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http://www.zoglo.net/blog/yingfen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63 ]

63    마음이 딴 짓을 하려고 할 때 댓글:  조회:334  추천:0  2021-12-09
수필 마음이 딴 짓을 하려고 할 때 김영분 나는 내가 왜 려행을 좋아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살다보면 하고 있는 일이 어려움에 마주쳤다거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불리워다닌다거나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마주한 것처럼 갑갑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것이 려행의 동기라고 하면 동기가 되겠다. 밥벌이를 위주로 할 나이에도,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소란을 피워  성가스러울 때도, 속상하거나 우울하면 려행이 생각났다. 나는 이를 일컬어 딴 짓을 하고 싶어진다고 말하고 싶다. 려행을 가서는 풍경을 감상하기 보다는 떠나왔다는 그 자체에 설레인다. 낯선 거리에서 초면인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작은 친절에 깃드는 감사의 마음,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얼굴에서 뿜어져나오는 평온한 웃음 등을 보면 마음에 연고를 바른 듯 치유가 된다. 가이드는 물론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도 나만을 위한 서비스를 해주니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어서 신난다.새롭고 신선한 것도 많아 눈과 귀가 쉴 틈이 없어  좋았다. 다행히 려행이 끝나갈 즈음이면 집을 떠난 불편함이 슬슬 몰려온다. 그러면서 설레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귀찮고 지루하게 느껴지던 일상생활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밥벌이 외 딴 짓은 아무래도 잠시만 설레이는 듯 하다. 아무렴 그래도 내 집이 제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한가슴 가득 고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 덕분에 다시 힘차게 늘 있던 그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언제부터 려행을 좋아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굳이 따져보면 예니곱살 때, 외가집으로 가자하는 엄마의 그 말 한마디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외가집으로 간다고 하면 괜스레 신이 났다.특히 집에서 혼이 났다거나 꾸중을 들어 속상할 때면 따뜻한 외할머니 품이 너무 그리워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어수선한 우리 집 분위기보다는 외가집은 난로를 피운 움막집처럼 화기애애했다. 외할머니는 셋째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린 손님이 제일 큰 손님이라고 생각했는지 코흘리개였지만 내가 가면 극진히도 대해주셨다. 외할머니는 바삭한 누룽지도 따끈하게 구워주고 겨울이면 춥지말라고 뽀송뽀송한 새 내복도 한벌 해입혔다. 오래 숨겨두었던 사탕을 내 손안에 쏙 쥐여주는 건 한번도 빼놓지 않았고 잠을 잘 때는 항상 나를 옆자리에 눕혔다. 터실터실한 손으로 등을 쓱쓱 문질러주기도 하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기도 하셨다. 그러면 집에서 받았던 서러움은 봄 눈처럼 녹아버렸다. 이모는 자신의 딸은 제쳐놓고 항상 나에게 질문이 많았다. 무엇을 먹고 싶으냐,앞집에 친구찾아 가서 놀을래,소매점에 같이 갈가 하는 등 어쩜 내가 오매불망 그리던 소원들을 잘도 물어봐주셨다. 나는 질문을 잘 하는 이모가 참 좋았다.나의 의사를 정중히 물어보면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여린 심장이 탄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때면 분명히 온 세상은 나 하나의 것이였다. 모든 사람은 나를 에워싸고 움직이고 있다.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맛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내 의견을 어필 할 수 있고 또 존중까지 받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움크렸던 마음의 손수건을 탁탁 펴는 시간들이였다. 다툼이 많던 우리 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푸근함을 어린 나는 느꼈다. 집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수선하게 다가왔다. 엄마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작은 일도 잘 다투셨다. 다투면 불똥이 나한테 튕길 때도 있었다. 괜스레 욕도 먹고 끼니를 허겁지겁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기분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여주지도 않았고 나는 어른들의 얼굴색을 많이 살펴야 했다. 시험을 잘 봐서 또래들보다 등수가 월등히 높아도 집안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잘했다는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그래도 집이 내 뒤심이라고 느끼게 해준 것은 38절이나 가족모임이 있는 날에는 의외로 우리 아이가 이래봐도 공부 하나는 잘한다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압도적으로 가로질렀기 때문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분명히 우리 엄마 아버지의 어깨에 힘이 실리고 얼굴에 행복이 쓰여져 있었다. 그럴때마다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 할 수가 있어 엉성하던 허리가 쭉 펴졌다.몸도 마음도 같이 크는 시간들이였다. 이때문인지 외가집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사무치게 집생각이 났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역정을 내시며 빨리 밥을 먹으라는 부모의 꾸지람마저 그리워났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였다. 늙은 부모보다 내 자식이 더 사랑스럽고 내 고통보다 자식의 아픔이 더 걱정되는 것이 부모마음이였다. 표현을 하지 않았다 하여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였다. 다만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무겁게 담아두고 표현에 서투른 어른들도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그 부모의 자식이 아니랄가봐 나도 무뚝뚝하다면 상을 받을 수 있을만큼 표현에 서툰 사람으로 부모옆에 서있었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덕분에 지금은 때로는 수줍고 어색하게 때로는 괜한 짜증을 섞으며 조금씩 엄마에게 사랑표현을 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려행을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 그 외가집의 분위기가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내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일원으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어렵고 답답한 시간들이 분명 있었다. 이를 달래고자 할 때마다 딴 짓이라도 하려고 둘러보면 영낙없이 려행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시간들을 많이 보내다가 나를 찾아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외가집으로의 려행이 엉성하던 나의 작은 나무를 크게 자라도록 힘을 보태준 것은 확실하다. 집에서는 몸이 많이 자랐고 외가집에서는 마음이 많이 자란 것 같았다. 허나 엄마가 있었기에 외가집이 있었으므로 종당에는 모두 내 부모가 나를 이리 성장하게 한 것이라고 본다.몸은 정직해서 외가집에는 항상 고맙고 따뜻한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으나 내 부모에게는 피와 살을 나누며 충성을 다 하고 있다. 언제까지 려행을 즐겨 찾아 떠날 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려행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번잡한 일상을 헤치고 나 자신이 또렷이 나에게로 걸어 온다는 것만 알고 있다. 세상은 고민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풀어나가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 려행을 하면 물속에 물감이 퍼지 듯 새로운 힘이 몸 안에 골고루 퍼진다. 어려서는 외할머니를 찾아떠났고 어른이 되서는 자신을 응원하고 지키고자 하는 나를 찾으러 떠난다.상처가 생기면 연고를 찾아 바르듯이 앞으로도 나의 려행은 계속 이어질 듯 싶다. 장백산2021.6기 발표
62    다육이의 머리카락 댓글:  조회:321  추천:0  2021-12-09
 수필 다육이의 머리카락 김영분   사무실 창문턱에 가지각색 다육이들을 모셔온지도 일년이 넘었다. 몸이 풍선을 불린 듯 탱탱 부은 아이,자기를 보호하려고 솜털같은 가시를 뾰족히 세운 아이,돈 자랑을 하는 듯 동전같은 잎을 훤히 보이게 조롱조롱 매달은 아이,남방의 야자나무처럼 길고 가는 몸매에 꼭대기에만 손톱만한 잎을 피운 아이, 등 앙증맞기로 두번째로 가라하면 서러워 눈물 흘릴 다육이들로 창문턱이 점점 수북히 채워져갔다. 식물에 관심이 전혀 없던 나였는데 어느새 귀엽고 야무진 다육이들의 모습에 혼을 쏙 빼앗겼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무작정 가까워지고 싶어 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면 리유없이 지켜줄 생각이 들게 한다더니 다육이들의 가녀리고 앙증맞은 모습이 나의 보호욕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헌데 키우다 보니 생긴 것이 가녀리고 작을 뿐이지 다육이는 은근히 자신만의 생존철학이 있는 개성이 돌출한 꽃이기도 했다. 자주 물을 주는 것은 금물이고 통풍도 늘 시원히 시켜줘야 한다. 누군가 들여보지 않으면 며칠사이에 금세 초췌해지고 자주 들여다보면 목이 말라하는 것 같아 또 자꾸 물을 주고 싶게 만드는 것이 또 다육이다. 키우는 이의 마음을 쥐였다 폈다 하는 재능이 있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게 하는 련인처럼 다육이를 대할 때는 일편단심으로 조심히 정성스레 그리고 사랑을 듬뿍 곁들여 돌봐야 한다. 다육이를 키우는데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키우는 이와 다육이 품종에 따라서 모두 다르다. 적절한 습도와 환기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서 요령있게 혼자 가늠해서 헤쳐나가야 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너무 관심을 기울이면 아이가 갑갑해하고 또 한편으로 지나치게 무관심하면 일탈을 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닮아서 혼자 혀를 끌끌 찬 적도 있었다. 인간의 육아를 쏙 빼닮았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은 것은 선인지(仙人指)라는 다육이의 머리카락을 본 후였다. 선인지(仙人指)라는 다육이는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손가락모양으로 생겼다. 한뭉치의 손가락이 조론히 모여 작은 화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는데 신선의 손가락이 하늘을 찌르 듯 천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양지바른 창턱에 고히 모셨더니 며칠만에 마치 머리카락을 옆으로 빗은 듯 해빛을 좇아 창밖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었다. 괜히 보기가 불편하여 방향을 바꾸어 돌려놨다. 그랬더니 며칠 후에는 또 손가락들이 다 같이 거꾸로 창밖으로 늘어질 기세였다. 오기가 발동하여 옆으로 기울 때 마다 바로 세워주기 위해 화분을 요리조리 돌려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선인지(仙人指)의 머리스타일이 말이 아니였다.    폭탄맞은 포도넝쿨처럼 이리저리 헝클어져있었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늘어뜨리고 아래를 향한 아이도 있었다. 옆구리를 채운 강아지마냥 꼬부라져있기도 했다. 유독 꼭대기를 향해 서있는 손가락은 없었다. 나의 쓸데없는 바로 잡아야겠다는 오기로 바꿔놓은 방향때문에 다육이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 모양이다. 처음에 데려올 때 가쯘하고 똘똘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심신이 피폐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젠 야무졌던 자신의 손가락을 어디로 뻗어야 할지 방향을 잃은 듯했다. 문득 내가 평소에 별 의미없이 아이들에게 늘어놓던 잔소리가 생각났다. 아이들의 생각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권위적인 간섭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였다. 소금처럼 짜도 소금처럼 쓸모없는 것이 잔소리라 했건만을. “모두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을 하며 사랑이라는 갑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때 아이들도 많이 당황하고 힘들었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의 성장과 탐색의 욕구를  외면하고 어른들의 경험으로만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아이들 또한 얼마나 정서적으로 헝클어질 것인가.진정 원하는 일의 동기가 불이 붙었다가 스러지는 초불처럼 점점 희미해지고 꺼지는 연기처럼 흐려질 것이다. 자주적으로 결정을 할 수가 없는 어린 아이들은 커가면서 갑갑하다 못해 뛰쳐나갈 생각을 하게 되거나 뿔 없는 소처럼 수걱수걱 일만 하고는 철저히 꼬리를 내리고 부모의 울타리에서 준비된 빵만을 기다릴 것이다. 다육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모멘트에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대책을 강구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곶은 나무가지로 의지할 수 있게 묶어주는 가 하면 끈으로 손가락들을 모아서 오무려 묶어주라는 방법도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으로든 묶어주면 한동안은 곧게 자라겠지만 그 또한 얼마동안 유지할 수 있겠는가. 좀 지나면 해볓을 좇는 마음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하리라. 있는 그대로 자랄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치렁치렁 화분밑으로 머리태를 드리우 듯 신나게 자라게 놔둘 것이다. 어떤 풍경이 되든 그건 다육이의 몫이니까. 나는 그냥 해볓과 물과 그리고 바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드문드문 기특하게 자라는 모습에 눈도장을 찍어주고 야호를 불러줄 것이다. 새파란 하늘에서 해살이 쏟아지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다육이에게 환기를 시켜줘야겠다. 송화강2021.6기 발표
61    흑토와의 재회 댓글:  조회:396  추천:0  2021-10-26
수필 흑토와의 재회 김영분   얼마전 조카의 결혼식차에 흑룡강 W시를 방문하게 되였다. 할빈 시내에서 자가용차로 다섯시간이나 줄창 달려야 도착하는 변방의 작은 도시였다. 차로 이동하는 내내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은 초원을 달리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푸른 곡식들이 아득히 넘실거렸다. 이전에는 북대황의 흑토가 비옥하여 중국의 5분의 1이나 되는 인구의 량식을 책임지고 있어 북대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싱그러운 곡식들로 줄세워진 벌판이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눈 그득히 밀려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높은 위도에 위치해서인지 해발이 높지 않아도 하늘과 가까운 동네인 듯 해살이 살갗을 따끔따끔 내리쬐였다. 청명한 하늘은 파란 물감을 푼 듯 산뜻해 보였다.공업폐기가스가 없는 관계로 공기도 상큼하고 투명했다. 갑자기 시들하던 시력이 좋아진 것처럼 모든 물체가 빤하게 보였다. 우리는 예전에  동북에서 벼를 심으며 살고 있던 농민이였으나  갑자기 농사에 신물이 난 것처럼 꽤 오래전 연해도시로 뿔뿔히 흩어져나간 사람들이다. 고향이 흑룡강인 남편은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운 듯 경작지의 장엄한 모습과 깨끗한 공기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나 판도라의 마법상자를 열 듯이 흑토를 둘러싼 감탄은 줄에 줄을 이어 생겨났다.       잔치집에서 준비한 환영만찬에 사돈 내외의 형제들이 많이 모였다. 조카사위 부친의 여섯 남자형제가 다 모였는데 자기소개를 듣고는 고향을 등지고 여러해동안 시내에서 허둥대던 우리 친정 쪽 친척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조카사위 부친의 형제중 세 사람은 모두 농민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옷차림이 점잖고 얼굴은 검스레 하나 풍상고초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아 우리 부모세대의 농민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모습이였다. 도리여 다부진 농촌의 간부 티가 물씬 거렸다. 참말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맞을가 하고 잠시 갸우뚱 하는 사이 조카사위 부친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자기는 100헥타르좌우의 경작지를 부치고 있고 다른 두 형제도 자기와 비슷한 면적을 부치고 있다는 것이다. 계산이 느린 내가 속으로 천천히 따져보니 어마무시하게 100만평방메터나 되는 면적이였다. 어림잡아 축구장 140개나 되는 면적이였다. 그것도 삼형제이니 거의 420개 축구장면적이 아닌가.        겸손하게 농민이라고 허리를 낮추었음에도 실은 농장주와 다름없었다. 사돈들은 몇십년전 산동에서 배를 곯지 않으려고 산해관을 넘어 동북으로 어렵사리 이주를 한 한족들이다. 처음에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억척스레 개간을 하고 부지런히 토지를 넓혔단다. 날씨가 춥고 경제구조가 단일한 동북지역을 꺼리여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돈들은 공을 들여 터전을 늘리는데 공력을 꾸준히 들였다고 한다. 밭 한 고랑의 길이가 8,000메터인 농장도 있었다. 밭고랑의 길이 만큼이나 어렵고 긴 세월들을 지나 형제들이 오손도손 손을 모아 서로 돕고 힘을 보태며 큰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풍채름름한 농민은 처음 본다며 땅 부자에 지주라고 롱도 섞어가면서 기꺼이 부러운 마음을 전했다.웬지 든든해보였다. 뿌리를 깊숙히 박은 나무처럼 느긋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그 젊은 시절에 미련없이 떠났고 중년후반이 되여 그리움이 잔뜩 묻어 돌아온 우리에게 고향이 펼치는 흑토의 풍경은 경이롭고 새로웠다. 흔히 동북은 후지고 돈벌이가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아니였던가.다 파먹은 김치독이라고 얼마나 안타까워 했던가.글로벌 시대에 발전없이 같은 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고 얼마나 애탄했던가. 새로 정착한 연해도시에서 쉼없이 앞만 바라보고 달려야 했던 우리의 마음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름모를 파문이 일었다. 새끼붕어라도 낚아본 늪에는 언제나 미련이 남아있듯이 아쉬움과 서운함이 섞이고 부러움이 교차했다. 잠시나마 만약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부자로 떠오르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설픈 도시인 행색이 무색해질 정도로 흑토가 풍기는 위력은 배포 유하고도 막강하게 와닿았다. 그래도 사돈들은 덩치만 컸지 돈벌이는 시원찮다고 연신 겸손을  뚝뚝 떨구며 손사래를 친다. 도리여 두 주먹만 믿고 타향에서 크게 성공한 우리네가 부럽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칭찬을 듣는 순간 속이 뜨끔해났고 웃음으로 펴지던 얼굴이 굳어지면서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쓰르르 아려났다. 과연 그들이 바라본 성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타향에서 성공을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앞만 보고 달려왔다.허겁지겁 청춘을 불태운 덕에 조그마한 성취를 거두었고 그들보다 조금 세련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아빠트에 살고 있고 낯선 곳에  드문드문 폼나게 려행도 다니느라 한다. 많이 가진 것 같아도 마음 깊은 곳에는 날아다니는 연처럼 어딘가에 든든하게 정착하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뿌리가 얕은 나무가 가지를 무성하게 치는 것처럼 유독 비바람이 두려웠다. 어망결에 뒤돌아본 고향의 풍경은 바다를 구경하다가 바다물을 뒤집어 쓴 려행객의 입처럼 짜고 쓰겁고 찜찜해났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이 진정 폼이 나보였다. 사돈들의 삶에 깊이 수긍을 하고 나니 괜스레 우리 자신도 여태 너무 잘해왔지 않냐 하는 자기 위로가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상실감을 느끼면 보상을 바로 맛보아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나무는 옮기면 죽고 사람은 움직이면 산다”는 말처럼 가령 우리가 고향에 남아있었다면 땡볕을 이고 흑토를 파헤치며 농장주로 탈바꿈했을가 하는 큰 의문도 갖게 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살아가는 내내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택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기는 삶이 되겠다. 땅부자 사돈들도 산동에서 떠난 사람들이 아니였던가. 떠나서 정착한 곳에서 쉬지 않는 오리발을 저었기에 떵떵거리는 성공한 땅부자로 거듭났을 것이다. 그분들도 산동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여느 소시민들과 다를 바 없이 적은 농사에 여가시간을 리용해 밀물처럼 쓸어든 외자회사에 출근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밤에 뜨는 달을 보는 것처럼  상대방의 가장 밝은 측면만 눈여겨 본다.우리 모두는 각자 선택을 위해 춥고 어두운 밤들을 수없이 보냈으니 서로의 눈에 성공의 신기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안일한 삶을 미련없이 뒤로 하고 배수일전(背水一战)의 각오로 더 잘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새로운 삶터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한 치렬한 몸부림이 서로의 눈에 빛나는 오늘의 사돈과 우리의 모습을 만들지 않았을가? 선택은 설명될 수 없고 경험될 뿐이다.선택의 길목마다에 도전과 사는 맛이 마련되여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새파란 하늘에서 해살이 쏟아지고 있다.  12시 종소리를 들은 신데렐라처럼 흑토를 다시 한번 뒤로 하고 순순히 삶의 터전으로 복귀를 서둘러야겠다.     연변문학 2021.10월호 발표  
60    방아쇠를 당기려거든 잠간 멈추어라 댓글:  조회:382  추천:0  2021-09-22
수필 방아쇠를 당기려거든 잠간 멈추어라 김영분   우리는 종종 별 것도 아닌 일에 발끈하며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년말총화를 위해 동료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였었다. 평소에 무거운 박스를 씨엉씨엉 나르고 원자재를 등에 둘쳐업고 다니던 자재과 남자 직원들이 한상 둘러앉았다.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는 만큼 술에 대한 애착도 묵직했다.     술이 여러 고패 돌자 경직된 어깨들이 느슨히 풀어졌다. 무뚝뚝하던 사람들답지 않게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가에 웃음이 출렁거렸다. 권커니작커니 목소리도 쌓여가는 맥주병 처럼 점점 높아져갔다.     한창 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누군가 술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씩씩거리며 식당을 씽하니 빠져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옆좌석에서 웃음꽃을 피우던 다른 부서 직원들뿐만 아니다. 같이 술을 마시던 남자동료들 자체도 화면이 정지된 티비처럼 웅긋쭝긋 일어서서 멍하니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야?”       “무슨 일인데?” 용수철처럼 튕겨나간 동료에게 술을 권하려고 두손으로 맥주잔을 받치고 있는 옆자리 친구에게 주위 사람들의 질문이 비발처럼 쏟아졌다. 영문을 모른채 열성스레 술을 권하던 동료는 어안이 벙벙하기만 한 눈치다.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모처럼 모인 회식자리 분위기를 자기가 망친 것 같아 여간 억울해하지 않았다. 재미있게 마시자고 술을 권했을 뿐인데 이런 무안을 당하다니 본인도 억이 막힐 일이였다.     사후에 안 일이지만 원샷을 권했는데 술잔 절반을 비우자 자연스레 한마디를 했단다. “에잇, 남자면 한번에 다 비워.” 술을 받은 직원이 원샷은 안된다고 이리저리 피하자 주위에서 입을 모아 또 여러마디 했단다. “너 정말 남자 맞아 안 맞아?”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 동료가 얼굴을 벌겋게 달구면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으니 회식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던 것이다. 여러해 동안 같은 울안에서 동고동락을 해온 동료로서 술 한잔에 친분이 깨질 사이는 절대 아니였다. 부서 지간에 협조도 잘하고 서로 돕고 힘과 어깨를 빌려주는 동료애도 다분한 소박한 친구들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가. 그건 다름이 아니라 상을 박차고 일어난 남자동료는 부리부리한 눈매에 커쿨진 체구를 가졌지만 안해한테서 꽤 오랜 시간 소량의 용돈만을 얻어쓸 수 있는 강요받은 착한 남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같은 부서 친구들은 평소에도 롱담을 잘 건넸다고 한다. “넌 체구만 컸지 마누라 한테 꽉 쥐여 사는구나.” “남자가 웬 마누라를 그리 무서워해?” 평소에 롱담은 그럭저럭 잘 받아 넘겼다고 한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남자동료들의 처지는 비슷해서 백보가 오십보를 웃는 신세였지만 술상을 뛰쳐나간 이는 동료들의 용돈 평균선에서도 훨씬 적은 용돈만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껴안고 있는 사람이였다. 이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고 있던 중이였다. 자신에 대한 가혹한 절제로 가족에 대한 충성을 실현했다.하지만 억눌린 소비의 본능과 동료들 앞에서 구겨진 체면은 커쿨진 체구만큼이나 야금야금 커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괜찮은척 하면서도 가끔 공장 귀퉁이에 숨어서 매운 담배연기로 갑갑하고 창피한 마음을 훨훨 뿜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너 남자 맞냐?” 남자들 사이에서는 별 것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였지만 그에게는 간들거리는 빨래줄에 한 칼을 그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튼튼한 신체에 두툼한 지갑을 가지고 거기에 배짱까지 두둑한 남자를 속으로 오래동안 부러워했을 그에게 이 한마디는 아픈 손가락을 다쳐 비명을 지르게 하였다. 총알을 가득 머금은 권총의 방아쇠를 무심결에 당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방아쇠는 총에서 총알을 발사하게 하는 장치다. 총탄을 밀어넣고 굽은 쇠모양의 금속장치를 집게손가락으로 잡아 당기면 탕하는 소리와 함께 발사하게 된다. 딱딱한 금속 칸막이 속에서 비좁게 움크려 있던 총알이 불꽃을 일구며 눈 깜짝할 사이에 튕겨나간다.혹은 허공을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날아간다. 가벼운 롱담 한마디로 자칫 하면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일을 그르치게 할 수 있는 방아쇠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기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콤플렉스 선이 있다. 콤플렉스 중에서의 한계선이라 해도 되겠다. 례를 들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는데 부모를 들먹이면서 장난을 하는 경우, 몸매에 신경을 많이 쓰는 친구한테 좀 뚱뚱하게 생겼다고 롱담을 건넬 때, 돈 벌이가 펑크 난 친구한테 너 요즘 쪽박찼다며 하면서 문안을 할 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끈한다. 정곡을 찌르면 전기에 덴 듯 꿈틀한다. 본인이 제일 집중해서 아파하고 있는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사자는 물을 오래 먹은 솜처럼 이미 많이 처져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물 한방울을 떨구어도 홍수를 만난 것 처럼 거칠게 파도를 치며 여기저기 덮친다. 뒤돌아보면 나도 별 거 아닌 일에 발끈 한 적이 많았다. 남편이 너 술 좀 하는 걸 보니 장인을 많이 닮았구나 하면 발끈했다. 어려서 술을 많이 마시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시퍼래진 나의 얼굴을 보면서 리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였다. 어른이지만 계산에 서투른 나를 보고 참 아둔하다고 하면 발끈했다. 나는 중학교 때  수학을 너무 못해 스스로 둔하다는 생각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아둔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중학교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아주 불쾌했다.학교 다닐 때는 순둥이였던지라 참고 있었지만 어른이 되여 화를 낼 능력이 구비되자 바로 맞받아쳤던 것이다. 헌데 느슨하게 흐르는 세월의 가르침 덕분인지 지금은 많이 평온해졌다. 누군가 나의 아팠던 곳을 건드려도 웃으며 받아넘긴다. “네. 맞아요. 내가 원래 그래요.” 순순히 인정하고 나면 홀가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발끈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만이 많아서 생기는 강한 부정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누가 무엇이라 말해도  방아쇠를 당길 일이 없다. 불만이 있지만 또한 이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이 되지 않으면 발끈한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서둘러 개선을 하고 능력을 키우는데 힘을 써야 한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천지만물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면 불만스러운 일이 적다. 평소에 다른 사람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남의 헛 총질에 상할 일도 적어진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픈 새끼 손가락을 잘 보듬어 강하게 보완하다 보면 아픔이 진주가 되여 빛날 것이고 배포유하게 나 또한 누군가를 향해 방아쇠를 어망결에 당기는 일도 적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방아쇠를 꼭 당겨야 한다면 옳은 시간에 좋은 일에 명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라지 2021.5호 발표
59    라면의 기(气) 댓글:  조회:349  추천:0  2021-09-22
수필   라면의 기(气)   김영분     고중을 졸업하기 바쁘게 나는 엄마가 한국회사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도시인 청도로 발길을 옮겼다. 현성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간간히 가뭄에 콩 나 듯 시내를 거쳐갔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 시내돌이도 겨우 뻐스나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문 스산한 역전이 전부였다. 그런 시골뜨기인 나에게 처음으로 펼쳐진 큰 도시의 기차역은 으리으리 그 자체였다. 붐비는 사람들의 물결도 졸랑대는 시내물이 아닌 넘실대는 바다의 파도처럼 스케일이 커서 헉 소리나게 가슴에 부딪쳐 왔다. 엄마가 다니고 있는 한국회사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 회사란 과연 이런 곳이구나를 련발하면서 호기심이 눈에서 떨어질 정도로 이리저리 비질하며 두리번거렸다.   한뉘 농사만 짓던 엄마가 이렇게 큰 공장에서 회사이름이 적혀있는 작업복을 입고 경비가 망을 봐주기까지 하는 튼튼하고 커다랗게 지어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멋졌다. 때는 점심이 퍽 지난 오후였는지라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발뼘발뼘 주방으로 가셨다. 가스렌지에 불을 붙여 빨간 플라스틱포장지를 뜯더니 뽀글뽀글한 면을 삶아 주셨다. 흐늘거리며 솟아오르는 하얀 김과 함께 주방을 가득 채우는 그 매콤한 냄새가 어찌나 얼큰하고 구수했던지 여태 보지 못했던 큰 세상을 구경하느라 배 속에서 누른하게 기죽어 있던 장기들이 꼬르륵대며 박수를 치는 것만 같았다. 꼬들한 면발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혀로 보는 맛인지 위 속에서 퍼지는 맛인지 온몸이 그 맛을 음미하고 기억하려고 흥분에 떨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신라면이였다. 캉스푸라면이 제일 맛있는 줄 알고 기차로 오는 내내 먹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달려왔는데 이처럼 맛있는 라면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그때까지 먹어본 라면 중에 제일 맛있는 라면이였다. 한창 맛나게 먹고 있는데 삐꺽하며 주방문이 열렸다. 흰 머리의 아저씨가 들어섰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송구스레 머리를 떨구고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른 색의 작업복을 깔끔하게 받쳐입은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이사님, 제 딸이 금방 기차로 여기에 도착해서 라면을 좀 끓여 줬어요.” 당황한 경상도 말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불안하게 뒤척였다. “허허. 그랬구먼. 언제부터 온다던기 이제야 왔나 보군. 아니, 라면만 먹으면 쓰겠나. 아주머니, 맛있는 거 좀 해주이소. 얘야, 마이 묵거라. 서서 먹지 말고 밥상 차려서 먹어라.” 생각밖으로 너무 소탈한 한국 아저씨였다. 나는 엄마의 그 망설임에 가슴이 찌릿했다. 몰래 라면 끓여 주다 들킨 엄마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력력했다. 번듯하고 커다란 공장에서 눈치보며 묵묵히 참고 벼텨왔을 힘든 나날들을 엿보았다. 가슴이 스르르 저며왔다.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울바자가 얼기설기 늘린 마을 길을 벗어나 멀리 있는 시내로 발길을 돌린 용기있는 사람이였다. 몇푼 안되는 차비만 들고 낯선 땅에 들려 소개소에 기거하면서 일자리를 찾았고 회사에서 식숙을 하였다.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나와 동생의 학비를 벌어 뒤바라지를 하던 참이였다. 엄마는 후날 늘 되뇌이였다. “난 청도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집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목이 메여 넘어가지를 않더라. 과일도 맛있고 라면도 얼마나 맛있던지.” 말 뒤끝엔 항상 눈굽을 찍으시였다. 지금이야 도처에 널려서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고 “라면 먹고 갈래”가 썸을 타는 남녀 사이에 사랑표현의 도구로까지 쓰여지는 엽기적이고 보편적인 음식이 되였지만 아직도 나는 처음으로 신라면 먹을 때의 감탄과 행복이 교차하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 라면맛에 홀딱 반하고 허허거리며 당황한 엄마와 나를 위로해주던 아저씨의 호의에 세상의 따뜻함을 느꼈다. 급기야 한국회사에 입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새로 펼쳐야 질 사회생활이 기대되기까지 하였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근심걱정에 휩싸였었다.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해야 할 새로운 고민들을 상상을 했었지만 어느새 거부감과 두려움이 봄눈 녹 듯 사라지고 용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매콤한 라면맛으로 배도 든든해졌고 배짱도 두둑해졌다. 빨리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졌다. 새롭게 펼쳐질 사회생활이라는 길에서 라면 맛과 같은 행복한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마치 신라면이 맛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운 맛도 강하 듯이 시련은 거추장스럽게 눈치없이 사계절 내내 따라다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의 벽은 높고도 견고했다. 칼칼한 억양의 산동지방말투에 귀를 도사리는 거로부터 짠 음식과 퍽퍽한 빵을 씹어 삼키는 련습도 수없이 해야 했다. 따뜻한 온돌이 없는 겨울은 집안에서도 허옇게 입김이 새여나오기도 했으며 손등이 얼어 가렵기도 했었다. 성질이 급하고 갑갑해하는 한국 상사들은 모두 소탈한 한국아저씨처럼 너그럽지도 않았다. 서투른 신입은 작은 질책에도 마음을 닫아 걸고 불평불만을 터뜨리기가 일쑤였다. 봄에는 화난 바람의 몸부림에 먼지를 된통 뒤집어쓰기도 했고 한 여름 땡볕에 녹아내릴 것 같은 아스팔트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가을날의 향수는 또 왜 그리 서럽게 가슴팍을 파고 드는지 눈시울이 붉어지기가 일쑤였고 겨울의 시린 바람은 자주 코끝을 스쳤다. 버텨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발목을 잡을 때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보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가 몰라 더 막연했다. 담쟁이처럼 아슬아슬하게 한발짝씩 벽을 타고 오르며 더 높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려고 항상 모진 애를 썼다. 다행히 밥상을 차려 많이 먹으라고 관심을 보이던 한국아저씨처럼 마음이 따뜻한 동행자들도 많아 같이 지혜를 나누고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민들레의 끈질긴 성품을 이어받아 흩날리다 걸터앉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기에 도전하고 꽃과 잎을 피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반토막의 중국말로 통역일을 맡아하며 회사발전에 큰 힘을 보태고 차츰 일의 요령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욕구 중에 가장 중요시되는 의식주를 해결한 뒤, 안정을 취하고 사회활동에 더 활발히 참여를 할 수 있었다. 존중받을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더 겸손해지고 프로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며 가치실현을 꿈꾸는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 이젠 서먹하고 낯선 타향이 아니라 설 쇠러 고향에 행차를 했다가도 열흘이 지나면 바로 되돌아오고 싶어 지는 친숙한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봄이면 살구꽃과 사쿠라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날려주는 바다의 파도소리가 철썩인다. 가을에는 여름부터 더운 김을 내뿜던 나무잎들이 자지러지게 붉게 익으며 겨울은 가끔 은색단장을 한 고향을 떠올려 보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도 한다. 제2의 고향에서 여전히 땀을 동이로 쏟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몸에 딱 맞는 옷처럼 편해졌다. 늦은 저녁시간, 티비를 보다가 촐촐해진 배를 달래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신라면을 끓여 먹는 화면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행복한 풍경이다. 신라면 양푼 속으로 젓가락들이 이리저리 오가면 가족간의 대화도 웃음꽃으로 피여난다. 언제 먹어도 맛있고 친숙한 라면이다. 라면맛에 반해 열정을 피워올렸고 허둥지둥 힘든 줄 모르고 달려온 세월이 그 맛처럼 매콤하고 얼큰하고 구수하기만 하다. 전통의 맛을 고수하는 라면이 전세계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우리도 신라면의 기를 받아 언제나 자기의 색갈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디에서나 씩씩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처음 먹었던 신라면이 매콤하고 얼큰한 유혹이였다면 지금 먹는 신라면은 시련 속에서 우려지고 계란까지 덤으로 받은 구수한 향수이다. 도라지2021.5호 발표
58    회식의 재구성 댓글:  조회:450  추천:0  2021-08-24
수필 회식의 재구성 김영분   년말이 되니 회사업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고양이 손도 빌려 써야 할 판국이였다. 출고가 거의다 비슷한 날자에 맞추어져서 설 휴무전에 끝내려면 어느 건도 느슨히 손놓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더 한 건이 시간이 지체돼 출고에 빨간등이 켜지자 바이어는 사장에게로 사장은 부장에게로 문책이 이어졌다. 그러자 불붙은 해변가의 불꽃놀이처럼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자재과에서는 생산을 왜 그따위로 했느냐며 생산부에 소리 지르고 생산부에서는 자재가 늦게 도착해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맞짱을 뜬다. 세관업무를 보는 직원은 콘테이너 예약을 할 터이니 생산완료 시간을 알려 달라고 아우성이고 이제 더 이상 지체하면 콘테이너를 배에 태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수없이 최후통첩이 아닌 통첩을 반복한다. 그러면 생산부에서는 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생산 스케쥴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시간 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그거 요령을 피워서 시간을 좀 벌어줄 수 없느냐고 투정이다. 현실이 그렇게 계산으로 됄 일이냐며 목청을 높여 따진다. 일이 바쁘면 마음이 급하고 마음이 급하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일이 매끄럽게 진행이 잘 될 때는 가족처럼 끈끈한 정을 보이다가도 삐꺼덕거리는 기어처럼 일이 비틀어 질 때는 직원들 사이에 옴니암니 누구의 책임을 추궁하는 시합이라도 벌이는 듯 목소리가 몇 옥타브를 뛰여 넘어 카랑카랑해진다. 어느 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마다 보이는 초기반응이 확연히 다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건을 대하는 말투도 천지차이가 난다. 업무확인차로 자재가 언제 입고하느냐고 묻는 말에도 자재가 늦게 도착해 생산에 책임을 묻는 말인가 하여 발끈하기도 한다.사람마다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 급급해서 책임지려는 사람보다 책임을 전가하려는 사람이 더 많다.  말하는 투가 모든 갈등의 근원이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중요한 판국에 서로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하다.같은 말도 에둘러서 완만히 표현하면 문제거리가 되지도 않고 문제 해결이 더 빠를 터인데 서로가 자기 립장만 강하게 어필하다보니 받아들이는 쪽에서 약이 올라 또 반격을 가한다. 이런 상황이 다람쥐가 채바퀴 돌 듯 꾾임없이 반복된다.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가려내기가 칼로 물 베기처럼 어렵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회사일은 균형이 제일 중요한데 리더가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주다가 훈계를 하기라도 하면 큰 코를 다친다. 이전 같으면 리더도 강한 말투나 제스츄어로 직원들을 기선제압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요즘은 개미도 개성이 있는 시대라 그 누구도 간섭이나 훈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장의 위엄이 늦가을 나무가지에 매달린 나무잎처럼 위태롭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직원이 무단사퇴를 하고 인수인계가 어려워지기도 하다. 그래서 관리자도 그 관리요령을 잘 터득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다. 이런 골치거리 문제들을 떠안고 년말 회식은 으르렁거리는 직원들의 기분과 상관없이 공식처럼 치러졌다. 년말 회식은 해마다 하는 것으로 일년 총결을 지을 겸 특별히 년말에 일을 많이 하므로 사장으로서는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하는 자리이다. 이전에는 회식을 하면서 고리타분한 설교를 곁들이고 요즘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무마하고 싶어했다. 특히 사이가 살벌해진 직원들이 술 한잔 나누면서 누군가의 간섭이나 훈계가 없이 스스로 알아서 화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회식보다는 나름대로의 의미있는 회식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직원사이의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회식은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하고 맛나는 음식과 재미있는 게임, 정성어린 선물들로 순서가 이어졌다. 술이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간 탓인지 모두의 경계가 조금씩 풀리고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레 흥겨운 웃음꽃을 피우는 절묘한 타이밍이 왔다. 급기야 미션을 하나 던졌다. 재미있는 문답을 진행하겠는데 답을 한 사람은 모두 특별한 선물이 있다고 했다. 환성소리가 들려오고 기대를 머금은 눈길이 모아졌다. “지금 행운의 신이 내려 갑자기 하와이 여행쿠폰이 하나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행복의 물결이 얼굴에 흔들거렸고 너도 나도 앞다투어 답을 했다. “나는 당장 날아가겠습니다. ” “나는 여권을 찾아내서 비자를 만들고 날씨를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 “나는 그 곳의 민속상황을 알아보고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가겠습니다. 해변이 아름답다는데 수영복도 챙겨가겠습니다.” “나는 외국에 나가면 중국사람들의 매너향상을 위해 행실을 바로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기회가 생기면 하와이가 아니라 소주로 가겠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항주의 서호를 가보고 싶어했습니다.” 매사람마다 답이 달랐다. 열정적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들으면서 재미있으면 입을 가리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을 삐죽이 내밀고 그럴 수가 하는 표정도 있었다. 천인천면이라고 한가지 물음에 반응은 천차만별이였다. 술기운이 다분했지만 미션이 끝나자 뜻밖의 선물을 받아쥐고 싱글벙글하던 사람들이 간단한 모두발언을 들으면서 얼굴이 숙연해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마다 사건에 대한 초기 반응과 생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줬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여를 한 사람들이다. 참여가 없으면 얻는 것도 적을 수 있다. 무작정 떠나겠다는 사람은 행동파이다. 이런 사람은 집행력이 뛰여나지만 뒤수습이 약하다. 날씨나 민속정보를 알아보고 떠나겠다는 사람은 세심하여 세부적인 일을 잘 처리하지만 신속한 결단력이 약하다. 국민의 마인드를 위해 행실을 바로 하겠다는 사람은 책임감이 뛰어나서 리더의 품격을 지녔지만 경직되여 있을 수 있다. 하와이도 싫고 오로지 항주만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신과 느낌을 제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성격이 다르고 사건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고 대화하기 전 삼초 만 숨 고르고 얘기하라고 수백번을 회의 때 얘기를 했어도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듣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깊은 도리를 가르치는데 그 사람이 느끼게 해주는 것보다 더 큰 공부는 없었다. 지루한 설명도 필요 없었다. 이미 많은 직원들은 그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기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에 관해서 모두 최선을 다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비상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자재가 늦었다느니 생산에서 차질을 빚었다느니 서로 책임묻기를 하고 훈계를 하면 담당자들은 자기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하고 문제 해결은 뒤전으로 하기 쉽다. 그렇다고 리더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멘트를 날리면 자기관리에 약한 직원들은 더이상 반성하려 하지 않고 물에 물 탄 듯 미지근하게 자기 자리만 지키려 한다. 엄마 배속에서부터 성격이 형성되고 말투가 만들어져 맡은 바 일이 대나무가 갈라지 듯 술술 진행이 될 때는 서로 다정다감한 동료이다. 하지만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자신이 튀여나와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래서 회사내에서 터지는 비상상황은 직원들 매 사람의 참모습을 보아내는 요술거울이 되기도 한다. 사람마다 한가지 사건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 아닌 회식 현장에서 리얼하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시범을 보여줬다. 회식은 이로써 끝났다. 하지만 그 울림은 오래 가길 바란다. 회식의 약발이 오래오래 남아서 잘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올해는 적어졌으면 좋겠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리성적으로 절제된 의사표현들로 현실을 써내려가면 좋겠다. 송화강 2021.8월호 발표
57    쿠다모노야 댓글:  조회:338  추천:0  2021-08-24
수필 쿠다모노야 김영분 한 여름이라 걷기 운동을 하는 주민들이 폭팔적으로 늘어났다. 그 출렁이는 인파에 발폭을 맞춰 아파트를 한바퀴 돌고 나면 사흘이 멀다하게 개장하는 크고 작은 과일가게가 눈에 띈다. 아파트내의 1층 주차공간에 과일가게,야채가게가 밤하늘에 졸다가 깨여나는 별처럼 새록새록 생겨난다.      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울 때 일이 생각났다. 쿠다모노야(果物屋-과일집)를 배우면서 갸우뚱한 적이 있다. 과일과 야채를 어지럽고 시끄러운 시장에서만 팔고 있던 시절이라 일본에서 정결한 가게안에 상전 모시 듯 과일구럭에 골고루 보기 좋게 배렬해 놓은 삽화들을 보면서 의혹을 금치 못했다. 배불리기가 무엇보다 우선이였던 세월에 땅에서 굴리면서 팔아도 비싸서 사먹지 못하는 과일을 왜 저리 가게안에서 정성스레 팔고 있을가 하는 생각을 자주했다. 일본의 정보를 전혀 접할 수 없었기에 교과서의 삽화로만 리해해야 했다. 과일가게를 갸우뚱하게 배우고나니 뒤이어 야채가게까지 등장을 하게 되여서 그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슨 생각으로 야채까지 저렇게 팔고 있을가 하며 어린 나이에 또 한번 놀랐었다. 실제로 갓 청도로 와서 출근을 하고 있을 때 한번은 한국상사를 모시고 시장을 갔는데 사과 매대를 지나다가 그 상사가 깜짝 놀라는 것이였다. 조용히 하는 말이 한국에서는 저런 어지러운 사과는 돼지를 먹인단다. 어린 나이에 자격지심이 생겨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여 토라진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과를 볼 수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정말 살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싫은 매는 맞아도 싫은 음식은 못먹는다고 입맛도 많이 향상되였다. 그런데 요즘 곳곳의 아파트에는 정성들여 장식한 과일가게나 야채가게가 몇 집 건너 하나씩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백성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졌고 상가환경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는 말이다. 거기에다 과일이나 야채를 사면서도 최상의 서비스를 받고 싶어하는 백성들의 보상심리가 홍수가 난 저수지 수위처럼 높아진 것 같다. 이제야 그때 일본어를 배울 때 쿠다모노야를 제대로 리해할 거 같았다. 저녁운동이 끝나고 땀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불이 밝게 켜진 과일가게 앞을 지나치면서  꼭 과일을 조금씩 곁들여 사곤 했다. 그러니 아파트 가운데 차지하고 있는 상업로에 줄느런히 자리잡은 과일가게 사장들이 서로 손님을 유치하느라 길거리에 나서서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곤 한다. 심지어 앵두나 살구를 하나씩 건네주면서 한번 먹어 보라고 권하기 까지 한다. 가게안에 들어서면 눈부실 정도로 불빛이 환하다. 에어콘 까지 빵빵하게 켜서 시원하기 그지없다. 뭐니뭐니 해도 가게 사장이 털털하게 웃으면서 건네주는 봉지를 받고 나면 탐스러운 과일들을 하나하나씩 구경하기 시작한다. 빨갛고 노오란 체리로 부터 살이 잘 오늘 망고에 파랗게 꽃 처럼 피여난 파인애플, 털이 보시시한 동글동글한 홍모단, 여름에 빠질 수 없는 단물이 팍팍 들은 수박 등 눈앞에 쉴새없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침샘을 자극해 새큼한 군침이  도는 것 같았다. 바나나와 사과는 주눅이 들 정도로 소박해졌고 그 대신 비싼 과일들이 가게를 메우고 있다. 서너가지만 골라도 백원이 훌쩍 넘는 과일 값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과일은 명절 때나 맛을 볼수 있는 희귀한 음식이였다. 허나 지금은 눈을 가득 메우는 수십가지의 풍부하고 맛나는 과일을 버젓이 정결한 가게안에서 비싸게 팔고 있다. 개혁개방후 일취월장하는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경제를 과일 가게가 대변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만 개혁개방을 겪는 것이 아니라 과일들은 먹히고 씹히면서 더 치렬하게 생존을 위해 가게안으로 몰려 든다는 생각을 해봤다. 광주리에 담겨 길가에서 팔리던 과일들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시장을 넘어 이젠 버젓이 고급주택 아파트 내에 입주했다. 반짝이는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몸 값을 자랑하고 있다.무한한 경쟁시대에 자신을 높이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은 과일들의 달고 시큼한 노력들이 너무 대견스럽다. 30년전, 일본어시간에 쿠다모노야를 배우면서 갸우뚱했던 시절을 온 몸으로 실감하는 오늘,과일들도 자기 입지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과일들도 진지한 모습으로 자기가치를 실현하기에 올인하는데 하물며 팔다리 성성한 우리가 발벗고 나서지 않을 리유가 또 머가 있을가.     나날이 발전하는 과일가게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동지애를 느껴본다.   2021.1기 도라지발표
56    어게인 댓글:  조회:611  추천:0  2021-08-24
수필 어게인 김영분 올해는 코로나사태로 인해 본의 아니게 손씻고 집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한해였다. 하품이 나도록 지루한 시간도 흘러흘러 어느새 찬 기운이 으슬렁거리며 뒤목을 덮치는 서늘한 가을이 되였다. 꽃내음이 코를 간질이는 봄과 매미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는 울창한 여름을 지나오기는 했는데 대체 무얼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되짚어보면 손가락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동안 처져있지 말라고 추석맞이 행사로 오랜만에 나훈아가수의 가슴을 울리는 공연을 티비로 시청할 수 있어 한결 위로가 되였다. 눌리웠던 어깨가 거뜬해지면서 가슴이 펴지는 것 같았다. 노래선률은 흥겨웁다가도 무겁게 흐느끼기도 하고 가사는 소크라테스를 소환하고 싶도록 살아가는 인생의 도리를 조목조목 읊조리는 것이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주며 귀에 쏙쏙 꽂혔다.  그중에서도 기획공연의 테마가 제일 마음에 와닿았다. 바로 “어게인”이라는 말이였다. 무슨 뜻인지 몰라 검색을 해보니 “한번 더”라는 말이였다. 힘든 시국에 한번 더 힘을 모으고 시도를 해보자는 메시지가 담겨져있었다. 지루한 코로나와의 대치로 인해 심신이 지쳐있고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말의 희망을 되살려주는 말이 틀림없었다. “한번 더”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것은 나는 늘 버거운 일을 만나면 물러서거나 멈추어 서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 저어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우에 뜬 튜브처럼 수영장에서는 신나게 튕기고 부딪치며 놀다가도 바닥에 닿으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차분히 다음에 물에 내려갈 때를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무서워하는 편이였다. 되새겨보면 이런 성격으로 인해 한번 더 도전했으면 큰 성과를 얻었을 법한 일들도 많이 지나쳤다. 례를 들면 려행지에서 조금만 더 힘을 들였으면 가까이 있는 다른 산봉우리도 가 보았을텐데 숨이 이미 턱에 찼다고 그 산이 그 산이겠지 하는 마음에 되돌아선 적도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후 다시 힘이 차오르면 씻던 머리를 절반 헹군 것처럼 개운하지 않아  항상 후회하였다. 회사일도 그러했다. 바이어로부터 수정해달라는 제의를 받으면 여러번 응해주다가도 도저히 협력업체에서 협조해주지 않으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하청을 끊거나 바이어를 실망시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주위에서 서로서로 리해를 해주니 10여년간 제조업을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번 더”라는 마인드로 조금만 더 몸을 수그리고 다가갔다면 그 성과가 분명히 더 컸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지인의 아들이 방학을 리용해 친구와 둘이서 배낭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둘의 려행목적에는 력셔리한 호텔을 이용해보는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둘이 거금을 들여 호화방에 들었는데 글쎄 밤중에 두번이나 야식 룸서비스 전화벨이 잘못 울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단다. 이틑날 카운터에서 결산을 할 때 불만을 털어놓으니 직원들이 간단히 미안하다고만 하더란다. 사회경력이 적은 수염이 말랑말랑한 대학생들이라 그대로 넘어가려다가 한번 더 용기를 내서 메니저를 찾았단다.   여차여차 려행 중 이 호텔이 유명하다고 하여 수중에 얼마없는 려행경비를 털어 호화방 경험을 하러 일부러 찾아 왔다. 헌데 호텔 직원이 방번호를 헷갈려 밤중에 전화벨 소란을 두번이나 겪고 잠을 설쳤으니 우리는 피해자이다. 그러니 보상을 해달라고 당당히 얘기를 했단다. 밀고 당기고 그 메니저와 대화와 변론을 거듭한 결과 꽤 비싼 그 날 방값을 모두 면제받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지만 “한번 더”의 마인드를 잘 활용한 례였다.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 같으면 쏸라쏸라(됐다됐어) 하면서 내키지 않아도 불평을 서너마디 더 늘여놓고 눈을 흘기며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상까지 받았다니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옭아맨 생각의 올가미였다. 한번 더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때로는 그 한발자국으로 인해 큰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번 더”가 힘을 엄청나게 들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원래 자리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작아도 몸 전체를 거느리듯이 생각이 우리의 발길을 조종한다. 계절이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나무잎을 붉게 물들게 하더니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니 성격이 저절로 둥글해지고 뚝심도 배살과 같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팔청춘에 맞이하는 사춘기를 마흔 넘어 경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엉뚱하게 새로운 분야를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드니 자신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수출만 하던 우리 회사가 코로나를 맞으며 오더 위기에 들어섰다. 자택근무를 권장하고 비대면문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바이어들의 제품에 판매위기도 슬그머니 찾아왔다.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이전 같으면 한숨만 짓다가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번 더 용기를 내봤다. 내수팀을 내오고 디자인을 모색하여 판매용 제품을 만들어봤다. 그리고 여태 해보지 않던 판매를 시도해봤다. 시작이 절반 성공이라고 도전은 멋졌다. 많은 이들의 도움과 관심하에 첫 판매치고는 꽤 성황을 이루었다.      장장 10개월 동안 우리의 발목을 묶은 코로나때문에 때로는 지치고 막연해진다. 기분도 다운되고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행복해지는 일에 관심을 잃어버리고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가는 일에도 무관심하고 뒤로 한발짝 물러서게 된다. 새롭게 도전을 하면 실패할가봐 전전긍긍하게 되고  손놓고 있으려니 마음 한구석은 해놓은 일이 아무 것도 없어 항상 허무하다.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얼마나 오래 우리곁을 맴돌지 누구도 모른다.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훈아의 공연 테마 “어게인”은 마른 땅에 단비 내리 듯 촉촉했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들판에서 흔들리던 갈대같은 우리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도 “한번 더”의 의미를 깊게 새기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듬뿍 거머쥐였다. 우리의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즐겨야 할 축제이다. 어려워도 새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다행히 우리는 똑같게 매일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바로 “한번 더” 마인드이다. 우리 모두 다시 한번 더 힘내자. 연변문학 2021년 3기 발표
55    안부를 부탁해 댓글:  조회:286  추천:0  2021-08-24
 수필 안부를 부탁해 김영분   가을이 막바지에 들어서서 그런지 길거리에 나무들이 서서히 앙상한 줄기를 드러내고 있다. 목깃을 파고 드는 찬 바람이 한번씩 불어칠 때마다 단풍잎들이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처럼 옷섶을 툭툭 치며 분주하게 흩날린다. 출근길에 가로수가 제법 불타오르는 듯 울긋불긋 가을정취를 뽐낸다. 성격이 급한 락엽들이 다른 잎사귀들보다 먼저 길우에 내려앉아 바스락거리며 가을을 느끼려 온 사람들의 신발주위를 맴돈다.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보니 아직도 노르스름하거나 붉으스름한 잎사귀들이 듬성듬성하게 나무가지에 매달려있다.수분과 양분을 아낌없이 내주어 푸르게 피여나게 하고 높은 곳에서 먼곳을 바라볼 수 있게 받쳐준 나무가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빛을 받으면 아직도 반짝거림을 잊지 않는 수많은 단풍잎들이 혹은 나무가지우에서 혹은 길우에서 서로 어깨를 서걱대며 자기들만의 가을잔치를 즐긴다. 이 모든것을 지켜보는 나무는 어떤 마음이였을가. 자신이 더운 날 쉬지 않고 수분을 끌어주고 흐린 날 비바람을 맞으면서 무성하게 피워올렸던 잎사귀들이 세월의 풍파속으로 휘청이며 걸어가고 있다. 속절없이 잎사귀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나무는 찬바람이 불어치면 흔들리지 않으려고 이를 사려물었을가. 한시라도 더 잎사귀들을 붙잡고 보듬어주고 싶어 무정하게 차가워지는 계절에 애원을 했을가.또 아니면 뒤짐지고 서서 비장한 눈빛으로 락엽들의 춤추는 몸짓들을 응원해줬을가. 락엽들은 나무를 떠나면서 또 어떤 생각을 했을가.먼저 떨어져야 했던 나무잎들은 아쉬워서 더 머무르고 싶었을가 아니면 자기 갈길을 드디여 찾았다고 성수가 났을가.더 오래 매달려 있었던 나무잎들은 점점 메말라가는 나무의 그 푸름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주고 싶어했을가. 많은 사색을 낳게 하는 단풍나무의 모습이다. 심혈을 다 기울인 부모와 성장해서 곁을 떠나가는 자식들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부모들은 자식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정성껏 보살펴준다.그러다가 어른들 키를 훌쩍 넘고 허우대가 커지면 스스로 바깥세상을 헤쳐나가라고 자식들 손을 놔줘야 하지 않았던가. 올해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다. 온역으로 열병을 앓고 있는 시기에 아들을 혼자 한국에 류학을 보내야 하는 마음은 조미료가 엎질러진 부엌처럼 혼잡했다. 집에 데리고 있자니 덩치 큰 아들이 학기내내 백수처럼 쏘파만 차지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보내자니 역시 인터넷수업중이라 등교를 못하는 것은 이 곳이나 그 곳이나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환경이고 학교 옆이라 마음상태는 보다 으로 더 치중해서 나올 것 같았다.본인도 어렵게 대학생이 된 설레이는 마음을 눅잦힐 수가 없어 물 불 안가리고 가겠다고 하니 손을 우드득 움켜쥐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보내기 전,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정작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여태 배워준 것이 무엇이였나 싶을 정도로 쏟은 정성과 가르침이 무색해졌다.마스크를 꼭 끼고 다녀라,사이비종교를 조심해라, 다단계를 조심해라 통장을 빌려주지 말아라, 클럽을 가도 음료수를 마음대로 마시지 말아라, 학원대출에 손 대지 말아라 등 온갖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자루에 든 콩을 한꺼번에 쏟아붓 듯 다 털어내서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다급하고 간절한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고개만 부지런히 끄덕인다. 그깟쯤이야 하는 대수로운 표정은 목까지 치밀고 올라 온 나의 걱정을 더 크게 부풀렸다.왜 이렇게 중요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지 고까운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소금처럼 알차도 소금처럼 쓸데없이 들리는게 엄마의 노파심이 담긴 잔소리가 아니던가.이제 이런 말 해줄 사람도 없겠는데 혼자 떨어져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만 늘어났다. 키가 아무리 커서 어른들을 초과했어도 부모눈에는 철없는 애로 보이는 게 자식이다.이는 우리 엄마가 마흔도 훌쩍 넘은 나를 항상 걱정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가까이 사는 친지가 대학파티를 해준다고 해서 갔더니 걱정스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들에게 당부를 한다. “집안 어른으로서 정말 중요한 부탁을 한다.혼자 공부하러 가게 된 건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집에 부모들은 아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걱정을 할 수가 있다. 학생이 할 수 있는 건 정기적으로 부모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일이다. 잘 먹고 잘 자고 그리고 안전하다는 것을 부모에게 확인시켜주길 바란다. 이는 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였다. 정말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싸인을 정기적으로 그리고 주동적으로 보내준다면 엄마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아주 행복할 것이다. 효도란 이리 간단한 것이란 말인가. 자식이 안전하고 잘 먹고 잘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벅찬 일이라는 것을 마음 깊숙히 느꼈다.   온역이 살판을 치는 시국에 안전하게 외국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큼 더 반가운 것은 없을 것이다.수업을 열심히 한다는 말도, 어디에 견학을 다녀왔다는 말도, 그리고 어떤 친구를 새로 사귀였다는 말들은 아들을 신나게 할 수 있으나 부모인 나는 그래도 아들이 안전하게 잘 지낸다는 싸인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아들의 눈도 잠깐 반짝했다. 아마 그도 느꼈으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고. 헌데 감동은 반디불처럼 그때 잠시 뿐이였다. 아들이 내 곁을 떠나 외지로 간지 여러달이 지났지만 항상 내가 답답하고 궁금해서 영상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여러번 련습을  거친 나래이션처럼 멘트는 항상 똑같았다.”밥은 잘먹고다니냐,춥지는 않냐,잠은 잘 자냐.” 우리 엄마도 종종 참지 못하고 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오는 것처럼. 나무가 나무잎을 붙들어 놓지 못하듯이 엄마들도 그런 것이리라. 떠나버린 나무잎을 응원하며 바라볼수 밖에 없다. 손을 흔들어 붙잡아보려 해도 그들의 그림자에도 닿지 않는다. 아이들은 성수나게 넓은 세상을 휘젓고 다니기때문이다.들끓는 젊음은 앞으로 달려가느라 뒤돌아볼 새가 없다.   세상의 리치가 내리사랑만 허락한다면 자주 부모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만으로 효도를 할 수있다.오래도록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 고장을 의심했다는 부모도 있지 않은가. 부모의 은혜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는 올리사랑이지만 나는 하는 친지의 그 말 한마디에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냈다. 다른 부모들 그리고 나의 부모 또한 그런 것을 원하는 건 아닐가. 흩날리는 단풍이 제풀에 성수나서 나무를 뒤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나도 철이 안드는 망아지를 닮았는지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자주 하지 못했다. 효도란 이렇게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효도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진정한 효도가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철이 바뀌면 옷 몇견지 사드리고 다니실 때 다치지 말라고 간섭이 섞인 관심을 보인 적은 많았다.그래도 항상 엄마는 너 잘있냐 하면서 전화를 먼저 걸어 오는 것을 보면 나처럼 역시 자식의 안부가 제일 궁금하고 마음에 걸리였던 것이다. 깊이 반성해야겠다.여태까지 나는 진정한 효도를 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한테 바로 안부전화 한통 넣어 드려야겠다. 2021 .1기 송화강발표
54    봄의 변덕 댓글:  조회:293  추천:0  2021-08-24
수필 봄의 변덕 김영분 전 세계의 사람들이 코로나사태로 인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몇개월을 휘청거렸다.그동안 정직한 자연은 계절을 뛰어넘지 못하고 기어이 초록의 봄을 우리에게 보내왔다.걱정스레 뉴스에만 눈길을 묻었던 사이 어느새 청도의 거리마다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피였다. 겨우내 어떻게 용케 참고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무더기로 피여나서 아름다움을 토해낸다. 긴긴 산고 끝에 태여난 새 생명이 되여서 그런지 싱그러운 것은 말할나위 없고 화사하게 피여나는 꽃들을 보면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뾰족거리며 돋아나는 풀처럼 파랗게 물이 든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꽃내음에 무거웠던 마음이 큰 짐을 부리운 듯 가벼워진다. 푸른 빛을 머금은 대지를 따스하게 쪼여주는 해볕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싱숭생숭한 계절이다. 따뜻한 산들바람과 화창한 날씨에 걸맞게 사람들도 활력을 되찾은 거 같다. 거무죽죽한 겨울 외투 대신 연한 색상의 쟈켓으로 바꿔 입었고 두꺼운 가죽 부츠 대신 산뜻한 런닝화로 갈아 신었다. 오늘은 봄 날씨 치고는 화창하다.싱그러운 봄기운이 그득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코끝을 감도는 찬기운이 느껴졌다.엷은 블라우스를 입으려다가 약간은 추울 거 같아서 털실 가디건을 하나 더 걸쳤다. 그래도 사무실에 반나절을 앉아 있노라면 뼈 속까지 찬기운이 파고 들어와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위가 더부룩해진다. 따스함만 있는 봄이면 얼마나 완벽하겠냐만은 겨울과 여름의 건널목에 버티고 있는 봄은 따스함과 추위를 채널 돌리 듯 쉽게 반복한다. 패셔니스타들에게 봄은 희망의 계절이지 안도의 계절은 아니다. 꽃을 시샘하듯 추위가 덮치기도 한다.자칫 엷은 의상을 코디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온도를 잃어 랑패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봄은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기에 따뜻하다고 많이 표현한다. 따뜻한 봄, 화창한 봄, 하지만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봄은 마냥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추위와 따뜻함사이를 수시로 드나든다. 썰렁하게 진눈깨비를 뿌리기도 하고 으스스하게 차가운  봄비를 적셔주기도 한다. 해볕이 잘 들지 않는 사무실에는 바깥의 포근함과는 등지고 있어 아직 썰렁함을 다 밀어내지 못했다. 겨울은 쉽게 자취를 감출 수 없노라고 시위를 하면서 제법 쌀쌀하게 맞대응을 하고 있다. 밖에는 따뜻한 온도에 아지랑이 아물거리지만 사무실 의자뒤에는 항상 두터운 겨울 작업복이 준비되여있다. 멋스럽게 엷은 옷을 입고 출근 한 날에는 어깨를 움츠리고 덜덜 떨면서 겨울 옷을 겹쳐 입는다. 그래도 발목은 찬기운으로 찜질한 듯 섬찍하게 춥다. 드러낸 발목은 봄을 맞이하는 이의 용감한 환영식이다. 추위를 감수하며 얼음을 뚫고 노란 꽃망울을 피워올리는 설련화같다고 할가. 회사의 일상업무도 항상 봄처럼 변덕이 많다.박 밀듯 시원히 일이 진행되다가도 예상치 않은 사건이 불쑥 터져나온다.  샘플 진행부터 생산이 완료되기까지 아주 힘겹게 진행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샘플 컴펌을 받아서 생산을 시도하려는 찰나에 고객이 마음이 바뀌여 디자인을 조금만 변형을 해달라는 부탁 아닌 지시가 내려졌다. 샘플사가 생산부에 수정의견을 제출하자 생산라인에서는 투입준비도 끝났는데 바꿀 수 없다고 홱 돌아서버렸다.     점심까지도 한 테이블에서 도시락을 맛나게 먹으며 수다를 떨던 동료사이인데 자기부서에 불이익이 들이 닥치자 손바닥 뒤집 듯 태도가 확 바뀌였다. 예상하지 못한 폭풍을 만난 배처럼 생산은 뚝 멈추어섰다. 안달이 난 오다  담당이 나서서 그 로고를 인정하고 번복한 지시에 대한 미안함을 거듭 전달했다. 입에 사탕을 바르고 애걸에 가까운 설득을 거쳐서야 생산부서 담당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다시 생산에 임했다.종당에는 엿가락을 뽑아내 듯 배배 탈면서  힘겹게 생산을 완성했다. 이런 사건이 심심하면 방영되는 약 광고처럼 많아 이젠 가슴 쓸어내리도록 놀라지도 않는다.작업이 평탄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관리자의 일방적인 기대일 뿐이다. 고대하는 회사내 평안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일이란 곧 변덕이고 창조이니까. 창조는 또 끊임없이 시련을 마주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는 따뜻하던 봄날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추위를 많이 닮았다. 따뜻한 날씨인줄 알고 코노래를 흥얼거리다 찬서리를 맞을 수도 있다.    신호등을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은 곧 파란불로 바뀔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면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것도 이제 추위는 곧 지나고 완연한 따뜻한 봄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변화와 고민으로 반죽된 일터에서 견지할 수 있는 것도 매일 더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고 또 꼭 좋아질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추위와 따뜻함이 다 봄의 모습이라면 성공과 좌절도 모두 우리의 삶에 꼭 뿌려져야 할 양념이다. 어느것도 멀리하고 외면할 수가 없다. 겨울은 멀어져갔고 봄은 차분히 우리 곁으로 와서 머물다가 소리없이 여름으로 넘어간다. 그때는 봄의 썰렁함도, 따스함도, 찬 바람에 드러내놓고 시렸던 하얀 발목도, 함께 소중한 추억이 되여 생의 한페지를 장식한다.      봄날의 따뜻함과 추위의 시련을 거쳤기에 여름이면 나무가지가 더 우직하고 풍성해진다.여름의 열정으로 아낌없이 불태우고 나면 풍성한 열매를 자랑하는 가을이 올 것이다. 봄이 변덕 많은 날씨에도 꽃을 피우 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들도 우여곡절이 있어서 리얼하게 완성이 된다.변덕이 많은 봄,의외로 추운 봄,  오늘도 봄 꽃 사진 찍으러 공원으로 향한다. 봄에 가끔씩 변덕을 부리며 찾아오는 추위는 이제 곧 지날 것이다. 나는 여름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도라지 2021.3기 발표
53    마음의 병 댓글:  조회:320  추천:0  2021-08-24
수필 마음의 병 김영분   몇년전,우리 엄마가 당뇨로 인해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옆침대 할머니는 뇨독증이라 투석을 위해 입원을 했는 모양이다. 아마도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을 했는지 얼굴도 맑고 피부도 매끈한 편이였다. 병간호를 하는 할아버지는 어느 촌에서 간부를 하는 듯했다.우리가 사는 도시는 촌에서 간부를 맡아하는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저력을 보여주는 듯 촌민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갔다. 할아버지는 약간 부푼 배에 항상 셔츠를 깨끗하게 받쳐입고 있었다. 병문안을 찾아온 촌민들의 구김살있고 허트러진 모습에 비하면 로부부의 행색은 소위 촌에서 몇 안되는 출세한 차림이였다.   첫 며칠은 큰 아들로 돼 보이는 남자가 매일 밥을 날라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지 헬멧을  항상 옆구리에 차고 들어섰다. 얼굴에 선하고 어진 웃음을 피우며 비닐봉지에 물만두와  빵,그리고 볶음요리 등을 부지런히 날라왔다. 할머니는 병실에 들어서는 아들을 볼 때마다 아픈 것도 잊고 환한 웃음을 지으려고 애쓰는 반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덤덤하다못해 싫증을 내는 눈치였다. 아들은 사근사근하게 엄마의 병세를 묻고 이불을 여며주면서도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질가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술한 작업복 차림을 한 남자는 점심과 저녁이면 어김없이 음식과 일상용품을 가득 거머쥐고 병실에 나타났다. 돌아갈 때는 두 어깨가 항상 축 늘어졌다. 며칠이 지나고 투석을 여러번 하더니 할머니의 병세도 많이 호전이 되여 누르꾸레하던 얼굴에 화색이 좀 돌아온 듯했다. 기운을 조금 차렸는지 가느다란 목소리로 시간만 나면 할어버지를 책망했다. 당신이 정말 문제라고,아들이 변압기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무엇이 불만이냐고,공부를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데, 아이들마다 자기의 좋아하는 일이 있는데 올 때마다 눈치 주고 구박주어 어쩌자는 건가.출세한 자식만 자식이냐며 엄청 화난 표정으로 나무랐다. 병석에 누워서 기력이 빠졌지만 남편에 대한 불만은 목구멍까지 가득 차오른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당장 철을 녹여 바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듯 한숨을 풀풀 내쉬였다. 내가 어디가 못나서 저런 아들을 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두덜댔다. 돈이면 돈, 관계면 관계 다 틀어쥐고 있는데 자신이 조금만 잘하면 명품대학도 갈 수 있고 학력을 거머쥐고 집에 돌아오면  뜨르르한 공관서에 일자리도 마련해줄 수 있는데 지금 하고 다니는 꼴이 저게 무엇이냐고 할아버지가 더 못마땅해 했다.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다고 연신 푸념을 늘어놓았다. 둬번 로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나서야  밥 나르는 남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태도를 알아차렸다. 두 부자간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졌다. 능력있는 아버지의 원망과 그 기대에 못미쳐 갈팡질팡하는 아들의 고통이 삐걱이는 치륜처럼 아프게 신음하고 있었다. 며칠 후, 엄마의 주치의를 만나 상담을 끝내고 병실에 돌아오니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글쎄 흰 와이셔츠 차림의 보지 못했던 웬 젊은 남자가 왜소한 할머니의 병상에 같이 바싹 누워서 혼곤히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먼길을 달려왔는지 머리는 기름기가 약간 번지였고 검은 테두리를 하고 있는 안경이 침대 옆의 테이블에 비스듬이 놓여져있었다. 피뜩 봐서는 꽤 학식이 있고 체면있는 차림새였다. 짐작컨데 작은 아들로 보였다. 보호자 침대가 없는 상황이라 환자의 병상에 비집고 쪽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량손 가득히 먹거리들을 사들고 병실에 들어섰다.간만에 얼굴에 띄는 웃음에 힘이 실렸고 눈길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로인은 나와 엄마를 향해 연신 작은 아들이 왔다고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손짓으로 전하고 있었다.잠자고 있는 작은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듯 싶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지금 상해에서 대기업에 취직 중이라고 뿌듯하게 말했다. 한참을 설레발을 치고 있는데 인기척에 잠을 깬 작은 아들이 부시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단잠을 잤는지 입을 다시며 기지개를 쭉 펴는 것이였다. 사위를 둘러보더니 눈음 슴벅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우리 쪽과 간단한 목례가 오가고 그들 셋은 둘러앉아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귤이며 바나나를 작은 아들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금방 잠을 자고 일어나서 입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왼고개를 트는 작은 아들은 상관하지도 않고 권유는 연신 이어졌다. 신기한 것은 권하면 권할수록 작은 아들의 인상은 더 구겨지고 왼고개를 타는 회수도 더 많아졌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락담했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쓸쓸한 기색을 보이며 쓰거운 입을 다시기도 했다. 작은 아들은 외지에서 간병하러 온 사람답게 이튿날 총총히 떠나갔다.그래도 할아버지는 서운한 기색을 숨기며 연신 걱정말고 일보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다음날 헬멧의 아들은 여전히 음식꾸러미를 들고 병실에 나타났고 할아버지도 변함없이 흐린 얼굴을 선보였다. 세월이 여러 해 흐른 오늘날도 헬멧을 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나르는 아들과 출세하여 병간호을 온 사이에도 병상을 비비고 잘 만큼 인정받고 사랑받는 아들을 둔 할아버지의 모습이 웬지 뇌리를 오래 스친다. 우리는 출세하거나 사업에서 크게 성공해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생각은 무엇이나 잘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밑바탕이 깔려 있어서 그런 것이다. 뒤쳐지거나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하고 가치가 작게 평가되여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자신의 감수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해서 생겨난 마음의 병이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에게 있어서 이 또한 편견이라면 아주 오만한 편견이 되겠다. 이런 생각으로 자식을 키우면 그 자식 또한 이런 생각을 되물림 받고 자신의 자식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게 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사랑하는 것, 아이들이 마음놓고 부모 앞에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부모와 자식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야 나다운 사람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고 당당히 기죽지 않고 살아간다. 뒤쳐지는 자식이 안타까워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아이들을 닥달하고 혼내고 심지어 위협을 서슴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 할 수 없는 바 어려서는 부모 곁을 떠날 능력이 없어 고스란히 그 횡포들을 받아안아야 한다. 어린 시절 내내 길게 이어지는 부모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는 아이가 어른이 되여서도 이름 모를 분노와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타협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그들은 남에게 잘 베풀고 인정받으려고 무척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으로 거듭난다.        하루만에 급히 떠나가는 작은 아들의 뒤모습을 통해 할아버지가 큰 아들에 대한 무언가를 많이 느낀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변문학 2021년7월호 발표
52    더치페이, 18세를 만나다 댓글:  조회:394  추천:0  2021-08-24
수필 더치페이, 18세를 만나다 김영분 올해 18세인 아들이 고중을 졸업하면서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썩 잘하는 공부는 아니였지만 나름 12년동안 정해진 틀에 맞춰 교실에 묶여있느라고 갑갑했는 모양이다. 대학입학 소식을 받자 날듯이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졸이던 마음에 홍수가 터졌는지 방학을 하자마자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회포를 푸는 시간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제 곧 대학생이 되니 자신도 어른이라고 생각하는지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는 술도 버젓이 등장시켰다. 가끔은 집안 어른들도 이젠 맥주 한잔씩 받아마셔보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서툰 청춘이 기지개를 마구 펴고 가족들이 못이기는 척 술을 허용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고중졸업을 하고 맞은 아들의 여름방학은 술자리가 유난히 많았다. 오늘은 누가 대학 턱을 내고 래일은 또 어느 친구가 다른 도시로 떠난다고 송별식이니 하면서 어른들 못지 않게 식당놀이가 잦았다. 심심찮으면 달려가는 식당모임에 부모로서 잔소리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잔소리 와중에 웃지도 울지도 못할 18세의 더치페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회식자리가 많고 참가한 친구들도 많은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술값 계산을 하냐고 저그만이 다니라고 나무랐더니 송별식이니 축하파티니 참석을 해도 각자 부담을 한다는 것이다. 한턱 내는 사람은 그냥 모임소집을 하는 것으로 턱을 낸다는 것이다. 계산은 어차피 더치페이란다. 어른들 듣기에는 좀 터특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턱을 낸다고 했으면 본인이 계산을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덩치가 큰 아들이 멋을 부리느라 곱슬하게 파마한 머리를 자주 쓸어올리며 당연하다는 듯 하는 말이 너무 귀여워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가관은 다음이다. 자기는 녀학생들을 배려하는 마음에 회식이 끝나면 꼭 집에까지 다 바래준다는 것이다. 그래 너 매너 좋구나 하고 칭찬을 했더니 이어서 하는 말은 그대로 토크이다. 녀학생들이 집에 도착하면 스스로 자기몫의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고 아들은 거기서부터 집에 돌아오는 택시비를 부담한단다. 급기야 폭소가 터졌다. 울대뼈가 멋모르고 바삐 오르락내리락하는 햇내기 청년의 순수하고 기특한 발상에 이 엄마는 무엇이 우스웠는지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참을 깔깔거렸다. 매너가 좋고 신사스러운 어른이였으면 아마도 녀동창이 스스로 택시비를 지불하게 놔두지 않고 격하게 말렸지 않았을가 싶다. 녀동창도 미소와 고맙다는 멘트로 신사의 완성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용돈을 조금씩 받아 쓰고 있는18세 아들은 자기의 귀가 택시비만을 가까스로 낼 수 있었다. 그러고도 녀학생을 집까지 바래줬다고 자랑을 하니 김밥의 옆구리가 불시에 터지듯 웃음이 절로 나왔다. 더치페이는 영국인들이 지어낸 것으로‘네덜란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더치(Dutch)와 ‘지불하다’는 뜻의 페이(pay)가 합쳐진 말로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일을 말한다. 신사로 불리는 영국사람들은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의례히 남자가 계산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근검하고 소박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고 해상무역을 발전시키면서 각자부담하는 방법을 택했다.특히 허영심 강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한턱을 내여도 각자부담하는 계산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근검절약하는 삶의 방식을 쪼잔하다 비웃으며 조롱한 것에서 더치페이란 말이 상용되였다. 이렇듯 더치페이란 원래 비아냥거리는 식의 말로 쓰였다고 하니 엄마의 폭소에도 아들의 각자 지불한 택시비에 대한  비웃음이 섞여있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밥은 각자 먹었다 쳐도 집에 바래준다는 자체가 차비도 포함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생각이 내 머리에 틀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아들은 한치의 망설임이나 주저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택시비를 각자 지불했다고 하니 문화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또한 다시 생각을 해보면 아들은 아직 학생이고 용돈을 받아쓰고 있는 립장인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몫만 내도 빠듯한 상황이 아닌가. 술도 좀 마셨으니 녀학생들이 걱정이 돼서 나름대로 신사흉내를 내느라고 집까지 택시로 배웅했을 것이다. 만약에 돈을 한방에 다 쓰고 나면 부담이 되여서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니 이 또한 현명한 처사이다. 어른들은 자기 힘에 부쳐도 내색을 하지 않고 체면에 자신이 감당하기에 무리한 결정을 할 때가 많다. 감당도 못할 큰 소리를 치고 벙어리 속을 끙끙 앓을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이 비웃을가봐 강한 척하고 또 그에 따른 과소비를 하게 된다. 소위 작은 몸에 큰 바지를 입고 힘에 겨워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 불편함과 무거움은 자신만 알고 있다. 18세의 더치페이에서 본 솔직한 모습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명쾌하고 발랄해보였다.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달려야 오래 뛰고 멀리 갈 수 있다. 18세에 맞춤한 옷을 입어보고 편안했던 기억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가 늘어 높고 추운 곳에 이르면 또 자신의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 입을 능력이 생길 것이다. 이제 어른들도 그만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했으면 좋겠다. 뚱뚱한 몸집에 팽팽한 옷을 입지도 말고 왜소한 체구에 커다란 양복도 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이 보기 좋아하는 옷보다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으면 좋겠다. 연변녀성2021년8기발표
51    뾰족한 수 댓글:  조회:277  추천:0  2021-08-24
수필 뾰족한 수 김영분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온다.찬 기온에 두툼히 몸을 감싸며 몸매를 가리던 옷견지들이 맥없이 무장을 해제해야 하는 더운 계절이 우리 곁으로 서서히 찾아왔다. 움츠렸던 몸이 풀어져 어깨를 시원히 펴고 기지개를 쭉쭉 켜본다. 얇아진 의상에 숨을 곳이 없어 싱겁게 출렁이는 군살들을 보노라니 다이어트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쫑긋 머리를 치켜든다. 해마다 같은 시간이 되면 알람을 맞추어놓은 것 처럼 떠오르는 생각이다. 아무리 야위여도 본인은 뚱뚱해 보여 속상해하는, 체중만큼은 요구가 극히 높은 부류가 바로 녀자들이 아닌가 싶다. 엄마눈에는 포동포동하고 복스러운 살이 자기 눈에는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거추장스러워 당장이라도 시원히 떼여버리고 싶은 애물단지 혹이라도 되는 듯 하다.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별의별 시도를 다 해봤다. 아침을 과일로만 때워보고 저녁을 죽으로 대체도 해봤다가 쌀과 밀가루음식을 원쑤를 대하듯 피하기도 했다.걷기운동은 물론 두시간을 뛰고 나면 땀벌창이 되는 배드민턴 운동도 몇년째 꾸준히 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끔 산을 오르면서 허벅지가 저릿저릿 아프도록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기도 했다. 헌데 수더분하게 늘어나는 나이만큼이나 체중도 가랑비에 내물이 넘치듯 어물쩍하게 불어났다. 나이살이라고 눈을 곱게 흘기며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같이 머리를 까댁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약해지면 얼마나 좋겠냐는 환상은 지지리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해빛을 보면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화창한 날 외출을 다짐하고 나면 더더욱 그랬다. 살아온 세월만큼 긴 시간동안 한입한입 야무지게 먹어서 생긴 살집을 짧은 시간에 확 줄이려고 다급하게 서두른 적도 많았다.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자신의 입을 관리하는 의지는 믿지 못하더라도 세상이 이처럼 발전했는데 다이어트 하나 정복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의학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꽤 높았다. 령단묘약이라도 받아쥔 듯 다이어트 차를 꿀꺽꿀꺽 들이마시고는 저녁내내 끊어질 듯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출입을 하기도 하였다. 안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느긋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 날에는 몸에서 에네르기보충신호가 심하게 전해오자 야심한 밤이라는 것도 감감 잊은 채  과일을 허겁지겁 흡입하기도 하였다. 보나마나 여태 부르짖던 다이어트는 매일 떠오르는 해처럼 지지 않는 과제가 되여버렸다. 여러번의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담백한 식단과 적은 량의 식사,그리고 맞춤한 운동과 안정된 일상외에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곧 답이고 뾰족한 신의 한 수 였다. 상식은 일반사람들이 보통 다 알고 있는 지식이나 일반적 견문이다.그러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고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지력과 재력이 급상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범사에 똑 부러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창한 진리보다는 의외로 심플하고 상식적인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 벌거벗은 황제의 새옷을 바라보면서 아이가 무심히 뱉은 한 마디에 어른들이   놀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벌거벗은 걸 벌거벗었다고 한 것 뿐인데 그게 진리이고 답이라니 어른들이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보아내지 못한 멋진 옷을 걸치고 있을 거라는 가상 답안을 합리화시키고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아이 교육을 놓고 봐도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을 떠날 수가 없다. 우리는 자녀와의 관계와 소통을 중요시한다. 헌데 청소년이 되면 방문을 닫아 거는 아이들이 늘어난다.반항하고 도발적이고,학업을 뒤전으로 하고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가끔은 비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담실을 찾을 경우, 역시 뾰족한 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경청이 이루어져야 하고 공감과 인정이 뒤를 따라야 한다. 아이의 생각을 물어보고 부모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가 진심으로 힘을 실어주는 말을 건네줘야 한다. 아이가 자기의 생각을 말할 때는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말의 흐름을 끊지 말고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어야 하며 신중하게 검토하고 호불호를 분석해주어야 한다. 부모가 언제나 너의 편이고 도와줄 준비가 되여있으니 문제가 있으면 제일 빠른 시간에 자신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문제를 들고  찾아왔을 때는 고맙다는 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지극히 상식적인 소통의 방법이다. 아이와 소통을 하고 싶은데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찾는다면 아마도 우에서 말한 방법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동원될 수 있지만 우의 소통법을 뺀다면 속이 없는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하고 내실은 없다. 소통법을 얼마나 인지하고 활용하느냐가 아이와의 소통의 장벽을 허무는 뾰족한 수가 될 것이다. 요즘 코로나로 온세계가 발목이 잡혔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어도 코로나 사태이래 똑 부러지는 백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방송에서는 마스크를 잘 끼고 사회적거리를 두며 손을 자주 씻으라고 한다. 자유를 지향한다는 명목하에 이를 무시하는 지역은 코로나 감염자수가 일파만파 겉잡을 수 없이 추가되고 있다. 반면에 이를 잘 지키는 지역은 서서히 병역사태가 수습되여 가고 있다.  사소하고 상식적인 생활습관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코로나를 이겨내는 뾰족한 수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뾰족한 수라는 것도 지나서 보면 대개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들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거창한 지혜가 필요하지 않다. 심플하고 상식적인 것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걸림없이 순탄하게 살아갈 수 있다.누구나 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뾰족한 수를 잘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받은 제일 큰 축복이 아닐가 생각을 해본다. 연변문학 2020.11월호  
50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1039  추천:0  2020-08-18
수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김영분     갓 회사에 입사해서 출근을 할 때의 일이다. 깐깐한 한국상사가 있었는데 자주 하는 말이 한마디 있었다. 즉 사람은 속임수를 써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이 말을 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잘못을 저지른 직원을 훈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사는 꽤나 점잖은 사람이라 함부로 목청을 높이거나 인상을 쓰지 않았다. 언제나 유유하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한마디였다. 통역을 하는 내가 싱거울 정도로 말을 아꼈다. 회사는 체인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밤과 낮을 교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재료가 동으로 되였는지라 한덩이만 해도 꽤나 값이 나갔다. 낮시간에는 직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쉴새없이 절구처럼 아래 우로 찧고 빻고 하는 기계를 지키고 있어 그나마 합격한 제품수량이 원재료 중량에 버금갔다. 그러나 저녁교대시간의 생산일보에는 똑같은 원재료가 투입되였지만 합격품은 훨씬 적게 기재되는 대형사고가 가끔 있었다. 생산회사는 원재료를 아끼고 좋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능사인만큼 상사도 생산량에 무지 신경을 썼다. 저녁 교대시간에는 왈랑절랑하는 기계소리가 온 공장을 메우지만 몇사람만이 절래절래 기계를 돌보고 있어 한산하고 괴괴한 정적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 지루하다고 하품을 서너번 하면 자장가로 들려 제법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로련한 기계사들을 붙여 웬만한 기계고장은 혼자 처리할 수 있게 세팅이 되여 졸거나 딴청을 피우지 않는다면 생산량은 낮근무시간보다 적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저녁 생산일보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다. 상사가 퇴근하는 몇을 불러 경유를 밝히라고 하면  급한 김에 기계탓을 하는 기계사들이 많았다. “5번 기계가 작동을 멈춰서 고칠 수가 없었어요.” “8번은 낮근무시간에 어떻게 설정이 됐는지 불량품만 잔뜩 나왔어요.” 그러면 통역을 맡은 내가 진지하게 리유를 설명하면 상사는 언제나 짧게 한마디 하였다. “사람은 속임수를 써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화를 내는 대신 직원 몇을 거느리고 현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불량품 수거를 하고 체인무늬를 분석하고 차분히 기계를 점검한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어느 기계에서 원재료가 적게 투입되였는지 불량품을 실없이 뽑아냈는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있었다. 몇번 같이 수사 아닌 수사를 해보니 답이 나왔다. 저녁 근무를 할 때 졸고 있었던 것이다. 원재료가 거의 떨어질 즈음에 새로 동선을 걸어줘야 하는데 졸면서 그 타이밍을 놓치면 기계가 혼자 절커덕절커덕 공회전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는 생산량만 봐도 얼마나 오래 졸았는지 눈짐작으로 견적이 나왔다. 여러번 기계탓을 해보고 나니 직원들도 너무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가 싱거워졌는 모양이였다. 그 후로는 변명보다는 솔직하게 반성을 하고 징계를 받았다. 그러면서 기계가 아닌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창피해서 진지하게 저녁근무시간에 임하기 시작했다. 나도 사무실 행정일을 보면서 몇번 거짓말을 했었다. 갓 사회에 나오다보니 처음으로 접하는 일이 많았다. 십여년전이라 전산이 아닌 수동으로 회계업무를 많이 보던 때였다. 수표를 써서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글씨 하나 잘못 써서 헛탕을 하게 되였다. 다시 회사에 돌아와서 새로운 수표를 받아가려니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은행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오후에 다시 오라 한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또 한번은 세무국에 도장 찍으러 갔는데 서류 하나를 빼먹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이실직고할 용기가 나지 않아 또 세무국에 담당과장이 회의 중이라 래일 오라고 한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런 일이 여러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후에는 이런 버릇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왜냐면 그런 일이 있은 날이면 상사가 현장통역으로 일부러 나를 불렀다. 그리고 현장생산을 훈계할 때 특별히 그 한마디를 강조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기계는 정직하다.” 나를 훈계한 것도 아닌데 여러번 통역을 하다보니 은근히 내 속이 찔리기 시작했다. 거짓말은 아이들이 자주한다. 잘못을 승인하면 벌을 받을가봐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새빨갛게 하는 것이다. 어려서 잘못을 그대로 받아주는 너그러운 부모 밑에서 컸다면 어른이 돼서도 잘못을 순순히 승인하고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는데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훈계를 일삼는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다행히 사회초년생으로 지낼 무렵 한국상사의 지나가는 말처럼 읊조리던 그 한마디로 인해 나는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가 있었다. 여러번 기계정직론의 통역을 담당함으로써 거짓말은 언제든지 들통이 나고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제안을 받아들이고 시정해나가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다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 어떻게 자로 잰 것 처럼 정확할 수가 있겠는가. 또 누구나 다 잘못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닐가. 이럴 때 어른이 어떻게 받아주고 이끌어주느냐가 자못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힘을 주고 받기에 서로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일을 하다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상사가 기계의 정직함을 유유히 내세우지 않고 직원들을 혼내고 목청을 높이는데만 급급했다면 기계사와 나는 아마 더 오랜 시간 거짓말로 실수의 구멍을 땜질하려 했을 것이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를 강조하면서 사람이 정직하지 않을 때가 많지 않을가 라는 커다란 의문의 뭉치를 던져주고 오랜 시간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상사가 있어 문제를 직시하고 제대로 시정할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봄바람은 꽃을 피게 하고 꽃은 바람에 향기를 얹어준다. 짧은 말 한마다, 작은 행동 하나가 한 사람을 개변시킬 수도 있다. 지금 이 말은 내가 직장에서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되였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변명을 하려다가 참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일을 고쳐서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나의 지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2020.8월호 료녕신문 발표  
49    엄마와 딸과 립스틱 댓글:  조회:569  추천:0  2020-08-10
엄마와 딸과 립스틱 김영분   원래 나는 립스틱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두 세개였다. 안방 화장대에 두개 세워놓고 나들이 가방에 하나 넣고 다녔다. 나들이 가방이라 해봐야 한번 들었다 하면  2,3년을 꾸준히 메고 다니는 메인가방이였다. 사무실 갈 때나 친구들 만날 때나 심지어 동네 잔치집에 갈 때도 바꿔 메지 않았다. 그러니 립스틱도 그 가방 속에 고히 누워 나를 잘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립스틱을 꽁무니가 나올 때까지 바르려면 무척 힘들었다. 발라도 발라도 그 자리에 빨간 쫑대가 자꾸 솟아 올라왔다. 가방 바꿔 멜 즈음에는 지겨워서 그리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류통기한이 걱정되기도 하여 시원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아무 곳에나 버렸다. 그리고 또 새로 하나 장만해서 오래오래 들고 다녔다. 헌데 우리 딸애가 중학생이 되면서 립스틱 풍년을 맞았다. 댄스학원을 다니는 딸애가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딸애는 일주일 내내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몸을 격하게 뒤흔드는 걸로 푸는지 몇 해 째 꾸준히 다니고 있다. 춤치인 나를 생각하면 티비에서나 볼 수 있는 춤들을 어떻게 내 딸이 저리 현란하게 추고 있는지 허벅지를 꼬집어 그 진가를 가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다. 청도의 12월은 송년회의 거대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풍에 우리 딸애도 12월내내 토요일이 네 번만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열번도 넘게 공연하러 다닐 번했다. 우리 딸애가 다니는 댄스학원 원장이 안면이 넓어서 꽤나 뜨르르한 단체 송년회에는 모두 초대를 받아 하이라이트로 춤 공연을 하고 있다. 그 덕에 딸애는 12월의 토요일만 되면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공연복을 할랑하게 차려 입고 겉에는 두터운 롱패딩을 얼추 걸치고 완연히 연예인인양 이 모임 저 모임의 송년회장에서 걸그룹의 한 멤버가 되여 춤사위를 선보인다. 어떤 날에는 두 타임을 출 때도 있었다. 그래서 우스개로 너 연예인처럼 바쁘구나 하면서 농을 치면 앳된 얼굴에는 간만에 어른처럼 화장을 해서 흥분한 것인지 웃음이 찰랑거린다. 그 와중에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립스틱을 한번 슬쩍 덧바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딸애가 부러울 때가 많다. 내가 초중을 다닐 때는 뻐꾸기도 왔다가 울고 갈 만큼 화장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고 생각도 못할 일이였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써야 했던 부모의 살림살이 만큼이나 마음이 곤궁했던 시절에는 반반한 옷이라도 한벌 있으면 정말 한학기 내내 입고 다녀야 할 지경이였다. 멋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그 때, 옷매무시나 화장보다는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더 절절했다. 그 소박한 품성이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 후까지 이어졌다. 녀학생으로 살 때나 녀인으로 살 때나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목표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앞으로 달릴 줄 알았지 멋부릴 줄 모르고 화장이 뒤전인 것은 둔한 호수가 좀처럼 잠에서 깨지 못하 듯 파문이 일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무드없는 몸뚱이가 아이를 둘 키우면서 옆으로  신나게 퍼져 십년 째 살 빼기에만 맹세를 거듭하였다. 뚱뚱해진 몸에 멋을 부리려니 정말 호박에 금을 그어 수박이 되려는 속셈 같았다. 멋도 없이 싱겁기만 했다. 화장도 잘 할 줄 몰라 연하게 비비크림 바르는 데까지만 하였다. 찐하게 분장하여 주위 사람 놀래우는 일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초중을 다니고 있는 딸애는 댄스공연을 시작하면서 립스틱에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립스틱으로 시작된 화장품 사재기가 이젠 제법 규모를 갖췄다. 기초화장품으로 부터 비비크림, 아이새도까지 여러개 갖췄다. 공연은 1년 중 12월에 네번 하고 나면 거의 찾는 연회자리가 없는데도 딸애의 화장품 사재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점차 댄스 학원 갈 때도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토요일 댄스학원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품을 즐비하게 늘여놓고 꼼꼼히 바르고 찍는다. 부모 눈을 피해 은밀히 하던 화장은 이젠 수면우로 피여오른 련꽃처럼 자연스럽다. 립스틱으로 곱게 마무리 하고 나서 두 입술을 아래우로 탁탁 털고는 아주 뿌듯하게 웃어보이곤 하였다. 공연을 위한 화장인지 화장을 하고 싶어 댄스를 배우는지 야릇하게 웃고 있는 딸애의 그 심보가 궁금할 지경이였다. 그러는 딸애를 나는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 초중 3학년의 힘들고 팍팍한 공부 압력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푸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지만 눈 감아주기로 했다. 멋 부리는 것도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꽤나 긴 세월 몸소 체험했다. 공부에 매진할 시기이지만 그와 동시에 연한 화장에서 느끼는 소소한 설레임을 보뚝 막 듯 막아나서기 싫었다. 딸애가 정말 아름답게 청춘을 색칠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청춘은 색바래고 수수한 흑백사진이였다면 딸애의 청춘은 풍성하고 알록달록한 채색사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튼튼한 뿌리와 흐느적 거리는 가지가 골고루 자라날 수 있는 그런 청춘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련습되고 훈련된 설레이는 마음을 품고 앞으로의 생활을 쭉 밀고 나가기를 바랬다. 살아오면서 늘 마음이 무겁고 허전했던 것 같았다. 나는 딸애의 야금야금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원인을 조금 알았다. 지치고 지루한 공부시간 외에 서툰 화장을 끝내고 나름 뽀얀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딸애의 마음에는 자신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도 사랑하는 느낌이 감출 수 없는 기침소리처럼 새여나왔다.  작은 화장으로도 설레이는 그 마음, 설레인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자주 움직인다는 것이다. 나는 잠자는 호수를 잠에서 깨워 파문을 일구고 싶었다. 덩달아 화장을 진지하게 마주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과 청춘은 너무 곤궁했던 나머지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같은 따뜻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었다. 살뜰하고 아기자기한 시간들이 련습되지 않아  주위가 늘 한산하게 비춰졌다. 시큰둥하고 궁상맞게 청춘을 걸어오면서 마음에 울타리를 치고 빗장을 질렀다. 어질게만 살았다는 것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뜻이 아니였다. 특히 멋 부리기는 녀자의 전용물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다. 아름답기 위한 길에 나도 뒤늦게나마 발 벗고 나섰다. 몸무게를 줄이려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하고 식단도 야채와 과일의 비중을 늘렸다.피부관리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 흘러간 청춘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전보다 얼굴이 많이 환해졌다. 립스틱 바르는 회수도 많아졌다. 그러고보니 립스틱도 어느새 바구니 속 매일 모으는 달걀처럼 많아졌다. 딸애가 쓰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꽤 괜찮은 립스틱들을 나에게 슬쩍 윙크를 하면서 양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어난 립스틱이 어느날 아침 문뜩 보니 일여덟개는 족히 되여 화장품 테이블우에 오밀조밀 수줍게 서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컬러를 골라가며 다채롭게 입술을 발라볼 수 있게 되였다.      립스틱을 짙게 바른 날은 왠지 신이 났다. 발걸음도 사뿐해졌다. 뻣뻣하던 근육들도 와인 한잔 걸치고 실없이 웃어대는 얼굴표정처럼 푸근하게 풀어졌다.   립스틱은 이제 문을 나서면 주머니에 꼭 넣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 되였다.그거 하나면 마음이 괜히 든든해졌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도, 회사에서 잠간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도, 운전을 하고 있는 차안에서도 나는 이젠 립스틱을 가끔 바른다.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우리 딸애처럼 흡족하게 거울을 보면서 웃어본다. 창밖의 풍경도 흐뭇하게 바라본다. 바람도 락엽도 가을편지로 보인다. 밋밋하고 슴슴한 날은 이젠 다 지난 것 같다. 그런 날에는 립스틱으로 붉게 발라줄거니까. 설레이는 이 기분,너무 좋다.
48    늙은이 쉽지 않다 댓글:  조회:928  추천:0  2020-08-10
 엄마의 년세가 점점 많아지면서 걸핏하면 “늙은이 노릇 쉽지 않다”라든지 “늙으면 죽어야 돼” 라고 넉두리를 한다.자식으로서 이런 말을 듣기가 가장 거북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꼭 꼬집듯 맞받아친다. ”엄마두 참, 이 좋은 세월에 왜 자꾸 그런 말을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의 넉두리는 깊어지는 주름만큼 점점 더 깊이 내 귀를 파고 들어왔다. 엄마는 젊어서부터 한시도 가많이 있지 못할 만큼 부지런하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어디 편히 앉아있는 걸 보지 못했다. 초가삼간 뒤 널직한 밭에는 계절에 맞춰 여러가지 채소와 과일을 심어 만풍년을 거두었고 오리며 닭이며 돼지며 마당개며 돈냥 되는 짐승은 거의 키우다싶이 했다. 앞마당에 돌덩이로 허술하게 걸어놓은 벌떡가마에는 여름이면 옥수수와 감자 등 맛난 먹거리들이 푹 익히는 줄도 모르고 탱글탱글한 얼굴들을 자랑하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이 모든 것은 엄마의 쉬지 않는 손길을 거쳐 활기를 띠고 윤기가 흐를 수 있었다. 부지런한 엄마 덕분에 어렸을 적 나는 마음껏 뛰여놀 수 있었고 원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또래에 비해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 시기 엄마의 눈빛은 형형하였다. 삶에 대한 의욕으로 터전을 영위하는 발걸음에 바람이 일 정도였다. 자식들을 따뜻하게 입히고 배불리 먹이기 위해  연약한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곤궁한 살림을 조금이나마 더 윤택하게 꾸려나가기 위해 모진 힘을 쏟았다. 하지만 가녀린 손으로 간난신고의 핸들을 아무리 돌려봤자 아버지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성질만 거칠어졌다. 살림살이는 뒤뚱이는 펭귄처럼 찬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배불리 먹는 데에만 그쳤다. 담배골초였던 아버지가 폐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엄마는 한평생 고생한 사람도 골골거리며 버티는데 뭐가 그리 급해 길을 떠났냐고 눈물을 훔치며 무거운 한숨을 지으셨다. 세월 이기는 장수가 없다고 고생을 함지로 지고 장거리를 달렸던 엄마는 기력이 약해져 병원신세를 여러번 졌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하늘의 별도 따올 것 같은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여전히 힘을 아끼지 않았다. 좀 편히 쉬라는 자식들의 말은  항상 귀전으로 흘려보냈다. 두팔을 걷어부치고 우리 집 아이 둘을 다 키워주셨고 살림을 도맡았다. 한국으로 잠간 놀러 간 사이에도 틈틈이 알바를 뛰러 다니면서 용돈벌이를 하였다. 자식들이 각자 살림을 차리고 먹고 사는 데 별 문제 없어도 늘 휴지 한톨이라도 보태주지 못해서 안달복달이였다. 그러는 사이 이젠 좀 쉬라는 엄마를 향한 나의 잔소리는 늘어가고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힘이 약해진 엄마는 내키지 않은대로 골방으로 물러앉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면서 자주 하는 말이 생겼다. 늙으면 죽어야지 늙으면 쓸 데가 없다는지 하시면서 허전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큰 일은 힘이 부쳐 이젠 엄두를 못내니 언제부터인가 소소한 일상에서 일할 기회를 찾는게 보였다.빈 병과 헌 박스 따위를 모으기에 손을 댄 것도 그 무렵이였다. . 늦게야 눈치를 채고 격하게 반대를 했지만 나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베란다구석에 모으는 것이였다. 그거 팔아서 몇푼 안된다고 집만 어지른다고 말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한푼두푼이 모여 큰 돈이 되지 너희들은 너무 랑비가 많다고 도리여 설교를 늘어놓았다. 년세가 많으니 먼 채소시장에 다니지 말고 가까운 마트에 다니라 해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래도 큰 시장에 가야 채소가 풍부하고 가격도 착하다는 것이였다. 당연히 많이 산 채소는 보관을 오래 하다보면 시들어서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의견 차이가 많아 엄마와 나는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였다. 다투면 영낙없이 늙은이 무용론이 등장했다.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말은 비수처럼 나의 마음을 찔렀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좋겠건만 병약해지고 서러움이 많아져서인지 엄마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만 하면 늙은이 무용론으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늙고 기운이 빠져 왜소해진 엄마는 왕년의 어글어글다던 눈빛을 잃었다. 광야를 달리던 승냥이가 숲을 잃은 듯 자신의 무기력함을 언짢게 여기셨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남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는 엄마는 여러가지 질병으로 몸이 힘든 것보다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부담이 된다는 자체를 용서할 수 없는 듯 했다.     아둔한 딸은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엄마 속을 어지간히 긁어 놓고서야 엄마가 왜 그토록 바삐 살고 싶어 했는지를 알아차렸다. 늙은이 무용론이 나에게 죽도록 듣기 싫은 말이였다면 엄마는 내가 편히 쉬라고 하는 말이 받아들이기 힘들게 섭섭함으로 들렸을 게 틀림없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해 온 분이 갑자기 그 행복의 원천인 섬김의 권력을 통째로 빼앗겼으니 그 마음은 오죽했을가.    종종 페품수거 할아버지들에게 집에 모아둔 폐품을 팔 때면 허리를 쭉 펴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해지는 엄마를 발견한다. 아침에 시장에 간다는 말을 하고 문을 나설 때면 다시 바지가랭이에서 삶에 대한 의욕의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그 때,엄마의 눈빛은 다시 빛을 뿌린다. 편히 쉬게 하고 싶은 효도의 마음에 엄마를 오해하고 힘들게 했던 나 자신을 성찰해본다.  누구나 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 한다.몸은 늙어도 마음은 파랗게 젊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판단으로 꺼꾸로 된 효도를 할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오래 오래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게 엄마에게 아주 작은 부탁이라도 자주 건네야겠다. 엄마의 형형한 눈빛이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47    작은 새, 높이 날다 댓글:  조회:624  추천:1  2020-07-31
 수필   작은 새, 높이 날다 김영분     올해 설휴가를 리용해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패키지관광을 갔었다. 팀원들은 여러 가족이 모여 거의 스무명 정도 되였는데 우리 가족만 조선족이고 모두 산동 각 지역 한족들이였다. 중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긴긴 일주일을 한족들과 지척에 두고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기는 처음이였다. 가이드가 공항에서 출발 전에 인원체크를 할 때부터 나는 부자연스러운  묘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려행을 앞두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요란한 중국말로 수다를 떠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식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함구하고 있었다. 어려서 학교를 다닐 때 한족들에게 꼬리빵즈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고 위협당하기도 하면서 자라서 그런지 어른이 되여서도 주위 한족들과 성큼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성격이 소심한 나는 굳이 그룹 내에서 내가 다름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 민족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간단히 요점을 잡아 알려줄 수는 있었으나 먼저 묻기 전에 적극적으로 홍보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바램은 종이에 불을 감싼 것 처럼 오래 가지 못했다. 우리 비행기는 한국 부산을 경유해서 일본 오사카로 가는 중이였다. 부산공항에서 환승을 위해 잠간 대기실을 리용했는데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팀원들이 핫도그를 사기 위해 진땀을 빼는 것을 보고 그만 아주 자연스레 통역을 해줬다. 그 바람에 그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팀원 중에서 제일 첫 사람으로 의문의 눈길을 보내왔다. 어떻게 한국말을 할 줄 아냐면서 물어왔다. 긴 설명을 할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 넘기기 힘든 음식을 입에 물은 듯 애매한 상황이 온 것이다. 침묵은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미소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던가. 나의 의미심장하고 친절한 미소 앞에  그녀도 종당에는 애매모호한 웃음으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은 의문의 가족을 만난 그녀는 아리송한 퀴즈를 열심히 푸는 진지한 학생처럼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녀의 궁금증을 싣고 비행기는 다시 오사카로 붕하니 떴다. 팀원들이 강냉이 알 처럼 고루고루 둘러 앉은 비행기에 착석한 그녀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주위 팀원들에게 우리 가족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으로 우리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라는 신분을 허무하게 들키우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해서 또한번 자신을 로출하는 사건이 생겼다. 오사카 공항에 내려 호텔로 이동하는 관광뻐스 안에서 가이드가 래일 하루는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각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다녀오라고 했다. 공항에 내려서 부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일본말에 포위된  팀원들은 자신만만하게 열변을 토하던 중국공항에서의 들뜬 모습과는 전혀 달리 비 맞은 장닭처럼 걱정스러운 한숨만 푸푸 내쉬였다.  엄마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리유로 중학생인 우리 애 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다투어 유니버셜 스튜디오 (环球影城) 로 놀러 가자고 입을 모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를 테마로 한 롤로코스터(过山车)를 포함한 탈 것과 뮤지컬 쇼, 영화 속 유명한 케릭터 매장 등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하게 할리우드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한 테마파크이다. 옆자리에 앉았던 신혼부부는 일본어가 조금 통한다는 우리의 말을 듣고 자기네도 덩달아 같이 가겠다고 합류했다. 이튿날, 아침을 일찍 먹고 로비에서 신혼부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뜻밖에도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되였는지 두 가족이 더 늘어났다. 부럽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오늘 하루는 나만 믿고 다니겠다고 철썩 같이 따라붙었다. 한국말도 자유자재로 하더니 일본말도 할 줄 아냐고 정말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타국에서 나를 의지하고 믿어주는 팬이 생겨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으쓱하기까지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두 다리는 지칠 줄 모르는 듯 열심히 안내를 했다. 길을 묻고 지하철 승차권을 사고 편의점을 리용하는 등 가벼운 일본말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합류한 팀원들은 입을 하 벌리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덕분에 일본어 안내를 받아 헤매지 않고 잘 놀 수 있었다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중학교 때 배워둔 일본어를 직장생활을 하면서 쥐꼬리만큼 더 보완을 한 것이 크게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였다. 나한테는 그냥 자기손을 잡는 것처럼 쉬운 일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갑작스레 벼랑을 마주한 것만큼 당황하고 두렵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의 작은 재주가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이틀 동안의 거침없고 친절한 통역으로 팀원들 사이에서 우리 가족은 이미 스타가 되였다. 로출을 꺼려했던 초심과 달리 도리여 더 거창하게 드러난 것이다. 거대한 중국에서 살면서 숲 속의 작은 풀처럼 조용히 묻혀 살아왔지만 일본이라는 외국 땅에서 어여쁜 꽃으로 피여나 주위에 향기를 퍼뜨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의 언어우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려행 3일째가 되자 일행은 교토에 있는 청수사(清水寺)를 둘러보게 되였다. 깍아지른 절벽을 따라 주홍색 의포단장을 한 사찰들이 뉘엿뉘엿 포개져 서있는 모습이 멀리 떠난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 말수 적은 아버지를 방불케 했다. 사찰 주위 올리막 길을 따라 선물가게들이 줄느런히 늘어져 려행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알락달락한 색감을 머금고 빙그레 웃고 있는 눈섭처럼 펼쳐진 화려한 부채가게 앞에서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있던 파뿌리 처럼 흰 머리를 하고 있는 일본  할아버지가 안경을 추스르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한국말을 할 줄 아냐고 눈을 껌뻑이며 연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히 부탁을 하나 해야겠다고 했다. 좀전에 가게에서 물건을 산 한국사람이 려권을 놔두고 갔으니 스피커로 한국어 방송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삽시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국어를 하는 일은 쉬웠으나 세계 각지의 려행객들이 붐비는 관광지의 가게 앞에서 안내방송을 해야 한다니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을 했다. 우리 아이들과 주위 팀원들의 기대와 관심 쏠린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스피커를 들었다. 그리고 티비에 나오는 아나운서처럼 또밖또박 려권에 적혀있는 이름의 주인공을 부채가게에서 찾고 있다고 여러번을 반복해서 방송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학생 네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타깝게 찾고 있던 려권을 찾았다고 좋아라 퐁당퐁당 뛰였다. 방학을 맞이해 넷이서 배낭려행을 왔는데 하마트면 려권분실로 귀국에 어려움을 겪을 번 했다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머나먼 외국 땅에서 내가 한국학생들을 크게 도울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중일한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나를 보고 한국학생 넷은 정말 멋지다고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여태 이토록 나를 흠모하는 눈빛은 처음이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 땅에서 나를 기대 이상으로 반겨주고 고마워하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은 긍지감으로 흠씬 물들었다. 평범한 일개의 조선족 아주머니가 며칠 동안 해외려행에서 받은 찬사와 부러움은 천년 묵은 나무의 둘레만큼이나 손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오래 동안 시큰둥하게 항구에서 미적거리던 보잘것 없던 배가  바다를 가로 지르는  무적함대가 된 느낌이였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면서 항상 약자라고 생각하였다. 마음 열고 한족들에게 다가가지도 않았고 혼자 선을 긋고 보이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줄세우고 편 가르기에 급급했다. 근년에 한국으로 밀물처럼 흘러들어간 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의 첨예한 모순이 빈번히 이슈로 부상하면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지만 무언의 거리감을 피부로 느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가시들을 내세웠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름 원활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해외려행에서 받았던 감사한 눈빛들은 어느새 나의 가시들을 모두 녹여버렸다. 비록 소수에 속하는 약자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한 우세를 움켜쥐고 있었다. 조선족이였기에 가능했던 쉬운 일들이 다른 사람에겐 그토록 넘기 힘든 산이였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작은 재주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큰 재부였고 또 상상이상으로 큰 도움이 되였다니 참말로 아이러니 하였다. 작은 새지만 높이 날았다. 작은 풀이였지만 나름 향기가 그윽하게 주위를 메웠다. 평범한 주부였지만 멋진 엄마로 자리매김하게에 손색이 없었다. 큰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을 활용하고 열심히 자신의 힘을 키워야 대우를 받는다. 사막에서 피는 꽃은 더워도 말이 없다. 그래도 차분히 모래밑으로 부지런히 뿌리를 뻗어가며 꽃을 피워 사막을 지킨다. 종당에는 지구를 지키는 일에 큰 역할을 한다.  
46    생각의 오십견 댓글:  조회:471  추천:0  2020-07-31
수필 생각의 오십견 김영분   지인과 담소를 나누다가 재미있는 화제를 두고 옴니암니 쟁론하게 되였다. 말하자면 같은 동네에 있는 가게에서 콩나물국밥은 35원에 팔고 돼지국밥은 30원에 팔려 그 리유가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얼핏 보기에는 돼지국밥에 고기가 많이 들어가니 당연히 고기국밥이 더 비싸야 맞는데 웬 일로 집에서 스스로 키워서 먹을 수도 있을 만큼 흔한 콩나물국이 더 비싸야 하는지 한참을 토론했다. 고기가 야채보다 비싸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온 터라 화두가 던져지니 제법 토론거리가 되였다. 당연히 흐지부지한 추측과 어정쩡한 계산으로 야무진 답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아마도 가게의 인테리어와 딸려나오는 밑반찬의 가지수 등이 원인이지 않을가 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결론을 지었다. 어렸을 때 고기가 귀하고 비싼 환경에서 살아온 나는 고기가 야채보다 비싸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설날이 돼야 고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먹고 싶으면 당장 먹어야 하는 본능으로 충만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냥 참아야 했다. 몸이 더디게 크는 내내 군이 뚝 떨어지게 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고기는 비싸고 귀하다는 그림이 마음 깊은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고기 먹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푸드조리법이나 가게 인테리어 등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료리의 값이 결정된다. 건강식을 많이 찾는 현대인들의 콩류 음식에 대한 애착도 콩나물국밥의 몸값에 일조를 한다고 본다. 콩은 대표적인 식물성 단백질인만큼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고 불리우니말이다. 그러다보니 야채료리도 고기료리보다 가격이 비싼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나만의 주관적 판단이다. 간판의 지명도나 브랜드의 가치 등 우리가 모르는 어떤 데이터가 또 있을 것이다. 잘 모르기에 아는 만큼 상상을 발휘하여 병주고 약주듯 혼자 그럴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말 못하는 콩나물국밥을 분석하고 평가했기에 주관이냐 객관이냐 나를 향해 따질 일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주관적 판단이 주위사람이나 사물을 향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잘못되였다 하기보다는 알고 있는 만큼 편협할 수 있다. 그러면 평가를 마음대로 내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친구사이가 비틀어지거나 비난을 받아야 한다. 이런 도리를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번의 시행착오와 부딪침을 겪은 후나도 지극히 주관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주관은 말 그대로 자기의 견해나 관점을 기초로 사물을 본다는 말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나 살아왔던 경험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많은 일들을 대한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몸에 알레르기가 나는 것처럼 방어나 공격태세를 갖추게 된다. 왜 나를 리해해주려 하지 않는지 하는 원망까지 생긴다. 자신의 성격이 느리기에 급한 사람을 보면 숨이 차는 것 같아 불편하고 아울러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에 시끄러운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힘에 버거워서 여태 피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지내보니 성격이 급한 사람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고 흥성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하고 열정적이여서 남을 잘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마흔의 고개도 이제 다 지나갈 나이가 되여보니 생각지도 않은 오십견이 찾아와 왼쪽 어깨가 여간 아프지 않다. 뒤로 돌리거나 우로 쳐들기가 쉽지 않다. 머리를 감거나 빗을 때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잠을 자다가도 잘못 뒤치락거렸다가는 아픈 어깨 때문에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여날 때도 있다. 오십세 좌우에 나타나는 흔한 질병이라고 하는데 오랜 생활습관으로 인해 어깨관절이 유착되면서 염증을 일으켜 관절운동을 제한하고 통증을 유발한다. 우리의 몸에 배인 고유한 성격도 오랜 시간 주인과 밀착관계를 가진다. 생각이 경직되고 자기주관에 자주 빠져있다보면 생각근육에 유착이 생겨 염증이 생기기 쉽다. 그러다보면 자기생각을 고집하게 되고 시야가 좁아진다. 콩나물국밥은 왜 돼지국밥보다 비싸야 하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자기만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생각의 오십견이 온 것이다. 맏이 선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는데 언니가 먼저 경제적으로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구들 모두 언니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갓 사회에 나온 녀동생은 이에 불만을 품고 여러 번 가족모임에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밀어준 만큼 맏이가 로후를 책임지기 바라는 엄마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녀동생은 많은 면에서 언니에게 양보하거나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화목한 가정질서를 유지하기는 커녕 언니와 동생이 등을 돌리고 엄마도 그 사이에서 전전긍긍하게 되였다. 엄마는 자신의 부모세대의 교육방법을 그대로 답습을 했고 자신도 그렇게 행해 왔기에 그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마인드가 많이 바뀐 자녀세대는 받아들일 수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였다. 이 시점에서 나도 많이 반성을 해본다.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애들에게 여러가지를 강요하고 그에 응하지 않을 때는 화도 많이 냈었다. 주위사람들을 바라볼 때 나와 다르면 다가서기를 주춤했고 협력관계도 주저없이 중지시켰던 적이 있었다. 한손가락이 남을 향할 때 네 손가락은 자기를 향했기 때문에 자신도 많은 손해를 본 것 같다. 오십견을 치료하기 위해 침구도 맞아봤고 약도 먹어봤다. 그래도 뚜렷하게 효험을 보지 못했다. 도리여 집에서 혼자 하는 맞춤 률동과 체조가 큰 도움이 되였다. 어깨를 들썩거려주기도 하고 앞뒤로 절주있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중요한 팁이라면 매일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거였다. 체조를 하루만 열심히 하고 사흘 땡땡이를 칠 때는 간간이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또 아프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도 잠시 하는 것 보다는 꾸준히 지켜가다보면 생각근육의 유착도 풀리지 않을가 싶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자기관점을 강요하는 주관적동기도 썩둑 잘라 없어질 것이다. 더 느슨하고 객관적인 마인드로 거듭 날 것이다. 주관이란 다시 풀이해보면 내 것만 좋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생각이 바뀌려면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알아차리면 절반은 개선된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상대방을 받아들이기도 쉽다. 몸에 찾아온 오십견은 꾸준한 체조를 통해 치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생각근육의 유착을 풀어주다 보면 나에게 찾아온 생각의 오십견 역시 스스로 교정되지 않을가.
45    비 오는 날이 장날이다 댓글:  조회:658  추천:2  2020-05-07
 비가 온다.   봄비가 주룩주룩 쉬지 않고 내린다. 메말랐던 도로변 록화지대도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가벼운 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쉽게 몸서리를 치던 먼지들은 떼를 지어 정처없이 하수도로 흘러들어간다.    제법 당찬 비방울들이 건물 주차장에 주차되여있는 승용차들을 두드린다. 차지붕 우에는 잔잔한 비방울들이 뛰여내렸다가 다시 튀여오르고 차창에는 비련의 소녀마냥 구슬픈 눈물이 흐른다.   어느새 위챗 모멘트에는 지지미와 막걸리가 곁들여진 따뜻한 온돌방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져 올라와있다. 양고기 식당을 하는 사장님의 고기를 삶느라 하얀 김을 내뿜는 부뚜막도 버젓이 등장했다. 비소리가 투닥거리는 칙칙한 사무실에 앉아 위챗 모멘트를 보고 있노라니 뜨끈뜨끈한 무언가를 위 속에 집어넣고 싶어진다.   비가 온다.    몸은 사무실 책상에 기댔어도 일할 생각은 비방울을 따라 땅 밑으로 잦아든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는데 정작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언의 심란한 기분이 슬슬 마음 한구석에 돗자리를 펴고 있다. 리성의 뇌는 잠시 쉬겠노라 파업에 들어갔고 착잡한 감성의 돌기들이 봄에 톡톡 터지는 꽃망울들이 되여 당장 바깥세상으로 터져나갈 태세를 취하고 있다.    나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주차장에서 쓸쓸히 비를 맞고 있는 승용차께로 잰걸음을 옮겼다.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어딘가로 가서 누군가와 애잔하게 만나고 싶다. 마음속의 채워지지 않는 어떠한 것들을 털어내며 슬픈 사연들을 따뜻한 커피 한잔에 풀어 나눠 마시고 싶은 충동이 봄비에 머리를 쳐드는 새싹처럼 촐싹거린다.    바로 이 때, 세차게 떨어지는 비방울을 인 까만 작업복을 입은 배달원이 무거운 상자를 부여잡고 사무실에 성큼 들어섰다. 물건이 비에 젖을가 봐 옷섶을 젖히면서 감싸고 까치발로 뛰는 모습이 꼭 마치 아이를 안은 것 같았다.    움츠린 어깨와 달리 비를 피해 뛰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경쾌하다. 무언가에 쫓기우는듯 흥분에 떠는 숨소리가 괴괴하던 사무실 전체에 퍼진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만긱할 수 있는, 즐거움이 묻어나는 약간은 들뜬 얼굴이다. 찬 공기에 파랗게 얼어든 코끝에 땀방울인지 비물인지 대롱대롱 매달려 이겼노라 뽐내고 있다.       그 배달원은 사무실에 들어서서는 미처 갈 곳이 파악 안되는지 잠시 멈추더니 머리 우에 머물러있던 비방울들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걱정거리가 있는듯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업무원을 향해 다가가더니 행여나 비방울에 테블이 젖을가 봐 그와 한메터 간격을 두고 말을 걸었다.    갑자기 업무원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비로 인해 지연 통보를 받은 물품이 제시간에 배달되였던 것이다. 시름이 서렸던 그녀의 얼굴은 삽시에 얼었던 매화가 피여나듯 하였다. 이번 달 업무를 순리롭게 완성하고 승진표까지 거머쥔 것이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몇배는 더 즐거운지 연신 배달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열성적인 배달원은 오늘 배달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며 매우 뿌듯해하였다.    그렇게 배달원은 문을 나서며 씨익 웃고는 또 비 속으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씩씩하게 뛰여나갔다. 까치발을 한 채 두 손은 머리를 감싸고 말이다. 그래도 비방울은 사정없이 그의 넙적한 등짝에 내리꽂힌다. 행복을 배달한다고 확신하는 까치발이 잽싸게 떠나간 자리에는 하얀 물보라가 살짝 일었다.    ‘우산 좀 쓰고 다니지.’ 관심해주고 싶은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핀잔이 불현듯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비 속을 가르며 뛰는 택배원의 앞에서 아련히 몰려오던 커피 비위는 선잠을 깬 아이가 눈을 비비듯 부시시 부끄럽게 흩어져버린다.   “딩동” 하고 문자가 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오빠다.    “오늘 여기는 큰비가 내리고 있다. 그래서 어쩌다가 쉬게 되였다. 쉬는 날에 가족들이랑 맛 있는 거 해먹으려 했는데 오늘 웬 일이냐. 시장이 장날이다. 모처럼 우산 쓰고 장을 푸짐히 봐서 지금 추어탕 보글보글 끓이고 있다. 참 타이밍이 잘 맞춰진 좋은 날이다.”   문자 밑에는 어김없이 사진 한장이 추가되였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추어탕이 가스불 우에서 보글거리고 있다. 기분이 지화자 둥둥인가 보다.   그 때 내 눈앞에는 사시장철 세멘트와 철근 사이를 전전하는 거쿨진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독한 해빛에 그을려 구리빛을 띤 얼굴, 그리고 얼굴보다 더 검은 두터운 목, 항상 무거운 짐을 들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 탄탄한 두 팔, 두 손은 알이 박혀 투박하기로 길가에 옹이 박힌 나무를 련상케 했다.      오빠는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라 할 수 있게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생면부지인 사람들의 집을 짓느라 정작 자신의 집은 비 올 때에만 느긋하게 오래 머문다. 일년 사시절 건설현장에서 땡볕 세례를 받는 오빠에게는 비 오는 날이 꽤 기대되고 고마운 날일 수도 있다. 비가 오는 날은 동업자들이 다 일을 나갈 수 없기에 혼자만 뒤떨어진다는 조바심이 없이 편안히 집에서 쉴 수 있어서 좋은 모양이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보잘것없는 인생이여도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고 또 쉬는 날이 면바로 장날이여서 기분이 째지게 좋은 오빠가 가슴 한가득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그 즐거움이 비소리를 따라 스멀스멀 나에게로 전달되였다.    비가 온다.   게다가 비가 오는 날이 장날이다. 급한 물건을 배달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배로 받은  배달원도, 지연되였다고 생각한 물품을 제때에 배달 받아 승진표를 거머쥐게 된 업무원도 덤으로 행복을 선물 받아 행복해한다. 비 오는 날을 빌어 가족들과 같이 맛 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오빠는 또 얼마나 행복할가.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치면 앞으로도 줄곧 불행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태풍이 휩쓸고 지난 과일농장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사과에 ‘떨어지지 않는 사과’라는 이름표를 붙여 판매하여 큰 수익을 얻은 사례도 있다. 이 사례는 넘어진 자리에서 어디까지나 다시 일어설 긍정적인 기량과 기회가 숨어있다는 도리를 알려주고 있다.       비가 온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소리가 또다시 고막을 자극한다. 그 소리에 이젠 몽롱하게 현실을 회피하고저 커피 타령이나 하던 정신줄은 다림질을 한 바지처럼 곧바르게 펴졌다. 부글거리던 커피 감성은 김 빠진 맥주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글이 나오지 않아서 괴롭다고 호소하던 나, 애 문제로 선생님 호출이 있어 속상해하던 나, 운영하는 회사에 여러 분야의 간섭이 지나치게 많이 쏠린다고 불평하던 나,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냐고 실의감에 모대기던 나, 심지어 세상을 다 깨달은듯 무관심으로 주위에 무뚝뚝했던 나… 참으로 부끄럽게 다가왔다. 다리 잃은 사람 앞에서 신발이 없다고 투정하는 엄살쟁이처럼 보였다.   나에게 어두웠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은 그저 단순한 그늘이 아니였다. 그늘 안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쉬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 덕에 글 잘 쓰려고 항상 좋은 글귀들을 부지런히 모아두는 습관이 생겼고 아이와의 갈등을 해결하고저 청소년 상담사가 되였다. 회사 관계부문과 많이 접촉한 덕에 의외로 혜택정책을 많이 알게 되였고 주위에 무관심한 듯한 생활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골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순간들도 보따리에 싼 이야기처럼 풀어놓고 보면 많고도 많은데 족집게처럼 서글픈 기억만 고집하려 한 자신이 한심해난다. 그리고 그게 다 부지런히 제갈길 가는 비의 탓인 양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지 않았던가. 비와 커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기 죽지 말아야겠다. 비 오는 날이 장날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 비가 그치면 불평, 불만에 젖었던 내 마음을 해살에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기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들어야겠다.    (연변녀성 2020년 3월호에 실림)
44    주차장 일화 댓글:  조회:801  추천:2  2020-03-19
수필   주차장 일화  김영분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주차를 해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접하는 일상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이 작은 변두리도시에 차량이 붐비지 않았다. 마트를 가든 은행을 가든 상가 앞 주차장에 흔하게 널린 것이 주차장이였던 것 같았다. 혹여 일이 있어 차를 상가 앞에 며칠을 세워놓아도 누구 하나 차를 치우라고 독촉하지 않았다.마치 마당에서 뛰여노는 남집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 덤덤한 표정이였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주차가 많이 어려워졌다. 차량들이 도로를 메울 정도로 불어났지만 주차장 수자는 늘어나지 않고 마른 우물에 빠진 청개구리처럼 매일 제자리에서 폴짝거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비좁은 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들여놓고는 정교한 카드에 전화번호를 적어 앞유리에 끼워두어 혹시 모를 차량 이동 호출에 응해야 했다. 원치 않게 남의 길을 가로막고  불량주차를 잠간 했을 때는 차주인이 시커먼 얼굴을 하고 찾아와  호통을 칠 것 같아 용건을 보는 내내 송구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였다. 누구 앞을 막고 있다는 것은 아주 가슴 졸이는 일이였다. 도시의 발전속도만큼이나 후끈 달아오른 사람들의 괴퍅한 정서와 팍팍한 일상에서 몰려오는 좌절감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마음대로 자신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는 분노로 순간적으로 끓어오를 수 있기때문이다. 어느 해 북경에서는 유모차를 밀고가던 젊은 엄마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제때에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고 기사가 펄펄 뛰면서 다짜고짜 차에서 내려 갓난아이를 내동댕이 쳤다지 않는가. 순간의 분노가  두 가정을 비극으로 몰고갔다. 우리는 흔히 자식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말하지만 핸드폰이나 차량도 그 레벨에 못지 않을 정도로 애틋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차량을 막아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앞길을 막았다고 순간적으로 불쾌하게 느낀다. 만약 그 차주인이 분노조절에 약한 사람이라면 시비가 제법 붙을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불량주차를 해야 하는게 도시의 주차상황이다. 주차때문에 이웃지간에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한번은 밤 늦게 집에 갔더니 아빠트 주차장이 꽉 찼다. 보조도로에도 바싹바싹 붙여 바둑알처럼 조론히 빈틈없이 서있었다. 주위를 여러번 돌면서 견주어보아도 주차자리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어서 신발을 팔고 있는 가게앞에 전화번호카드를 앞유리에 잘 보이게 붙이고 아침 일찍 차를 빼리라 다짐을 하면서 주차를 했다. 고맙게도 이튿날 아침까지 차량 이동 호출은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차를 운전해서 절레절레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가 웃으면서 왜 뒤편에 차량번호판이 끊어졌냐고 웃으면서 물어온다. 그럴리가 하면서 나가 보니 정말 차량번호판이 절반만 외롭게 걸려있었다. 차량번호판은 꽤나 든든한 것이기에 혼자 닳아서 끊어졌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화가 욱하고 났지만 누가 끊어놓았는지 확실히 보지 못했기에 궁시렁거리기만 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신나게 운전을 하고 회사까지 다그쳐온 것을 생각하니 한편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번호판 없이 돌아다니다가 벌금에라도 걸리면 손해가 더 생기니 부랴부랴 새 번호판 신청에 들어갔다. 그런데 며칠 후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나갔는데 그 신발가게 앞에서 다른 차량주인이 멀쩡하던 번호판이 끊어졌다면서 아빠트 경비와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것을 보게 되였다. 아침 일찍이라 가게 주인은 없었지만 차주인은 이건 분명히 가게앞 주차에 대한 보복이라고 따지고 있었다. 이웃 사이에 너무 매정하다고 투덜거리면서 장사가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고 악담도 빼놓지 않았다. 순간 나도 죄없이 끊어진 번호판이 오버랩되면서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게앞에 주차하여 생긴 불미스런 일은 모두 차주책임이다”라는  붉은 글씨가 “어서오세요” 라는 환영문구와 나란히 붙어 있어 꽤나 익살스럽기까지 하였다. 그 후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한번도 그 가게 근처로 다가가지 않았다. 식구들에게도 단도리를 하여 에돌아 다니게 하였고 그 집 물건을 사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나만 그랬을 리는 없다. 번호판 끊어졌던 사람들은 아마도 다 그랬을 것이다. 얼마 안 지나 그 가게는 정산을 하고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되 기분이 나빠서 이웃들의 주차에 분노를 터뜨렸던 것인지 번호판이 실없이 자주 끊어져 장사가 내리막 길을 걸은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주차로 인한 아이러니한 사건이 주변에 또 하나 있다. 사무실이 복합아파트단지에 있는지라 1층은 거의 상가들이다. 갓 이사왔을 때는 출입이 자유로워 먼저 온 사람이 주차 자리를 차지하기였다. 성냥갑처럼 차곡차곡 높게 포개져있는 건물은 차량 수자에 비해  지상주차장은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1층은 식당들이 많았는데 한 식당은 사람들이 자기네 가게 앞 주차장에 주차하기 바쁘게 직원이 쪼르르 달려나와 여기 세우면 안된다고 손을 훼이훼이 저었다. 우리가 바로 우층에 이웃이라고 해도 에누리가 없었다. 여러 번 저지를 당하고 나니 자연히 입이 쓰거워나서  멀찌감치 차를 세우게 되였다. 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주차장을 전세냈냐고 같이 떠드는 업주들도 있었다. 웃층에 사는 사람들은 주차할 자격도 없냐고 기어코 세우고야 말겠다고 시비를 가르다가 휙하니 일보러 갔다가는 큰 랑패를 보기가 일쑤였다. 떠나갈 때 보면 차 유리에 “차 잘 세웠다!”라는 엄지를 거꾸로 치켜든 커다란 스티커를 고약하게 붙여놓기 때문이다. 식당에 들어가서 따지면 자기네는 모르는 일이라고 재갈 물은 듯 딱 잡아뗀다. 이런 경험을 아빠트내의 이웃들이 여러번 경험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서로 입소문을 내다보니 될 수 있으면 그 집 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말이 말을 탄 듯 빨리 퍼져 많은 이웃들이 온역을 피하 듯 에돌아 다녔다. 무언의 보이콧불매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식당은 주차자리를 많이 보유하고자 말뚝까지 버젓이 세워놓았다. 외부에서 밥 먹으러 오는 손님들한테만 그 말뚝을 상냥스레 치워주었다. 웃층에서 일하고 있는 회사원들은 아마 밥도 안먹고 식당놀이도 안하는 사람으로 취급한 모양이다. 아니면 한동네 사람들 돈보다는 의리있게 외부사람들 돈주머니를 겨냥하자는 갸륵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업주들이 점점 더 많이 입주하면서 주차장은 고도로 포화가 되여 관리실에서 전자출입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였다. 지하주차장을 리용해 주차카드를 발급하고 지상은 림시주차비를 받게 되였다. 그러자 무료로 주차하던 차들이 물러가고 업주들만 주차장을 사용하게 되여 주차장이 여유가 있게 되였다. 말뚝도 소용이 없게 되였다. 말뚝을 세워놓지 않아도 주차장이 많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여 외부손님들이 오면 주차를 안내하며 말뚝을 부지런히 치우는가 싶더니  주차장이 남아돌아 말뚝이 쓸모없게 되여 치워버려서 그런지 차츰차츰 외부차량도 와서 주차하는 것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 식당앞 주차장은 나날이 휑뎅그렁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무렵 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웃들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는 마인드로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은 그 가게에서 어떤 맛의 음식을 먹으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차를 세운다고 이웃들에게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던 식당주인이 영업전략이 바뀌였는지 급기야 업주그룹에 연신 식당광고를 하는 것이였다. 그러는 가게 사장이 닭을 쫓다가 지붕우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우스꽝스러웠다. 먼 친척보다 낫다고 하는 가까운 이웃들을 한동안 주차문제로 마음 다 시려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호들갑을 떤 들 마음에 쉰내가 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곳으로 가서 먹겠는가. 주차문제는 공간다툼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 가짐이기도 하다. 빠듯한 자원을 적당히 같이 나눠 쓸 줄 아는 지혜를 지녔더라면 신발판매나 식당장사에 훨씬 유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잠시 주차를 하게 했더라면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이웃들이 그 고마움에 자연히 그 집 가게를 드나들었을 것이 아닌가.  나눔과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은 잔잔한 바다가 여러갈래의  강물을 품어주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꽃을 심으면 꽃이 피고 나무를 심으면 나무가 자라난다. 주차장도 땅우에 만들어졌다. 땅의 정직한 속성을 가졌다. 나쁜 마음을 심으니 나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주차를 하고 대가를 치르고 피해도 봤던 사람들은 아마도 조심스레 주차하느라 오늘도 안깐힘을 쓰면서 살겠지만 닫혀진 가게문과 외면한 이웃들을 쓸쓸히 바라봐야 하는 가게주들은 어찌하고 있을가. 정녕 누가 더 큰 피해자일가. 떠난 배를 돌려세우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게 사람마음이라 했거늘 마음을 얻은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땅의 정직을 배워 너그럽고 부드럽고 자상해야 한다.아니면 주차장도 분노한다. 그러면 당신의 생계는 물론 삶마저 징벌을 받아 만신창이 될지도 모른다.
‹처음  이전 1 2 3 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