 가두어야겠어요. 안그러면 개를 다 다른데 줘야겠어요.” 아뿔싸. 흰둥이와 검둥이의 행복한 나날은 그날부터 골목바람에 콰다당 닫긴 대문처럼 갑작스레 닫겨버렸다. 그들은 각각 공장 한구석에 이전에 지어놓은 허줄한 벽돌집옆에 목을 묶이운채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한눈에 공장이 다 보이고 사람들이 돌아치는 상황을 다 볼 수 있어서 너무 까막눈이 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밥 먹이를 줄 때만이 할아버지가 개밥통을 들고 나타나셔서 “오늘은 잘 지냈냐? 에구. 까부는거 봐서 일 치겠다 했지. 그래도 여기에 잘 있어라. 내가 때때로 먹을 거 가져다 줄테니까.” 하신다. 눈물나게 고마운 할아버지시다. 그런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개밥을 주러 오셔서 “내일부터는 내가 며칠 청가를 내야 한단다. 90세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누워계시는데 또 위독한 상황이란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꼭 지켜야 한단다. “ 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으슬으슬 비집고 올라온 주름살들이 할아버지의 걱정처럼 얼기설기 늘어져서 풍상고초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캐갱캐갱. 할아버지 속상해하지 마세요.” 흰둥이는 연신 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리려고 깡충거렸다. 그 바람에 청이가 달아준 딸랑방울이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귀막을 자극했다. 할아버지는 인자하신 그대로였다. 환갑도 넘으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말을 하시곤 했다. 흰둥이는 할아버지 덕분에 그동안 길에서 치이고 쫓기고 배고프던 불안함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요. 할아버지. 노할아버지 잘 모시고 오세요”흰둥이는 앞발을 들어 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렸다.     3 청이   “어때. 여기 묶이니 심심하지. 내가 야근하지 않을 때 꼭꼭 너 보러 한번 올게.” 청이도 드문드문 흰둥이를 보러 왔다. 그럴 때마다 흰둥이는 한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흰둥이는 점차 청이의 불쌍한 과거를 알게 되였다. “흰둥아. 내가 태여날 무렵 엄마아빠가 삼륜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그만 나만 태여나고 두분 다 저세상으로 가셨단다. 그래서 고모네 일가가 나를 데려다 키웠어. 고모는 나때문에 힘든 밭일을 하고도 고모부한테 엄청 욕도 많이 먹고 매도 수태 맞았단다. 고모는 나를 이뻐하다가도 종종 나때문에 가정이 불란스럽다고 짜증을 내셨단다. 나는 정말 복이 없는 사람일가. 나는 엄마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갔단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고모는 툭하면 에그에그 하면서 나를 보고 쯧쯧거렸지, 고모부는 재수없는 년이라고  나만 보면 흥하고 들어오다가도 집을 나갔단다. 그집에는 오빠하고 언니가 있는데 오빠는 집에 꼬마 황제이고 툭하면 나보고 밥축만 내는 아이라고 소리를 질렀고 오빠보다 두살 큰 언니는 보모살이나 다름 없단다. 그래도 그 언니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가만가만 챙겨주곤 했어. 하지만 그 언니도 그 동네 건달한테 시집가는 바람에 아주 비참하게 살고 있단다. “ 흰둥이를 쓰다듬고 있는 청이의 손이 파르르 가늘게 떨렸다. 흰둥이는 깨갱깨갱하면서 쪼크리고 앉은 청이의 주위를 코로 냄새 맡듯이 빙빙 돌다가 청이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사람도 이렇게 이집저집 엄마 아빠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살고 있구나. 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한 줄 알았는데. ) 흰둥이는 자기도 태여나서 두달만에 낯선집에 팔려간 신세를 한탄하게 되였다. 비록 주인집에서 애지중지 키웠지만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었고 옹기종기 같이 태여난 형제들이 그리웠다. 강제로 팔려가던 날 흰둥이는 무섭고 두려워서 작은 개집에서 꼼짝도 안하고 엎드려있지 않았던가. 흰둥이는 갑자기 동병상련의 감정이 북받쳐 꼭 청이를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4 재호가 입사하다   누구도 흰둥이를 보러 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아이, 심심해. 흰둥이는 때로 날아다니는 날벌레를 뱅뱅 쫓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껌둥이도 잘 지내겠지. 그들은 멀리서 쳐다보면서 컹컹하며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외로움과 답답함을 달랬다. 같이 뛰고 놀던 그 정경이 눈앞에 삼삼거렸다. 한 여름이라 모기떼도 성가스럽게 윙윙거렸다. 시간은 소리없이 물에 떠내려가는 쪽배처럼 시름없이 흘러갔다. 이런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던 하루 공장 문어구에 새로운 남자 직원 한명이 들어섰다. 검스레한 피부가 윤기가 반들반들하고 팔뚝이 탱탱한게 다부지게 생긴 청년이였다. 눈이 판들거리는 것을 봐서는 아주 령리한 사람처럼 보였다. 흰둥이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새로 온 청년을 향해 컹컹거렸다.     5할아버지의 가족   흰둥이는 며칠동안 할아버지를 보지 못해서 너무 안달이 났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기계적으로 밥만 퍼주고 눈길도 안 마주치고 가버렸다. 행여나 흰둥이가 친해지려고 캐갱거리면 “에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이런 걸 다 키워가지고 나를 귀찮게 하네. 그저 콱.”하면서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는 휑하니 가버린다. 이런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계속 먹자니 정말 목에 꺽 막히고 소화도 안된다. 괜한 개밥을 발로 툭툭 차면서 아주머니를 비난했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개의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울며겨자먹기로 흰둥이는 찬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버텨나갔다. 열흘이 지나자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에구. 흰둥아. 잘 있었냐. “ “캥캥. 네 . 할아버지. 보고싶었어요.” 흰둥이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였다. “그래그래. 나도 반갑단다. 슬프게도 나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여태 장례식을 치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단다.” 할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흰둥이랑 오래 얘기를 나눌 타산이였다. 흰둥이는 이러는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또 할아버지 발밑에 납작 업드렸다. 할아버지는 손으로 흰둥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친 아들이 아니란다. 주어온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친아들처럼 지극정성을 다 해서 키우셨단다. 농사면 농사 품팔이면 품팔이, 심지어 짐꾼도 했었지.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정직하셨단다. 자기의 로동으로 먹고 사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셨지. 나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단다. “ 여기까지 말하고 할아버지는 그만 너무 슬퍼서인지 목이 컥컥 메이시는 거 같았다. “그런데 흰둥아. 나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5년 누워있는 동안 짜증도 많이 냈단다. 마음으로는 아버지가 가엾고 불쌍하지만 정작 누워서 바지에 똥칠하는 아버지를 몇년 모시기란 쉽지 않단다. 나의 마누라는 양노원에 보내자고 몇번을 졸랐는데 기어이 내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만 멀리 일하러 가버렸단다. 바로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색시가 달아난거지. 휴“ 흑흑, 할아버지는 세차게 흐느끼셨다. “그래도 어쩌겠니. 내가 의지가지 없는 아기일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극진히도 보살펴주었단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만드신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를 갔단다. 동네에서 아버지를 더벅머리 총각이 애를 하나 키워서 어떻게 장가를 가겠냐고 해도 끄덕없이 나를 지켰단다. 결국엔 장가도 못갔지. 다 나때문이란다.” “와. 할아버지 아버지는 대단해요. 할아버지는 정말 행복했겠어요. 캥캥” 흰둥이는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너무 위대해보였다.   “캥캥. 베품과 사랑을 할줄 아는 인간세상이 너무 부러워요. 할아버지.” 흰둥이는 고개를 쳐들고 올롱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상하고 혼신의 힘으로 사랑을 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우리 할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실가. 흰둥이는 할아버지를 위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혀로 날름날름 허름한 구두를 핥았다.     6 청이와 재호가 사랑에 빠지다   “너는 요즘 묶여있어서 답답하지. 회사사람들이 다 퇴근한 다음에 차량이 안 다니는 밤에는 풀어줄게. 그런데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말썽을 피우면  또 들키니까 껌둥이랑 조용히 다녀. 그럴수 있지.” 할아버지는 매일 묶여있는 흰둥이가 불쌍했는지 밤에는 풀어주겠다고 한다. “앗싸. 할아버지.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 최고예요. 나 얌전히 다닐게요. “ 흰둥이는 좋아서 캐갱소리가 그만 헹헹하고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희소식이다. 또 껌둥이와 같이 뛰여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역시 할아버지가 있는 세상은 살만해. 흰둥이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날부터 흰둥이는 밤이 되면 껌둥이와 함께 풀려나서 마음대로 쏘다니게 되였다. 퇴근을 한 공장울안으로 건뜻 걸린 달과 휘붐한 공장내 가로등이 적막한 빛를 뿌리고 있었다. 그래도 흰둥이네가 쏠락거리면서 다니기엔 충분한 조명이였다.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를 풀어놓은 양상이다. 둘은 좋아서 서로 깨물기도 하고 다리로 서로 코등을 쳐놓기도 하면서 날고 뛰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할아버지가 모종을 했던 자리는 고추와 가지, 파 등 농작물을 심어놓아 이젠 제법 키가 훌쩍 컸다. 둘은 고랑 사이를 오고가면서 숨박곡질을 해댔다. 문득 밭고랑이 끝나는 담장 모퉁이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밭고랑과 공장건물이 맞붙는 으슥한 곳이였다. “청이씨. 청이씨를 처음 볼 때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어. 청이씨는 소박하고 얌전한 여자라구.” 청이라구. 청이언니라구. 흰둥이는 귀가 쫑긋해졌다. 누가 청이언니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휘뿌연 먼지가 가득 낀 가로등이 초췌하게 조명을 하고 있는 공장모퉁이로 흰둥이는  청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캥캥. 흰둥이는 청이 바지가랭이를 물고 머리를 요리조리 흔들면서 자기가 왔노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리고는 꼬리를 연신 저어댔다. “흰둥이구나. 너가 어찌 여기까지. 흐흠. 할아버지가 풀어놓았구나. 아이구. 좋겠다.” 청이도 너무 좋아서 흰둥이를 펄쩍 들어올렸다. 청이 품에 안겨보니 청이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남자였다. 며칠전 금방 입사한 검은 피부의 청년이였다. “청이씨는 마음이 참으로 곱네요. 강아지도 이렇게 이뻐해주다니요.” 검은 피부 청년은 뚫어져라 청이를 바라보면서 다정다감하게 말을 했다. “휴. 재호씨도 참. 난 그리 훌륭하지 못해요.” 청이는 부끄러워하면서 함초롬한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 무안했는지 행복에 취했는지 연신 손으로 흰둥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빛은 청이의 까만 머리결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있는듯 했다. 머야. 이건. 청이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거야. 흰둥이는 그만 검은 피부 청년한테 청이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끄으응. 흰둥이는 볼멘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흰둥이는 종종 조용한 밤이 되면 청이랑 숨박곡질하듯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청이와 피부검은 청년은 어떤 때는 밭고랑끝에서 어떤 때는 건물 모퉁이에서 어떤 때는 사무실 앞 화단에서 도란도란 사락사락 끊임없이 소곤거렸다. 둘은 많이 행복해보였다. 흰둥이와 검둥이에게 맛있는 소세지를 던져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청년 남녀의 연애는 청이를 한떨기 수선화처럼 활짝 피게 하였다. 하얀 목뒤로 수시로 머리카락을 넘기는가 하면 걸음걸이도 더 사뿐해졌다. 어느 하루 점심시간에 청이가 흰둥이를 찾아왔다. “흰둥아. 난 요즘 너무 행복하단다. 누구도 나를 이렇게 눈여겨 봐준 적이 없단다. 스무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천덕꾸러기였지.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재호씨는 나의 은인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란다. 그는 나를 정말 소중한 존재로 봐주고 있단다. “ 끄으응. 흰둥이는 행복에 잠긴 청이를 질투나게 올려다보았다. “넌 어떻니? 넌 검둥이가 마음에 드니. 검둥이도 멋있는 녀석이거든” “에이. 청이언니두 참. 쿄쿄” 갑작스런 말에 흰둥이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검둥이? 검둥이는 멋있는 녀석이라고. 쿄쿄. 재미있는데. 흰둥이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것 같았다. 그래. 검둥이의 미끈한 다리며 반지르르한 털이며 개중에 내세울만한 개였다는 것을 흰둥이는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에이. 부끄러워. 검둥이는 그냥 나랑 좋은 친구야. 흰둥이는 속으로 웨쳐댔다. 청이언니한테도 말하고 싶었지만 킁킁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흰둥이는 검둥이를 흠모하게 되였다. 괜시리 검둥이를 보면 가슴이 널 뛰듯 두근거렸다.     7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화해를 하다   할아버지는 예나 다름없이 꼬박꼬박 흰둥이에게 맛있는 개밥을 날라오군 했다. 밥주러 올 때는 한참이나 흰둥이를 보고 푸념 늘어놓 듯 길게 말타래를 풀다가 간다. “휴. 흰둥아. 아버지 장례식날에 내가 그래도 우리 로친을 끄집고 와서 마지막길에 절을 올리고 인사를 시켰단다. 우리 마눌도 착하디착한 할미인데 어쩌다가 우리 아버지를 싫다고 내팽개치고 달아날 생각까지 했는지. 장례식 끝나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또 집에 눌러앉았지 뭐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그래도 살 비비고 반평생을 같이 산 로친인데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겠지. 아버지는 항상 모든 일을 너그럽게 생각하라고 하셨지. 중풍때문에 누워있으시면서도 항상 자신때문에 집에 불화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눈가에 눈물이 줄줄 흐를 때도 있었단다. 우리 로친도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이야 많이 했지. 미안한 마음도 꿀뚝같고 얄미운 마음도 산 같단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척하고 로친한테서 밥 얻어먹어야겠지.” 캥캥. 흰둥이는 좋아라 날뛰였다. “그래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남은 시간 오붓이 잘 보내세요. 할머니도 많이 미안해하실 거예요. “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소박하고 정직한 인간세상의 화신처럼 보였다. 슬프고 기쁜 일을 예고없이 자주 겪다보니 풍상고초가 어린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면서 감정이 골짜기에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흘러다녔다. 사람들은 이처럼 많은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구나. 판자로 된 허술한 집과 따뜻한 밥만 있으면 살것 같은 개의 인생은 그야말로 상팔자 인생이라고 흰둥이는 놀라운 생각을 했다.     8 재호가 떠나다   청이는 이젠 재호씨를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였다. 은은한 달빛사이로 사랑이 움트더니 이젠 제법 찰싹 붙어다니게 되였다. “재호씨. 오늘 점심에 식사를 많이 안하는 거 같던데 어디 아픈가요?” 청이는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요. 내가 이전부터 허리병이 있는데 또 도진 거 같아요. 내가 부두에서 막일을 좀 했었거든요. 집에 아버지 엄마가 많이 아프다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사회로 나와서 무거운 일 더러운 일 많이 했소. ” 검은 피부 청년은 머리를 떨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청이에게 말을 했다. “어떡해요. 너무 힘들었겠어요. 그럼 내일 회사 청가 내서 하루 쉬세요. 밥은 제가 날라갈게요.” 청이는 안타까운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야겠소. 내일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소. 그나저나 내가 회사로 온지 한달도 안되여 봉급도 못받았는데 어쩜 이런 일이 생겼는지. 휴. 청이씨 보기 민망하네요. 아직은 내가 너무 못났소. 가진 것도 없고 아프기까지 하니.  청이씨한테 행복을 주지 못할 거 같아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오. 청이씨 볼 면목이 없소.” 검은 피부 청년은 큰 죄를 지은 죄인마냥 머리를 푹 두다리 사이에 묻었다. “아니예요. 재호씨. 난 여태까지 살면서 재호씨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없어요. 다 나를 무시하고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호씨는 달랐어요. 밥먹을 때 채소도 집어주고 따뜻한 물도 떠다주고 자기전에 잘자라고 문자도 해주고 . 정말이지 난 지금 하늘만큼 행복해요. 우리 흰둥이가 알아요. 난 흰둥이한테 아무 일이나 다 말하거든요. ” 청이는 밤마다 찾아오는 흰둥이를 쓰다듬으면서 다정스레 재호씨한테 말을 했다. 그날 밤이 지난 뒤 재호씨는 자주 청가를 내고 병원을 다녀오는 거 같았다. 아침이면 나갔다가 퇴근 무렵 회사로 들어왔다. “재호는 회사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데 매일 청가예요.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청가를 안 내줄 수도 없구요. 물리치료를 한다는데 걸어다닐 때 보면 또 멀쩡하고. 휴. 팀 생산에 영향이 많아서 과장이 여러번 반영을 했어요. 아무래도 재호를 찾아서 단단히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애요. 금방 입사한 사람이 근무태도가 저모양이니 장차 회사에 도움이 안될 거 같아요. 회사는 생산성이 생명인데 재호 한사람때문에 전반 생산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되요. 사람을 대체하든지 해야겠어요. ” 흰둥이는 사무실에 예쁘장하게 생긴 양홍이 사무실 앞 화단에 서서 구구절절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아뿔사. 이걸 어쩌지? 우리 청이언니랑 재호씨는 어떻게 되는거야? 안돼 안돼. 청이언니는 재호씨가 없으면 많이 슬퍼할 거라구.” 흰둥이는 한시 바삐 청이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목에 줄이 메여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캐갱캐갱하면서 연신 올리 뛰면서 부산을 피웠다. “에끼. 조용해. 문이나 잘 지킬 것이지 또 풀어달라고 생떼야. 마당에서 뛰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쩔려고.” 양홍은 날뛰는 흰둥이를 보고 책망섞인 목소리로 나무랐다. 끄으응. 흰둥이는 삽시에 조용히 눌러앉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양홍은 사무실뿐만아니라 이 회사에서 제일 권력이 있는 사람이였다. 저번에 보니 현장에 키 큰 과장도 양홍한테 굽신거리지 않던가. 양홍은 외부에서 멋있게 옷을 입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또한 사장님이 계시거나 안계시거나 제일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전거가 아닌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였다. 흰둥이는 개의 짧은 안목으로 양홍이 사장님 다음으로 제일 힘이 센 권력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이 있은 후 흰둥이는 재호가 여러번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돌아갈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가 축 처져서 걸어갔다. “휴. 어쩌지? 허리가 빨리 나아야 할텐데.” “청이씨. 사무실에 양홍경리가 이젠 더 이상 청가를 주지 못하겠다고 하오. 회사 생산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온다고 금방 입사한 사람이 자꾸 청가하면 곤난하다고 여러번 닥달을 했소.” 재호의 근심 어린 얼굴우로 새초롬한 달빛이 비껴갔다. “그래도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오래 일을 못하겠소. 알다싶이 자재창고의 자재가 얼마나 무거운지 천근만근처럼 내 몸을 누르오.” “내일 물리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데 혹시 청이씨 돈 좀 빌려줄 수 있소. 아직 한달이 안되여 봉급을 받을 수가 없는데 그동안 내가 있는 돈은 다 썼소.” 재호는 죄를 지은 사람마냥 머리를 푹 숙였다. “재호씨. 근심말아요. 나는 이 회사에서 2년 넘게 일을 해서 모아놓은 돈도 좀 있어요. 얼마나 필요한가요? 내가 내일 출근을 해서 은행을 갈 수가 없으니  은행카드를 재호씨한테 드리겠어요. 자그만치 내가 1년 넘게 만원을 모았어요. 재호씨가 필요한만큼 찾아서 먼저 병원 가보세요.” 청이는 안타깝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렇게 자상하고 착한 재호씨한테 안타깝게도 때이르게 허리병이 찾아와서 애를 먹인다는 생각에 청이는 속이 바질바질 탔다. “청이씨. 정말 청이씨밖에 없소. 나같은 못난 놈을 이렇게 믿어주다니. 내가 돈을 많이 벌면 꼭 이 은혜를 갚겠소. ” 깽깽. 흰둥이는 재호를 향해 세차게 짖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이언니가 너무 경솔한거 같았다. “흰둥아. 이리 와. 너도 재호씨가 안타까워서 그러지. 점차 좋아질 거야.” 청이는 흰둥이를 보면서 되뇌이였다. 그 검은피부 청년 재호는 그 이틑날 물리치료를 받는다고 회사를 떠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청이는 울먹이면서 달빛아래서 흰둥이를 마주하고 억울하게 울고 있었다. “흰둥아. 어떻게 재호씨가 연락이 안될 수가 있지. 난 믿을 수가 없어. 나를 그토록 따뜻하게 대해줬는데. 손도 꼭 잡아줬었고 더욱이 나를 그윽히 바라보던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데.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러워 죽겠단 말이야. 혹시 나한테서 돈을 빌려가고 미안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 돈을 그냥 줄 수도 있는데. 나는 정말 재호씨가 인간대접을 해줘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름이 지나도록 나한테 연락도 없고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크으응. 흰둥이는 안타까워서 청이의 발밑에 납죽 엎드렸다. 사람이였더라면 정말 청이언니를 살포시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 재호라는 남자를 길거리에서 찾아서 당장 물어다 청이언니앞에 끌어오고 싶었다. 검둥이에게 도움이라도 청해서 재호를 시원하게 물어주고 싶었다. 이렇게 착한 청이를 슬프게 하다니. 청이는 점점 수척해졌고 얼굴에 늘 어두운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재호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에게 원한이 목이 꺽 막히게 쌓였는지 또 아니면 믿을 것이 더이상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은 항상 퀭해있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뒤 개밥 주러 온 할아버지한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흰둥아. 너 그 재호 생각나니? 글쎄 그놈이 여태 우리동네 근처에서 세방을 잡고 살았다지 뭐야. 그런데 어제 건달들이 한무리 와서 죽도록 팼단다. 인사불성이 되여서 집주인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지뭐야. 그런데 왜 뭇매를 맞았는지 너 알아? 글쎄 이놈이 어느 공장의 여자아이를 꼬셔서 임신시켜놓고 돈도 많이 홀려서 쓰고는 또 잠적을 했다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여자아이한테 들켜서 그애 오빠가 사회불량배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한바탕 두들겨놓았단다. 에코. 쌤통이지. 우리 착한 청이가 불쌍하지.” 할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던 흰둥이는 더없이 흥분이 되여서 풀쩍풀쩍 뛰였다. 빨리 이 소식을 청이한테 알리고 싶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도 빨리 청이한테 알릴 생각이야. 그런데 그 아이가 더 충격에 빠질가봐 걱정이구나. 모르는게 약이라고 재호의 본심을 알게 되면 청이가 더 슬퍼할가봐 걱정이구나. ” “그래도 알려줘야해요. 청이언니가 계속 저렇게 침울하게 지내는 것은 아직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나도 류랑개시절이 지루하다못해 죽을 것 같았어요. 다행이 할아버지가 나를 받아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길가의 꾸정물에 콱 박혀 죽을가 하고 생각도 했었어요. 길게 아픈 것보다 짧게 확실하게 고통받고 끝내는게 더 낫다구요.” “재호 이놈, 기다려봐. 내가 언젠가 검둥이랑 같이 갈기갈기 물어서 찢어 놓을거야. 우리 검둥이는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거라구. 검둥이보다 못한 놈.흥.” 흰둥이는 착한 청이를 얼려서 마음도 돈도 뜯어간 재호가 죽어라고 미웠다.     9 청이가 아이를 낳다   “흑흑,흑흑” 청이는 흰둥이를 쓰다듬으면서 슬프게 울었다. “흰둥아, 어쩜 좋니? 나 임신했단말이야.” 청이는 임신을 했지만 딱히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시골에 있는 고모가 알면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애가 시원찮은 남자한테 감정도 돈도 다 빼앗기고 그 마당에 임신까지 했다고 하면 정말 다리몽둥이라도 분질러 놓을 것 같았다. 회사에는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사사건건 원칙을 내새우는 양홍이 알게 된다면 이것은 이유불문 해고였다. 산아정책사무실에서 안그래도 일년에 두번씩이나 가임녀성들을 검사시켜 계획외 임신을 막는 상황에 결혼도 안한 처녀가 애기를 가진 것을 알면 무조건 추방이다. 공장에서도 해고지만 공장단지를 관리하고 있는 촌에서도 부녀주임이 가만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류산을 하려니 이미 5개월이나 지나서 섣뿔리 류산을 할 수도 없었다. 이 마당에 그래도 실마리처럼 간직하고 있던 재호라는 작자는 관습적으로 녀자등을 쳐서 먹고 사는 놈이라고 하지를 않나. 청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수심에 차서 지내다나니 얼굴이 해쓱해졌다. 종이에 불을 감쌀 수 없듯이 청이의 배도 하루하루 커져갔다. 다행이 겨울이 되여서 작업복을 크게 입고 다녀서 그러는지 회사내에서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워낙에 청이가 조용하고 눈에 안 띄여서 자기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설이다. 회사는 보름동안 긴 휴무에 들어갔다. 다른 직원들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꿍져서 고향집으로 간다고 희열에 휩싸여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하나 둘씩 떠나갔다. 흰둥이도 사뭇 즐거웠다. 공장에 와서 쇠는 첫 설명절이 아닌가. 요즘 설이라고 할아버지가 맛있는 소세지도 주고 뜨문뜨문 우유도 한봉지씩 주곤 하였다. 회사 현장건물은 시커먼 자물쇠가 능청스럽게 걸려있다. 사무실건물도 빨간 복자를 새긴 알록달록 빨강색종이들이 대문마다 창문마다 붙혀져있고 경비실 대문에는 춘절을 경축한다는 초롱불이 줄느런히 매달려있다. 경비실 할아버지는 껌둥이와 흰둥이를 거느리고 회사 곳곳을 점검하러 다녔다. 숙소에 아직 남아있는 직원이 있는지 대문이 열려져있었다.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고 숙소건물에 들어서니 숙소가 열몇칸 쭈욱 보인다. 방마다 다 잠겨져 있었는데 유독 한칸이 열려져있다. 노크를 했지만 인기척이 없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보던 할아버지는 경악을 한다. 허걱. 이게 웬 일인가?! 어지럽게 널려진 8인실 숙소에는 두층짜리 침대가 량옆으로 두줄로 나뉘여졌는데 청이가 그중의 한 밑층 침대에 누워서 얼굴이 땀벌창이 되여서 끙끙거리면서 누워있었다. 심한 고통을 겪는지 얼굴은 온통 일그러져있었다. “청이야. 너 대체 어디가 아픈거냐? 왜 그러는거냐?” 할아버지가 다급히 묻자 청이가 맥없이 대꾸했다. “할아버지. 나 살려줘요. 나 지금 애기 낳을 거 같애요.” “뭐라고? 어이크. 큰 일 날 소리. 그런데 왜 아직 이러고 있어. 빨리 병원 가야지. 가만있어봐. 내가 구급차 부를게. 좀만 기다려.” 할아버지는 너무 당황하여 가슴이 세차게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할아버지. 구급차 부르지 마세요. 나 혼자 여기서 낳을래요. “ “어이크. 사람잡겠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리고 너희 가족한테 알려야지. 전화 줘봐. 내가 연락할게.” “아닙니다. 절대 연락하면 안되요. 나 누구도 알리기 싫어요. 정말 나혼자 여기서 낳을래요. “ 청이는 아픔을 참느라 입술을 사려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말을 뱉어냈다. “안되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가 우리 로친 불러올테니 혼자 잠시만 참고 있어.” 할아버지는 허겁지겁 숙소문을 나섰다. 회사에는 도움을 청할려 해도 휴무가 시작한지 사흘이라 모두 집에 가고 누구도 없다. 감쪽같이 애기를 낳느라고 허줄한 침대에 누워있는 청이, 그리고 몇발자국 뛰려고 해도 관절이 시큰거리는 별 볼일 없는 늙은 경비할아버지, 거기에 하루세끼 밥을 챙겨줘야 하는 개 두마리가 있을 뿐이다. 가족도 알리지 말고 구급차도 부르지 말라니. 저러다가 혹시 인명사고라도 나면 큰 일이였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띵해났다. 본능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할멈은 분명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할멈을 데리고 숙소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숙소에는 청이가 없었다. 그 대신 고운 담요에 싸여있는 갓난 아기가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청아. 청아. 청이는 어디로 간거야?” 할아버지가 껌둥이와 흰둥이에게 물었지만 개들은 그냥 초롱불이 데롱데롱 달린 대문을 향해 컹컹거릴 뿐이다. 할머니가 갓난 아기를 안아올리자 아기가 꼼지락거린다. 앙앙 하면서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다.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령감. 우리 평생 아기가 없었는데 이 아이는 천사예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라고요. 우리 잘 키워봐요. “ 할머니는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적막한 공장건물과 붉은 초롱들을 뒤로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꽃포대기로 아이를 꽁꽁 싸안고 집으로 향했다. 흰둥이는 검둥이곁에  붙어 서서 찬 바람을 맞으며 물끄러미 시커먼 대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감싼 꽃포대기는 유난히 알락달락했다.  
30    미로의 끝 댓글:  조회:1464  추천:1  2018-08-10
 우리는 태여나서 부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라난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재잘재잘 말을 배우고 가나다라를 배우면서 학교에 들어간다. 머쓱하고도 수집은 이팔청춘을 넘어 학문의 세계인 대학으로 들어가 더 넓은 지식을 쌓으며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비교적 무르익은 사회인으로 거듭난다. 사과가 익으면 땅에 뚝 떨어져 사람들의 맛나는 과일이 되듯 대학문을 나선 청년들은 첫 직장에 성큼 발을 디디고 내실을 갈고 닦으면서 성숙해지는 길에서 훠이훠이 걸어간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성장 스토리이다. 나도 별반 다름 없이 학교를 나와 곧장 취직을 했고 뒤이어 결혼과 육아를 경험했다. 다행히 여러 직업을 경험하지 않고 쭈욱 한가지 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십여년 평탄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게 되였다. 주위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더러 직업이 여러번 바뀌고 복잡미묘하고 굴곡이 많은 인간관계를 겪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내심으로 위로를 하군 했다. 안정된 생활이 쭉 이어졌지만 불안감은 거북이 등에 붙은 미물처럼 시원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안정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항상 하고 있는 일 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싶었다. 꼭 마치 지금 달리고 있는 길 외에 또 다른 길과 세상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보지 않은 길이 나를 손짓하는 것 같아 그게 무엇일가 항상 고민하고 생각했다. 어릴 때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동네 점집에 갔었다. 점을 쳤더니 깡마르고 성격이 괴퍅한 점쟁이 할머니가 나는 장차 커서 선생을 할거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매가 독수리를 채가 듯 딱 잘라서 말했다. 긴장하게 점쟁이 입만 바라보고 있던 수더분한 엄마의 얼굴은 활짝 핀 해당화처럼 밝아졌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졌지만 고된 시집살이에 자식에게 맛있는 음식도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하는 기 죽은 엄마의 두 눈은  점쟁이의 말에 작달막한 딸이 금방이라도 선생이 되여 교단에 서있는 것 같아 감격에 겨워 반짝이였다. 자신처럼 갈라터진 땅을 만지지 않아도 될 앞날을 약속받은 거 같아 뿌듯해하셨다. 그래서일가. 나도 어린 나이에 감히 선생이라는 직업을 흠모해봤다. 깔끔한 흰 와이셔츠에 까만 양복을 세련되게 차려 입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천사처럼 보였다. 나도 커서는 밭김을 매면서 모기를 때려잡는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이 아니라 칠판에 글씨를 쓰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어릴 때의 소원은 뒤골목에 떨군 딱지처럼 기억에서 희미해졌고 여태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되여 여느 사람들처럼 출근하고 가정을 돌보는 워킹맘이 되였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여태 잘하고 있던 업종이 도마우에 오른 고기처럼 이리저리 할퀴우고 있을 때는 불안감이 증폭했다. 솜털처럼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아이들이 내 손을 잡고 뚱기뚱기 걸음마를 배우던데로부터 어느새 내 키를 따라잡았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아동으로부터 자기 주장을 고슴도치처럼 내 세우는 사춘기 소년이 되였다. 직장도 육아도 이가 맞지 않는 치륜처럼 삐걱거리는 시기에 들어서면서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였다. 요즘은 자라다가 문득문득 생겨나는 참대의 매듭처럼 인생살이가 순탄치 않아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구름이 없어도 비 맞을 걱정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헛헛함을 느낀다. 무언가에 쫓기우면서 팽팽해질대로 팽팽해진 삶에 채워지지 않은 것이 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였다. 뜨겁고 시뻘건 용암이 지각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맞춤한 분출구를 찾아다니는 기분이였다. 여태 앞만 보고 달리던 길이 아니라 다른 샛길로도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새 동네를 지날 때마다 샛길이 나진다. 그 동네로 들어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가 궁금할 때도 많았지만 갈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쳤다. 딱 한번 외지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자정을 넘겨서 주위를 검색해봤더니 유명한 온천이 있는 동네를 지나고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주소를 찍고 찾아갔다. 엄동설한에 실외 온탕에서 김이 몰몰 나고 짜릿하게 뜨끈뜨끈한 온천물은 온몸의 피곤을 가셔주었다. 그후 스케줄을 완벽하게 짜고 온천에 가보았지만 한번도 한밤중에 갑작스레 찾아 갔던 온천의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역시 계획에도 없던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가보니 가슴이 먹먹해지게 감동을 주는 운치가 있었다. 수학처럼 정확히 계산된 인생의 퍼즐을 맞추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가보지 않은 동네의 다른 풍경도 꼭 내 삶에 칠해져야 하는 색갈이라는 것을 느꼈다. 더 늦기 전에 그려진 지도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한비야씨는 는 책도 펼쳐내지 않았던가. 길 잃은 아이처럼 세계의 오지라는 오지는 다 찾아다니며 배낭여행을 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녀는 바람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지구 곳곳을 누비며 국제재난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인생을 알게 되였고 또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되여 그녀는 매일매일 신선하고 에너기가 넘친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미로에 서있는 사람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나선다.  마흔이 넘어서 문학이라는 동네를 거닐게 된 일은 참으로 복 받은 일이였다. 아마도 어렸을 때 어렴풋한 점쟁이 할머니 점괘때문에 마흔이 넘어 외롭고 고독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심리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상담을 배우고 있는 것도 지적으로 살아보겠다는 탈농의식에서 온 것 같다. 보슬비에 푹 젖은 옷처럼 무거워진 가족의 경제부담이 마음을 자주 무겁게 눌렀다. 말썽이 많은 사춘기 애들 교육문제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직장내에서는 작은 말 한마디 때문에 서로 얼굴 붉히는 후배들도 어지간히 속을 썩였다. 고민에 머리가 터지도록 아파서 시원하게 터놓으려 해도 마땅히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여태 살아오면서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했다. 실패에 익숙한 나머지 일상이 되여버렸다. 성공은 몇번 오지 않지만 좌절은 수시로 눈앞에서 애매하게 나를 쳐다본다. 갑갑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시작한 독서가 글쓰기까지 이어졌다. 명품 문장은 아니어도 한편한편 완성을 하면서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그 시간만큼은 고민으로부터 해탈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인생에서 가보지 않은 길에 나타난 새로운 풍경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퇴근 후 독서하고 글 쓰고 짬짬히 상담하고 공부를 한다. 마흔이 넘어서 주요 생계수단인 생업에 충실하지 않고 엉뚱한데 시간을 소모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밍크코트 차려입고 우체국 드나들 듯 못마땅해하는 충고였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많이 흔들렸다. 마치 미로에 서있는 듯 했다. 특히 글이 안나와서 고통스러울 때는 누가 보지도 않는 글을 왜 써야지 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나타난 신기루 같은 꿈은 치렬하게 살아야 하는 생활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아닌지. 현재의 삶이 고단하다고 도망치려는 핑계거리는 아닌지 의심도 해보았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그랬더니 섭섭하게도 세상은 그대로 너무나 잘 돌아갔다. 하지만 놓친 배를 넋놓고 바라보는 심정이라 할가. 아련하게 미련이 자꾸 찾아왔다. 다시 손 내밀어 배전을 끌어당겼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소리가 씩씩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포기하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은 자기멋대로 돌아갈 것이고 한번뿐인 생에 후회를 남기기 싫었다.미로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쇠몽둥이를 갈으면 바늘이 될 수 있고 비방울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내듯이 나는 새로운 길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운치를 발견했기에 꾸준히 느긋하게 걸어갈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의 풍경은 경이롭다. 아름답고 눈부시다. 그리하여 외롭고 고독하더라도 발길을 멈출 수가 없다. 미로의 끝은 어디일가. 잡히지 않고 미리 내다볼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파헤치고 싶다.가보지 않은 길의 풍경은 내 생을 더 풍부하게 색칠해줄 것이다. 
29    궁색한 변명 댓글:  조회:1432  추천:1  2018-08-08
      십여년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큰 아들애는 8세였고 작은 딸애는 5세였다. 말복도 지났는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운 8월의 어느날, 매미가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소리에 집안에 앉아있으려니 갑갑하기 그지 없어서  나는 말은 듣지 않고 애만 먹이는 아이 둘을 끌고  수영을 가기로 했다. 그때만해도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는 수영장이 별로 없었던거 같다. 유명한 호텔1층에 신립한 수영장이 있어서 거기로 가기로 했다. 어릴 때 도랑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헤염을 쳐본 일은 있지만 시내로 와서 살면서 고급 풀장에서 수영하기는 나도 처음이였다. 아이들도 사우나 욕실에서 허우적대는거 보다 수영장을 간다고 하니 신이 나서 방방 뛰였다.  수영장입구에서 입장료에 대해서 물어보니 어른은 50원이고 애들은 4살 이상이면 25원이란다. 앗싸, 잘 되였네. 우리 딸애가 4주세이니 무료로 놀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운터 아가씨한테 넉살 좋게  큰 애는 8세이고 작은 애는 아직 4주세가 안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애 둘이 줄을 서서 앞다투어 “아니예요. 다섯살입니다.”라고 하는게 아닌가. 내가 너무 놀라서 그 아가씨한테 “아닙니다. 세는 나이로 5세고 실은 4주세가 안되였어요.”하면서 궁색하게 변명을 했다. 솔직히 4주세가 안되였다. 그런데 여덟살 된 큰 애가 못마땅한 듯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였다. “아니예요. 내 동생은 지금 다섯살입니다. 설을 쇠여서 다섯살 된지 오래됐어요. ” 그 카운터 아가씨 앞에서 얼마나 창피한지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다 알렸다.  엄마는 한사람 수영비라도 아끼려고 안깐힘을 쓰는데 애들 둘은 정의의 용사인양 엄마를 비난하고 다섯살이라고 빡빡 우기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김에 돌아서서 애들을 째려보면서 우리말로 큰소리로 호통쳤다.  “가만 있지 못해? 혼 좀 나야 입 다물거니. ” 애들은 금세 주눅이 들어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나는 다시 아가씨를 쳐다보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구구절절 해석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어이없어보였다. 바로 그 순간,기차표 값을 아끼려고 다 큰 나를 등에 업고 기차에 오르던 우리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가 기차에 오르면서 나더러 머리를 푹 숙이고 자는 척 하라고 하여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큰 키를 오그리고 자는 흉내를 냈었다. 돈이 귀했던 그 세월에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엄마를 도왔다는 자부심에 은근히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기차역 일군들을 속이는 엄마가 못마땅하게 생각되였지만 엄마를 위해 돈을 아꼈다는 생각에 어느새 엄마등에서 흐뭇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우아하고 고운 면사포를 서슴없이 내려놓고 기꺼이 악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나와 엄마가 모처럼 겹쳐지는 순간이였다. 다행히 아가씨가 융통성이 있어서 작은 애는 그냥 놀아도 괜찮다고 선심을 베풀어서 나는 난처한 경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찝찝한 느낌은 계속 남아있어서 수영장으로 재빨리 들어가버렸다. 나의 엄마는 용케 기차를 공짜로 태우면 나에게 호떡을 사주군 했었다. 솔직히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의 행동에 선뜻 반기기는 싫었다. 한순간 엄마가 혹시 나쁜 사람은 아닐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내심 호떡을 얻어먹는 재미에 나름대로 행복감을 느꼈다. 만약  나도 아낀 수영비 25원으로 애들에게 피자나 치킨을 사준다면 우리 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가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역시 어렸을 때의 나처럼 엄마를 아니꼽게 보다가도 즐겁게 야호를 웨치지 않을가 싶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제쳐놓고 치렬하고 품위 떨어지게 살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정작 자신을 완성해가는 우아함과 지적인 수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뿐이지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엄마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우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종래로 해명할줄 몰랐다. 엄마를 주름지게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살림을 영위해나가는 알뜰함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엄마의 고운 면에서 착한 품성을 배우고 가끔은 부적절한 처신에서 살아감에 꼭 필요한 융통성을 배워간다. 이 세상은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품위를 잃어가며 자식을 사랑해주는 엄마들이 있어 한층 더 따스하다. 오늘도 엄마들은 아이들이 먹다 떨군 피자를 주어들며 궁색한 변명을 하신다. “파지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운동삼아 줏는거야.”  
28    내 안의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댓글:  조회:1556  추천:1  2018-07-30
   한해의 끝자락이 나붓거리면서 초중에 다니고 있는 딸애도 기말시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달 전부터 이 잡듯 샅샅히 훑으며 복습을 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담임선생은 애들 핸드폰은 절대 금물이라고 위챗그룹에서 학부모들에게 따끔하게 이른다.       핸드폰은 청소년 아이들에게 있어서 정말 부모 못지 않게 중요한 것 같다. 잠간이라도 이리저리 훑으며 메시지 확인을 하고 난 후에야 마음 놓고 숙제를 하는 우리 딸애다. 성적은 반급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선생으로부터 칭찬도 여러모로 듣는 아이기때문에 평소에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도록 자각에 맡기는 편이다. 그래서 핸드폰은 하루에 얼마나 오래 다뤄야 할지 혼자 결정하라고 했더니 한시간을 제의했다. 평소에는 별 문제 없이 승낙했다.         헌데 요즘은 담임선생으로부터 큰 제지를 받았다. 기말복습 동안 핸드폰은 무조건 부모가 간수하고 있으란다.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고 애들 자각성을 한번쯤은 의심해보라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딸애한테 오늘부터 핸드폰은 엄마가 갖고 있을 거라고 했다. 이것은 선생님의 요구일뿐만 아니라  엄마가 봤을 때도 시험기간만큼은 핸드폰과 거리를 두는게 좋을 거 같다고 했다. 딸애는 강하게 반발했다.  “엄마는 나를 믿지 못해요. 나는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고 핸드폰을 잘 관리할 수 있다고요.” 딸애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아니, 영영 안주겠다는 말도 아니고 너 시험기간만 엄마가 갖고 있겠다는데도 안된다는 거야. 너네 반 대부분 애들은 아예 오래 전부터 핸드폰을 다치지도 않는다고 하잖아.”     엄마의 권위가 늦가을의 나무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요즘 오랜만에 딸애와 기싸움을 하니 갑자기 성수가 났다. 지고싶지 않은 오기도 메뚜기처럼 풀쩍 튀어나왔다.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는 엄마를 등뒤로 딸애는 꽝하고 문을 닫아걸었다.  “흥, 너에게 핸드폰을 주는 것은 도둑에게 열쇠를 주는 격이지.” 딸애는 저녁내내 무엇을 하는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  나도 질세라 딸애의 방문을 가끔 돌아다볼뿐 들어가 달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맞은 놈은 다리 펴고 자고 때린 사람은 쪼그리고 잔다고 잠을 설치는 사이에 아침이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나 상을 차리는데 딸애가 방에서 징징 걸어나오더니 “엄마. 오늘 나 학교 안갈래요. ”하지 않는가?  “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등교를 거부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기가 심할 때도 딸애는 약을 챙겨 먹으면서도 학교에 가지 않았는가. 결석은 딸애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더니 갑자기 당돌해진 건가. “나 어제 숙제를 안했어요. ” 딸애는 나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천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더니 숙제 안한 것도 결석 원인이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염 같이 발작을 하려고 할 때 다행히 내 안의 다른 목소리가 나를 잡았다.  (그랬구나. 어제 핸드폰 압수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구나. 이해해줘.) 나는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그래. 숙제를 안하면 선생님한테 혼나니 학교 가는 건 무리겠다. 그럼 어떡하면 좋지?”  “하여튼 오늘 학교 안갈래요. 숙제 안하고 학교 가면 혼나요. ” 딸애는 어느새 고개를 떨구고 가라앚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건 엇나가는 말이란 걸 인차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딸애는 아침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으며 교복도 반듯하게 챙겨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 황금삼백냥이 없소이다 하는 것과 같았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숙제를 하지 않고 학교 가는 경험을 한번 해보는 거야. 이런 경험도 아주 색다르지 않을까. 안 그러면 또 이렇게 할수도 있지. 지금부터 숙제를 해서 아침 아홉시 쯤에 학교를 가는 거야.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두가지 제안를 했다. 그리고 먼저 밥을 먹자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딸애는 밥 안먹을래 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을 펼치고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밥 먹는 걸 거절했으니 엄마한테 이기고 체면은 세운 셈이라 할까.  그날 딸애는 여덟시 전에 숙제를 마치고 학교로 갔다.  딸애의 첫 등교 거부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밤길을 오래 걷다보면 도깨비를 만난다고 아이를 키우다보면 본의 아니게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순이 생길 때 마음의 탕개를 느슨히 풀면 하는 일이 가벼워 진다. 물론 부모 자식 간의 일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흔히 세상사란 맞서기보다는 강물이 돌을 어루쓸 듯 다독이면서 넘기는게 더 효율적이고 마진이 남는 법이다.
27    새옹지마 댓글:  조회:677  추천:1  2018-07-23
터벅터벅. 순희는 출근을 마치고 지친 다리를 끌며 집에 도착했다. 남편과 랭전중인 순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표정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지. 대문에 공문이 한장 붙어있다. 자세히 보니 법원에서 내려온 전표(传票)가 아닌가. 순희님은 6개월전부터 집 대부금을 납부하지 않은 관계로 건설은행에서 로산구인민법원에 소송이 걸려왔습니다 …… 순간 머리가 뗑해났다. 아니. 대출? 요즘 왜 핸드폰으로 대출납부 메시지가 오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메시지를 못받은지 퍼그나 오래된 것 같았다. 앗, 순희는 이마를 탁하고 쳤다. 폰번호를 설전에 바꾸었는데 은행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받을 리가 없었다. 집 대출은 매번 납부날자 며칠전이면 은행에서 친절하게 알람메시지가 날아오군 했다. 순희는 기계적으로 메시지를 보고 매달 갚아야 할 금액만큼만 대출통장으로 이체를 해서 납부했다. 그런데 공고문을 보고나니 정말 몇개월은 이런 메시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일에 정신을 팔며 다니느라 정작 중요한 집대출은 몇개월이나 내지 않고 있었다. 이 공고문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방치해둘지 모를 일이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착한 순희에게 법원에서 공고문이 내려오다니. 그것도 금융안건으로 말이다. 순희는 공문을 받아들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거 어떡하지. 혹시 집이 경매로 넘어간 것은 아닐가. 벌금을 많이 안길려는가. 소송을 어떻게 대응해야지. 이거 남편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가뜩이나 남편이 넉넉치도 않은 상황에 친구에게 빌려준 돈때문에 지금 순희가 바가지를 긁어대고 있어서 랭전중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순간 순희의 머리는 하얗게 비였다가 다시 거센 홍수가 밀려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문고리를 따고 집에 들어섰다. 이튿날 순희는 공고문에 있는 법관 전화번호로 전화를 여러번 했지만 애매한 뜨르릉소리만 들릴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이 법관은 자리를 안 지키고 대체 어디를 다니는거야. ” 할수 없이 순희는 은행 대출부 전화를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순희라고 하는데요. 집 대출 건 때문에 전화했어요.” “아, 순희예요. 순희라는 사람이 드디여 전화 왔네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복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희가 전화를 걸어와서 반갑다는  소리였다. “아, 네. 저희들이 아무리 연락을 해도 찾을 길이 없어서 법원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전표(传票)를 받았군요. 혹시 손님께서 전화번호를 바꾸셨나요. 10년을 꼬박꼬박 갚으셨는데 갑자기 안 갚고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은 했지만 남편 전화도 바꾸었는지 역시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어요. 하도 연락이 안되여서 정상적인 법 절차로 진행을 했습니다. ” 그쪽에서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설명을 했다. 아, 이런 일이였구나.  남편도 몇년전에 데이터량 관계로 전화번호를 바꾸었으니 그야말로 은행 대출부와는 아무런 연락도 닿을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지요. 고의적으로 갚지 않은게 아니고 단지 메시지를 못받고 잊어먹고 안 냈는데요.” 구차하지만 구구절절 변명을 늘여놓았다. “네, 그래서 저희들이 변호사 한분을 소개해드릴게요. 손님과 연락이 안되여서 대리변호사가 여태 법원과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오래동안 연락이 안되면 집이 경매로 넘어갈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 순희는 철렁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변호사 연락번호로 바로 전화를 했다. 변호사는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이 이제 피고인과 연락이 되였으니 여차여차 리유를 설명하고 날을 약속잡아 법원으로 함께 가서 조정을 하자고 했다. 법원까지 가야 한다니 순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기업도 운영하고 자질을 높이려 여러가지 공익활동에도 몸소 참여하는 순희가 모범시민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한다니 기가 막힐 일이였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였지. 남편하고 상의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침에도 밥을 먹을 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려 삼켰었다. 시원하게 혼줄 날 것이 뻔했다. 자기가 돈 뜯겼다고 앙앙불락하더니 순희녀사님도 이런 일을 만들 수가 있냐고 랭소할 것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애들한테 밥상머리에서 구구절절 엄마를 비난할 것이다. “너네 엄마는 말이야. 혼자 똑똑한 척하더니 지금 법원놀음하게 생겼단다. 흐흐흐흐” 아휴, 생각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다. 여태 애들만 내편이구나 하고 버티고 살아왔는데 애들은 또 엄마의 이런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일가. 순희는 억울한 나머지 깊은 고뇌로 허덕이던 몇개월 전으로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지난 설을 앞둔 12월이였다. 남편과 같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련이은 인원감소로 그리고 건물임대기한 만기로 지금보다 더 작고 아담한 공간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설전이라 오더가 넘쳐나는데다가 하청업체 관리도 해야 하는 판국이였다. 한쪽으로는 트럭으로 기계설비를 실어나르며 이사를 하고 한편으로는 자재업체가 설휴가에 들어 가기전에 자재를 확보해야 하기에 미리미리 자재대금을 송금해야 한다. “으흠, 이제 보니 전자대문이 원할하지 않던데 레루가 망가졌더군. 그거 내가 큰 돈 들여서 설치한 것인데 고쳐놓게나.” “숙소에 벽에도 못을 마음대로 박아놨던데  그거 다 수리해주게.”  건물주가 이사를 간다고 하니 심술을 부리는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따박따박 대꾸를 하면 더 불리해질게 뻔했다. 이 판국에 또 시집편 삼촌이 사놓은 집이 있는데 역시 한국으로 일하러 떠나면서 임대를 순희네한테 맡겼다. 그런데 그 집이 또 물이 새여 아래층을 다 후줄근하게 적셔놓았다. 아래집에서 배상을 해내라고 하니 세입자는 건물 자체 상수도가 터진 것을 자기는 부담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삼촌은 자기가 살다가 물이 터진 것도 아닌데 세입자가 물어줘야지 어떻게 자신이 배상을 하냐고 화를 내는 바람에 설득은커녕 되려 순희가 구정물 세례를 받은 셈이다. 이런저런 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원래 건물주가 한수를 더 친다. 전화번호를 명의변경을 못해주겠단다. 그런 의무가 없단다. 정말 고약하다. 회사 전화를 설치할 때 건물주 이름으로 신청한거라 핸드폰번호도 건물주 이름으로 신청이 되였던 것이다. 이사를 가는 마당에 건물주와 따지고 들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것 같아 화김에 새 전화번호를 땄다. 회사일도 많고 가족일도 복잡한 상황이라 부지런히 전화번호를 변경했다고 메시지를 날렸지만 정작 자신의 은행대출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실컷 절하고 자기집 조상은 술을 안 권한 셈이다. 그뒤로 설연휴가 들어가고 설 쇠고 회사 복귀해서는 새로 이사한 공장을 꾸미고 정리하느라 두달이 지나갔다. 애들도 졸업반 마지막학기 개학이라 눈코 뜰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 나날들은 여기저기 뛰여다니느라 머리들어 태양도 본적이 없었던 거 같다. 팽이처럼 돌아치는 인생살이였다. 그래도 방향을 잃지 말아야지 하면서 견뎌온 나날들이다. 순희는 여태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법원에서 전표가 날아오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보듯 놀라고 답답한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남편한테 알려야 한다. 살림을 대체 어찌하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다달이 물어야 하는 은행대출을 메시지를 못받아서 안냈다고 하면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도 반년씩이나 안내고 있었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남편앞에서 온갖 꼼꼼한체를 다 하면서 쓸데없이 헤프다고 얼마나 닥달을 했던가. 이제와서 순희 실수로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남편의 얼굴은 어떨가. 순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장변호사입니다. 담당법관하고 이번주 수요일날 약속 잡혔으니 그날 오전 여덟시까지 법정에 와줄 수 있으시죠.” “네. 그리하겠습니다.” 순희는 약간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빨리 해결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냉큼 대답했다. 막막하다고 생각할 때는 막 해야 한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 까짓거 법정에 갔다와서 보자. 어떤 판결이 날지 나도 모르니까. 그러고 이게 머 다 내 잘못인가. 나도 일부러 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처녀가 애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순희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이젠 자기방어단계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나름 떳떳해진거 같기도 하고 숨도 길게 나오고 어깨도 쫘악 펴졌다. 오랜만에 홀가분해졌다. 살것만 같았다. 래일은 또 래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하면서 수요일을 기다렸다. 수요일 아침 일찍 순희는 콜택시를 타고 시내에 있는 법원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법원이라는 곳을 가본다고 생각하니 그곳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했다. 이미 엎지른 물인데 죽으라는 법이야 없겠지 하는 심정이다. 죽은 돼지는 따가운 물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더니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이렇게 모범이고 기품 있는 시민이요 하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정장에 스카프까지 착용을 했다. 아무렴. 내가 낸 세금으로 일을 하고 먹고 사는 법관인데 설마 나쁜 의도로 체납한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순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거란 생각도 기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꾸역꾸역 떠올렸다. “변호사님. 여기 사자 두 마리가 서있는 법원 동쪽 문에 도착했습니다.” 장엄한 법원앞에 내린 순희는 그 위풍에 슬슬 겁이 질렸다.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땀구멍이 스륵스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목 뒤덜미도 섬뜩해지는 것 같앗다. “네. 동문이 안 열려있을 것입니다. 구석에 보면 쪽문이 있는데 거기로 6층으로 오셔서 저한테 전화 주세요.” 변호사는 변호비용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종일관하게 침착하고 친절하게 순희를 대했다. 다행이다. 변호사가 괜히 변호사겠는가. 들이마신 먹물은 얼마며 머리도 얼마나 령리하겠냐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갔다. 6층 복도에서 변호사를 만나니 변호사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 “먼저 여기 의자에 앉아서 안건을 설명드리겠습니다. 2008년부터 건설은행융자로 노산구에 위치한 아파트를 구매했지요. 순희님과 순희님 남편 두분의 담보로 융자 50만을 받았고 20년에 거쳐 다 갚기로 했죠. 거의 10년을 꼬박 갚았는데 연락두절이 되여서 건설은행 행장이 순희님한테 소송을 걸었구요. 현재 남은 금액은 35만이고 그에 해당한 법원에서 받을 소송비와 로펌에 지불해야 할 변호비는 여기에 쓰여 있는 금액 그대로입니다. 융자할 당시는 50만이지만 리자를 다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첫 몇해는 거의 리자를 갚는거로 되여있기 때문에 원금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헉, 이렇게 많다니. 만원이 펄쩍 넘어갔다. 이 돈이면 대출을 몇개월 갚을 수 있었다. 정말 후회막급이였다. 배가 아팠다. “이 제의에 동의를 하시고 조정을 받아들이시면 이 비용에서 소송비와 변호사비용을 절반을 깎아줍니다. 그리고 대출을 일시불로 완납할 시 변호사비용이 또 30프로 절감이 됩니다. “ “절반? 30프로?” 순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맞고소를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하겠는가. 순순히 조정을 받고 절반 비용 절감을 해야지. 그런데 완납을 하면 30프로 내려준다는데 30몇만원을 어디 가서 한시에 내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50프로 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았다. 결국은 법정출두라는 것이 법관과 작은 사무실에서 간소하게 의논하고 서류 작성하고 싸인하고 끝났다. 체납금을 내고 소송비 그리고 변호사비를 내면 일은 원만히 해결된 셈이다. 돈으로 액을 피했다고 생각하자. 어찌 좋은 날만 있으랴.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이 일을 통해 평생을 살아도 못할 법정구경도 했으니 경험 넓혔다고 생각하자. 헌데 이 일을 어떻게 남편한테 말을 해야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순희는 매사에 깐지고 세심하고 책임감이 있는 녀자로 남편에게 알려지지 않았는가. 남편이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어 왕창 뜯겼을 때 사정없이 몰아부쳤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새로운 아이템을 가동시켜보려고 애쓰다가 손해보면 구구절절 잔소리를 늘여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남편은 아무 일이나 점점 순희한테 털어놓기 싫어했다. “아니, 돈 빌려간 사람은 골프 치러도 잘 다니던데 우리 돈은 언제 갚는대요. 내가 그렇게 빌려주지 말자고 했는데 기어코 빌려주더니.” “아참, 그만하라구. 누구는 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가. 돈이 없다는데 난들 어떻게 하겠소.”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듣는 시늉이라도 하던 남편은 연이은 바가지 긁는 소리에 순희를 보면 슬슬 피해다녔다. 순희는 택시를 불렀다. 둘이 랭전중이지만 곧장 회사로 가서 남편한테 알려야 했다. 이젠 더 이상 지체할수가 없었다. 대체 이 법원 전표는 왜 나한테 날아왔지. 내가 무얼 잘못했지. 남편한테 무엇부터 먼저 알려야 하지. 일이 꼬인데는 무슨 원인이였지. 순희는 택시안에서 눈을 감았다. 심한 어지럼증때문인지 멀미때문인지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보. 할 말이 있어요.” 순희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편한테 실토를 했다. 눈을 딱 감았다. 순희가 남편한테 노발대발했던 것처럼 자신도 심한 소리를 들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게 정말이요. 그런데 왜 진작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소. 정말 혼자서 법원 갔다오는 길이요? 이 아둔한 마눌이 글쎄. 이런 일은 남편인 나랑 같이 해결해야지. 혼자 무섭지도 않았소? 그래서 요즘 얼굴이 반쪽됐구만. 난 또 나한테 화가 안 풀려서 당신 마음이 심란해서 그러는가 했지.” 의외로 남편은 순희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흑흑.” 비난대신 관심이 섞인 위로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옥죄였던 마음의 바줄이 스르르 풀리면서 순희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그동안 남편의 잘못을 쪽집게 집듯 집어내면서 비난한데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제 잘못으로 그만 큰 손해를 보게 됐어요. 흑흑.” “괜찮소. 돈은 또 벌면 되지만 마눌 혼자 큰 일 때문에 속 썩이게 해서 미안하오.” 남편은 얼른 순희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혼자 법원까지 가게 해서 정말 미안하오. 그래도 당신이 여장부요. 큰 일을 했소. 우리 애들한테도 자랑스럽게 얘기하겠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우리 식구들 간만에 외식하는게 어떻소. ” “욕 먹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외식까지 시켜줘요?” “허허. 나도 요즘 당신 눈치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먹은 거 알지. 그리고 당신도 이 일로 속 썩이느라 얼굴이 헤쓱해졌구만. 애들도 힘들게 공부하는데 오늘만큼은 맛있는거 먹고 푹 쉬게 하고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당당한지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 “아니.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애들한데까지.” “아니요. 우리 애들도 이젠 다 커서 집안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장차 커서 살아가면서 무슨 일에 부딛칠 수 있는지 알아야 할 일이요. ” 순희는 남편의 리해와 지지가 고마웠다. 그동안 대출사건때문에 혼자 속을 끙끙 앓은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자자. 얘들아. 오늘은 우리 엄마를 위해서.” 남편과 아이들의 환소속에 순희는 쑥스럽게 잔을 들었다. 혼자 긴장하고 무서워 했던 날들이 안개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였다.    
26    나부지몽 罗浮之梦 댓글:  조회:1139  추천:1  2018-06-30
수필 나부지몽(罗浮之梦) 김영분   4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호적은 한 사람의 좌표로 통했다. 호적부 하나면 이 사람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물론 하고 있는 일까지도 알 수가 있었다. 농촌호적이면 땀 흘리며 흙을 뚜지는 농사군이고 시내 호적이면 깨끗한 옷차림에 책상 머리에 앉아서 놀고 먹는 쌍발쟁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직업도 단순했고 할 수 있는 일도 단조로웠다. 그 시절 쌍발쟁이는 더없이 빛나는 광환이였다. 개혁개방전 날씨 눈치를 살피며 농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매달 봉급을 현금으로 받는 시내 사람은 샘이 나도록 부러운 존재였다. 탈곡이 끝나고 공량을 다 바친 후 조금 남은 여유의 쌀로 두부도 바꿔 먹고 애들 옷견지도 마련해야 하는 농민들에게 현금을 쥐여 보기란 하늘에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에 있는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을 출세시켜 시내사람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각오가 철석같이 견고했다. 그 시기에 농촌을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대학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군대라도 보내서 신분세탁을 하려고 애썼고 처녀들은 조금은 못났더라도 공량을 먹는 시내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시내에서 살게 되기만 하면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생활이 펼쳐질 것 같았다. 도시인이 된다는 것은 비가 새는 초가집이 아닌 차곡차곡 정연하게 개여져 있는 아빠트에서 살 수 있고 흙투성이가 아닌 깨끗한 시멘트 길에서 걸을 수 있다는 버젓한 꿈이였으며 달과 별을 지고 다니며 허리 구부려 땅과 씨름해야 했던 고달픈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그러다가 세상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개혁개방의 물살이 빠르게 퍼지며 시내로 진출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마른 목을 추겨주었다. 90년대가 되자 전란을 피해 만주벌판으로 이주하여 투박한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이삭을 춤추게 했던 농민들의 발걸음은 연해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족 농민들은 한국기업이 중국 연해도시로 대거 진출하는 보폭에 맞춰 홍수처럼 도시로 몰려왔다. 가뜩이나 배고픈 살림에 갑작스레 홍수에 떠밀려 오다나니 변변한 옷견지 하나 준비를 못하고 빈 주먹만 쥐고 도시복판에 턱 하니 뻗쳐 서있게 되였다. 소망하던 도시 생활이였지만 꿈에서만큼 버젓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농촌에서 뒹굴면서 투박스레 커온 덕에 매집이 좋아서 그나마 닥쳐오는 천만가지 시련을 용케도 이겨냈다. 민들레 씨앗처럼 뿌려지는 곳을 탓하지도 않고 아무리 으슥진 곳이라도 해빛이 조금이라도 비추면 파란 잎을 피우고 거센 비바람이 불어치면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우리는 물과 같이 세계 각곳으로 스며들었다. 연해도시는 물론 해외 진출도 서슴없었다. 청도는 이미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가 되였다. 곳곳에 우리 말소리가 들려오고 한국인이 청도에 오면 중국가이드가 필요없이 한국말이 통할 정도이다. 보잘것없던 농민이 대형 공장을 운영하는 대표가 되여 있는가 하면 음식체인점 사장이 되기도 했다. 매년 우리만의 운동회가 열릴만큼 사회활동도 활발하다. 자체로 예술단을 묶어 자선공연을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이면 20여년 사이에 농촌 사람으로부터 시내 사람으로 화려한 변신을 이룬 셈이다. 번데기는 자기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나방으로 다시 태여난다. 그만큼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많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그래야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노력하는 과정은 얼마나 눈물겨웠을가. 듣지고 보지도 못했던 회사 관리를 하려니 본토배기 직원들의 반발은 밥 먹듯 했고 열에 아홉은 모르는 현지 행정업무를 뛰여 다니려니 공무원들의 오만방자함은 주먹으로 한대 치고 싶은 심정이였다. 건물주의 행패도 잠에서 자다 벌떡 깨나게 했으며 현지 운전기사들의 잔꾀는 또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게 했는가. 중국 수나라에 조사웅이 나부산(罗浮山)에 이르니 소복담장한 (素服淡妆)미인이 반갑게 영접을 하였다.아릿다운 미인의 향기에 취해 술을 마시고 마음껏 즐겼는데 이튿날 깨여나보니 활짝 핀 매화나무를 끓어 안고 자고 있었다.우리가 꿈꿔왔던 세련된 도시생활은 그야말로 나부지몽과 같았다. 비온 뒤의 땅이 더 굳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우연히 뿌려진 민들레는 더 아름답게 피여날 수 있었다. 요즘 청도는 현지에 집을 산 사람이면 호적을 떼여올 수 있다는 새로운 정책을 펴냈다. 그러자 파출소 앞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20여년전 농촌에서 올라와 도시인으로 살아 남으려고 아득바득 발버둥 친 사람들은 이젠 서류상으로 명실공히 도시인이 되였다. 수십년의 인생길에서 어린 시절은 가장 비옥한 농촌 땅에서 튼실하게 자랐고 울바자가 듬성듬성 세워져있는 산간마을을 탈출하는 꿈을 수없이 꾸어왔다.제일 불타는 청춘은 타향에서 도시인 행세를 하면서 몸부림을 치며 호적에 적혀있는 툰이라는 동네 이름이 창피하게 느껴져 하루 빨리 번듯한 시가지 주소가 적혀있는 시내호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절벽에 가냘프게 붙어서 능금을 따는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은  덕분에 나도 툰이 아닌 도로 번지수가 적힌 호적을 거머쥐였다.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담담할 뿐이다. 도시인은 도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우직한 중년이 된 지금은 향수에 젖어있다. 고향의 눈 내리는 사진 한장에 목메이고 가로수 심어져 있는 동네길이 그립다. 어릴 때 뛰여놀던 학교 마당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찰랑이는 도랑에 헤염치는 버들개치가 사무치게 보고싶다. 툰이 적혀져 있던 곳의 추억을 파먹으며 도시에서 살아갈 새로운 힘을 얻군 한다. 늦가을의 황소처럼 게으른 볕쪼임을 하던 농촌의 리듬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호적은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만큼 중요한 좌표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꽃이 피고 희망을 품으려는 의지와 실천하는 노력만이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라는 것을 알았다. 세월의 변화를 온 몸으로 맞으며 내가 딛고 있는 길에 내 삶이 펼쳐진다.  
25    제가 한상 차릴게요 댓글:  조회:1795  추천:1  2018-06-30
수필 제가 한상 차릴게요 김영분   오디오 북에서 명절마다 시댁에서 고된 주방일로 쓰러져 눕게 되는 한 어설프게 착한 며느리의 삶을 듣게 되였다. 손이 커서 장을 많이 봐오는 년로한 시어머니 덕분에 다리가 붓도록 서서 음식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준비가 다 끝나갈 무렵이면 곱게 차려 입은 손우 동서가 두손 가득히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사뿐히 나타나서는 도울 일 없냐고 상냥히 안부를 물어온다. 식사내내 다른 식구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유하는 시어머니와 잔심부름만 시키는 남편은 전혀 그녀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착하게 보이고 싶은 며느리는 웃으면서 불만을 쏙 숨기고 가족내 행사를 원만히 치른다. 쓰러진 며느리 때문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바보천치같다는 생각에 얄밉기까지 하였다. 곰처럼 미련하게 일만 할줄 알았지 자기 자신은 억울해도 그냥 참고 지나는 무심함이 너무 한스러웠다. 한편 나자신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였다. 설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바리바리 큰형님네 집으로 모인다. 회사일을 하는 관계로 그믐 전날에야 시댁에 도착한다. 그러면 설 장은 물론 웬만한 음식은 다 준비되여 있다. 시어머니와 큰 형님이 바쁜 와중에 다 준배해 놓은 것이다. 막내 며느리인 나는 애들 손을 잡고 멋내기 코트를 차려 입고 나타나서 설인사를 깍듯이 해왔을 뿐이다. 설준비 때문에 힘들어 하는 며느리를 보니 새삼스럽게 해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해주시는 시어머니와 큰형님에 대해 숙연히 고마워지는 한편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손님처럼 살며시 맛있는 음식만 얻어먹고 돌아오는 자신이 갑자기 사연속의 동서처럼 느껴져 죄스러운 마음이 갈마들었다. 하지만 설 쇠는 내내 몸이 편하다고 마음마저 가벼웠던 건 아니였다. 앉는 자세도 서성이는 모양도 어색하기만 하다. 평소에 우직스럽다가도 시댁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방일이 서툰 나로서는 마늘 바르고 설겆이 같은 허드레 잡일을 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일을 하는 며느리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느라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치지만 나처럼 얻어먹기만 하는 며느리는 왜 마음이 송구방석일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작은 며느리라고 내리 사랑을 받기만 했지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당연지사로 번잡한 식구들에게 갈비를 찌고 닭을 삶아 대접하는 일은 지레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놀고 먹는다는 인상을 남길가봐 은근히 걱정이 되였다.그래서 주방에 큰 일은 맡아서 할수는 없지만 과일 깎아서 돌리는 일이라든가 맛있게 먹고 편안한척 하고 같이 오락하고 웃고 노는 것은 잘 할수 있었다. 좀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 짐을 좀 덜어드려야겠다 이런 생각은 잠자리가 물 차듯 잠시 스쳐지났지만 주인공 의식이 결핍했던지 어떻게 처사할줄을 몰라 늘 웃고 있으면서도 긴장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또 내 집이 아니니 지레 음식 장만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에 설겆이에만 눈독을 들여 나도 설을 쇨 때 일을 좀 했노라고 자기위안을 하기도 했다. 항상 받는 립장에서 신세를 크게 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에도 남의 신세를 지기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 도움을 받으면 꼭 보답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아둔하게 설에는 왜 손우 동서에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가 하는 후회가 절로 생겨났다. 일이 사랑이라고 봉투보다는 팔소매 걷고 나서는 모습이 진정 보답이였을텐데 말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주어들은 기억이 있어서 미안한 마음을 감사하다는 말로 메우려고 애쓴다. “정말 맛있어요. 이 많은 음식 장만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 “올해도 얻어먹기만 하네요. 항상 고마워요.” 헌데 이런 인사말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배처럼 하면 할수록 더 미안한 감이 더 든다. 시어머니와 형님이 괜찮다고 연신 손사래를 쳐도 자신은 한없이 미안하고 작아진다. 내 집이 아니더라고 십여년 넘게 설 쇠는 동안 한번쯤은 내가 여러 식구들을 대접하겠노라고 한상 차렸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념불에는 마음이 없고 제사상에만 성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고맙다는 말보다는 서툴더라도 한번쯤은 음식을 장만해봤어야 했다. 일 때문에 그믐날에야 시댁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어찌보면 얌전히 얻어먹기 위한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주인공의 마음으로 다가갔더라면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한 설이였을 것이다. 설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시어머니와 형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보면서 올해 설에는 나도 팔 걷어부치고 씩씩하게 한상 차리리라 다짐해본다. 갓 배운 감자탕에 생선도 굽고 오이도 시원하게 무치고 소고기 불고기도 하련다. 십여년동안 루적되었던 미안함과 그분들에 대한 사랑을 따뜻한 밥상에 담아보련다.  
24    세상과 맞선을 보다 댓글:  조회:843  추천:1  2018-06-30
보름이라는 설연휴를 마치고 회사에 다시 만난 동료들은 그간 할 얘기들이 많았던가본다. 그 가운데서도 맞선보기 화제가 인기를 끌었다. 동료들은 산동지방 시골태생이 많았다. 아직 싱글인 친구들은 설에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들이 미리 맞선 상대를 여럿 포섭해놓는다고 한다. 만나보고는 직감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약혼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동료 중에는 그런 행운을 잡은 친구는 없었다. 꼬작꼬작한 시골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개구리가 왁자지껄 합창하는 동네를 벗어나 나름지기 크고 번화한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몇년은 도시인으로 살았던 그들이다. 혼기는 꽉 찼는데 도시의 약소군체로 근근득식 살아가는 그들은 우아한 교제도 그럴듯한 만남도 없다. 오로지 춥고 허줄한 공장에서 낮에는 박스를 옮겨가며 일을 하고 퇴근을 하면 핸드폰 게임이나 싸구려 야시장을 전전하며 여가시간을 보낸다. 비슷한 처지의 청춘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며 한쌍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내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외톨이 문제를 효률적으로 해결하려고 휴가때 맞선을 봐서 빠른 시간에 결혼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짧은 시간에 맞선을 봐서 결혼을 결정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어떤 사람은 며칠을 사이두고 여러사람과 맞선을 본다. 본의 아니게 인신매매를 당해 팔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는 자신이 직접 이런 삶을 선택하고 있지 않는가. 실제로 몇해전 한 여직원은 설에 맞선을 보고 오개월 후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날 친정어머니가 혼례금을 터무니 없이 요구하는 바람에 신랑쪽에서 결혼을 깨버렸다. 맞선 후 세번을 고작 만난 두 사람이 전화로 서로 연락하면서 준비한 결혼식이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여직원은 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이 혼미해서 다른 도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핸드폰이며 지갑을 잃어버렸다. 싸구려 여인숙에 들었다가 하마트면 변을 당할 번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제일 두려웠던 것이 다시 회사로 돌아와 마주할 결혼사탕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의 눈길이었다고 한다. 질투를 하던 동료들은 쑥덕이기도 했고 친한 자매들은 위로에 위로를 거듭하니 그 녀는 숨을 쉴수가 없었다. 엄마는 설이 되면 또 맞선자리를 주선해 놓았다고 시름 놓으라고 자꾸 전화가 왔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작업사고도 여러번 내고 결국은 사표를 냈다. 어디로 떠나갔는지 여태 소식이 없다. 그때 그녀가 한없이 가여웠다. 혼기가 꽉 찼다는 이유로 섯불리 결정한 결혼은 얼마나 큰 상처로 그녀를 찌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아주  본능적인 욕구이다.  그렇지만 이것조차 순리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와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설이 되면 맞선에 시간을 떼워야 하고 또 앞날이 어떨지도 모르는 도박같은 결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삶은 우리가 소망했던 것보다 더 줄수도 있고 적게 줄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의 눈길을 건네보자. 우리는 훨씬 많이 누리고 있으니 좀 나누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주위 이웃들을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자. 그리고 주어지고 누릴 수 있는 모든것에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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