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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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경어'단상 (정인갑60) 댓글:  조회:7154  추천:104  2007-10-23
‘경어’ 단상 정인갑김정룡 군의 글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는 조선족 언어생활 중의 문제점을 면바로 진맥한 좋은 글이다. 따라서 필자도 ‘경어’에 대한 단상을 적어본다. 첫째. 우리말에는 경어 외에 ‘경어체(敬語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경어보다 더욱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경어는 어휘의 범주에 속하고 경어체는 문법의 범주에 속한다. ‘체’는 문법적으로 체계를 이룬다는 뜻이겠다. 필자는 본문에서 경어의 반대어를 ‘반말’로, 경어체의 반대어를 ‘반말체’로 표현하련다.    ‘처먹다’ ‘뒈지다’ ‘꼴까닥하다(죽은다의 뜻)’는 욕이지만 ‘처먹으시요’ ‘처먹으십시오’ ‘뒈지시오’ ‘뒈지십시오’ ‘꼴까닥하시오’ ‘꼴까닥하십시오’는 경어체이다. ‘잡수다’ ‘계시다’는 경어이지만 ‘잡수라’ ‘계시라’는 반말체이다.   漢語에는 경어는 있지만 경어체가 없다. ‘您’(nin, ni+n)은 경어이지 경어체가 아니다. 만약 ‘您’이 반말체 ‘你’에 대응되는 경어체라면 ‘탄(他)’ ‘원(我)’ ‘라우슨 (老師)’…등의 말이 있어야 한다.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중의 ‘-씨’ ‘-분’ ‘-님’ ‘저’는 경어이고 (그중 ‘저’는 自謙語) ‘하시다’ ‘-요’는 경어체이다. ‘-요’는 함경도 방언에서는 반말체로 취급하지만 기타 지역 방언에서는 ‘半경어체’이다. 김정룡 군의 ‘-요’에 대한 서술에는 약간 미비한 점이 있다고 본다.  둘째. ‘-시다’는 특수한 경어체이다. 다른 경어체는 듣는 사람을 존경하기 위해서이고 ‘-시다’는 행위자를 존경하기 위해서이다. ‘제가 지금 신문사에 찾아가시려고 하는데’에서 ‘찾아가는 사람’이 행위자 즉 말하는 사람이므로 ‘가시다’로 자기를 존경하면 분명 어폐이다. 필자는 ‘-시다’와 같은 체를 ‘행위자경어체’ 또는 ‘주체경어체’라고 부른다.   ‘-시다’에서 존경을 표시하는 형태소는 ‘시’인 듯 하지만 ‘아뢰사돼…’ ‘했수다(평안도 방언)’ 등에서 보다시피 ‘사’ ‘수’로도 표현할 수도 있으므로 ‘시’가 아니라 형태소(語素) ‘ㅅ’로 보아야 한다.  셋째. 지구촌에서 경어체가 있는 언어는 극히 적다. 적어도 漢藏어계, 印歐어계의 수백종 언어에는 없다. 필자가 모든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체크해 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어, 일본어를 제외한 다른 알타이어계 언어에는 경어체가 없다. 그러면 우리말의 경어체는 분명 후세에 새로 생긴 듯 하다.  우리말에 경어체가 있어 자오감을 느끼고 있지만 필자는 생각을 달리 한다. 다른 언어들은 경어체가 없다 하여 추호의 결여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말의 경어체는 오히려 많은 불편과 폐단을 일으킨다. 아르젠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리레스에는 약 200명의 화교가 살고 있지만(1978년) 다 한어를 잘한다. 그러나 북경에는 6만명 이상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외 한국인 6만명) 2세만 되면 조선말을 모른다. 무엇 때문인가? 주요 원인의 하나가 경어체 때문이다. 손님이 왔다가 떠날 때 자식이 “또 놀러 오라!” 하면 부모는 “이놈 자식, ‘또 놀러 오세요’ 하여야지!” 라며 핀잔준다. 다음 기회에 “또 놀러 오세요” 하면 “이놈자식, ‘또 놀러 오십시오’ 하여야지(이번에 온 손님은 전번보다 더 연로한 분)” 라며 또 핀잔준다. 이렇게 둬번 당하고 나면 자식들은 아예 입을 다물고 조선말을 외면하게 된다. 그러니 조선말을 못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집안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생기곤 하였다. 한어는 한마디 알면 한마디를 써먹을 수 있지만 우리말은 다 알아야 한마디를 써먹을 수 있다. 경어체가 주요 원인이다. 경어체가 없는 언어에서는 이런 폐단이 없다. 필자는 우리말에 경어체가 제발 없었으면 한다. 경어체가 없던데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다시 없어지지 못 한다는 법은 없다. 한국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젊은 일대들이 경어체를 써야 할 곳에 반말체를 쓰는 현상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인터넷에 의한 교류가 일사천리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 혹시 그에 힘입어 우리말의 경어체가 없어질런지….
59    언어의 퇴화냐, 언어의 진화냐? (정인갑59) 댓글:  조회:7446  추천:100  2007-10-18
언어의 퇴화냐, 언어의 진화냐?—《언어의 퇴화와 인간의 퇴화》를 읽고정인갑 서영빈 교수의 많은 글들을 필자는 감명 깊게 읽곤 한다. 잘 씌어진 글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의《언어의 퇴화와 인간의 퇴화》 (이하 《퇴화》로 약칭함)만은 좀 음미해 볼 생각이 든다. ‘인간의 퇴화’ 문제는 참견할 수준이 못 되고 ‘언어의 퇴화’ 화제에 대하여서는 일가견을 말해보련다. 지금 서울 사람들은 漢語 ‘餡兒’에 해당되는 한국어를 ‘소’라 하지 않고 ‘속’이라 하고 ‘다르다’의 개념을 ‘맞지 않다’의 개념에 쓰이는 단어 ‘틀리다’로 표현한다. 하여《퇴화》의 저자는 개탄하였다:‘이건 분명히 언 어의 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은 언어의 퇴화가 아니라 언어의 변화, 심지어 언어의 진화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첫째, 민중의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진화하지 퇴화할 수 없으며 또한 인위적으로 퇴화시킬 수도 없다. 중국 역사상 唐宋八大家가 고문 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지만, 그때도 민중의 언어는 엄청나게 변화, 진화하였지 추호도 퇴화하지 않았다. ‘餡兒’에 해당되는 우리말 어원이 ‘속’이므로 원래 ‘속’이라 하다가 ‘소’로 변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을 다시 ‘속’이라 하여도 ‘소’가 ‘속’으로 발전한 것이지 퇴화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서울 방언에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속’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랴! 둘째, 언어의 변화 발전은 그 나라나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 발전의 중심지(이하 ‘문화소용돌이지역’으로 약칭함)가 이끈다, 이는 객관적 철의 규율이다. 漢語의 예로, 약 1,000년간 중국 동북부(개봉, 북경 및 남경을 연결하는 삼각지)가 변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이 지역의 漢語는 북방 ‘오랑캐’의 말이 살판치어 엉망진창으로 망가졌으며, 또한 많은 학자들이 字書, 韻書들을 펴내 정통적인 漢語를 고수해보려 했지만 다 허사로 돌아갔다. 지금의 북경 방언은 漢語에 동화된 滿族의 口語이며 현대 표준 漢語는 이 ‘오랑캐’ 의 구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영어는 당연 영국식 영어가 정통이며 미국식 영어는 그야말로 ‘오랑캐’ 지역으로 이민간 쌍놈들의 말이다. 그러나 미국이 ‘문화소용돌이지역’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미국식 영어가 점점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울은 조선왕조 이래 약 500년간 우리민족의 ‘문화소용돌이지역’ 작용을 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조만간 서울말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연길에서 아무리 ‘소’, ‘치솔’, ‘웨치다’, ‘돈을 꾸다’고 해도 서울에서 ‘속’, ‘칫솔’, ‘외치다’, ‘돈을 빌리다’라 하면 무가내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언어 자체에는 是와 非가 없다. ‘約定俗成’이면 그만이다. 그 ‘約定俗成’도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인정받아야지 벽지의 인정은 무효다. 해마다 중국 조선족 언론 일꾼들이 서울에 연수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퇴화》의 저자는 개탄할 것이 아니라 다년간 서울생활의 언어경험을 총화하여 중국조선족 언어의 발전을 잘 이끄는 것이 좋겠다. 셋째, 인류의 문화사를 보면 ‘문화소용돌이지역’은 언어를 포함한 문화의 변화 템포가 가장 빠른 지역이다. 이 지역은 모종 문화현상을 배출하면서도 또한 그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새로이 배출하기 좋아한다. 몇년 전 파리에서 시세에 가장 앞선다는 패션이 불과 1,2년 후이면 후진 옷이 돼 버리기가 일쑤다.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주현미, 최진희의 노래가 한창인데 서울에서는 이내 ‘할아버지 벌의 노래’로 돼 버린다. 명사 ‘복덕방’, ‘룸살롱’도 삽시에 ‘부동산’, ‘단란주점’으로 변해 버리고. 지금 서울에서 모음 ‘ㅓ’를 ‘ㅗ’에 접근하게 발음한다. 서술문인데도 술어부분의 억양을 상당히 높인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하지 말아’를 ‘그렇게 하지 말어’로, ‘그렇지 않아’를 ‘그렇지 않어’로 말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말의 모음조화 규율도 깰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간다. 광복 후 점점 변해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필자는 서울말이면 무작정 따르자는 뜻이 아니다. ‘속’, ‘틀리다’, ‘돈을 빌리다’, ‘ㅗ에 접근하는 ㅓ’, ‘술어의 억양을 높이는 서술문’, ‘…말어’, ‘…않어’ 등들은 A, 한동안 진통을 격다가 없어질 수도 있고—자생 자멸하고—B, 뿌리를 박고 표준어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 A에 속하건 B에 속하건 모두 소용돌이 지역에서 빠른 템포로 나타나는 변화현상, 언어의 변화나 진화이지 퇴화가 아니다. 넷째, 언어를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은 그 문화를 배출한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오래 남아있는다. 漢語 어음은 2천년간에 일사천리로 변하여 왔지만 중국의 외곽일수록 적게 변하거나 변하지 않았다. 옛 음이 많이 남아있는 방언이 粤, 閔방언이며 한국어 한자음은 더 옛날의 것이다. 중국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세 한국어 '∆ [Z]' 음이 후세에 없어졌다. 그러나 함경도 방언에 그의 흔적(變種)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마슬(마을), 가슬(가을), 구시 (구이, 소나 말에게 여물을 주는 긴 그릇) 등이 그것들이다. 역시 ‘문화소용돌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말에서 ‘속’, ‘틀리다’, ‘빌리다’, ‘ㅗ음에 접근하는 ㅓ’, ‘술어부분의 억양을 높이는 서술문’, ‘…말어’, ‘…않어’가 뿌리를 박아 표준어 지위를 얻어도 기타 지역의 언어, 특이 중국 조선족의 언어에서는 상당히 긴 세월간 이를 접수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진화한 서울말(우리말)에 대한 ‘보수’, ‘守舊’로 밖에 풀이할 수 없다.
58    한국인은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 (정인갑58) 댓글:  조회:6253  추천:86  2007-09-19
한국인이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 정인갑지금 한국인이 중국으로 밀물처럼 들어오고 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이 끝나면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한국인이 100만 명을 돌파하고(2006년에 이미 70만 명), 매년 중국을 드나드는 한국인이 누계 600만명(2006년에 이미 390만 명)이상 될 예상이다. 여기에 대두되는 가장 절박한 문제가 중국행 한국인들이 어떻게 중국어를 배워 내는가 이다. 20대까지는 괜찮지만 30대 이상이 문제다. 중국어는 고립어이므로 가장 배우기 쉬운 언어이다. 한자 배우기가 좀 어렵지만 40대 이상의 웬만한 한국인이면 1,000자 정도는 안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데 쉽게 가르치는 교재와 교사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필자는 평생 중국어를 연구해 왔으며 마침내 한국인에게 중국어를 쉽게 배워주는 방법과 교재를 고안해 냈고 한번 실천에 옮겨보기도 하였다. ∆ 언어를 배우는데는 특수로부터 일반(방법1), 일반으로부터 특수(방법2)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은 한마디, 한마디의 말을 수없이 배우면 문법이 저절로 알려지는 방법이고, 2는 문법 틀에 맞추어 교재를 편찬하고 과문을 만드는 방법이다. 나이가 어릴 수록(15세 좌우까지) 방법1을 써야 하고 나이가 많을 수록(10대 말부터) 방법2가 좋다. 20대 이상이면 당연 방법2를 써야 한다. ∆ 나무의 정체를 아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잎을 하나 하나 따 버리니 그 나무의 정체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톱으로 나무 그루를 베어 잎이 말라 떨어지면 그 나무의 정체가 이내 일린다. 1은 잎을 따는 방법이고,  2는  그루를 베는 방법이다. ∆ 중국어 문장을 고도로 귀납하면 系詞 ‘是’가 술어인 ‘他是韓國人’, 형용사가 술어인 ‘他高興’, 동사가 술어인 ‘他吃飯’ 세 가지밖에 없다. 이 기초 위에 체언에는 한정어가 붙고, 용언에는 상황어(술어 앞, 술어 뒤)가 붙는다. 이상이 陳述文이다. 이 외에 몇 가지 疑問文, 否定文, 時態를 나타내는 방법, 이렇게 약 20가지 문장을 익히면 중국어 문법을 끝내준다. 약 100시간, 3개월이면 마스트할 수 있다. ∆ ‘몇 천 개의 단어를 익혀야 하고 발음과 聲調를 장악하기도 어려우므로 몇 년은 걸릴텐데’라며 필자를 면박할 것이다. 쉬운 방법이 많다. 이를테면 한국어 한자어에서 ‘–ㄴ, -ㅁ, -0’이 終聲인 글자 및 단어를  중국어에서 그대로 써먹어도 대충 맞다(단 –ㅁ를 –ㄴ로 읽어라). 예: 반장, 황량, 방면, 랑만, 민진당, 중심(신), 산림 (린),…그대로 읽어도 중국인들이 대충 알아듣는다. 이렇게 단어, 발음, 성조 등을 쉽게 장악하는 비결을 필자는 10가지 고안해 냈다. ∆ 필자는 젊었을 때 茅臺酒를 가끔 둬잔씩 얻어마시군 하였다. 10년 이상 마셨지만 마우타이주 맛이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후에 한 번에 반병씩 여러번 마시니 이젠 마우타이주의 맛을 안다. 가짜로 필자를 속일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언어를 배우는 방법1은 가끔 둬잔씩 마시는 격이고, 방법2는 단번에 반병씩 마시는 격이다. 필자의 교재는 중국어 문법 한 가지를 전수하기 위하여 보통 20~30개의 문장으로 과문을 꾸며 놓았다. 단번에 철저히 장악할 수 있다. ∆ 언어를 잘 가르치려면 1, 그 언어의 口語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2, 그 언어의 문법을 잘 알아야 하며; 3, 보통언어학 즉 언어과학을 장악해야 한다. 한국인 중국어 교사는 대부분 중국어 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중국인 중국어 교사는 대부분 문법을 잘 모르며, 한국 교사나 중국 교사나 언어과학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것이 현재 중국어 교학상의 큰 문제점이다. ∆ 필자가 말하는 대상자는 첫째, 20대 이상이어야 하고; 둘째, 한자를 좀 알아야 하며; 셋째, 지력상수(IQ)가 보통은 되며 문법을 개념적으로나마 알아야 하며; 넷째, 한자어 감이 있어야 한다(‘물수건’하면 ‘물’은 고유어이고 ‘수건’은 한자어 ‘手巾’이라는 정도는 알아야 한다).
57    ‘思 想 罪’ (정인갑57) 댓글:  조회:5484  추천:74  2007-08-02
‘思 想 罪’정인갑   필자는 최근 한 차례의 경력을 회고하며 ‘사상죄’라는 문제를 반복 심사숙고하고 있다.   1970년 필자는 군인의 몸으로 長春第一自動車工場에 입주하여 지좌(支左: 혁명적 좌파를 지원)를 하였다. 공장의 혁명 좌파를 부추기고 '계급의 적'을 타격하며 그릇된 사상을 비판하는 정치운동을 진행하여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 그 취지다. 필자는 發動機分廠 軸齒車間을 담당하였다.   어느 날 오후, 車間에 나가니 車間主任이 필자에게 그 날 오전에 일어난 심상치 않은 사건을 알려주었다. 동우군(가명)이란 본 직장의 젊은 근로자가 출근하자마자 車間주임 사무실에 앉아서 외쳐대었다:   “고구마, 고구마, 나는 감자, 나는 총사령관 감자! 전국적인 폭동 개시. 북경 총진격 당장 착수! 포병부대는 중남해를 포격할 것, 제1부대는 북경 서부를 진격할 것, 제2부대는….” 車間주임 등은 동우군을 공장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청진기를 동우군의 가슴에 대고 의사 문: “어디가 불편하지?” 동 답: “林彪는 나쁜 놈!” 의사 문: “머리가 아프지 않나?” 동 답: “劉少奇는 청렴한 관리.” 의사 문: “엊저녁 무슨 꿈을 군 것 아닌가?” 동 답: “문화대혁명은 엉터리.”…   필자는 이내 동우군을 공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필자 문: “당신 오늘 무슨 큰 일을 하고 있다던데?” 동 답: “전국적인 폭동을 명령해 놓았는데 모르겠다.” 문: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자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다면서?” 답: “없다.” “’임표는 나쁜 놈’, ‘유소기는 청렴한 관리’ 등 말을 했다면서?” “아, 그렇게 생각한다. 무슨 잘못된 점이 있는가?”   “그러면 반동이고 나라를 반대하는 역적이 아닌가!” “왜 역적이라는 감투를 씌우나?” 필자 왈: “임표는 모주석의 계승자라고 헌법에 씌어있는데 임표를 반대하면 헌법을 반대하는 거고, 헌법을 반대하면 나라를 반대하는 역적이 아닌가!” 동 답: “그렇다면 나를 반동, 역적이라는데 동의한다. 반동, 역적이면 어쨌나!”   필자는 이내 그를 발동기분창 廠長(군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차간주임 전원 회의를 하다가 금방 휴식하는 때였다. 필자는 창장과 뭇 차간주임 앞에서 그와의 담화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왜 임표와 문화대혁명을 그렇게도 적대시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한번은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나의 부친을 투쟁하고 있었다. 부친은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역사반혁명이라 쓴 간판을 걸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나는 역사반혁명분자다!’ ‘모주석과 혁명군중에게 사죄한다…’라고 외치더라. 그때 만약 기관총이 있었더라면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을 다 갈려 죽였을 것이다. 희틀러 못지 않은 閃電戰(電擊戰)을 일으켜 공산당이고 뭐고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이놈은 지금 극도의 반동 사상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렇게 내뱉고 있다. 혹시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수도 있고…”라는 말을 남기고 필자는 창장 사무실을 나왔다.   공장 혁명위원회는 즉시 동우군을 길림성혁명위원회에서 지정한 公主嶺市 정신병 監定所 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발동기분창의 수천 명 종업원들은 계급의 적개심에 격양되어 퇴근하지 않고 동우군 聲討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8시경 동우군을 실은 차가 공장으로 돌아왔으며 ‘僞病(꾀병)’이라는 감정 결과를 선포하였다. 수천 명 종업원들은 즉시 동우군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튿날 성토대회는 전 공장으로 확산되었으며 5만 명 종업원들은 일제히 동우군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들끓었다.   약 둬 달 후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책임자 한 분(군인)이 찾아와 이미 조사한 동우군 사건 始末을 필자와 확인하였다. 그런 후 동우군에게 10년의 실형을 내렸다고 알려주었다. “아니, 이런 악독한 반혁명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느냐?”며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책임자 왈: “동우군의 사상이 극도로 반동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광범위한 군중을 煽動하는 행동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 사상 자체는 죄가 아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한 말이나, 반역자가 국가 권력자 앞에서 한 말은 죄로 취급할 수 없다. 그가 창장, 車間주임에게 한 말을 죄로 취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한 말도 죄가 아니다. 군대는 나라 권력의 전형적인 대표이며 군인 개개인도 권력자에 속한다.”   “마땅히 동우군을 무죄 석방해야 하는데 민심이 두려워 마지못해 일단 10년 언도를 한다. 오히려 당신에게 착오가 있으며 엄중하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자백을 유도하였다. 다른 사람이 나쁜 말을 하게끔 유도한 행위는 엄중한 착오다. 물론 우리는 당신의 행위를 충분히 이해하며 당신을 처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팔자는 아연실색하였으며 심지어 당황해졌다….큼직한 계급의 적을 붙잡아냈다는 표창을 받기커녕 하마트면 처분을 받을뻔 하였으니 말이다..   그 후 약 반년이 지난 어느 날, 필자는 아침 구보(驅步)훈련을 하다가 우연히 길가에 서있는 동우군과 부딪쳤다. 깜짝 놀랐으며 마음이 섬뜩하였다. 즉시 길림성혁명위원회 당국에게 왜 동우군을 놓아주었나 문의하였다. 그가 간헐적(間歇的)정신환자(정신이 들락날락하는 정신환자)이므로 무죄 석방하였다고 한다.   필자 왈: “어떤 정신환자는 공산당과 모택동을 찬양하는 노래만 곧잘 부르는데 동우군의 경우 반동적인 말만하므로 그가 간헐적정신환자라고 하여도 반동이며 죄인이다.”   책임자 왈: “정신환자가 아니더라도 죄가 없기 때문에 석방하여야 한다. 정신환자이므로 민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석방하였을 따름이다. 정신환자가 한 행위는 당연 죄로 취급할 수 없다. ”   이상이 필자가 말하자는 스토리의 전부이다. 이 사건을 회고하며 필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제를 음미해 보련다.   1, 문화대혁명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홍색’ 테러 속에서 길림성 지도자들이 위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요녕성의 張志新은 동우군과 유사하였다. 장지신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懷疑를 동료(요녕성 선전부 간부들, 역시 권력자에 속함)에게 말했지만 죄로 몰아붙였으며 1973년부터는 정신이상 증상이 보였는데도 무작정 사형에 처하였다. 길림성 지도자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 ‘사상죄’는 ‘動機罪’라고도 하며 머리 속에 담아만 놓고 행동에 옮기지 않은 죄를 일컬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아직 아리송하다. 일기에 쓴 것 만인지, 말로 토로만 하고 선동하지 않으면 되는지, 무단 투쟁 또는 폭력적 행위만 없으면 다 행동에 옮기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 확실한 법적 규명이 없다.   3,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처사에 따르면 행동에 옮기는 것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환자가 의사에게, 백성이 국가 권력자에게 토로한 반역사상은 죄가 아니다. 그때 필자는 농민으로부터 군복을 입은지 반년도 안 되는 최하층 졸병이었지만 권력자였다. 권력자에는 국가 권력기관의 모든 사람­—관리, 공무원, 군인, 경찰 등이 포함될 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국영학교 학생이 선생에게 한 말도 죄가 아닐 듯 하다. 권력자에는 촌민위원회 간부까지 포함시켜야 됨 즉 하다. 상기 범위의 사람을 다 합치면 나라 인구의 10%는 될 것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 앞에서 반역사상을 토로해도 죄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1957년의 우파는 거의 다 공산당간부에게 의견을 제출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나쁜 사상’을 머리에 담고만 있어도 죄가 된다. 2004년에 반포한 중국의 최신 헌법에도 ‘사상죄’는 죄가 아니라는 조목이 없다. 이 문제의 철저한 해결은 어느때 가야 될지! 이렇게 볼 때 1970년대의 길림성 지도자들이 더욱 돋보인다. 4,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처사를 찬양하였지만 대국이 아니면 실로 이렇듯 조류에 거슬러(反潮流) 진리를 견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어렵다. 중국 수천 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난의 시기, 암흑의 시기면 꼭 조류를 거슬러 나라를 재난에서 구하는 救星이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은 전도가 밝은 나라이다. 십여 개 사회주의 국가 중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하며 등소평도 바로 이런 구성이다.
56    김기덕씨를 위해 청원한다 (정인갑56) 댓글:  조회:5874  추천:118  2007-06-02
김기덕씨를 위해 청원한다 정인갑필자는 <동북아신문> 홈페이지에서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았다.   조선족 김기덕씨는 1991년에 한국에 친척방문 가 모 건설업체에서 일하였다. 2003년 해당 업체가 부도나자 7억 원의 채무를 갚아주고 회사를 인수하였다. 연 수주액을 80억 원으로부터 300억 원으로 올렸으며 300∼400명의 근로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고 2005년 한해만도 세금 4억 원을 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 위조죄로 구속, 추방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중한 수교 전에 입국하여 불법 체류하는 조선족은 1,000명 정도, 그중 800명은 한국에 호적이 있거나 4촌 내의 친척이 있어 국적을 취득하였고 200명은 김씨처럼 수시로 추방될 위험에 처하여 있다.   필자는 김기덕씨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請願하며 아래와 같은 시비를 걸어보고자 한다.   1, 1990년 필자가 한국 L사장의 도움으로 한국에 보낸 친구의 여동생 부부가 불법체류 하였다. “노비도 뽑고 사업 자금도 좀 번 후 돌아가겠다” 라며 그들은 필자의 귀국 권고를 거절하였다(그들은 2년 후 돌아왔으며 지금 자그마한 식당을 꾸리고 잘 살고 있다).   L사장의 핀잔에 필자 왈: “일본 놈이 쳐들어왔으며 위정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니 우리는 할 수 없이 ‘無國之境’ ‘無人之境’으로 피난 갔으며 독립운동도 했다. 이젠 일본 놈도 없어졌고 살만해졌다고 하여 다시 돌아왔는데 왜 불법체류냐!” L사장 왈: “無國之境, 無人之境? 무슨 헛소리냐?”   필자 왈: “한국이 중국을 승인하지 않으니, 말하자면 세상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없는 셈이니까, 우리는 ‘무국지경’ ‘무인지경’에서 온 셈이다.” L사장 왈: “하―하! 정교수의 궤변술 대단한걸! 어디 한번 글을 써서 신문에 내봐! 법무부를 설득시켜봐! 그러면 나도 불법체류 시켰다는 죄명을 벗을 거 아니냐!”   필자의 농담 섞인 횡설수설이었다. 그러나 부언할 것은 중한 수교 이전에 입국한 조선족에게 불법체류라는 감투를 씌우기는 좀 걸리는 데가 있다고 보여진다. 조선족은 원래 한국인이었으며, 피난간 것도 사실이고, 그것도 국가 위정자들의 잘못 때문이며, ‘무국지경’의 사람이므로 여권이 아닌 통행증으로 제3국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갔으니 말이다.   2, ‘호적이 있는 사람은 한국국적에 가입시켜준다.’ 한국의 호적은 원래 없다가 한일합병 후 일본놈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일본臣民이 됐던 사람은 한국국적에 가입시켜주고 되지 않았던 사람은 가입시켜주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일본의 식민통치, 생각만 해도 뼈마디가 저려나는데 지금도 일본에 귀화했던 공식 증명이 있는 사람만 한국국적에 가입시켜준다, 된 말이냐!   3, ‘한국에 4촌 이내 친척이 있으면 한국국적에 가입시켜준다.’ 중국으로 早期이민간 사람은 한국에 4촌 이내의 친척이 없고, 晩期이민간 사람만 있다. 조기이민간 사람은 독립운동을 했거나 독립군에게 貢糧을 바친 사람이 주축이고, 만기이민간 사람은(자원해 갔건 강제로 끌려갔건) 논을 일구어 일본 關東軍에게 쌀밥을 먹인 사람이 주축이다. 만기이민간 사람만 우대하는 것이 합리한가!   4, 만기이민간 사람도 고향이 남한이어야 국적취득이 가능하고 북한이면 남한에 4촌 이내의 친척이 없으니 불가능하다. 남북한 분단은 광복 후 (정확하게 말하면 1948년 8월 15일 또는 9월9일 후)의 산물인데 상기의 규정에 따르면 고향이 북한이면 광복 전 반세기간도 한국국민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떨어진다. 너무나 語不成說이다.   5, 중국에서 북경 호적을 따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어렵다. 그러나 상기 김기덕 정도의 공로면 북경 호적을 취득할 수 있다. 아니,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환영을 받을만한 공로다. 김기덕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것만은 잘못이지만 그의 공로는 저지른 잘못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필자는 줄곧 중국 조선족이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행위를 부정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족이 한국국적을 취득할 권리와 근거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조선족의 한국국적가입에 대한 한국의 처사에 불합리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55    ‘연변’과 ‘옌볜’ (정인갑55) 댓글:  조회:5878  추천:88  2007-05-16
‘연변’과 ‘옌볜’정인갑‘연변’과  ‘옌볜’,  이 문제에 관하여 "'연변'을 '옌볜'이라 부르지 말아주세요"와  " '연변'이면 주체성, '옌볜'이면 친漢파?―발음법에 대한 논란, 언어학적 접근이 필요" 등 2편의 글은 모두 문제의 핵을 찌르지 못하였다. 전자는 민족 정서에 그쳤고 후자는 어학적 접근을 한다며 별로 접근하지 못하였다.지금 한국은 중국고유명사를 현대漢語 발음대로 적고 있다. 이는 표기상의 일대 변혁이다. 필자는 이런 방법을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지만 한자어 음으로 적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1, 한자의 漢語발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를테면 ‘北京’이 ‘ㄱ+ ' 점으로 표시하는 아래 'ㅏ+ㅇ’(중고), ‘북경’(중고 후기), ‘베이깅’(근대), ‘베이징(현대)으로 변화하여왔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한자어음(고려 때 규범한 음) 역시 중국발음이다. 단 조금 낡은 중국발음일 따름이다. 중국의 같은 고유명사를 漢語음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로(이를테면 상기 北京을 4가지로) 쓰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한가지로 고착시켜 비교적 장기간 쓰는 것이 좋은가? 각자 다 장단점이 있으며 후자가 더 좋을 듯하다. 어떤 민족이나 언어에 비해 문자표기가 뒤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영어 ‘knock(두드리다)’, ‘like(좋아하다)’를 옛날에는 ‘크노크’, ‘리케’처럼 발음 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노크’, ‘라이크’로 발음한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서사 형태와 맞지 않은 영어단어의 발음을 국제음성기호로의 표기에 따라 하나하나 익혀야 한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의 발음에 맞추어 ‘nok’ ‘laik’로 고쳐 쓰면 이런 시끄러움이 없어지지만 고쳐 쓰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단어 書寫上의 혼란을 기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약 영어단어를 역사상 끊임없이 발음대로 고쳐썼다면 영어사전이 지금의 몇배로 두터워졌을 것이다. 영국은 2,000여년 전의 ‘秦’을 나타내는 ‘china’로, 러시아는 1,000여년 전의 ‘契丹' 은 나타내는 ‘키타이’로 중국국명을 표기하고 있다. 또한 조선-한국을 1000여년 전의 ‘고려’를 나타내는 ‘korea’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도 中國을 ‘중궈’라고 표기하지 않고 ‘중국’이라 표기한다. 북경대학을 ‘Beijing university’로 표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Beking university’로 고집해 쓰는 외국인이 많다. 모두 력사적, 전통적으로 고착된 표기를 되도록 고치지 않으려는 습관 때문이겠다. 우리민족은 중국의 고유명사를 전통적, 습관적으로 쓴 력사가 너무나 길다. 이렇게 볼 때 ‘연변’을 포함한 중국의 고유명사를 전통적으로 써온 한자어음대로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보여진다. –ㄱ, -ㅂ, -ㄹ 받침이 없는 한자의 한국어어 발음은 현대한어발음과 대충 비슷하다. 2, 지금 한국에서는 중국고유명사를 현대漢語 발음대로 적으면서도 1919년 이전의 고유명사는 한자어음으로 적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많다. 인명에서 1919년 전인지, 후인지, 1919년 전후에 치우친 사람인지, 력사학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아리송한 사람(袁世凱, 段其瑞, 李鴻章 孫中山, 黃興, 宋敎仁 등)의 인명을 어떻게 쓸 것인가 망설이게 된다. 지명에서, ‘南京’을 태평천국을 운운할 때는 ‘남경’이라 하다가 중화민국을 운운할 때는 ‘난징'으로 해야 한다. 한 개 도시가 두 개 도시로 변해버린 셈이다. 력사도시 ‘長安’은 ‘장안’이라 하고 현대도시 ‘長春’은 창춘이라 한다. 같은 ‘長’자를 두 가지로 읽게된다. 3, 한자어발음을 무시하면 문화적 의미가 증발된다. 현대발음대로 쓰면 ‘쟝졔스(蔣介石)’와 ‘쟝저민(江澤民)’이 같은 성으로 돼 버린다. ‘모금도 유(劉)’요, ‘버들 유(柳)’요 하며 따지는 우리민족이 중국 성씨에 대해서는 방임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山海關’을 ‘산하이관’이라 하면 ‘산과 바다를 이은 관문’이라는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長白山’을 ‘창바이산’이라 하면 ‘항상 눈이 덮여있는 흰 산’이라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高麗營’을 ‘가오리영’이라 하면 ‘옛날 중국에 귀화한 우리민족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고장’이라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개봉(開封)’, ‘형주(荊州)’라 하면 <수호전>과 <삼국지>에 익숙한 우리민족이 바로 아는데 ‘카이펑’, ‘징저우’라 하므로 생소한 고장이 돼 버린다. ‘東北, 西北, 西南’을 ‘둥베이, 시베이, 시난’으로 쓰면 방위관념이 명확하지 않다. ‘북경, 남경’ 하면 ‘북쪽에 있는 경성, 남쪽에 있는 경성’이라는 감각이 오지만 ‘베이징, 난징' 하면 이런 감각이 없어진다. ‘河北, 河南, 山東, 山西, 江西’를 ‘허베이, 허난, 산둥, 산시, 쟝시’라 하면 ‘황하북쪽, 황하 남쪽, 태행산 동쪽, 태행산 남쪽, 태행산 서쪽, 장강 서쪽’이라는 개념이 일소된다.4, 현대음으로 쓴다 해도 중국 발음과 같지 않거나 심지어 거리가 먼 례도 많다. 우선 한어의 ‘f’음을 ‘ㅍ’로 표기하는 것(푸지엔-福建, 리펑-李鵬)이 엄청난 차별이다. 그 외 한 개 음절을 두 개 음절로 쪼개 쓰는 것(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漢語 복모음을 조선어 복모음(사실은 복모음이 아니다. ‘예’는 반자음 ‘j + 에' 이다)으로 쓰는 것도 문제다. ‘延邊’을 ‘얜뱬’으로 써야 더 한어발음에 접근한다. 그러나 ‘옌볜’이건 ‘얜뱬’이건 다 우리말에 쓰이지 않는 음절이므로 리론적, 가상적 한글이지 진정한 한글이 못된다. 또한 미관에도 좋지 않다. 5, 중국의 방언을 전혀 무시해도 안 된다. 중국 보통화와 접근하는 곳은 북경, 河北 廊房, 河北 承德, 新疆 石河子, 東北 5개 지역뿐이다. 상기의 지역을 다 합쳐도 1억 3천만이 될까말까하다. 즉 중국 인구의 1/10뿐이다. 나머지 9/10인구의 방언은 보통화와 엄청나게 다르며 오히려 우리말 한자음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閔南방언 지역 사람들은 ‘福建’을 ‘복건’하면 ‘푸졘’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 粤방언지역에서 ‘北京’을 ‘북경’, ‘三亞’를 ‘삼아’ 하면 ‘베이징', ‘산야’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 膠遼방언 지역(산동반도와 요녕 반도)에서 ‘朱熔基’를 ‘주용기’하면 ‘주룽지’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 陝西에서 ‘天安門’을 ‘천안문’, ‘廈門’을 ‘하문’하면 ‘톈안먼’, ‘쌰먼’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 6, 이 부분은 본문과 별개의 내용이지만 첨부하련다. 한국에서 중국 고유명사를 漢語발음대로 적고있지만 규범한 음에 엉터리가 많다. 한어 ‘ao, iao’의 실제 발음은 ‘au iau’인데 한국에서 ‘ao, iao’로 적고 있다. ‘毛澤東, 溫家寶, 鄧小平 胡錦濤, 焦志敏’은 ‘마오저둥, 원쟈바오, 덩샤오핑, 후진타오, 쟈오즈민’이 아니라 ‘마우저둥, 덩샤우핑, 원쟈바우, 후진타우, 쟈우즈민’이여야 한다.한어에는 된소리가 없으므로 중국고유명사에 된소리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제4성만은 된소리와 비슷하므로 틀린 표기지만 마지못하여 된소리로 적어도 괜찮다(大連-따롄, 上海-쌍하이 등). 제4성이 아닌 자 이를테면 ‘마우쩌둥(毛澤東), 쑤둥퍼(蘇東波)’ 등은 삼가해야 한다. 된소리자가 너무 많으면 이를테면 ‘鄭州, 深玔, 錦州’를 ‘쩡쩌우, 썬쩐, 찐쩌우’로 표기하면 미관에도 좋지 않다.   
54    라스베가스의 누드쇼 (정인갑54) 댓글:  조회:7325  추천:99  2007-05-10
라스베가스의 누드쇼 정인갑얼마 전 필자는 미국 L-A 출장 때 회의참가의 여가를 리용하여 2박 3일 관광코스로 그랜드캐년(대협곡)과 라스베가스를 관광하였다. 라스베가스는 유명한 도박성이니까, 돈을 조금 처넣으며 도박놀이의 맛을 보아야겠다고 필자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쇼를 관람한다며 별도로 90달러를 더 내라고 하지 않겠는가! 自願에 맡긴다기에 주춤하니 녀인의 누드쇼가 볼만하다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였다.   나는 이미 지나온 사람이고, 내일모래면 환갑이므로 이른바 녀인의 누드에 별 취미가 없다. 허나 옆 사람들이 너무 추기고, 또 나 혼자 외톨이로 빠질 수 없고 하여 마지못해 참가하였다.   평면 무대가 굉장히 큰데도 그 외에 즉흥적으로 천장으로부터 드리운 무대, 옆벽으로부터 스며 나온 무대에 꽉 차, 최고 100명에 이르는 여성 연예인이 등장하는 프로도 있었다.   연예인들마다 손바닥만한 팬티만 입었고 웃통은 ‘一絲不掛’다. 키가 훤칠하고 몸매는 날씬하며 근육은 풍만, 팽팽하고 얼굴은 예쁘다. 100쌍의 유방은 다 멋지면서도 그 생김새가 제각기이다. 정말 ‘八仙過海, 各顯其能; 百乳起舞, 各顯其妙’였다.   필자는 저도 모르게 ‘워―싸이!’하며 감탄하였다. 눈요기는 별개이고 인체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구나, 조물주(필자는 ‘조물주’를 대자연의 조화와 모든 생물체의 진화과정의 대명사로 쓰고자 한다)야말로 최고 예술품의 창조자이구나 하는 느낌 때문이였다.   齊白石의 새우, 徐悲鴻의 말, 王進喜의 매화…에 千姿百態를 그렸다 하지만 너무 雷同化한 것이 많다. 위의 명실상부한 천자백태의 여자들의 몸매와 유방에는 비교도 안 된다. 인간의 능력이 조물주의 조화를 초과할 수 있을 소냐!   누드쇼라고 하지만 퇴폐적이 아니고 그 내용이 맑았으며 積極向上 적이였다. 한두 사람의 표현이 아니라 수십 명 내지는 100명이 동시에 나타나므로 인체 미를 감상하게 하는 효과가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말하자면 인체 미를 감상하는 예술 프로를 개발해낸 것이라는 감이 든다.   이는 아직 폐쇄상태에 있는 중국이 심사숙고해볼 일이다. 중국 사람이라고 최고 예술품인 인체의 미를 감상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중국에서 ‘여성의 누드’ 하면 무작정 음란, 퇴폐로 몰아붙이는데 이 문제는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튿날 가이드가 ‘어제 밤 쇼가 끝날 때 인사말을 하던 여자의 나이가 얼마 돼 보이나? 알아 마친 자에게 선물을 드리겠다’고 하여 30살, 32살, 38살  하며 대답이 분분하였다. 필자는 28살이라고 외쳐보았다.   다 틀렸다. 60살이 정답이였다. 70살 생일에 마지막 연출을 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분투목표라고 한다. 또한 어제 밤의 쇼에 나타난 연예인들, 30대 이하는 거의 없고, 대부분 40대, 50대, 60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마 젊은 연예인을 쓰면 요금이 많이 들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물론 정형 수술을 했거나 약을 쓴 사람도 있겠지만 선진국의 여인들은 몸 관리를 잘 하는 것으로만도 중국 여인들에 비해 육체상 평균 10년은 젊다는 설이 있다. 몸매를 위해 정형수술을 하거나 약을 쓰는 것도 너무 부정하고 싶지 않다. 정신상 그토록 의의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적극적인 인생이 나쁘랴!   관광객들은 ‘와!’ 하며 또 한번 감탄하였다. 필자(관광객 중 유일한 중국인,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에게 준 충격은 더욱 컸다. 우리 중국 여인들, 30대 말이면 벌써 근육의 탄력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유방을 말할진대, 태반이 40대면 축 처지고, 50대면 김빠진 고무풍선이며, 60대면 갈비뼈에 말라붙어 미이라(木乃伊)를 연상케 하지 않는가!   라스베가스의 누드쇼, 중국 녀인들도 한번 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53    ‘鍾路’냐, 아니면 ‘鐘路’냐? (정인갑53) 댓글:  조회:5337  추천:82  2007-05-02
‘鍾路’냐, 아니면 ‘鐘路’냐?  정인갑 몇 년 전 한국의 모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서울 시청에서 모 서예가에게 ‘鍾路’라는 두 글자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서예가는 ‘鐘路’라야 써주지 틀린 표기 ‘鍾路’라고는 써주지 않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그러면 ‘種路’인가, 아니면 ‘鐘路’인가? 지금 중국의 간체자는 ‘鐘’과 ‘鍾’을 모두 ‘钟’으로 통일시켰다. 그렇지만 옛날  문헌을 들춰보면 ‘鍾’과 ‘鐘’은 뜻이 완연히 다른 두 글자이다.    ‘鐘’은 두드리면 소리나는 일종의 금속 악기를 뜻한다. <說文解字(설문해자)>에 ‘鐘, 樂鐘也’라고 돼 있다. <訓蒙字會 (훈몽자회)>에도 ‘쇠붑죵’이라 기재돼 있다. 그러나 ‘鍾’은 술을 담는  금속항아리다. <說文解字>에 ‘鍾, 酒器也’ 라고 적혀있다. <訓蒙字會>에도 ‘量名(그릇 이름)’으로 해석하였다.  鐘閣(종각)에 큰 鐘이 번연히 매달려 있고 그 종각에 붙은 길이므로 ‘종로’라고 이름지었으니까 물론 ‘鐘路’가 맞을 터이다. 이러고 보면 그 고명한 서예가에게 시청 관리가 실수한 것이 당연하겠다.  그러나 이 시비는 몇  마디 말로 간단히 해명될 일이 아니다. 중국 문헌에는 또한 ‘鐘’과 ‘鍾’을 서로 엇갈려 썼으며 심지어 이 두 글자는 서로 통용할 수 있다고 까지 했다. 한국인들이 ‘鐘’자를 써야 할 곳에 ‘鍾’자를  쓴 것을 무조건 무리로 밀어 부칠 수는 없다.   하지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들 두 글자의 음이 완전히 같기 때문에 임시 서로 빌러 쓴 것이지 이 두 자가 같은 것은 아니다. <설문해자>의 해석에 이 점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경전에 “鐘”을 많이는 “鍾”으로 쓰지만 ‘술항아리’라는 뜻의 글을 빌러 쓴 것이다(經傳多作鍾, 假借酒器字)’.  다시 말해 ‘鐘’으로 쓰면 ‘쇠북’이라는 개념이 명확하지만 ‘鍾’으로 쓰면 ‘쇠북’인지, 아니면 ‘술항아리’인지 아리송하다. 결국은 서예가의 견해가 에누리가 없이 맞는 것으로 된다.  孫成祐(손성우) 편저 <한국지명사전>(경인문화사, 1974년)에 ‘鍾路’로 돼 있으며 기타 책에도 거의 다 ‘鍾路’로 돼 있다. 사전에만은 ‘鐘路’라 표기하고 ‘”鍾路”라고도 씀’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아예 ‘鐘路’로 표기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여진다.  ‘종’자는 한국인의 이름자에도 많이 쓰이는데 한국인의 명함에 대부분 ‘鍾’자로 쓰고 있다. 자식이 술꾼으로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터이고, 말하자면 ‘술항아리’자로 이름을 짓지는 않았으리라 보여지므로 역시 ‘鐘’자로 바꾸어 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들이 명함에 꼭 ‘鐘’자로 쓰기 바란다.  이름과 관계되는 자로 ‘鎬(호)’자를 본문에서 부언하고 싶다. ‘鎬’는 우리 민족의 이름자로 많이 쓰이는 글자이다. 이를테면 ‘영鎬’ ‘병鎬’ 문鎬’…등.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 글자를 조선어로 ‘호’로 발음함에도 불구하고 한어로는 모두‘găο (가우)’로 발음한다. 완전히 틀린 발음이다. ‘鎬’자는 ‘hào (하우)’와 ‘găo(가우)’ 두 가지 발음이 있는데 전자는 ‘도읍(西周의 수도 鎬京)’, 또는 ‘빛나다’란 뜻이고 후자는 ‘곡굉이’라는 뜻이다. ‘곡꾕이’라는 뜻의 ‘găo (가우)’음은 생긴지 100년도 안 되며 우리말 한자어에 이 음이 없다. 또한 자식이 곡굉이로 땅을 파먹으며 살라고 이름지었을 리 만무하다.중국 조선족들이 이름에 쓰인 ‘鎬’자를 꼭 ‘hào (하우)’로 발음하기 바란다. 한족들도 조선족의 이름을 ‘găο(가우)’로 틀리게 발음하므로 왜 틀리게 발음하나 핀잔을 주니 조선족들이 ‘găο (가우)’로 발음하며, 또한 이름은 주인을 따르라는 원칙이 있으므로 당연 ‘găο(가우)’로 발음해 준다고 하지 않겠는가! 음이 같은 글자 ‘鐘’과 ‘鍾’에서 ‘鍾’을 잘못 선택해 쓴다던가 (한국인), 같은 글자이지만 음이 다른 ‘hào (하우)’와 ‘găo (가우)’에서 ‘găo(가우)’를 잘못 선택해 쓴 것(중국 조선족)은 모두 한어에 약한 우리민족의 망신이겠다.
52    방취제 質疑 (정인갑52) 댓글:  조회:5479  추천:102  2007-04-04
방취제 質疑  정인갑필자는 訪就制 실행에 한국어 시험을 치르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필자의 ‘한국어 수평고시를 단호히 반대한다’참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의 주장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 치르기로 결정되고 말았다.   만약 시험을 기어코 치른다면, 시험에 응할 사람이 대부분 조선족 농민이니까, 시험 장소를 연길, 길림, 통화, 목단강, 할빈, 가목사, 심양, 무순, 단동, 철령 등에 두어야 한다. 조선족 농민의 95% 이상이 상기 10개 지역에 분포돼 있으니 말이다. 이외에 북경 한곳 쯤 더 넣을 수는 있겠다.   그런데 시험 장소가 북경, 상해, 장춘, 대련, 천진, 광주, 연대, 남경, 중경, 락양 등 10개 도시의 대학으로 결정되였다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10개 지역에는 조선족 농민이 없으며(장춘, 대련 지역에는 약간 있음) 그곳에 장기 진출하여 사는 조선족 중에는 방취제 시험에 응할 사람이 별로 없다. 즉 시험 장소는 모두 응시 대상자 不毛의 지역이다.   이것은 수영선수를 내몽고 사막지역에서, 스키선수를 해남도 열대지방에서 선발한다는 격이 아닌가! 이런 론리대로라면 앞으로 우리민족 전통 체육운동 종목의 선수, 이를테면 그네뛰기선수를 중경에서, 널뛰기선수를 남경에서, 씨름선수를 락양에서 선발해도 괜찮다는 말이 되겠다. 너무나 황당하다. 연변에는 우리민족 농민의 42%이상이 살고 있으며 연변대학은 조선어의 맏형(老大)이다. 시험장소를 단 한곳만 설정한다 하더라도 당연 연길이여야 한다. 그런데 10곳을 설정하면서도 연길을 제외시킨 것은 너무나 용납 못할 일이다. 이는 우리민족에 대한 우롱이고 연변대학에 대한 기시이다.   필자는 한국 법무부나 중국고시중심이 이런 정도로 상식을 모르는 기관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여 문제를 아래와 같이 달리 풀이해보고 싶다.   1, 방취제에 조선족만 뽑겠다는 주장이 중국정부로부터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방취제를 200만 조선족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13억 중국인을 상대한다는 뜻이겠다. 단 한국어 시험 때문에 조선족이 퍽 많이 선발될 가능성(가능성에 불과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두고보아야 한다)이 있겠지만. 필자는 한국이 방취제에 중국 조선족 인력만 쓰겠다는 뜻을 사전에 중국 정부에게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옛날(1989년) ‘재외동포 특례법’도 중국정부에 통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떠벌이다가, 나중에 중국정부의 ‘不行’ 한마디에 작살난 적이 있지 않은가!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너무나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잘 저지르고, 한국 법무부도 재외동포, 특히 중국조선족에 대해 너무나 수준 이하의 처사를 자주 하기에 이번 방취제에 관해서도 필자는 부득불 이런 추측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2, 방취제를 위한 고시는 엄청나게 많은 돈과 관계된다. 상기 도시 대학의 한국어 학과들이 우리도 한몫 끼워 달라는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잠시는 돈을 못 벌더라도 적어도 해당 대학 한국어학과의 이미지 개선 및 발전에 이롭게 된다. 이런 압력에 못 이겨 중국고시중심 및 한국법무부가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방취제를 위한 한국어 고시란 말이 나오자마자 적지 않은 考試부로커들이 한탁 하려고 꿈틀거리며 물밑 작업에 나섰다. 당초 상기 대학의 한국어 학과들은 적극성이 없었더라도 고시부로커들이 여간 꼬셨겠는가! ‘우리 손잡고 해보자. 당신네는 신청만 하라.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라며. 지금 중국에는 교육, 고시와 관계되는 부정이 너무 많다. 구멍가게 같은, 무너져가는 사립학교들이 명문대학과 결탁하여 금전을 챙기는 부정이 얼마나 살벌한가! 그러므로 해마다 행해지는 사립학교에 대한 사찰의 중점이 ‘다른 학교와 협력관계를 맺은 사안이 있는가’이다. 필자는 지금 사립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이 면의 내막을 너무 잘 안다. 이상은 전적으로 필자의 추측에 불과하다. 두 가지 추측이 다 맞는지, 아니면 그중 한가지만 맞는지, 아니면 두 가지 추측이 다 틀리는지, 한국 법무부의 명확한 회답을 바란다. 필자는 4개월 전에 방취제가 시간상 질질 끌거나 심지어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고(필자의 ‘방문취업제 실시에 즈음하여’ 참조), 한국어 수평고시를 치르면 엄청난 부정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필자의 ‘한국어 수평고시를 단호히 반대한다’ 참조) 예언한 적이 있다. 시간상 질질 끈다는 예언은 이미 증명되였고, 고시에 엄천난 부정이 생긴다는 예언도 지금 증명되고 있으며 만약 추측1이 맞는다면 무산될 가능성도 없는 것이 아니다. 떡 줄놈은 아직 떡가루 준비도 안 되여 있는데 중국 조선족들은 김치국부터 반년 마셨으며 앞으로 얼마 더 마셔야 할지 모른다. 한국법무부여! 정신을 바짝 차려라! 중국조선족과 한국간의 갈등을 해소할 마지막 챤스를 놓치지 말라! 중국고시중심이여! 정신을 바짝 차려라! 한개민족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을 서투르게 처리하다가 력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
51    대림동산의 ‘너무 편협된 사고인 듯’에 답하여 (정인갑51) 댓글:  조회:5334  추천:102  2007-03-27
대림동산의 ‘너무 편협된 사고인 듯’에 답하여    정인갑 zhengrenjia@263.net   필자의 글 ‘근본적인 해결은 自强에 있다’를 '동북아신문' 사이트에도 게재하였다. 한국독자 한 분이 '대림동산' 필명에다 ‘너무 편협된 사고인 듯’의 제목으로 댓글을 달았다. 오해와 주관적인 판단이 많으므로 이 글을 쓴다. 서술의 편리로 해라의 칭으로 쓰니 양해 구한다. [...]안의 글은 댓글이다.1. [무시당하는 조선족만 한국에 있는 게 아니라 당당히 대접받는 조선족 또한 많다.] 많고 적은 것은 상대적이다. 대접받는 조선족은 개별적이다. 그 대접도 한계가 있다.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선진국에서 온 교포와 중국에서 온 교포, 어느 쪽이 더 대접을 받는가? 구태여 말할 여지도 없다.2. [조선족이 오기 전에 훨씬 먼저 중국 화교들이 왔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미 주류사회에 진입하였다.]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화교와 조선족의 구성원은 질적으로 다르다. 조선족은 살기 어려워서 품팔러 갔거나 시집갔고, 화교는 적어도 이런 상황이 아니다. 또한 화교는 한국이민 2∼4세대가 주류이다. 한국체류 조선족은 못사는 군체이므로 무시하는데 반해 화교는 너무 재테크를 잘하여 한국의 돈을 긁어모을가봐 제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문의 취지와 다르기 때문에 할애한다.3. [왜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는지, 왜 대접을 받는지, 그런 것은 밝히지 못하고 무작정 적개심만 가지는 것은 잘못돼 있다고 본다.] 왜 무시당하는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명백히 밝혔다. 이런 무시는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도, 마카오도, 미국도, 세계 어디를 가도, 심지어 중국조선족간, 형제간에도 다 마찬가지이다. 한국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自强하여야 근본적인 해결이 된다고 하였다. 구태여 ‘적개심’이란 말을 쓴다면 필자의 글에는 오히려 적개심을 완충시키는 저의가 깔려 있다.4. [한국과 일본이 축구를 하면 일본교포는 한국을 응원하지만…중국교포는 중국을 응원한다.]중국교포의 이민 1∼3세는 거의 100%가 한국을 응원하고 5세 이하는 대부분 중국을 응원하며, 4세는 한국응원과 중국응원이 대충 반반이다. 조선족 集居지역에 살거나 민족 岐視로 손해를 본 사람일수록 한국을 응원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록 중국을 응원한다. 일본교포의 대부분은 이민 1∼3세이다. 앞으로 60년쯤 지나 4∼6세에 가면 어디를 응원할 것 같은가!일본교포는 일본에서 岐視당하고, 중국교포는 나라의 주인 대접받는다. 각급(중앙 급 포함) 조선족 官員, 인민대표(한국의 議員에 상당), 政脇委員 등이 추천명을 헤아린다. 국가에서 경비를 대여 주는 조선족 학교도 수천 개나 된다. 그렇지만 민족자존심, 민족의식, 민족언어문자를 엄연히 지키며 산다. 일본교포의 민족의식은 중국교포와 비교할 여지도 없다. 5. [한국인에게 무시당하는 조선족은 한국인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에게도 우리보다 못사는 타국 동포를 무시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친척방문으로 중국 조선족을 찾아왔을 때 음식을 대접하며 “귀국사람들은 아마 우리보다 잘살며 그곳 음식은 중국음식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 차린 것은 없어도 맛있게 들라”라고 하면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기 어렵다라고 하며 잘 먹는다. 즉 그들의 자존심을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굶었으면 삐삐 말랐나! 그곳에서는 이런 음식 보지도 못할걸! 있는 동안이나마 배불리 자시다가 돌아가라”라고 하면 대단히 싫어하며 심지어 수저를 내동댕이치며 안 먹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더욱이 약자의 자존심과 반발심이다. 만약 조선족이 ‘대국’ 운운하며 한국인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면 이는 한국인이 조선족을 여지없이 깔보며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나오는 반발심일 것이다. 무작정 한국인을 무시하는 말을 안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일단 중국에 돌아오면 漢族들 앞에서 민족 자존심 때문에 한국 욕을 안 한다. 조선족 대 한국인, 조선족이 약자고 한국인이 강자이다. 이런 문제에서의 책임은 당연 강자에게 있다.6. [조선족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본다…]강자가 약자에 대한 무시, 이런 문제는 약자에게는 민감하지만 강자는 무심코 흘러보내기 일쑤다. 필자는 한국에서 가장 대접받는 조선족 중의 한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가끔 못사는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하는 무시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생계를 위해 한국에 품팔러 갔거나 시집간 사람이 당하는 울분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시각으로 조선족을 무시한다면 중국인인 조선족이 중국인의 시각으로 그 무시에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금 중국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50만 명이 넘으며 2008년이 지나면 100만 명에 접근한다는 설이 있다. 그중에는 좀 과장해 말하면 ‘거지’, ‘반거지’들도 적지 않다.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은 어쨌던 피땀으로 벌어 살지만 중국체류 한국인 ‘거지’, ‘반거지’는 사기치며 살면 살았지 피땀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은 그들에게도 최저의 예우를 베풀어 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의 시각’, ‘중국인의 기질’, ‘중국인의 방법론’이겠다.  부록: 너무 편협된 사고인듯(대림동산)글을 읽어보니 글쓴이는 조선족 사회의 상당한 지식인 인것 같군요. 그러나 당신이 보는 만큼 한국이 그리 만만한 사회는 아닙니다. 무시당하는 조선족만 한국에 있는게 아니라, 당당히 대접받는 조선족 또한 많습니다. 한국에는 조선족이 오기전에 훨씬 먼저 중국 화교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미 주류사회에 진입하였습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국인, 중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인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선족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인을 본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무시당하는 조선족은 한국에서 한국인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의 시각에서 말이죠. 제 주변에는 중국에서 온 우리 교포가 많은데, 그들의 말투에서는 대국에서 왔다는 은연중에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끔 봅니다. 상당히 기분 나쁘죠.당신이 보는 3.4년 혹은 7.8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왜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는지, 왜 대접을 받는지, 그런것은 밝히지 못하고 무작정 적개심만 가지는 것은 잘못되었다 봅니다.한국인이 우리 교포를 무시하고, 중국교포가 한국인을 무시하고... 결국 똑같이 중국, 일본인에게 무시당한 조선민족이겠죠.한국과 일본인 축구를 하면 일본교포는 한국을 응원하지만,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중국교포는 중국을 응원합니다. 이것 또한 한국 정부의 딜레마겠죠...
50    근본적인 해결은 自强에 있다 댓글:  조회:5836  추천:124  2007-03-21
근본적인 해결은 自强에 있다정인갑 중화서국 편심     려호길군의 ‘양국화와 연변처녀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본 포럼 려호길87 참조). ‘고향에서 불어오는 서북풍도 한국에서 마시면 눈치를 봐야한다’. 한국에 시집간 조선족 여인들의 처지를 얼마나 생동하게 표현하였는가!   그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정부의 그릇된 법규를 비판하고, 한국남편들을 교육하고, 사회에 호소하고, 그들의 自衛의식을 높여주고…할 일이 많겠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은 自强에 있다.   ‘연변처녀들’이 한국에서 岐視당하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다. 선진국,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시집왔으면 ‘연변처녀들’처럼 岐視하지 않을 것이다.   북경 주재 한국령사관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혼인 수속하러 온 조선족 녀자는 오관이 단정하고 그의 한국 대상자는 소아마비 환자였다. 걸을 때 왼발은 왼쪽으로 휘젓고, 오른발은 오른쪽으로 땅바닥을 쓸고, 팔을 가슴 쪽으로 오므리고, 팔꿈치는 절구질하고…그때 필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돈이 만능인 만능이로구나!’   필자가 출장갈 때 한번은 고향 친구로부터 서울에 시집간 딸 영자(가명)를 만나보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은적이 있다. 전화를 여러번 걸었지만, 시어머니 돼 보이는  여인이 받았으며 번번이 집에 없다는 것이였다. 어쩌다 영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남편이 “씨발년, 누구야, 누구야! 어느 눔캉 전화해?” 하며 수화기를 가로채는 것이였다. 남편에게 온갖 사정을 했지만 끝내 영자와 대화하지 못했으며 만나지는 더구나 못하였다. 감옥살이와 뭐가 다른가!   그후부터 필자는 항상 한국에 시집가는 조선족 녀인들을 말린다. 돈을 벌긴 벌어도 당한 굴욕으로 인한 손해가 더 크다라며. 물론 한국에 시집간 조선족 여인들이 다 이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열아홉 순정’ 중의 양국화같은 행운아가 몇이나 되랴!   인간은 권력과 금전 앞에서 절대 평등할 수가 없다. 이는 인간 사회의 철 같은 룰이다. 시집간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한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단 녀성의 지위가 낮은 한국이 좀 더 심할 수는 있겠지만.   1987년 필자가 처음 한국에 갔다 돌아올 때 당한 일이다. 중국 비자신청에 도움이 필요하다 하여 한국친구와 같이 홍콩으로 떠났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 필자만 걸리였다. 영국대사관의 비자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홍콩은 No비자가 아닌가”고 하니 “다른 나라 사람은 No비자이지만 중국사람만은 No비자가 아니다”고 하지 않겠는가! 영국비자를 받고 며칠 후에 홍콩에 갔으며 먼저 간 한국인의 홍콩 체류시간이 7일 넘으면 안되므로 같이 마카오(澳門)에 갔다와야 했다. 그런데 필자는 또 거절당하였다. “마카오는 No비자이지만 중국 사람만은 No비자가 아니다”고 하지 않겠는가!   중국이 영국과 포르투갈에 빌러준 손바닥만한 땅인데 다른 나라 사람은 다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땅의 진짜 주인만은 들어가지 못한다. 된 말이냐! 그러나 중국이 가난하기 때문에 번번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1990년 필자는 H1비자(미국에서 취업이 가능한 비자)로 미국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는 부인을 찾아가 L-A에 체류중인 중국교수 한 분을 만났다. 그들 부부는 어느 부잣집에서 무료로 숙박하고 있었는데 대신 그 집의 잔디밭을 가꾸어 주어야 했다. 그 교수는 반년간 부잣집 잔디밭에서 기여다녔다고 한다.   “미국에서 살 것이냐”하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No!”였다. 아무리 교수라고 하여도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거지취급하며 2세에 가면 식모급으로 올라갈 수 있고 3세게 가야 일반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피부색 때문에 여전히 렬등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리유였다. 그러면서 “윤택하게 잘 살 수는 있지만 3세대 동안 양놈 무릎밑에서 기여다니느니 못살더라도 중국에 가서 날아다니는 것이 더 났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물론 필자도 중국으로 돌아왔다. 동료들이 “바보 같은 놈, 미국에서 살 것이지 왜 돌아왔나?”고 하는 핀잔에 필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길짐승과 날짐승의 차이다(走獸和飛禽的區別).” 동료 왈: “한 10년쯤 기어다니다가 돌아오면 더 높이 날 것이 아니냐?” 필자 답: “40대인 내 인생에 10년이 몇 번 있나? 10년 받은 상처가 아물려면 몇십년 걸릴지 아나?”    한국도, 홍콩도, 마카오도, 미국도 그렇고, 심지어 중국 조선족 간, 친척-형제간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에 약하거나 돈이 없으면 울분과 불평등을 당하기 마련이다. 약 20년 전에 ‘연변문예’에 실렸었으며 소수민족 문학상까지 받은 림원춘의 단편 소설 ‘몽당치마’를 한번 음미해 보자:   너무 가난하여 친척의 군일에 빈손으로 가 몽당치마 바람으로 머리를 숙이고 부엌 일만 한다. 그러다가 자정쯤에 행해지는 친척들이 이번 잔치에 한 부조돈과 선물을 선포하는 행사를 피하여 슬그머니 밖에 나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들어온다. 뭇 친척들의 야유의 목소리나 경멸의 눈매가 두려워서였다.   이런 신념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에 가서 돈을 벌 마음이 없다. 중문학 분야에서 잘 씌울 수 있고 돈도 엄청나게 많이 벌 수 있으며 초청을 받은 적도 있지만. ‘거지같은 놈, 돈 벌러 왔구나’ 하는 한국인들의 눈매가 싫다.   필자는 조선족이 한국에 품팔이 가거나 시집가는 일을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는다. 먹고 살 수만 있으면 가지 말라고 충고할 따름이다. 또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중국에 있지 한국에 있지 않다. 중국이 잘 살아야 인격상의 근본적인 전환과 평등이 가능하다.   이렇듯 중국 조선족은 운명이 중국에 매워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수입품 쇠고기’ 취급을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젠 중국사람이다’라는 관념을 확고히 하고 중국에서의 自强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 중국 조선족이 한국에서 울분을 참으며 눈치밥을 먹어야 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짧으면 3~4년, 길어도 7~8년이면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恩賜가 아니라 중국이 自强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전환이다.
49    [단상] 연길 택시 단상 (정인갑49) 댓글:  조회:5264  추천:102  2007-03-04
연길 택시 단상정인갑필자는 택시 기사와 한담하는 기호가 있다. 현지의 풍속습관, 부정부패, 소비수준 등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다. 전번 연길 출장 때도 례외가 아니였다.   길을 몰라 택시를 꾀나 많이 탔지만 조선족 기사와는 한 사람도 부딪치지 못하였다. 택시기사들은 필자가 북경사람이어서 인지 물음을 잘 받아 주었으며 필자를 한족으로 보았기에 조선족에 대해 기탄 없이 평가하곤 하였다.   문1: “왜 조선족 기사는 안 보이나?”   답1: “조선족은 ‘好吃懶做(먹는데는 이골이 났지만 게으르다)’이므로 택시를 모는 고생스러운 일을 하기 싫어한다.”   답2: “조선족은 일확천금을 노리지 碎少한 돈은 안 번다. 그들은 한국에 가서 큰 돈 벌고 우리는 그 돈을 조금씩 낚아들인다.”   답3: “조선족은 남을 시중드는 일을 천하게 본다. 택시도 남을 섬기는 것이 아니냐.”   문2: “텍시 타는 사람은 조선족이 많나, 한족이 많나?”   답4: “물론 조선족이 많다. 연길시 인구의 70%가 한족이라던데 손님 70%이상이 조선족이다.”   문3: “택시 벌이는 쇄소한 돈이 아닐텐데….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북경 택시 기사의 월수입은 대학 교수와 맞물렸는데….”   답5: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부부가 다 택시 업에 종사하는데 월 당 6,000원 정도 번다. 한 사람이 한국에 가 버는 액수에 접근한다.”   조선족이 한국에 가서 버는 돈이 월 당 6,000원은 넘겠지만 불로커에게 뜯긴 돈, 왕복경비, 한국에서의 高價소비 등을 감안하면 답5의 말도 대충 맞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연길 조선족이 한국에 가서 번 돈 중의 절반 가량이 같은 人數의 택시기사 지갑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연길의 조선족은 왜 택시를 그리 많이 타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들이 등교하다가 지각할 것 같아도, 아줌마들이 장보러 갈 때도 택시를 자주 리용한다고 한다. “자그마한 연길에서 자전거를 리용해도 될 텐데…”라고 했더니 필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나는 북경에서 매일 자전거를 40리씩 탄다”고 했더니 “거짓말  말라”고 면박을 준다. 필자의 집이 직장에서 16리 떨어져 있으니 왕복 출퇴근만 해도 32리, 그 외 이러저러한 일로 다니는 것까지 합치면 사실은 40리를 초월한다.   북경사람들은 웬만하면 택시를 안 탄다. 많이는 길을 잘 모르는 타지방 사람들이 택시를 리용한다. 북경의 위성도시―大行縣, 昌平縣, 順義縣, 密雲縣, 懷柔縣 등의 縣城―는 면적이나 인구가 연길시와 비슷하지만 택시운영이 잘 안 된다. 십여대가 역전앞에 서있고, 몇십대는 시내에서 빙빙 돌고, 黑車(택시가 아닌 불법운영차, 대부분 삼륜 자동차)가 택시보다 헐한 값으로 손님을 나르는, 도합 100∼200여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길은 택시가 3,000대를 초월한다고 한다.   연길의 택시 상황은 우리민족의 劣根性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선은 ‘체’병이다. 못난놈이 잘난체, 돈이 없으면서도 있는체, 적으면서도 많은체…,  ‘愣充大尾巴狼’이다. 북경 사람들이 택시를 안 타는 것은 절대 연길사람보다 못나고, 못살아서가 아니다.   량반은 얼어죽을지언정 겻불은 안 쪼인다더니 이제는 숯불도 안 쪼인다는 격인가! 이전에는 구두 닦기, 인력거꾼, 목욕탕 때밀이, 아이스크림 팔기 등만 안 하더니 지금은 택시 몰기도 싫어하는 수준인가!   다음은 재테크에 문제가 있다. 택시를 몰아 5원, 10원…별거 아니지만 3,000명의 택시 기사가 한국행 1,500명의 수입을 낚아드린다면 적은 돈인가! 티끌 모아 태산이 생기며 역시 티끌 소비를 합하면 태산이 없어진다.   필자 고향 마을의 찌들게 가난하던 한족 楊과부가 생각난다. 아들이 결혼할 무렵 그가 고래등같은 삼간 벽돌 기와집을 짓기에 돈이 어디서 생겨 집을 지었나 문의했더니 그의 답은 티끌 모아 태산이였다:   “돈 8전이 생기면 2전 보태 바깥 지갑으로부터 안 지갑으로 옮겨 넣고, 80전이 생기면 20전 장만해 지갑으로부터 궤 안에 옮겨 넣고, 8원이 생기면 2원 벌어 궤로부터 저축소로 가져가기를 20여 년 하였더니 삼간 벽돌 기와집 한 채가 생기더라.”   연길의 조선족, 아니, 200만 우리 동포들이 필자의 이 글을 우수개 소리로만 보지 말기 바란다.
48    ‘섣’ ‘설’ ‘살’ 그리고 ‘세’ 댓글:  조회:5238  추천:77  2007-02-27
   ‘섣달(일년의 마지막 달)’‘설날(일년의 첫 날)’‘다섯 살’‘만세(萬 歲)’이 네 마디 말에서 ‘섣’‘설’‘살’은 고유어이고 ‘세’는 한자어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뿐만 아니라 ‘섣’ ‘설’ ‘살’ 역시 한자  ‘歲’에서 기원된 말이다.   ‘歲’는 약 1,500년 전후의 중고(中古) 한어에서는 [sĭwεi] 로 발음했다. 이 음은 지금 쓰이고 있는 한자음 ‘세’와 맞물린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 약 2,000∼3,000년 전의 상고(上古) 한어에서는 ‘歲’자를 [sĭwet(셛)]으로 발음했다.    그 증거로 <시경(詩經)·대아(大雅)·생민(生民)>의 ‘載燔載烈, 以興嗣歲’ 구절 을 례로 들 수 있다. 중국 시가의 압운(壓韻) 현상은 앞뒤 시구의 마지막 글자의 중성과 종성이 같거나 비슷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烈’자를 [lĭet(렫)]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세’자도 [sĭw e t(셛)]으로 발음했다고 언어학자들은 고증해 냈다. 뿐만 아니라 중고 한어에서 받침이 없는 제운(祭韻), 태운(泰韻), 쾌운(夬韻), 폐운(廢韻) 네 운은 상고 한어에서 ‘ㄷ’ 받침이 있던 데로부터 없어진 것이라는 결론도 내렸다.   이 음이 조선어에 차용되어 ’셛→섣’으로_ 읽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조선 사람들은 ‘ㄷ’ 받침을 잘 발음하지 못해서인지 후세에 ‘ㄷ’ 받침을 점점 ‘ㄹ’ 받침으로 고쳐 발음하였으며 한자어의 규범 음에서는 아예 모든 ‘ㄷ’ 받침을 ‘ㄹ’받침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葛(갇→갈)’ ‘訥(눋→눌)’ ‘達 (닫→달)’ ‘辣(랃→랄)’ ‘末(맏→말)’ ‘拔(받→발)’‘殺(삳→살)’ ‘謁(앋→알)’‘節(젇→절)’ ‘察 (찯→찰)’ ‘脫(탇→탈)’ ‘八(팓→팔)’‘割(핟→할)’ 등이 그 례이다.   이렇게 보면 ‘歲’를 ‘섣→설’로 읽었을 것이다. 후세에 한어에서 ‘歲’를 ‘셛’으로 읽지 않고 ‘세’로 읽으니 ‘歲’자의 음을 다시 ‘세’로 규범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한자 ‘歲’와 관계되는 음은 ‘섣’ ‘설’ 및 ‘세’ 세 가지가 있다.   같은 개념을 표시하는 단어가 여러 개이면 그 중의 하나를 제외한 다른 단어들이 죽어버리거나 또는 의미상 서로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결과 ‘섣’으로 일년의 마지막 달을 표시했으며 ‘설’로 일년의 첫째 날과 나이를 표시했고 ‘세’를 쌍 음절 이상의 한자어로 썼다.   일년의 첫날에 나이 한 살 먹으므로 ‘설’로 나이를 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세 문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두설 디내디 아니ㅎ、야(두살 지내지 아니해야)’, <월인석보(月印釋譜)>의 ‘그 아기 닐굽 설 머거(그 아이 일곱 살 먹어)’ 에서 보다시피 그때는 나이를 일컫는 ‘살’을 ‘설’이라 했다. 나이를 헤아리는 ‘설’이 한해의 첫날인 ‘설’과 뜻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지금은 ‘살’로 변경시켜 쓴다. 필자의 조선어 발달사 지식이나 조선 문헌에 관한 지식이 깊지 못하므로 언제부터 변경되었는지 본문에 다루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조선어 고유어에는 ‘섣’ ‘설’ ‘살’과 같이 한자와 관계되는 단어가 많다. 본 사이트에 올린 필자의 글 ‘동무’ ‘짐승’ ‘동이’’둥궤’ ‘짓’ 등은 필자가 이미 고증해 낸 이 부류의 단어 중의 일부이다. 그 중 ‘동무’ ‘동이’ ‘둥궤’ 등은 후세 한자음과 관련되지만 ‘짐승’ ‘섣’ ‘설’ ‘살’ 및 ‘짓’과 같은 단어들은 상고 한자음과 관련이 있다.    상고 한자음과 관련이 있는 이런 단어가 조선어 고유어에 적지 않게 스며들어 있는 현상은 필자의 주장­-―상나라 때 만들어진 한자는 상나라를 세운 동의족(어쩌면 우리 민족의 조상)의 글-―의 증거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47    '技'와 '文'의 관계 댓글:  조회:6249  추천:73  2007-01-07
'技'와 '文'의 관계정인갑 어릴때부터 한가지 特技를 련마하여 一方, 一國, 심지어 세계적인 명인이 되였으면 보람찬 인생을 살았다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명인이 되려면, 또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일정한 지식을 습득한 문화인이여야 한다. 문제는 '技' 련마와 '文' 습득의 비례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바람직한가? 아래에 체육특기를 례로 들며 이 문제를 운운해 보련다. 필자는 몇년전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北京三江학교 학생을 거느리고 자매학교 한국 龍仁初等學校(소학교)를 방문했을 때 沈陽체육학교 소년 축구팀(소학교 년령에 해당됨)과 룡인초등학교 축구팀간의 경기에 부딪친 적이 있다. 룡인 초등학교는 100년 가까운 력사를 지닌 명문학교에다 재학생 3,600명이나 되며 축구 수준도 대단하다고 한다. "먼 심양에서 온 손님이니 제발 둬 알 정도 이기면 됐지 너무 많이 이기지 마세요." 필자가 경기 주최자(필자와 잘 아는 사이)에게 한 부탁이였다. 주최자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튿날 알고 보니 심양팀이 4:0으로 이겼다. 깜짝 놀라 그 영문을 물었더니 이러하였다: 중국은 도시마다 체육학교를 세우고 어릴때부터 (이를테면 5∼6살부터)체육인재를 전문적으로 양성한다, 그들은 말이 초•중•고교생이지 학력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체육 특기만 련마한다, 그러므로 용인팀이 심양팀에게 질 수밖에…. 심양팀이 힘껏 차면 8:0정도로 이길 수 있는데 한국측에서 경비를 대여 왔으며 룡인 시민의 감정을 너무 상하게 할까봐 4:0정도로 이기고 만다는 것이였다. 심양과 룡인간에 이런 경기를 이미 여러번 하였다. '한국도 중국처럼 선수를 양성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몇십명 또는 몇 백 명의 우수 선수를 양성하기 위해 천천 만만의 문맹•반문맹을 배출할 수 없으므로 그런 결심을 못 내린다'고 대답하더라. 한국은 고등학교(고중)부터 이런 체육학교를 꾸린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보통 이런 체육학교를 꾸리지 않고 고중, 심지어 대학 공부를 완벽히 하며 체육은 명실공히 業餘로 한다고 한다. 최근 30년간 중국의 체육 수준은 급속히 성장하였지만 천천 만만의 문맹•반문맹의 선수 배출이 그와 동반되였다는것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중국 체육선수의 평균 문화수준은 소학생에 해당되고(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하고) 한국 체육선수의 평균 문화 수준은 초중생에 행당될 것이다고 필자는 대충 평가한다. 필자는 약 20년 전 한국 모 남자 선수와 중국 모 녀자 선수간의 중매를 서고 그들의 련애편지도 3년간 번역해 준 경력이 있다. 더불어 중•한 량국의 선수들과 접촉할 기회도 가졌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 선수의 문화 수준이 중국 선수보다 훨씬 높으며 상기의 평가와 거의 맞물린다. 중국도 1960년대까지는 학교 서클식으로 선수를 양성하였다. 그런데 '讀書無用論'이 난무하던 문혁때 많은 어린이들이 문맹을 마다하고 체육 또는 예술에 뛰여 들었으며 지금은 완전히 이렇게 정착돼 버렸다. 중국은 인구 80만 정도의 도시면 체육학교가 설립돼 있으며 해마다 이런 체육학교에서 문맹•반문맹의 선수들을 양성한다. 만약 이런 체육학교에서 해마다 평균 100명을 모집한다고 가정하면 중국 전역에 이런 도시가 200개 정도이니까, 1년에 2만명, 30년이면 60만명이나 되겠다. 이 60만명중 성•국가•세계급으로 출세한 선수는 수백명에 그칠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출세하지 못한 문맹•반문맹이겠다. 필자는 연변예술학교의 문화과 교원을 한 경력이 있다. 학력이나 나이로 따지면 고중생인 한 성악전공 학생이 집에 보낸 메모에 '거믄 와끼 보내 돌라'(검은 우와기 보내 주세요)'라고 씌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맹인지 반문맹인지 모를 일이다. 물론 체육학교에서도 소학•초중•고중의 학력공부를 시키지만 시키나 마나이다. 중국의 시스템과 한국 또는 구미 선진국의 시스템을 비기면 어느쪽이 더 낳을까? 필자의 수준으로서는 정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아래의 몇 가지만은 留意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문맹•반문맹의 특기인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10년간의 중국 프로축구 선수들의 행실을 보라. 타도시로 경기하러 갈 때 갈보를 차고 다니는 자가 허다하다, 주먹사회를 끌어들여 자기의 라이벌을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한다…만약 그들이 문맹•반문맹이 아니라면 이런 망측스런 사건의 발생 확률이 퍽 낮을 것이 아닌가! 문화수준과 도덕품행은 정비례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둘째, 체육 선수는 성공 확률이 높지 못한 업종이다. 성공하지 못한데다가 문맹•반문맹까지 겹치면 버린 인생이 아니겠는가? 성공한 선수의 선수생애도 아주 짧다. 몇 년, 고작해야 10년 정도 반짝하고는 사라진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화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코치를 하든, 학교 체육선생이 되든, 어느 문화기관의 체육 지도일군으로 활약하든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문맹•반문맹은 끝장이다. 셋째, 문맹•반문맹이 선수 노릇을 과연 잘 할 수 있는가? 몇 년전 북경 국안팀에 전근돼 활약하던 리홍군 선수가 생각난다. 키가 남보다 작고 개인 기술이 출중한 것도 아니며 빨리 달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지방인을 여지없이 깔보는 북경시민마저 변방 소도시에서 온, 그것도 소수민족인 리홍군을 '축구를 발로만 차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도 찬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리홍군의 문화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축구를 차는데도 머리를 굴려야 잘 찬다고 믿는다. 문맹•반문맹이 과연 머리를 잘 굴릴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축구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 원인이 많겠지만 문맹•반문맹과 初等•중등 문화인간의 게임이라는 원인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체육선수 외 기타 업종, 이를테면 음악, 무용,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어릴때부터 특기를 련마하는 것도 좋지만 문화지식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초중 정도는 원만히 배우고, 특기 업종에 종사하면서도 문화지식의 습득에 다소 정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하루 평균 한 시간 정도 신문, 잡지를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가수의 연창 콩클에 문화시험이 있는데 20대 대학생 가수가 열서너살 나는 초중생도 알아 맞힐만한 쉬운 문제도 몰라서 금붕어처럼 눈알을 껌벅거리다가 기권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여간 가련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100점 만점에 문화시험 성적이 1점으로 할당돼 있지만 앞으로는 점점 올릴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CCTV 3채널에서 제12차 청년가수 연창 콩클을 생방송하고 있다. '조예는 시밖에 있다(功夫在詩外)'라는 口述 시험문제가 있는데 바로 특기자의 최종적인 수준은 특기를 떠난 기타 문화지식, 사회경력, 생활체험 등에 있다는 뜻이겠다. '技嚮文靠'가 특기자의 더 보람찬 인생을 만들어줄 것이다.
46    우리민족의 부조문화를 개조하자 댓글:  조회:6277  추천:76  2007-01-07
우리민족의 부조문화를 개조하자정인갑 본 사이트를 통해 연변의 부조문화(기실은 우리민족의 부조문화)를 다소 알게 되였다. 월 평균 봉급 1,000∼2,000원인 고장에서 부조를 최저 100∼200원 하고 가까운 사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은 500∼1,000원 하여야 하며 이런 부조의 일이 빈번히 생긴다니 사람을 경악하게 할 화제다. 이 문제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북경의 부조문화를 알아보기로 하자. 필자는 1982년 1월 中華書局에 발령되어 지금까지 25년 근무하였다. 그런데 동료 대사의 부조에 쓴 돈이 단 51원뿐이다. 중화서국의 종업원들은 남이 알게 결혼 잔치하는 자가 전혀 없다. 생일, 환갑은 더더욱 쇠지 않는다. 이따금 동료 젊은이가 사무실에 찾아와 “시탕시탕(喜糖喜糖: 결혼사탕)…”하며 알사탕을 서너 알씩 던져주고,“시옌시옌(喜煙喜煙)…”하며 담배를 던져주고 나간다. "언제 결혼했는데?”“서너달 전에 려행으로…”.“축하한다”. 이것이 결혼 홍보의 전부다. 물론 부조는 없다. 그런데 약 18년 전 어느 날 아침 필자와 마주 앉아 5∼6년 간 같이 근무한 녀종업원 한 분이 “시탕시탕…, 시옌시옌…”하는 것이었다. “언제 결혼했는데?” “반년 전에 려행으로…”. “신방은 어디 잡았지?”“당신네 조선대사관 바로 뒤야”.“신방 구경 가도 되니?”“환영!” 그 날 오후 우리 편집실 종업원 7명은 1인당 1원씩 모아 보온병 하나 사들고 신방에 찾아가 차 한 잔씩 마시고 돌아왔다. 작년 필자 편집실의 또 한 분이 “사탕시탕…, 시옌시옌…”하여 1인당 50원씩 모아 그릇을 사준 적이 있다. 이 51원이 25년 간 부조 돈의 전부다. 술 한 방울, 밥 한 술 안 먹었다. 필자가 연길에 25년 살았다면 평균 한 달에 대사에 두 번만 참가해도 총 600번에 술 300근은 마셨고, 부조 12만 원은 냈고, 1,200시간은 허비했고…. “No! 12만 원은 내기만 했나? 받기도 했지! 이 돈은 엎음 갚음이야!” 이렇게 필자를 면박하는 자가 있음 즉 하다. 정확한 엎음갚음이 아님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므로 삼가 한다. 필자도 연길시의 결혼잔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음식이 절반 이상 남았으며 연회가 끝나는 바람으로 양돈장에서 실어가더라. 한 상에 1,000원을 잡으면 그 날 20상이니까, 1만 원어치를 실어간 셈이다. 연변에서 해마다 이렇게 되지 아가리에 밀어 넣는 음식(돈)이 몇 백 만원은 됨 즉 하다. 이 돈은 누구와 엎음 갚음인가! 또 술 마셔 당하는 신체의 손해와 시간 랑비는 누구와 엎음 갚음인가? 다수 사람들이 이런 풍속을 고쳐야 한다면서 고치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관건은 관념문제에 있다. 관념문제에 관해 역시 북경인의 상황을 살펴보자. 첫째, 북경인은 보통 대사를 개인과 집안 일로 본다. 필자의 경우 생일날 저녁 평소보다 炒菜 4접시 더 해놓고 집 식구끼리 모여 앉아 “祝你生日 快樂!”을 외치며 밥 먹는 것으로 끝낸다. 가정 식구끼리 밖에 나가 외식하는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고 생일을 쇤 적이 없다. 절대 대부분의 북경인은 다 이러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시탕시탕…시옌시옌…”이면 그만이다. 고작해야 두 사돈 가정에다 신랑의 불알친구 10명 좌우, 신부의 ×친구 10명 좌우 모여 4상정도 차려놓고 밥 한끼 먹는 것으로 끝낸다. 이런 경우 불알•×친구들은 부조를 500∼1,000원 정도 한다. 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1년에 둬 번 있을까 말까 하다. 둘째, 북경인은 “못난 놈”(속칭 못난 놈이지 사실은 못난 놈이 아니다)이 결혼 잔치를 크게 한다. 이런 사람은 보통 가정이나 본인이 不遇하며 “평생에 한번밖에 없는 결혼잔치나 성대하게 해 울분을 풀어보자”라는 심리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미국제 붉은 색 캐들랙 승용차 한 대를 앞세우고, 奧迪(아우디) 승용차 8대가 뒤따르고…, 수백 명을 식당에 끌어들어 먹고 마시고, 따라서 부조도 몇 만원 챙기고…. 그러나 이런 사람이 많지 않다. 일반 문화인, 교원, 공무원, 대학 졸업생, 괜찮은 직장인…들은 절대 이 짓을 안 한다. 누가 결혼 잔치를 크게 했다면 “그놈 못난 놈이겠구나”고 추측하면 거의 맞아떨어진다. 극히 개별적인 權力家가 크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람들의 여론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연변 자치주 주장의 아들이나 연변대학 박사 교수가 잔치(결혼, 생일 등)를 크게 하여 자기를 과시할 필요가 있을까? 구두 수리쟁이 아들이나 손수레 석탄 배달을 업으로 하는 젊은이가 결혼 잔치를 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북경인의 관념을 이렇게 풀이하면 이해 못할 것 없다. 필자는 1975년 연길에서 결혼 잔치를 하였다. 그때 小근莊(혁명화를 잘 한 천진시 교구의 모 모범 마을)을 따라 배우는 정치압력에 못 이겨 해바라기 두 근에 알사탕 두 근을 놓고 한 좌담회가 결혼잔치 내용의 전부였다. 저녁에 두 사돈집 사람이 한 상에 모여 앉아 술 둬 잔 마셨다. 그러나 평생 개인분투를 락으로 삼았으며 다소 보람을 느낀 탓인지 지금까지 유감 스럽다는 심정이 추호도 없다. 연변의 부조문화를 개조하는 관건은 관념상의 쇄신이다. “잔치를 크게 하는 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이를 락으로 삶는 자는 못난 놈이다”라는 여론을 광범위하게 퍼뜨리자. 중산층(白領)으로부터 시작하여 잔치를 안 하거나 검소하게 하자. 나중에는 중산층이 아닌 사람도 ‘못난 놈’이 되기 싫어 점점 이를 따를 것이다. 이러면 연변의 부조문화는 개조될 것이다.
45    '동무' 댓글:  조회:6754  추천:143  2007-01-07
'동무'정인갑 언젠가 한국 모 신문의 칼럼에서 ‘동무’란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文益煥 목사가 조선 金日成 주석을 만날 때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고민하던 끝에 ‘동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였다. 그러면서 ‘동무’를 한자의 ‘同務’에서 왔을 것으로 보고 ‘함께 힘을 쓰는 사람’으로 해석해 놓았다. 필자가 보건대 ‘동무’는 한자의 ‘同務’에서 온 것이 아니라 ‘同謀’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중세의 漢語에서는 서로 돕는 동료 일꾼을 ‘훠찌(火計/夥計)’라 했다. 劉昌惇(류창돈)의 《李朝語辭典》에 의하면 이 단어를 한국의 언해본 《老朴集覽》《譯語類解》《同文類解》에서는 ‘동모’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역어류해》와 대조해 본즉 ‘동모’가 아니라 ‘동무’로 되여 있다. 또 《訓蒙字會》는 ‘伴’자에 대한 해석이 '벋(벗―필자 주) 반’으로 되여 있고 그 밑에 ‘俗曰火伴, 同謀(통속적인 말로 화반, 동모라고 한다)’라는 주를 달았다. 《類合》에서는 ‘伴’자를 아예 ‘동모반’으로 풀이했다. ‘伴’자는 ‘동반자’라는 말에 쓰이는 ‘伴’자이므로 그 뜻이 ‘동무’와 통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 ‘동무’의 어원은 무엇이겠는가? 필자는 이를 한어의 ‘同謀’로 보고 있다. 한어에서 ‘同謀’라는 단어는 ‘짝이 되여 같이 일을 꾀하다(동사)’ ‘짝이 되여 같이 일을 꾀하는 사람(명사)’의 뜻으로, 춘추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주 쓰이고 있다. 이런 단어가 한자어에 없을 리 만무하며 조선어의 ‘동무’란 단어의 뜻에 ‘친구’란 뜻 외에 ‘짝이 돼 함께 일하는 사람(명사)’, 혹은 ‘짝이 돼 함께 일하다(동사)’의 뜻인 것으로 보아 그 어원이 한어의 ‘同謀’ 임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위에 언급한 《훈몽자회》는 16세기 초(1529년), 《역어류해》는 17세기 말엽의 저작인 것으로 보아 아마 한자어의 ‘同謀’를 옛날에는 ‘동모’라 하다가 후에세 ‘동무’로 바꾸었을 것이다. ‘동모’에서 같은 모음 ‘ㅗ’가 중첩되므로 이화(異化) 현상이 일어나 ‘동무’로 변하는 것은 어학적 규률에도 부합된다. 마치 ‘姑母’를 어떤 방언에서는 ‘고무’라고 하듯이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동무’를 ‘북한 빨갱이 말’이라며 쓰지 않는다. 하지만 16세기에 벌써 우리말로 쓰인 것을 ‘북한 빨갱이 말’이라며 배척하는 것은 당치 않다. 사실 조선에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쓰는 말은 ‘동지’이지 ‘동무’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동무’를 ‘친구’로 대체해 버렸는데 이 두 단어가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에 불편할 때가 많다. 우선 동사로서의 ‘동무’다. 가령 거의 끝나 가는 술상에 새로 등장한 사람에게 술을 권할 때 ‘내가 동무해서 마셔 줄게’하면 적절하련만 ‘내가 친구해서 마셔 줄게’할 수는 없다. ‘친구하다’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밤에 험한 산길을 가다니?’ 할 때 ‘동무해주는 사람이 있어’라면 적절하지만 ‘친구해주는 사람이 있어’하면 말이 안 된다. 명사 ‘동무’도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공사장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저 사람은 나의 동무야’ 하거나 서로 ‘동무’라 부르면 적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친구’ ‘동료’ 라고 하거나 ‘김군’ ‘박일식씨’ ‘미스터 최’ 식으로 부른다. 심지어 재미 교포로부터 ‘유(you)’라고 칭하는 것까지 들어본 적이 있다. 모두 ‘동무’처럼 적절하지 못하다. 최근에는 중국 조선족들조차 한국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점점 ‘동무’라는 단어를 피하더니 지금은 아예 쓰지 않는다. 연길시 예술단의 공연 중에 서로 모르는 두 사나이가 장보러 나와 자리다툼을 하다가 어느새 너 한잔, 나 한잔하며 술에 취하는 프로가 있는데 이 프로를 ‘술친구’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술동무’라 해야 맞으며 아주 적절한데 말이다. 한국에서 그토록 쓸모 있는 ‘동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못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조선족도 쓰지 않으니 매우 서운하다. 마치 어떤 동물의 種이 사라져간다는 기분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아직 ‘길동무’라는 말을 가끔 쓰며 가요 ‘찔레꽃’에도 ‘동무’란 단어가 등장한다.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등산할 때 두 한국 사람이 서로 몰라보다가 한 사람이 ‘같이 등산한 적이 있는데 왜 몰라보나’고 하니 상대방이 ‘아, 생각난다. 한번 같이 등산했던 친구를 내가 몰라봤구나’고 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말중의 ‘친구’를 ‘동무’라 써야 맞는데 말이다. 하여 몇 년 전에 쓴 이 글을 다시 베껴본다.
44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댓글:  조회:6326  추천:78  2007-01-07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정인갑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 사회는 도시와 해외 진출로 인해 일대 ‘위기’ 에 직면하고 있다. 자치마을•자치학교가 무너지고, 자치주(현, 향, 촌)의 조선족 인구비례가 줄어들고…. 이런 위기에 응급 대책은 없고 하니 어떤 조선족 ‘지성인들’은 무가내의 挽歌(만가)를 불러보기도 한다: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이 ‘고향가’는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는 ‘愛族歌’일 듯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견해를 좀 달리하고자 한다. 이런 변화는 우리민족의 危機와 悲이면서도 跳躍과 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눈앞에 들이닥친 것은 危機와 悲이지만 그 展望은 跳躍과 喜이다. 민족은 그것이 무엇이라는 확정성과 변화하는 운동성의 대립 통일체이다. 최신 생명공학과 유전자 연구성과에 따르면 인류의 최초 발원지는 아프리카이다. 약 14∼11만년전에 아시아, 유럽, 호주, 아메리카 등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그 이동 과정에 사람들은 아마 ‘아프리카에 살리라, 아프리카로 돌아가리라’의 푸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이런 이동을 막지 못하였다. 이보다 썩 늦은 시기 우리민족의 발원지는 아마 알타이산맥 주위였을 것이다. 그중 동부로 이동한 부족이 퉁구스족이고 東퉁구스족의 일부가 우리조선족으로 됐을 것이다. 그 이동 과정에 많은 조상들이 알타이산맥 지역에 대한 향수를 못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동아시아에 정착하고 말았다. 일제에 강점된 이후 우리는 중국으로 이민하였다. 약 반세기 이상 중국조선족은 ‘조선에 살리라 조선으로 돌아가리라’를 외우며 살아왔다. 적어도 移民 1세, 2세는 이러했다. 필자의 조부, 부친은 평생 조선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미 중국 귀신이 됐고 필자나 필자의 후손들도 앞으로 중국 귀신이 될 것이 아닌가! 개혁개방 이래 중국 조선족은 또 고향 중국 동북을 떠나 내지 대도시, 외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동안 일부 조선족 ‘지성인들’은 '어떻게 손수 개척한 토지를 버리고 세세 대대로 살아오던 요람을 떠날 수 있나?’며 이런 이동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조선족의 이런 이동은 지금 엄청나게 가중해지고 있다. 인류는 10여만년간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를 부르짖으며 계속 자기의 요람을 떠나 생소한 지역으로 확산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생존투쟁이다. 인류의 가장 기초적 활동은 의식주의 개선을 위한 생존 투쟁이다. 의식주의 보장과 향상을 실현할 수 있다면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는 어떤 주관 의지로도 개변시킬 수 없는 객관적인 철의 規律이다. 연변 시골에서 농사져 봤댔자 1년에 2∼3천 원 벌이밖에. 그러나 북경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면 100만원, 식당을 운영하면 15만원, 려행사 가이드를 해도 5만원, 짠지를 팔아도 3만원, 하다 못해 식당 심부름을 해도 1만 원 벌이는 된다. 그들에게 ‘연변에 살리라, 연변으로 돌아가리라’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지금 해외에 진출하여 연변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년간 8억 달러, 연변 년 재정수입의 2배라고 한다(김종국‘리와 폐, 득과 실’ 참조, 본 사이트 포럼 글마당 591). 또한 연변 조선족이 국내 타지역에 진출하여 버는 수입도 해외 진출 수입의 절반은 될 것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이런 수입이 없다면 허다한 연변 동포들이 굶주림에 헤맬 것이고 병 치료도 못할 것이며 자식의 공부도 못 시킬 것이다. 그들의 공헌은 애족이 아닌가? 이래도 ‘연변에 살리라, 연변으로 돌아가리라’인가? ‘고향가’ 唱歌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같은 값이면 고향에 와서 사업하고 고향에 투자하며 고향의 건설과 번영에 이바지하여야 바람직하지 않는가!’ 맞는 말일 듯도 하다. 10여년전 필자는 자치주 모 州長과 대면한 적이 있다. 그때 그 州長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연변에 투자할 것처럼 돌아다녔지만 투자커녕 종무 소식이라고 욕바가지를 퍼부었다. “저는 달리 봅니다. 만약 연변의 투자 여건이 좋으면 철근콘크리트 댐으로 봉쇄하고 오지 말라고 해도 땅굴을 파고서라도 들어 올 것이고, 수익성이 보이지 않으면 쇠사슬로 매여놓아도 빠져나갈 것이 아닙니까?” 필자가 州長에게 진언한 말이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 規律에 의해 움직이지 민족감정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수익성이 없는 연변에 투자하여 거금을 탕진하느니, 차라리 수익성이 있는 타지방에 투자하여 번 돈의 얼마를 고향에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공헌이요, 애족일 것이다. ‘고향가’ 唱歌자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누가 대도시진출, 해외진출이 나쁘다고 했나? 진출하고 싶은 사람은 하라. 나는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 우리민족이 대도시로, 해외로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발전과 진보의 표징이다. 이런 발전을 통해 우리는 농경 민족으로부터 산업민족으로, 村居민족으로부터 都居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벌써 이런 전환을 가져왔어야 할 것이 너무나 늦게 도래한 것이다. 우리민족의 지성인이라면 이런 변화에 찬가를 부르고 민족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야 할 것이 아닌가! 필자는 대도시나 해외로 진출한 우리민족들에게 ‘고향에 살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主題의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흥타령이고 우리는 먹고살기 어려우니 No!”가 그들의 반응이다. 결국은 생존투쟁이 인류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기본적인 활동임을 립증해 준다. 19세기 西學東漸할 때 일본은 이내 받아들였기 때문에 재빨리 아시아, 심지어 세계의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꼬락서니로 됐다. 유태인은 나라가 망한후 세계 각 국의 도시로 확산되어 상업에 종사 하였으므로 지구촌의 가장 탁월한 민족으로 탈바꿈하였다. 인디언은 인류의 문명과 대세를 거부하다가 지금의 꼬락서니가 됐다. 중국 조선족 이민의 지난 100년史는 농업국-계획경제라는 환경 속에서 농경민족으로 이럭저럭 살아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산업화-시장경제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전의 방식을 답습해서 되겠는가! 지금 우리는 절호의 발전 기회에 놓여 있으며 또한 엄연한 시련에 놓여 있기도 하다. 만약 이 시련에서 뒤떨어지면 우리민족은 영원히 농경민족, 村居민족, 약소 민족, 가난한 민족, 가련한 민족의 비애를 면치 못한다. 경쟁의 승부는 경제실력, 즉 富와 貧데 달려있는 듯 하다. 연변 축구가 추락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돈에 있다. 만약 우리민족이 산업화를 실현하지 못하고 빈곤에서 헤매면 우리의 우세는 축구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하나 추락되고 말 것이다. 중국 56가지 민족 중 교육 제일, 위생 제일, 문화 제일, 가장 문명한 민족…? 천만에 말씀, 하나하나 넘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인구비례의 위축으로 생기는 위기나 가난으로 생기는 위기나 다 위기이다. 후자는 전자보다 더 비참한 위기다. 인디언 ‘지성인들’은 19세기까지도 모이면 어떻게 백인들을 내쫓고 옛 인디언 원시공동체 사회로 복귀할 것인가 하는 탁상공론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수십 년 심지어 백년 이상의 앞날을 내다보며 민족의 대계를 세워야 한다. 고향에 살며 민족의 진지를 고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산업화의 遠景, 도시민으로서의 우리민족의 공동체 대책이 더욱 시급하다. ‘고향가’ 보다 ‘산업가’ ‘도시 진출가’ ‘글로벌가’를 더 힘차게 부르며 시대에 앞장서야 한다.
43    ‘방문취업제’실시에 즈음하여 댓글:  조회:6451  추천:104  2007-01-07
‘방문취업제’실시에 즈음하여정인갑 지금 한국에서는 재외동포의 한국 취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방문취업제’라 일컫는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새 법안의 제정을 위해 법무부인원이 중국 각지의 조선족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돌아갔다. 11월 10일 필자도 의견 청취 간담회에 참가하였다. 본 간담회에서 필자가 한 발언 내용을 진일보 보완하여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써 본다. 1. 중국 조선족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거래하며 많은 리익을 보았다. 보따리 약장사를 했던, ‘불법체류’ 취업을 했던, 중국진출 한국기업에 취직했던, 돈을 꽤나 많이 벌었다. 적지 않은 사람은 또한 번 돈을 사업 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 감사하여야 한다. 2. 그러나 이런 와중에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조선족의 한국 입국을 점점 까다롭게 만들어 많은 조선족이 뚜쟁이들에게 당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나중에는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길만 열어놓아 많은 조선족 가정이 파괴되고 많은 로총각, 홀아비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족사회의 위축이라는 엄중한 사태까지 빚어내고 있다. 이 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심각한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이다. 3. 새 법안의 골자는 친척방문자에게 5년 유효 복수비자에 1회 3년 련속체류 및 취업의 대우를 주며, 그 외 해마다 동포 3만명(그중 80% 즉 2.4만 명은 暫定 중국 조선족에게 할당)을 인력으로 모집해 가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숫자이며 3년 안에 한국에 가 일하고 싶은 조선족은 거의 다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말 획기적인 법안이다. 단 시장경제의 룰에 맞추어 호혜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건전하게 실행할 수 없다. 4. 그사이 한국은 중국조선족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준다고 하였으나, 1998년 ‘재외동포특례법’으로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8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빈 말뿐이였다. 국부적인 개선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안은 없었다. 이번 새 법안도 국회의 심사통과 및 많은 부서간의 조율을 거쳐야 한다. 시간상 질질 끌 가능성과 심지어 무산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중국 경제의 쾌속성장과 인민폐 대 달러 환률의 절상으로 중국 조선족의 생활 수준은 급속히 제고되고 있다. 이제 3년 정도 지나면 한국에 가 일하고 싶은 조선족이 아주 적거나 심지어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때 가서 새 법안을 실행한다면 중국조선족들은 ‘네미×, 똥이나 먹어라’라며 욕바가지만 퍼부을 것이다. 어린이에게 “과자 줄게, 과자 줄게” 빈 말만하며 줄 듯 말 듯, 너무나 시간을 끌다가 주면 내동댕이치고 안 받아먹는다. 삼척동자도 자기 자존심이 있는데 하물며 만만치 않은 중국 조선족이랴! 중국조선족은 ‘人窮志不窮’ 이란 것을 알라! 새 법안을 당장 내놓지 않으면 주고도 욕먹을 짓밖에 안 된다. 5. 2.4만명의 인력을 어떻게 모집하는가? 요구자의 신청서를 한국 법무부나, 로동부 또는 주중 령사관에서 이메일로 받고, 그 명단을 중국 조선말신문 또는 모 사이트에 공포하고 나중에 제비뽑는 방법으로 선발하기 바란다. 절대 모 특정회사나 특정기관에 의뢰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야 금품수수의 부정을 철저히 막을 수 있고 마이너스 後果를 극소화하고 플러스 效果를 극대화할 수 있다. 6. 한국어수평심사는 취소하여야 한다. 물론 한국어를 알면 일하는데 편리하다. 그러나 한국어수평 자격증으로 인하여 생기는 부정부패가 엄청날 것이며 이로 생기는 害가 得보다 퍽 클 것이다. 옛날 필자가 북경대학을 다닐 때 북경대학 영어계 교원 1/2정도가 영어 原版 영화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북경대학의 영어교원을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족(그도 개별적인 사람만)이 한국에서 일을 못할 소냐! 옛날 ABC도 모르는 그 많은 중국인들이 미국에 가서 미국의 동서 횡단철도를 가설하지 않았는가! 외국어를 모르는 많은 중국인들이 외국인과 결혼하여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지 않는가. 말은 한국에 가서 일하며 배우면 된다. 한국어 수평에 따라 봉급 차별을 주어 빨리 배우도록 자극할 수는 있겠다.
42    ‘한국어수평고시’를 단호히 반대한다 댓글:  조회:6400  추천:74  2007-01-07
‘한국어수평고시’를 단호히 반대한다정인갑 ‘방문취업제’에 따라 한국으로 가는 인력에 대해 ‘한국어수평고시’를 행해야 하는가, 행하지 말아야 하는가? 요즘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을 一瞥(일별)해 보면 贊反의 견해로 대립되고 있다. 또한 구 쏘련의 동포에 대해서는 면제해 주고 중국 동포에 대해서는 면제해 주지 말자는 견해도 있다. 필자는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본 사이트 글 참조) 좀 더 상세히 말해 보련다. 1. 뽑는 인력은 25세 이상의 조선족으로 제한돼 있으며 주로 조선족 농민이 응할 것이다. 25세 이상의 조선족 농민으로서 조선어를 전혀 모르는 자는 3%정도 밖에 안 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 3%를 위해 엄청난 부정도 마다하고 '한국어수평고시'의 방대한 공정을 가동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한족이 조선족으로 둔갑해 응하는 자를 방지하는데 신경을 써야 마땅하다. 2. 조선어는 膠着語이므로 한어나 영어보다 배우기 어렵다. 필자는 중국주재 한국대사관 문화원에서 한국어 강사를 5년 반 동안 하였으며 필자에게서 한국어를 배운 학생이 1천명 넘는다. 2∼6개월 배운 그들의 수준은 ‘한국어를 거의 모른다’이다. 사실 몇 년 배워도 시원치 않다. 그중 黃存新이란 학생은 필자의 권고, 사장 張志敏의 알선으로 화룡현 모 조선족 중학교에 가서 8개월간 생활하였는데 조선어를 제법 배웠다. 北京第二外大 한국어학과에서 3년간 배운 학생보다 더 잘하였다. 한국에 가서 일하며 배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겠다. 3. 지금 적지 않은 사람이 '한국어수평고시'에서 한탕 하려고 꿈틀거리고 있다. 할빈 모 한국어학원에서는 학비 5천원이라고 선포하였다고 한다. 북경 모 한국어 학원에서는 집을 빌리는 데만 교실 하나, 기숙사 방 하나에 1년당 각각 3만 원을 내야 한다니 학비, 식사비까지 합치면 학생에게 차려지는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 외에 신체검사비, 考試수수료, 한국행 항공기 티켓…. 합계 1∼2만원 날려야 한다. 이 금액도 고리대로 꾸어야 할 판이고. 무릇 돈이 생기는 일에는 부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돈이 많이 생기면 부정도 더 커지고. ‘한국에 가서 5년간 일하면 50만원정도 벌판인데 고까짓 몇만원쯤 뜯어먹는 거 별거 아니야’라며 달려들 것이다. 이래도 한국어수평고시를 실행해야 한단 말인가! 필자가 꾸리고 있는 三江學校는 ‘面授朝鮮語’ 자격증을 딴 학교이다. 지금 조선족 소학생에게만 조선어를 무료로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학교는 이번 ‘방문취업제’ 기회에 한탕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4. 한국어수평고시를 居住國 당국에 맡긴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사정을 알기나 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몇년전 한국 법무부의 말에 따르면 그때 한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는 중국인 13만명 중 1/3정도가 한족이라고 하였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그 ‘한족’ 대부분은 조선족이 신분증과 戶口簿를 위조한 ‘한족’인데 말이다. 중국에서 돈만 쓰면 안 통하는 일이 없다. 좀 과장해 말하면 巨金만 내면 ‘달나라 사람’이라는 증명서도 감히 써주는 것이 중국이다. 가장 법을 지켜야 할 공증기관도 마찬가지다. 돈 있는 사람이면 한국어를 전혀 몰라도 A급 증명서를 만들 수 있고, 돈 없는 사람이면 한국어 수준이 높아도 증명서를 만들기 어려울 가능성을 고려해 보았나! 한국어를 배우건, 금품으로 증명서를 만들건, 1인당 5천∼1만원은 써야 할 판이니 10만명이라면 5억∼10억원이 아무런 보람 없이 엉뚱한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이래도 한국어수평고시를 치러야 하는가?
41    '질' 댓글:  조회:6445  추천:77  2007-01-07
'질' 정인갑 고한어에서 ‘疾’은 작은 탈을, ‘病’은 큰 탈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 문헌에 ‘疾이 더 중해지면 病이라 한다(疾甚曰病)’는 註釋문이 있는가 하면 에도 ‘病’을 ‘疾加(질이 중해진 것)’라 해석하였다. 조선어 한자어에서도 ‘질(疾)’은 작은 탈, ‘병(病)’은 큰 탈을 일컬었다. 이를테면 큰 탈 ‘문둥병’ ‘폐병’ ‘정신병’ 등을 절대 ‘문둥질’ ‘폐질’ ‘정신질’ 이라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작은 탈 ’치질(痔疾)’ ‘간질(癎疾)’ ‘구역질(嘔逆 疾)’ 등을 절대 ‘치병(痔病)’ ‘간병(癎病)’ ‘구역병(嘔逆病)’이라 하지 않는다. 신체 장애자를 ‘병신(病身)’이라 하지 ‘질신(疾身)’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신체 장애자는 그 장애가 작을지언정 큰 탈로 보았다는 의미겠다. 고한어에서 ‘疾’은 ‘생리, 육체상의 탈’의 뜻으로부터 ‘행위, 도덕상의 흠’으로 의미를 확장해 썼다. ‘寡人有疾, 寡人好勇’ ‘寡人有疾, 寡人好貨’ ‘寡人有疾, 寡人好色’ 중의 ‘疾’은 모두 '행위상, 도덕상의 흠'을 말한다. 조선어 한자어에서 ‘질(疾)’의 ‘행위, 도덕상의 흠’이라는 뜻은 한어보다 더욱 보편적이다. 이를테면 ‘도적질’ ‘오입질’ ‘쌍소리질’ ‘욕질’ ‘싸움질’ 등은 큰 흠이다. ‘離間질’ ‘고자질’ ‘흉질’ ‘삿대질’ ‘손가락질’ ‘잔소리질’ ‘광대질’ ‘주먹질’ 등은 작은 흠이다. 자질구레한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태질’ ‘트림질’’하품질’ 등. 심지어 흠인지 흠이 아닌지 명확치 않은 행위도 높이 말하지 않을 때는 ‘질’을 쓸 수 있다: ‘새김질’ ‘빨래질’ ‘대패질’ ‘선생질’ ‘다림질’ ‘낚시질’ ‘칼질’ ‘찜질’ 등. ‘疾’은 고한어에서는 ‘짇[dzit]→짓’으로 읽는다. 조선어의 ‘짓’도 한자 ‘疾’과 관련이 있을 듯 하다.《論語•陽貨》:‘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옛날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짓이 있었으나 자금은 없어진 듯 하다)’. 이 례문의 ‘짓(疾)’은 조선어의 ‘나뿐 짓’ ‘엉큼한 짓’ ‘엉뚱한 짓’ ‘손짓’ ‘발짓’ 등의 용법과 류사한 듯하다. 어쨌든 우리말에서 ‘질’이건 ‘짓’이건 다 좋은 행위, 높이 말하는 행위에 쓰지 않는다. 고작해야 ‘노릇’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자 ‘疾’과 련결시키는 데는 무리가 없겠다. 고한어에서 ‘疾’과 ‘病’의 이런 차이점은 그리 분명하지 않았으며 先秦 문헌에 이미 헛갈려 썼다. 아마 先秦 초기 또는 商나라 때 ‘病’과 ‘疾’을 엄격히 구분해 쓰다가 先秦 중기부터 헛갈린 듯 하다. 흥미로운 일은 先秦 漢語에서 ‘病’과 ‘疾’의 구분이 흐린데도 불구하고 조선어 한자어에서는 이런 구분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민족이 先秦 이전에 이미 한자문화와 깊숙이 관여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자가 주장하는, 商나라를 세운 우리민족이 한자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의 한 단면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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