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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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시간만큼
2018년 02월 08일 10시 53분  조회:1441  추천:1  작성자: 하얀 진주
수필
기다리는 시간만큼
김영분
 
     한때 아파트 뒤편에 있는 탁 트인 정부청사 공원에서 아침걷기 운동을 하면서 늘 마주치던 모녀가 있었다. 엄마는 단발머리에 왜소한 체격인 반면 열살 남짓한 딸은 몸집이 비대한 지적 장애인이였다. 아이의 눈길은 거슴츠레했고 약간 비뚠 입에는 항상 타액이 지저분하게 발려 어른거렸다.
     
    그들은 항상 엄마가 앞장서고 딸이 뒤에서 열심히 두 팔을 흔들면서 따라 걸었다. 무엇이 좋은지 흐흐흐 하면서 웃기만 했는데 가뜩이나 비뚠 입이 눈과 함께 더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니 정말이지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그러나 뒤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앞에서 걷는 엄마의 지친 얼굴은 금세 흐뭇해진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서 기특한 나머지 가녀린 손으로 침을 닦아준다.
그 후, 아파트 앞쪽으로 더 크고 쾌적한 도심속 삼림공원이 생겨 나는 새 공원으로 옮겨 운동을 시작하면서 꽤 오래동안 모녀를 만나지 못했고 내 기억속에서도 그녀들의 모습은 점차 잊혀져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문득 예전에 운동하던 공원으로 한번 가보고 싶어져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채살처럼 쫙 펼쳐진 정부청사 공원에는 여전히 익숙한 얼굴들이 부지런히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사람의 모습도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더 왜소해졌고 딸은 몸집이 더 커져서 웬만한 남자성인과도 견줄만 했다. 그들은 여전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딸은 여전히 천진하게 웃으며 엄마 뒤를 따랐고 엄마는 변함없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뒤돌아보며 침을 닦아주군 하였다.
   
    그동안 계절도 여러번 바뀌였지만 두 모녀의 행색은 변함 없었다. 엄마의 인내와 믿음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기다림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솟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과 배려가 나에게는 있었던가?나는 얼마나 나의 아이들을 위해 기다려주는 시간을 감내했던가?아이가 서툴어서 실수를 저지를 때도,내 도움이 필요해 울먹일 때도 곱지 않은 목소리로 훈육을 하기에 급급했다.
“너 숙제 빨리 하지 못해!”
“너 옷 정리 정말 제대로 안 할거야!”

    어느새 아이들은 훌쩍 커져버렸고 얼굴에 항상 천진한 웃음을 닮고 엄마 곁을 맴돌던 꼬맹이가 아니였다.이젠 되려 저희들이 이 엄마의 간섭을 싫어하는 나이가 됐다.아이들 얼굴에 묻어있는 귀찮은 기색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던가.
바다가 다 마르고 바위가 부서질 때까지(海枯石烂) 당신을 기다린다. 그러는 사이 꽃잎이 다 말라버렸다(等你等到花儿也谢了)는 애절한 절규에 가까운 노래가사가 있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돌아올 때까지 한눈 팔지 않고 그대로 돌이  되여 기다리겠다는 맹세로 들린다. 죽도록 사랑하면 상황이 얼마나 어려울지라도, 시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리고 싶은 것이 참사랑의 마음이다.

    이 또한 달리 해석하면 기다리는 시간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뜨거운 련애를 거쳐 결혼한 부부지만 오래 살다보면 작은 일에도 기다려줄 수 없는 사이가 되여버리기 쉽다. 둘이 가뭄에 콩 나듯 간만에 데이트 시간을 가졌지만 만나기로 예정한 시간이 5분만 지나도 “아 정말 왜 이렇게 늦어. 확 가버린다 그냥.”하면서 전화를 날려본 남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이끌기에 바쁜 분이였다. 딸집에 와서도 어머니는 바삐 출근하는 딸을 위해 기꺼이 살림을 도맡아 하신다. 두 눈이 어두워지고 풍습에 손마디가 저려서 걸레질이 매끄럽지가 않을 때가 많다. 가끔 숟가락에 고추가루가 묻어 나오면 그때마다 주저없이 “엄마. 이것 좀 봐. ”하면서 그 자리에서  면박을 준 적도 있다.
좀 더 현명한 딸이였다면 어린 시절 한낱 사랑과 정성으로 보듬고 키워준 엄마의 그런 실수쯤은 눈감아줄수도 있었겠건만,웬지 가족이라는 리유로 그 하나만은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덧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기다려주기는 커녕 독촉하고 지적하기 좋아하는 심판원이 되여 가고 있다. 편하다는 리유로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말과 행동들을 서슴치 않으며 그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려고 한다.

    신은 도처에 있을수 없기에 엄마를 세상으로 내려보냈다고 했다.

    단발머리 엄마는 몸집이 자기보다 더 커져버린 딸이 매번 갓난아이처럼 사고를 치고 보살핌이 필요할 때 얼마나 조급하고 애간장이 타들었을까. 자기의 감수를 다 내려놓고 오직 딸애만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이 있었기에 몇년을 하루같이 아침 운동을 같이 하며 침을 닦아줄 수 있었다. 엄마는 목숨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섬길 것이다.

    사랑은 화초를 키우듯 아무 바램없이 언젠가는 활짝 피리라는 확신을 갖고 꽃만 바라보는 마음이다. 가족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덜 기다려줬다는 증거이다.인간의 행동은 사람의 사고를 가장 잘 보여준다. 얼마나 기다렸느냐가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알수 있다.늙은 어머니의 살림살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간을 찌프렸던 나,몸이 불편하다고 하면 병원에 가면 될걸 왜 자꾸 밀방만 찾으시냐고 핀잔을 하면서 조급해 했던 나다.

    왜소한 체격이지만 몇년을 하루와 같이 지적 장애인 딸애를 데리고 아침운동을 하고 있는 그 엄마와 선명하게 비교가 되여 순간 심한 죄책감이 들었다.내리 사랑은 있어도 올리 사랑은 없다고 한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부끄러웠다.부모가 자식에게 몰부은 사랑에 비하면 자식이 부모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은 새발의 피보다도 적다.그래서 어머니의 은혜는 바다보다 더 깊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려거든 얼마나 기다려줬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봐야 한다.
    이제 부터라도 기다려줄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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