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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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좋은 시

좋은 시 묶음(1)
2019년 07월 19일 16시 41분  조회:1324  추천:0  작성자: 륙도하


채소를 다듬다가 / 강초선

채소를 다듬어본 사람은 알리라
밭에서 갓 캐어 왔다는 채소를 다듬다 보면
먹을 수 있는 속잎보다
먹을 수 없는 겉잎이 더 많았을 때, 속상했던 기억을...

한 뿌리에서 돋아나
속잎과 겉잎으로 갈라지는
채소, 우리네 삶의 가지에도
진짜와 가짜는 태어나는 법
그래, 어쩌면 꼭 필요한지 몰라
속잎을 보호하기 위한 겉잎으로...

진짜와 가짜,
예부터 귀하고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조상들
그 얼이 지나친 탓일까
세상 어느 장소 어디를 가도

가짜가 진짜의 주름잡고
화려한 조명발 받는 세상
사라져가는 것은 쓸쓸한 진짜들의 뒷모습
잃어버린 진짜들의 설 자리
바람과 햇살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볓 안되는 속잎마저 말라버린다면
속잎이 없는, 먹을 수 없는
겉잎으로만 자라나는
쓰레기밭을 가꾸는 세상이 될까
그 것 이 두 렵 다



 


비누 / 강초선

그의 몸은
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
그러나
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까닭에
한순간의 生이
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
오래 전
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온
제 몸의 향기를
흐르는 물에
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





 

 

다른 구멍에 넣다 / 최영철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는데
구멍이 카드를 밀어낸다
자꾸 넣어도 자꾸 밀어낸다
구멍이 자기를 밀어낸다는 걸 알았는지
구멍이 밀어내기도 전에 카드가 먼저 비집고 나온다

몇 번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 줄 선 아주머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차

누가 이 많은 구멍을 만들었을까
현금 카드를 넣는다는 게 전화카드를 넣어버렸다
아주머니가 웃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경배 / (김소연. 2015년 <문학과사상> 여름호.)

ㅡㅡㅡㅡㅡ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풍의 좋은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은 아픈 소리를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세상의 아픔을
말하네요 날도 더운데 "그"  초록의 부추처럼 다들 오늘도 싱싱해지시기 바랍니다 오전 근무를 하고 플룻 레슨을 받고 산에 올라왔는데 시 올리느라 잠시 숲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산새소리와 바람 속에서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한 잎의 온도

            금시아


나뭇잎 한 장, 빙판에 갇혀 있습니다
 
반대편의 아이 하나,
피켓을 들고 침묵합니다
 
이파리 쪽으로 모여들거나 햇살 쪽으로 모이는 온도가 있습니다 초록도 온기도 없는 겨울이 짧은 햇살을 따라 저녁으로 갑니다
 
지구의 시간이 녹아내리고
금요일의 아이들 등교를 거부합니다
 
나뭇잎 주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한 잎의 곁도 흔들리는 촛불만큼의 온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체감온도가 한 잎의 온도라면
 
금요일의 피켓은
창백한 지구의 어조입니다
 
얼음의 이불 같은 마른 나뭇잎 한 장, 지구를 걱정하는 어린 피켓 하나, 어쩌면 겨울의 숨통이거나 따듯한 봄의 근처들이겠지요
 
어떤 금요일의 약속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치 밖의 온기가 있습니다

 

ㅡ『미네르바』(2019, 여름호) 
------------------------------------
금시아 : 1961년 광주 출생.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툭,의 녹취록』 『금시아의 춘천詩_미훈微醺에 들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서울의 우울 5

                      김승희


오늘의 날씨,
모기가 힘이 없어요

우리는 일회용 건전지가 아니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 나무젓가락이 아니다
우리는 당일치기 풍선이 아니다
말할수록 야위어가는 메아리가 아니다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왜 우리는 불안한가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약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어도 불안하고
아침에도 불안하고
저녁에도 불안하고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엔.....
유능해도 불안하고
무능해도 불안하고
낮에도 불안하고 밤에도 불안하고
왜 우리는 쥐새끼처럼 늘 불안한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은가
성폭행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놈이 많은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왜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한가
왜 나의 하늘을 누가 가리고 누가 뒤집는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법이 허전한가

정녕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
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
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
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
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
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
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
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






나비는 날개로 운다
이근배
날개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봄 산과 들을 뒤덮고 있는
저 꽃들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다
내 어리석은 더듬이로는
한사코 쏟아내는 질탕한 향기를
다 맡아낼 수도 없는 것
알에서 애벌레로 다시 번데기로
거듭 몸 바꾸기를 하면서
우주의 빛깔을 모두 담아 짜낸
비단날개로 하늘을 휘저으며
아지랑이 더불어 춤을 추는 것이나
나의 발은 허공에 더욱 시리고
달디단 황홀을 빠는 입맞춤은
혀끝에 죽음처럼 쓰다
겨우 봄 한 철도 못 건너고
적멸로 돌아가는 나의 가녀린 목숨
붉은 볼로 서럽게 웃는
저 어리고 아리따운 것들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내 몫으로 챙기지 못하고
헤프게 꽃가루로 날려버린 사랑
나는 춤으로 운다
날개를 바스러트리며
바스러트리며





쭈그러진 술 주전자
 
김인덕
 
먼저는
생업에 뛰여들기도 전에
이유 없이
주인의 망치에
흠씬 뚜들겨 맞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홀에 호출되였다가
여기저기 술상 모서리에 맞히고
멋도 모르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단
쭈그러진 술주전자
 
밤새도록
낯선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술잔을 오가며
귀때로 열물을 토했다
 
온갖 짓거리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마저 노근하다가
짓궂은 나그네의 육담에
잠시 마음이 설레이기도 했다
 
자정이 되여서야
시렁구석에 납작 엎드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빈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다
 
마침내
새벽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쭈그러진 술주전자끼리
부둥켜안고
스며드는 한점의
찬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쭈그러진 술주전자는
누구나 가슴에
쓰고 농렬한 소주쯤은
품고 사는 거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말한다







 

   박은영



아버지 몸엔 뾰족한 것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친구들은 보자마자 어깨선에 숨겨둔 낫을 찾았고
바짓단에서 호미를 들춰냈다
바늘, 송곳, 펜촉, 압정…하나씩 찾아낼 적마다
나는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몇 해 전 양지 바른 뒷산에 엄마를 숨겼을 때처럼
때때로 예상을 뒤엎기도 하였다
산새 우는 밤이 덥수룩한 턱수염에서 나오고
나란히 선 아버지와 나 사이
녹슨 열쇠가 잠긴 기억을 열고 윤곽을 드러냈다
체육시간에 잃어버린 실내화 한 짝처럼
눈 씻고도 보이지 않는 화상(畫像)
뒷장의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왼쪽 가슴
셔츠 주머니 가장자리에 양초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어둡고 누추한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가
촛농을 떨어뜨렸다
귓바퀴에 웅크려 있던 새가 울부짖고
낮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학부모 모임날
아버지는 눈앞에 두고도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제9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혜작.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 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 오빠에게/
넘김니다
작은 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김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에게 넘김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하자/
손사레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 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 사이 내손에 불이 붙었습니다

깜짝놀라 엉겹결에
들고 있던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머리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새를 만나다


      이화영



새 울음이 들려와 빨래를 널었습니다
펄럭이는 자락이 작은 깃 같아서
가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대상은 다정합니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은
빨래사람 짓을 합니다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이 습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입니다

새의 이니셜은 고독합니다
나는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할 것입니다

빨래의 오른 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먹었습니다

동이 터 옵니다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
며칠 빨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6월호




 

초대시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초대시

오래 말하는 사이/ 신달자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말레이시아 클럽

황주은


참사랑회는 스무 명으로 시작했다
회원이 줄자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린이집 봉고를 운전하는 7년 언니가
동그라미회가 어떠냐고 제안했다
가슴을 떼어 낸 언니들이 주로 반대했다

도배 다니는 9년 언니의 의견이 신선했다
우리 모두 찰고무같이 질기게 살아야 하니
세계최대 고무 생산국가 이름을 따자고 주장했다
참사랑의 본질도 생고무와 같다고 모두 주억거렸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클럽의 언니들이 되었다

3년 언니와 5년 언니는 샘물요양원을 거쳐 영구 탈퇴를 했고
8년 언니는 소원대로 애인의 포도밭에 묻혔다
그녀의 애인은 고위 공직자라고 했다

우리 클럽의 강령은
'늦지 마, 죽지 마, 신입회원은 항시 환영!'이다
투병 연도를 앞에 붙여 이름 대신 부른다

닭발을 팔던 19년 언니도
들국화를 꽂고 우주로 포장마차를 몰았다

그해 겨울,
클럽에는 눈 대신 하얀 진액이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우리들 가슴에는 구더기가 끓었다

말레이시아 클럽 가입은 무료다

 

ㅡ『문예바다』(201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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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은 : 경북 예천 출생.  2013년 격월간《시사사》로 등단.





 
 

거울 / 조용숙

가까이 다가오면
무엇이든 덥석덥석 삼켜버리는 나는
온몸이 입이라네
헛배만 불렀다 꺼지는 상상임신처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네
거침없이 입에 넣은 것들이
깊은 망각의 늪에 떨어질 때면
나는 먹은 만큼 더 허기가 진다네
먹이를 찾아 나설 발이 없어
늘 뱃가죽이 납작하게 붙어 있는 나에겐
영양결핍에서 오는 폭식 습관이 있다네
늘 허겁지겁 삼켜봐도
먹을 수 있는 건 항상 생의 외피뿐이어서
깊이와 무게는 삼킬 수가 없다네
지독한 편식주의자인 나는
언젠가부터 만성 빈혈을 앓고 있다네

.
.
 

걸레 / 이기순

몸으로 닦아준다
접근할수록 쌓여가는
삶의 흔적
겸손으로 핥고 지나간다
잔재
깊숙한 아픔까지 안으로 흡수시키는 나,
흥건하게 어두워진다
비웃지 마라
뒤엉킨 시간 속에 너덜거리는 세상의 먼지
뒤집어 쓴 건 내가 아닌 너다
네가 게워낸 삶의 잔재
몸으로 쓸어안고서도 흔쾌히 가슴을 여는 나,
인간이 만들어낸
시커먼 속내 기꺼이 들이마신다
하여
너는 나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디카시

꽃등심
     
       김세연

등에 문신처럼 새겨진 문양이라 했다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접시 위에 고이 핀
저 붉은 꽃

 

(           )

                 안도현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 안도현, '익산고도리석불입상' 전문


누구에게나 사랑은 맹목, 눈 먼 석불
나에게도 눈 먼 석불이 있지
부모에게는 자식이 눈 먼 석불이요
칸트에게는 철학이 눈 먼 석불이지
한용운의 님이 모든 기리운 이의 눈 먼 석불이듯이
모든 사랑하는 이의 가심에는 하나의 눈 먼 바위가 있지
천 년이 가도 어두운 석불입상,
네Du가 있지......








 

민들레 저작권

 

김서하


꽃을 베끼는 복제의 계절
들뜬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락거린다

틈을 보이면 위험한 시뮬라크르의 세상
원본을 밝히지 않는
강을 건너온 바람의 옷소매에서 물냄새가 났다
가벼운 생일수록
뿌리는 질기다

제멋대로 분양된 흰 민들레
그런데 너는 알고 있을까
이번 달에 월세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봄의 작품들
발신지를 몰라 저작료를 지불할 필요 없으니
끝까지 꽃대를 밀어 올린다마는
너를 안고
궁핍의 페이지를 한 번 더 옮긴다.


시집『가깝고 먼』2019. 고요아침 열린선 

 


 

     상징법


그동안 기초적인 것과 좋은 습관 들이기 그리고 쉽게 시를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 한번에 하나씩만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상징법인데
시의 참 맛을 이제부터 알아가시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상징법은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을 활용하여 사유를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조 관념으로 사용하는 사물과 원래 쓰고자 하는 원관념의 공통점을 어떻게 잘 풀어내는가가 관건이 됩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예로 들겠습니다.

 

     배롱나무 /  김시호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지난 주에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이다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실은 원관념인 너와 나를 숨긴 것이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단종애사를 쓴 시입니다.. 즉 원관념 너는 단종이고, 나는 성삼문입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힌트를 주기 위하여 본문에 삼문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면 원관념인 성삼문과 보조관념인 배롱나무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요..?
제가 이 글을 쓸 때는 처음 배롱나무를 한참 관찰하고
그다음 집으로 돌아와 배롱나무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찮게 성삼문이 좋아한 꽃이란 것을 알게되어 시나리오 구성을 위해 단종애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다음
다시 배롱나무 앞에 앉아 성삼문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보고 쭉 쓴 것입니다..

첫 연의

너 없이 피고 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주군에 대한 신하의 도리)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성삼문의 일편단심)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주관적이지 못한 어린 단종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고문을 당할 때 전신에서 터져나오는 피와
실제 배롱나무꽃 피는 모양을 공통분모로 표현)
밑둥이 허얘지도록 나는 야위었는데
(실제 배롱나무의 밑둥은 허였기도 하며
옛날 고문 과정에서 정갱이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것을 묘사)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수양대군의 찬탈)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동강이 흐르는 영월에서 단종의 죽음)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비통한 신하의 심정)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주인을 버리고 세조 밑에서 살수는 없었다)

명패가 삼문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삼문을 독자들에게 힌트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문을 세겹으로 빗장을 걸어 충성심을 지켰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다시 살아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주군을 모실 것)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다시 태어나서라도 충성을 다하여
기어코 주인을 지키겠다)

*요기서 잠깐 논란이 있었던 햇불은 김시호식 조탁입니다
흔히들 횃불의 오타가 아닌가 하셨는데 그것이 아니고
한 여름 이글거거리는 태양을 제나름으로 표현 한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원래는 시에 대한 해설은 확장성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도 성삼문과 관련하여 시작을 하였으나 중의적으로 연인관계에서 일편단심
부모의 자식사랑에 대한 부분도 비쳐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집법에 대한 이해가 되셨나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 원관념을 숨기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말이 됩니다
많은 시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별들이 모여 사는 마을

                       김찬옥

 
지호가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다
가방을 받아들고 집 앞 편의점에 들려 마이쭈를 사고
새콤달콤한 얼굴로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마당에 핀 꽃들이 오늘따라 유독 한가해 보인다

봄은 꽃들에게 먼저 왔건만 경비병보다 더 지루해진 오후,
한참 졸고 있을 꽃들에게 지호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저 나무는 목련이라고 해, 꽃이 뭐 같아 보여?"
"응 꽃잎이 하얀 날개 같으니까 백조 같아요"

"그래 정말 백조 같네,
큰 소리로 말하면 백조 떼가 우르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지호는 살금살금 목련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적막한 봄은 달아올라 모이를 쪼듯 연신 물어댄다
"저 건 벚나무인데 저 꽃은 뭐 같아?"

"응 벚꽃나무 뒤에 하늘이 있으니 밤하늘 별자리 같아요
별들이 함께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이 나무에 걸려있네요"

"응 정말 그러네, 지호의 눈은 진짜 상상님이 주셨나 봐"

지나던 바람이 귀를 세우고 지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백조 몇 마리 땅으로 내려앉아 날개 속에 부리를 감추자
지호의 머리 위에도 발등 위에도 낮 별들이 호호호 쏟아져 내렸다


 
ㅡ『시현실』(2019, 여름호)
-------------------------------
김찬옥 : 1996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물의 지붕』『벚꽃 고양이』등. 수필집『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지문


김유진


여긴 무대인데 너무 누워 있는 건 아닌가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는 건 아닌가
침묵도 대답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한 번쯤 움직였을 텐데

무언가를 계속 적는 관객 앞에서 나는 사물

여긴 무대인데 너무 대사가 뻔한 건 아닌가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간호사가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게
형식적인 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나는 사물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수밖에……

여긴 무대인데
조명이 너무 식상한 건 아닌가
조명 주위로 벌레들이 모여드는 것도
예정된 방치처럼
티 나게 노골적인 건 아닌가
암전되거나 말거나
천천히 어두워지거나 말거나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지
사물의 대사는 사물 속에 있을 테니까
- 격월간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해설

어느 순간 당신은 이런 상상도 할 것이다. 내가 만약 식물인간이 된다면 나는 과연 무엇으로 존재할까? 식물일까? 아니면 동물일까? 아니면 식물적 동물일까? 동물적 식물일까? 다른 사람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나 혼자만 나를 인식한다면 과연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방치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의해 김유진 시인의 「지문」은 탄생했을 것이다. 그동안 식물인간에 대한 시는 많이 창작되어 왔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창작된 시들은 공통적으로 식물인간의 존재성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럴 때 식물인간이 주체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문」에 나온 화자는 주체자로서의 발화가 거리낌이 없고,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능동적이다. 어차피 타자들이 식물인간인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나름대로의 ‘나’를 표출하는 수밖에 없다 라는 의지가 돋보인다.
화자는 지금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화자에게 부여된 지문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마지막 희극일 수도 있고/ 흥행하는 연극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오래 액션”이 없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움직임은 없고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 화자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역할의 본질은 ‘생각하는 사물’. 관객들은 ‘생각하는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물(事物)인지 사물(死物)인지 관찰하다 “특이사항 없음이라 적고” “포도당에 비타민을 타는” 형식적인 조치를 취한다. 마치 죽어가는 식물에 액체 비료를 투입해주는 식이다.
화자는 죽을 때까지 ‘사물’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물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감은 눈은 더 이상 뜰 필요” 없으니 “예정된 방치처럼” 노골적인 관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역할을 하루 더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화자가 끝까지 저항하면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노골적인’ 가족들의 방치인가? ‘노골적인’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문’에 대한 확고한 입장표명인가?
시인은 스스로 비참함에 비참함을 더하는 식물인간인 의지를 연극이라는 코드를 활용해 「지문」에서 미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식물인간에겐 존재성을 나타내는 주체의 결핍이나 욕망의 환유가 없다. 그저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생명연장을 하기에 과학적으로 보면 식물인간은 분명 피동적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친 그것은 주체적이다. 당신의 눈엔 어느 쪽으로 비치는가?(하린 시인)



 

28회 정지용문학상 국물

당선자 | 신달자

당선일 | 2016-04-25

국물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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