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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일년의 마지막 달)’‘설날(일년의 첫 날)’‘다섯 살’‘만세(萬 歲)’이 네 마디 말에서 ‘섣’‘설’‘살’은 고유어이고 ‘세’는 한자어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뿐만 아니라 ‘섣’ ‘설’ ‘살’ 역시 한자 ‘歲’에서 기원된 말이다.
‘歲’는 약 1,500년 전후의 중고(中古) 한어에서는 [sĭwεi] 로 발음했다. 이 음은 지금 쓰이고 있는 한자음 ‘세’와 맞물린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 약 2,000∼3,000년 전의 상고(上古) 한어에서는 ‘歲’자를 [sĭwet(셛)]으로 발음했다.
그 증거로 <시경(詩經)·대아(大雅)·생민(生民)>의 ‘載燔載烈, 以興嗣歲’ 구절 을 례로 들 수 있다. 중국 시가의 압운(壓韻) 현상은 앞뒤 시구의 마지막 글자의 중성과 종성이 같거나 비슷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烈’자를 [lĭet(렫)]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세’자도 [sĭw e t(셛)]으로 발음했다고 언어학자들은 고증해 냈다. 뿐만 아니라 중고 한어에서 받침이 없는 제운(祭韻), 태운(泰韻), 쾌운(夬韻), 폐운(廢韻) 네 운은 상고 한어에서 ‘ㄷ’ 받침이 있던 데로부터 없어진 것이라는 결론도 내렸다.
이 음이 조선어에 차용되어 ’셛→섣’으로_ 읽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조선 사람들은 ‘ㄷ’ 받침을 잘 발음하지 못해서인지 후세에 ‘ㄷ’ 받침을 점점 ‘ㄹ’ 받침으로 고쳐 발음하였으며 한자어의 규범 음에서는 아예 모든 ‘ㄷ’ 받침을 ‘ㄹ’받침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葛(갇→갈)’ ‘訥(눋→눌)’ ‘達 (닫→달)’ ‘辣(랃→랄)’ ‘末(맏→말)’ ‘拔(받→발)’‘殺(삳→살)’ ‘謁(앋→알)’‘節(젇→절)’ ‘察 (찯→찰)’ ‘脫(탇→탈)’ ‘八(팓→팔)’‘割(핟→할)’ 등이 그 례이다.
이렇게 보면 ‘歲’를 ‘섣→설’로 읽었을 것이다. 후세에 한어에서 ‘歲’를 ‘셛’으로 읽지 않고 ‘세’로 읽으니 ‘歲’자의 음을 다시 ‘세’로 규범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한자 ‘歲’와 관계되는 음은 ‘섣’ ‘설’ 및 ‘세’ 세 가지가 있다.
같은 개념을 표시하는 단어가 여러 개이면 그 중의 하나를 제외한 다른 단어들이 죽어버리거나 또는 의미상 서로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결과 ‘섣’으로 일년의 마지막 달을 표시했으며 ‘설’로 일년의 첫째 날과 나이를 표시했고 ‘세’를 쌍 음절 이상의 한자어로 썼다.
일년의 첫날에 나이 한 살 먹으므로 ‘설’로 나이를 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세 문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두설 디내디 아니ㅎ、야(두살 지내지 아니해야)’, <월인석보(月印釋譜)>의 ‘그 아기 닐굽 설 머거(그 아이 일곱 살 먹어)’ 에서 보다시피 그때는 나이를 일컫는 ‘살’을 ‘설’이라 했다. 나이를 헤아리는 ‘설’이 한해의 첫날인 ‘설’과 뜻이 좀 다르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지금은 ‘살’로 변경시켜 쓴다. 필자의 조선어 발달사 지식이나 조선 문헌에 관한 지식이 깊지 못하므로 언제부터 변경되었는지 본문에 다루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조선어 고유어에는 ‘섣’ ‘설’ ‘살’과 같이 한자와 관계되는 단어가 많다. 본 사이트에 올린 필자의 글 ‘동무’ ‘짐승’ ‘동이’’둥궤’ ‘짓’ 등은 필자가 이미 고증해 낸 이 부류의 단어 중의 일부이다. 그 중 ‘동무’ ‘동이’ ‘둥궤’ 등은 후세 한자음과 관련되지만 ‘짐승’ ‘섣’ ‘설’ ‘살’ 및 ‘짓’과 같은 단어들은 상고 한자음과 관련이 있다.
상고 한자음과 관련이 있는 이런 단어가 조선어 고유어에 적지 않게 스며들어 있는 현상은 필자의 주장-―상나라 때 만들어진 한자는 상나라를 세운 동의족(어쩌면 우리 민족의 조상)의 글-―의 증거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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