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과 감정은 맥을 같이 하나 글자의 위치가 다르듯 그 쓰임의 차이가 있다. 정감은 사람의 마음에 호소해 오는듯한 느낌이고 감정은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하여 느끼여 나타나는 심정이나 기분이다. 정서는 주요하게 인간의 생리수요에서 기인되고 정감은 주요하게 인간의 사회성수요에서 발원된다. 정서의 산생은 일찍하고 정감의 산생은 보다 뒤지는데 사회교류 가운데서 형성된다.
정서는 일정한 정경속에서 인기된다. 정감에는 정경성도 가지고 있거니와 온정성도 가지고있다. 사람은 매 시각마다 자신의 생리변화와 현실생활의 자극에서 인기되는 내심의 희열, 비애, 만족, 후회와 한…등 감수를 받기마련이며 동시에 늘 다른 사람의 분노, 우려, 쾌락 혹은 애증 등 정감정, 정서적반응을 살피기마련이다. 이렇듯 정서는 인지내용에 대한 특수한 태도이며 개체의 념원과 수요를 중개하는 일종 심리활동으로서 심리학상에서 크게 희,로, 애, 락으로 나눈다.
정감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란 있을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천실만실 얽히고 정서는 만단정회(万端情怀)이다. 정감은 그 개체생명에서 기인되지만 사회성수요와도 련계되여있으며 사회생활속에서 형성되여 발전하며 변화무상하게 드러나고있다. 사람의 총명정도는 선천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정감은 선천적인 공능으로 대체할수 없다.
심리학에서는 정감체현의 심리과정의 구체적인 형식을 정서라고 명명하며 정감이 표현되는 정서를 “사회정서”라 하고 생물적수요와 련관된 정서를 “원시정서”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정서란 이 두가지 성분으로 구성된것이다. 일반정서란 쾌락, 비애, 분노, 공포감 등이고 도덕감, 리지감, 미감 등을 고급적인 정감이라 한다.
감각은 현대인들의 심리추구의 요점으로서 이른바 인연, 연분이란것도 감각에 원천을 두고있다. 감각과 감정은 별개의것이다. 감각이 있다해서 반드시 감정이 생기는것이 아니며 감각이 없다해서 감정이 없다고 할수 없다. 례하여 경국지색의 미녀를 보았을 때 감각이 있기마련이지만 독사같고 전갈같은 녀자임을 알았을때는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수 없다. 이는 감정의 변화무상함을 반증해준다. 감각은 감정보다 신속하고 맹렬하며 가변적이여서 사람을 눈부시게 하고 머리가 뜨거워지게 하는데 랭정해진후에는 꼭 후회막급한다. 감정은 감각보다 늦게 오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믿음직하다. 정감은 화학성질을 가지고있는데 정감의 최종적인 공제는 잠의식이 아니면 무의식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을 처리함에 감정에 놀지 말라고 하나 리성을 앞세워 당면한 정감파동을 잠재운 현인군자는 많지 않다. 그만큼 정감은 미친토끼처럼 리성이 치는 그물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냉큼 뛰여넘는 법이다. 리해득실은 리성(머리)으로 따진다지만 정서를 수반하지 않을수 없다. 력사상에 벌어졌던 그 모든 인의지사들의 참사는 정감에서 기인된것이였다. 례컨대 반우파투쟁이나, 려산회의나, 문화대혁명이나 서로 못살게 굴고 죽음에로 몰아넣고 잠시 득세하였으나 남잡이가 제잡이로 된격으로 모두 같은 고초를 겪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이 얼마였던가? 그 모든 비정함과 비리함은 비속하고 가소롭지만 사람은 누구나 정감의 지배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희노애락은 인간상정이다. 황제도, 군왕도, 위인도, 군자도, 영웅도, 현인도 례외일수 없다. 기쁘면 웃음짓고 발연대노하면 침방이 튕기는것은 정상인의 자연적인 정감의 로출이다. 물론 량지가 감정류출의 조절기가 되겠지만 왕왕 너무 창백무력하다. 실패한 영웅, 항우가 강동에 돌아가 동산재기할 기회를 버린것도 정감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였거늘 하믈며 민초백성, 포의한사들임에랴,
이처럼 지혜의 대가는 모순이다. 이것은 인생이 인생에 대한 롱담이라 할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적은 자기라는 명언이 있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왕왕 자기의 정서를 전승하지 못한다는 역설이 될것이다. 자기를 다스린다는것은 바로 자기의 정서를 다스린다는것이다. 무지경의 탐욕도, 무절제한 호색도, 자기를 모르는 본분에 맞지 않는 출세욕도, 자기가 잘 되기 위해 남을 헐뜯는 암투도…다 감각, 정서로부터 출발한것일진대 영화부귀를 누리다가 일패도지하는 그런 사람들을 다 의지박약자라고 힐난할 성인이 누구일가?
근간에 중국에서는 심리상태(心态)를 어떻게 다스릴것인가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리론설교는 어디까지나 실천보다 쉬운 일이듯 약속력이 없은 말을 하기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 흔히 “내려놓을줄 아는것,“버릴줄아는것”이 인생의 최고경지라고 설파하는데 누가 그런 대도리를 몰라서 자기 심리정서를 절제하지 못하는가? 포용이 지혜로운 처세의 방식이고 버리는것은 일종 명지한 선택이라 하지만 물욕도, 명예욕도, 권력욕도 흔쾌히 버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최고의 경지에서 노니는 현자는 드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간단해지기 위해 간단해질수 없으며 잊어버리기 위해서 잊어버릴수 없다. 인생에 대한 새라새로운 오감만이 있을뿐이다. 무지개는 적, 등, 황, 록, 청, 남, 자 등 색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무지개가 아니다. 인생도 칠색으로 아롱진 유혹의 세계이지만 넘치도록 가득채우느니보다 적당한 때에 멈추는것이 좋다는 가르침을 누구나 명기하고는 있지만 실천에서는 십중팔구 난쟁이가 아닌가?
인생은 꿈같고 꿈이 인생같이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기에 완미한 인생이 없고 완미한 인간이란 이 지구촌에 태여난적이 없다. 잘 짜놓은 연극에도 순수 희극이란 없다. 우주는 망망하고 망망한 우주에 뭇별들이 반짝이고 반짝이는 별빛아래 별처럼 많은 중생들에게는 그만큼 많은 정서극이 무시로 연출되고 있을뿐이다.
우리는 지금 감각시대에 살고있다. 그래서 “감각을 따른다”는 말이 류행되였다. 이런 감각시대는 지난 초감각의 시대가 급전환하면서 온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각에 대한 압제는 극한에 이르렀는바 병이 나면 의사에게 말할수 있고 격정이 일면 송가를 엮는 외에 모든 공통감각과 그에서 생성되는 정서에는 “사상”,“주의”라는 락인이 찍히지 않은것이란 없었다.
그때 누가 감히 느낀것을 다 말할수 있었던가? 정서상에서 욕망이 꿈틀거려도 누가 감히 발설한단 말인가? 오래동안의 한가지 설교와 그에서 형성된 집체무의식은 체념이 아니면 중용을 선택하게끔 강요하였을뿐이다. 지금은 정서세계에 금구가 없지만 표현의 자유세계는 아닌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많이 좋아졌다. 사람마다 정감에 굴레를 씌우지 않고 감각의 광야에서 마음대로 질주할수 있게 되였으니 말이다.
인간이 자기의 본연을 찾으려는 시대, 감각에 따라 살고싶다는것을 마다할 리유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정서는 아직도 절제와 조절이 요청된다. 감각만을 따르다보니 사람들은 인제 정감의 극치인 애정의 산마루에서 리혼의 희비극을 비일비재로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일러 리혼시대, 리유없는 리혼시대라 한다.
이 한가지 실례로부터 인생극장의 희비극은 모두 정감극, 정서극이라 개괄할수 있으니 현대인의 정감세계의 미로를 밝혀주고 광분하는 정서의 들말을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것은 인간의 원초적비애가 아닐수 없다. 자비감이 많은 사람의 치명적인 연약성은 자기 단점과 부족점의 음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것이다. 열정적인 사람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 리용당하기 일쑤이다. 인간이 감정동물로 진화된 이상 참으로 극단으로 진화되여가는 정감이요 무서운 감각,정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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