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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강산!
2012년 05월 19일 06시 49분  조회:3511  추천:1  작성자: 등에
, 금 강 산!
   
지난해 칠보산의 뒤를 이어 금년에는 조선 금강산을 다녀왔다.
원래4월14일 뱃길로 일정이 잡혀있었으나 조선측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다보니 항공편으로 평양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여 우리 관광객들에게는 오히려 화가 복이된샘이다.
4월28일,심양에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하니 오후3시경이었으나 수하물 찾는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여 조선금강산관광지도국의 버스에에 올라 원산으로 향했을때는 저녁먹을 시간이 되였으나 내일의 정상적인 관광을 고려하여 오늘로 원산에 가서 주숙하기로하고 평양을 떠났다.
조선의 출입국 수속이 작년보다 훨씬 간편하고 세관 검사가 까다롭지않아 이번 려
행의 첫 인상과 기분이 가벼웠다.사진기나 록화기도 그저 수량만 체크하고 넘어갔다.
개방의 분위기가 더짙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원산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나니 밤12시가 가까웠다.평양서 원산까지 200여km이
나 세멘트로 포장된 길이라하지만 덜렁거려 속도를 뽑을수없어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둠의 장막속에 잠겨있는 신비한 조선의 산천 구경은 궁금한데로 내일로 기대 할수밖에 없었다.
 
새날이 어슴프레 밝아오자 어제 하루로정의 피로를잊고 모두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원산시에서 제일로 꼽힌단는 이 <송도원>호텔은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듯한 정결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원산시의 동해안 기슭에 자리 잡고있는 이 호텔은 중국의4성급에 상당한 12층 건물이였음에도 호텔이라 부르지 않고 려관이라한다.
조선의 아침은 맑았다.
우리 일행은 접대원 처녀들의 친절한 봉사속에서 기분좋게 아침을 먹고 또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원산서 금강산까지 108km라한다.만약 원산서 고성으로 배길로 간다면 106km라한다.고성서 금강산 입구까지는 8km다.
 
우리는 금강산 온정구역에 자리를 잡고있는 <금강산호텔>에 행낭을 두고(여기서 이튿밤을 자게된다) 정식적으로 금강산을 구경하기로 한다.
 
금강산호텔은 1958년에 착공하여 1981년에 완공된 외국인 전용호텔로서 러시아식 건축인데 지하1층,지상12층,총13층으로되여있고 호텔로비에는 5메터에 이르는 천장높이에 건축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또한 남북리산가족의 행사장소이기도하며 남북적십자회담 및 장관급 회담의 장소이기도한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대외봉사국에서 운영해오다가 2003년6월,한국 현대아산그룹에서 임대하여 약1년3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였는데 지금은 조선서 운영하고있다.
봉사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로 금강산의 첫인상은 여기서 얻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으로는 해금강,서로는 외금강인 가운데 놓여있는 온정구역은 금강산의 첫 입구이
기도하다.이구역의 서,남,북쪽으로 톱날같이 솟은 기암준봉이 둘러서있고 동쪽은 확트이였으며 호텔 정원주위에는 진달래며 여러가지 꽃들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향기를 피우며 우리를 향하여 방긋 웃고있었다.아침마다 식당종업원들이 생화를 꺽어 식탁에 꽂아 싱그러 꽃내음새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오늘의 려정은 외금강의 <만물상>구역이다.
만물상은 층암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악미로 하여 금강산에서 가장인상적
으로 남성미를 갖춘 곳이기도하다.만물상은 이세상의 모든 물체들을 이 한곳에 모아 놓은것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물론 보는사람들의 충분한 상상력이 따라가야한
다.여기에는 무사바위를 비롯한 삼선암,얼굴이 험상궂게 도깨비처럼 생겼다하여 불리워진 귀면암,7층으로된 바위위에 사람모양의 큰돌이 놓여있다하여 칠층암,절부
암,독수리,곰,자라 등 각가지 짐승과 새들의 모양을한 기암들이 줄지여서있다.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좌우량쪽 산기슭에 미인송이 수림을 이루고있었다.여기 미인
송은 장백의 미인송처럼 어쩐지 더 미끈하지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감이 들었다.
아마 장백의 미인송보다 더 늙어서일까?장백의 미인송도 300여년이 된것도있는데…
30대후반인듯한 엄씨라는 여성 안내원은 금강산 구경을 하자면 두가지를 “아껴”야
한다고하였다.
 그중 하나는 “아!아!”하는 감탄사를 아껴야한다고한다.아!아!감탄사를 련속 내뿜으면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금강산 구경을 놓쳐버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진 필림을 아껴야한다는것이다, 처음부터 마구 이것 저것 사진을 찍다보면 필림이 떨어져 갈수록 더 좋은 경물을 찍지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이다.사실 그러하였
다.높이 톱아 오를수록 아!아!소리는 련속 나갔고 모두들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
다.
무러익어 가는 늦은 봄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의 골짜기에는 녹지않은 눈들이 해살에 반사되여 멀리서 보면 마치 은띠를 산비탈에 내리드리운듯 녹아내려오는 폭포수에 어울려 한결 금강산의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안심대를 지나 망양대에서 왼쪽 가파로운 길로 헐떡그리며 약100메터를 오르니 작은 샘이 나타났다.<망장천忘杖泉>이라는 사시장철 마르지않고 아무리 큰비가 와도 넘쳐나지 않는다는 샘이다.그기에 물맛까지 좋아서 마시면 장수힘이 솟아나서 짚고갔던 지팽이도 잊고 간다고하여 망장천이라 이름을 달았다한다 그런데 이물은 딱 한모금만 마시야하지 너무 많이 마시면 젊어지다 못해 아기가되여 홀랑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버린다고 안내원이 익살스레 이야기하였다.모두가 그래서인지 한모금
씩 물을 마시고 계속 벼랑길을 톱아 오르기시작했다.이렇게 자연 돌문인 일명 하늘문이라고도 불리우는 <천일문> 에 이르렀다. 이 문은 높이가 두어길가량되여 보였고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으며 문벽에는 “금강제일관”이라 새겨져있었다.만약 이문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천선대를 발견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천일문을 나서서 철근으로 만들은 경사70도도 넘는 사다리를 수없이 굽이 굽이 갈아타고 금강의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에 올랐다.네게의 삐죽삐죽 솟은 바위가 기둥처럼 겨우10여명이 들어 설수있게 둘러서 있었는데 이전망대는 천주봉줄기가 뻗어져 내려 가다가 잘리운 끝에 놓여있어 허궁에 떠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신비로운 주위를 바라보면 수정기둥에 서리꽃이 서린것 같기도하고 은으로 주조한 붓처럼 뾰죽한 산악들이 사처에서 번득이였다. 동남방향으로 금강산에서 제일 높이를 자랑하는 비로봉(1639메터)이 멀리 멀리에서 아물거렸였다.금강산에 다녀온후 많은 사람들의 중국에 장쟈졔보다 좋으냐,황산과 비해 보면 어떠한가 등등의 물음을 수없이 받았다.장쟈졔에 가도,황산에 가도 볼수없는 신비한 산악이 바로 금강산이였다.생김세나 기세나 중국의 그 어느 곳에서 보아낼수없는 그 무엇이 바로 이 금강산에 숨어있었다.백두대간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강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조선반도의 숨결이 보여지고 들려오는 곳이 아닌가싶
다.마치 백호가 엎더려있는듯한 지형을가진 금강산맥은 뻗어나간 줄기도 호랑이 등줄
기 무늬를 방불케했다.그렇틋 금강산은 숭엄한 기백이 산줄기마다 골짜기마다 봉오리
마다에 담겨있었다.
  천선대에서 내려와 세지봉 동쪽에 망양대가있다한다. 그기에 오르면 동해바다가 바라보이며 바다가운대 섬들이 마치 물속에 고기들이 헤염치느듯한 절경이라하나 이번 관광코스에는 그곳이 없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오리라고 어렸을때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어느누구도 통계를 내여 본적이없다한다.그러나 제일봉인 비로봉에 올라가보면 이 일만이천봉이 몽땅 보여질
것만 같은 생각이든다.지금까지 비로봉을 정복해본 경력이없다는 해설이다.중국의 쵸모랑마봉은 많은사람들이 올랐다는 보도를 들은 이야기지만 금강산의 비로봉은 나는 새 외에 그 누구도 오를수없으리라고 여겨진다.산세의 험악성과 수직으로된 가파로움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의 준엄한 모습에 기가 꺾여 사람들이 오를 념도 못한다 봄이 마땅 할것이다.그토록 엄숙스러운 금강산의 비로봉이였다.
헐떡거리며 산발을 타고 오르고 내리다 보니 많은 경물을 보지 못하고 아쉬움을 한아름 품고 하산하고 말았다.
저녁전에 금강산온천욕을 하였는데 이 온천은 500여년전 부터 유명해졌는데 광물질 규토 온천으로 여러가지 심장장애,고혈압증등에 리롭다한다. 물의 온도는 40도 좌우여서 우리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중국의 몇개온천을 다녀 보았지만 모두가 이 물보다 더웠다.한국사람들이 금강산 유람길에 올랐을때도 이 온천은 개방되지 않았고 우리가 처음으로 리용하는 관광객이 되였다한다.참으로 이번 관광은
이래 저래 많은 우혜를 받은셈이였다.
풍성한 저녁식사에 반주술 한잔을 곁들이고 객실에 돌아와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
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부시도록 이부자리가 깨끗하고 객실의 정연함에 놀랐다.
려관마다 물이나 전기가 풍족히 쓸수가있었다.지난해 칠보산려행길과는 달랐다.
 
오늘은 외금강구역에서도 으뜸가는 구룡폭포를 비롯하여수많은 폭포들과 소(沼)들
이 집결되여있는곳으로 떠났다.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옥류동이라 이름지은 곳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하였다.금강산에서 제일 큰 담수인 옥류담의 면적은 600평방메터나되며 깊이는 6메터나된다한다.여기서 또 약 200메터쯤 올라가니 조그마한 담소우에 련주폭포가 걸려있었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 비봉폭포전경이 보이는데 마치 봉황새가 나는듯한 모습이라하
여 이 이름을 달았다한다. 비봉폭포는 금강산 4대폭포중 하나로서 폭포는106메터
나되는 특이한 바위벽으로 쏟아져 내려와 우리들을 신비경으로 몰아갔다.이폭포의 오른쪽에 또 무봉폭포가있어 아주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문자 그대로 폭포와 소,기암
들로 이루어진 한폭의 풍경화였다.
여기를 떠나 우리는 계속 올라가니 길 오른쪽켠에서 수많은 은구슬을 날리는듯한 이름모를 폭포가 물보라를 날리며 쏟아지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를 넋없이 살펴보다 보니 일행의 사람들은 가많게 저 멀리 가버렸다.그래서 대오를 따르려고 한식경이나 숨이 턱에 닫도록 무엇이 무언지도 모르고 달려 무대바위라는 곳에 가서야 대오를 만났다. 무대바위란 폭포아래에 내려가는 계천위에 무대처럼 생긴 넓직하고 평평한 바위였는데 먼저 도착한 우리 사람들이 그기서 훨훨 춤을 추고있었다.  
더디여 구룡각에 이르러 구룡폭포의 전경이 요란한 물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 구룡폭포는 조선의 3대 폭포중하나라고 안내원이 소개하였는데 금강산에서는 으뜸가는 폭포로서 높이가74메터,너비는4메터의 아름다운 폭포였다.수많은 세월동안 폭포의 떨어지는 물방아로하여 깊이13메터의 <구룡연>을 만들어 놓았다.옛날에 9마리의 룡이 여기서 살았다하여 구룡연이란 이름을 달았다나…
9세기에 이곳을 찾은 한시인 너럭바위 위에 아래와 같은 한시 한수를 남겼다.
천길 흰 비단필이 내리운듯 하고
만섬 진주알이 쏟아지는듯 하여라.   
 
구룡폭포에서 사진도 찍고 잠간의 휴식을 끝내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구룡폭포를 만들어내는 상팔담으로 가기 위하여서였다.연담교를 건너 상팔담
오름 길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아바이”는 그만 두는게 좋다는겄이였다. 여기서약700
메터의 길은 상상도 못할 가파로운 산발을 타야한다고하였다.한참 망서리고 있은데 함께 갔던 친구가 올라가지 말자고하여 아쉬운데로 단념하고 말았다.
 앉아서 쉬면서 상팔담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히 수림들사에에서 나타났
다 숨었다 하는데 올려다만 봐도 아찔하였다.
집에 돌아온 지금에도 올라 가보지 못한것이 내내 후회가되였다.
상팔담에 오르면 구룡대란것이 있다한다.여기에서 골짜기에 푸른물을 담은 소(沼)
들이 층층이 련달아있는것이 보인다한다.그 가운데 큰것8개를 팔담이라하는데 이 팔담을 내금강에 있는 만폭동의 팔담과 구별하기 위하여 상팔담이라 한다고한다.
이렇틋 험악한 돌산 꼭대기에 담소가있고 흘러내리는 물이 있다는것이 신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는 하도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하고 올라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금강산은 우리들이 잘 알고있다싶히 외금강구역,내금강구역,해금강구역,이렇게 크게 3개구역으로 나뉜다.내금강은 무었때문인지 우리들에게 개방되지 않고있어 이번에는 외금강의 만물상구역과 구룡연구역의 구경을 마치고 해금강구경이 남았다.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지역이라 이것,저것 주의하라는 당부도 많았다.그중 몇가지를 들어 보면 지정된 곳 외에는 가지말것,전쟁시기에 각 군이 묻어 놓은 지뢰들이 있어 위험하다는것,군사요지여서 아무곳에나 기웃거리며 다니지 말것,(아닌게 아니라 바다옆 산기슭에 해안포들이 배치되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함부로 아무데나 오줌을 갈기지 말것,이에 진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안내원의 이야기는 여기서 특히 남자들
이 아무데고 오줌을 갈기다가 땅벌(이고장 사람들은 땡삐라한다)에 쏘여 거시기가 방망이 만큼 크게 뿔어나 고통을 겪는다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서 남으로 보면 얼마 멀지 않은곳에 자그마한 섬이 보인다 그섬이 바로 군사분계선이여서 어민들의 어선도 그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이쪽에서 작업을 하고들 있었다.
우리가 본 해금강은 바다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길이300메터좌우 넓이50메터
좌우의 아주 제한된 구역이였다.그러나 경관은 륙지부분이 아닌 해상경물이였다.
여기에는 해만물상이라는 섬들이 있었다.바다속에 우뚝솟은 립석,소나무가 무성한 솔섬(松島)전설로 가득찬 사공바위,다정하게 마주서있는 부부암,사자바위등이 다투어 서있었으며 크고 작은 섬들이 구슬마냥 해빛에 반짝이고 있었다.특히 볼거리는 해저 만물상인데 그곳은 바다 밑이라 아직 개발되지않아 구경할수 없었다.
뭐니 뭐니하여도 해금강의 해돋이를 보지 못한것이 크다란 유감으로 남았다.해금강
에서 제일 장쾌하고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수 있는것이 해금강의 해돋이라한다.
백사장에 서서 불덩이 같이 이글이글 타는 해가 솟아 오르는 모습을 바라 본다는 것은 상상만 하여도 황홀하였다.
나는 구경거리도 마다하고 저—쪽 남녁땅쪽으로 눈길이 끌리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분계선 넘어 저멀리에서 푸른바다와 푸른하늘이 잇다여 있었다.
한때는 쪽문이나마 빠끔이 열려 남쪽에서도 이곳으로 관광을 다녔고 리산가족도 이곳 온정리에서 만나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지금은 리산가족 만남의 장소로 쓰이던 건물은 문이 닫긴체로 외롭게 쓸쓸하게 서있었다.
해금강 구경을 마치고 삼일포 구경을 갔다. 삼일포는 호수들과 섬들,그 기슭에 명
승들이 포괄된다.
삼일포는 예로부터 관동 8경의 하나로 불리우며 호수경치로서는 뛰여난 모습을 가지고있었다.섬중간에있는 마치 소가 누워있는듯 하다하여 와우도라 이름을 달은 섬위에 소나무들이 멋진 풍경선을 이루고있었다.
삼일포주위에 영랑호니 감호니 하는 담수호들리 있다고하나 모두가 멀리서 보일뿐
이였다.
여기 상점에서 <솔술> 한병을 샀는데 유로를 인민패로 환산하니 9원60 전 가량 나와서 10원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찾아줄생각도 하지않는다.
조선의 화페개혁이후 돈액면의 수가 가장 큰것이 5000원 짜리였다. 5딸라쯤 된다.보통 관광 안내원의 한달 월급이 1500원인데 딸라로 환산하고 다시 인민패로 환산하니 7--8원가량되였고 조선암시장에서 쌀한근에 12—15원한다한다.
 
삼일포를 둘러보고 돌아오는길에 기차역이 보였다. 그래서 저 기차역이 무슨역인가 물어 보았더니 이전에는 이 기차길이 남으로 쭉 통하였는데 지금은 여기서 동강이
났단다.이 끊겨진 철길의 마감역전의 이름은  <금강산청년역>이라 불렀다.
원산서 고성까지 오면서 녹쓸은 철길이 외롭게 누워있는것이 자주 눈에 띄우군하였
다.
 
여기서 금강산관광은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외금강,내금강,해금강 외에도 돌기둥이 빽빽히 서있다고 하여 총석정이라 불리우는 총석정의 이채를 띠는 돌과 물과 동굴,그리고 망경대구역,망군대구역,태상구역,구성
구역,백운대구역,만폭구역,만천구역,은선대구역,송림구역,발연소구역,백정봉구역,선하구역,천불동구역,선창구역,등 등 수많은 경관구역을 짧은 며칠사이에 다 둘러본다
는것은 욕심에 불과한일이다.이쯤의 구경을 하게된것만 하여도 하나님에 감지 덕지할
일이다.나머지 구경은 후에 관광 올사람들에게 남겨놓는다.
이곳을 떠나면서 나는 머리를 돌려 한 특수한 건물에 다시 한번 눈길을 보냈다.
온정리에 마땅히 지금 이시각에도엗남북의 수많은 리산가족들이 여기에서 모여 서로 부등켜안고 회포를 배풀어야할 남북 리산가족면회장소의 건물이다.
2007년12월에 준공된건물인데(어느쪽에서 투자하여 지은 건물인지는 알아 보지 않았다)12층으로 동시에 천여명을 수용할수있는20개의 객실이있다한다.그후 금강산 사고(박왕자 피격사건)로 인하여 관광이 중단되여 개관식은 못하고 2010년3월에서
11월5일까지 남북리산가족 만남의 행사를 진행했다.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리산가족
의 비운을 남겨둔채 이건물의 문은 굳게 닫겨져있었다.
 
아침을 먹고 행장을 들고 나와 호텔종업원과 관광안내원들의 배웅속에서 우리는 원
산으로향했다.
조선의 봄은 농민들을 모두 논밭으로 불러 내였다. 일찍 부은 수상모는 파릇파릇 자랐으며 지금 한창 모판을 닦는 곳도 있었고 경운기(천리마뜨락또르?)로나 여윈소들
이 힘겹게 쟁기를 끌고 사람은 소앞에서 소를 끌며 논밭을 갈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언덕에서 나물케는 아낙네들과 어린애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아직 자라지 못한 풀들을 뜯고있는 소들이나 양들은 여위여서 피골이 상접한 모양이 마치 강원도의 벌거벗은 산들의 모습과 같았다.이곳의 산들은 덤성덤성 소나무들이 서있는 외에 풀들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어려운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기려는지 하는 걱정이 절로났다.
 
금강산을 떠나와 고성에서 원산으로 가는데 통천이라는 고장을 지나게된다. 한국현
대그룹의 정주영회장의 고향이다.가난뱅이 정주영씨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땅에 500마리의 소와 500대의 자동차를 보내주었다한다.수년이 지난 현재 그 소들이 아직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관광길에 타고 다닌 버스가 아이러니하게 현대차였다.
그리고 갈마반도 해안에 그 옛날 <명사십리 해당화>라 노래로 불리워지던 명사십리
가 뻗어져 있는것을 볼수가 있었고 평양을 거의 다 갈무렵 동명왕의 무덤이 옆으로 삐여져 나간 쭉벋은 도로 저 끝에서 얼씬 보였다.  
 
이날은 5.1로동절이여서 조선에서도 근로자들의 명절이라 하루 휴가가 있는 모양이였다. 길가에서 각종유희놀이를 하는 무리들이 보였고 끼리끼리 숲속에서,강가
에서 밥보따리를 풀어 놓고 점심들을 먹고있는것이 보였다.학생들이나 종업원들은 단체로 들놀이를 조직한듯 싶었다.배구시합을 하는곳도 있었고 달래기하는 곳도 있었고 춤판 노래판이 벌어진곳도 있었다.원산시에서는 온시민들이 명절옷차림으로 해변 광장에 모여들어 온갖 놀이가 한창이였다.우리 일행중에 누군가 우리도 잠간 차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날의 귀중한 휴일은 평양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즐거운 날로 되여있었다. 평양시구
에 들어서니 길가의 나무 밑에서나 공원에서도 무리무리로 술들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정경이 기분좋게 우리눈에 안겨 왔다.우리가 투숙하게 되는 호텔앞 수림속에서도 몇무리의 술판이 벌여졌있는것이 보여 있었는데 그들의 환보의식에는 눈살이 찌프러졌다.먹은후에 남긴 쓰레기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며 바람에 흩날려 주위를 어지럽혔다.지금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정경이다.
 
호텔 엘리베트에서 연변서 이곳으로 나와 담배공장을 한다는 술취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5.1절이라 술을 마신게 그만 취하였다한다. 조선생활이 재미있느냐는 물음
에 그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이튿날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왔다가 또 다른 한 연변에서온 강씨라는 젊은이를 만나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투자환경이 어떠하냐는 물음에 모든것이 어렵다고 말하였다.그는 현재 우리조선족들이 평양에 나와 크고 작은 기업을 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된다고 하였다.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심양에서 황해북도에 광산 고찰을 갔다 돌아오는 한족친구는 아주 락관적으로 투자환
경을 전망했다.    
  
평양에서 첫번째로 만경대 탐방이였다.김일성주석의 생가를 배알하고 온 평양거리
가 한눈에 안겨오는 만경대에 올라섰다.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을 품에 안고있는 평양
시는 평화스럽게 보였고 아름다웠다.
평양은 <류경>이라는 일명을 갖고있다. 柳京이란 뜻은 버드나무가 우거졌다는 뜻에서 온것인데 거리에 수양버들이 휘휘늘어져있었으며 대동강이나 보통강은 온통 버드나무숲에 묻혀있었다.버드나무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도있었다.
저녁을 먹고 평양 야경을 보고싶다고 청을 들었더니 조선측 려행사책임자가 흔쾌이 받아 주었다.김일성광장에서는 모두가 사진도 찍고 시원한 대동강변의 밤 공기에 취
하였다.다음 주요거리를 버스에 앉아 돌아 보았다.듣는 소문과는 달리 평양의 주요거 
리는 불빛으로 장식되여있었고 조용하였다.
그러나 주민구역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까막나라였다.
대동강유보도에서 거니는 사람들의 무리는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5월2일,귀국하는 날이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정오쯤이여서 아침을 먹고 또 평양구경을 떠났다. 처음으로 찾아 간곳이 만수대였다.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이 정중이 모셔져 있는곳이다. 2012년4월14일에 제막식을 가지고 한달후인 오늘 우리들이 찾아 보게되였다.
평양시민들이 출근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들에게 경견히 허리굽혀 묵례를하고 간다. 우리 일행은 꽃다발을 사들고 (이 꽃다발은 조선측에서 삿음) 줄을 지어 묵레를 하고 한참 주위를 살펴 보았다. 천리마 동상도 보였고 모란봉도 보였으
나 모란봉극장은 나무숲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모란봉은 생각보다 나즈막하였다.
의사당(중국의 인민대회당에 상등하다)도 한눈에 흘러 들어왔다.이것 저것 궁금한것
을 알아보고 모두가 차에 올라 개선문으로 향했다.
개선문은 프랑스 빠리의 드골광장에 서있는 49.54메터 개선문보다 10메터나 더높게 흰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20년간의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개선한 김일성장군의 위업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위하여 세운 기념성적 건축물로서 김일성탄생 70주년인 1982년4월에 건립했다.정중하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이 건물은 지금 평양의 상징물로되여있다.
높이는60메터,정면너비52,5메터,아치문높이는27메터,너비는18메터이고 개선년대를 상징하는<1925>와<1945>라는 글자가 좌우로 갈라져 새겨져 있었고 <김일
성장군의노래>의 가사가 중간 윗부분에 새겨져있다.개선문 사각마다에 진달래무늬가
새겨져있었는데 각기 70송이라한다.이는 김일성주석의 탄생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개선문의 또하나의 특징은 모든건물의 정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지만 이 개선문의 정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리유는 김일성주석이 항일혁명의 불길을 지핀곳인 백두산이 북쪽에 있다는데여섰다.
 
이번려행에서 사진을 찍거나 록화를 하여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출입국검사소를 지날때도 사진기속의 내용을 검사하지도 않고 통과 시켰다.
나는 조선의 전기가110볼트로 알고(조선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전압이220볼트였다)
사진기충전기를 가져고 가지 않아서 바떼리부족으로 많은 귀중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것 이번 려행길에서 가장 큰 유감으로 되였다.
 
지리적으로 조선반도는 복받을 땅이다.만약 이땅에 전쟁의 불운이 없어더라면,
력대로 렬강들의 간섭이 없었더라면,남북이 좀더 랭정한 정치머리를 가졌더라면,
한민족이라고 말로만 하지말고 서로들 믿어 준다면,이땅에 평화가 깃들고 백성들이 대복속에서 살수있는 땅덩어리에 틀림이 없을것이다.
그날이 빨리왔으면 하고 하늘에 빈다.◈20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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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jby0306
날자:2012-05-31 19:18:36
나두 1974년송도원에 가보았는데 너무어려서인지 아니면 너무오래된일이여선지 기억에 또렷이 남이있는건 산우에 덮인푸른 소나무숲과 그밑에 깔린 붉은모래톱 거긴 백사장이아니라 홍사장이였다 그리고끝없이푸른 바다 영사십리라는곳은 가보지못했다 금지구역이라......그곳에서 멀지않은곳에 엄청나게큰 유리하우스가있었는데 한겨울인데도 그속에는 푸르른 활엽수와 이름모를 아주큰 푸른과일이 주렁진나무들이 빼곡히자라 열대림을 방불케했다.
1   작성자 : eee
날자:2012-05-27 03:18:18
어째 좋은데는 가 보았는데 글이 째우지 못하고 말투가 좋지 못하구만요
거~~~~가 무엇이요 이것도 써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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