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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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시론(1 . 2 , 3 , 4 , 5 , 6 , 7 , 8 )
2019년 08월 19일 08시 11분  조회:1066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 것/ 안도현시론1

무엇을 쓸 것인가? 한 미국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파울러)라고.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 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시인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시인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 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 두자.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어트를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원이다.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를 독파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시는 ‘고귀한 사랑’ 아냐 … 하찮은 것 써야>
<나만의 경험 살려 어떻게 쓸 것인지가 관건>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졸시 <애기똥풀>)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칭(艾靑)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도현시론2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백석 시엔 멧새 깃털도 없어 후대 독자들 궁금할 수밖에

한 끼의 밥을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고,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연암집>)는 문장을 남겼다.
그만큼 제목은 중요하다.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 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강연호, <주제의 구현과 제목 붙이기>)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멧새 소리>이다. 그런데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 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자유지성사)에서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나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제’있지만 좋은 시 드물어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처음부터 붙이든 나중에 붙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하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시 쓰기의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그것은 제목이 시의 내용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다.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붙여야 한다는 시인들의 조언도 적지 않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주면”(박제천,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문학아카데미>)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지엽은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과 “술어를 생략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감탄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도 예를 든다.(<현대시 창작 강의>, 고요아침)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무제(無題)>가 기다리고 있다.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의 시 <무제>다. 사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제’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를 제목으로 단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무제>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이 왜 아픈지 나도 아니까!

대체로 제목은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김중식의 <완전무장>을 읽어보라),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우는 경우(최승자의 <개 같은 가을이>가 대표적이다)가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연암의 호쾌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함락된 적진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와 연애하는 법'/ 안도현시론3
                                                  
◇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 다작 (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 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인정>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풍장 27>(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안도현시론4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 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텍스트를 시가 되게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황지우는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찾아 쓰겠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가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는 그의 시론집 <백석도인서설> 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이안의 <숨길 1>이다.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소극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 “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내 자신의 언어 만날 때까지 찾고 넣고 비틀고 흔들어라〉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문태준의 짧은 시 한 편(<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을 보자.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나희덕의 시 <누에>를 보자. 두 딸과 꼽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은 김종삼의 <장편(掌篇)·2>인데, 이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묻자. 시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이원, <시와 세계> 2007년 가을호)를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안도현/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안도현시론5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직유·제유·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라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과 대상 연결하는 ‘은유' 비틀고 꼬며 덧칠해야 할까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활과 리라>)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제유의 시학>에 따르면 시는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다. 다시 말해서 은유는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서경>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명문장을 보라. 모두 문장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어려운 말로 교묘하게 꾸민 구절이 있는가? (중략) 제자백가서만 보더라도 모두 자신들의 도리를 논했기 때문에 그 글은 쉽고 간결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마침내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다.”(허균 <성소부부고>)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의 시 <땅>이다. 시인은 가진 땅이 한 평도 없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땅을 가지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소유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시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이 시에는 시적인 비유도 없고 시적인 발견도 없다고, 이런 시라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쓰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것이니까 좋은 시라고 추어올리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는 아주 작지만 근원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땅을 가진 뒤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에 부동산을 짓겠다는 투기 욕망 따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런 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인은 그저 초목과 꽃을 심겠다고 한다(그러다 보면 땅값이 오르겠지, 하고 의심한다면 당신은 정말 속물이다). 이러한 단순성의 미학이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만들었다.
이 시에서 무욕의 욕망을 읽고 은유 아닌 은유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은유의 성채 입구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 나는 그것을 ‘비유의 덧칠’이라고 부른다. 비유를 덧칠하지 않고 단순한 상상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저녁에 술 마시러 나갈 때 천상병의 이런 시 구절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주막에서> 일부분)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미당이 작고하기 두 해 전, <현대문학> 1998년 1월호에 발표한 시 <내 늙은 아내>다. 그 한 해 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도 그렇지만 말년에 미당은 여든을 훨씬 넘은 나이에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얻었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이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詩仙)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특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천진난만한 상상 표현하길

내 아내는 여기 등장하는 ‘늙은 아내’와 달리 내 담배 재떨이를 아침저녁으로 비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내 재떨이는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버린 휴지 조각, 방바닥에서 집어낸 머리카락, 손톱 따위들을 담는 쓰레기통쯤으로 취급되어 왔었다. 나는 이 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보고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부터는 정말 내 재떨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담뱃재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재떨이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무려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아 내곁에 누어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戀人(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눈 오시는 날〉 일부분) 그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단순함의 힘이다.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랑하라 그러면 써질지니'/안도현시론6

●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시론>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중국의 문학이론>)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청장관전서>)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 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사랑법>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밤에>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 장옥관, <걷는다는 것> 전문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새로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안도현시론7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꿔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시학도 이 마음의 눈을 강조한다. 사물의 껍질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관물론’(觀物論)이 그것이다.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섦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새롭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정민, <한시미학산책>)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 보물 같은 의미들이 숨어있다

우리의 연암도 그림의 리얼리티가 단순히 사실적 묘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은 그 물건과 꼭 닮게만 하는 데 있지 않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고는 훌륭한 그림이랄 수 없다. 잣나무를 그리려거든 잣나무 형상에 얽매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마음속에 푸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고는, 천 그루 백 그루의 잣나무를 그려 놓더라도 잎 다 져서 헐벗은 나목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라.” 또 청대의 시인 심덕잠(沈德潛)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 시인은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눈으로 발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없는 멋진 이미지와 새로운 의미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 보물인 데도 보물로 보지 못하고, 숨겨진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 를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 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 지는 시를 기다리지 마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 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졸시 <겨울 강가에서> 전문

이 시의 소재는 겨울 강가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다. 실제로 어느 겨울 날 나는 강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깔리기 시작하는 섬진강을 갔고, 그 전날 내린 눈이 살얼음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문득 얼음 위에 내린 눈은 왜 녹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눈송이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곰곰 생각하다 보니 이런 시 한 편이 태어났다.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세찬 강물 소리”는 그 무렵 신문에서 읽은 과학상식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든 물소리는 물방울들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인 거라고 했다. 폭포 소리가 큰 것은 물방울들이 더 많이 깨지기 때문이고, 여울에서는 물방울들이 돌멩이에 걸려 깨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난다는 것이다.(나는 초등학생들이 보는 과학이나 생물 관련 책을 자주 뒤적거린다. 거기에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데도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나무가 새로 잎을 피워 내거나 떨어뜨릴 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무를 노끈으로 묶거나 필요 이상으로 밤에 불빛을 쪼이면 나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등은 얼마나 매력적인 시의 소재들인가.)

◇삶을 관찰·발견·반성할 수 있게 가슴속 망원경·현미경 갖추길

시인도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관찰의 자세로 사물을 봐야 한다. 아니, 사물의 현상이나 외피에 집중하는 과학자의 관찰을 넘어 시인은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삶을 앞으로 진보시키지만 시는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양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한 부분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해 내고 이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고 그 관심이 타인에게로 전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좀 더 여유롭고 또 세심한 관찰에서 비롯된다.”(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김명수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발자국> 전문). 바닷가 백사장 위에 찍힌 발자국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을 지우는 풍경도 바닷가에서는 흔하게 보게 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데서 오롯이 시가 생겨난다. 발자국 흔적의 행방을 찾는 이 의문은 ‘품어주다’라는 동사를 만나 아연 시적 깊이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사장 위의 발자국을 오래 바라보며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만나게 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의 제목은 <바다의 눈>이다. 관찰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은 바로 ‘시인의 눈’이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 곳을 보려면 망원경이 필요하고, 미세한 것을 보려면 현미경이 필요하다.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1970~80년대에 시인들은 주로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바라보던 시인의 눈이 ‘골방’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광장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군중을 바라보던 ‘그’가 골방의 ‘나’로 회귀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해 외치던 3인칭의 목소리를 1인칭의 내면 탐구 형식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장의 햇빛을 뒤로 하고 골방의 그늘에 들어앉은 시는 그 이전보다 훨씬 촘촘한 상상력의 밀도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골방은 음습해서 점점 자폐적 공간으로 바뀌어 가기 마련이다. 광장을 떠나온 자아는 아예 광장을 외면하거나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 단계 한국시의 자폐적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의 눈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할 때가 되었다. 시인은 옆에 항상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 두어야 하고, 광장과 골방 사이에서 그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그 둘 사이에서 긴장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시를 빚는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을 빚는 사람이므로.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안도현시론8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의 얼굴이 핼쑥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가 그랬다.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없었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경림의 <농무>가 솟아나왔다.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주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침묵 강요하는 참담했던 시절, 신경림 ‘농무’ 현실묘사 ‘충격'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 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창작의 원칙 같은 것도 나름대로 정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향기롭기만 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시골 큰집>)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하찮은 세계가 한 권의 시집 속에 그렇게 눈부신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서정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이용악의 <낡은 집>이다. 이 시에서 이용악은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30년대의 상황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그려낸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농무>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는 전체 5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다.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의 이슬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두어 방울은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 <삶> 전문이다.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서정 만나면 ‘시’ 탄생 감정 구성하고 소재 장악해야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 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의 <허공 한줌> 전문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시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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