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찰과 글감
인간의 인식에는 필경 관찰이 선행하게 된다. 여기서 관찰이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기 위해 본것, 관찰하기 위해 관찰하는것은 무가치하다. 관찰의 출발점은 어떤 발견을 시도하고 그것이 무엇인가? 어째서 저렇지 않고 이렇게만 되어있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며 어떻게 수용하고 리용할것인가? 등 목적의도적인 탐구성이 선행되여야 가치로운 관찰이 되는것이다.
사회상황에 대해 많이 보고 많이 사색하여 감성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에 이르게 해야 한다는것은 글짓기에 임하는 첫자세이며 심리준비 이다. 관찰은 곧 다양한 정보의 입수로서 취사선택의 전제인 것이다.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일체 생활 현상, 객관 사물, 사회 현실은 모두 인식 대상이고 글의 객체가 된다. 즉 글짓기 행위에서 객관적인 인식 대상은 모든 글의 원천이다. 객관적 사물, 사회 현상, 사상 감정, 인생의 도리 등도 심미적 인식 즉 새로운 인식을 말한다.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왜 어떤 사람은 구체적으로 묘사해 낼수 있는 데 어떤 사람은 아주 익숙한 사물이지만 무엇인가 보아내지 못하 기에 할말이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저 본데 그치고 전자는 관찰할 때 비단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눈으로 본 것이 마음에 이르게 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정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즉 생활을 열애해야 하고 신선감을 보장해야 한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고 미워하면 미워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관찰의 세밀 여부는 이런 애증의 정도에서 결정된다. 만약 사회에 국외인처럼 방관자의 입장에서 냉담한 태도로 생활을 대한다면 아무 것도 보아내지 못하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
둘째, 마음을 기울여 관찰해야 한다. 이는 우선 강령한 특징의식을 구비한 표현으로서 사물의 특질을 파악하는 의식에서 관찰능력이 신장 될 수 있다. 시내암은 무송이 맨 손으로 범을 때려잡는 정절을 쓰기 위해 높은 산 깊은 골짜기를 넘어 사냥군들을 채방하였으며 심지어 큰 나무뒤에 숨어 범의 외모, 색태, 동작등을 자세히 살펴 보았에 무성이 범을 때려잡는 세절을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관찰을 선행시키면서 사유를 바싹 따라 붙여야 한다. 관찰자 는 사물, 현상을 관찰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오감을 주입시켜야 하며 감성 묘사로 하여금 리성의 빛을 접수하도록 해야 바람직하다. 예하여 주자청의 정채로운 서정산문 “봄”의 결말에는 작자의 리념이 짙게 깔 려 있다. 이렇게 정을 앞세우고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고 한편 관찰하 고 한편 사색하여야 눈으로 본 것이 마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른다.
우리는 언제나 객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주관이라는 나의 관념을 가지고 객관을 이해한다. 그러한 주관이 포함된 객관의 인식을 참된 인식으로 승화시키려면 냉철한 판단이 앞서야 한다.
우리의 참된 인식은 주관의 변별적 사고를 벗어나 객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외계의 자극과 반응 에서 비롯된 정서, 지각이 글의 재료가 되는 것도 당연지사 이다.《문심조룡》에 “산에 오르면 정은 만산에 넘치고 바다를 바라 보면 정은 창파에 넘친다” 고 한것은 경물에서 정감이 생긴다는 도리 를 형상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예문: 강낭콩 관찰 일지
2002년 7월 25일
*씨앗을 심었습니다.
<씨앗의 모양> 씨앗의 모양은 전체가 붉은색이고 긴 타원형이다. 한 쪽에 콩의 눈이 붙어있다. 그 곳에서 싹이 돋아 나온다. 씨를 화원에서 샀는데 왠지 오래된 것 같다. 싹이 나올까 좀 걱정이다. 오래된 씨는 싹이 안 나온다고 들었는데.. 처음에는 집에있는 앵두씨 를 심고 싶었는데 그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아서 할수없이 강낭콩 씨앗을 샀다. 예전에 강낭콩을 학교에서 키워본적이 있어서 키우는데 그리 큰 걱정은 들지 않는다.
2002년 7월 30일
<싹의 모습>
*싹이 나왔습니다.
흙을 뚫고 연두빛의 싹이 돋아났다. 시간이 지나도 싹이 안 나오 길래 새로 심으려고 했는데. 식물을 직접 씨를 심어 키워본 건 처음이라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든다. 사진기가 있으면 찍어두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고장난 사진기 밖에 없다. 나중에 꼭 찍어야지. 처음에는 콩깍지를 덮어쓴 채 올라왔는데 조금 자라자 손으로 떼어주었다. 지금은 고운 빛의 떡잎만 보인다. 물이 마르지 않도록 물관리를 잘해 주어야 한다. 앞으로 물을 꼬박 꼬박 주어 잘 자라게 해야겠다.
2002년 8월 4일
<고개든 떡잎>
*떡잎이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물주는걸 잊었다가 오늘에서야 물을 줬다. 물을 못 먹어선지 시들시들하다. 까딱하면 말려죽일 뻔 했다. 조심하기로 몇번을 다짐했지만 작심삼일이라고 잊어먹기가 예사다. 관찰일지를 들고 강낭 콩의 모습을 조사했다. 한참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구부러져 있던 떡잎이 고개를 들고 옆으로 벌어졌다. 그 위로 앞으로 크게 자랄 본잎이 있다. 아직 노란색에 가까운 연두색 빛을 벗지 못하고 있는 강낭콩. 문득 조사를 하다가 떡잎의 모양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떡잎은 본잎이 커지게 되면 떨어지겠지. 며칠뒤에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
2002년 8월 9일
<떡잎과 본잎>
*떡잎이 시커멓게 되고 있습니다.
큰일이다. 비가 어찌나 오는지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모두 비 이야기 뿐이다. 하늘은 하루종일 시커먼 얼굴을 하고있다. 나야 비가오든 해가 뜨든 괜찮지만, 내 강낭콩은 며칠째 햇빛을 못 봐서 잎이 점점 파리해 지고 있다. 그래도 물은 줘야지. 분무기를 들고 물을 주러 나섰다. 베란다에 내논 강낭콩. 살펴보니 떡잎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떡잎은 콩 안에서부터 나온 잎이다. 이 잎은 새싹이 자라는 영양분을 공급하고 나면 그 역할이 끝나므로 떨어지게 된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점점 시커멓게 되가는 떡잎이다.
2002년 8월 10일
<새로운 잎이 나고>
* 떡잎위로 아주, 아주 쪼그만 잎들이 보입니다.
줄기의 가운데에서 새로운 잎이 돋아나고 있다. 비록 아주 아주, 쪼끄맣지만 잎이 나고 있는게 보인다. 하루만에 이런 성장을 보이다니. 빨리 크고 싶은가 보다. 그나저나 계속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해는 언제 나올까. 이 녀석이 빨리 자라려면은 해가 빨리 나와야 할텐데.
2002년 8월 11일
<특별한 변화가 없는 강낭콩>
*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 강낭콩은 별로 변화가 없다. 그래서 강낭콩에 대해 한번 자세히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2002년 8월 12일
<커져가는 본잎, 말라가는 떡잎>
* 본잎은 점점 커지고 떡잎은 조금씩 말라갑니다.
떡잎 바로 위에 있는 본잎이 점점 커져서 이제 완연한 잎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물 맥의 잎맥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잎의 색깔은 연두색에서 녹색을 띄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자라고 있는 잎도 조금씩 커져간다.
예전에는 잎이 세 개인지 몰랐는 데 이제 보니 세 잎이 위에서 자라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조그맣다. 떡잎은 이제 시커멓게 변해 말라 비틀어져 있다. 잎이 점점 자라면서 떡잎은 조금씩 작아 지기 시작해 이젠 떨어지기 직전이다. 날씨는 아직도 흐리지만 조금씩 햇빛 이 난다. (이하 략)
작자는 강남콩의 성장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여 서술하고였는 데 그저 관찰하기 위한 관찰이 아니라 강남콩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 려는 각도에 관찰히고 일지를 썼다. 이리하여 그 자신만의 인색 활동이 아니라 많은 살맘들에게 유익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실용문에서는 인식 대상의 객관화가 전제로 나선다. 글의 대상을 글쓰기의 객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필자 즉 글 쓰기의 주체와 서로 대응된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안경의 색채에 따라 다른 색조로 각인 됙 마련이다. 예문에서 주객체의 관계를 잘 처리하고 있다. 2. 글쓰기 대상으로서의 객관 사물
글의 대상은 네개 방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감각, 감각의 인간성은 모두 그 대상적 존재, 인간화된 자연계가 있었기에 산생될 수 있었다” 글쓰기의 대상은 첫째로 물질, 둘째로 사실, 셋째로 감정, 네째로 이치이다. 수많은 사회현상은 우리에게 실용문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천태만상의 자연의 조화는 우리게 무궁한 소재, 영감의 계기 와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정서란 외계 사물의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수려한 강산, 아름다운 꽃, 사나운 비 바람과 눈보라, 삼라만상, 그리고 세월의 변천은 수많은 작가들의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신비한 영감을 부여하는 “여신(女神)”이었다. 이 여신이 문학예술의 꽃을 피워준다.
예문: 푸른 논벌이 보고싶다.
하느님은 향촌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도시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이 죽은 후 사람들은 자기들의 장원을 내버렸다. 인간의 역사는 도시 발전사라 하여도 어페는 아닐 것이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구조가 바로 도시이다. 인간이 사는 공간에 대한 합리성과 리익추구의 결과물이 바로 도시인이었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합리성은 근저로부터 화평공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날히 무지경으로 확건되는 도시에 무엇이 있는가? 자연을 개발하여 인간생활에 적합한 공간을 만든 도시는 인간 이외의 생물들에게 있어서는 서식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고 생태계는 변형되어 도시에 특유한 도시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도시란 오로지 고층건물이 생장하는 곳이다. 그 많은 고층건물들은 죽어간 분지와 산등성이위에 일떠섰다. 도시는 다만 대자연의 묘지로 되였을 뿐이다.
무절제한 도시확대의 열풍 속에서 도시의 자연적,물리적 환경은 매우 열악해지고 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외 조류와 동식물이 공존하는 생태환경은 너무 사치한 생각이지만 녹지는 마구 점령하지 말아야 했다. 도시화과정에서 원래의 녹지를 과도하게 침점해버린 근대도시들은 록지가 갖는 다양한 환경보존 기능이 마멸되여 생물다양성의 감소와 물리적 환경기능의 불완정성 등 다양한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발달국가에서는 언녕 확대가 아니라 순환과 자연과의 공생을 주축으로 한 환경공생형의 도시개발을 세기적 과제로 내세웠다. 과도한 인공화에 의한 소실된 농경지와 자연메커니즘을 재생하는 것이 가급적으로 필요하다고 자각하였던 것이다. 하여 인간소외의 인간중심이 되어버린 도시를 기능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여 생태도시란 새 명제가 제기되었다.
기존의 도시는 자연과 인위적으로 멀어지게 한 계획된 공간이라면 생태도시란 자연과 인위적으로 가까워지게 계획된 공간이다. 번창한 도시미관과 인간의 생활만이 고려되고 건축상들의 돈벌이만 선행된 도시를, 인간이 내몰았던 자연을 다시 우리의 터전으로 복원시키는 생태도시로 재건설하려고 노력하지만 사후청심환이다.
물론 기존 도시들에서 머리가 좋은 인간들의 기발한 창신정신으로 하여 고층건물들 틈사리에나마 화초와 나무를 심을 수 있어 관상용화분처럼 흔상한다.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전지된 식물들은 어떻게 했든 자연의 존재물이 아니라 집에서 기른 가축과 다를배 없다. 우리들의 눈길은 소음과 혼탁한 공기와 쓰레기, 철근과 세멘트로 얽힌 도시를 벗어나 희망을 향촌에 쏠리고 그 곳에서 자연에로의 회귀를 느낄수 있을뿐이다.
인류는 자연과 멀어질수록 자연에로의 회귀를 갈망하며 날이 갈수록
더 강렬해 진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가설할 수는 없으나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갈수록 자연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연과 멀어진다. 인류는 천방백계로 자기를 개조하고 있다. 처음엔 손의 로동을 간단화하고 다음 자기의 발을 간단화하며 나중에 마음마저 바꾸어버린다.
과거에는 산을 동강내고 호수를 메꾸고 물길을 돌리여 경작지를 얻어내는 등 자연에 대한 인위적인 재배치를 자연을 정복하는 거창한 혁명이라고 야단법석했다. 시대가 바뀌고 개념도 바뀌여 지금은 개발이라고한다. 이를테면 관광지개발. 도시 경제 개발,무어나 개발이 붙는다. 여기 저기에 파괴해 놓고 개발의 손길이 뻗치게 되었다고 자호할것인가? 자연상태를 파괴하는것이 개발일수는 없다.
며칠전 자전거를 타고 논밭을 찾아 헤맨적이 있다. 그 어데서도 논밭을 볼수가 없었다. 오지랖넓게 싱거운 걱정을 굴리였다. 연길시내의 곡창이던 신풍벌에 고층건물을 들여앉힌것은 현대개발인가? 계동벌까지 콩크리트숲을 이룬것이 장거인가?
늘어나는 도시인구에 대비해서 건축은 해야 한다. 그러나 꼭 옥토를 고층건물로 뒤덮어버려야 하는가? 동서남북 뉘연한 산등성이들에 집을 지으면 산간도시의 경관을 이루어 또 다르게 멋질수도 있지 않는가? 허망한 궁리를 낡은 자전거 바퀴처럼 굴려보았다.
일본 같은데서는 도시 건축을 하면서도 개인의 묘지마저 보류해두고 시내 변두리에 논벌도 함부로 침탈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자연환경을 개발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보존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원래의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면 자다가 봉창을 두드린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손길이 닿은 모습이 장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는 생각이 현대적시각이고 관념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감히 아니라고 하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아름다운 의지대로 흐르는 강은 자연 그대로 흐르게 놓아둘 때 생태 환경을 보장하는 장거이다. 자연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에서 가장 건강할 수 있다. 농지고 뭐고 집을 즐비하게 지어놓아야 도시가 번창해지고 미관에도 아름답다는 구상은 실제적이 못된다. 도시확대화의 리페를 생각해야 한다.
자연 환경에 대해 인간이 갖는 관계에서 기술의 자율성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인간과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자원랑비와 환경파괴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자연환경으로부터 소외시켰다. 사회환경과 인간관계에서 기술의 자율성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인간성 상실의 문제에 귀결된다.
환경호르몬으로 대표되는《자연의 역습》은 토목형 도시 문명이 위기에 직면했음을 알려 준다.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한 승리의 축하연을 열때《자연》은 미래에 향해 공소장을 부쳐보낼 것이다. 연길시시교에 펼쳐졌던 록판만경, 금파만경은 기억속에서마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아, 참으로 내 고장의 푸른 논벌이 보고싶다!!! 3. 글쓰기 대상으로서의 사회 생활
풍부하고 다채로운 사회 생활은 모든 형태의 글의 원천이다. 생활이 라는 도가니 속에는 인간 심령의 진실성과 아름다움, 인성의 비리, 신구 의식의 충돌, 경쟁, 승패가 들끓고 있다. 작가는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비판적인 안목과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 심불재언이면 시이 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 이란 말은 "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문: 컴퓨터의 이폐
컴퓨터게임으로 인한 청소년의 인격형성에는 많은 문제 점을 내포 하고 있다. 게임 자체가 대부분 때려 부수고 짓밟고 무차별 사격으로 전멸시키는 폭력물이며, 파괴하는 놀이와 음란물에서 쾌감을 느끼므로 청소년의 정서에는 절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즈음 아이들은 모두 귀하게 자라서 어려움도 모르며 마땅한 놀 곳도 없고 친구는 내 맘 대로 안되니 자연히 컴퓨터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안식처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운동과 사회성은 부족하고 어릴 때부터 파괴하고 싸우는 흑백 논리를 먼저 보아왔으니 나중에 커서도 한탕주의, 사기, 이성 관계, 싹쓸이, 등에 마음이 빠져 들테니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물론 컴퓨터는 꼭 해야 하지만 유일한 친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사회적인 문제는 이기주의와 사회성 부족 때문이니 친구들과 어울려서 단체 생활을 통한 협동심과 봉사 정신을 길러야 한다. ……
적당한 컴퓨터 활용으로 아이들의 특기를 살리는건 좋지만 중독은 위험하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컴퓨터 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 인터넷 사용 시간 정하기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건강한 규칙을 정해주어야 한다…
작자는 늘 무심히 스치는 사회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포착 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해부하고 자기 가치 기준을 주장한다. 작가는 하나의 조약돌에서 새로운 인생인 철학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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