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http://www.zoglo.net/blog/yingfen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63 ]

23    사기 댓글:  조회:916  추천:1  2018-05-03
미니소설 사기 김영분    모 쇼핑가 2층에 위치한 강당이다. 안에는 어림잡아도 백명은 넘을 듯한 할머니들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무대에서는 밴드가 곡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검정 쟈켓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준수한 중년 남자가 마이크를 현란하게 돌리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잘한다. 잘해. 앵콜.” “박지점장이 최고여.”  중년남자를 둘러싸고 앉은 객석에서 흥에 겨운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되여 무대를 향해 소리지르고 있다. 흘러간 청춘이 야속한참에 터프하고 흥겨운 메들리는 가을에 말라가는 락엽같은 할머니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숙자할머니도 부자연스럽게 박자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복덩이 홍보관이 해변의 작은 도시에 자리잡은지 한달이 되어간다. 숙자 할머니는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들이 나누어 주는 작은 쪽지를 받고 추천 받아서 열심히 출석도장을 찍으며 다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매일 노래와 춤으로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준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휴지나 간장과 같은 생필품을 공짜로 나누어 준다.  그리고 운이 좋을 때는 점심에 간간히 떡국도 얻어먹을 수 있다. “아이구 사모님, 래일은 건강에 억수로 좋은 천일염으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친구들을 데리고 꼭 나오세요. 자, 이 쪽지는 추천서이구요. 많이 데리고 오시면 선물도 많이 드립니다. ” 얼굴이 허여멀쑥한 박지점장은 푸짐한 선물과 구수한 입담으로 한달사이에 허리를 뒤로 제낀 로파로부터 90도로 구부린 할머니들까지 골고루 불러모았다. “사모님. 오늘 즐거우셨나요. 많이 웃어요. 웃어야 복이 옵니다. 웃으니 너무 예쁘잖아요. 소녀같아요. 래일은 더 재미있는 얘기를 준비했습니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뜬  할머니들을 박지점장은 친절하게 배웅을 하고 있다. 순간 숙자할머니는 황홀하다. 70평생에 언제 이렇게 사모님이라 불리워보고 왕후대우를 받아봤을가. 원수같은 령감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다 크지도 않은 아이들과 50을 갓 넘긴 자신을 저버리고 차사고로 그만 황천길로 먼저 가버렸다. 하늘나라로 떠나간 사람은 발 펴고 자는지 모르지만 령감이 떠나간 그날부터 숙자할머니는 혼자  두 남매를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느라 허리 펼새가 없었다. 살아 생전에도 무뚝뚝하기로 손 한번 살뜰히 잡아보지 못했다. 자식들은 다행히 둘다 대학을 나오고 혼기에 맞게 반반하게 시집장가를  가서 이젠 자기 살림을 온천히 하고 있어 그나마 덜 억울하다.     하지만 숙자할머니는 쉬지 않고 돌아가던 기계가 기름칠 할 때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 삐거덕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몸에 부품들이 제 기능을 충실히 하지 못할 신세가 되였다.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남들이 다 한국 가서 로후대책으로 돈벌이 한다는 그 흔한 보모노릇도 못할 지경이여서 딸네 집으로 와서 살기로 했다.  “경애야. 이봐라. 오늘은 몽고표간장이다. 요즘 안 그래도 간장 살려했더니 잘 됐다. 이 에미가 공짜로 얻어온거라 좀 내다보거라.”   “엄마두 참. 공짜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그 사람들이 할머니들한테 매일 공짜선물 주면서 잘 구워놓은  다음에 비싼 물건들 팔려고 그러지요.” 경애는 할머니들을 노리는 홍보관 사람들이 아니꼽던 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그래 니 아는게 많다. 이젠 에미 말이라면 그냥 메주로 콩 쑨대도 못 믿는구나. 이래서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고 했지라. 내 팔자에 무슨……흑흑” 어느새 숙자할머니는 서러운듯 손등으로 눈굽을 훔쳤다. 경애는 홀로 자식들을 위해 애를 쓴 엄마가 70이 되고 몸이 쇠약해지니 판단력도 흐려지고 유난히 자식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숙자할머니는 끝내 홍보관에 갔다 오더니 4000원짜리 침대커버를 두개 사왔다. “경애야, 빨리 와봐. 이건 토마린성분이 들어간 침대커버다. 토마린이 있어 원적외선을 방출한단다. 관절염도 고치고 실면증도 고칠 수 있대. 그리고 얼마나 튼튼한지  20년을 써도 문제 없단다. 너무 좋다 해서 두개를 샀다.”  “헉, 엄마!” 경애는 너무 놀라 소눈방울이 되여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좋으면 하나 사면 되지 그것도 두개씩이나. 지금 4000원하는 침대커버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설령 있다 해도 우리가 그리 비싼 커버 쓸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경애는 련주포처럼 마구 쏟아냈다. “아니. 절대 비싼 것이 아니다. 박 지점장이 자신을 믿고 한번 써보라고 했어. 그 사람 참으로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이 침대커버를 펴고 자보면 후회 안한다고 했어. 만병통치한단다.” 숙자할머니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석쉼한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고 안깐힘을 썼다. “엄마때문에 내가 못살아. 참 내원. 아, 나 몰라. 성준이한테 전화 할거예요.” 경애는 씩씩거리며 남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성준아. 엄마가 오늘 4000원짜리 침대커버를 두개나 사셨다. 어떡해. 너가 좀 말해봐.” 경애는 홱 하고 전화기를 엄마손에 쥐여주었다. “그래. 에미다. 성준아.” 숙자할머니는 잘못을 저지른 소학생처럼 풀이 죽었다. “엄마, 침대커버 사셨어요?” “그래. 좋다고 해서 너까지 주려고 두개를 샀는데 글쎄 너네 누나가 내가 비싸게 주고 샀다고 야단을 치는구나.흑흑”숙자할머니는 억울하다 못해 흐느끼였다. “엄마.그거 우리 장모님도 사왔는데 내가 잠을 자보니 몸도 상쾌하고 개운하고 좋더라구요. 나 안그래도 엄마하고 누나한테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 정보력이 좋아서 금방 알고 사셨네요. 참 잘했어요. ” “성준아, 정말이니? 그거 자보니 그렇게 좋디?” 숙자할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본다. “경애야, 전화 받아봐라. 내 말이 안 틀렸다잖아.” 경애는 눈쌀이 꼿꼿해서 전화기를 콱 나꾸어챘다. 수화기 저쪽에서 동생 성준이의 느긋한 목소리가 전해왔다. “누나, 엄마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엄마가 속으신거 같은데 즐겁게 샀으니 우리도 편히 받아주자고. 그 돈은 내가 낼테니 누나랑 나랑 효도하는 셈치고 속아주는게 어때? 다음엔 절대 속지 않게 내가 단단히 얘기해놓을게.” 앗. 성준아. 못된 놈. 언제 이렇게 철 들었니. 이러면 누나가 민망하잖아. “아. 그렇니. 이 침대커버가 그렇게 좋은 거야. 오. 알았다. 우리 엄마 참 잘 하셨네. ” 경애는 웃으면서 얼른 엄마손에서 커버를 받았다.  
22    내 생애에 찾아온 채찍 댓글:  조회:1338  추천:2  2018-02-26
수필 내 생애에 찾아온 채찍 김영분   도처에서 송년회가 찬바람을 타고 눈꽃처럼 활짝 피여난다. 정말로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올 한해는 어떤 한해였나 혼자 되짚어본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일도 열심히 했고 책도 틈틈히 새겨보았으며 제일 큰 성취는 뭐니뭐니해도 작가협회 송년회때 작가증을 떡 하니 받아쥔 것이였다. 오랜 짝사랑 같은 련애끝에 결혼증을 어렵게 따낸 기분이라 할가. 어깨가 으쓱해지고 괜시리 마음이 든든해졌다. 글을 금방 쓰기 시작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작가라 부르면 괜히 거짓말을 해서 사기를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주 쑥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결혼도 안하고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부모에게 털어놓는 경우와 비슷한거라 할가? 그래서 증서를 받아쥔 이틑날에 위쳇 모멘트에 “나도 이제부터는 증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한낱 종이장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 증서로 인해 되물리지도 못하고 이젠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려운 글쓰기를 마다할 리유가 깡그리 없어졌다.   글이 안 나온다고 징징댈 일도 없어졌다. 저울추를 삼킨 듯 이젠 마음을 글이라는 작자에게 꽉 잡힌건 분명하다. 증서가 없을 때는 짝사랑 하듯 조심스레 다가갔다면 지금은  짝사랑이 승화한 것처럼 더 열정적으로 글에 다가가고 싶어졌다.   이제부터 더 적극적으로 글에게 다가가야 할 마음이 생겼으니 본격적으로 짝사랑이 수면우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런 뜻에서 이 증서는 나에게 머뭇거릴 리유를 걷어내고 탄탄대로에로 달려나가게 하는 채찍이 되였다. 살아가면서 채찍 하나쯤 생기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애들도 다 커버리고 허무한 나이에 들어선 이 시점에 채찍이 있어 올해는 정말 팽이처럼 돌아쳤다. 그 덕에 이런 저런 모임에 자주 나가게 되여서 한가한 적은 없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도 아주 바쁜 일이였다. 그렇더라도 회사를 다니면서 한가히 글을 쓰겠노라고 시간을 낼 수도 없었다.그래서 항상 오후 세시쯤 일을 다 마무리 해놓고 회사에 앉아서 글을 구상하고 쓰고 지우고 하면서 두시간 남짓이 글을 쓴다. 저녁에 퇴근해서는 낮에 써놓은 글을 되살려 보면서 잘된 점과 보완할 점을 머리속에서 채 거르듯 꼼꼼히 다듬질한다. 저녁 설겆이를 마치고 운동과 독서를 끝내면 또 한번 소가 새김질 하듯 되짚어본다. 그리고 이틑날 아침 선생님과 교류를 하면서 글을 다듬는다. 한편의 완성된 글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작업을 거쳐서 문학지에  전달이 된다. 그곳에서도 채용이 될지 안될지 또 짝사랑 하듯 오랜 시간 숨죽이면서 기다려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남의 글을 또 많이 읽었다. 우리말 신문,잡지는 물론 베스트 셀러 책으로부터 무명 작가의 글까지 골고루 보기 좋아한다. 매 한권의 책에는 작가의 령혼과 숨결이 흐른다. 좋은 글귀는 줄을 그어놓기도 하고 메모를 해두기도 한다. 요즘은 오디오북도 많아서 출 퇴근 시간에는 전자책을 듣기도 한다. 이전에는 출근하면 점심은 의례 맛집에 가서 먹는 걸로 되여 있었지만 독서를 시작하면서 점심은 회사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맛집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여 조용히 책을 펼쳐본다. 회사원들과 사이도 돈독해지고 성격도 차분해지고 배속에 글이 들어있으니 마음도 든든해진것 같다. 독서모임에도 나가게 되였다. 책 나눔을 하기도 하고 짧은 강연을 해보기도 한다. 강연을 하기 위해서 원고를 작성하고 여러번 혼자서 소리내여 리허설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을 앉혀놓고 감정을 살려가며 강연 연습을 하니 애들은 눈이 올롱해서 엄마를 쳐다본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엄마를 보면서 시작은 아무때나 늦지 않다는 열정을 배우는지 관계하지 않고 엄마는 자기 일에 집중하기에 급급하다. 독서하는 사람들은 펭귄과 같다. 펭귄은 바다에 뛰여들기 전에 서로 눈치를 본다. 머뭇거리다가 한 녀석이 뛰여들면  다른 펭귄들도 덩달아 뛰여든다. 내가 책을 보고 글을 펴내자 주위에서도 따라서 책장 번지는 소리가 많이 들려온다. 우리 식구들이 책을 따라서 보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서점에 들리기 시작했다. 글쓰는 길에서 문우들도 첨벙첨벙 발표의 다이빙을 즐기고 있다. 용감히 바다에 먼저 뛰여든 펭긴이 되여서 많은 펭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채찍을 뒤늦게 찾은 이 해의 끝자락에서 명년은 더 열심히 해볼 것을 다짐한다. 다른 사람들의 무의미한 이야기나 사건에 시간을 허비하거나 허영을 뒤쫓기보다는 자신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에 대한 짝사랑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있지만 머지 않아 내가 좋아하고 노력했던 것만큼 글들도 나에게 푸짐한 보상을 내릴거라 굳게 믿는다.
21    기다리는 시간만큼 댓글:  조회:1438  추천:1  2018-02-08
수필 기다리는 시간만큼 김영분        한때 아파트 뒤편에 있는 탁 트인 정부청사 공원에서 아침걷기 운동을 하면서 늘 마주치던 모녀가 있었다. 엄마는 단발머리에 왜소한 체격인 반면 열살 남짓한 딸은 몸집이 비대한 지적 장애인이였다. 아이의 눈길은 거슴츠레했고 약간 비뚠 입에는 항상 타액이 지저분하게 발려 어른거렸다.           그들은 항상 엄마가 앞장서고 딸이 뒤에서 열심히 두 팔을 흔들면서 따라 걸었다. 무엇이 좋은지 흐흐흐 하면서 웃기만 했는데 가뜩이나 비뚠 입이 눈과 함께 더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니 정말이지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그러나 뒤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앞에서 걷는 엄마의 지친 얼굴은 금세 흐뭇해진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기특한 나머지 가녀린 손으로 침을 닦아준다. 그 후, 아파트 앞쪽으로 더 크고 쾌적한 도심속 삼림공원이 생겨 나는 새 공원으로 옮겨 운동을 시작하면서 꽤 오래동안 모녀를 만나지 못했고 내 기억속에서도 그녀들의 모습은 점차 잊혀져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문득 예전에 운동하던 공원으로 한번 가보고 싶어져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채살처럼 쫙 펼쳐진 정부청사 공원에는 여전히 익숙한 얼굴들이 부지런히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사람의 모습도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더 왜소해졌고 딸은 몸집이 더 커져서 웬만한 남자성인과도 견줄만 했다. 그들은 여전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딸은 여전히 천진하게 웃으며 엄마 뒤를 따랐고 엄마는 변함없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뒤돌아보며 침을 닦아주군 하였다.         그동안 계절도 여러번 바뀌였지만 두 모녀의 행색은 변함 없었다. 엄마의 인내와 믿음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기다림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솟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과 배려가 나에게는 있었던가?나는 얼마나 나의 아이들을 위해 기다려주는 시간을 감내했던가?아이가 서툴어서 실수를 저지를 때도,내 도움이 필요해 울먹일 때도 곱지 않은 목소리로 훈육을 하기에 급급했다. “너 숙제 빨리 하지 못해!” “너 옷 정리 정말 제대로 안 할거야!”     어느새 아이들은 훌쩍 커져버렸고 얼굴에 항상 천진한 웃음을 닮고 엄마 곁을 맴돌던 꼬맹이가 아니였다.이젠 되려 저희들이 이 엄마의 간섭을 싫어하는 나이가 됐다.아이들 얼굴에 묻어있는 귀찮은 기색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던가. 바다가 다 마르고 바위가 부서질 때까지(海枯石烂) 당신을 기다린다. 그러는 사이 꽃잎이 다 말라버렸다(等你等到花儿也谢了)는 애절한 절규에 가까운 노래가사가 있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돌아올 때까지 한눈 팔지 않고 그대로 돌이  되여 기다리겠다는 맹세로 들린다. 죽도록 사랑하면 상황이 얼마나 어려울지라도, 시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리고 싶은 것이 참사랑의 마음이다.     이 또한 달리 해석하면 기다리는 시간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뜨거운 련애를 거쳐 결혼한 부부지만 오래 살다보면 작은 일에도 기다려줄 수 없는 사이가 되여버리기 쉽다. 둘이 가뭄에 콩 나듯 간만에 데이트 시간을 가졌지만 만나기로 예정한 시간이 5분만 지나도 “아 정말 왜 이렇게 늦어. 확 가버린다 그냥.”하면서 전화를 날려본 남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이끌기에 바쁜 분이였다. 딸집에 와서도 어머니는 바삐 출근하는 딸을 위해 기꺼이 살림을 도맡아 하신다. 두 눈이 어두워지고 풍습에 손마디가 저려서 걸레질이 매끄럽지가 않을 때가 많다. 가끔 숟가락에 고추가루가 묻어 나오면 그때마다 주저없이 “엄마. 이것 좀 봐. ”하면서 그 자리에서  면박을 준 적도 있다. 좀 더 현명한 딸이였다면 어린 시절 한낱 사랑과 정성으로 보듬고 키워준 엄마의 그런 실수쯤은 눈감아줄수도 있었겠건만,웬지 가족이라는 리유로 그 하나만은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덧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기다려주기는 커녕 독촉하고 지적하기 좋아하는 심판원이 되여 가고 있다. 편하다는 리유로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말과 행동들을 서슴치 않으며 그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려고 한다.     신은 도처에 있을수 없기에 엄마를 세상으로 내려보냈다고 했다.     단발머리 엄마는 몸집이 자기보다 더 커져버린 딸이 매번 갓난아이처럼 사고를 치고 보살핌이 필요할 때 얼마나 조급하고 애간장이 타들었을까. 자기의 감수를 다 내려놓고 오직 딸애만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이 있었기에 몇년을 하루같이 아침 운동을 같이 하며 침을 닦아줄 수 있었다. 엄마는 목숨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섬길 것이다.     사랑은 화초를 키우듯 아무 바램없이 언젠가는 활짝 피리라는 확신을 갖고 꽃만 바라보는 마음이다. 가족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덜 기다려줬다는 증거이다.인간의 행동은 사람의 사고를 가장 잘 보여준다. 얼마나 기다렸느냐가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알수 있다.늙은 어머니의 살림살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간을 찌프렸던 나,몸이 불편하다고 하면 병원에 가면 될걸 왜 자꾸 밀방만 찾으시냐고 핀잔을 하면서 조급해 했던 나다.     왜소한 체격이지만 몇년을 하루와 같이 지적 장애인 딸애를 데리고 아침운동을 하고 있는 그 엄마와 선명하게 비교가 되여 순간 심한 죄책감이 들었다.내리 사랑은 있어도 올리 사랑은 없다고 한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부끄러웠다.부모가 자식에게 몰부은 사랑에 비하면 자식이 부모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은 새발의 피보다도 적다.그래서 어머니의 은혜는 바다보다 더 깊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려거든 얼마나 기다려줬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봐야 한다.     이제 부터라도 기다려줄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    서울아줌마 댓글:  조회:1749  추천:1  2018-01-25
수필 서울아줌마 김영분   십여년전 스무살의 나이에 나는 개혁개방의 물살을 타고 하해(下海)라는 거창한 테마를 거머쥐고 청도라는 곳에 왔다. 한국회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청양에 발을 붙혔다. 여러 회사를 거쳐 초보자 딱지를 떼고 경력을 조금 쌓은 후 금속체인 회사에서 꾸준히 출납으로 일을 하였다. 여느 한국상사들과 달리 이 회사의 부장은 아주 인성이 두드러졌다. 차후 나의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회사 구조는 아주 간단했다. 동사장은 형인데 한국에 상주하고 동생인 부장이 청도회사를 맡아서 운영을 했다. 그 밑으로 내가 말이 출납이지만 통역에 인사관리며 현장지시까지 맡아 했다. 후에는 성이 차지 않아 외주 발주까지 덤으로 받아 안았다.그리고 공장장, 대리, 자재관리, 현장기술자 등 한국인과 조선족이 어우러져 열명 정도 되는 회사 핵심인물들이 타향에서 조선족 아줌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구수한 된장찌게를  먹으며 50명정도 되는 한족 외지직원들을 데리고 금속 체인을 만들면서 오붓한 가정식 회사를 운영해 나갔다. 부장은 아주 깐깐한 사람이였다. 서른살 쯤 되는 결혼도 안한 청년이였지만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살림을 똑 소리나게 잘 하였다. 식당아주머니 식비를 한주일에 300원을 쳐주었다. 한국에서 공무원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형 회사를 관리하기 위해 중국까지 와서 그러는지 되지도 않는 니디워디 중국말로 시장을 잘도 다녔다. 그래서 채소 값이며 기름 값 등 물가를 손금보듯 꿰뚫고 있었다. 보통은 식당아주머니들이 식비에서 자기 용돈을 조금 남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부장이 시장의 물가를 너무도 꿰뚫고 있어서 우리 회사에서는 좀처럼 식비를 올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적은 식비에서  휴지조각이라도  살려고  용돈을 남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회사 식당아줌마들이 자주 바뀌였는데 면접을 지나가는 주마등처럼 자주 봤던지라 청양시장에 우리 회사 부장이 어지간한 깍쟁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후에 면접하러 온 아줌마 한분이 그러는데 시장 아줌마들이 우리 부장을 “서울아줌마”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우리도 재미있다고 뒤에서는 부장을 다 “서울아줌마”라고 불렀다. “서울아줌마”라고 불리기까지 물샐 틈 없이 깐깐하고 깍쟁이같은 부장이였지만 직원들은 꾸준히 회사자리를 지키면서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부장은 인간적이면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국 회사들은 툭하면 철야를 하면서 과부하로 일을 하던 때였다. 한국 상사들도 갓 중국에 들어와서 리념과 인식 차이로 조급증이 폭팔하던 시기였다. 걸핏하면 중국직원들에게 바보스럽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리해를 할수 없다니 하면서 폄하를 하는 상사들이 많던 시기였는데 우리 회사 부장은 전혀 그런 면이 없었다. 되려 유모아가 넘치고 따뜻한 말로 직원들을 대해줬다. 종종 가족의 안부도 물어봐주고 생일이면 꼭꼭 축하를 해주었다. 현장에 들어가면 한족직원들 어깨도 툭툭 쳐주고 아침은 잘 먹었냐는둥 일은 어렵지 않는지 등 인사를 했다. 사무실 조선족직원들과는 말이 통해서 하루종일 재미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군대에 있었던 일이며 공무원 일을 할 때 일을 얘기해주었는데 그때는 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습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원인이 하나 있었는데 칼퇴근을 시키는 것이였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전화벨이 울려도 되려 직원들에게 밥을 편히 다  먹고 가서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 회사는 점심도 안 먹고 일을 하냐고 자기는 우리 직원들 점심시간에 일 시키는 사람이 제일 꼴불견이라고 편을 들어주었다. 다른 회사는 철야작업을 하면서 물량을 맞추어도 우리는 매일 저녁 여덟시반까지 일을 하고 칼 퇴근을 시켰고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후 다섯시에 꼭 퇴근을 시켰다. 지금이야 출근시간이 많이 짧아졌지만 십여년전 청양에서 이 룰을 지킨 회사는 정말 내가 다닌 우리 회사밖에 없는 걸로 장담할수 있다. 그래서인지 새도 나무가지를 가려 앉는다고 봉급이 타사에 비해 평균치에 약간 미달을 했지만 직원들은 한번 회사입사를 하면 다른데로 옮겨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덕에 자주 바뀌던 회사식당 아줌마도 아릿다운 아줌마 한분이 자리를 오래 지켜주게 되어 우리는 깔끔하고 맛나는 밥상을 몇년간 무난히 마주할수 있었다. 아줌마는 부장을 깍쟁이라고 우리 앞에서 흉을 곱게 보면서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고 빨래도 안 시킨다고 아주 정직하고 예의바른 청년이라고 곱씹었다. 결재도 어김없이 제 날자를 지켰다. 다른 회사들은 결재를 잘 해주지 않아서 거래업체들이 동동 발을 구르며 눈쌀 찌푸리면서 납품을 했지만 우리는 달말에 거래명세서를 꼭꼭 정리해서 거래처에 돌리고 다음달 20일은 무조건 전화를 해서 결재 받아가라고 알렸다. 그러니 거래처들은 우리가 주문을 하면 한걸음에 달려와 납품을 했으며 회사에 들려서는 한번이라도 출납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인사를 더 하고 가는 것이였다. 혹간은 고향의 특산품을 가져다주는 업체도 적지 않았다. 결재를 흐트럼 없이 해주는 대신 부장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납품업체 사장들을 불러 들여 가격흥정을 하는 것이였다. 소금을 많이 먹으면 물을 켠다고 납품업체들은 당연히 다른 회사보다 싼 가격에 원재료를 납품하겠다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흩어지지 않는 연회는 없듯이 나도 어느덧 이 회사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나니 서른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남편이 자체 회사를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부득이 사직을 하고 남편을 도울수 밖에 없었다. 사직을 하려고 하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사직서를 제출하려는 날 회사에서 개추렴을 했다.  보신탕을 맛있게 얻어먹고 사직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할 말이 있다고 독대를 하니 난데없이 부장이 개다리 한짝을 곱게 포장해서 집에 부모님 갖다 드리라는 것이였다. 보신탕에 개다리까지 넙쩍 받아쥔 마당에 사직하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날은 그냥 집으로 왔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 온 느낌이였다. 그 개다리 여운 때문에 한달이 지난 뒤에야 비장하게 결심하고 부장을 찾아갔다.말은 쉬워도 하기는 어렵다고 억지로 사직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부장의 한 쪽 팔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던 나였기에 못내 서운해 하셨다. 정말이지 눈물이 났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어느 새 지지고 볶으며 같이 해온 세월 동안 고운 정 미운 정 다 쌓여서 가족이 된 느낌이였다. 정이 든다는 것은 지진처럼 강렬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산들바람처럼 살금살금 찾아 온 것이다. 그래도 자기발전을 위해 떠나 간다고 하니 등을 두드려주면서 격려해주었다. 어려우면 꼭 찾아오라고 연신 부탁했다. 사직하고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면서 지내는 옛 상사이다. 깍쟁이였지만 푸근했던 상사, 타인을 존중해주고 원칙을 지켰던 스승, 부장은 사회에 갓 발을 디딘 나에게 몸소 인생을 잘 경영해나가는 큰 도리를 깨우쳐주었다.친절한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 끼친 행복은 리자까지 붙어서 되돌아오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는 향후 나의 대인관계 속에 깊이 스며들어왔다. “서울아줌마”는 나에게 있어서 오늘도 닮으려고 노력을 멈추지 않는 훌륭한 스승이다.  
19    파출소에 모이다 댓글:  조회:1261  추천:1  2017-12-19
수필 파출소에 모이다 김영분   딸아이의 호적문제로 오래만에 고향땅을 밟게 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고향의 하늘을 보는 순간 말 못할 푸근함과 친근함이  온 몸을 감싸고 돌았다. 십여년만에 밟는 고향땅이여서 그런지 내디디는 매 발자국마다 의미있게 다가왔다. 가슴은 설레이다 못해 풍선처럼 둥둥 뜬거 같았다. 화려한 건축도 없고 세련된 양복맨들도 없었지만 편안한 그 느낌은 저녁까지 뛰여놀다가 맛있는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향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과 같았다. 당연지사처럼 소학교 때 코 흘리개 친구들과 만났다. 고향에 남아있는 그들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거의 30년을 못 본 친구도 있었다. 한국에서 건축일을 하다가 잠시 귀국하여 비자를 기다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학교옆에서 민족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그리고 학교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애들 뒤바라지 하느라 고향에 눌러 앉아있는 친구,의사를 하고 있는 친구로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이였다. 푸근한 동네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은 외지에서 빡세게 살고 있는 나로 하여금 큰 부러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튿날,기꺼이 동행을 해주는 친구와 함께 뻐스를 타고 살던 동네로 향했다.향 파출소에 가서 딸아이 이름을 정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네로 향하는 뻐스는 옛적의 덜컹대던 뻐스가 아니라 크고 넓직한 관광뻐스로 변해 있었다. 시내를 한참 달구지처럼 늦장부리면서 손님을 끌어모으느라 천천히 달리더니 서서히 시골길로 들어섰다. 길 량옆의 백양나무는 아직도 푸르청청 서 있었다. 다만 길이 좁아보였다. 분명 내가 뻐스를 타고 중학교를 다니던 그 길이였는데 십여년 이 지나서 그런지 아주 좁아 보였다. 덜컹 거리는 길은 여전했다. 때는 여름이라 옥수수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낑낑대면서 오르던 언덕도 한없이 작아보였다. 십여년 가까운 세월이 벌떡 몸을 일으켜 눈앞으로 다가온 듯 설레였다. 친구랑 둘이서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하느라니 옆좌석에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조선족이구만유.” 그제야 보니 의상이며 눌러쓴 모자며 조선족아저씨의 특유한 풍채가 엿보였다. 우리도 같이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어찌된 일로 시골 가시는거예요?” “파출소에 볼 일이 있어 가는거유.” 생각 밖으로 그 아저씨도 파출소에 간다는 것이였다. “파출소가 아니면 그 한산한 동네에 갈 일이 머가 있겠슈,혹시 언니들도 파출소 가는거아니유.”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척척박사가 따로 없었다. 그렇다. 내가 학교 졸업하고 고향을 다녀와도 친척들이 다 시내로 이사가서 살고 있는 바람에 시내에서만 머물렀지 동네까지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파출소에 볼 일이 없으면 아마도 정말 고향동네로 가는 뻐스 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초면이지만 같은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이것 저것 얘기를 나누다나니 우리 동네랑 10키로 정도 떨어진 동네에 촌민이셨다. 우리 부모님이랑은 논뚝 물을 관리하면서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셨고 지금은 량주가 시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였다. “우리 동네는 다 한족들이 들어와서 산다우. 조선족집은 한 호밖에 안 남았다니께.” 아저씨는 코 끝까지 떨어진 안경을 추스르며 서글픈 듯 쯧쯧 소리를 냈다. 하긴 우리 동네도 상황이 다를바는 없었다. 40여호였던 조선족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다 한국으로 연해도시로 진출하면서부터 아이들 로인들 할것 없이 거의 이사를 한것 같았다. 촌장 맡을 사람도 없어서 70넘은  로인을 시킨다니 할 말이 없는 것이였다. 어기영차 한시간 남짓이 달려서 뻐스는 향정부 소재지의 십자길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전에 시내 한번 나가려면 반나절이 걸린 것 같은데 뚝딱하니 한시간만에 온것도 너무 신기했다. 내가 커버린 것인가 길이 갑자기 짧아 진것인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릴 때 설이 되여야 어쩌다 와 보던 향정부 거리였다. 각종 맛나는 음식이 즐비하게 늘어선 설 장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듬성듬성 빨간색 건물이 몇개 들어서 있었다. 파출소에 도착하고 보니 자그마한 사무실 한 칸이 다였다. 젊은 청년이 뽀얀 피부를 하고 서글서글한 두눈으로 한대 밖에 없는 컴퓨터 앞에 서서 우리를 보면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왔다. 여태 내가 살던 도시의 파출소는 으리으리 했다. 공무원들도 많았고 창구도 많았고 컴푸터며 프린트기며 사무집기가 즐비했었다. 고향의 향 파출소가 이렇게 간소할 줄은 정말 생각 밖이였다. 나는 여차여차 딸 아이의 호적에 이름이 출생증과 맞지 않아서 고치러 왔다고 했다. 미리 준비한 수많은 복사본을 같이 내밀면서 어렵게 한 걸음이니 꼭 잘 부탁한다고 곁들었더니 이것은 자기가 호적관리시스템 원인으로 고쳐줄수가 없고 여차여차 다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였다. 내 일이 끝나자 같이 뻐스를 타고 왔던 아저씨가 또 호적등본을 내밀었다. 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손자 호적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였다. 추가로 아들과 호적을 가르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으니 고향에 아들 집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니 량주가 살던 집도 다 팔았고 아들은 연해도시에서 정착을 해서 살고 있으니 동네에 집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파출소 직원이 그러면 호적을 가를수가 없다면서 어떠한 상황하에서 호적을 가를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설명이 끝날 때 쯤 되니 파출소로 야구모자를 쓴 남자와 파마를 버섯처럼 동실하게 한 아주머니가  들어섰다.얼핏 봐도 조선족이였다. 아들은 중년의 나이였고 준수한 얼굴은 금빛을 뿌린 것처럼 윤택이 반지르르 돌았으며 어머니는 고운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환갑이 지난듯 싶었다. 이 모자간이 파출소를 찾은 원인은 어머니가 여태 아들이 살고 있는 연해도시에서 아이를 돌봐주느라 십여년을 고향에 돌아와본적이 없다나니 제2대신분증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새롭게 신분증을 만들려니 이전의 신분증도 다 분실된 상황이였다. 파출소 직원은 무슨 원인으로 이렇게 오래 신분증을 만들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디서 여태 살았는지 등 이런 증명을 떼오라고 하였다. 오전내내 파출소에는 한족들의 업무는 전무했고 다 외지에서 급히 고향으로 돌아와 호적문제로 찾아온 조선족들이 문턱을 넘나 들었다. 파출소 직원이 웃으면서 “너희들은 참 좋겠다. 다 좋은 곳에서 살고 있으니 너무 부럽다.”고 하였다. 자기는 학교졸업하고 고향으로 분배를 받다나니 시골에 오게 되였다고 기회가 되면 자기고 꼭 나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청년의 그 부럽다는 말 한마디에 나는 머쓱하니 웃었다. 우리의 애환을 알고 부러워 하는지. 그는 아마 파출소에 찾아온 윤택한 얼굴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그리고 우리가 누릴 멋진 삶을 련상했을 것이다. 도시는 현란하지만 그 속의 우리는 어떠한가. 빙벽에 걸린 자일(등산때 쓰이는 로프)처럼 항상 팽팽하지 않았던가. 오뉴월에 해빛과 수분만 있으면 제멋대로 자라는 개버들처럼 우리는 항상 씩씩했지만 많은 걸 감수해야 했다. 비바람과 추위는 계절마다 찾아오지 않았던가. 고향은 다 파먹은 김치독과 같았다. 다시는 안 볼것 처럼 떠나왔지만 또 그 독에 맛있는 김치가 들어있기를 뒤돌아보며 간절히 비는 나를 발견하였다. 당겨진 활시위라면 뒤돌아봐서 멀 어쩌겠는가. 나그네는 가던 길을 간다고 했던가. 그래. 이 언니도 가던 길 가야지. 신발이 닳도록 가다보면 낙원이 보이겠지.
18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1510  추천:2  2017-11-17
수필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하지 않는다 김영분   쉽지 않게 생긴 휴가를 즐기기 위해 두 애를 데리고 해변가로 소풍을 떠났다. 썬글라스를 코에 걸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내 키를 훌쩍 따라잡은 두 애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두눈을 지긋이 감은채 흥심 없는 표정으로 후줄근히 늘어져있었다. 차는 미끄러지듯 시원하게 트인 아스팔트길을 따라 씽씽 달렸다. 창밖은 자연이 파티를 하는듯 흐드러지게 피여나는 사쿠라꽃이며 매화꽃이며 개나리로  눈이 즐겁다. “얘들아, 저걸 봐. 길옆 꽃들이 너무 예쁘잖아?”  “오. 괜찮네요. “ 들뜬 나의 목소리에 비해 애들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순간 내 몸안에서 풍선처럼 부풀렀던 열정이 김빠지듯 새여나갔다. 나혼자 즐기려고 나온 바다구경도 아닌데 같이 박자를 맞춰 즐겨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에 애들이 야속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부모와 어울리기를 질색하는 애들이다. 내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거부감을 보이면서 연예인이며 노래며 영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녀석들이다. 닭에게는 보석이 보리알만 못하다더니 좋은 여행을 다녀오자고 해도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낸다. 아침에도 어쩌다 맞이한 휴가이니 머리를 쉬우고 바다바람도 쐬우자고 건의를 하자 큰 애가 먼저 자기는 집에서 쉬면서 혼자 있는것이 더 좋다고 투덜댔다. 작은 애도 덩달아 친구들과 영화보러 가는것이 더 좋단다. 그래도 휴가를 이대로 흘려보낼수 없다며 윽박지르듯 나들이 길에 끌고 나왔다. “얘들아. 핸드폰 다 내놔. 놀러 나왔지 노래 들으려고 온거 아니잖아. 노래 들을거면 집에서 들어야지.“ 나는 엄마로서의 위엄을 지키고자 곧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제는 지시를 안 따르는 경우가 많기에 실패한 지시로 끝나지 않기를 조심히 바라면서 말이다. 애들은 마지못해 입을 삐죽이며 이어폰을 귀에서 뽑아냈다. 핸드폰은 빼앗기기 싫다는 표정들이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날고 뛰여봤자 아직은 내 손바닥이지.) 그런데 한참후 큰 애가 멀미가 난단다. 속이 미슥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단다.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두눈에 정기마저 잃어갔다. 마른침을 연신 삼키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전혀 거짓말 같지가 않아서 나는 서둘러 차를 세웠다.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도 멀미를 하지 않던 애가 갑자기 멀미를 하다니? 혹시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차안이 갑갑해서 그럴가? 아들애는 식은 땀만 흘릴뿐 두눈도 뜨기 싫어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메슥거린단다. 조금만 움직이면 속에서 무언가 나올거 같단다. 아뿔사. 바다에 도착도 못했는데 이걸 어쩐담. 딸애는 연신 오빠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바다로 가기에는 무리라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종알거렸다. 괘씸한것이 도움은 못될망정 초를 치려고 잡도리를 한거였다. 아들애는 물을 좀 마시고 차에서 내려서 시원한 바람을 좀 맞았더니 서서히 괜찮아졌는지 두눈에 정기가 다시 돌았다. “거봐요. 나 오늘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는데 엄마가 자꾸 해변에 가자고 하니까 내가 멀미 하잖아요. “ 아들은 볼멘 소리를 한다. 난 애들이 힘들게 공부를 하니 휴식하는 날을 리용해 바다로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자연을 즐기게 해주고 싶었을뿐이였다.  바다나 산에를 다녀보면 학교에서 배울수 없는 우직한것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그런것들이 애들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될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과 아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심신을 자연에 맡기고 힘든 인생과제를 풀어나가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애들은 전혀 달갑지 않아 했다. 평소 애들은 휴일만 되면 엄마 아빠는 뒤전으로 하고 홀로 집에서 컴과 폰에 파묻혀 있지 않으면 친구들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이번에는 내가 애들이 더 크기 전에 한번 바다구경이라도 함께 가고싶어 억지를 부리고 설득도 거듭해서 어렵게 떠난것이였다. 개구쟁이일적에는 매일 부모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애들이 이젠 부모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것만 같았다. 얼마나 가기 싫었으면 전혀 안하던 멀미까지 하겠는가.   그래도 이미 뽑아든 칼이니 무라도 베야지 하는 심정으로 해변으로 강행을 했다. 바다에 도착해서도 애들은 어렸을때 그렇게 좋아하던 모래성 쌓기도 하지 않고 사진을 찍자고 포즈를 취하라고 해도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쁘게 입을 삐죽거리지 않으면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바다물에 발을 담그기는커녕 멀찌감치 서서 밀려오는 파도만 구경하면서 어른거리는 물결에 머리가 어지러워 멀미 난다며 이마살을 찌프린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애가 느닷없이 사람들은 왜 멀미를 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열정이 식어 아무렇게나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야. 뒤좌석에 앉은 사람은 차가 빨리 달릴지 늦게 달릴지 그리고 언제 급정거를 할지 차선을 바꿀지 잘 모르니까 몸안에 감지하고 있는 위치와 실제로 차가 지나가는 위치가 오랜시간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멀미를 하게 된단다. ” “그런데 왜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를 안해요?” 아들이 신기한듯 또 물었다. “글쎄. 운전하는 사람은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속도를 빨리 해야 할지 늦게 해야 할지 혼자 속으로 다 알고 있으니 내 마음속의 위치와 실제 차가 이동하는 위치가 일치하니까 멀미를 하지 않는단다.” 나는 생각나는대로 대답하다가 느닷없이 속이 뜨끔해났다.    내가 오늘 무슨 일을 저질렀지. 오기 싫다는 애들을 데리고 내가 지정한 바다에 혼자 편한 시간에 애들을 강요하다싶이 데리고 나왔으니 애들이 멀미가 안나면 도리여 궤변이지. 내가 아낌없이 주었던 사랑이 아이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여야지 멀미로 남게 해서야 되겠는가.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를 안한다. 하지만 동승하는 사람은 멀미를 할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애들을 억지로 내 차에 태우려고 하지 말고 애들 혼자 결정해서 멀미나지 않는 길을 가도록 도와줘야겠다고 다짐했다.  
17    당신에게 감사패를 드리오리다 댓글:  조회:1416  추천:1  2017-11-17
수필 당신에게 감사패를 드리오리다 김영분   언제부터인가  남편 사무실 책상위에는 임명장과 감사패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 직책이 커지면서 생겨나는 증표가 아닌가 싶다. 사무실을 정리하러 들어 갈 때 마다 임명장과 감사패를 하나하나 닦으면서 그 내용을 새겨본다.   혹자는 귀하를 모모협회 모모간부로 임명합니다. 혹자는 귀하께서는 물심양면으로 민족사업발전에 영원히 기록될 큰 업적을 남기셨기에 그 뜻을 높이 받들고 기념하기 위하여 감사패를 드립니다. 등등 내용이였다. 제일 오른쪽 밑에는 수여단체장의 성함도 듬직하게 박혀있었다. 큰 기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작은 성의를 표시한 것 뿐인데 정중히 감사패까지 이쁘게 만들어서 주시다니 받은 사람은 정말로 인정받은 그 기분에 뿌듯한 마음이 흠뻑 든다. 이년전부터 남편은 고향협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였다. 성격이 조용한 남편은 극구 사양했지만 임명장까지 턱하니 받아쥔 마당에 울며 겨자먹기로 임할수 밖에 없었다. 완벽주의자 성격을 가진 남편 못지 않게 임명된 마당에 잘 해내야 한다는 고상한 신념에 첫 발자국부터 고향어르신방문에 양노원방문에 고향유명인사방문에 회원방문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다니고 또 다녔다. 덕분에 고향분들을 많이 알게 되였다고 못내 기뻐하였다. 회사와 가정일은 뒷전이 되였다. 술자리도 많아졌다. 좋아하는 운동도 시간을 내여야만 할수 있게 되였다. 그래도 남편은 마냥 신이 난 모양이다. 고향어르신들 장례식이라든가 누가 아프다던가 결혼식이라든가 돐이라든가 하면 가차없이 달려갔다. 나는 결혼해서 여태까지 남편이 이렇게 진지하게 한가지 일을 해나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도 이렇게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었다. 항상 시간 여유가 있어야 운동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어디에든 고향분들의 회장님호출이 있으면 무조건 번개처럼 달려갔다. 이건 아마도 남편은 사무실에 모셔놓은 임명장과 감사패를 바라보면서 지녀야 할 책임을 마음속 깊이 새겨서 그렇지 않나 싶었다. 감사패의 매력이란 말인가. 올해는 고향송년회때 남편이 회장으로써 수고가 많은 고향분들에게 감사패를 수여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향협회를 위하여 일선에서 뛰여 주시고 흥을 돋구어 주시는 몇몇 분들도 감사패를 받고서는 입이 함박만해졌다. 어루쓸고 또 어루쓰는 모습이였다. 자신의 봉사정신이 인정받았을때 얼마나 흐뭇했을가. 나는 감사패를 수여받은 분들의 마음을 알것 같았다. 아마도 내년에는 더 열심히 고향분들을 위해 헌신하고 뛰여 다닐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 우리 회사도 올해 년말 송년회를 하기로 했다. 왕년에는 큰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 먹고 선물을 나누어주고 노래와 춤을 좀 곁들이고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올해도 수고 했소 하는 신년사를 간단히 하고 직원들은 사장님 고맙습니다하면서 술을 권커니 작커니 하는 멘트였다. 하지만 올 해 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십여년을 같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뛰여온 정말로 고생한 몇몇 직원들에게 나도 감사패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걸어온 긴긴 여정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노력과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16.12.30. 모모회사. 수여하는 무대에서 12년을 같이 한 창고 보관원은 감격한 나머지 내가 오늘 금메달을 수상한 기분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하였다. 우리도 이런 메달로 우리의 가치와 노동을 인정해야 한다고 . 위챗에 올린 직원 몇몇은 자기 위챗 동아리에서 감사패를 다 받았냐고 수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집에 가져 갔더니 어린 자식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라는. 감사패의 매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정이 필요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 주는 사람은 줘서 인정받고 싶고 받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은 표현이라더니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서 또 감사패와 같은 눈으로 볼수 있는 증표로 각인을 할 필요가 있다. 
16    꽃으로 피여났다 댓글:  조회:929  추천:1  2017-10-25
수필 꽃으로 피여났다 김영분   평일에 채바퀴 돌듯 바삐 출근을 하고 일요일이 되면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산행팀을 따라서 청도해변과 맞닿은 “천하제일산”이라는 로산에 등산을 가곤 한다. 로산은 아름다운 경치가 변화무쌍한 구름처럼 서있는 위치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돌바위가 줄서있는 석림이 되기도 하고 푸른 숲에 잠겨있는 원시림이 되기도 하며 비취색 바다가 두 눈이 질리도록 파랗게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섬이 되기도 하고 뻐꾹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오는 새들의 락원이기도 하다. 로산의 푸근하면서도 웅장한 매력에 사로잡혀 지칠줄 모르고 갈때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새로운 길과 풍경을 찾으려고 도전하는 팀원들이 똘똘 뭉쳤다. 처음으로 어렵사리 톺아 올라갔던 정상에는 리본을 달아매놓고 여기 왔었노라고 무언의 지역표시를 해놓곤 했다. 히말라야 등반을 한뒤 경위도를 밝히면서 위치확인을 하는 마음을 천번만번 이해할것 같았다. 로산 곳곳을 다니면서 로산정상을 한번 가리라는 목표가 생겼다. 로산정상은 거봉이라고도 하는데 해발높이가 1130메터에 달하고 바다해안선과 불과 5키로 떨어져있으며 중국에서 해안선을 끼고 솟은 제일 높은 산봉우리이다. 로산정상은 높지만 작은 산등성이인데 양면으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있고 로산의 크고 작은 버섯처럼 퍼져있는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볼수 있는 절정의 곳이다.   주위에 등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로산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취미로 하는 등산은 일정을 반나절로 잡지만 로산정상을 가려면 하루를 잡아야 하고 체력도 많이 소모해야 하기에 단단히 준비를 해서 가야했다. 로산정상에 가기로 결심한 뒤로부터 나름대로 번마다 산행의 거리를 좀씩 늘려 연습을 해가면서 겨우내내 등산을 견지했기에 봄이 되자 무더위가 오기전에 꼭 로산정상을 도전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도 그럴것이 남자회원들중 몇명은 로산정상을 갔었지만 그 외 열몇명의 회원들은  지레 겁을 먹고 시도를 안해봤기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특히 여성멤버들이 뒤쳐질가봐 많이 걱정하였다. 하지만 신선놀음에 도끼 썪는줄 모른다고 어렵고 힘든 길일수록 도전의 짜릿한 맛을 느꼈기에 우리는 한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산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오직 포기하지 않고 톺아오르는 사람만 있을뿐이다. 드뎌 목 빼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3월말의 청도는 아직도 쌀쌀한 꽃샘추위가 맴돈다. 봄바람은 왔다가도 수줍게 밀려나고 비구름만 몰고 왔다. 아침 여덟시에 로산자락의 알룽산입구에 도착했다. 긴 산행인지라 먹을거리와 물 그리고 여벌의 옷 등등 준비물때문에 사람들의 배낭은 여느때보다 부풀어있었다. 스무명의 로산등반가들은 알룽산 입구를 통해 외딴 비탈길을 따라 호호탕탕하게 로산정상 탐험산행을 시작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꽃샘추위에 몰려왔던 비구름들이 부서졌는지 보슬비가 솔솔 내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큰 비가 내리지는 않겠는지 모두가 걱정이였다. 그러나 모두 방수쟈켓에 묻은 비물을 털어내면서 우리가 로산정상에 도착하게끔 산이 허락해주기를 바란다며 갈수 있는데까지 가는것도 한개 추억이 아니냐면서 서로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등산이란 참으로 의미가 다양하다. 어려움이 닥치면 편안하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 일자체를 받아들이는 법도 터득할수 있으니 말이다. 첫 발자국이 어렵지 떼기만 하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왜냐하면 지정한 산길이 아닌 임의로 개척한 가시길로 가기때문에 인솔자가 없으면 혼자서는 산중턱에서 산을 올바로 내려갈수 있다고 장담을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따라나섰으면 도망칠수도 없이 끝까지 가야하는 우리 팀의 철칙이 있다. 첫시작은 로산정상을 정복해야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다리에 힘이 넘쳐서 씽씽 톺아올랐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모두 땀벌창이 되고 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튀여나올것 같앗고 숨은 거칠어져 씩씩거렸으며  배낭은 천근만근으로 몸을 짓누르는것 같았다. 모두 비 맞은 장닭처럼 후줄근해졌다. 보슬비는 언제인지 자취를 감추고 싸락눈이 되여 휘날렸다. 침엽수가 푹씬하게 깔려있는 산길은 금새 흩날리는 흰 눈 때문에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처럼 희끗희끗해졌다. 청도는 눈이 잘 내리지 않아 산에서 눈을 보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였다. 우리는 눈이 내리는 산중턱에서 상대방의 모자를 뚫고 몰몰 새여나오는 아지랑이같은 김을 보면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추위도 찬 바람도 힘겹지만 도전을 향한 그 굳센 마음들 앞에서는 무색해졌다. 평소 산행처럼 단란히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시간을 가질수가 없었다. 3월의 로산은 해가 짧아 땅거미마 빨리 찾아올수 있어 네시가 되면 날이 어두워지기때문에 적어도 세시면 하산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로산자락 알룽산 입구에서 로산정상까지는 여러개 산등성이를 넘어야 하기에 걷는 거리만 해도 26키로에 달한다. 눈과 비가 엇갈려 오고 있고 해님이 비구름과 숨박꼭질을 하고 있는 날씨 상황을 봐서 인솔자는 안전을 위해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안을 선택했다.우리는 긴 줄을 서서 그 자리에 선 채로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요기를 했다. 각자 자리에 서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그 장면이 오래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긴박하고 비장하며 서로 격려하고 다독여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였다. 우리는 그 시간 만큼은 특수부대요원이 되여 임무수행을 위해서  기꺼이 눈이 내리는 산림속에서 서서 김밤을 같이 나누어 먹었다. 오후 한시쯤 우리는 거의 산 정상에 다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마지막 산등성이를 넘어야 한다. 몸은 솜처럼 나른해졌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발은 아파서 감각을 잃은것 같았고 두 어깨는 배낭에 눌리워 천근만근이 된듯 했다.  고요한 산속에는 우리 스무명의 터벅턱벅 발걸음 소리와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간간히 들릴뿐이다. 해발이 높아서인지 갑자기 푸실푸실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밑에서는 보기 드문 폭설이였다. 산길은 삽시에 두툼한 눈으로 휩싸였고 산 전체가 은백색치마를 입은듯 하얗게 변했다. 나무가지며 바위며 산비탈이며 모두가 눈에 뒤덮혔다. 소나무가지는 묵직한 눈꽃에 눌리워 힘겹게 머리가 숙여졌고 사락사락 쌓인 눈은 밟아도 부서지지 않고 대굴대굴 굴러가는듯 하였다. 발밑에는 뽀드득 소리가 났고 눈이 두터워서 톺아오르기가 어려워져서 발에 힘을 한껏 주어야 헀다. 끝없이 펼쳐지는 흰눈의 산림속에 우리의 알록달록한 등산복은 떨기떨기의 채송화마냥 하얀 세상을 이쁘게 수놓았다. 즐거운 셔터소리에 눈꽃들은 더 환하게 피여났다. 세시경에 우리는 끝내 힘겨운 다리를 끌고 로산정상에 우뚝 섰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휘우붐하던 구름떼는 눈꽃을 무더기로 털어내더니 말끔이 가셔졌다. 해살이 부채살처럼 펴지자 흰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로산정상은 뾰족한 산등성이라 전망대주위를 야트막하게 울바자를 쳐놓은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까운 산봉우리에는 작은 정자하나가 지어져 있었다.긴 세월동안 이 로산정상을 정복한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으리라. 눈바람 휘날리는 산 꼭대기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흰 눈의 세상을 처음으로 바라보는 우리는 동화세계에 빠진 아이들마냥 기뻐했다. 아마도 우리가 힘겹게 로산정상을 도전한다고 3월에 큰 눈을 내려주신것 같다. 그날 봄비를 지나 봄눈을 흠뻑 맞았던 우리는 힘겨웠던 그 순간은 다 잊고 모든것을 다 가진것 같은 희열에 휩싸였다. 깊은 바위계곡도 우리 발밑에서 깊고도 기다랗게 눈단장을 하고 우리에게 깍듯이 경례를 하는것 같았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퍼져가는 산등성이들은 하얀 면사포를 곱게 쓰고 한껏 이쁨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가지마다 묵직하게 매달린 눈꽃송이들은 뒤늦게 나타난 해님의 어루만짐에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눈이 부셨다. 우리는 그날 다섯개의 산등성이를 오르내렸고 4만보를 걸음으로서 26키로를 완주하였다. 어려운 일은 있지만 해내지 못할 일은 없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머리가 시키는 한 우리의 다리는 걸을수 있었다. 산은 우리에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수 있다는 도리를 알려주었다. 그날 우리는 로산정상에 우뚝 섰다. 우리는 눈내리는 로산위에서 울긋불긋한 꽃으로 피여났다.
15    숫자세기 댓글:  조회:836  추천:1  2017-10-24
수필 숫자세기 김영분     나에게는 오동통하게 생긴 튼실튼실한 열두살 딸램이가 있다. 심성도 착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며 공부도 학급에서 손꼽히고 반급에 일도 발 벗고 나서서 서두르는 만사통 별명을 가진 아이이다. 딸램이 자신도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요즘에 티비에서 농구주제로 된 영화를 보고 주인공 여자아이가 농구장에서 멋진 슛을 하는것을 보더니 다짜고짜 아빠를 끌고 집 근처 농구장으로 향해서 하루에 두시간씩 만져보지도 못한 농구를 연습하는것이였다. 이틀후 연속 여섯골을 슛하는데 성공했다. 그 기쁨과 희열을 감출수가 없어서 나한테 바로 전화 하여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 나 슛하는데 성공했어요. 그것도 여섯개 연속 말이예요!”하면서 나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나는 역시 우리 딸램이구나 하는 기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너무나 장하다. 전화를 받고 있는 나는 자호감을 느끼고 딸램이 얼굴을  생각하니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씩씩하고  야무진 딸램이에게 컴플렉스가 하나 있다. 바로 수학이 너무 어려운것이다. 세심하지 못한 점도 있고 사고를 더 넓혀가지 못하는 점도 있다. 여태 문제집 제일 마지막 총명집 문제를 유치원부터 여태 단 한문제도 풀어내지 못했다. 이건 지극히 나를 닮은거 같다. 나는 고중을 다닐때 대수와 기하를 너무 어려워해서 교정에서 걸어다니다가 대수 기하 선생님과 마주칠가봐 무서울 지경이였다. 대수 기하 선생님도 나만 보면 안타까워서 “왜 이 선생이 싫은건가요. 다른 학업은 잘하는데 왜 내 과목만 성적이 못올라가요.”하면서 핀잔아닌 핀잔을 주시곤 했다. 그때 마다 나는 내 아둔한 머리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정말 문제풀이때 다른 친구들은 대수 공식을 잘도 기억하고 풀이에 응용하는걸 보면 세상에서 이렇게 머리 좋은 사람도 있을가 싶을 정도로 숭배를 했다. 나는 작문에서 점수를 많이 땄지만 유독 수학을 못하는것에 집착을 했다. 결과 학교다니는 내내 나혼자 걸어논 주문에서 헤쳐나오지 못하고 나는 학업을 잘 못하는 사람이야 하고 생각했다. 학교 흑판보에 내 작품이 실리기도 하고 다른 학업은 다 잘 해서 칭찬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과하고 내 기억에는 중학교때 온통 수학을 못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에 재주가 약간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꿈도 야무지게 꾸지 못하고 그냥 생각만 하다가 너무 어려울것 같아 마음속에서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우리 딸램이는 엄마보다 지혜로운것 같다. 딸램이는 자기가 잘하는거에 대해서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들만 쫓아다니면서 노력과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때는 수학을 못해서 상은 찡그리고 안타까워 하지만 너무 큰 문제로 생각치 않고 되려 내가 “넌 왜 수학을 이렇게 못하니 ?”하고 핀잔을 하면 “엄마. 수학 못하면 어때.나중에 슈퍼에 가서 빵사고 계산만 잘 하면 되지요.”하면서 오히려 나늘 골려주곤 했다. 총명집의 문제를 같이 풀어달라고 도움을 청할땐 아직도 내가 가슴이 떨려 낯이 하얗게 질린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소학교 6학년 수학은 나에겐 너무 어려운것이다. 분명히 나도 풀수 없으니까. 나는 아직도 수학에 대한 무서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럴때면 우리 딸램이는 “엄마. 엄마도 수학을 아주  못했네요.”하면서 눈을 찡긋하는것이였다. 휴. 내 가슴에 못을 박아라.  우리 딸램이 유치원 다닐때 한번은 숫자세기를 배우고 왔다. 그것도 하나부터 다섯까지 배우고 와서는 나더러 손가락을 펼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면서 알려주는것이였다. 손가락을 다 세더니 또 발을 내밀으라고 하였다.그러더니 내 발앞에 오똑 앉아서 또 발가락을 가리키면서 다섯까지 세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나 귀여워서 하하호호 웃으면서 꽉 끓어않고 얼굴을 비비고 또 비볐다. 자기도 잘 했는걸 알았는지 그 작은 어깨에 힘을 주고 눈을 치켜들더니 입도 쀼죽하면서 시뚝해서 얼굴을 쉬리릭 반쯤 돌려 위를 보는것이였다. 그러고는 “엄마. 봤지요. 사람 손가락하고 발가락은 다섯개라고 선생님이 알려줬어요.”하면서 챙챙한 목소리로 알려주는것이였다. 아침이 되니 숫자공부를 더 해야 한다면서 아빠 발도 세보겠다는것이였다. 다 세보고는  아빠한테도 확인해주었다. “아빠 발가락도 다섯개래요.”아빠가 발가락 세는거 보고 너무 기특해서 숫자세기를 잘 했으니 밥을 먹여주겠다고 하니 좋아서 헬쭉 거리더니 딱 다섯숟가락만 먹겠다고 한다. 배운걸 확실히 써먹겠다는 의지인거 같았다.  그래서 아빠가 한숟갈 두숟갈 세숟갈 하면서 먹이면서 생각하니 다섯숟갈이면 너무 적게 먹는거 같애서 세숟갈 먹인후에 아빠가 다시 한숟갈 두숟갈 세숟갈 먹였다. 그래서 억지로 여러번만에 다섯숟갈까지 먹여서 죽 한그릇 다 먹였다. 그런데 딸램이 입을 쓱 딲고는 내옆에 슬금슬금 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고 “엄마. 아빠는 다섯개를 모르네요. 자꾸 셋 까지 하고 틀려요.나는 아빠가 틀린거 다 알아요.” 나하고 애 아빠는 급기야 너무 우스워서 배를 끓어않고 웃었다. 웬영문이지 모르는 딸램은 눈이 화등잔마냥 휘둥그래져서 눈물 짜면서 웃고 있는 엄마 아빠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숫자세기도 수학이라고 하면 수학이라 할수 있겠다. 조금이라도 잘 배워내면 그것에 만족하고 바로 써먹는 우리 딸램이다. 그리고 자기가 잘하고 있고 다른사람이 못하는것도 예리하게 찾아내지만 지적하지 않고 품어주는 너그럽고 낙천적인 성격이 엿보인다. 우리 딸램의 이런 용감한 자신감은 타고난 성격인거 같다. 어렸을때의 이런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성격이 커서도 수학문제에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못하는것을 용감히 인정하고 자신있는 일에 많이 투자하고 또 승리를 이끌어내서 성공의 희열을 느낄줄 아는 아이로 성장한것 같다.      나는 학창시절 어려운 수학때문에 고통스러워했듯이 인생길에서도 힘든 일을 크게 주목해왔기에 많은 즐거움이 손에서 모래 새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갔다. 하지만 우리 딸램은 유치원 숫자세기를 하듯이 쭈욱 잘하고 있는것에만 집중하고 발휘하여 성취감을 찾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법을 알고 있기에 지금 아주 명랑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총명집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할것이지만 농구와 같은 다른 행복한 도전에 힘을 쏟을 것이 분명하다. 수학은 나와 딸램이 둘다 못한다. 하지만 수학에 대한 태도는 분명 다르다.  나는 딸램이한테서 배운다.
14    제발 부탁이야 댓글:  조회:1039  추천:1  2017-10-18
수필 제발 부탁이야 김영분   시간은 거슬러 10년전으로 올라간다. 그때 나는 여섯살과 세살짜리 아들 딸을 키우고 있는 새내기 엄마였다. 한창 육아에 갇혀 답답하기 그지없던 그 시기였다. 육아, 말만 들어도 얼마나 성스럽고 행복한 글귀인가. 하지만 정작 애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은 한결같이 힘들었다고 손사래를 칠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애들이 잡지에 박혀있는 사진에서처럼 귀엽기만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채살처럼 쫙 펴지는 따스한 해볕이 스며드는 아늑한  방에 애들은 얼굴이 빠알간 사과처럼 상기되여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다. 간혹 가다가 꿈에서 사탕을 줏었는지 입귀가 실룩실룩거리며 호르륵거리며 웃기도 한다. 너무 예쁘다. 애들이 자고 있을때 쳐다보고 있는 이런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이고 깨여나기 바쁘게 자지러지게 울어재끼지 않는가 하면 슬금슬금 기여다니면서 온 바닥을 휘젓고 다니기도 한다. 간혹 벽 모서리에 이마를 맞히기도 하고 뒤똑뒤똑 걸어다니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온수기에 손이 데기도 하면서 좌충우돌하면서 도깨비들이 조금씩 커왔다. 엄마는 자면서까지 애들을 간수하는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이런 갑갑한 육아가 지속되는 어느 가을의 토요일날에  간만에 애 아빠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은적이 있었다. 저녁에 애들을 데리고 해운회사 사장님네 가족이랑 식사를 하자고 한다. 아이구 좋아라. 오랜만에 집에서 밖으로 나가서 외식하는지라 나는 너무 좋아서  마음이 흥분되였다.       그런데 즐거운 외식 데이트가 나의 수난시대가 될 줄이야. 나는 오후부터 애들을 이쁘게 단장시키고 인사 잘하라고 연신 교육시켰다. 해운회사 사장님은 한국 사람인데 부인님이 세살난 딸아이를 데리고 간만에 중국에 서방님 보러 오셨던것이다. 그래서 애 아빠가 그 사장님네 가족을 초대하게 되였다. 그집 딸애 보영이는 예전에 한번 본 기억이 있는데 왜소한 몸매에 얌전한 공주 스타일이다. 인사도 무척 잘하고 아무 사람이나 보면 헤쭉헤쭉 잘도 웃어준다. 또릿또릿한 한국 발음으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할라치면 간이 다 녹아날 정도다. 근데 밥 먹을러 가는 아줌마가 괜스레 남집 애한테 신경쓰이는건 무슨 영문이지?   어기영차 해서 두집 식구 만나서 식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른들끼리 간단한 인사가 오가자 자연히 애들더러 인사하라고 두집 엄마들 다 부산하다. 보영이가 선수를 썼다. 허리를 약간 세련되게 구부리며 “안녕하세요.”하고 챙챙한 목소리로 실눈까지 예쁘게 웃으면서 우리를 향해 인사를 한다. 근데 우리 애들 둘은 머람. 두눈만 휘둥그래 해가지고 잘하던 인사도 안하고 있다. 세살 딸애는 인사하라고 재촉하자 허리만 대수 구부리고 곧장 내뒤에 머리를 숨긴다. 허리 좀 이쁘게 구부리면 어디 덫이라도 나는것처럼 말이다. 여섯살 아들은 무뚝뚝하게 “안녕하세요.”를 재빨리 해치우고 말아버린다. 성의가 없이. 이것들이 오후내내 교육은 헛시켰어. 정말. 한국 애들 인사성은 정말 따라배워야 한다. 말씨도 얼마나 고운지 산들산들 봄바람마냥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였다. 보영이는 얌전히 앉아서 호박죽을 홀짝홀짝 먹고 있는데 얌전하다말고 우리 애들은 이것저것 숟가락 질이다. 인사하라 할때는 조용하더니 이것들이 먹기 시작하니 정신이 없이 설쳐제낀다. 숟가락을 안 떨어뜨리면 매운것을 집고 맵다고 투정이고 물을 먹여주면 컵을 넘어뜨리고 떡을 집어주니 젓가락 휘리릭 집어던지고 손으로 막 집어먹고 그야말로 관청에 들어온 촌닭처럼 천방지축 마음 가는대로 질러제낀다.   하긴 집에서도 떡을 손으로 집어 먹을때가 많았다. 손님 가족들이랑 외식할줄 알았으면 집에서도 교육을 잘 시켰어야 하는건데 하면서 슬슬 후회할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애들 습관이 곧장 엄마 생활습관으로 나타나니까. 정말 쑥스럽다. 평소에 얌전히 먹으라고 닥달을 할걸. 많이먹으라고 주구장창 잔소리는 왜 했을가. 많이 먹으라고만 배워줬지 얌전히 먹으라고 닥달 안한것이 잘못이지. 후회막급이다. 딸애는 이쁜 양말 신겨서 왔더니 거치장스럽다고 죽 잡아당긴다. 벗는건 괜찮은데 휘리릭 집어 던진것이다. 던진것도 괜찮은데 어쩜 밥상우에 상추광주리에 던져졌다. 아이구머니야. 폭탄이 터졌어도 내가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것이다. 노루가 제 방귀에 놀란다고 이젠 나는 놀란  노루마냥 애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칠가 노심초사하였다. 상추를 바꿔 왔지만 고기 싸먹는 내내 맘에 걸린다. 보영이 엄마가 뭐라고 할가. 아참. 쑥스러워 쥐구멍에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화가 났지만 손님앞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웃음을 발라가면서 딸애를 진정시킬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속으로 이제 집에 가서 보자 하고 별렀다. 밥을 먹고 있는데  맛이 영 아니다. 이넘들 맛있는거 사준다니까 좋아할때는 언제고 엄마 체면 깍을때는 의논 한마디 안하고 거침없이 해제낀다.    한참을 밥을 먹네 마네 하는데 우리 애들 둘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아들애가 딸애를 밀쳐놓더니 거창하게 딸애를 보고 한마디 하신다. “야. 이 멀싸한기 .......니 까불래.” 딸애는 손해봤다고 에에 하고 울고 불고 난리다. 아~ 정말 못말려. 평소에 내가 화가 날때면 머절싸하다고 욕을 몇번 했다고 제대로 배워서 손님앞에서 망신을 주는거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나나 애아빠나 모두. 애 아빠도 영 못마땅한 눈치다. 씩씩거리면서 나한테 눈을 올리세우고 내리 세우면서 눈치를 주고있었다. 나인들 어떻게 하냐고요. 나도 애가 타 죽겠다고요.  간만에 받은 데이트 신청 이렇게 치르고 나도 애아빠도 기진맥진하여 이젠 다시는 애들하고 밥 먹을러 안가겠다고 집 오는 길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 체면 좀 봐주면 안되겠니. 애들아. 엄마도 우아하게 손님이랑 밥 좀 먹어보자. 제발 부탁이야. 속으로는 그렇게 두덜대면서도 어쩐지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애들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자라는거 같아 한편으로는 안도의 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당당하게 커갈것도 제발 부탁이야!
13    손님과 주인이 꾸는 꿈은 다르다 댓글:  조회:1119  추천:2  2017-10-14
수필 손님과 주인이 꾸는 꿈은 다르다 김영분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너희들 장차 커서 리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언 손등으로 코를 쓱 닦으며 커서 과학가가 되겠다는 애가 있는가 하면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찰이 좋다는 아이에 의사가 되어 할머니 병을 치료해주겠다는 친구에 그야말로 꿈이 각양각색이였다. 그때 유치하게도 심심산골에서 살고 있던 나의 간절한 소망은 소학교 교과서에 중요한 과목으로 선정된 북경 천안문광장에 한번 가보는 것이였다. 그 소원은 어른이 다 되여서 출장이나 관광으로 여러번 다녀와서 풀었지만 어렸을 때 간절히 원해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 첫 장거리 여행마저 일순위로 북경을 다녀왔다. 시키지도, 초대해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나의 자연스런 발상으로 천안문앞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었다. 긴 세월이 흘러 아이들하고 함께 하는 천안문구경이였지만 어릴 때의 그 간절함은 거짓말처럼 또 살아났다. 인파를 비집고 국기 게양식을 거행하는 장면을 꼭두새벽에 일어나 내 두눈으로 보고야 직성이 풀렸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간절하게 소장하고 이루고 싶은 꿈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오는 계절은 항상 나에게 희망을 주듯이 그런 소박하지만 꿋꿋하게 지킬 수 있는 꿈이 마음 한구석에 도망가지도 않고 온천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든든하고 행복했다. 왜 그랬을가? 때 묻지 않은 첫눈처럼 하얀 마음속에서 자라난 싹이여서 그런 것일가. 어른이 되여서도 꿈을 많이 꾸고 가꾸었다. 사업을 잘 해서 큰 집도 마련하고 아이들 류학도 보내고 싶고 무엇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통해 좋은 안해, 훌륭한 엄마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았다.  아이들이 다 큰 지금은 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내여 당당하게 인정받는 사람으로 되고 싶다. 여러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고 더 나아가 잘난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마음이였다. 희망은 풍성하지만 현실은 겨릅대처럼 허약하기 일쑤다. 어른이 되여 가진 꿈이여서 그런지 씨엉씨엉 달리다가도 밧데리가 자주 나가는 핸드폰처럼 시도 때도 없이 빨간 신호가 깜박거렸다. 아이들은 내 마음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주지도 않았고 선생님한테서 호출받기를 거듭했다. 이럴 때마다 힘이 빠진다. 아이들이 곱다가도 미웠고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나의 꿈을 괴롭힌다. 그뿐인가. 사업도 순탄하지는 않다. 바이어들은 카멜레온처럼 색갈을 바꾸어가면서 회사의 인내와 능력을 시험 보며 좀처럼 마음을 느긋하고 편하게 내주지 않는다. 빡세게 당기면 주저앉고 손을 놓으면 날아가는 연줄과 같았다. 요즘 새로이 꿈을 가져본답시고 시작한 글쓰기도 엉망이다. 힘들게 짜내는 고름처럼 눈꼽만큼씩 나오다가 그 자리는 멍투성이가 되기가 일쑤다. 쓰여지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애꿎은 키보드만 부여잡고 구상을 한답시고 커피만 축낸다. 글을 써서 무얼 어쩌겠다는지 말 한마디에 답을 찾고자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글쓰기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대해 의심이 들기도 했다. 족제비를 만난 수탉처럼 기가 푹 죽기도 한다. 정녕 개미가 궁전을 지을 수 없고 참새가 설산을 날아넘을 수 없듯이 쳐다보지 말아야 할 나무를 쳐다본 것일가. 어른이 되여서 가진 꿈은 왜 다 이렇게 흔들리는걸가.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반딧불인양 잠간 유용하게 쓰이다가도 자칫 잘못하면 아주 예리하고 아프게 내 살을 찌른다. 천안문에 가보고 싶은 꿈은 한번도 흔들리거나 괴로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천안문은 내가 진정 보고 싶은 꿈이였기에 오래동안 간직하고 수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다 되여 품은 꿈은 내 꿈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꿈이 아닐가. 그래서 힘들고 괴로웠던 것일가. 그렇다면 잘남보다는 나다움이 더 중요하다. 한집에 들어있는 손님과 주인처럼 품은 꿈이 다르다. 잘남은 체면을 지키느라 화려하지만 빛아래 그림자가 따르듯 불안과 괴로움이 동반하는 손님이다. 하지만 나다움은 주인이다. 주인은 마음이 한결같고 넉넉하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발란스를 맞출 수 있고 집도 편안하게 가꾸고 자신도 편히 쉬면서 성장할 수 있게 리드한다. 어른이 되면서 주인으로부터 어느새 손님으로 바뀌여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이들처럼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되여 아프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생각하기만 해도 행복하고 단단한 자신만의 꿈을 키워야겠다.  
12    두부쟁이의 사랑 댓글:  조회:1833  추천:1  2017-10-11
두부쟁이의 사랑   나는 퇴근할 무렵이면 동네 앞 흥가마트에 들려서 반찬거리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흥가마트는 바로 퇴근길에 있어서 출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퇴근길에 곁들여서  하는 일이라 시간도 절약하고 차도 얻어탈수 있어서 일석이조인셈이다. 몇년을 쭈욱 흥가마트에 들렸더니 이젠 내 생활에 지긋이 자리매김을 한 일상이 되여버렸다. 마트에 들어서면 가게 주인들이 부지런히 손놀림을 하고 있다. 흥성흥성한 시장의 분위기에 감염이 되면 나도 모르게 내 혼탁했던 의식도 바로 공기 불어넣은 풍선처럼 붕 떠오르는 행복 모드로 들어선다. 바로 들어서면 한국식품을 팔고 있는 가게로 부터 지글지글 중국식 튀김을 팔고 있는 가게도 있고 쌀가게 야채가게 양념가게도 있는가 하면 쑤욱 안으로 들어가면 해산물 가게도 있고 정육가게도 있다. 그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부장사를 하고 있는 동북 한족 언니가 있다. 동북사람 키골에 걸맞게 우뚝하고 펑퍼짐한 몸집에 피곤한듯 열정적인듯 항상 강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한결같은 언니이다. 가게진렬대는 3메터 남짓하고 두부 진열대를 뒤로 작은 칸이 하나 있는데 그기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는 두부를 손수 만드는것이다. 새두부가 완성되면 이 언니는 두부김이 물물 나는 함지박만한 큰  쟁반을 거뜬히 들어올려 진렬대에 내려놓고는 흥겨운 소리로 하고는 칼로 보기좋게 두부모를 가로 세로 갈라놓는다. 새두부들은 새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처럼 하얀 김을 내뿜으며 이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콩하고 관련되는 콩나물 녹두나물 두유 건두부 등등 여러가지를 팔고 있는 만큼 손놀림이 빠르기로 예사롭지가 않다. 내가 볼때마다  언니는 항상 재빠르게 몸과 손을 뜨개바늘 하듯이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나처럼 하루종일 책상머리 맞대고 앉아서 일을 하면서 일이 힘드니 어쩌니 하는 모습이 너무 대조가 된다.  하루종일 손수 두부를 만들어 파는 육체적 일을 하고 있는 이 언니도 몸으로는 얼마나 피곤할가 생각을 하면 힘들다고 생색을 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허니 이 언니만 보면 나도 모르게 맘이 편해진다. 그리하여 이 마트에 들릴때마다 저절로 이 가게로 발길이 돌려지고 여느때나 두부 한모를 사면서 안부를 전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살뜰한 웃음을 선보인다. 인심도 좋아 내가 가면 단골이라고 미역 한줌이라던가 땅콩 한줌이라던가 꼭 꼭 서비스로 주곤 했다. 몇년을 단골로 다니니 이젠 너무 익숙한 사이가 되여 친구가 된 느낌이다. 내가 은근슬쩍 이 언니를 좋아하는 리유중 하나는 인심이 좋은것도 있지만 소박한 언니의 형제사랑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언니에게는 다리를 약간 절고 있는  남동생이 한명 있었다. 혼자 두부장사를 하고 있던 언니 가게에 언제부턴가 남동생이 되여보이는 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첨에는 짤뚝 거리며 누나를 도와서 매대에서 두부도 팔고 콩나물도 팔고 하면서 돈도 받아주고 허드레 잡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니를 닮아 순박하면서 다소곳하며 또 마음이 후더워 손님들 손에 채소가 무거워 보이면 꼭꼭 불편한 다리로 차 있는 곳까지 같이 채소를 들어주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니네 두부가게는 항상 흥성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더니 아릿다운 여자친구를 데려 와서 같이 두부를 팔고 있었다. 그 여자친구도 아주 착했다. 계산 또한 야무지게 잘해서 두부사고 땅콩 사고 미역사고 여러가지를 사면 포장해서 손에 쥐여주는 순간 척 하고 계산을 해낸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맛있게 먹고 또 오세요 하면서 인사를 한다. 하여튼 힘들게 하루 일하고 채소사러 들리면 두부장사하고 있는 이 식구들 보면서 나도 몰래 긍정의 힘이 생겨났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고민꾸러기인 우리들에게 그야 말로 마음의 힐링 시간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그 뒤로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하루는 채소사러 들렸다가 두부사고 돌아서려 하는데 두부쟁이 언니가 웃으면서 자기 남동생을 기억하냐고 한다. 그래서 그럼 기억하지 했더니 지금 그 남동생이 독립해서 바로 앞쪽에 있는 가게에서 야채를 팔고 있다고 했다. 내손에 야채를 가득 산걸 보더니 한번 가게자리를 알아놓고 담에는 남동생가게를 이용해달라고 열성스레 홍보를 하는거였다. 그러고 보니 남동생이 안보인지 시간이 퍼그나 지난것 같았다. 그 가게로 가보니 남동생은 갓난 아기를 안고 야채들을 곱게 진렬하고  있었고 여자친구 였던 그 아가씨가 부지런히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야채를 팔고 있었다. 그사이 결혼을 하고 아기까지 낳은거 였다. 손님들이 많으니 채바퀴돌듯 입과 손이 놀새가 없었다. 머리도 팩팩 돌아가서 야채 여러가지를 다 사고 나면 큰 포리백에 마무리 해서 야채를 손님손에 쥐여주는 순간 채소값도 영낙없이 튕겨져나왔다. 채소를 좀 많이 산 손님한테는 생강 한토막이라도 더 쥐여주는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누나가 내손에 야채봉투를 낚아채서 기이이 문앞까지 배웅을 하는거 였다. 그러면서 동생 가게를 많이 이용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거였다. 다리가 불편한 남동생을 항상 도와주려는 누나의 마음이 흠뻑 젖어있었다.긴병에 효자 없다는 세월에 이 언니는 다리가 불편한 동생을 귀찮게 생각치 않고 어떻게든 도와서 장가도 보내주려고 했고 독립도 시키려고 두부쟁이의 그 능력안에서 최상의 노력을 했는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금방 오픈한 야채가게지만 두부가게 손님들이 북적거려서 장사가 여간 흥성하지가 않다. 가진게 많아도 서로 시기하고 티각태각하는 사람들이 많고도 많은데 한낱 두부쟁이에 불과한 이 언니가 정말 위인처럼 숭고해보였다. 소박한 일상에 묻어나는 끈끈한 가족사랑이 아스팔트길에 그어놓은 흰 도로선처럼 선명하고 찐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두부가게와 야채 가게가 나날이 흥성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나는 문앞까지 배웅나온 두부쟁이 언니를 향해 감동의 웃음을 지었다. 
11    얼굴(窟) 댓글:  조회:755  추천:2  2017-10-09
수필 얼굴(窟) 김영분   얼굴 하면 자연히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의 얼굴 애들 얼굴 남편 얼굴 친구의 얼굴 회사동료의 얼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제 저녁 티비를 보다가 김제동의 톡투유프로그램을  보고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한창 얼굴이라는 화제로 잼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송길영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이 나로하여금 섬찍한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그 선생님이 글쎄 말씀하시기를 얼굴(窟)을 한자로 풀이를 했을때  한 사람의 얼이 지나가는 동굴이다 라고 풀이를 할수 있단다. 그러고보니 굴(窟)은 정말 동굴할때 굴이였다. 굴이란 터널로 풀이가 되기도 하기때문에 얼굴은 그야말로 한사람의 얼이 지나가는 통로임이 틀림없다. 얼이 지나가는 통로인만큼 자연스레 한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얼이 쓰여있을것이다. 즉 내 맘이 다른사람한테 보여졌을테고 다른 사람 영혼도 내가 얼굴을 봤을때 엿보았을것이다. 어제 그프로그램을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사람의 얼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보고있던 얼굴은 그냥 얼굴이 아니라 한사람의 얼 즉 영혼이 였음을 알았을때 오늘 아침 다른 사람을 마주할때는 가볍게 다른 사람 얼굴을 볼수가 없었고 나도 가볍게 내 얼굴을 아무렇게나 하고 보여주면서 다닐수가 없었다. 상냥한 미소쯤은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가. 친절한 눈웃음을 짓고있어야 하지 않을가. 이건 얼굴이 아니라 내 영혼 내 맘이니까. 아침 다섯시반이 되니 내 핸폰 알람이 울린다. 달콤한 잠에서 깨야한다. 나는 두 아이 엄마니까. 애들이 학교를 가야하니까. 큰 애는 초중2학년이라 학업도 과중하니 아침을 잘 해먹여야 하니까. 작은 애는 5학년이니 또 아침 밥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 줘야 하니까. 어제 밥은 앉혀놨고 예약도 해놨으니 이맘때면 구수한 밥 냄새를 풍기면서 밥이 다 되여 있을테고 있는 밑반찬에 계란하고 파를 넣고 살짝 지져주고 미역에다 소고기 녹혀놨으니 국을 끓이면 된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잠을 물리치고 옹크렸던 몸도 기지개 쭉쭉 하면서 일어날 준비를 한다. 부시시 눈비비면서 일어나서 어슴푸레한 거실을 지나 주방에 전기를 켠다. 내 눈은 강한 전등빛에 찌프려져있다. 이때 갑자기 어제저녁 봤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 내가 오늘부터 얼굴관리 하기로 했으니. 가만 .솔직히 얼굴 관리 하기로 결심한게 아니고 자연히 내 맘이 그렇게 시키고 있었다.그만큼 영혼이 관련된 일은 매 사람마다 전율을 느낄만큼 심각하게 잘 다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가보다.누가 안 보고 있을지라도 얼굴 찌프리는 일은 삼가하자 하고 생각하니 얼굴이 자연스레 펴졌다. 내 영혼을 구겨서야 되겠는가. 계란볶음하고 소고기미역국을 다 해놓고 나면 우리 큰 애부터 깨워야 한다. 예전같으면 큰 애가 자고 있는데로 가서 이불을 걷으면서 얘야 빨리 일어나라 시간다 됬다 하고 건성으로 말하고 다시 내 할일을 했으련만 오늘은 그렇게 쉽게 아침 엄마와 하는 첫 얼굴을 그냥 아무 의의 없이 마주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밤중내내 자고 있던 얼굴 근육들은 아직 풀어지지 않았는지 웃으려고 해도 아주 뻣뻣한 감을 주었다. 그래. 예전엔 아침마다 이렇게 밋밋하고 뻣뻣한  얼굴로 우리 애들을 대했구나. 자책감이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애를 깨웠다. 내 맘과 영혼을 담아서 정성스레 아들이 눈을 부시시 떴다. 쭈빗쭈빗 선 머리를 돌리면서 눈은 어슴프레 뜨면서 나를 바라본다. 엄마는 상냥스레 웃고 있다.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영혼을 담은 얼굴은 웃을때 아마 은은한 사랑을 풍기면서 상대방을 포옹하리라 믿었다. 아들은 이런 엄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예전 하던데로 또 눈을 감는다. 그러고는 한마디 하지만 내가 내 정성과 맘을 담은 얼굴로 아들을 대했기에 우리 아들은 충분히 내 맘을 읽었으리라. 아침에 일어나서 사랑을 듬뿍 느꼈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었다. 왜냐면 잠꼬대 같은 아들의 말소리는 흐느적흐느적 애교가 섞여있는것처럼 들렸기에. 예전엔 아들도 툭한 말투로 나한테 대꾸하지 않았던가. 하면서 말이야. 같은 말이지만 느낌과 톤과 흐름이 다르게 느껴졌다. 봄눈이 녹는 혹여 사탕이 입에서 녹는 그런 느낌이였다. 출근하는 길에 나는 또 그 얼굴 화제가 떠올랐다. 나는 여태 어떤 얼굴로 살아왔을까.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왔을가. 나는 잘 웃는 편이 아니다. 성격이 활달하지 못한데다가 낯가림을 많이 한다. 나는 여태까지 애들을 혼낼때는 험상굳은 얼굴을 했었고. 친구험담을 하고 있을때는 야릇한 심술을 상기시켰고 가족들땜에 속상했을때는 한없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을 통해서 나의 속마음을 그대로 다른사람들한테 보여주었다. 참으로 많이 미안한 일이였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도 아마 불쾌했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왜 자주 웃어주지 않았을가. 내 어두운 얼굴뒤에는 나의 소심하고 씩씩하지 못한 영혼이 엿보였다. 그러면 자주 웃기만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인상만점이지 않겟는가.어제 출연한 게스트들과 객석 손님들이 한결같이 열띤 토른을 벌린 화제가 바로 자주 웃는것이다. 현시대 사람들은 집단주의속에 살면서 자주 웃을것을 강요당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얼굴도 남들과 같은 얼굴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대학나오기전까지는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소유했을지라도 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곧바로 자기 얼굴을 잃어가는 사람이 되여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 애들은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토라져있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맘껏 웃고 있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눈물 뚝뚝 흘리고 신기하면 신기하다고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싫으면 싫다고 외면하고 좋으면 좋다고 앙탈을 부리기도 한다. 이렇듯 애들 얼굴은 자연스레 연출된다. 이건 애들의 영혼이 그만큼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반면 우린 다르다.애들이 좋은 성적표를 내 앞에 가져왔을때는 행복한 웃음을 하고 있을테이고 남편에게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았을때는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것이다. 이렇듯 자유분방하게 내 맘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좋아도 나빠도 화가 나도 억울해도 다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잘 웃는 사람이 성공을 가져온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팔고 있는것이다. 우리의 얼은 얼굴을 통해서 지나가는데 정말 기쁠때 웃는것은 당연한것이지만 화가 날때거나 억울할때도 내 속마음을 감추고 얼굴을 통해서 가식적인 웃음을 내보내야 할때가 있다. 그 때 그 얼굴은 아마 웃고 있지만 맘은 많이 고달펐으리라. 그래서 잘 웃는 사람도 늘 즐거운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저 즐거운척 보일 뿐이다. 왜냐면 그사람의 얼굴은 즐겁지만 영혼을 고달플수도 있기때문이다.  이젠 내 얼굴이 얼굴이 아니라 내 영혼히 지나가는 통로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나는 더 이상 가식적으로 내 얼굴을 웃기면서 혹사시키지 않기로 했다. 어두운 얼굴 표정도 짓고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얼굴은 내 맘이자 내 영혼이다. 잘 어루만져주고 잘 풀어주고 해야 할것 같다. 내 맘을 잘 달래서 편안하게 웃을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워야 한다.
10    외로운 별처럼 댓글:  조회:905  추천:2  2017-09-28
수필 외로운 별처럼 김영분       더운 여름날이 화염을 내뿜는다. 시원한 여름을 날리려 바닷가를 찾아 한적한 팬션을 찾았다. 바다물이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함께 시원한 밤 바람은 어느새 낮에 찌든 내 힘든 마음의 우려를 말끔히 거두어갔다. 늦은밤 바다에서 보는 하늘의 별은 유난히 반짝인다. 별은 개체수가 많다고 하나 서로 서로 가까이하려해도 먼데서만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참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자기궤도에서 쉼없이 달려도 목적지에 도달할수 없는 그리고 별무리들과 어울린듯해도 한시도 겹치지 못하는 존재이다.그래서 혼자서 빛난다. 외로운 빛을 발사한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든다. 사람들도 시끌벅쩍 흥성거린다고 하지만 조용히 앉으면 또 혼자가 되고만다. 위인은 외롭다고 했다. 위대한 과학자 에디슨도 그랬듯이 아마 그도 실험실에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오래 하여왔을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 싶이 에디슨은 초등학교 시절에 지역 교육청에 저능아로 공식 보고된 사람이였다. 다행스럽게 그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온 에디슨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아들에게 철학고전과 같은 묵직한 책들을 독서시켰다고 했다. 외로운 전쟁이였을것이다. 10여년후 에디슨의 발명품들이 서서히 시장에 나타났고 그 발명품들은 날개가 돋친듯 팔려나갔다고 했다. 이러한 휘황한 성과는 그와는 또 아무 상관이 없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그에게 속하는건 오로지 외로운 독서와 실험과 발명 뿐이였을수도 있었을것이다. 평가하는 자들은 흥성거렸을진데 아마 에디슨 본인은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마 제일 빛나는 별이 되였지만 주위의 수많은 별들의 총애를 받았을뿐 자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던것이다.   나도 종종 외로운 느낌을 갖는다. 집에는 식구가 많아 흥성거리고 직장에서도 바빠서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위챗에도 친구들이 쉴새없이 모멘트를 공유하고 있고  독서도 틈틈히 하여 책속 사람들과도 소통을 할 정도로 감성도 풍부하지만 조용해지면 부단히 외로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은 어디서 오늘것일가.   나에게는 달리기를 즐기는 친구가 있다. 처음에는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가볍게 시작한 아침 달리기가 이젠 거대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녀는 처음에는 공원을 한바퀴 두바퀴를 돌면서 뛰였다. 한달 뒤에는 세바퀴 네바퀴를 뛸수 있었다. 일년을 견지하고 나니 발만 떼면 십키로는 문제없이 뛰여 다닌다. 이어폰 하나에 단촐한 운동화,그리고 쉼없이 뛴다. 그 십키로를 뛰면서 땀을 흘리고 거칠게 숨을 쉬며 옆에 건물들은 쉬익쉬익 지나가고 공원에 쭉 뻗은 나무들은 흔뜰흔뜰 지나간다. 그녀는 다이어트를 위해  외로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갔을것이다. 매일이다싶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일년사이 10키로 감량을 기적적으로 했다.더 큰 기적은 하루 한시간을 쉼없이 달린 결과 그는 2016중국위방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장거리 달리기 시합에 참가하여 22키로 제일 먼 거리를 선택하여 두시간만에 완주하고야 만다.십분도 제대로 못 뛰는 나로서는 너무도 경이롭다.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명예의 최상의 보답이  아닌가. 고된 외로움 뒤엔 휘황한 성과가 따라온다는 좋은 실례인것이다. 현대판 에디슨이다. 주위의 수많은 친구들의 박수와 응원속에 그녀는 또 다시 혼자 달린다. 내가 외로운건 아마 아무런 확실한  미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혼자 확실한 답을 엊고자 고민을 하고 있는데서  오는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자녀를 잘 키워야 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혼자 자녀심리책 등 여러가지 도서를 혼자 탐구해보았다. 그러나 책속의 이론은 이론일뿐 내 아이에게 맞는 교육법은 그래도 이리저리 부딛치면서 키워야 할수밖에 없다는 정답아닌 정답을 어렴풋이 알았을때 한껏 외로움을 느꼈다. 나의 더 나은 미래는 어떤것일가. 외롭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여기저기 속심말을 터놓고 토론도 해 보았지만 결국 누구도 나에게 답을 줄수 없음을 알았다. 아마도  나는 남의 입에서 확실한 나의 미래를 먼저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였을것이다. 나의 미래는 남의 조언에 의해 만들어질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수 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계속 외로워 해야 한다. 외로운 과정이 바로 우리의  삶이니까. 외로움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니까. 흥성흥성한 사람들 물결속에 내비치는건 아마도 내가 아닌 다른 나였을수도. 나는 외로울때의 내가 점점 좋아진다. 그때의 내가 진정한 내 자신이라는것을 알았기때문이다. 바로 저 외로운 별처럼.
9    남편은 왕자 댓글:  조회:927  추천:1  2017-09-25
수필 남편은 왕자                                                            김영분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에 배우자이름을 아주 재치있고 사랑스럽게 저장한다. 어떤 사람은 “내 사랑”이라 저장하고 어떤 사람은 “귀요미”라고 저장하기도 한다. 나도 핸드폰이 생긴뒤로 남편 이름 저장하는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다. 실랑이라고 저장할가 아님 남편이라고저장할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왕자라고 저장하기로 했다. 왕자라는 이름이 제일 맘에 들었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는 왕자(王子)는 멋있는 남자이다. 왕이나 왕의 아들로서 대개는 동화속에서 봄바람이 몸을 살포시 감싸듯 따뜻하게 공주를 사랑해주고 보호해주는가 하면  때로는 질풍같이 말을 타고 번쩍이는 칼을 치켜든채 한나라의 평화를 위해 싸우기도 하는 그런 로망의 남자이다.왕자(王子)는 또한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황족이나 왕족의 남자나 특정의 영역을 지배하는 귀족을 칭한다고 한다.나는 어린시절에 어쩌면 동화책을 보면서 아마도 왕자를 맘속으로 은근히 흠모한 모양이다. 그래서 결혼해서 핸드폰이 생긴후 남편 이름을 심사숙고한 뒤에  왕자라고 저장했다. 그런데 왕자란 이름을 지키지도 쉽지는 않았다. 한번은 우리 큰애가 안방에서 아빠 전화로 내한테 장난전화를 해왔다. 마침 애아빠가 안방에 놔둔 나의 전화기를 나한테 넘겨주려고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다가 액정에 왕자란 이름이 뜨니까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따지고 들었다. “야.이게 도데체 누구야? 누군데 왕자야?” 그 왕자가 자신이 였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싱겁게 머리를 젓기도 했다. 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몸조리 할때 우리 친정엄마가 와계셨다. 어느날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핸드폰을 가지고 와서는 황당한 얼굴빛을 해가지고 속삭였다. “얘.왕자란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러고는 못마땅한지 질책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이름이 왕자야?이름도 이상하네.” 우리 집은 통 애교가 잘 통하지 않는  집안이라 식구대로 무뚝뚝한 성격 소유자이시다. 우리 부모님은 따뜻하게 유머 한번 쓴적이 없었다. 묻는것도 답하는것도 간단명료하다. 아버지가 일하시고 들어모면 세수대야에 물을 부어서 후룩후룩 소리를 내시면서 세수를 하신다. 내친김에 머리에 까지 물을 끼얹으며 뒷목까지 깨끗이 씼으신다. 맞춤하게 엄마가 알아서 밥 상 차려주시면 아버지는 그냥 묵묵히 차려논 음식 말씀 한마디 없이 수걱수걱 드신다. 식사후 뒤로 물러 앉으시면 엄마가 슬쩍 슬쩍 설겆이를 한다. 대화를 척척 몸으로 하시는지 눈으로 하는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용케도 두분이 척척 손이 맞아 돌아갔었다. 동생이 한국에 일하러 간뒤 엄마랑 드문드문 통화할때면 옆에는 듣는 내내 답답하기 그지 없다. 엄마가 쉽지 않게 입을 열려는 순간 전화 저쪽에서 동생이 미처기다리지못하고 말을 이어간다. 그러면 엄마는 또 “그래 니 말해봐라.”하시고 동생은 또 동생대로 엄마가 아마 할말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하던말을 끊는다.결국  두사람은 10여분을 통화했지만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끊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집안의 딸이 글쎄 시집을 가더니 실랑 이름을 왕자라고 저장했으니 엄마는 그 왕자가 사위인줄 상상도 못했으리라.엄마는  내가 남편과 통화하는것을 지켜보고 또  전화기 로부터 흘러나오는 대방의 목소리가 확실히 사위인것을  확인한후에야 마음이 놓이는지 미소를 떠올렸다.그래도 웃긴다는듯이 한마디 하신다.  “왕자는 무슨…” 엄마앞이라 그런지 더 몸둘바를 몰랐다. 그래도 내 사랑은 내가 가꾸어야 하니 쭈욱 내 방식대로 왕자로 저장할거라고 다짐했다. 이렇게 내가 실랑을 왕자라고 저장한 일이 입소문을 타고 울집 식구들이 다 알게 되였다. 첨에는 좀 부끄러웠는데 한동안 쓰고 나니 얼굴이 좀 뻔뻔해져서 이젠 제법 머 어떻냐 하는 배짱이 생겨서 애들 앞에서도 실랑을 우리 왕자님 왕자님 하고 불렀다. 그런데 더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한번은 실랑 친구가 외지에서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 친구는 우리 실랑이랑 짜개바지 친구란다.청년시절에 같이 시골에서 닭도 도둑질 해먹고 머리도 같이 길게 길러본 친구였다고 한다. 우리 실랑도 애교가 적은 사람이라 청년때는 아주 무뚝뚝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울집에 들어서면서 애한테 니가 모모아들이구나 하면서 남편이름을  부르는데 가지런히 섰던 우리 애들 두놈이 일제히 대꾸한것이다. “아니예요. 우리 아빠는 왕자예요. “ “엥. 왕자라니. 너네 아빠이름을 왕자로 고쳣어?” “네. 엄마가 아빠 이름을 고쳤어요.” 나나 애 아빠나 너무 민망해서 어쩔줄 몰랐다. 그 친구는 우리 남편을 보면서 배를 끌어안고 웃는다. “아이고 니가 무슨 왕자야 왕자는?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하하하하” 소꿉친구앞이라 남편은 창피해서 얼굴이 벌개져서 절절 맨다. 쥐구멍이라도 있음 찾아들어갈 기세다. 아주 큰 망신을 한셈이다. 에효. 왕자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구나. 고귀한 혈통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님 말타고 싸우면서 나라를 구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도 나같은 근사한 공주는 지켰는데말이지. 그래도 나는 쭈욱 왕자라는 이름으로 사랑해 가리라. 행복과 사랑은 내 몫이니까. 
8    감기 댓글:  조회:643  추천:1  2017-09-25
수필 감기 김영분   12월이 되였다. 고향에는 함박눈으로 뒤덮혔을 엄동설한이다. 하지만 청도는 아직도 포근한 나머지 길가에 가로수도 겨울 답지 않게 파랗게 뒤덮여져 있다.   휘끄무레한 동북농촌에서 상경한 조선족들이 청도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자신의 지혜와 끈질긴 노력으로 풍성한 결실을 듬뿍 따안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12월이 되니 곳곳에서 송년회파티가 열리고 소주잔 기울이며 위하여를 신나게 웨치는 소주멜로디 소리가 울려퍼진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취기도 있고 만족함도 있는가 하면 애석함도 묻어나 있었다. 애들은 노는 시간은 거의 빼앗기다싶이 되였고 기말시험이 코앞인지라 시험연습지에 허리가 휘여질 정도고 주말이면 악기를 메고 부시시한 머리로 악보 훈련하러 다닌다. 나도 12월이 되니 바쁜 행보에 숨 돌릴 새가 없다. 그러더니 쉬여가라고 귀띔을 하기라도 하듯 심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년말 바쁜 회사일에 들쑥날쑥 여러번 참가한 년말 파티에 알쑹말쑹 애들 공부에 여러가지로 신경을 썼더니 내 몸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온것이다. 예사로운 감기인줄 알고 집근처 약국에서 약을 사서 혼자 먹었다. 내가 혼자 이전에 사 먹던 기억으로 몇가지 약을 지목해서 샀더니 약국 언니가 심드렁한 표정에 이 약으로는 감기를 퇴치할수 없다면서 견적이 좀 나오는 약으로 대체해주었다. 비싼 약 먹으면 빨리 나을가 하는 마음을 안고 집에 와서 열심히 일주일을 먹었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약을 먹은 탓인지 최면술에 걸린듯 머리가 어리둥절하고 속이 메슥거리고 급기야 밥맛도 떨어졌다. 오한에 걸린듯 온몸이 오싹오싹 추워나고 목줄기를 타고 불이 타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픔에 손마디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심지어 뼈속까지 송곳으로 찌르는듯 아팠다. 그야말로 탈태환고(脱胎换骨)의 무아지경이였다.     감기바이러스 수명은  길어야 일주일이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행운을 빌었다. 이젠 약도 일주일을 먹었으니 더이상 약먹을 필요가 없다. 나을 감기면 언녕 나았을거다. 나는 약을 먹지 않기로 했다. 밥맛이 똑 떨어져 더 이상 쌀 한알도 넘길수가 없었다. 그날밤 열이 펄펄 났다. 눈에서 확확 불이 이는것만 같았다. 눈동자가 녹아 내릴것 같앗다. “쯧쯧.옛날에는 뜨끈한 생강물에 정통편 한 알 먹고 땀 푹 내면 감기 뚝 떨어 지는데 지금은 감기가 참 질기다.” 엄마가 가슴 아파 말씀 하신다. 꿀 넣고 생강을 푹 우려서 내앞에 떡 하니 가져오셨다. 생강차 한 사발 들이키고 나는 이불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땀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불덩이 같이 달아올랐지만 땀은 좀체로 나지 않았다. 나는 저녁내내 킁킁 소리를 내면서 비몽사몽 헤메면서 고열과 씨름했다. 오기가 생겼다. 에라. 죽기야 하겠는가. 감기야. 덤벼봐라. 대체 누가 이기나 한번 지켜보자. 고열은 거센 공세를 펼쳤다. 저녁 내내 내 눈을 녹일 기세로 화염을 토하더니 새벽이 되니 그제야 고열도 힘들었는지 땀이 되여 쑥 내려갔다.  암세포는 고열에 살아남을수 없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도 내 몸안에 잠자고 있던 암세포들도 모두 다 뜻하지 않는 감기 횡포에 앗 따가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장렬히 희생했으리라 믿는다. 열이 내리니 살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먹을수가 없었다. 목이 아파서 넘길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강물만 먹어야 했다. 곁들여 후식으로 배와 꿀을 닳인 엄마표 간식만 조금씩 먹을수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삼일을 쌀알 한알 안 먹고 생강물로만 견지해봤다. 이전에 다이어트 한다고 여러날 밥을 안 먹는 사람들을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을 했었는데 정작 굶어 보니 견딜만 했다. 본의 아니게 굶었지만 그 덕인지 감기도 서서히 꼬리를 감추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애시당초 밥을 안먹고 삼일을 버텼더라면 감기가 이 지경으로 심하게 나를 괴롭히지 않았을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비우고 나면 병도 퇴치가 되는것 같았다. 감기는 피곤해서 쉬라고 보내는 신호라고 하던데 아마도 마음을 비우고 속도 비우니 감기가 나아지는것 같았다. 12월이 빨리 지나야 할텐데. 우리 집 아저씨는 연달은 송년회때문에 마냥 행복한것만은 아닌것 같다. 즐거워서 초대받고 가야 할 자리에 걱정을 반쯤 메고 가는 아저씨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엄마.빨리 기말시험 끝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나만 보면 투정이다. 그도 그럴것이 초중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은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시험지때문에 눈빛이 퀭한지가 오래되였다. 지나친 공부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 애들을 보면서 “그래.12월이 끝나고 기말시험이 끝나면 푹 쉬게 해주마. 마음껏 비우고 즐겨라.”하면서 나혼자 되뇌여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할것없이  이 세상에서 흩날리는 한올의 미세한 먼지와 같은 존재이다. 복잡하고 욕심 많은 머리를 깨끗이 씻고 비울때면 아마도 조금 더 개운해지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감기가 낳는것처럼.
7    제비가 물고 온 박씨 댓글:  조회:673  추천:1  2017-09-22
수필 제비가 물고 온 박씨 김영분   장미꽃이 만발한 5월이 깊어가는 어느날, 출근을 했더니 회사 복도에 웬 제비 대여섯마리가 신바람나게 날아다닌다. 좁은 복도에서 쉬익쉬익 날면서 얼마나 떠드는지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한번 내다봤다. 웬걸 사무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굽인돌이처럼 꺾이는 복도 웃쪽으로 제비집이 덩그러니 하나 걸려있었다. 이 공장으로 이사온지 3년이 되는데 이전에는 왜 보지 못했을가. 바깥도 아니고 사무실 안쪽 복도에 제비집이 있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였다. 우리가 이사들어올때 건물주가 새롭게 페인트칠을 했는데 제비집도 흰색으로 도배가 되여 있었던것이다. 이 제비들은 아마도 헌 제비집을 발견하고 살림을 차려볼가하고 집을 잡으러 온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제비이다. 도시가 들어서고 공장건물을 구역을 나뉘여 순서대로 부수면서 점차적으로 아파트위주 건물을 짓는 이 동네에서  제비가 재잘거리는 모습을 못본지도 거의 3년이 된것 같았다. 제비집이 왜 복도안에 있는지도 이해가 갔다. 공장건물은 네모칸식이여서 처마로 의지할 지붕이 없었던것이다. 예전에는 너무도 우리에게 친숙하고 항상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던 제비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제비 한쌍이 나무가지를 부지런히 물어다 집을 짓고 새끼를 위해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날으는 모습을 보며 혹시 강남에서 박씨는 물고 왔는지 하면서 흥부전에 나오는 제비를 상상하곤 했다. 항상 우리 주변을 낮게 감아 날던 제비의 갑작스런 방문에 나는 물론 회사 전체 직원 스무몇명이 모두 삭막하고 딱딱한 경쟁분위기로부터 푸근하고 다정다감한 시골인심모드로 바뀌였다. 솔직히 제비가 오기전에는 회사가 불경기여서 저마다 얼굴이 찌뿌뚱했었다.업무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높은 목소리가 오갔고 거래처전화는 자재를 제때에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쿵쾅거리면서 끊을 때도 있었다. 헌데 제비가 왔을뿐인데 우리의 까칠하던 마음은 난로를 피운듯 따뜻해졌다. 설레이는 마음을 잠시 뒤로한채 일하는 공간에서 제비랑 같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선뜻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였다. 바이어 상담도 때로는 해야 하고 거래처 사람들과 회의도 해야 하고 더우기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무실 직원들은 제비의 재잘소리가 무더운 여름날에 날카로워지는 신경질에 부채질을 하지 않을가하는 걱정이 많았다. 우리는 제비를 들여야 할지 아니면 매정하게 쫓아내야 할지를 놓고 열렬한 토론을 벌렸다. 모두 진한 커피를 잔뜩 먹은듯 흥분이 되여서 거창하게 열변을 토했다.  인사과장은 복도에서 제비가 재잘거려서 업무에 지장을 주게 된다면서 이제 제비가 금방 왔으니 우리가 훼방을 놓으면 아마 자각적으로 다른데로 가지 않겠냐하는 주장이다. 제비는 예로부터 길조라고 알려져 왔던터라 쫓아내기보다는 스스로 물러나기를 주장했다. 샘플실주임은 도리도리 머리를 저으며 꼼꼼히 패턴을 확인하던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는것이다. 제비는 흉가는 절대 찾아오지 않으며 제비집도 허무는 법이 없는데 가정을 꾸려보겠다고 찾아온 제비를 자의든 타의든 쫓아내는것은 아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며 찾아온 복을 밀어내는 일이라는것이였다. 생산을 관리하는 과장아저씨는 이제 제비가 배설물도 떨어뜨릴텐데 어찌 무더운 여름에 그 냄새를 맡으면서 견디겠냐고 반박을 했다. 그리고 복도에 제비집이 있어 퇴근을 한뒤 대문과 창문을 다 닫아야 하는데 제비때문에 창문을 열어둘수는 없지 않느냐 하면서 자신도 제비가 찾아와서 아주 정겹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열띈 토론은 마치 납기를 앞두고 곧 출하할 마지막 점검회의처럼 진지했다. 나는 며칠 지켜보자고 했다. 일주일뒤 다시 토론해서 제비를 들일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목소리를 높이며 내탓이니 너탓이니 태각거리면서 일을 하던 분위기가 서로 배려하고 협력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회사는 뜻밖에 찾아온 제비가족들때문에 화기애애해졌고 새로운 생기가 흘러넘쳤다. 사장님을 비롯한 회사원 모두 시키지도 않았지만 복도를 지날 때마다 머리를 들어 제비랑 주거니 받거니 인사를 나누며 정을 쌓아갔다. 드문드문 바쁘다는 리유로 서로 건너뛰던 아침인사도 호상간에 꼬박꼬박 함박꽃처럼 웃으면서 하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한결 청아해졌다.제비에게 인사하면서 바늘구멍만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던것이다. 제비에 관한 지식도 더 많이 캐고 묻고 알아가게 되였다. 제비는 쌍쌍히 사는 조류인데 왜 대여섯마리가 같이 재잘거리면서 들락날락거리냐는것이였다. 정답을 알수 없는 우리는 아마도 친척들이 아닐가 또 아니면 지금 한참 집 한채를 놓고 여러쌍이 경쟁을 하는데 차지하는 놈이 임자라고 지금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거라고 어느 제비가 이기고 장가를 가느냐 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색다른 토론에 너무 재미있어서 꺄르륵거리며 웃어댔다.삽시에 회사원들끼리 공감대가 생기더니 협력관계가 더 좋아졌다. 제비들이 돌아온지 사흘이 지나자 정말로 한쌍만 집으로 들락거렸다. 아마도 집을 차지하기에 성공한 것 같았다. 우리는 일제히 용감한 제비부부에게 축하를 보내주었다. 갑자기 제비연구원이 된듯한 느낌이였다. 자각적으로 제비가 떠나가기를 바랐던 인사과장은 슬쩍 제비집 밑에 헌 박스도 가져다놓았다. 배설물 관리까지 들어갔던것이다. 제비가 외출을 한 사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보니 아직 제비알은 없다면서 빨리 어린 제비가 생겨났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복도벽이 반반한지라 제비 한마리가 집안에 들어앉아있으면 다른 한쪽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좁은 복도에서 째악째악하면서 황급히 날아다니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생산과장은 자재과 남자직원 한명을 데리고 뚝딱거리더니 제비집 밑에다가 칼도마만한 철판을 매달아놓았다. 제비 배설물도 받고 제비들이 집안에서 내려와 거실마루에서 편히 다닐 수 있게 넓은 운동장이 생긴 것이였다. 그랬더니 한마리는 집안에 앉아서 다른 한마리는 철판테두리에 살포시 앉아서 서로 바라보고 재잘거리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별장이 따로 없었다. 이제 제비가 알을 품는 모습을 제비남편이 편히 지켜줄 수 있겠다면서 일제히 좋아했다. 경비아저씨도 저녁만 되면 창문을 빠꼼히 열어놓는다. 제비가 집으로 드나들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기꺼이 지켜주었다. 회사원들은 제비에 대해 풀어줄수 있는 배려는 모두 신경을 써서 해결해주었다. 그사이에 서로의 착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상대방에 대한 한층 더 깊은 호감을 가질수 있었다.덕분에 회사원들은 더 탄탄히 뭉칠수 있었고 불황기이지만 누구도 앞날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열정을 내여서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수 있게 되였다. 결정을 해야 하는 날이 왔지만 아무런 회의도 소집하지 않았다. 이미 제비는 회사원들 마음속에 깊숙히 똬리를 틀고 앉아 우리는 제비를 떠날 수 없게 되였다. 우리 기억속에 친숙한 길조이자 강남 가서 박씨를 물어다 주던 그 제비가 다시 돌아와서 고맙기만 하다. 아마도 우리에게 불황을 이겨내고 희망을 가지라고 박씨를 물고 찾아온 것 같다. 그 박씨는 다름아닌 배려와 협력만이 두려움을 떨치고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이다는것을 알려준것이 아닐가.
6    지금 서있는 곳에서 행복을 빌어요 댓글:  조회:1134  추천:2  2017-09-22
수필 지금 서있는 곳에서 행복을 빌어요 김영분   7월에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일행은 해발이4000메터나 되는 서녕지역으로 문학탐방을 떠났다. 척박한 서녕땅에는 청도에서 활발히 창작활동을 하셨던 리홍철작가 일가족이 분식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유목민족의 후예라고 하는 우리 민족은 몇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목민의 유전자가 남아 있어서인지 유독 떠돌이를 좋아하고 또 어느 곳을 가든 적응을 퍼그나 잘하고 현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고스란히 고수해가면서 차곡차곡 잘 살아가고 있다. 연해 지역은 그래도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어서 도시안에 소형 조선족동네가 형성되여 우리가 살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서녕은 그렇지 못했다. 해발3200메터 우에 떠있는 거대한 염수호-청해호를 품은 서녕, 바다처럼 넓은 호수와 노란 유채화가 띠를 두른듯 물결치는 그곳의 인구는  240만명이다. 그가운데 조선족 가정은 겨우 리홍철작가네 뿐이였다. 그래도 전혀 기 죽지 않고 퉁소소리처럼 굵고 여운있는 목소리를 내며 삶을 가꿔가고 있었다. 조선족은4,50년대에는 한반도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해왔고 8,90년대에는 한국, 일본 등 지역으로 로무수출을 떠났다. 90년대부터는 중국 개혁개방의 세찬 물살을 등에 업고 연해지방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중국내 이주 1세인 현재 구성원들은 자신의 피타는 노력으로 연해지역 곳곳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자식들도 성공적으로 해당 주류사회에 편입하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부평초처럼 떠도는 생활은 양파 속 헤치듯 파헤치고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력이 아무리 강해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과 가지런히 풍류를 즐기려면 몇배 심지어 몇십배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심신을 수없이 닥달하고 채찍질해야 타향에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압박감에 정서적으로 항상 긴장하다. 내쳐지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강박감에 자기에 대한 요구를 더 높이게 된다. 생존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이다보면 자연적으로 정신적 향수는 뒤전일 수 있다. 돈은 많이 벌어도 행복감은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헌데 다행히 우리는 태생적으로 즐기면서 지내는 민족이다. 생존이 아무리 급박할지라도 마음의 향수를 먼저 달래주고 쓰담아주면서 다음날 활기찬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아마도 조상들이 유목민이여서 이런 락천적인 성격을 말고삐 꿰차듯 꼭 잡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가시에 손이 찔려야 장미를 꺾을 수 있고 떠돌아 다녀야 새로운 길이 트인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가. 옛말에 길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고향땅과 수천리가 떨어진 곳, 소수민족 잡거 지역이면서도 해발이 높은 지역으로 두주먹만 믿고 머나먼 서녕땅을 밟은 리홍철작가는 처음에는 고산반응과 현지 사람들과의 문화 차이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망과 비난대신 오래동안 한결같고 담백한 입맛과 허심하고 부지런하고 유모아적인 분위기로 분식집은 이웃들의 마음을 차츰 사로잡았고 지금은 친하게 지내는 몇몇 장족친구들도 생겼다고 한다. 지금 서있는 그 곳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세상 어디를 가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리홍철작가는 거칠고 척박한 서녕땅이였지만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에너지를 100프로 쏟아붓는 후회없는 노력을 했기에 행복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이틀동안 리홍철작가는 우리 일행과 함께 한집에서 밥을 해먹으며 고산반응을 무릅쓰고 청해호며 차카염전이며를 목이 쉬도록 안내했다. 양고기의 진미를 맛보여 주었고 장족의 혼례문화와 장막문화를 생생하게 현장에서 설명을 해주었으며 회족의 이슬람사원에 대해서도 라마승들의 오체투지(五体投地)에 관해서도 몸소 발로 뛰면서 닿는데까지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하늘과 맞닿은 끝자락에서 제일 행복한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이틀이라는 소금처럼 알찬 일정은 금방 지나갔다. 청해호의 아름다운 일출을 뒤로한 채 메마르고 외로운 서녕에 리홍철작가와 두 아들을 남겨놓고 우리 일행은 떠나야 했다. 상봉의 희열도 잠시이고 리별의 슬픔은 스멀스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기여들어오고 있었다. 공항에서 잘가세요 잘계셔요 라는 리별의 인사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모두 목이 꺽 메였다. 드넓은 청해호 우에 햇솜과도 같은 구름처럼 아쉬움과 그리움은 뭉게뭉게 피여올랐다. 아무리 락천적인 사람들일지라도 리별의 순간은 쓰라렸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났다. 모두가 서둘러 태연한척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서로의 마음으로 확인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수행해야 할 삶의 고뇌가 있다.서로가 가야 할 길이 있기에 따듯한 눈물로 애석함을 달래야 했다. 뜻이 있고 인내가 있기에 뜨거운 눈물을 쓰윽 닦고나면 또 가던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삶의 종점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향을 떠나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 서있는 곳에서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오늘 하루가 제일 소중한 것이다. 있는 그곳에서 오늘을 충실히 보내는 것이야 만이 우리를 성공과 행복이 그득한 그곳으로 데려다 준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아무리 험난한 길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다. 
5    점심엔 돼지 댓글:  조회:779  추천:2  2017-09-21
수필 점심엔 돼지 김영분   회사 출근하면서 점심이면 자주 단골 맛집을 찾아가군 한다.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고 분위기도 아늑하고 음식도 빨리 나와서 오후 일하는데 지장이 없는 그런 식당을 자주 간다. 식당을 자주 가다보면 메뉴를 일컫는 말들때문에 웃을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루는 전통 칼국수집을 갔다. 손님들과 함께 여럿이 가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를 시켰다. 그런데 예전에 연필로 꽁꽁 박아쓰면서 주문을 받던 종업원이 쉬는지 다른 아주머니가 재빠른 솜씨로 밑반찬을 내오면서 주문을 받는 것이였다. 주문이 끝나고 주방에다 메뉴를 알리느라 목소리 높게 소리치는데 예전의 종업원이랑은 다른 말을 해서 일행이 모두 갸우뚱해졌다. “왕 하나, 칼 두개, 콩 하나요.” 각자 시킨 음식을 생각하면서 짜맞추기를 해보니 실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사후에 재미가 있는 거 같아서 위챗모멘트에 글을 올렸었다. “나 오늘 점심 메뉴가 왕 하나 칼 두개 콩 하나인데 맞출 수 있는 사람” 그랬더니 별의별 추측이 다 나왔다. 콩나물무침, 감자볶음은 물론 거부기탕까지 수두룩 쏟아나왔다. 물론 수수께기 답안은 내가 내놓을수밖에. “왕만두 하나, 칼국수 두개, 콩국수 하나” 즐거운 하하소리가 모멘트를 꽉 채웠다. 메뉴 하나에도 이렇게 큰 즐거움이 있을 줄 몰랐다. 또 한번은 겨울인데 국밥집을 찾아갔다. 그 국밥집 주인은 더 기발하게 물어보았다. “손님은 돼지죠. 그리고 이분은 순대하고 고등어죠.” 우리는 고스란히 “네”하고 대답을 했다. 주문 받은 분은 바빠서 알았습니다를 칼날같이 내뱉고는 부지런히 주방과 홀사이를 드나들었다. 전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 자연스레 행동을 했다. 덕분에 우리도 아주 자연스레 “욕”을 먹은 셈이다. 내가 무슨  돼지야 라는 생각을 잠간 하면서 익살스런 웃음이 또 튀여나왔다. 그후부터는 의례 주문을 할 때 스스로 “나는 돼지요.”하면서 소리치는 센스까지 생겼다. 심지어 상대방으로부터 점심에 밥 먹으러 가자고 할 때는 “점심엔 돼지지”하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그러다가 글 한편을 봤는데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글이였다. 정치인들 몇이서 보신탕집을 갔는데 주문받는 주인이 글쎄 “손님들 다섯명 모두 개지요.”하고 물었더니 도도한 정치인 다섯이 모두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며 흔쾌히 “네.그렇습니다.”라고 답을 하더라는 것이였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너무 웃겨서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내가 주문할 때 처했던 상황이랑 너무 비슷해서였다. 괜스레 보신탕집 가면 정말 주문 조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위인도 정치가도 아니고 풍자당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네”하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정경이 계속 떠올라서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욕같은 말도 잘 들으면 찰떡처럼 들린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일가. 평소에는 욕처럼 들렸을 말들이 아마도 허기질 때 고소한 음식을 줄 사람한테서 들으니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가도 좋게 전환이 된 것일가. 배를 채울 본능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이쁘게 보이는 것일가. 또 아니면 밥 주는 사람이 힘이 있어 고분고분 말을 듣는 식객들을 좌우지하는 것일가. 특정된 환경에서 어떤 말들은 뒤집혀서 들린다는 것도 무척 신기했다. 그 어떤 말들이 욕이라도 말이다. 느닷없이 요즘 시중을 시끄럽게 하는 “갑질’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은 밥줄 쥔 놈이 힘이 있으니 말이다. 빵과 케익을 준다면야 선의적인 욕이 대수겠는가. 인간세상도 일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쩌면 그저 한번 웃고 지나칠 일도 아닌상 싶다. 한편 초로인생에 대박 즐거움이 별도로 있겠냐만은 언제나 기쁜 마음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도 “갑질”의 억압에서 이겨나가는 지혜일수도 있겠다.  
4    중년의 눈물 댓글:  조회:751  추천:1  2017-09-21
수필 중년의 눈물 김영분     중년이 되고 나서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마흔은 먹먹한 한숨입니다라는 글귀 때문에 내 가슴이 시려오고 눈물이 그렁해졌다. 중년을 그리는 노래가락 하나에도 감동의 쓰나미가 덮쳐들 때도 있다. 이렇듯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하루에도 몇번이고 변덕이 많은 날씨처럼 흐렸다 개였다를 거쳐간다. 마흔이 되면 남녀 몸속의 호르몬분비가 변화를 가져와서 남자에게는 녀자 호르몬을, 반면에 녀자에게는 남자 호르몬을 이색적인 선물이라도 하듯 조금씩 분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호랑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던 남자는 부드러워지고 양처럼 순하던 녀자는 남성호르몬 덕분에 더이상 약해지려 하지 않고 강인하게 변한다. 그래서일가. 중년이라는 인생길에 접어든 천하의 무쇠처럼 강하던 아빠나 엄마들은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많아졌다. 간혹은 고향에 계시는 늙은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하고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감추는 눈물을 보았을 것이다. 자식이 어버이의 날이라고 꽃 한송이를 가져다 바치면 금세 목이 꺽 메이는 적도 있었을 것이다. 저녁 늦도록 회사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을 때 쪼그리고 잠든 안해의 얼굴을 보면서 항상 기대에 못미치게 한 죄책감에 남편의 가슴에는 뜨거운 무엇인가 울컥했을 것이다. 그러한 남편의 뒤모습을 지켜보는 안해는 괜스레 코끝이 찡해난다. 남편의 두 어깨가 왠지 축 처져있는 듯해서 안쓰럽다. 중년에 난데없는 불청객처럼 소리소문없이 살며시 찾아온 눈물앞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나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닌데 하면서 강철도 녹일만큼 열정이 장작처럼 투닥투닥 거리며 불탔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급히 손사래치면서  부인 해 보지만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눈물은 이런 주인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족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여태 몰부은 사랑이 실마리같은 인정을 받아서 흘리는 감동의 눈물이고 사회생활속에서 받았던 억울함과 피타는 노력을 하면서 힘들었던 시간들을 가족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애절한 하소연이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위에 소중한 것들 때문에 아프다는 투정조차 못하는 중년은 번민의 복합체이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알아준다고 남자나 녀자나 서로의 중년의 처지가 안쓰러운 것이다. 자주 상대방을 위해 뒤돌아서서 몰래 훔치는 눈물이 그 증거이다. 올해6월에 우리 아들은 중학교 졸업식을 치렀다. 졸업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졸업식에 참석해서 어엿하게 큰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 눈물이 앞을 흐렸다. 아무 말도 필요없었다. 학부모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들쭉날쭉 히죽히죽 웃으며 장난스레 입장하고 있던 학생들도 졸업식 마무리 때는 엉엉 소리놓고 울었다.성장이란 이렇게 감동스러운 것인지 다시 한번 가슴 깊숙히 느꼈다. 모두가 한 목표를 가기 위해 쏟아 부은 열정과 노력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이해받지 못했던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간이 되자 중년의 부모들은 여지없이 눈물의 보뚝 앞에서 엎어졌다.항상 조심스레 노심초사하면서 뒷바라지를 하면서 분하고 억울해도 꾹 참고 견디였던 시간들을 이해받는 순간이였다.   아들한테 꽃을 안겨주고 축하한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어려운지 목이 꺽 메였다. 포옹하는 찬스에 아들 어깨를 가까스로 부여잡고는 몸이 전률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원했지만 청소년 아들이 학업에 매진하기를 늦장부렸던 것이 억울해서였을가. 아니면 내가 아직 못다 해준 사랑 때문에 미안해서였을가. 아니면 이 부대끼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아들한테 이해를 받았다고  생각해서 고마워였을가. 중년에 들어서서 눈물이 부쩍 많아졌다. 가야 하는 길에 잠시 마음을 치유하고 먼지 털 듯 그 자리에서 일어나 또 떠나야 하는 방랑객의 들키기 싫은 하소연이다. 물밑을 헤염치는 고기떼마냥 조용히 우직하게 움직이는 중년이다.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버드나무를 춤추게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년에 부쩍 많아진 눈물은 지치고 외로워서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을 알리려 흘러내리는 것이 아닐가. 중년은 아픈 가지에 꽃을 피우려고 인내와 끈기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 눈물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이 눈물은 생명의 완성을 상징하는 꽃을 피울 것이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