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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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선어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하는 리유 댓글:  조회:6367  추천:74  2005-07-07
조선어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하는 리유정인갑 금년 2월 중순 한국 국어연구분야에서 활약하는 모 학자가 필자를 찾아와 한국에서는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는 견해와 섞어쓰지 말자는 견해의 대립이 팽팽한데 정교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 학자는 인터뷰의 내용을 조선족 신문에 꼭 실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한국 두 파벌 외의 제3자의 견해라는 의미에서 아주 필요하다며 말이다. 하여 일요특간 2월 20-26일 22면에 인터뷰의 全文이 실렸으며 그것을 다시 연우포럼에 퍼옮겼다. 그런데 최균선 선생님께서 필자의 행위를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하며 “강건너 꾸짖기로 손짓발짓”한다고 하였다(본 사이트 포럼마당글 NO309 참조).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학술문제에 ‘남의 제상’이 있는가! 그것도 지구촌 시대에 쫍은 바다 하나 사이둔, 비행기로 한시간 미만의 거리인, 같은 민족, 같은 문화, 같은 언어, 같은 문자의 한국인데 말이다. 학술문제의 서로 다른 견해의 토론을 ‘손짓발짓’ 한다고 풍자하면 有傷斯文也!. 최균선 선생님의 관점상, 논술상, 방법상, 풍격상의 많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 토론의 大道로부터 빗나갈 위험이 있으므로 차후에 천천히 취급하기로 한다. 필자의 문장은 한국을 상대로 쓴 글이였으므로 중국 조선족의 출판물에도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리유를 밝히지 못하였다.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련다.1. 섞어 쓰는 것이 오히려 우리말 지키는데 리롭다 어떤 사람은 섞어쓰면 우리 민족 언어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민족언어를 상실케 하는 비행을 자초한다는 우려를 표시하였다. 사실은 섞어 쓰는 것이 오히려 우리말을 지키는데 리롭다. 지금 우리민족은 언어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언어동화의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 중의 한 가지가 한자를 우리말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金鑫’, ‘盧春艶’이라는 이름을 ‘김신’, ‘로춘연’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김흠’, ‘로춘염’이라 시정해준 적이 있다. 그러니 상대편이 오히려 "웃기지 말아, 우리학교 선생, 조선어, 한어 선생들도 다 이렇게 부르며 이미 20여년 불러왔는데 틀릴소냐"며 대드는 것이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들 앞에서 필자는 아연실색할 뿐 할 말이 없었다. 선생들도 이렇다니 학생을 원망할 수 있으랴! 고유명사를 이렇듯 틀리게 부르는 것은 이해한다 치고 일반 언어의 표현도 엉망이다. 아래의 례문을 보자. 징차가 따이부해갔어. 스녠 판했대(경찰이 체포해 갔어. 십년 실형이대). 선양에 쌍발해. 한국 허즈치예서 미수한대. 궁즈 꽤나 높다더라(심양에 출근해. 한국 합자기업에서 비서한대. 공자 꽤나 높다더라). 링다우구 나발이구 터수화할줄만 알았지 췬쭝 쿤난 알기나 알아?(령도구 나발이구 특수화할 줄만 알았지 군중 곤난 알기나 알아?) 우리민족들 사이에서 상기와 같이 말하는 것을 너무나 흔히 목격하게 된다. 만약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고, 소학 때부터 이런 훈련을 받아 왔으면 한자어에 부딪칠 때마다 그 한자의 한어발음과 조선어 발음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를 수 있다. 그러면 상기 ‘警察, 逮捕, 十年, 合資企業, 秘書, 工資, 領導, 特殊化, 群衆, 困難’등을 자연스럽게 ‘경찰, 체포, 십년, 합자기업, 비서, 공자, 령도, 특수화, 군중, 곤난’으로 말할 수 있으며 ‘징차…쿤난’ 등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를 섞어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민족 언어의 순수성이 파괴되고 나아가서 민족어를 상실케 하는 비행을 자초하는 화근이 생기게 된다. ①단우이(單位)에 반처(班車)가 있어 쌍발(上班), 쌰발(下班) 다 뻰리(便利)해. (②직장에 출퇴근 차가 있어 출근, 퇴근 다 편리해 / ③ 단위에 반차가 있어 상반, 하반 다 편리해.) ①즈예(職業) 주츌(足球) 찡싸이(競賽) 볼만해. 그런데 찡싸이창(競賽場)의 츄미(球迷) 쯔쉬(秩序) 란타우(亂套)야(②프로축구 경기 볼만해. 그런데 경기장의 축구 팬들 질서 란잡하더라 / ③ 직업족구 경새 볼만해. 그런데 경새장의 구미들 질서 란투야) 위의 례문 ①은 조선족들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말이다. 문법 외에는 거의 한어에 동화된 말이다. ②처럼 말해야 비교적 표준적인 조선어 표현이다. ③에 사용된 ‘반차, 상반, 하반, 족구, 경새, 경새장, 구미, 란투’ 등은 해당 한자의 조선어 발음으로 표현했을 뿐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조선어가 아니다. 그러나 새로 창조한 한자어라고 하면 조선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자어란 우리민족이 수천년간 한어로부터 입수한 차용어라고 할 때 지금은 입수할 수 없다는 법은 없을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 매개 한자에 대한 우리말 독법에 익숙하면 적어도 ③처럼 ‘반차…란투’로 발음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만하면 우리말이다. ‘반처…란타우’로 발음하는 것에 비해 우리말을 지켰으며 동화되지 않은 셈이다.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면 적어도 ③정도는 되므로 우리말을 지키는데 이롭다는 결론에 떨어진다.2. 섞어 쓰는 것은 한어를 장악하는데도 리롭다 사실 한자어의 존재는 우리가 한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말 에서도 한자와 빈도 높게 접촉하면 한어 문자관을 넘는데 퍽 쉬워질 것이며 한자어를 기초로 하면 한어 단어를 익히는데 크게 편리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역시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이런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우선 오자(誤字)를 없애는데 리롭다. ‘絶對正確’에 ‘絶’인지 ‘決’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우리말로 ‘절대정확’이지 ‘결대정확’이 아니므로 당연 ‘絶’이 맞다. ‘向領導反映問題’에 ‘映’인지 ‘應’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우리말로 ‘반영’이지 ‘반응’이 아니므로 ‘映’이 맞다. ‘甚至’인가, ‘甚致’인가? 우리말로 ‘심지어’이지 ‘심치어’가 아니므로 당연 ‘甚至’가 맞다. 이런 글은 한족들도 틀리기 쉬우나 우리민족은 절대 틀리게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자들의 조선어 발음을 모르거나 익숙히 장악하지 못하면 이런 득을 볼 수 없다. 다음은 어음을 장악하는데 리롭다. 그중 한 가지 례로 한어에는 권설음(卷舌音)과 평설음(平舌音)의 구분이 있으며 이를 구분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북경사람 외의 한족들도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자어 발음이 있기 때문에 쉽게 장악할 수 있다. ‘즈, 츠, 스’처럼 발음하는 한자(知子, 持此, 詩思 등)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이런 한자의 조선어 발음이 ‘지치시’면 권설음이고 ‘자차사’면 평설음이다. 예: 지치시:支指止紙知志脂智祉之, 治置値致齒恥稚峙侈緻, 時市施詩始示視試侍尸 ―이상은 권설음 자차사:自子資字咨姿紫, 雌次此慈瓷磁刺, 思四死絲私司辭寺似斯 ―이상은 평설음, 단 ‘社事史使士師’ 6자와 이들을 변으로 하는 글자만은 ‘사’로 발음하지만 례외로 권설음. 북경인이 아닌 한족들도 북경에 반평생 살며 권설음과 평설음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런데 일부 조선족이나 한국인은 필자에게서 한 시간 정도의 보도와 훈련을 받고 적지 않은 글자들의 권설음과 평설음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한자어음에 익숙하지 않은 자에게는 도저히 이런 보도와 훈련을 시킬 가능성이 없다.3. ‘도우미’ 좋은 방법 아니다 한글 전용이면 아무래도 쉬운 말을 골라 쓰게 되고 풀어쓰게 되며 문장이 길어지고 지저분해진다. ‘백문불여일견’을 풀어쓰면 ‘백 번 들은 것이 한 번 본 것보다 못하다’로 되어 6자가 15자로 되며 띄어쓰기까지 합치면 23자가 된다. 문장의 품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각 청각에 주는 감도 달라진다. 어떤 사물이나 특정된 시공(時空)하에 존재한다. 경극 무생(武生) 연예인이 1미터 거리 안에서 열 번 공중전을 하는 것과 2미터 거리 안에서 열번 공중전을 하는 것은 관중에게 주는 예술적 감이 다르다. 수박씨에 새긴 룡을 수박 껍질에 옮겨놓으면 역시 그 감이 달라진다. 다른 문체에도 이런 구별이 있겠지만 문예 작품, 특히 문학 작품은 언어 예술인바 예술 형상을 부각하는데 어떤 말을 썼나, 그 말을 몇 개 음절로 표현했나에 따라 독자에게 주는 예술적 형상이 달라진다. 적지 않은 작품이나 특정적인 표현 단락에 한자어를 쓰는 것이 예술 형상 창조에 퍽 이로울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한글로 쓰고 괄호안에 한자를 ‘도우미’로 써넣어도 무방한가? 이를테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다. 마치 먼저 들러리를 써놓고 다음 주요인물이 나타난 듯 하다. 마치 가수가 마이크에 대고 입만 벌리고 사전에 잡아놓은 록음을 스피커로 내보내는 듯 하다. 6자가 12자로 되었고 괄호까지 합치면 편폭이 배 이상으로 불었으므로 템포도 느려졌고 보는 사람의 시각, 듣는 사람의 청각에 주는 감도 6자만 못하다. 만약 이것이 시(詩)나 연속 겹친 음절수가 같은 배비문(排比文)이면 예술적 형상이 더 엄청나게 떨어진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류의 언어사나 문자사를 보면 절약, 간소화가 철의 법칙으로 관철되여 왔다. 개념 표달에 문제가 되지 않는 전제하에 되도록 말마디 수를 줄이고 문자의 획을 줄인다. 우리말의 배아미→배미→뱀, 가히→가이→개는 말마디를 간소화한 전형적인 례이다. 뎡(鄭)→졍→정, 쟝(章)→장은 어음수 및 글자의 획수를 간소화한 례이다. 한자의 수천년에 거친 간체화는 문자 간소화의 례이다. 한자의 經→经, 東→东 등 많은 간체자는 글씨를 빨리, 헐하게 쓰기 위하여 간소화한 초서에서 따온 것이다. 전 인류의 언어와 문자가 간소화하는 방향의 규률에 따라 변화하고, 담은 한 음절, 한 획을 아끼느라 고심하고 있는데 우리가 6자를 12자로 펑펑 늘여쓰는 것이 된 말이냐! 인류의 언어, 문자의 발전 규률에 역행하며 우리 조상에게도 미안하다. 만약 부득이한 경우라면 몰라도 완전히 피면할 수 있는데 말이다. 소학교부터 한자를 섞어 쓰면 괄호안의 ‘도우미’는 완전히 필요 없는 군 살이다. 필자는 신문 에 칼럼 문장 305편을 쓴 경력이 있다. 판면 제한 때문에 1,200자로 국한된 칼럼이였다. 제한된 편폭안에 심도 깊은 내용을 싣기 위해 매 한자 한자를 다듬어 써야 했으며 금싸라기처럼 아껴 써야 했다. 그러나 한자어 뒤에 괄호를 치고 ‘도우미’를 적어야 하므로 한글, 한자 혼용의 80% 내용밖에 표달하지 못하는 고민을 하여야 했다. 중국 조선족 출판물은 한국이나 조선의 출판물에 비하여 한자를 섞어 써야 할 리유가 더 충분하다. 한국도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견해와 섞어 쓰지 말자는 견해의 사람이 거의 반반이며 그 대립이 팽팽한데 중국 조선족이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는 견해를 완전히 외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는 간체자를 써야 한다.
19    ‘…연’ 문화의 재조명 댓글:  조회:5573  추천:73  2005-05-27
‘…연’ 문화의 재조명 정인갑 우리 민족에게는 ‘…연(緣)’ 문화라는 정신자산(精神資産)이 있다. 이 ‘…연’은 ‘혈연(血緣)’ ‘학연(學緣)’ ‘지연(地緣)’…등의 ‘연’을 말한다. 물론 세계 어느 민족이나 연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처럼 연문화에 애착심이 강한 민족은 세상에 둘도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 민족이 혈연을 얼마나 중시하는가? 필자가 목격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연변 모 조선족 J의 외숙부 리하천(가명)은 6•25전쟁 때 남하하여 가족과 갈라진지 수십 년이 된다. J는 외숙부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지만―이를테면 한국의 방송에 사람 찾기 광고를 내고 경찰청에 의뢰하는 등―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족보를 소장(所藏)하고 있는 한국 모 사회단체를 통해 안악리씨(安岳李氏―외숙부는 안악리씨임) 종친회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거기에 전화를 걸었다. J 문: “안악리씨 종친회인가? 리하천의 이름이 기입돼 있는가?” 종친회 답: “기입돼 있다. 단 부산 사람이므로 부산지회에 알아 보라.” J 문: “안악리씨 종친회 부산지회인가? 리하천의 집 전화를 알려 달라.” 부산지회 답: “리하천 집의 전화번호는 ***−****다.” J 문: “리하천인가? 나는 리황금(가명)의 딸이다…. 외삼촌!” 이렇게 리산된지 40년이 넘는 외숙부를 반시간 안에 찾았다. 이만하면 우리 민족이 혈연 관례를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알만하다. 사람마다 다른 민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친조직의 한 성원으로 존재한다. 중국인도 혈연관계를 꽤나 중시하지만 많은 대만 사람들이 대륙에 와 친척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현상과 선명한 대비가 된다. 몇 년 전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종묘를 인류문화재로 결정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혈연 외에도 학연, 지연…등 많은 연이 있지만 지면상의 제한으로 할애한다. 본 사이트에 진지하고도 생동하게 묘사된 우상렬의 문장 과 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연문화에 대해 우리는 재조명을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짙은 정을 바탕으로 하는 연문화에 도취되고 락관만 할 것이 아니라 연문화의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서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력사상 연문화는 본래 생존투쟁 중 자신의 나약한 힘에 대한 보충으로 등장하였다. 최초의 연문화는 혈연문화인데 인류의 최 저능시대―야만시대에 발생하였다. 씨족, 씨족련맹, 혈연군혼가정 등 사회구도의 체현이다. 그때 인류는 생존 능력이 너무나 나약하므로 자연계와 싸우건, 외부적대세력과 싸우건 혈연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정치, 경제, 생활, 사회…모든 것의 기초가 혈연이었다. 인류가 한 단계 더 발전한 후 등장한 연문화는 천연(天緣) 문화이다. 인간이 자기를 초자연의 힘―하느님, 신령, 인과응보, 천국, 래세에 위탁하는 이데올로기, 즉 종교를 말한다. 천연문화는 인류문명시대의 초창기에 나타났으며 세계 3대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대표로 한다. 인류는 철기(鐵器)의 사용으로부터 문명사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황하류역의 유연한 토지와 절호 기후의 혜택으로 철기보다 생산력이 퍽 락후한 청동기 시대에 문명사로 진입하였다. 말하자면 중국의 문명은 조생아이다. 그러므로 중국 유학문화의 핵심은 혈연문화이다. 하상주 3대의 구조는 종친구조(통치계급과 피통치 계급은 성씨별에 의해 구분됨)이고, 그후 2천여 년간의 최고 정권은 혈연에 의해 세습되였으며 지금도 부지기수의 고위층간부의 자녀가 고위층의 요직에 앉아 있다. 유학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민족도 혈연문화가 주축일 것은 당연하다. 그 후 인류는 자체의 능력이 제고됨에 따라 점점 법제와 계약을 기초로 하는 사회로 발전하였다. 르네상스 때부터는 일대 도약을 이룩하였으며 400여 년이 지난 오늘 서방 선진국에서 법제와 계약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가 완전히 정착되였다. 혈연, 천연 등은 점점 정치 지위를 잃고 순수 문화나 순수 신앙으로 저하되였다. 총체적으로 혈연, 천연 등 연의 정치지위는 사회 발전 정도와 반비례된다.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연이 맥을 못쓴다. 후진국일수록 연은 정치와 엉키여 있으며 심지어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는 어용공구로 충당된다. 만약 우리 민족의 연문화가 친목을 나타내는 짙은 정의 로출 뿐이라면 그 이상 좋을 것 없으며 다른 민족의 흠모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많이는 친목의 범위를 벗어나며 적지 않은 폐단, 부정과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혈연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이 도처에 표출된다. 최고 권력의 세습, 한국 전임 두 대통령의 아들이 정치 비자금을 빙자하여 억수의 금품 횡령, 사람들은 득을 보려 국가 고위층 관리의 사돈에 팔촌에까지 접근, 웬만한 회사도 되도록이면 혈연이 가까운 사람을 요직에 앉힘…등이 혈연문화의 폐단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중등발전 국가에서도 보기 드물다. 한국의 지역갈등도 사실은 지연문화 팽창의 폐단이다. 영남, 호남의 대결만도 골치 아픈데 이젠 충청까지 끼어 들었다. 수도 이전이 부결된 후 그의 변태 안으로 많은 행정기관을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찬성하였는데 어떻게 당략당론을 무시하며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느냐 하는 문책에 대한 변명은 간단했다: 반대했다가 앞으로 충청권의 표밭을 잃을까봐. 그토록 진득진득하고 두터운, 우리가 대단히 부러워하는 학연문화 (동창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기관이나 회사, 단체에 일단 모 학교의 동문이 집결되면 이내 세력화하여 동문이 아닌 자를 고립시키며 심지어 배척하고 타격한다.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어느 한국인으로부터 자기와 일가인 조선족 종친에게 돈을 맡겼다가 1만 달러를 떼웠다는 하소연을 들은바 있다. 또 필자는 북경에서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이 사업하다가 나중에 서로 싸우며 갈라지는 사건에 자주 부딪친다. 알고 보면 공식 계약서 없이 ‘앞으로 섭섭치 않게 해 줄게’로 일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다. ‘물보다 피가 짙은 동포끼리니까’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고도로 산업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법제의 계약문화에 비해 인정의 연문화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가열된 연문화는 친목 외로 팽창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한 폐단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민족은 연문화에 대해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심지어 연문화 자체를 좀 퇴색시킬 필요도 있을 듯 하다. 이 면에서 ‘선소인, 후군자(先小人, 後君子)’의 원칙을 지키는 한족이 정에 냉담한 약점은 있지만 산업화 사회 발전도상에서는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섰다는 감이 든다. 한국은 GDP가 1만 달러 넘으며 바야흐로 선진국으로 등급하고 있다. 그러나 혈연, 천연, 지연, 학연…등으로 생기는 연문화의 부정이 웬만한 개도국 이상으로 살벌하다. 연문화에 대해 확실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18    '대학생 교외 기숙 금지령'論 댓글:  조회:5766  추천:69  2005-05-27
'대학생 교외 기숙 금지령'論정인갑 몇 달 전 전 중국 교육부는 대학생의 교외 기숙을 금지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학생의 남녀 동거를 막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필자는 생각되는 바가 많다. 첫째는 인간 세상이 이렇게도 무상(無常)하구나이다. 필자가 베이징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말만 해도 학생이 연애를 했다가는 멸시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공개적인 동거는 어림도 없고. 그때 한 여대생 장모는 하이뗸구(海淀區) 인민대표 선거에 출마, 경선 강령에 ‘대학생의 연애를 막지 말자’는 슬로건을 넣었다가 야유의 대상으로 되었다. 그와 선민(選民)간의 대화 한 단락을 보자. 선민 문: “왜 막지 말아야 하나?” 장 답: “하고 싶은 연애를 못하게 하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공부에 더 불리할 수도 있다.” 선민 문: “당신네 여학생들, 특히 당신은 연애하고 싶은 정신상, 육체상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 장 답: “그건 너의 누나나 엄마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 아니냐.” 그런데 불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공개적인 동거로 변했다. 난징시(南京市)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이런 동거를 하고 있으며 금지령이 내린 후 혹은 공휴일에 여관 동거, 혹은 숏타임 동거, 혹은 학교에 공식 숙소를 두고 실은 하숙집 동거를 한다고 한다. 상전벽해의 변천이 아닐 수 없다. 둘째, 10대 후반 청년의 성생활을 권장할 것은 못 되지만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일본은 1980년대에 벌써 성생활을 체험한 여고생이 꽤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민족이 망한 것도 아니고 일본의 청년이 타락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 선진 민족으로 줄달음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대학생에 대해 엄한 제한을 할 필요가 있는가! 셋째, 청년 남녀의 성생활은 간단히 무단적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다. 성생활을 탐닉하다가 타락에 빠지는 자는 개별 인이고 성생활을 하면서도 공부나 사업을 제대로 하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성생활을 못하게 하면 하고자 빠득빠득 애쓰지만 하게 내버려두면 오히려 ‘별거 아니구나’하며 심상해 하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넷째, 인간은 나이에 따라 할만한 짓을 다 해봐야 한다는 철리(哲理)를 본문에서 피력하고 싶다. 인간은 공부할 나이에 공부, 연애할 나이에 연애, 성생활 할 나이에 성생활, 결혼할 나이에 결혼, 생육할 나이에 생육하고…이렇게 해야 정상적인, 훌륭한 인간으로 될 수 있다. 불행결혼의 사례를 살펴보면 많이는 연애와 성체험이 없이 오로지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으로 얼러뚱땅 결혼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연애와 성체험이 인간수업의 한 내용이여야 할지도 모른다. 10대 후반에 연애도 못해보고, 20대에 성생활도 못해본 채 30대가 거의 돼 결혼한 필자와 같은 세대, 그들이 사업에서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인간 천륜(天倫)을보는 면에서는 뭔가 좀 모자랄지도 모른다. 교육부의 나리들이 아마 이런 세대일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이런 불민한 생각에 상기의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고 본다.
17    절개출산에 통탄한다 댓글:  조회:5852  추천:83  2005-04-28
절개출산에 통탄한다정인갑 임신부가 분만하여 아기를 낳는 방법에는 자연출산과 절개출산 두 가지가 있다. 그중 절개 출산은 산모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내는 방법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절개출산율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절개출산율이 가장 높은 곳은 강원도이며 2003년 하반기에 43.6%로 집계됐다. 산모나 태아의 안전을 위하여 절개출산을 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주팔자(四柱八字)의 조립을 위하여 절개출산을 취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필자는 후자의 절개출산을 극히 부정하는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우선 의학전문가나 사회학자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절개출산의 방법으로 태여난 아기는 성장하는 과정에 그의 의지(意志)가 자연출산의 방법으로 태여난 아기보다 약하다고 한다. 이는 분만으로 인한 인생 최초의 고통 없이 출생한 사람의 약점이며 그 영향이 평생에 미친다고 한다. 다음, 사주팔자는 무엇인가? 태어날 때의 년, 월, 일, 시 4가지에 각각 두 글자씩 붙는 간지(干支) 여덟 자의 조립이다. 즉 태어날 때 우주, 태양, 지구, 달간의 상대 위치에 불과하다. 산명가(算命家)나 오행가는 사주팔자에 따라 인생의 운이 혹은 좋다, 혹은 나쁘다 판단한다. 그래 상기의 위치가 인생의 운을 결정한단 말인가! 이는 추호의 과학적 근거도 없는 미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생일±15일 안에 시간을 맞추어 산모의 배에 칼을 대어 아기를 빼내니 얼마나 우매하며 통탄할 일인가! 만약 동전을 던져 정면이냐 반면이냐에 따라 출생한 아기의 운이 결정된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를 던져 어느 면이냐에 따라 운이 결정된다면 맞고 틀리는 확률이 각각 1/6 이어 아리송해지므로 다소 믿으려 할지 모른다. 나아가 산 가지 12개( --형 6개, ―형 6개) 중 6개씩 뽑은 64괘는 맞고 틀리는 확률이 1/64 이므로 신비한 베일에 싸여 사람을 우롱하기 더 편리해진다. 이것이 바로 점치는 교과서 이다. 주사위를 던지건, 괘를 뽑건 그 본질은 동전을 던지는 것과 완전히 같다. 중국인은 2천 년 전부터 산명가나 오행가의 말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근세에는 이런 행위를 허위과학 또는 현대미신으로 보며 이런 내용의 책을 출판하지도 않는다. 물론 사주를 감안하여 절개출산하는 자는 더욱 없다. 한국은 국민의 평균 문화 수준이 중국보다 훨씬 높고, 경제적으로도 선진국에 접근하며 또한 반세기 이상 미국 선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많은 면에서 중국보다 앞섰다. 중국이 따라 배워야 할 점이 많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미신을 믿으며 많은 학자까지 동원되어 사주팔자의 책을 펴내고 있다. 심지어 이런 미신에 매도돼 산모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빼내기까지 한다. 문명민족의 이미지와 너무나 걸맞지 않다.
16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 再論 댓글:  조회:5681  추천:86  2005-04-19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 再論―‘글쎄요’와 ‘넘버원’에 화답함정인갑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라는 글이 발표된 후 이 글에 대한 ‘글쎄요’와 ‘넘버원’ 두 선생의 反論과 質疑가 나타났다. 본 ‘재론’은 그들의 반론과 질의에 화답하는 바이다. 1. 商나라는 확실히 우리민족과 관련이 있다. 상나라가 망하자 箕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를 信史로 보기에는 근거가 미비하다. 그러나 상나라 많은 遺民이 자기 민족의 발원지인 동쪽 및 조선반도로 피난 갔다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마치 원나라가 망하자 대부분의 몽고족이 자기의 발원지 북으로 피난 간 것처럼 말이다. 상나라 문화 중 가장 특출한 것이 거북이 뼈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쑥을 넣어 태워 점을 치는 것이다. 뼈에 쓴 점괘 甲骨文이 바로 한자의 최초 문헌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거북’이란 단어는 이 동물의 이름 ‘거←구(龜)’에 점을 치다의 ‘북←복(卜)’을 합쳐 부르니 이는 기적적인 현상이다. 옛날 東夷민족인 우리민족이 이 동물을 주로 점을 치는데 활용했다는 말이다. 東夷민족이 세운 商나라도 거북이를 점치는데 활용했고, 같은 시기에 다른 민족은 이런 관습이 없었다고 할 때 이는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가! 2. 事大主義는 자기의 주체가 없이 세력이 큰 나라나 사람의 힘에 의존하려는 주의를 말한다. 우리의 수요에 따라 타민족의 우수 문화를 攝取하는 것은 사대주의와 본질이 다르다. 우리말을 기초로 한 전제 하에 수요에 따라 한자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은 절대 사대주의로 몰아붙일 수 없다. 우리가 참여하여 창조하였고 11세기 후부터는 우리 자체로 변화, 발전시킨 한자, 한자어를 쓰는 것도 사대주의라며 배격한다면 한자보다 더 우리 것이 아닌 유교문화를 숭상하는 것은 더욱 사대주의의며 배격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역사적 허무주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3. 한자의 컴퓨터 타이핑 속도를 영어와 대비하면 어떠한가? 공식 경기를 한 적도 없고, 따라서 공식 평가를 내린 적도 없다. 그러나 대단히 빠르다고 말하고 싶다. ‘中華人民共和國(zhonghua renmin gongheguo)’을 입력하려면 자모 4개만 입력하면 ‘中華’가 나타나고 ’人民共和國’은 자모결합으로 저절로 떠오른다. 떼여 쓰기까지 25개 부호를 2∼3초안에 완성한다. 영어 25개 부호를 2∼3초안에 타이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중국어 전문 입력인원이 8시간에 한자 5만 자 입력할 수 있다. 한자 하나에 평균 3.5개 자모라고 할 때 175,000개 부호를 입력하는 셈이다. 16절지 영어 인쇄물 1페이지에 보통 2,900개 부호가 입력된다. 175,000개면 60페이지쯤 되는데 8시간 내에 입력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영어 입력이 한자 입력보다 보다 7배 빠르’려면 420페이지를 입력하는 셈인데 이는 어부성설이다. 한자의 컴퓨터 입력이 가능한 것만 해도 대단하며 영어 입력 속도의 1/4만 되어도 대성공이라고 여겼는데 영어를 따라잡거나 초과할 정도라고 하니 더욱 대단한 셈이다. 영어는 수백 년의 타이핑 역사가 있고 한자의 컴퓨터 입력 역사는 불과 20∼30년이다. 4. 조선반도 문화의 중심지는 기원전 108년 漢平帝가 古朝鮮을 멸망시켜서부터 기원 316년 西晉왕조가 멸망될 때까지 420여 년 간 중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 이 기간 문화적으로 퍽 선진적인 중국문화가 얼마나 조선반도에 침투되었겠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선진국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몇 년, 심지어 몇 주간 있다 와도 그들의 옷을 입느라 설치는데 420년이란 긴 세월에 중국의 의상이 조선반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한복이 한나라인의 의상과 비슷하므로 한나라인의 옷을 입수해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해 보는 것은 한나라인이 한복을 배워 입었다고 추측하는 것보다 더 합리하다고 본다. 6. 西安인이 먹는 허러면과 우리의 냉면이 아주 비슷하다. 여기에는 a, 한국 냉면이 중국 허러면을 배운 것; b, 중국 허러면이 한국 냉면을 배운 것; c, 각자가 독자적으로 창조한 것, 세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 그러나 허러면이 냉면보다 퍽 후지고 맛이 없는 것으로 보아 허러면이 냉면을 배웠을, 즉 b의 가능성보다 a의 가능성이 퍽 크다고 본다. c의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한복과 냉면을 운운한 목적은 이 두 가지가 시초부터 우리의 것이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남의 것을 입수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문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말의 眞髓가 이렇다 할 때 ‘한복과 냉면이 우리의 것이냐, 입수한 것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쟁론이다. 7. 중국에 문맹이 많은 근본 원인은 빈곤과 무지에 있지 한자에 있지 않다. 물론 한글 자체는 몇 주 안에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을 안다고 해서 문맹이 퇴치됐다고 할 수 없다. 필자는 베이징에서 중국 초등학교에 다니며 주일마다 한글학원에서 한글을 배운, 심지어 몇 년간 한글을 배운 한국학생(초등학생)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한글문장을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은 잘 모른다. 한글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문맹 또는 반문맹이다. ‘넘버원’께서 한국의 문맹이 세계에서 가장 적다고 하였는데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도 한글과 같이 자모문자인데 왜 문맹이 한국보다 많은가? 이 현상 자체가 문맹의 근본 원인이 문자에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연우포럼 NO.246](문화)出版物에 漢字를 섞어 쓰자에 대한 반론:반론1:商을 세운 東方民族에는 우리 韓民族도 包含돼 있으므로 ===대단한 논리군, 냉면 한복도 한나라에서 비슷한게 있었다고..한나라에서 왔다고??? 그럼 빈대떡은 피자랑 비슷하다고,이태리에서 왔다고 하지~~참 완전히 사대주의 에 범벅이 된 사람이군, 漢字의 컴퓨터 입력이 오히려 英文 타이핑보다 더 빠를 程度이다.===이런 주장을 하는사람이~~`한자보다 영문이 7배 빠름니 다. 좀알고 쓰시요~~중국인의로서. 어디서 한글은 배워 가지고. 대단한 애국심이군요~~~온글을 ..이렇게 쓰다니~~~참~~~ 대단하오~~` (글쎄요)반론2:당신이나, 죽을 때 까지 한문이나 배우다...가시요~~ 한글은 초등학교 들어가지전에, 애들은 전부 깨우치고 입학을 하는데~~`문맹율이 중국이 최고 높다는 사실을 아는지요~`한국운 자기나라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오, 문맹율 0.1% 이하...세게최고 라는걸 ,어떻게 설명 하실찌~~ㅉ ㅉ (넘버원)
15    하루살이와 대붕 댓글:  조회:5587  추천:85  2005-04-13
하루살이와 대붕정인갑 중국 산샤(三峽) 댐과 동남지역 공업 오염 물질 때문에 서해 물의 담수 비중이 줄고 서해가 사해(死海)로 될 위험이 있다는 말이 한국 언론에 퍼지고 있다. 서해 사해 설은 제쳐놓고 산샤댐 공정의 거창함을 실감하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철학자 장자(莊子)의 글《소요유(逍遙遊)》를 음미해 볼 충동을 필자는 느낀다. 하루살이는 오늘만 알고 래일을 모르며 매미는 금년만 알고 명년을 모른다. 그러나 명령(冥靈)이라는 나무는 500년, 팽조(彭祖)라는 사람은 800년, 향춘(香椿)이라는 나무는 8,000년 장수하였다. 산비둘기는 나무 가지에 오르내릴 줄이나 알지 교외(郊外)를 모르며 백리, 천리 밖은 더더욱 모른다. 그러나 대붕(大鵬)은 길이가 몇 천 리고 날개는 구름 같다. 한번 꿈틀거리면 3천리 바다에 파도가 일고 일단 날면 9만리 솟아오르며 6개월만에 한번 쉰다. 물이 적으면 배를 띄울 힘이 없다. 구덩이에 부은 한 컵의 물에 풀잎파리는 떠도 술잔을 띄우면 밑바닥에 붙는다. 바람이 모이지 못하면 날개를 떠받는 힘이 약하다. 9만 리의 바람이 있어야 대붕이 9만 리를 날 수 있다. 인간 사회나 자연계의 소년(小年)과 대년(大年), 소물(小物)과 대물(大物), 소능(小能)과 대능(大能), 소지(小智)와 대지(大智), 단거리와 장거리의 차이점은 너무 엄청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비교해볼 생각을 말며 살아야 한다. 자기를 잊고 속세를 해탈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보통 말하는 '人比人死, 貨比貨扔'이다. 이것이 《소요유》에서 장자가 피력한 소극적 사상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차이점에서 적극적인 요소를 유발하고 분투 정신을 고양해 보련다. 우리는 자연계에서나 인간 사회에서의 투쟁에서 분발 정신을 발휘하여 대년, 대물, 대능, 대지, 장거리...등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사롭게 접촉하는 시골의 저수지는 풀잎파리를 띄우는 한 컵의 물에 불과하다. 한국의 이름난 소양댐도 나뭇가지에 오르내리는 산비둘기 정도밖에 안 된다. 중국의 산샤댐이야말로 9만리를 솟아오르는 대붕이다. 산샤댐의 길이는 2,335미터, 높이 175미터다. 인공 호수의 길이는 650킬로, 개성에서 부산까지보다 퍽 멀다. 저장된 물이 393억㎥이고 최대 발전 능력은1,820만 ㎾다. 10개 면에서 세계 댐의 랭킹 1위를 했다. 이만하면 서해 물의 구조를 개변시키고 그의 생태 환경에 영향을 끼칠 만도 하다. 이 산샤 댐은 아이디어를 내놓아서 실천에 옮기기까지 75년 걸렸고, 답사 설계에 50년 걸렸으며 최종 완공에 14년 걸린다. 국민 113만을 이주시켰다. 말하자면 대붕이 날만한 장소를 마련해 주느라 그 준비를 천문학적으로 한 셈이다. 큰 일을 하려면 크게 접어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장소를 마련한 자가 바로 960만 ㎢ 면적에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다. 산샤댐과 같은 기적이 앞으로 중국에서 얼마나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 중국 철강 년 생산량이 억대이다. 앞으로 인터넷 가입자 억대, 핸드폰 사용자 억대...통계 숫자가 억대를 초과하는 것이 부지기수로 나타날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 외국에서 ‘동방의 누어 자던 사자가 깨나고 있다’는 말로 중국을 비유했지만 사실 중국은 대붕이다.
14    出版物에 漢字를 섞어 쓰자 댓글:  조회:6453  추천:45  2005-04-10
出版物에 漢字를 섞어 쓰자정인갑 지금 韓國에서는 漢字를 배우고 출판물에 섞어 써야 한다는 見解와 漢字를 배울 必要가 없거나 배우더라도 出版物에 標記할 必要는 없다는 두 가지 見解가 팽팽하게 對立되고 있다. 筆者는 한국사람들이 漢字를 반드시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出版物에 漢字를 섞어 써야 한다고 본다. 韓國語에 漢字語가 60% 程度 되는데 漢字를 모르면 그 語彙를 터得하고 理解하는데는 限界가 있다. 또한 誤解의 所持도 있다. 이 點은 漢字를 배우는 것을 反對하는 사람도 認定하리라 믿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겠다. 中國 河南省 黃河流域 卽 中原地域의 民族이 세운 나라가 夏고, 東方民族이 中原으로 쳐들어가 세운 나라가 商이며, 西方民族이 東쪽으로 쳐들어와 세운 나라가 周다. 漢字는 商 때 發生, 發展한 文字이다. 商을 세운 東方民族에는 우리 韓民族도 包含돼 있으므로 漢字는 우리 韓民族도 參與하여 創造하고 發展시킨 文字이다. 昨年 韓國이 유네스코에 端午節을 人類文化財로 申請했을 때의 일이다. 많은 中國人들이 端午節은 中國의 文化財인데 韓國이 廉恥없이 훔쳐서 自己네 것으로 둔갑시켜 申請한다고 揶揄하였다. 端午節은 屈原을 紀念하기 爲한 名節이며 그때는 韓國과 中國이 다 周나라의 範圍안에 들어있었으므로 亦是 韓國의 名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春秋時代 晉나라 文公 때의 介子推를 追慕하기 爲하여 생긴 記念日―寒食도 亦是 韓國의 名節이다. 萬若 最近 韓國의 濟州道가 單獨 나라로 갈라져 이를테면 濟州共和國으로 되었다고 假定해보자. 몇 百年이 지난 후 濟州共和國 사람들이 ‘8•15光復節은 大韓民國의 名節이지 濟州共和國의 名節이 아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荒唐한가? 漢字의 發明權을 中國人에게만 局限시키는 것은 濟州共和國이 光復節의 所有權을 抛棄하며 大韓民國에 주는 主張과 같이 어리석은 發想이다. 韓國 漢字, 漢字語의 發達史를 보면 11世紀(中國은 宋朝, 韓國은 高麗朝) 前에는 中國의 漢字, 語彙와 같았고 11世紀 後부터는 中國語와 離脫하여 自體로 發展시켰다. 11世紀 後부터 漢字와 그 語彙는 中國과 韓國 兩側에서 제각기 發展시켰다. 卽 漢字는 남의 글이 아니고 우리의 글이며, 漢字語도 남의 言語가 아니고 우리의 言語이다. 漢字를 남의 文字로 보고, 漢字 學習을 重視하는 것을 事大主義 表現으로 보는 그릇된 見解를 優先 批判하고자 한다. 事實 本來 남의 것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것으로 變할 수 있다. 韓服은 中國 漢나라의 服裝과 거의 비슷하다. 아마 2千 餘 年 前의 中國 服裝을 入手해 지금까지 입어오며 變化, 發展시켰을 것이다. 冷麵 도 中國에서 入手한 듯 하다. 지금 中國 西安人들이 먹고 있는 허러면(食合 食各 麵)은 韓國의 冷麵과 거의 같다. 메밀로 만들었으며 단 肉水가 없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韓服과 冷麵을 남의 것이라고 하며 甚至於 排除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象形文字를 基礎로 한 漢字는 表意性 外에도 長點이 많다. 文字는 데이터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字母文字는 線形 그릇이고 漢字는 面形 그릇이다. 1미터 길이의 빨랫줄에 제비가 5마리 앉을 수 있다면 같은 길이의 널에는 제비가 10마리 앉을 수 있다. 英字는 빨랫줄에 恰似(흡사)하고 한글도 고작해야 좀 굵은 빨랫줄에 不過하다. 그러나 漢字는 널이다. 유엔의 같은 文書 中 中國語 文書가 가장 얇다고 한다. 漢字에 이런 長點이 있기 때문에 漢字로 新生語를 創造하기 아주 쉽다. 萬若 漢字를 섞어 쓰면 한글도 좀 널찍한 띠 구실을 할 수 있으므로 데이터를 담는 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다. 또한 漢字를 빌어 新生語를 創造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생소한 英語 外來語를 그토록 많이 쓸 必要가 없어진다. ‘漢字가 좋기는 한데 배우기 너무 어렵다’, ‘初, 中校 學生이 배우는 科目이 너무 많아 힘 벅찬데 漢字를 배우는데 時間을 虛費할 必要가 있는가?’ 이는 近視眼的인 見解이다. 知識이나 技術 中 쉽게 배울수록 사용할 때 損害를 보고, 어렵게 배울수록 사용할 때 得을 보는 것이 있다. 中國에 컴퓨터로 漢字를 타이핑하는 全拼이란 方法이 있다. 例를 들면 ‘壯’자를 그 發音에 나타나는 6個  拼音字母 ‘z, h, u, a, n, g’을 각각 치고 떠오른 10餘 個 글자 가운데 하나를 選擇하면 ‘壯’字가 입력된다. 이런 方法은 너무 쉬워 10分 안에 배울 수 있다. 五筆字型의 입력 方法은 퍽 어려워 約 2個月 걸려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實際 타이핑 할 때 五筆字型의 方法은 全拼의 方法보다 約 6倍 빠르다. 배울 때 2個月 虛費한 時間을 사용할 때 그의 數百, 數千 倍 되찾게 된다. 漢字도 바로 이런 類型에 속한다. 어릴 때 漢字를 배우느라 消費된 時間을 커서 사용할 때 그의 數十, 數百 倍의 利得을 보게 된다. 살기 어려운 옛날에는 몇 千 個의 漢字를 배우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學校에 다닐 수 있고, 中國은 初等學校 段階에 이미 3,500個의 漢字를 터得할 수 있으며 高等學校를 卒業하면 6,000字를 배운다. 5,000字를 알면 新聞보고 웬만한 冊보고 社會生活을 하는데 充分하다. 韓國 사람으로서는 한 2,500字 程度 알면 충분한데 初, 中校 學生이 2,500個의 漢字를 배우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漢字는 10萬字도 넘으며 平生 배워도 못다 배운다던데’ 라며 筆者의 말에 反論을 提起하는 사람이 있을 듯 하다. 筆者는 지금 中華書局 辭典部 責任者로 있으며 辭典과 字典의 編輯을 專門하고 있으므로 이 面의 事情을 잘 안다. 지금 中國에서 漢字가 가장 많이 收錄된 字典은 필자가 勤務하고 있는 中華書局에서 出版했으며 필자도 參與하여 만든 다. 약 7萬5千字가 收錄되어 있다. ,, 이 세 個 字典에는 約 4萬7千∼5萬7千字가 收錄되어 있고. 事實 漢字는 같은 글자를 異體字, 正字, 略字, 古字, 今字 等으로 이리저리 다르게 쓰기 때문에 그 숫자가 많지 이런 요소를 빼면 總 3萬 字도 안 된다. 그中 約 折半은 별로 쓰이지 않는다. 文史哲을 專門 硏究하는 學者도 8,000∼10,000字를 알면 괜찮다. ‘劃數 많은 漢字, 쓰기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라는 時代도 이미 지났다. 20世紀 70∼80年代에 漢字의 컴퓨터 입력이 開發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英文 타이핑보다 더 빠를 程度이다. 五筆字型 등 빠른 方法이 開發되었고 또 中文은 單語나 單語結合을 壓縮하여 입력하는 方法이 있기 때문이다(英文은 壓縮입력이 不可能하다). 옛날에는 펜으로 글을 썼는데 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爲主이다. 하여 漢字는 英字나 한글과 큰 差別 없이 쓰기 쉬워졌다. 漢字를 배우기만 하고 出版物에 쓰지는 말자는 見解도 筆者는 反對한다. 朝鮮에서도 漢字를 배운다(筆者에게 朝鮮의 漢文 敎科書 한 冊 있음). 그러나 出版物에 漢字를 全혀 쓰지 않기 때문에 漢字를 헛배웠다. 朝鮮에서 漢字를 배운 적이 있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筆者의 名銜을 보였는데 알아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筆者의 姓名 ‘鄭仁甲’ 석 字, 特히 ‘仁甲’ 두 字는 너무 흔히 쓰며 書寫하기도 쉬운 글이다. 이것도 모른다면 漢字를 全혀 모른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이는 朝鮮에서 出版物에 漢字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배운 漢字를 잊어버려 생기는 現象이다. 出版物의 性格에 따라 쓰는 漢字의 範圍를 달리할 必要는 있지만, 800∼2,500字 範圍에서 漢字를 出版物에 頻度 높게 써야 한다고 본다. 19世紀 末부터 中國에는 漢字를 알파벳으로 改革하자는 思潮가 생겼으며 그 힘이 대단히 컸다. 毛澤東도 ‘文字는 改革해야 하며 世界 民族처럼 알파벳을 써야 한다’고 呼訴하였다. 그러나 漢字 알파벳 化를 反對하는 사람도 줄곧 만만치 않았으며 100餘年의 爭論 끝에, 특히 컴퓨터 입력 成功을 契機로 反對하는 主張이 끝내 이긴 셈이다. 萬若 100年 前에 疏忽히 漢字를 알파벳 化하고 4,000餘 年의 歷史가 있는 漢字를 抛棄하였더라면 얼마나 큰 損害를 보았을지 모른다. 韓國은 1967年 軍事政權 下에서, 한글 專用 法案이 通過되었고, 그 보다 앞선 1948年 李承晩 政權 下에 國會에서 ‘公文書는 한글로 쓴다’ 라는 單 한 줄의 한글 專用 法案이 通過되었다. 數千 年의 歷史를 가진 文化 遺産을 하루아침에 버리는 韓國의 이런 處事는 너무 輕率하였다. 本文은 韓國人을 相對로 쓴 글이지만 中國 朝鮮族에게도 適用된다. 中國 朝鮮族 出版物에 왜 漢字를 섞어 쓰지 않는지 도저히 理解가 가지 않는다. 또한 本文은 出版物에 漢字를 섞어 쓰자는 見解를 主張하는 文章이므로 일부로 漢字를 섞어 써 보는 바이다. 讀者들의 諒解를 求한다.
13    조선족공동체의 전망 댓글:  조회:5886  추천:72  2005-04-09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 별거 아니다(3)―조선족공동체의 전망 정인갑 절대인구 마이너스성장이건, 상대인구 마이너스성장이건 관건은 중국조선족공동체의 전도문제이다. 우리민족의 지성인들이 인구 마이너스성장을 걱정하는 진정한 리유는 민족공동체가 해체될 위험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조선반도로부터 건너와 100∼150년이나 된다. 그렇지만 거주, 교육, 언어, 문자, 풍속, 습관, 기질, 응집력, 문화 등 많은 면에서 자기의 공동체를 유지하여왔다. 세계적으로 해외 이민이 가장 많은 6개 민족―중국인, 인도인, 유태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조선인은 2∼3세 안에 거의 주재국 국민에 동화되여버렸다. 유태인도 단 유태교만 지켰을 따름이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만 지금까지 5∼7세나 되도록 자체의 공동체를 지키며 살아왔다. 이는 인류력사의 기적이다. 기적의 원인을 필자가 대충 찾은 바로는, 1, 당시 동북은 인구가 너무 희소하여 조선족이 상대적으로 집결될 수 있은 것; 2, 농사 위주, 더욱이 벼농사의 선두민족으로 수전을 중심으로 조선족 마을을 형성할 수 있은 것; 3, 조선족이 동북 원 거주민보다 문화 수준이 높은데다가 각별히 교육과 문화를 중시한 것; 4, 중공 정부 성립후 조선족의 자치주, 자치향을 세워주었고 자치마을을 인정하였으며 조선족 학교, 문화관, 신문, 잡지, 방송, 문예단체 등을 운영하게 한 것, 등 4가지인 듯 하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오늘, 상기 4가지중 1, 3 두 가지는 이미 없어져버렸다. 2, 4 두 가지도 시장경제의 충격을 받아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필코 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 약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중국조선족은 가속도로 진행되는 해체와 반해체, 동화와 반동화의 대립통일 속에서 몸부림치고있다. 물론 우리는 지금 공동체의 해체와 민족동화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 첫째, 농촌에서 해체된 조선족 마을을 도시에 세우는 것이다. 이와 동반하여 많은 대도시에 조선족 협회, 친목회, 모임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다. 둘째, 농촌에서 폐교된 학교를 도시에 재건하는 것이다. 북경, 천진, 청도에 이미 조선족 학교가 세워져 운영되고 있으며 대련 조선족 학교도 원래 찌글찌글하던 것이 많은 조선족의 대련 진출에 따라 번영하고 있다. 앞으로 조선족이 진출한 많은 관내의 대도시에 조선족 학교들이 일어설 것이다. 셋째, 조선족 사이버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조선족 인터넷 사이트가 서로 멀리 떨어진 조선족들을 이웃, 한집안으로 응집시키고있다. 이런 시도는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민족의 동화를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막지는 못한다. 필자의 고향 료녕성 무순시는 6만명 조선족의 대부분이 도시변두리에 자치마을을 세우고 똘똘 뭉쳐 사는 고장이다. 1950년대(이미 이민 40년 이상) 그들은 한어를 잘 모르고 살았으며 필자는 1966년 고중을 졸업할 때 한족과의 대화가 시원치 않았다. 이만하면 연변을 제외한 지역중 비교적 전형적인 조선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985년 필자 모교의 학생들은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조선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또 20년이 지난 지금은 적지 않은 조선족이 한족학교를 가며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자도 조선어를 외국어처럼 배워야 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또 20년이 지나면 조선말을 모르는 조선족학교로 되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정도 지나면 연변을 제외한 지역의 조선족은 조선말을 할 줄 모르게 될 것이다. 또 50년정도 지나면 연변의 조선족도 개별적 향 외에는 조선말을 할 줄 모르게 될 것이다. ‘글세_, 두만강 변두리 일부 마을의 조선족은 조선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던데 우리 연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할 때가 100년안에 다가올 것이다. 지금 우리민족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수구(守舊), 퇴각의 길을 걸어 농촌과 벽지로 몰려 민족공동체는 보전하였지만 시대에 떨어진 골동품, 미국의 인디언 집거지처럼 되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이 연변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우리 한국 50년 전의 맛이 난다’라는 말을 자주 내뱉지 않는가! 다른 하나는 산업화 시민화로 발전하여 만족, 유태인처럼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자를 포기하고 후자처럼 변할 것이다. 산업화, 시민화로 도약하면서 예전과 같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3의 길은 불가능하다. 이 방향이 옳다고 인정되면 이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지금 은 그가 복무하던 흑룡강의 많은 조선족이 내지 대도시에 진출한 현황을 감안하여 청도판, 상해판, 북경판, 천진판, 대련판, 광주판…을 꾸리고 있다. 심지어 장래 할빈에는 농촌판 편집실만 남겨놓고 편집부를 아예 북경으로 옮길 장원한 계획도하고 있다고 한다. 참 좋은 아이디어이다. 내지 대도시 조선족의 눈에 , , , 연변가부단 연출, 촌스럽다. 연변대학교 졸업생, 촌 때 벗는데 시간이 걸린다…. 모두 대도시로 들어와야 한다! 적어도 길림시, 장춘, 심양, 좋기는 북경으로 들어 오라! 한국 지방의 웬만한 회사도 서울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전 중국 조선족을 리드할 대학, 신문, 잡지, 예술단이 촌구석에만 엎디여 있을소냐! 하물며 우리민족의 대다수가 대도시로 집결되고 있는데 말이다.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적응하는 미래 조선족 공동체는 어떤 존재의 형식을 취할 것인가? 위에서 말한 거주, 교육, 언어, 문자, 풍속, 습관, 기질, 응집력, 문화 등 특징이 선후로 하나하나 없어질 것이다. 거주공동체가 맨 먼저 없어지고 문화공동체가 맨 마지막에 없어질 것이다. 만족은 그 다수가 1664년 관내에 들어갔으며 약 250년을 기해 민족공동체가 없어졌다. 그러나 전 민족의 일대 도약을 실현하고 없어졌기 때문에 중화문화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중 한 가지 예로 현대 중국 보통화(普通話)의 핵인 북경방언은 만주어와 한어가 결합된 언어이다. 그토록 강대한, 중국 마지막 왕조의 통치민족까지 되었던 만족도 250년에 그 공동체가 없어졌는데 약소민족인 우리 조선족이 자기의 공동체를 250년이나 유지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며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민족사, 이민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기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다. 중국 이주 마지막 100년에 일대 도약을 실현하여 우리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중화민족의 문화에 담은 얼마라도 남기고 없어져야 한다. 우왕좌왕, 우물쭈물하다가 값없이 사라지면 절대 안 된다. 그때 가서도 우리민족의 문화공동체가 살아 남으면 참 다행이고.
12    인구마이너스성장 상대적으로 봐야 댓글:  조회:6490  추천:76  2005-03-31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 별거 아니다(1)인구마이너스성장 상대적으로 봐야정인갑ㅣ중화서국 편심 ‘지금 중국 조선족은 인구 마이너스성장이라는 엄중한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말을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필자는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은 조선족 력사발전의 필연적현상이라 본다. 별거 아닌데 신경을 쓰며 걱정할 것이 못된다. 어떤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성장은 조선족집거지역의 상대인구(相对人口) 마이너스성장과 중국조선족의 절대인구(绝对人口) 마이너스성장 두 가지로 나뉜다. 본회에서 우선 상대인구 마이너스성장을 살펴보자. 개혁개방 초기 조선족지성인들중 민족의 앞날을 렴려하며 조선족의 도시진출을 개원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세세 대대로 살아오던 생활의 터전-토지를 버리고 도시로 가서 될 소냐!” “조선족마을이 무너지고, 학교가 폐교되고, 이래서는 안 된다”며. 상대인구 마이너스 성장을 걱정하는 전형적인 견해였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쩍하면 “연변 인구 마이너스 성장”을 운운하며 통탄하는데 이런 관점의 잔여이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단호히 부정한다. 현재 우리 민족의 급선무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빨리 2대 전환을 실현하는 것이다. 즉 농경민족으로부터 산업민족으로, 촌민으로부터 도시민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밭고랑을 타고 땀을 흘려봤댔자 1년에 2천 원 벌이이다. 그러나 도시에 가서, 이를테면 북경의 식당에서 품팔이를 해도 1만 원 정도 벌 수 있다. 짠지를 팔면 3만 원, 식당을 꾸리면 10만 원, 노래방을 꾸리면 30만 원. 인간 능력의 주요 표징은 재부의 창조이며 재부의 다소는 일반등가물-화폐로 환산된다. 농사지어 번 2천 원이 짠지 팔아 번 3만 원보다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볼 때 조선족 농민의 도시 진출, 好得很! 조선족 마을의 해체, 没什麽了不起! 연변 인구 마이너스성장, 걱정할 것 없다. 192만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가 도시에 진출하여 평균 수입이 5~10배 증가되는, 즉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산업민, 도시민으로 되는 그 날이야말로 우리민족은 부유한 민족, 남이 부러워하는 민족, 유망한 민족으로 될 것이다. 가난에 시달리는 농경위주의 연변, 미련을 가질 것이 못된다. 지금 연변의 국민생산 총치(GNP)는 190억 원, 이를 218만이라는 인구로 제하면 1인당(GDP) 8,700원, 전국 평균 수준도 안 된다. 연변 사람이 외국 가 벌어 송금하는 돈이 년당 8억 달러고 도시에 진출하여 벌어 송금하는 인민폐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즉 만약 연변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이 없다면 연변 자체의 생계도 유지하기 어렵다. 지금 연변에는 3개의 빈곤 현이 있으며 중앙 재정의 구제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유태민족은 나라 잃고 부동산 권한의 제한을 받아 장사를 위주로 하며 2,000여 년을 살아왔다. 그리하여 전 민족이 솔선으로 산업민족으로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총명한, 유능한 민족으로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민하여 황무지가 많은 동북에서 땅을 붙일 수 있었으며, 새 중국 건국 후에는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농경민족으로 고착돼 버렸다. 어떻게 보면 복이 화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은 화가 복이 됐고. 세세 대대 의지하며 살아온 터전-토지를 수월히 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터전을 타민족에게 양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지켜야 한다. 그러나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을 다시 농촌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은 만무하며 지금 어떤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이른바 ‘록색마을의 건설’도 현실성이 너무 없다. 어느 유능한(자금이 많은) 조선족이 이런 토지를 긁어모아 농장을 꾸리고, 도시에 진출한 토지의 원 ‘주인’은 농장의 지분을 가지는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면 그 농장의 농업노동자가 어느 민족이던 그 터전은 우리 민족의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역시 조선족 마을이 산업화하는 방법이겠다. 지금 관내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만도 산동반도에 15만, 북경에 6만, 상해에 3만...이나 된다. 왜 동북 각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만 보고 내지 대도시 조선족인구의 플러스 성장은 보지 못하는가! 왜 전자 마이너스 성장의 손해만 보고 후자 플러스 성장의 성과를 보지 못하는가!
11    인구마이너스성장과 그 자연해법 댓글:  조회:5281  추천:70  2005-03-31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 별거 아니다(2) 인구마이너스성장과 그 자연해법정인갑 절대인구 마이너스 성장도 별거 아니며 너무 비관할 일이 아니다. 마이너스 성장의 주요 원인은 1, 조선족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 2, 조선족 여성이 외국으로 시집가므로 조선족 남자들이 제대로 장가를 가지 못하는 것; 3, 조선족 젊은 여성이 비례 이상 도시로 진출하므로 조선족 남자들이 제대로 장가를 가지 못하는 것, 세 가지이다. 원인1은 조선족이 보다 문명적인 민족으로 도약하는 현상이므로 지탄할 바가 못된다. 현대 사회를 살펴보면 선진 민족일수록 아이를 적게 낳고, 락후 민족일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다. 중국 56개 민족중 조선족이 솔선으로 산아제한을 잘 하고, 아이를 둘 낳을 수 있도록 되여있는 지역에서도 하나밖에 낳지 않는 가정이 생기고 있음은 조선족이 그만큼 깨였다는 말이다. 인류의 생산중 가장 기본적이고 첫 번째로 가는 생산이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인간의 자아번식이다. 인류는 수십만년간의 생존투쟁중 종래로 자체 생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우리 조선족은 총명한 민족, 리지의 민족이다. 산아의 실조(과소)로 자체의 생존에 위협을 주면서도 안일에 도취될 그런 무지한 인간이 아니다. 기필코 산아조률을 지혜롭게 해나가며 자기 생존의 지속성을 유지해 나아갈 것이다. 원인2의 주요 상대국이 한국이며 바야흐로 중국 조선족의 생활 수준이 한국을 접근하거나 심지어 초월하게 되므로 조만간 없어질 현상이다. 앞으로 한국 여성이 중국 조선족 남자에게로 시집오는, 말하자면 지금과 역행되는 혼인 현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원인3은 시장경제로 탈바꿈하는데서 생기는 일시적인 문제이다. 조선족이 농경민족으로부터 산업민족, 촌민으로부터 도시민으로 전환하는 대도(大道)에서 점점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원인2와 원인3은 모두 특정적인 력사단계, 특정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므로 이내 사라질 것이다. 인류력사상 특정적인 원인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많았지만 모두 인류 자체의 번식과 발전을 저지하지 못했다. 각종 역병에 수백만, 수천만, 심지어 억대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인류는 발전하였다. 2차 대전 때 수백만의 유태인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유태민족은 발전하였다. 조선전쟁 때 목숨을 잃었거나 해외로 유실된 우리 겨레가 수백만이었고 전쟁이 결속된 후에는 조선반도의 남녀 인구비례는 엄중한 실조(失調) 현상에 처하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 시집 못간 30대 노처녀가 득실거렸고, 게다가 한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젊은 여성의 비례이상 도시 진출, ‘양공주’ 바람 등으로 지금 중국 조선족이 현재 처한 상황보다 더 엄중한 위기에 봉착했다. 장가 못간 시골 노총각이 자살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고. 그러나 2,700만이였던 조선반도의 인구는 어느새 현재의 7,000만에 박두하고 있다. 비극, 위기였던 옛날 그 시대가 있었던가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다. 지금 중국 조선족이 처한 인구마이너스성장의 ‘위기’는 인류가 당했던 전염병, 전쟁, 전후 조선반도가 처했던 위기 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족력사 대하의 견지에서 볼 때 어쩌면 몸살 한번 앓은, 둬 번 기침한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너무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런 ‘위기’를 방치하고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말며 맹목락관하자는 뜻은 아니다. 戰略上 邈視, 戰術上 重視라는_ 모택동의 사상이 여기에도 십분 적용된다. 조선족 농촌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재교육을 실행하여 그들의 생존 능력을 제고시키는 것이 그 중의 한 방법이다. 조선족 농촌 남자들의 혼인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응급의 조치로, 돈을 들여서라도 중국 극빈 지역의 타민족 처녀들을 영입하자는 뜻에서 필자는 이라는 글을 몇 년 전 펴낸 적도 있지만 그 아이디어가 좀 당돌하고, 또 본문의 취지가 ‘위기’ 해결의 방법론을 제시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할애한다.
10    개미의 안목 댓글:  조회:5738  추천:90  2005-02-27
개미의 안목 정인갑/중화서국 편심, 사전부장 zhengrenjia@263.net 일전에 한국 신문에서 모 정유회사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20여 일이나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회사측에서는 근로자들에게 정성을 다 했으며 심지어 임원이 근로자들의 신발까지 닦아주었다고 한다. 회사에 준 피해는 막심하며 사실 근로자들도 덕본 것 없었다. 필자는 생각이 매우 착잡하였으며 중국 고서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우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주인이 돼지 목을 따 죽여 마당에 놓아 둔 짬에 개미 몇 마리가 칼 자리에 드러난 고기를 뜯어먹으려 모여들었다. 그런데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좋은 고기를 먹겠다며 옥신각신 싸우기만 하고 고기를 먹을 새가 없었다. 메뚜기 한 마리가 옆을 지나다가 한탄하였다: “조금 지나면 주인이 돼지를 끓는 물에 데우며 털을 뽑을 터인데 너희들 싸우지 말고 먹어!” 이 말에 문득 깨달은 개미들은 싸움을 그만두고 고기를 뜯어먹는데 전념하였다. 상기 정유회사 근로자들은 개미의 안목과 다를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운동권이나 노조원들이 많이는 이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공장들이 뿔뿔이 해외로, 이를테면 중국으로 옮기는데 최근 몇 년만 해도 이 때문에 줄어든 일자리가 100만개나 된다고 한다. 그 원인에는 근로자들이 너무 파업하며 일을 잘 해주지 않는데도 있다고 한다.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구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 자체를 타국으로 실어 가는데 그 고기를 많이 먹겠다고 싸워서 무슨 쓸데가 있는가? 일단 타국으로 실어가지 말도록 노력하고 볼 판이 아닌가! 지금 국제 경제 전쟁에서 한국이 위기 일발의 지경에 처해 있는데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한(韓)민족은 너무 좌경적이고, 극단적이며 근시안적인 것이 약점이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빈번한 노조, 동맹휴학도 다 여기에서 기인되는 것 같다.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 반도 나라는 대충 이렇다는 설이 있다. 베이징대학생은 중국의 민주화를 이끄는 선각자이지만 100년 사에 동맹휴학을 크게 1919년 ‘5.4운동’, 1935년 ‘12.9운동’, 1966년 ‘6.1’운동(문혁 초래), 1989년 ‘5.12’운동(천안문 사태) 등 4번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는 잘못한 것이고 네 번째에 대한 평가도 아직 미정이다. 그렇다면 빈번히 일어나는 한국 운동권의 행위가 다 잘한 것이라고 장담할 만 한가? 동맹 거부 운동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면 좋은 것 같지만 장원한 안목으로 보면 나쁠 수도 있지 않은가 등을 심사숙고하며 행동해야 한다. 긍정적이면 아예 크게 하고, 파악이 없으면 참는, 중국인의 이런 기질을 따라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인식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말하자면 개미의 안목을 버리지 않으면 한국의 올바른 노사(勞使)문화의 정착은 불가능하다.
9    중국이 자본주의 현장? 댓글:  조회:5926  추천:73  2005-02-27
중국이 자본주의 현장?정인갑/중화서국 편심, 사전부장 zhengrenjia@263.net 얼마 전 필자는 이런 ‘사고(社告)’를 보았다. 제목은 ‘중국 자본주의 현장 탐방’이고 그 안에 ‘중국 경제의 심장부인 베이징․상하이․선전 등에서 사회주의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로 변신하는 신(新) 중국을 목격할 것입니다’라고 씌어있다(사진 참조). 필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강령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번연히 씌어 있는데 말이다. “말이 사회주의이지 자본주의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반론을 할 것이므로 군더더기 말이지만 아래에 적어본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핵심은 소유제이다. 중국은 국가 공유제를 주체로 하고 각종 소유제 형태가 병존하는 경제 제도이다. 우선 중국의 토지는 에누리 없는 국가 소유이다. 멀쩡한 집이 제아무리 개인 소유라고 하여도 집 밑의 땅이 국가 소유이므로 그 집은 준(准) 개인소유밖에 안 된다. 국가 명맥에 관계되는 대형 공장, 광산, 철도, 우편, 금융, 보험, 수도(水道), 에너지 등은 모두 국가 소유이다. 그리고 규모가 상당한 상업, 통신, 연구, 교육, 위생(병원포함) 등 기구도 국가에서 운영한다. 물론 많은 업체가 개인 소유, 개인 운영을 하지만 국가의 명맥과 거리가 먼 서비스 업체가 중심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본주의 같지만 그 근본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국유체제의 보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정치상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4가지―공산당 영도,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신문, 잡지, 출판, 방송은 100% 국가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운영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과서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어긋나면 안 된다. 이래도 중국이 ‘자본주의 현장’이며, ‘세계 어느 나라보다 철저한 자본주의’인가? 큰 나무의 뿌리로부터 줄거리가 사회주의이고 일부 가지나 잎이 자본주의처럼 보인다고 하여 나무 자체를 자본주의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필자는 밥을 먹을 때 이런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한국인 문: “이 식당 당신 것인가” 주인 답: “네!” 문: “1년에 얼마 버나?” 답: “40만 웬(元, 약 한화 5,500만원) 가량 번다.” 한국인: “이것 봐, 중국 자본주의 다 됐네!” 그때마다 필자는 이런 대화를 우수개 소리로 흘려버리곤 하였다. 그런데 사, 전경령(교육인적자원부, 포스코 후원)이 이런 얼빠진 소리를 하니 도저히 흘러버릴 수 없으며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고’를 쓴 사람의 실수라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을 너무 모르는 한국인의 한 단면의 반영이라고 본다. 중국에 접근했다가 실패하는 한국인이 너무 많은데 우연이 아니며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    한국 기업에 충고한다(상) 댓글:  조회:6847  추천:68  2005-02-20
한국 기업에 충고한다(상) 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필자는 한국의 큰 기업에서 현재 근무하고 있거나 과거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에게 ‘한국 기업이 어떠냐’라는 질문을 자주 해보곤 한다. 본문에서 칭찬의 말은 할애하고 핀잔의 말만 거론하여 보련다. 핀잔의 말도 각자 다르지만 두 가지만은 거의 일치하다. 첫째는 ‘노 사원이 신입 사원을 못살게 군다’이고 둘째는 ‘고정된 퇴근 시간이 없다’이다. 신입 사원에게 업무 기능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지도 않고 조금만 일을 서툴게 하면 “이 자식 개×도 모르네”라는 욕바가지를 퍼붓는다. “×팔” “싸가지 없는 새끼” 따위의 욕은 식은 죽 먹기고 심지어 뺨을 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들에게 한국 기업이 정말 이러냐고 문의하였더니 대개 맞는 말이라고 하며 이런 현상을 거의 정당하게 본다. 신입 사원을 ‘민며느리’처럼 다루며 길을 들여야 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신입 사원을 엄격히 요구하는 것은 좋지만 虐待型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인격상의 모욕보다 더 서러운 일이 있겠는가? 한국에서면 몰라도 중국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높은 봉급 때문에 마지못해 참는 것이지 달갑게 수긍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대받은 자의 마음의 상처는 두고두고 가셔지기 어려우며 학대한 자는 반드시 그로 인한 유형, 무형 또는 직접, 간접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저녁 6시 퇴근으로 돼 있지만 6시 정각에 퇴근하는 날이 많지 않다. 더 한심한 것은 팀장이 앉아 있으면 그 밑의 사원들은 할 일이 없어도 감히 자리를 뜨지 못한다. 컴퓨터를 켜고 허우적거리며 일 하는 흉내라도 내다가 팀장이 가방을 들고 나가야 비로소 회사를 떠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선 노동법에 위반된다. 중국 기업이나 기관이 이렇게 처사했다가는 큰 일 난다. 근무 시간을 연장하려면 우선 본인의 동의를 거쳐야 하고 연장 시간에 따르는 보수를 주어야 한다. 그것도 간혹 있어야 하는 일이지 경상적으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구미 회사에서 근무하는 자들에게 문의하니 팀장의 눈치를 보며 퇴근하는 현상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물품을 생산하는 일이면 몰라도 대개 일한 시간과 그 성과가 꼭 정비례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시간 무제한으로 할수록 상쇄相殺되는, 쓸모 없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중국이 주당 이틀을 쉬고 하루에 일을 6~7시간 정도만 하여도 고속도 성장하는 예가 이를 반증한다. 상기의 현상을 현대 기업의 관리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집 식구들을 데리고 일하는 종친제의 탈을 아직 벗지 못했다는 느낌도 준다. 한강 기적을 창조한, 아시아 4마리용의 하나라는 이미지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
7    한국 기업에 충고한다(하) 댓글:  조회:7077  추천:86  2005-02-20
한국 기업에 충고한다(하) 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몇 년 전 둥관(東莞) 한국인 완구 공장의 여자 사장이 중국 근로자더러 꿇어앉아 빌게 했다가 언론 플레이에 걸려 큰 봉변당한 사례가 있다. 한국 기업의 이러한 관리 방법이 한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중국에서 잘 먹히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사실 한국 기업의 상기 두 가지 근성은 한국 본토에서 아주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해외로 진출한 회사는 좀 낫다고 한다. 본지인의 강렬한 반발 때문에 다소 고쳐진 셈이겠다. 문제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조선족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는가 이다. 반영을 들어보면 한족은 퍽 느슨하게 대해주고, 조선족은 각박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노 사원이 신입 사원을 괄시하고’‘제때에 퇴근시키지 않는’버릇을 중국 조선족에게는 변태 없이 써먹는다는 것이다. 아마 ‘조선족은 한국인이니까’하며 신경을 안 쓸 것이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다. 조선족의 기질은 세대별로 다르다. 이민 1~3세는 한국인 기질이고, 4세는 한국인 기질, 중국인(한족) 기질이 반반이고, 5세 후부터는 중국인 기질이다. 같은 세대라고 하여도 조선족 집중 지역에서 왔으면 한국인 기질이 좀 더 강할 것이고 산재 지역에서 왔으면 좀 약할 것이다. 가령 한국팀과 중국팀 간에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고 하자. 그러면 조선족 1~3세는 한국이 이기기를 바라고, 4세는 한국이 이기기를 바라는 자와 중국이 이기기를 바라는 자가 반반이고 5세 이후부터는 물론 중국이 이기기를 바란다. 그러면 각 세대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초창기 1850년대에 이주한 가족과 말기 1940년대에 이주한 가족의 세대는 퍽 다르겠지만 재 중국 조선족의 주축이 1911~1920년에 이민한 사람이므로 대충 60세 좌우면 3세, 38세 좌우면 4세, 16세 좌우면 5세로 보면 비교적 타당할 것이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의 대부분을 반 중국인 기질이거나 완전한 중국인 기질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을 ‘같은 한국인이니까’하며 완전히 한국인의 예의나 습관으로 대하면 적합하지 않다. 같이 일하는 한족에게는 “샤우왕, 레이러바, 시우시이훌바(小王, 累了吧, 休息一會兒吧―왕군, 힘겹지? 좀 쉬며하자)”, “어러바, 츠완판짜이깐바(餓了吧, 吃完飯再幹吧―배고프지? 식사 후 하자)”라고 하고 조선족에게는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자식 쉴 궁리부터?”“젖 비린내나는 새끼 밥부터 챙길 생각?”라는 식으로 차별 대우를 하면 조선족이 얼마나 서럽겠는가! 이것 역시 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의 한 단면이다.
6    조선족의 역사적 위치 댓글:  조회:7038  추천:84  2005-02-16
조선족의 역사적 위치 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중국 조선족에게 한국국적을 부여하기를 바라는 조선족이 꽤 있다. 이를 쟁취하기 위하여 한국 체류 조선족이 농성한 사례도 있으며 한국 헌법재판소에 기소, 승소한 적도 있다. 이는 조선족의 역사적 위치와 관계되므로 감정 충동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다. 민족이나 국적은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 즉 A민족, A국적인 인간의 모 단체가 시대에 따라 B민족 B국적으로 변할 수 있다. 현재 조선족의 역사적 위치는 중화민족(중화민족 안의 조선족), 중국국적이다. 해외로 흩어진 민족은 퍼버린 물과 비슷하다. 다시 주어 담으려 시도하다가는 불화, 불안정이 생기기 쉽다. 해외로 흩어진 6대 민족―중국인, 인도인, 유태인, 이태리인, 아일랜드인, 한국인 중 다른 민족은 모두 주재국화 하여 잘 살지만 유독 유태인만은 다시 팔레스타인에 주어 담았기 때문에 현재 지구촌 최대의 불화와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상 취약한 나라이며 대량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몰리면 한국 국익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조선족이 한국국적을 취득하면 많은 조선족 공무원, 교원이 쫓겨날 것이며 농민은 땅을 잃게된다. 수많은 조선족 학교는 사영으로 바뀌어야 하고, 대학 진학도 불가능해 진다. 즉 조선족이 한국국적을 얻으면 차려지는 이익보다 부딪치는 손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국적을 원하는 자만 취득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바람이 불면 취득하지 않은 조선족도 중국에서 이부자식 취급을 받을 것이며 중국의 많은 분야에서 소외될 것이다. 좀 더 멀리 내다보기로 하자. 지금 중국은 가속도로 비약하고 있다. 현재중국의 GDP는 1,200달러이지만 구매력으로 따지면 4,000달러로 보고 있다. 불원간에 중국 조선족의 생활 수준은 한국을 접근, 초월하게 된다. 그때 다시 중국국적으로 바꿀 것인가? 1960~62년, 중국이 어려울 때 많은 조선족이 조선으로 불법 월경했다가 후에 중국이 좋아지니 대부분 중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회복하였다. 체면이 서지 않는 처사이다. 조선족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을 필자는 반대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감안하면 어쩌면 아주 필요하다. 그러나 그사이 한국에 이를 수긍하는 정책이 잘 되어 있지 못했다. 주요하게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인데 모험적인 국적 취득 문제를 운운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중국 조선족은 200만의 방대한 숫자에 100~150년의 긴 역사, 상당한 정도로 중국화 하였다. 중국에 발붙이고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 우리는 이 길밖에 없다. 이래야 우리는 중국과 한국에서 다 대접받을 수 있다.
5    역사의 검증(상) 댓글:  조회:7103  추천:76  2005-02-16
역사의 검증(상)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어떤 문제에 대하여 현시점에서는 시와 비의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때 ‘장차 역사의 검증에 맡기자’라는 말을 잘 쓴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면 시비가 저절로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한동안의 시간’은 얼마 길어야 하는가?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1989년 봄 베이징대학생들이 후야우방(胡耀邦)에게 사면복권 해 주어야 한다며 들고일어났다. 그것이 구 소련 공산당총서기 고르바초프를 따라 배워야 한다는, ‘선 정치개혁, 후 경제개혁’을 슬로건으로 하는 대학생들의 대형 시위, 톈안문(天安門) 광장 단식으로 이어졌다. 세계를 뒤흔든 ‘톈안문 사태’다. 약 1995년경에 이르러 구 소련과 유고의 해체, 전반 동구권 개혁개방의 실패, 유독 중국 개혁개방의 성공 등 사실 앞에서 중국의 ‘선 경제개혁, 후 정치개혁’이 옳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49년 중공 정부가 수립될 때 국호를 ‘중화민국’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고쳤다. 참신한 정권이면 의례 참신한 국호, 당시에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 후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 가입, 타이완(臺灣)과의 관계 등 일련의 문제에서 국호를 고쳤기 때문에 입은 손해가 막심하였다. 1959년에 마우저둥(毛澤東)은 ‘원래의 국호를 썼을 것 잘못했다’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하물며 원 국호도 위대한 혁명 선행자 순중산(孫中山)의 신해혁명의 산물이며 새 국호와 의미상에서도 다른 점이 없고 다만 쟝쪠스(蔣介石)에 의해 잠깐 오염되었을 뿐이니 말이다. 이를 깨닫는데 10년이 걸렸다. 1950년대 후반 마우저둥은 무산계급독재 하에서의 ‘부단혁명론(不斷革命論)’을 구상해냈다. 무산계급이 정권을 쥐었지만 집권층 안에 자산계급 대리인이 많으므로 혁명을 통해 끊임없이 숙청해내야 한다는 그럴듯한 발상이다. 이 이론에 따라 1957년의 반우파(反右派), 1962~4년의 사회주의교육 즉 사청(四淸), 1966~9년의 문화혁명, 1970~5년의 비림비공(批林批孔)․반우경번안풍(反右傾飜案風) 등 정치운동을 수없이 하였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중 전회(十屆三中全會)는 이를 부정하는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놓았다. ‘부단혁명론’의 오류를 인식하는데 20년이 결렸다. 1917년 소련이 창건되며 생산자료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생겼다. 그 후에 생긴 12개의 사회주의 국가는 물론 모두 소련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에 대해 의심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계획경제의 병폐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재래식, 경전식, 계획경제식 사회주의가 1978년에 먼저 중국에서 부정되었으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대체되었다. 장장 60년이 결렸다
4    역사의 검증(하) 댓글:  조회:7048  추천:80  2005-02-16
역사의 검증(하)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20세기 초부터 중국에서는 한자 자모병음화(拼音化)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그 방안도 여러 가지 등장했다. 마우저둥(毛澤東)도 “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 민족처럼 병음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 문제는 찬반양론의 싸움이 팽팽하였다. 그러나 100여 년 간의 실천을 통하여, 특히 한자 컴퓨터화가 성공됨에 따라 최근 몇 년간 병음화의 필요성이 없다는 견해로 통일되었다. 한자 개혁의 방향을 검증하는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런 검증 없이 4,000년의 역사를 지닌 한자를 서둘러 포기하고 알파벳 자모병음화를 채용했더라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겠는가! 중국 역사상의 인물 조조(曹操)는 간웅(奸雄)으로 1,700년 간 지탄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와서 탁월한 정치가, 전략가로 재평가 받았다. 진시황은 폭군으로 2,000여 년 간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20세기 중반에 중국의 통일 대업을 이룩한 군주이면서 폭군, 즉 공로와 과오가 반반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2,000여 년의 검증 끝에 내린 결론이다. ‘역사의 검증’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문제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역사의 검증을 받는데는 짧아 5년 정도면 되는 수도 있지만 길어서 100년, 심지어 2,000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쟁론이 있거나 파악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내심 있게 기다리는 중국인에 반해 한국인은 너무 성급하다. 예를 들면 전임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심지어 박정희, 이승만을 최종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후세로 미루어야 할 것이다. 둘째, 앞날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나온 역사로 검증할 수도 있다. 중국인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에 4,000년 간의 역사 경험을 잘 활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략이 비상한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들은 이 면에서 너무 약하다. 국제관계, 남북관계, 수도이전 등 문제의 처리에 역사의 계발을 받을 여지가 많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셋째, 앞날의 검증에 맡기자니 시급하고, 역사경험을 참조하자니 사무전례(史無前例)할 때 중국은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실험해 보고 신빙성이 있을 때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농촌도급제, 주택상품화, 대입시험 과목의 ‘3+X법(수학, 국어, 외국어+기타지식)’ 등에 이런 방법을 썼다. 시공(時空) 전환의 철학 원리이다. 시간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공간으로 보충하는 방법이겠다. 한국 기초교육에 한자 교육을 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를 쟁론만 하지 말고 먼저 한 개 또는 몇 개 도에서 실험하고 성공 여부에 따라 채용 또는 취소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몇 년, 심지어 10년 이상의 실험을 해도 괜찮다.
3    우물 안의 개구리 댓글:  조회:7133  추천:85  2005-02-16
우물 안의 개구리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 4년 전 필자의 친구가 랴우닝(遼寧) 텔레비전방송 3채널에 한국음악프로 ‘쿠쿠한류펑(酷酷韓流風)’을 개설하고 필자에게 본 프로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 적이 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볼 수 없는 채널이므로 막무가내였다. 이번 국경 연휴에 고향 랴우닝에 가서 사람들에게 문의하니 한결같이 그런 프로가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너무 의심쩍어 친구들과 함께 해당 시간(17:00~17:30)에 그 채널에 들어가 보니 번연히 그 프로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제야 친구들은 중국 텔레비전 방송은 전혀 보지 않고 한국방송만 본다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좀 더 알아보았더니 농촌의 조선족들은 전혀 중국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도시의 일반 조선족들도 거의 보지 않으며 지식인들만 조금 보는 형편이었다. 물론 그들은 중국의 신문, 잡지도 보지 않는다. 필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프로가 재미있고 없고를 제쳐놓고, 또 정부의 위성안테나 설치 금지령의 잘잘못을 제쳐놓고, 조선족들의 이런 처사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저절로 우물 안의 개구리로 되고 있는 것이다. 1975년 필자가 옌지(延吉)에서 근무할 때 정기간행물 발행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다. 잡지 중국어판의 발행부수가 제한되어 많은 한족들이 주문할 수 없으므로, 중국어판을 보는 조선족더러 한족에게 양보하라는 회의였다. 조선족들은 한결같이 반대하였다. 중국어 판을 보아도 언어 등 제한성으로 형세에 떨어지는데 조선어 판을 보면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며. 사실 조선족들은 여러 면의 제한성으로 중국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부지런히 보아도 한족에게 떨어지기 쉽다. 그런데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것이 된 말인가! 이런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어떻게 일사천리로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며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 사실 조선족은 중국 이민 150년 동안 우리 민족들끼리 똘똘 뭉쳐 자기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다. 그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형세 하에 이렇게 살면 우물 안의 개구리밖에 될 것 없다. 우리민족 속에서는 학자, 교수, 가수, 운동선수, 사업가…라고 우쭐되지만 우리민족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13억 인구라는 중국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200만 속에서 만의 아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국제화 시대, 지구촌 시대의 차원에서 보면 13억 속에서의 아무것도 그리 대단할 것 없다. 영어를 모르면 반 문맹이고 세계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면 반 머저리이다. 조선족은 하루속히 200만, 4,000만이라는 울타리에서 헤쳐 나와 13억, 60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2    아리랑 댓글:  조회:7424  추천:97  2005-02-16
아리랑정인갑|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필자는 남,북한 선수가 손잡고 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할 때 ‘아리랑’을 연주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치러졌을 때 시종 대한 민국의 하늘에 울려 펴졌던 ‘아리랑’!!! 이 ‘아리랑’ 이야말로 한민족의 얼을 가장 대표할 수 있는 민요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필자는 KBS TV 위성 방송에서 이런 대목을 본 적이 있다. 체코 여인 들이 체코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 모여 있었다. 한국 기자 한 명이 나타나 그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이러했다. 기자 문: "어째서 여기 모여있지요?" 여인들 답: "한국 비자 받으려 왔어요.." 기자 문: "한국에는 무엇을 하러 가세요?" 여인들 답: "돈 벌려 가려 해요.." 기자 문: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기나 하고 가려고 해요?" 여인들 답: "네...." 이에 한국 기자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이때 한 여인이 자신 만만하게 다가서며 ‘아리랑’을 불렀고, 그 기자는 그 여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면을 볼 때, 필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이 장면에 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16소절의 짤막한 민요가 한 개 민족의 정서를 강력히 자극할 수 있고 ,민족의 얼을 응집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세상에 이런 민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또 있겠는가! 아리랑은 실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정신적 자산이며, 문화재이다.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 님 웨일즈가 '김산'이라 부르는 조선인 혁명가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의 이름이 이라고 한다. 이 책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데올로기가 원인이 되여 수상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앞으로라도 노력하여 책이 노벨상을 받음과 더불어 ‘아리랑’ 민요도 전 인류의 문화재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겠는가! ‘아리랑’은 아마 한자어 ‘我離郞’(나는 낭군과 이별했네)일 것이고, 아라리는 한자어 ‘我難離’(아난리, 나는 이별하지 못하겠네)의 와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민요에 여러 가지 ‘아리랑’이 있지만’...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하고 부르는 아리랑이 진짜 아리랑(낭군과 이별)일 것이다. 물론 정설은 아니고 중국어 발달사를 좀 알기에 우리말을 연구할 때마다 한자와 연결시키는 필자의 벽호(癖好)에서 생긴 가정(假定)에 불과하다. 어느 현명한 분께서 정답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주중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베이징 한국 문화원의 선생으로 있으면서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 ‘아리랑’ 민요를 꼭 가르치곤 했다. 그러면서 “아리랑은 한민족 문화의 상징이다. 아리랑도 모르면 한국어를 배웠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5년 동안에 필자에게서 아리랑을 배운 중국인이 1천 명이나 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 중에 아리랑을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 20대 30대 가운데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심지어 한국인 20대, 30대 가운데도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아리랑’을 모른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민족 정신이 쇄퇴해지고 민족의 얼이 퇴색되는 것이 아니가 하는 걱정이 든다
1    정인갑 프로필 댓글:  조회:7087  추천:131  2005-02-02
정인갑 本 貫 平北 鐵山郡 余閑面 加峰里, 1918년에 이주한 동포 3세出 生 1947년 8월 중국 遼寧省 撫順市學 歷 北京大學 中文學科 古典文獻 專攻 졸勤務職場 中華書局 編審, 辭典部長(1982년 2월~현재)淸華大學 中文學科 객원 교수(1992년 8월~현재)學術背景 中國音韻學會 理事, 中國辭書學會 會員社會職務 전 <베이징 저널> 주간신문 부 주필(1997~2003년) 칼럼리스트, ‘정인갑 칼럼’ 305편현 <베이징 뉴스> 주간신문 주필(2004년 5월~현재)칼럼리스트, ‘정인갑 칼럼’ 집필 중北京三江學校(조선족 소학교) 교장(1999년 6월~현재)북경시조선족中壯年활동센터 회장(2001년 5월~현재)著 書 (서울, 多樂園, 1998년)<중국문화.COM>(서울, 多樂園, 2002년) 등 5種.자전, 사전 多部 주필論 文 중국어 발달사에 관한 논문 등 10여 편譯 作 <나의 부친 등소평> 毛毛, 한국 三文出版社, 1993년<2000년 신한국> 金泳三, 人民出版社, 1992년<明成皇后> 柳洪鐘, 臺灣 建宏出版社, 2002년등 中译韓, 韓译中 역작 약 400만 字zhengrenjia@263.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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