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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의 기준치
2013년 06월 27일 08시 24분  조회:9121  추천:16  작성자: 최균선
                                 진정성의 기준치
 
                                       최 균 선   
 
    근간에 세간에서 언필칭 “진정성”이 어쩌구하던데 진정성이란 진정 무엇이며 그 진정한 의미란 진정 무엇이며 그 기준치는 진정 누가 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진정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진정”을 사전에서는 참되고 옳바르다. 참으로 틀림없다로 해석하고있다. 따라서 진정성ㅡ하면 진실하고 참된성질이라하고 류사어로 실정, 충정(衷情)을 례로 들고있다.
    진정한 우정, 진정한 사랑, 진정한 우의, 진정한 의미, 진정한 학자, 진정한 충고, 진정한 무엇무엇…등처럼 이 진정이란 단어를 말머리에 붙이는것으로도 자신의 주장에 어떤 설득력을 기하여 “약국에 감초”같은 역할을 한다. 가령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서 진정이란 말의 어감에서 어떤 절실함같은것이 진정 느껴지는것인가? 무엇이 진정한것이고 무엇이 진정하지 못한것이라 말할 때, 그 기준의 근거는 무엇이고 또 그 근거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확인하는지 누가 단마디 명창을 내놓을수 있을가?
     포스터나 약광고,학생모집광고, 취직광고 등 온갖 잡다한 광고들에서 직접 혹은 우회적으로 내세우는“진정성”을 감지하며 서로가 진정하다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 진짜 진정한것이고 무엇이 아닌것인가? 진정성은 과연 좋은것인가? 상호불신의 시대, 이 세상에 진정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간단하게 리해한다면“진정성이란 허구”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었고 꿈을 분석하려했던 프로이드는 본능에 따르는것만큼 진정성이 있는것이 없다고했다. 례하여 동물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일련의 행위들이나 어떤 위기에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본능으로 취하는 자세나 표정, 행위…물에빠진 사람이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바로 그 행동과 아비규환 등등이 진정성일것이다. 
    이렇게 감성과 리성으로 판단하지않고 오로지 본능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모든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진정성이다. 리성적의지에 지배된 진정성이란 진정성이 아니라는 말이된다. 어쨌든 이 진정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진정성의 기준치는 미확정이다. 그런데도 이 심오한 개념을 일상에서 너무 쉽게 사용하고있다. 문제는 사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의 용도에 담긴 리기성과 자기중심주의적 판단에 있다고 볼수 있겠다. 
    이 진정이란 말은 흔히 자기리페를 기준으로 가늠하는데 나는 절대적으로 진정성을 가지고있는데 오직 대방만이 진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방주의가 문제이다. 자기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증명할수 있는가? 례컨대 진정한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할것 인가? 자기 말이 증명하는가? 진정한 사랑이란 말은 사랑의 실체가 증명되였음을 전제로하는 말이다. 실제로 증명가능한 대상들에 진정이란 단어가 붙는 경우를 과연 누가 가려낼것인가? 본적이 있는가?  진정한 개, 진정한 나무, 진정한 보따리…?
    상술한바와같이 관념을 실체화하거나 대상화할 때처럼 우리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거나 무언가 존재자체가 의심스러운 경우에 바로 이 진정이란 단어를 상표처럼 붙이고 있음을 보며 곤혹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 즉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기 위한 용도로 이 “진정'”혹은 “진정성”이란 단어를 껌처럼 씹는것은 너무 얄팍하다.
    진정성이란것이 인간의 심령세계에 존재하느냐 않느냐를 고증할 생각도 없고 시비를 걸고싶은 마음은 더구나 없다. 량심껏 사는 사람들속에 진정성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진정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빈도와 함께 문제라고 생각하는것은 어떤 사고나 행위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편견과 리기적인 기만술이다.
    진정성은 참되고 옳바르다이여도 절대적이 아니라 복합적이다. 가령 진정 분노와 미움에서 살인했다면 면죄가 되는가? 진정성있는 독선은 정당화될수 있는가? 생명을 노리는 맹수가 내뿜는 살기의 진정성을 운운하는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것인가? 코앞도 보이지 않는 칠칠흑야에 그 어둠의 진정성을 론해서 얻을것이 무엇인가? 충심으로부터 충고하는 사람은 구태어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따위의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성이 없는 사람이 진정성이 어쩌구 하며 너스레를 떤다.   
    진정성을 대방에게서 기대하기전에 내자신은 과연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있는가를 반성하는게 진정한 덕목을 갖추기전 진정한 기본품성이다. 가증스러운 거짓말쟁이들이 말끝마다 진정성을 내건다.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해라”하고 요구하는 촌훈장의 바램이 진정이라 하더라도 웃기는 가르침이다. 자신은 진정 정확한 발음을 하지못하면서도 바르게 발음하라는것 자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성의 결여가 아난가?
    “인자견인,지자견지(仁者见仁,智者见智)”라는 말이 있는데《주역.계사상편(周易·系辞上)》“(인자견지위지인, 지지견지위지지(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에서 유래된 말이다. 뜻인즉 어진사람은 그것을 어질다고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지혜로운것으로 본다인데 하나의 같은문제에 대하여 부동한 사람들이 부동한 립장 혹은 부동한 각도에서 부동한 관점이 있다는것을 비유한것이다. 여기서 진정성을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좌표가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좌표로 남을뿐이다.
    개체이든 집단이든 자신의 립장이 있고 관점이 있고 주장이 있으며 리해득실의 기준치가 있다. 어진사람은 선량(仁)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智) 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마련이다. 또 조금 비틀어서 풀이한다면 착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착한사람을 알아볼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지혜로운 자를 알아볼수 있는 그런 개인적인 능력과 수준의 차이도 있다. 따라서 각자의 관점도 용인되여야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수준, 수양의 차이도 인정되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나만 잘나고 나만 정확한것처럼 대방에게서만 결점을 찾으려는 자는 속창이 뻔할 뻔자이다.
   이소프의 우화《두개의 주머니》가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사람을 다 만든후 그들의 목에 두개의 주머니를 걸어주었다. 한 주머니에 다른 사람의 결점을 넣고 다른 한 주머니에는 자기를 넣게 하였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넣은 주머니는 앞에 걸고 자기를 담은 주머니는 뒤에 메였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함은 인차 보아내게 되였고 자기의 결함은 보지못하게 되였다.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다.
   “충언역이(忠言逆耳)” 에서 왜 충언이 귀에 거슬릴가? 충신의 간언은 진정하지만 왕은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도리는 몰라라하고 자기 존엄이나 왕권을 건드리면 무작정 아니꼽게 본다. 이처럼 진정성도 어떤 심리로 가늠하느냐에 적대성이 된다는 설명이 된다. “지록위마”에서 함구한 신하들이 진정성이 있는가? 아니면 조고에 동조한자들이 진정성이 있는가? 뻔한 물음이지만 조고로서는 해답이 다를수밖에 없다.
    이처럼 진정성은 영원히 상대적이며 어디까지나 변증법적이다. 하건만 나는 절대 진정인데 대방만 진정하지 않다고 고아대는것은 진정 편견증과 소아병에 걸린자이다. 오는말이 고와야 가는말이 곱고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하고 가는떡이 커야 오는떡이 크고 오는떡이 커야 가는떡이 크다한다. 가는떡이 큰것은 진성성문제이겠고 오는말이 고와야 가는말도 곱다는것은 조건부적이다.
    그냥 오는떡이 크기만 바라거나 오는떡이 크지만 가는떡은 크게 보내기 아쉬우면 지극히 리기적이요 자기중심적이요 결국 속물근성에 젖은 인간이다. 내리익에 부합되면 진정이고 아니면 함께 콩으로 메주를 쓰자해도 곧이 들으려 하지않는다. 혹 콩이 메주로 될수 있음은 진실이지만 함께 메주를 쓰자는 제의는 진정성이 없지않냐? 편견부터 앞세우면 그냥 독선주의자, 위군자로 되여 제마음을 속여먹는 꼴이다.  

                                              2013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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