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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 대한 잡감
2013년 02월 06일 09시 55분  조회:7796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수필에 대한 잡감
 
                                                          최 균 선
 
    현대시점에서 수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글자 그대로《붓가는대로 쓰는 글》《무형식의 글》이라고도 하고 비전문 적인 글, 자기 성찰의 글, 자기 고백의 글, 중년세대의 글…등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모두 지난세기 30년대의 기원된 정의들이라는 평판이 힘을 얻고있다.
    한국에서는 에세이라고도 하고《논픽션》이라는 외래어로 명명하기도 한다. 또《여가의 문학》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여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실정에서는 엉성한 제기법이다. 수필은 절대 붓가는대로 쓰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홍매로부 터 기원된 수필ㅡ붓가는대로 쓴다를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나는대로 쓰는것으로 해석해도 어페이다.
    중년녀인의 글이라는 수필가도 있지만 수필창작자들의 년령구조, 성별이 그것을 부정하고있다. 한국의 명수필가 피천득선생은 수필을《청자연적》에 비유하였는데 효용성에서 최고경지에 피워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이라고 한다.그러나 모든 수필이 청자연적일수 없다. 마음을 간지르는 수필이라면 그럴듯도 싶지만 개연성은 청자연에 만 머물라는 법이 없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수림속에 온갖새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수필도 각양각색 일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체험속에 감수를 쓰는 글인만큼 영원히 개성적일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란다. 수필만이 삶의 문학인가? 모든 문학이 삶의 메아리이다. 수필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고 그냥 락서일수도 있다는데 자신과의 대화임은 사실일세 뇌까림이 아니라 방백이다. 수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과 의미부여에서 그치면 일기차원이다. 자기 인생을 의미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독자와의 담화가 아닌가? 강렬한 정서성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글을 쓸것이다.
    문학일반이 인생마당의 조명이라면 수필도 인생현장을 조명하고 탐구과제를 내주는 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로 보편적인 공감성을 내세운다. 물론 수필의 흡인력과 공감은 진실성에서 기원된다. 이 시점에서 비록 길지는 않은 글이지만 절대 여유로움을 가지고 쉽게, 가볍게 씌여질수 없다는 잠규칙이 세워진다. 수필창작을 하기전 인간수련을 하라는것도 수필은 그 사람의 인생비밀이 되기때문이다.
    수필은 자기 생명의 향기를 피워올리거나 생명을 연소시키는것으로서 자기 자신 만큼의 글을 쓴다. 자기를 닮지 않은것을 낳는 동물이 없듯이 자기 고백의 글. 자기 성찰의 글이라는 수필에서는 자신을 그려내지 않을수 없다. 수필작자는 독자와 인격 적으로 만나서 생각하는바를 고백하는것이지 체험담을 늘여놓는것이 아니다.
   수필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서정화하는 동시에 객관화해야 한다. 작가의 개인적 정서나 체험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확보해야 하기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하기보다 공유화해야 한다. 시가 주관정감으로 감동을 주는 문학이라면 수필은 개체 적정감을 객관화하여 감동을 시도하게 된다. 자기의 체험을 소개하기보다 분석하고 제시해야 한다. 수필은 이야기자체가 아니기에 분석적이고 해설적이야 한다.
    수필글은 진실함에서 살아나고 분식에서 죽는다. 그만큼 수필글에 기발한 착상이란 있을수 없다. 수필을 무형식의 글이라지만 구성이 홀시되는것이 아니다. 정감의 론리성은 수필구조의 기본요구이다. 수필은 재치있는 글솜씨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쌀로 밥짓는 솜씨가 아니라 향기로운 술을 빚어내는 작업에 해당한 글재간이다. 새로운 감각, 짙은 흥미성, 정서적 감염. 평화로운 기분, 유익한 지식성, 느끼하지 않은 교훈성. 삶에 대한 재인식, 생활에 대한 애착감, 교묘하게 심어주는 지혜의 불씨…등 가치발견과 의미부여로부터 받아안은 인생공부가 되는데서 산생된다.
    한편의 수필에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생활정경이 그려지면 호기심이 당긴다. 풍부한 상상력은 흡인하고 작자의 독특한 안목과 발견, 해석은 경탄을 불러 오고 유모아와 해학이 넘치는 수필에는 즐거움이 묻어나오며 선구적인 통찰력과 예리 한 비판성은 통쾌감을 선물한다.자기과시나 설교, 훈계가 아니라 그저 설복당하는 멋이 좋다. 이렇듯 수필의 효용성은 개인체험이지만 권유하지도 않고서도 공유화되고 사회적인식의 재확장이 되는데서 잘 체현된다.
    일상의 체험이지만 나는 왜 못느꼈을가 개탄하게 되는 때에 감각의 새로움, 지적인 흥미, 정서적공감, 진선미를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좋은 수필이라고 값을 매기게 되는것이다. 하다면 좋은 수필의 구체적조건은 무엇인가? 수필은 체험의 과정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는데 흥미없다. 체험한 사실과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만의 느낌과 해석의 부여가 중요하다.
    기록문은 기록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치있지만 수필은 문학인만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예술가치가 창출되여야 한다. 수필은 체험에서 인기된 인생의 의미를 비쳐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노리는 형상화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거울속에서 예술적향수를 느끼면서 자성하게 된다. 수필은 인생미학을 창출하는 문학이므로 수기와도 다르다. 비록 개체생명이지만 그런만큼 독자에게 중요한것은 작자의 생활경력이나 체험의 전말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발산되는 인격력량이다.
    누구나 겪을수 있는 체험의 서술은 진부하다. 어떤 모양으로 빚든 그리고 비틀고 늘구든, 굽든 찌든 밀가루의 기본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밀가루음식을 먹는것은 감각문제이지 무슨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체험이라도 그속에서 참신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해야만 좋은 수필로 될수 있다. 같은 모래를 일면서도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수필도 그렇게 써야 한다.
    체험한 그대로 느낀 그대로 토로하는 수필이여야지 무병신음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비롯한 다른 쟝르는 예술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수필은 인생경지에 이르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것과 문학창작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것이다. 독일의 현대파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있다.《보이는것은 보이지 않는것에 접촉되여 있다. /들리는것은 들리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생각되는것은 생각되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고.
    본다는것은 단순한 목적일수 있지만 생각하는것은 무목적일수 없다. 본다는것은 촉동, 관찰, 발견, 사색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기이다. 작자는 체험의 내용 과 느낌을 전달하지만 독자들은 내용보다 느낌, 의미의 부여에 흥미롭다. 작자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여서 드러내고 싶겠지만 자기를 너무 의식하는 자기도취이기 십상이다.
   수필은 자기를 의식하고 쓰기보다 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한다. 독자는  작자의 신변잡사에는 별로 흥미없다. 그리하여 수필에서 가장 재치있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독자에게 고백해야 할것과 혼자 간직해야 할것을 분별하는것이다. 그냥 체험이 소중하게 느껴져 기록이나 수기단계에서 끝나면 독자는 별 볼일이 없게 된다.
    무엇을 고백해야 독자들이 솔깃할것인가? 바로 주제 ㅡ사상인것이다. 자기 삶에 별다른 철학관념이 없는 사람은 돼지의 포식과 소크라테스의 고뇌에서 선택을 수요하지 않는다. 체험담에서 인생경험은 나올지 모르나 그에 그치면 인생철학이 나오지 못한다. 축적된 지식이 철학을 낳는것도 아니다. 체험은 부어넣은 주전자물처럼 바닥이 드러나지만 느낌과 사색은 샘물처럼 그냥 솟아나온다.
    행동하기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행동이 끝난뒤에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인생철리를 도출해 낼것이다. 그것은 원인에서 결과를 얻은 사색의 열매이다. 철학은 사색에서 얻어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고란 무어냐 하는 사색의 저 끝에 철학이 묻어나올수 있다.
    생활이 철학을 낳는다.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근원과 근간과 뿌리가 되여서 인간의 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철학사상, 생각의 뿌리는 독자들의 생활의 옥토에서만 깊이 뻗어간다. 수필을 나무로 비유해 말할 때 표현의 꽃은 예술이요 사색의 뿌리는 철학이다.
    주제란 무엇이냐? 흔히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그 의도는 대부분 철학적과제와 련결되여있다. 주제가 곧 철학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주제를 있게 하는 바탕에 철학이 있다. 그래서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사색의 글인 수필의 주제에 한계가 그어진다. 어떤 주제 또는 철학을 형상으로 바꾸어놓는것이 수필창작이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씨앗이 없는 과일과 같다.
수필에도 사상이 있느냐? 철학이 곧 사상이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어디에서 왔는가? 동일한 사람의 많은 수필이 한결같이 동일한 문제로 엮어지는 리유는 내면의 사상테두리안에서 나오지 못하기때문이다. 보통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상이 더 짙게 표현된다. 까닭은 중수필이 생활 주변의 감성적인 이야기보다 자연과 인생에 철학적이고 객관적인 과제에 몰두하기때문이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이 문학이다. 일단 사상이 생기면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려 한다. 동일한 어떤 사태에 부딪쳤을 때 철학 또는 사상을 가진 사람과 사상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에 대한 감수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의 삶 자체만을 문제삼을 때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것을 인정할 수 없다. 생명운동과 그 표현 보다 더 심각한 주제가 있는가?
    철학사상이라고 말하듯이 량자는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생명력을 가진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일 때 사상과 감정의 관계는 파도와 그 밑에 심해와도 같다.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그 파도는 심해에서 인기된것이다. 격랑이 일어날 때는 심해에도 동요가 온다. 사상은 만고불변이 될수 없다. 인생을 흔들만한 큰 사건에서 사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사상과 감정을 부침 (浮沈)의 차이에서 구별하지만 나타날 때는 마음이라는 하나가 된다.
    중국의학계에서 쟁론되고있는 심주신명(心主神明)설과 신주심명(神主心明)설을 결합하여 말한다면 마음안에 사상도 있고 감정도 있다. 많이 움직이는 부분을 감정 이라 하고 적게 움직이는 부분을 철학 또는 사상이라 할뿐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 비교해보자.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가지와 잎에 있다. 이때 뿌리가 사상이라면 가지는 철학이 되고 잎은 감정이 될수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날그날을 개체성이라 할수 있다. 개체성이란 그래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개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별성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동일한 것이 흐른다. 개체적생활은 나름대로의 원인, 과정, 결과에서 모두 다르게 엮어진다. 그러나 그 바닥에 공유되는것이 있다. 보편성은 어떤 인간, 어떤 사건에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개체성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저변에 보편성이라는 분모로 련결이 된다. 서양사람들의 에세이의 원뜻은 도전이다. 도전해야만 새로운것을 얻을수가 있고 거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찾을수 있다는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고 경험이나 체험을 사실대로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지만 실천에서는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있다. 수필은 시대, 사회, 인생에 대한 도전이 되여야 한다.  

                                                     2008년 3 월 10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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