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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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10
2019년 12월 21일 21시 04분  조회:2042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밤의 독서

이장욱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낯선 여자 
  
 이향아 
  
    
 거울 속에는 언제부턴가 
 낯선 여자가 있다. 
 나보다 한 발짝 빠르게 떠났다가도 
 나보다 한 발짝 앞질러 돌아오는 
 날이 갈수록 낯선 여자가 있다. 

 손님처럼 멀거니 바라보다 지치면 
 수십 겹 물살 아래 잠적해 버리는 
 그렇다 
 내 모든 시름과 눈물 
 내 모든 번잡과 분망은 
 바로 이 낯섦이다 
 공연한 망설임으로 얼굴을 붉히고 
 손장단 어깨춤에도 신명을 멈춘 것은 
 그림자처럼 날 추적하는 
 거울 속 바로 저 여자의 
 낯선 얼굴 때문이다 
  
 이별하는 일이야 너무나 쉽지 
 검은 휘장 내리고 돌아앉아서 
 나 몰라, 나 몰라 
 쫓아내는 일 
 그거야 쉽지 어렵지 않지 
 낯선 여자를 
 오래오래 낯설게 
 내 눈 속에 품을 듯 
 녹여버릴 듯 
 낯설게 낯설게 뚫어야겠다


-시집『종이등 켜진 문간』(문학세계사,1997)



ㅤ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진도 냉이 
  
        이향아 
  
  
진도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어느 땅이나 똑 같은 봄 나물이 아니여 
진도의 밭 두렁에 쭈구리고 앉아 
진도의 냉이를 캐고 싶다 
미풍에도 흐느끼는 신들린 냉이 
신들린 진도의 코딱지 나물을 캐고 싶다 
겨울이 추웠기에 오히려 색이 맑은 
진도산 봄나물의 희디 흰 뿌리를 
내 오른 손금 위에 얹어 보고 싶다 
손금으로 파고드는 
진도의 
봄 시냇물 
풀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선창가 젓비린내 질퍽거리고 
- 목포에서 - 

  이향아 
  
  
내가 처음 목포에 갔을 때 
앞바다 물새알은 탁구알처럼 영글었다 
나는 그 시절 
목포 출신 탁구선구 위쌍숙을 사랑했고 
그녀는 푸른 바다 물새알처럼 솟았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커서 목포에 다시 갔다 
동백꽃 입맞추며 사진을 찍고 
선창가 정처없이 흐느적거리면서 
이난영 노래도 흥얼거렸다 
공연히 다리 뻗고 울고 싶었다 
바닷물보다 짭짤한 눈물 몇 방울 
그 바다 과녁에 섞어두고서 
흔적없이 흔적없이 뒤돌아서 왔다 
오늘 다시 목포에 왔다 
목포시인 김송희도 뉴욕으로 가고 
소문난 집 전복죽을 혼자서 먹으면서 
'네 고향 목포는 아무 탈 없고 
동백꽃만 몸살하며 지고 있더라' 
줄코 줄여 스물 몇자 전보를 치고 
유달산 조각공원 석양을 향해 
제목없는 묵념을 길게 하였다 
선창가 젓비린내 질퍽거리고 
뱃고동 악을 쓰고 울었으면 싶었다 
위쌍숙을 아시지요? 안부를 물어도 
모른다고 절레절레 고개들을 저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출세를 했어도 
옛날의 위쌍숙만 어림도 없다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이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아이쿠 아이쿠, 시원하시겄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가 그렇게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ㅡㅡ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ㅡ위 시는 워낙 유명한 시라서 대중에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 공간을 털면
이 시 / 쉬 / 에 대한 감상문 혹은 시노트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 시평을 잘한 분의 시노트를 가져와 시의 재미와 감상을 도운다ㅡ


이 시는 많이 알려진 대로 정진규 시인의 부친 상가에 갔던 문인수 시인이 정 시인에게 들은 부친과의 회고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회고담은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이다. 이를 듣는 순간 성능 좋은 촉수가 번득였고 이거 잘 하면 괜찮은 시가 한 편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곧장 대구로 내려와 단숨에 초고를 다듬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떠나버린 노구를 꼭 안고서 옛날 옛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며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이는 행위가 시인에겐 '몸 갚음'으로 포착되었던 것이다. 일화는 정진규 시인의 것이지만 비로소 시는 문인수 시인에게로 온 것이다.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길고 긴 뜨신 끈'

시에서 '뜨신 끈'으로의 비유는 문인수 시인 특유의 감각을 멋지게 살려낸 대목으로 이후 그의 모든 시에서 전매특허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금껏 각자가 눈 오줌발의 길이를 끈으로 환산해 잇는다면 한라에서 백두까지 세 번은 왕복하고도 남으리라. 그 '길고 긴 뜨신 끈'은 생명의 존재를 증거 하는 한편 인간의 모든 욕망을 함의한 존재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늙은 아들은 그 끄나풀을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하고 그 아버지의 끈은 이제 '툭, 툭, 끊기'면서 힘겹게 마저 풀리고 있다. 그때 아들은 '쉬!' 추임새를 넣는다. 한번은 길게 또 한번은 짧게. 어릴 적 많이 들어본 이 단음절의 언어를 아들의 가슴에 안겨 다시 듣는다. 쉬이 누어보시라는 추임의 뜻 말고도 우주적 고요를 이끌어내는 말이기도 하고 또 이 밀교의 행위를 빤히 지켜보는 삼라만상을 향해 비밀유지를 당부하는 주술적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한 절절한 울력의 소리였던 것이다.
(권순진) ㅡ 출처 네이버ㅡ


ㅡ별도 시 노트 ㅡ


위 감상의 시노트는 다른 분의 시노트로 대신했다 굳이 시노트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시를 접한 분이나 또는 교육수준의 정도면 충분히 그 속뜻을 읽어
내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공부중인 문청인 나는 여기에서 우리가
시쓰기에서 배워야할 몇가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시인은 여기서 오줌을/ 뜨신 끈/ 으로 읽고 있다 대단한 감각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끈과 관련된 시들이 몇 편 떠올려지기는 하지만 그건 실존하는 끈 혹은 인연의 끈 탯줄의 개념, 상징 등으로 표현되고 시적으로 확대 사용되었지만 오줌을 /뜨신 끈/으로 읽은 시인의 감각과 시력은 혀를 내둘 정도다 아마 이것은 시인이 천부적 자질이기보다 늘 대상과 사물과 대화하며 어루만진 반복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어떤 함의에서 도출된 결과물이 시인의 직관으로 연결, 발화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 위 시의 전문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묘사다 탁월한 묘사력를 보여주고 있다
그냥 텍스트란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그장면을 실제 보고 있는 듯 선명하게 영상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묘사 역시 많은 훈련에서 얻어진 학습에 의한 상관물일것이다

그리고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가 그렇게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어떤 동작 행위를 자세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 몸 갚아드리듯 / 정말 깊다
그 행위와 동작의 자세를 시인은 아무나나 상상할 수없는 깊숙한 곳에서
뭉클한 무엇을 끄집어 내었다 / 몸 / 어떻게 이 평이한 한 단어로 행위와 동작 자세
모두를 대변하며 단숨에 절정으로 몰고 가는가 우리가 이 시인에게서 배워야할 또 한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평이한 한 단어도 적재적소에 어떻게 제 쓰임새를 다 하는가에 따라서 명암이
갈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쉬ㅡㅡ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마직 결구의 /쉬/ 어휘적 중의성 다의성이 빛나는 부분인데
이건 재치와 직관 그리고 통찰력의 삼위일체다 이러한 부분을
우리는 또 부단한 노력과 훈련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고민해 본다

또한 항상 수첩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고 기록하고
매사 생활에서 조차 시를 놓지 않는 시인의 시는  치열한 시정신에서 창조된 시인만의 시세계다 싶다  위 시는 바로 치열한 시인정신의 결과에서 발행된 보증수표인 것이다[문정완]



잃어버려지지 않는 찾아지지 않는
                                          김행숙


  폐허에서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어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날개를 떼어버린 새의 발자국처럼 멀어지기 어려워요. 어디로든 조금씩 걷고, 천천히 걷고, 부리를 땅에 박으면 먹을 게 있다는 뜻일까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몸통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꿈속에서만 날아다닙니다. 나는 폐허에서 약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 이 중에 하나는 약초고, 다른 하나는 독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노인을 만났어요. 꿈결은 뒤척거리면서 이런 미치광이 노인들이 시간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를 꾸미죠. 그때마다 약초를 원했는데 독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약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어느덧 나는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폐허에서 잃어버린 기타를 찾고 있습니다. 기타줄 위에서 손모양이 살짝살짝 변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호기심은 새싹같이 움텄고 애벌레같이 꼼지락거렸어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보았을 뿐인데,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눈알을 뽑아 들개에게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쳤어야 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어요.

 

- 시집 <에코의 초상> 

 

   마른번개들

    김행숙


  타협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고
  발작을 시작한다
  숨, 숨을 안 쉬고
  숨, 숨을 쉬고
  나는 나를 넘나드는 잔인한 불길,
  나는 나를 찢고 나와서 또 찢을 테다!
  사랑의 화수분처럼
  내일 아침을 염려하지 않고 쓰고 쓰고 또 써버릴 테다!
  사랑의 쓰레기처럼
  완전히 허비하고 교환하지 않을 테다!
  나는 시시각각 다른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이 싸우는 소리라면
  협상하지 않고 위장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나는 나를 아끼지 않을 테다!
  이윽고 검은 동공이 사라지는 순간에,

- 시집 <에코의 초상>


 

저녁  

엄원태(1955~)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과 다름없는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육체의 세 가지 전략
 
  서안나

 <지난 계절의 좋은 시>
   최호일,「나의 과학」
   우대식,「이순(耳順)」
   이화은,「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재주 있는 사람 치고
바쁘지 않은 이가 있던가?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

有才豈有不忙客(유재기유불망객)
惟喜無才我獨閒(유희무재아독한)

-홍신유(洪愼猷·1724~?),「閒中(한중)」부분
 
 
   이제 곧 봄이다. 매서운 겨울의 혹한과 추위를 열고 나무는 꽃을 피울 것이다. 홍신유의 “모두 재주가 있어 바쁜데 나는 재주가 없어 홀로 한가하다”라는 한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무장한 겨울은 사람을 여유롭게 하여 시 읽기에 좋은 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카프카 역시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독서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어 부수는 도끼 같은 책. 이것이 나의 믿음이야.”라고 쓰지 않았던가.
   시를 읽는 맛이란 시인이 보여주는 낯선 이미지와 상상력과 맞대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만난 세계를 동행 하는 것이며, 시인의 쓴 안경을 빌려 쓰고 시인과 함께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계절의 시 읽기는 최호일, 우대식, 이화은 시인의 시 세계를 여행해본다. 최호일 시인이 몸을 통해 문명을 비판하고 속도의 시대를 저격한다면, 우대식의 시는 신체 일부인 “귀”를 통해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동하는 시선의 역동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으며, 이화은의 시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가부장적 시스템에 비수를 던지는 칼칼함을 만날 수 있다.
 
 
  저 허공은 사물이 없는 곳에 두 번 나타난다 소년과 소녀들은 발레를 하고
  나는 발레를 피한다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가 없다
 
  스포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렌지를 반대하고
  치통을 앓는다
 
  아직도 역사의 선반 위에서 불타는 사과 
 
  저녁이 유리 형제들처럼 투명한 과녁을 모두 빛낼 때
  빗나간 바람은 달그락거린다
 
  누군가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두 발은 항상 위험한 폭탄으로 떠 있다
  곧 날아오를 것이다
 
  불행은 가끔 장밋빛이며 영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할 줄 모른다
 
  열한 마리의 고양이와
  열한 명의 축구선수들
  공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벽의 세계에서는 벽을 들고 가
  벽지에 붙인다
 
  나의 과학은 소리가 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불을 끄고 그 벽에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최호일, 「나의 과학」,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최호일 시인은 시집 『바나나의 웃음』을 상재한 이후 시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최호일의 시는 독자들을 미지의 감각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나의 과학」은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와 현대인의 불안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의 제목이 “나의 과학”이지만 시에서 과학에 관한 설명이나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질적인 사건의 배열과 돌연한 상황을 병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호일 시는 쫄깃한 식감을 지닌다. 신선함과 긴장감을 통해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호일 시는 읽을 때는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막상 시를 분석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시의 행과 행 그리고 연과 연의 비약과 확장과 변주가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정황을 따라가 보면, “허공-발레-오렌지-치통-역사-사과-유리창-바람-러닝머신-불행-고양이와 축구선수-벽과 벽지-과학-슬픔”으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행, 행과 행, 행과 연, 연과 연 사이가 비유기적이며 폭력적인 이미지의 결합 그리고 돌연한 이미지들의 병렬식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 10연으로 이루어진 「나의 과학」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연은 1연과 3연, 6연과 8연이다. 4개의 연에 나타나는 정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1연의 발레와 3연의 스포츠, 8연의 러닝머신에서 시적 화자는 문화센터나 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시적 사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시의 1연이 유독 눈길을 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 그리고 발레로 이어지는 내용은 돌연하고 폭력적이다. 아마도 “나”가 문화센터 유리창을 통해 발레 하는 한 무리의 소년과 소녀를 목격한 것일 수도 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은 발레의 동작 중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뻗어 허공을 만들어내는 동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발레 교실을 지나치는 과정을 “나는 발레를 피한다”라는 감각적인 진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최호일의 시는 하나의 행에도 여백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도 간극이 넓다. 독자들은 시인의 상상력 증폭을 따라가며 그 이질적인 결합에 신선함을 느낀다.
 
    시의 후반에서야 유추할 수 있듯이, “나의 과학”은 “벽지를 들고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를 기여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불을 끄고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이때 “불”을 끈다는 행위 역시 시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다리는 폭탄처럼 터질 듯 위험하고, 고양이와 축구선수 모두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과 축구선수 등의 신체는 벽지 위에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 속에 결박된 육체이다. 과학과 문명으로 건설된 현대사회의 욕망의 구조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은 속도이다. 시적 화자는 속도 속으로 흡입되어 선택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과 현실의 모순된 시스템을 “나의 과학”을 통해 날카롭게 저격하고 있다.
    최호일 시는 카프카의 「어느 투쟁의 기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뛰듯이 달렸다/ 달려가는 취객처럼/ 발로 공중을 구르면서”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우대식, 「이순(耳順)」.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우대식의 시 “이순(耳順)”은 신체의 일부인 “귀”와 “이순(耳順)”이 시의 중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신체어가 지니는 다양한 표현 중 연령을 은유하는 “이순(耳順)”은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림이 없다는 나이”를 이른다. 귀가 순해져 나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겸손해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순에 가까워진 나는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라고 의지를 드러내지만, 이내 “몇 합 겨루지 못하고/낙화의 황홀에 굴복”하고 만다. 이순이 되어 내가 자연이 주는 낙화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굴복한다면, 이제껏 내가 세상을 향한 시선이 부드럽지 않고 대적하는 날카로움에 가까웠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순에 들어서서 그간 세상을 향해 휘둘러온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이 녹이 슬었으며, 이제는 순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이제껏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칼끝을 내 안으로 거두어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어한다. “낙화의 종년(終年)”을 바라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겨누던 칼끝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발적 내전 상황이다. 내 안에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들이 무성하여, 시적 화자는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상흔은 신체 기관 중 귀의 외형과 연관된다. 귀는 눈이나 코와 입과 달리 칼처럼 뾰족하고 외부로 향해 있다. 곧 나의 귀는 타자를 향해 날이 서 있던 내면의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의 구체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는 밖으로 향하던 칼날이 내 안으로 과녁을 새롭게 조준하는 내면의 고투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과녁의 변경은  “이순(耳順)”이 전제조건이며, 이를 통해 경청의 힘이 타자를 내면에 들이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칼끝을 나에게 겨누는 것은 곧 세계와의 대결에서 지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격전장을 나의 내면으로 옮겨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재배치하고, 자폐화 한 내면 공간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면 공간의 확장과 과녁의 변경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타자를 내면으로 들이는 공존의식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라는 진술은 독특하다. 시적 화자는 타자와의 공존의 자각에서 획득한 유순함과 현명함을 자폐적인 공간에 설정하고, 뒤이어 귀를 자르고 싶다고 욕망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와의 통로 차단은 “순백의 어느 한 날을”과 같은 순수함의 원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의지이다. 시의 첫 행인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 된다”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관계회복의 결연함은 곧 원형적 순수함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유심》 2015년 1월호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마른번개들

            김행숙


  타협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고
  발작을 시작한다
  숨, 숨을 안 쉬고
  숨, 숨을 쉬고
  나는 나를 넘나드는 잔인한 불길,
  나는 나를 찢고 나와서 또 찢을 테다!
  사랑의 화수분처럼
  내일 아침을 염려하지 않고 쓰고 쓰고 또 써버릴 테다!
  사랑의 쓰레기처럼
  완전히 허비하고 교환하지 않을 테다!
  나는 시시각각 다른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이 싸우는 소리라면
  협상하지 않고 위장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나는 나를 아끼지 않을 테다!
  이윽고 검은 동공이 사라지는 순간에,

- 시집 <에코의 초상>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김미나

달 거미 한 마리 지붕을 밟고 목련나무로 걸어와요

거미의 집을 허무는 게 아니에요.
물웅덩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솜 트는 기계 멈춰있는 집 앞의 목련나무
꽃송이 안으로부터 달이 솜털을 짜기 시작했나봐요
자동차 바퀴에 찍힌 고양이 울음소리도 되살아나요
솜이불을 짜는 소리 할머니의 귓바퀴에 감겨요

나는 벼락처럼 자라난 목련나무의 꽃과
달의 이빨들이 하나의 틀을 이루는 소리를 생각했어요

먹구름을 집어 삼킨 듯 검게 물드는 것들은
솜틀집 앞 배수구에 걸려있나봐요
그늘 쪽에 얼어있는 지난  봄눈 덩어리들이
아지랑이를 피워 올려요 아직 꽃샘추위는 발끝을
야금야금 베어 물고 있었죠

그러니까 목련들도 밤의 이불을 덮고 싶어
나뭇가지 침대에 꼭 맞는 그믐이 올 때가지

할머니의 꽃상여를 짜듯
깊은 어둠을 지우려고 달의 이불을 짜고 있나봐요

봄눈 녹자 귀신도 볼 수 있다는 물웅덩이엔
달과 목련과 거미가 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고여 있어요 이불 한 채에 그려진 목련나무,
노란 나비들이 먼저 날아와서 날개를 풀고 있었어요


 

겨울 맛 / 강세화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겨울날 - 정호승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엉겅퀴의  노래 

 복효근 


들꽃이거든  엉겅퀴  이리라
꽃핀  내 가슴  들여다  보리라
수없이  아프고  베인  자리  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안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돋힌   엉겅퀴 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러  꺽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  멍울을  보여  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  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  주리라
사랑을  보여  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홀로감상하기

의중


     성영희


철못은 안을 채우면서 박히고
나사못은 틈을 파내면서 들어간다
박히는 소리로 넘치는 못과
파냈으므로 넘칠 것 없이 꽉 조이는 못,
삐걱거리는 못은 딱딱한 성질 때문이 아니라
의중을 묻지 못했기 때문이고
소리 없이 그 틈을 채우는 못은
물렁해서가 아니라
의향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힘껏 찔러 넣어
자국도 없이 박혔다면
그 속에서는 뿌리가 다시 파랗고
우거진 틈을 내 펼치고 있는 것이겠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도
물보라를 덜어 낸 다음에
그 깊이로 가라앉는다

벽에 걸린 외투의 의중이
나른한 창밖을 내다보는 봄날 오후
위층에서 간헐적으로 못 박는 소리가 난다
삐걱거리는 속내도 아랑곳없이
시계 초침은 쉬지 않고 톡톡
휴일 오후를 박고 있다

무엇이든 잘 들어가지 않을 때는
그 의중을 물어 살살
돌려 줄 것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첫눈 오는 날/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첫눈 오는 날/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람이 좋은 저녁/곽재구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하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낄낄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ㅤ그리움에게/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만났고
길고 근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의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

구두 한 켤레의 시/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육체의 세 가지 전략
 
  서안나

 <지난 계절의 좋은 시>
   최호일,「나의 과학」
   우대식,「이순(耳順)」
   이화은,「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재주 있는 사람 치고
바쁘지 않은 이가 있던가?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

有才豈有不忙客(유재기유불망객)
惟喜無才我獨閒(유희무재아독한)

-홍신유(洪愼猷·1724~?),「閒中(한중)」부분
 
 
   이제 곧 봄이다. 매서운 겨울의 혹한과 추위를 열고 나무는 꽃을 피울 것이다. 홍신유의 “모두 재주가 있어 바쁜데 나는 재주가 없어 홀로 한가하다”라는 한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무장한 겨울은 사람을 여유롭게 하여 시 읽기에 좋은 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카프카 역시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독서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어 부수는 도끼 같은 책. 이것이 나의 믿음이야.”라고 쓰지 않았던가.
   시를 읽는 맛이란 시인이 보여주는 낯선 이미지와 상상력과 맞대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만난 세계를 동행 하는 것이며, 시인의 쓴 안경을 빌려 쓰고 시인과 함께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계절의 시 읽기는 최호일, 우대식, 이화은 시인의 시 세계를 여행해본다. 최호일 시인이 몸을 통해 문명을 비판하고 속도의 시대를 저격한다면, 우대식의 시는 신체 일부인 “귀”를 통해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동하는 시선의 역동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으며, 이화은의 시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가부장적 시스템에 비수를 던지는 칼칼함을 만날 수 있다.
 
 
  저 허공은 사물이 없는 곳에 두 번 나타난다 소년과 소녀들은 발레를 하고
  나는 발레를 피한다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가 없다
 
  스포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렌지를 반대하고
  치통을 앓는다
 
  아직도 역사의 선반 위에서 불타는 사과 
 
  저녁이 유리 형제들처럼 투명한 과녁을 모두 빛낼 때
  빗나간 바람은 달그락거린다
 
  누군가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두 발은 항상 위험한 폭탄으로 떠 있다
  곧 날아오를 것이다
 
  불행은 가끔 장밋빛이며 영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할 줄 모른다
 
  열한 마리의 고양이와
  열한 명의 축구선수들
  공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벽의 세계에서는 벽을 들고 가
  벽지에 붙인다
 
  나의 과학은 소리가 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불을 끄고 그 벽에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최호일, 「나의 과학」,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최호일 시인은 시집 『바나나의 웃음』을 상재한 이후 시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최호일의 시는 독자들을 미지의 감각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나의 과학」은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와 현대인의 불안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의 제목이 “나의 과학”이지만 시에서 과학에 관한 설명이나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질적인 사건의 배열과 돌연한 상황을 병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호일 시는 쫄깃한 식감을 지닌다. 신선함과 긴장감을 통해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호일 시는 읽을 때는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막상 시를 분석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시의 행과 행 그리고 연과 연의 비약과 확장과 변주가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정황을 따라가 보면, “허공-발레-오렌지-치통-역사-사과-유리창-바람-러닝머신-불행-고양이와 축구선수-벽과 벽지-과학-슬픔”으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행, 행과 행, 행과 연, 연과 연 사이가 비유기적이며 폭력적인 이미지의 결합 그리고 돌연한 이미지들의 병렬식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 10연으로 이루어진 「나의 과학」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연은 1연과 3연, 6연과 8연이다. 4개의 연에 나타나는 정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1연의 발레와 3연의 스포츠, 8연의 러닝머신에서 시적 화자는 문화센터나 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시적 사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시의 1연이 유독 눈길을 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 그리고 발레로 이어지는 내용은 돌연하고 폭력적이다. 아마도 “나”가 문화센터 유리창을 통해 발레 하는 한 무리의 소년과 소녀를 목격한 것일 수도 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은 발레의 동작 중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뻗어 허공을 만들어내는 동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발레 교실을 지나치는 과정을 “나는 발레를 피한다”라는 감각적인 진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최호일의 시는 하나의 행에도 여백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도 간극이 넓다. 독자들은 시인의 상상력 증폭을 따라가며 그 이질적인 결합에 신선함을 느낀다.
 
    시의 후반에서야 유추할 수 있듯이, “나의 과학”은 “벽지를 들고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를 기여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불을 끄고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이때 “불”을 끈다는 행위 역시 시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다리는 폭탄처럼 터질 듯 위험하고, 고양이와 축구선수 모두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과 축구선수 등의 신체는 벽지 위에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 속에 결박된 육체이다. 과학과 문명으로 건설된 현대사회의 욕망의 구조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은 속도이다. 시적 화자는 속도 속으로 흡입되어 선택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과 현실의 모순된 시스템을 “나의 과학”을 통해 날카롭게 저격하고 있다.
    최호일 시는 카프카의 「어느 투쟁의 기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뛰듯이 달렸다/ 달려가는 취객처럼/ 발로 공중을 구르면서”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우대식, 「이순(耳順)」.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우대식의 시 “이순(耳順)”은 신체의 일부인 “귀”와 “이순(耳順)”이 시의 중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신체어가 지니는 다양한 표현 중 연령을 은유하는 “이순(耳順)”은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림이 없다는 나이”를 이른다. 귀가 순해져 나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겸손해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순에 가까워진 나는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라고 의지를 드러내지만, 이내 “몇 합 겨루지 못하고/낙화의 황홀에 굴복”하고 만다. 이순이 되어 내가 자연이 주는 낙화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굴복한다면, 이제껏 내가 세상을 향한 시선이 부드럽지 않고 대적하는 날카로움에 가까웠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순에 들어서서 그간 세상을 향해 휘둘러온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이 녹이 슬었으며, 이제는 순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이제껏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칼끝을 내 안으로 거두어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어한다. “낙화의 종년(終年)”을 바라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겨누던 칼끝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발적 내전 상황이다. 내 안에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들이 무성하여, 시적 화자는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상흔은 신체 기관 중 귀의 외형과 연관된다. 귀는 눈이나 코와 입과 달리 칼처럼 뾰족하고 외부로 향해 있다. 곧 나의 귀는 타자를 향해 날이 서 있던 내면의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의 구체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는 밖으로 향하던 칼날이 내 안으로 과녁을 새롭게 조준하는 내면의 고투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과녁의 변경은  “이순(耳順)”이 전제조건이며, 이를 통해 경청의 힘이 타자를 내면에 들이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칼끝을 나에게 겨누는 것은 곧 세계와의 대결에서 지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격전장을 나의 내면으로 옮겨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재배치하고, 자폐화 한 내면 공간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면 공간의 확장과 과녁의 변경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타자를 내면으로 들이는 공존의식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라는 진술은 독특하다. 시적 화자는 타자와의 공존의 자각에서 획득한 유순함과 현명함을 자폐적인 공간에 설정하고, 뒤이어 귀를 자르고 싶다고 욕망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와의 통로 차단은 “순백의 어느 한 날을”과 같은 순수함의 원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의지이다. 시의 첫 행인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 된다”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관계회복의 결연함은 곧 원형적 순수함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유심》 2015년 1월호


 

 눈의 방황
                                                    조홍래
 

눈이 여름에 내리면
지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야단법석에
미리 겁 먹고 움츠렸다 겨울에 내린다
혹시라도 겨울이 아니면 어쩌나
조심조심 내린다
제 때에 내리는 건지 알기 위해
바람을 데리고 밤새 슬며시 온다
서로 부둥켜 안고 쌓일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눈의 위치

     김행숙


  공업용 다이아몬드 같은...... 네 눈알을 굴리면 니 눈꺼풀이 먼저 까지겠고, 쓰라리겠다.
  언제나 제자리에서만 구르는 건 공이 아니지. 하늘의 별이 아니지.
  저쪽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공중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땅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심심하면 공을 가지고 노는 거야. 그것은 우리 지구인들의 유희.
  최선을 다해 눈알을 던져봐. 최고 속도는 불이 되고 재가 되는 속도일까. 야구공은 야구공인 채로 던져지네. 축구공은 축구공인 채로 골대를 비껴가네. 휙, 지나가버려서, "아름다운 곡선이다" 감탄할 새도 없었네.
  어떤 룰 속에서 우리는 승리하고, 패배하고, 어떤 빗속에서 오늘의 경기를 쉬게 되는 걸까. 거친 숨을 고르며
  너를 보지만, 햇빛 때문에 우리는 우주를 볼 수 없다. 깜깜한 밤에 햇빛이 감추는 우주적인 구체(球體)들의 퍼레이드를 올려다보자. 렌즈를 바꿔도 상자 모양의 별은 없다.
  그러니까 우주에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를 별처럼 설치하면, 호기심 많은 외계인이 찾아올 겁니다. 똑똑한 외계인은 말하겠죠. 우주를 견딜 수 있는 직선이라니!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천문학자가 중얼거렸지. "기발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우리가 정말 외계인을 만나도 괜찮을까요?"
  우리끼리 사는 것도 죽도록 힘든데...... 혼자 잠을 자고 혼자서 꿈을 꾸는 것도 이렇게 괴로운데...... 너를 볼 용기가 안 생겨서 혼자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도 이렇게 쓰라리고 아픈데......
  내 눈빛을 이해하시겠어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먼 곳에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 시집 <에코의 초상>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에코의 초상>

 

눈의 방황
                                                    조홍래
 

눈이 여름에 내리면
지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야단법석에
미리 겁 먹고 움츠렸다 겨울에 내린다
혹시라도 겨울이 아니면 어쩌나
조심조심 내린다
제 때에 내리는 건지 알기 위해
바람을 데리고 밤새 슬며시 온다
서로 부둥켜 안고 쌓일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깜빡했다
                                                      조홍래

비누거품이 날리고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온세상이 은빛으로 화안했다
달까지도 반짝이는 소금꽃밭 길을
조신하게 걸었고
하얗게 꽃을 피운 나무들이 거들먹거렸다
역시 하늘님은 위대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마술사다

거기까지였다
가뭄에 원망 좀 했다고
예라이
목욕물을 퍼부었다

하늘님의 각질을
햇살과 땅이 나눠먹기 시작할 때쯤
온 천지가 땟국물로 질척거렸다
그렇다
하늘님이 목욕하는 날
땟가루 뒤집어쓰는 줄도 모르고
좋아한 나약한 인간이란 걸 깜빡했다
뒤끝있는 심술쟁이란 걸 깜빡했다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시집 <적막> (창비,2005)

 

떠도는 무렵 / 박남준


저 길 끝에 있을까 설레이며 헤매었지
마음속의 길을 버린 지 나 오랜 일이었으나
달려갔었지 별이 내리는 먼 산너머
길에 나서면 길은 언제나 나를 먼저 가로질러 갔고
나 내가 걸어온 길에 갇혀 길 밖에 버려지고는 했다
삶이 내게 드리운 그늘로 무너져가던 무렵이었다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

 

첫눈 소식 / 박남준 
  

설악의 대청봉에 내렸다는 첫눈 소식 
지난 여름 왼손 두 손가락에 물들였던 
붉은 봉숭아 꽃물 아직 남아 있는지 
살몃 내려가는 눈길 
여태 기다려야 할 사랑 떠도는 것일까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붉은 꽃물자위 보며 
허허로운 웃음이 
바람처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구두 한 켤레의 시/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낯선 여자 
  
 이향아 
  
    
 거울 속에는 언제부턴가 
 낯선 여자가 있다. 
 나보다 한 발짝 빠르게 떠났다가도 
 나보다 한 발짝 앞질러 돌아오는 
 날이 갈수록 낯선 여자가 있다. 

 손님처럼 멀거니 바라보다 지치면 
 수십 겹 물살 아래 잠적해 버리는 
 그렇다 
 내 모든 시름과 눈물 
 내 모든 번잡과 분망은 
 바로 이 낯섦이다 
 공연한 망설임으로 얼굴을 붉히고 
 손장단 어깨춤에도 신명을 멈춘 것은 
 그림자처럼 날 추적하는 
 거울 속 바로 저 여자의 
 낯선 얼굴 때문이다 
  
 이별하는 일이야 너무나 쉽지 
 검은 휘장 내리고 돌아앉아서 
 나 몰라, 나 몰라 
 쫓아내는 일 
 그거야 쉽지 어렵지 않지 
 낯선 여자를 
 오래오래 낯설게 
 내 눈 속에 품을 듯 
 녹여버릴 듯 
 낯설게 낯설게 뚫어야겠다

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잃어버려지지 않는 찾아지지 않는
                                          김행숙


  폐허에서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어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날개를 떼어버린 새의 발자국처럼 멀어지기 어려워요. 어디로든 조금씩 걷고, 천천히 걷고, 부리를 땅에 박으면 먹을 게 있다는 뜻일까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몸통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꿈속에서만 날아다닙니다. 나는 폐허에서 약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 이 중에 하나는 약초고, 다른 하나는 독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노인을 만났어요. 꿈결은 뒤척거리면서 이런 미치광이 노인들이 시간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를 꾸미죠. 그때마다 약초를 원했는데 독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약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어느덧 나는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폐허에서 잃어버린 기타를 찾고 있습니다. 기타줄 위에서 손모양이 살짝살짝 변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호기심은 새싹같이 움텄고 애벌레같이 꼼지락거렸어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보았을 뿐인데,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눈알을 뽑아 들개에게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쳤어야 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어요.

 

- 시집 <에코의 초상>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집『종이등 켜진 문간』(문학세계사,1997)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박남준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밖에 뒹굴던 것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시집 <적막> (창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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