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간술의 심전ㅡ(捣鬼心传)”이란 로신선생의《남강북조집》에 수록되여있는 잡문이다. 심전(心传)이란 본디 불교선종의 용어인데 글을 남기지 않고 경권(经卷) 에도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스승과 제자가 말없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하는 전법수업을 가리르킨다고 주해를 달고있다. 로신이 이를 제목으로 단것은 당시 통치계급의 롱간술을 배웠다는것을 의미한다. 졸문은 이를 본따서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롱간술에“심전(心传)”을 심전(心战) 으로 바꾸고 좀 다른 화제를 엮으려 한다.
일단 화제가 로신의 잡문으로 시작되였으니 서두를 인용해 보자.“중국사람들은 기괴하고 요망스러운것을 즐겨하는 습성이 좀 있어서 보리꽃이 피는것보다 고목에서 빛이 나는것을 보기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기실 그들은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것이다. (략)“에서 고목에서 빛이 난다”는것은 미신관념이니 두말할것없고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것은 롱간질은 잘해도 아무실정도 모르는 자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래서 롱간질할 얄팍한 심사가 생겨나는것이다.
롱간(弄奸)질은 글자에서 짐작되다싶이 다른 사람을 속여 피해를 주는 간사한 짓거리로서 교활함, 사악함, 간사함, 간계 등을 떠올리게 하는 재수없고 불쾌한 의미의 단어이다. 롱간질은 그처럼 허다한 온갖 “질”치고는 제일 나쁜“질”이라 할것이다. 하건만 인간이 문명개활할수록 이를데없이 간특해지면서 롱간의 “심전(心战)”에 사활을 건듯이 한사코 롱간질하다보니 이골이 튼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로신은 글에서 “…그러나 사람이 하늘보다 롱간을 썩 잘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주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것은 롱간을 부리는 묘리는 절대로 발휘하지 말아야 하는데 즉 함축성이 있어야 하는데 있기때문이다.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함축적인것보다 심원하지 못하여 영향도 그때문에 희미해지는것이다.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내가 한도가 있다고 하는것도 이를 두고하는 말이다.”라고 롱간질 일반에 대해 풍자하고있다.
롱간질은 뇌리에서 조작되는것이지만 말, 특히는 글로써 잘 체현된다. 그것이 장편대론이든 토막글이든 롱간질을 간파하였을 때는 로신의 응전술을 리용하면 가장 좋 을것이다. “…단죄하고 규탄하는 공개된 글은 그 힘이 왕왕 속삭이는 귀속말보다 못한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분명한데 하는 속내를 짐작할수 없기때문이다. 가령 그 때 락빈왕이 대중앞에 나서서 눈살을 찌프리고 머리를 저으며 ‘나쁘기 그지없다. 나 쁘기 그지없다.’라고만 하고 어째서 나쁘다는 말을 실례를 들어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효력이 그 글보다 나았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 금과옥조이기때문이다.
이런 응전술은 기묘하다. “…속내를 모르게 하는 위엄은 사람들을 저상케하며 속내를 모르게 하는 묘방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게 한다…롱간에는 술책이 있고 효과도 있지만 그것은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큰 일을 성사한 사람은 자고로 없다.”고 롱간질의 악습을 사정없이 질타하였기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롱간질하는 사람에게는 필경 치명적인 타격이 될수밖에 없다.
누군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의론보다 더 재수없는 일이 딱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아무도 당신에 대하여 의론하지 않는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글을 써서 사회에 내놓은후 평가는 둘째치고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허허 사막에서 저혼자 목쉬게 웨친후 씁쓸하고 싱거운 허탈감에 빠지는것과 같은 심정일것이니 말이다.
대천세계에 벼라별 사람들이 다있으니 평판도 제나름일것이고 중구난방이여서 종잡을길 없거니와 듣그러울것이다. 여론마당은 명칭그대로 의론이 정상적현상이지만 이미 내놓은 글이 변질될것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져 작자를 매몰시킬 일도 아니니 마이동풍은 불가하되 스스로 성찰을 앞세우는것은 바람직하다.
프랑스 계몽기 사상가 볼테르의 후대 작가가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 며 표현의 자유의 관용성을 강조한바있다. 미국의 련방대법원 판사였던 홈즈란 사람이 “사상의 자유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다” 라고 하였는데 아무나 미칠수 있는 사상경계는 아니지만 심히 교훈적이다.
닉명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도 사상표현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되 형식이나 결과나 암전이다. 설사 명중하였더라도 암전을 쏘는 자는 어디까지나 광채롭지 못한 “궁수”이다. 그렇게 일종의 심리롱간을 부리지만 자칫 자신의 밑창을 드러내게 된다. 그만큼 닉명으로 롱간술을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계발이나 조언으로서의 영향력은 거꾸로 되고말것이다. 로신의 말처럼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하는 일은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일일때가 많다.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는 피할수 있어도 파리는 피할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이것저것이 이래저래 한이 될수도 있다. 중국작가 장애령은 인생에 세가지 큰 한이 있는데 첫번째 한은 붕어가 가시뼈가 많은것이고 두번째 한은 해당화가 향기없는것이고 세번째 한은 “홍루몽”이 미완성작이 된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천층만층이니 품게 되는 한이 대동소일할수 없을진대 이것저것 한이 되더라도 남을 탓하다보면 스스로 심리혼란을 다잡지 못고 전전긍긍하게 될것이다.
인생은 마치 담담한 한고뿌의 물같지만 설탕을 넣으면 달착지근해지고 소금을 넣으면 짧짤해지고 고추가루를 풀어놓으면 맵싸하게도 된다. 세상에 동그란 네모꼴이란 없듯이 완전완미한것은 없다. 그만큼 자신의 완미함을 바랄수 없듯이 남들이 완전완미하기를 바라는것은 되우 무료한 일이나 롱간술의 심전은 무서운것이다. 세사람만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어낼수 있고 도깨비로 둔갑시킬수도 있다지 않는가!
관용과 아량은 성격에 뿌리를 두고있지만 성격이 좋다는 평판을 들을만큼 호방한 성격의 사람이 작가로서는 적임자가 아닐수도 있다. 그 반증으로 작가는 흔히 고지식한 생활의 “약자”이기 쉽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풍부한 내심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모종의 고통으로 그늘져있기가 십상이다. 조금 신경질적이거나 심지어 심적문제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전(心传)” 은 바랄수 없고 “롱간술의 심전 (心战)”에 성찰로 마주하면 일패도지는 하지 않을수 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 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는 사람은 성자의 사상경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것이다. 잡다한 롱간질로 운행되는 세상이니만큼 롱간술에 능한 자들이 지천이다. 그러나 롱간질로 일시 득세할수도 있겠지만 나중엔 그저 그러고 말것이다.
“어이하여 청산속에 사느냐 물으면 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아도 마음 스스로 한적하여라, 도화꽃 류수에 흐르는 별유천지라 인간세상 아니여늘. (問予何事捿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라는 리백의 명시로 횡설수설을 마무리하면 얼추 뒤끝이 맺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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