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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 - 현대시
나는 1500여년전에 중국의 류협이 쓴 <<문심조룡>>을 읽고 깜짝 놀랐다. <<문심조룡>>은 동양문학의 고전의 하나이며 정수의 하나이며 우리 전통의 하나이기도 하다.
<<문심조룡>>은 모종의미에서 말하면 동양문학의 뿌리의 하나로서 우리 문학의 뿌리라고도 할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의 많은 명제들이 <<문심조룡>>과 같은 감이 들었다. 어찌보면 현대시는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이라고 함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에 도착하는것을 부정할수 없었다. 아래에 몇가지 방법으로 <<문심조룡>>과 현대시 - 현대시와<< 문심조룡과의>> 관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현대시의 사유와 <<문심조룡>>에서 말하는 시적사유방식이 일치하다는것이 첫째 인상이다. 시를 어떻게 사유하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시적사유가 다름에 따라 부동한 시의 유파가 산생하게 되며 시가 어떻게 씌여지는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실 필자는 시적사유는 시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언어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의 언어는 시의 발상에 의존하여 산생되게 되고 나아가서는 시의 발상과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 영향이 어떤때에는 시로 되는가 안되는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대시는 감정에서 도피하고 개성에서 도피하고 지어는 시인의 자아마저도 부정하면서 언어의 집을 지으며 언어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시는 기성의 감정, 기성의 사물의 개성, 시인의 갖고있던 윤리들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면서 씌여진다고 한다.
그래서 말라르메는 까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래동안 무에 깊숙이 내려가 본 경험이 있어 단언하지만 <그 밑에는> 오직 아름다움이 있을뿐이요-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하나밖에 없소 . 시뿐이요.>> (시의 리해- 한국민음사 1983,7월 발행- 이하 <리해>로 줄임 235쪽)
랭보는 또 <<언어의 련금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박한 환각에 길들었다...나는 단어들의 환각으로써 나의 신비한 궤변들을 설명하였다! 나는 마침내 내 정신의 혼란을 신성시하게 되었다.>>(동상 228쪽)
<<상상력만이 창조적인 천채이다...그 최고의 업적은 추상에 있다>>라고 월리스 스티븐스는 <<가치로서의 상상력>>에서 말하였다. (리해 156쪽)
무에 깊숙이 내려가 보면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시밖에 없다는 말라르메의 말이나, 환각에 길들여진 랭보가 단어들의 환각으로 신비한 자신의 궤변을 설명하고 그 환각을 신성시하게 되었다는 론이나, 상상력의 최고의 업적은 추상이라고 말한 스티븐스의 지적이나 모두가 시는 현실속에서 받은 감각을 그대로 라렬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은 기성의 세계에서 무의세계로 들어가 시를 떠올려야 한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라겠다. 이러한 시리론들은 우리로 말하면 낯설지 않은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리론이 <<문심조룡>>에 있다는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말처럼 들리는 이 리론이 1500여년전에 중국에서 탄생하였다는 기적을 우리는 승인하지 않을수 없으며 놀람을 금할수 없는것으로 우리앞에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문심조룡>>이라는 이 언어 자체가 이점을 말하여 주기도 하지만 류협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적사색을 잉태함에 있어서 그 요체는 허심함과 조용함에 있으며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는데 있다...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신묘한 도와 길게 통한 심령으로 하여금 성률에 맞게 문학적언어를 안배하게 할수 있는데>> (연변인민출판사 조선문 출판 <문심조룡> 377쪽. 다음 인용부터는 페지만 밝힘)라고 하였다. 류협의 말처럼 <<허심하고 조용하고>>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면>> 그것은 바로 말라르메가 말하는 무의 세계이고 랭보가 말하는 환각의 세계이고 스티븐스가 말하는 <<추상>>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문심조룡>>이라는 말도 그렇다. 글 쓰는 사람이 마음으로 룡을 조각한다는 뜻이다. 룡이란 세상에 없는 사물로서 력래로 누구도 본 사람이 없는 환상적 토템물이다. 이 말이 바로 세상에 없는것을 이미지 즉 한어로 말하면 의상으로 창조해 내라는 말인것이다.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내면>> 무의식세계인데, 무의식세계에 들어가서 어떻게 시를 떠올리는가? 이 무의식세계는 바로 시성의 세계로서 시인은 이 세계에서 시적자각으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무의식세계에는 현실과는 다른 의식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시적정신 혹은 시성 혹은 시적자각 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문심조룡>>은 그것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남다른 식견이 있는 장인바치가 심상(意象)에 의하여 창작을 진행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학적사색을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首術)이며 작품의 구성에서의 중요한 발단이다.>>(동상)
류협은 무의식세계에서 심상창조 즉 이미지를 창조해내는것이 첫째 방법이며 시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류협의 이 관점은 천년의 중국문학을 연구분석하여 낸 결론으로서 중국문학사에서 오늘까지도 인정을 받는 관점이다. 소유의 문학사가들과 문학리론가들은 류협의 이 리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럴뿐만 아니라 현대시인들도 이미지라는 언어를 문학에 도입하고 이것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개화시켜 왔다. T.E흄, E.파운드, S.크레인등을 대표로한 영미의 시인들이 일으킨 이미지 시운동은 심상창조를 현대시의 핵으로 삼았던것이다. G. 바슐라르의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J.P. 사르트르의 <<상상심리학>>, 그 외에도
많은 시론과 철학과 미학들이 <<문심조룡>>의 <<선입견>> 버리기며 심상론과 천갈래 만 갈래의 련계를 가지고 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연구하고 창작한 이미지 리론과 시들은 그 원천이 <<문심조룡>>이 아니라고 말할수 없다. 특히 파운드의 어머니가 중문학자였고 파운드도 중국문학을 연구한 사람이여서 그는 서양시와 동양시의 교차점을 찾고 그 발전방향을 이미지시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2
선입견을 버리고 정신을 깨끗이 정화시키고 이미지를 창출해내야 하는것이 첫째 방법이며 시의 시작이라고 한 이 결론에서 이미지가 중요하고도 중요하다는것이 밝혀지였다. 어떤것이 이미지이며 어떻게 이미지를 창출하는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류협은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그것은 <<비흥>>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비란 비부(比附)이고, 흥이란 기흥(起興)이다. 비부 즉 사물의 리치를 련결한다는것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물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기흥 즉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것은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있는 사물에 감정을 맡긴다는 뜻이다.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서가 발생하기 때문에 흥을 리용하는 수법이 성립되며 비유를 통해서 사물의 리치를 드러낼수 있기 때문에 비의 수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란 격분의 감정을 품은 채로 잘못을 지적하는것이고 ,흥이란 완곡한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에다 숨겨진 의도를 의탁하는것이다...시인들이 지향하는 수법에는 항상 그 두가지가 함께 포함돼 있었다.>> (501쪽) 비와 흥은 이렇듯 중요한것으로서 이 두가지는 결합되여 이미지를 창출할뿐만 아니라 시의 뜻도 만든다. 이것은 시를 쓰는 핵심적방법으로서 비와 흥을 떠나선 시에 대하여 운운할수 없다는것을 말한다.
비와 흥에서 비교가 우선이다. 사물과 사물과의 비교가 없으면 흥이 산생할수 없다. 비는 흥의 기초이며 흥은 비의 비약이다. 흥은 시의 감정으로서 시의 뜻이며 사상이며 골격이지만 비에 의하여 산생하므로 비는 흥의 탯줄이며 모체이다. 시의 뜻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것도 아니고, 이미지밖에서 개념을 부여하여 만들어지는것도 아니다. 시의 뜻은 사물을 비교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산생하게 되며 이미지에 용해되여 있는것으로서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것이다.
류협은 어떻게 비교를 하는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비유된 두사물이 비록 북방의 호인과 남방의 월인들만큼이나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그것들이 일단 합쳐지면 간과 쓸개처럼 가깝게 된다네. 기흥은 외부의 형상을 묘사하여 그뜻을 뽑아오므로 말의 사용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리라>>(509)하였다.
여기서 두가지 문제에 류의할 필요성이 있다.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 >> <<그것들이 일단 합쳐지면 간과 쓸개처럼>> 친밀해진다는것이다. 그러기에 과감하게 언어를 구사하여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비교되는 두 사물이 성질이 다르거나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도 비교할수 있으며, 비유를 산생시킬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은 지금도 우리가 시에서 발휘시켜야 할 훌륭한 명제인것이다.
이미지에 대한 현대시인들의 시도 많거니와 론술도 많다. 그중 한두가지 관점만 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리처즈는 상상력을 론하면서 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사물의 성질에 대한 밸런스(균형) 혹은 화래로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통합적 마술적 힘이라고 하였고, 코울리지도 서로 반대되거나 또는 불일치한 성질들을 균형하거나 또는 타협시키는 힘이라고 하였다.
사물과 사물을 비긴다는것은 시적상관물을 설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적상관물에 대하여 엘리어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적상관물을 찾아내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특별한 정서의 공식이 될 일련의 대상들, 어떤 상황, 사건의 연쇄를 찾아내는 일이다.>> (세계명언대사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735쪽)엘리어트가 시적상관물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처즈와 코울리지의 말이나 엘리어트의 이 말은, 심상에 기대여 창작을 진행하는것은 첫째방법이며 글의 시작이라는 류협의 말과 일맥상통할뿐만 아니라 리처즈나 코울리지나 엘리어트가 류협의 말을 복창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가지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서의 공식이 될 일련의 대상들, 어떤 상황, 사건의 련쇄를 찾아내는 일>>이 바로 심상을 만드는 작업이며 시를 쓰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시창작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이 핵심의 중요성에 대하여 파운드는 이렇게 강조한다.
<<많은 량의 작품을 내놓는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것이 낫다.>>(리해 138쪽) 파운드의 이 말은 현대시에서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도 확연하게 말하여 변론을 할여지가 없다.
3
시는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의 결실이다. 언어를 떠나서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어라는 이 언어는 특종언어이며 외포와 내함이 다른 언어로서 어떤 개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하여 씌여지는 언어이다. 우에서 시적사유, 이미지에 대하여 현대시와 << 문심조룡>>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았다. 그 기초상에서 시의 언어구사에서 현대시추구와 <<문심조룡>>의 추구가 어떤점이 같은가를 살펴보는것도 주요한 방면이라고 생각된다.
류협은 <<정리는 문학작품의 날실이며 언어적 표현은 씨실이다. 날실이 올바르게 배렬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씨실이 제대로 오가면서 천을 짤수 있듯이,정리가 확정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문장이 류창해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구성의 근본이 되는것이다.>>(443쪽)고 하였다. 류협은 시는 두가지 근본으로 이루어진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나는 정리이고 즉 뜻이고 하나는 언어이다. 정리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지도(自然支途)혹은 천도(天道)이다.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이 자연지도를 말하였으므로 정리는 공맹지도에 부합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도 자연지도는 맞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시의 뜻은 성인의 도에 부합되는것이여야 한다고 한것은 100%로로 맞는다고 할수 없을것 같다. 아뭏든 시의 뜻은 비와 흥을 통하여 산생된다고 한것은 지금도 맞는 위대한 결론이였다고 하겠다. 말이 좀 빗나가는 같다. 시는 언어가 세련되여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함축되여야 하고 더 보탤것도 없고 삭제할것도 없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방면에서의 관점은 예로부터 시어에 대한 일상적인 요구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아주 주요한 면에서 <<문심조룡>>과 현대시가 같은 주장이 있다는것이다.
첫째: 언어를 시의 재료라고 보는데서 량자가 같은 주장이다.
문심조룡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짐승이나 새들의 발자국을 식별하는데로부터 시작하여 문자를 창출해냈는데 그것은 언어의 부호이고 문장을 구성하는 재료료 되었다.>>(537쪽)
얀 무카로브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각의 금속이나 돌과 같은, 또 미술에서 도료와 화판같은 재질과 재료이다.>>(현대시의 리론 -한국지식산업사출간 이하 <리론>으로 략칭54쪽)
류협은 짐승의 발자국과 새의 흔적을 분별하기 위하여 쓰는 문자를 부호라고 하기도 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재료라고 하기도 한다. 얀 무카로브스키는 조각이나 미술에 쓰는 여러 가지 도료와 화판같은것을 재질과 재료라고 한다. 서로 딴 것으로 례를 들었을 뿐이지 언어가 시나 문장을 만드는 재료라는 되데서는 완전히 일치한 관점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둘째: 시적언어를 점괘의 일종으로 보는데서 관점이 같다.
문심조룡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말은 역괘의 호체안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마치 역괘중에 변효가 있는것과 같네 >>(565쪽)
말라르메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치 주문과도 같이 세속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언어를 재창조하는 싯귀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다.>> (리해 238쪽)말라르메만 이런 말을 하는것이 아니다. 구조주의 활동을 주장하는 롤랑 바르트도 <<문학이 점술>>(현대문학 비평론-한신출판사)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이 산 년대가 다르고 입은 각각이지만 모두 시적언어는 점치개들이 말하는것과 마찬가지라는것이다. 류협은 시는 자연지도를 전달하는것이라고 했다면 서구현대시인들은 시인은 신선이 뜻을 전달한다고 하였다. 그들 모두가 점쟁이들의 언어는 령혼의 언어라고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전달하는것으로 알고 있었던것이다. 시는 령혼이 말하는것으로서 시어는 주술적인 언어라는 관점에 그들 소리가 모아지고 있는것이다. 그것은 시는 꼭 창의적이고, 창의적이기 때문에 언어도 일반 언어와 달리 <<예측 불가능>> 언어로 씌여져야 한다는 의미라겠다.
셋째: 량자가 모두 시언어의 다의성을 중시하였다.
류협은 <<사람들은 글자에 얽매여 말의 뜻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하고, 말의 뜻에 구애되여 작가의 의도를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513쪽)는 맹자의 말을 빌기도 하고, <<교묘한 말로써 만물을 섬세하게 새긴다>>(441쪽)는 장자의 말을 차용하기도하면서 <<심각한 언어적표현은 함축적이면서도 다채롭고, 말밖의 여미는 드러나지 않게 내포되여 있네>>(565쪽) 라고 지적하였다.
얀무카로부스키는 <<시적언어는 감정의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언어와 다르다. ...예술작품에서 언어 또한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것이다.>>(리론 44쪽)
맹자가 말한 언어의 뜻에 구속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것이나 장자가 말한 교묘한 언어나, 류협이 언어밖의 여운이 곡절적으로 포함되여있다는 지적들은 시인은 시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같은 말이라도 새로운 뜻으로 쓸수 있다는것으로 풀이 된다. 새로운 뜻으로 쓰일수 있는 언어는 원래의 언어의미와는 다른것일수 있는것이다. 언어의 외연은 같지만 언어의 내함이 다르다는 말로 해석하게 되는것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에 쓰이지만 시적인 언어는 의상을 창조하기 위한데 쓰는것이므로 류협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류협의 의도를 해석해보면 얀무카로브스키의 말의 정당성을 알수 있고, 얀무카로브스키의 말을 곰곰이 새겨보면 시언어에 대한 류협의 정당성을 알수 있다. 비가 온다 라고 시에 씌였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오는 비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위한 이미지로 쓰인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비는 하늘에서 오는 비인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여 나온 메타포인것이다. 이 비라는 사물은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원래의 뜻과는 틀리는 위치에 있게 된다. 즉 다시 말하면 비는 실제의 비인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기쁨, 그리움이나 아픔같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용으로 쓰이게 되는것이다. 이 비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추기 위해 쓰인것이며, 일상적인 언어그대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쓰인것이 아니라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 이미지를 그리기는데 충당된 재료이다.
<<붉은 살구나무가지에서 봄이 떠든다>> <<비파줄에서 꾀꼬리 운다>> 당송시기에 송기와 위장이 쓴 이런 시구들은 언어의 다양한 의미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봄이 떠든다>> <<꾀꼬리 운다>>는 바로 언어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시인들은 성질이 부동한 언어, 일상적인 례대로 하면 결합될수 없는 언어들을 강압적으로 련결시켜서 참신하고도 특이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없는것을 보게 하고 없는 소리를 듣게 하고 청각을 시각으로 교체시키거나 시각을 청각으로 교체시키는 외에도 기타 공감각을 리용하여 교묘하게 언어의 운치를 살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실로 말 그대로 주술적인 진술이라 아니 할수 없다.
4
현대시만 몽롱성이 있는가? 아니다. 고대시도 몽롱성이 있다. 현대시에서만 몽롱성을 론하는가? 아니다. 고대시에서도 몽롱성을 론하였다. 현대시만 몽롱성이라는 특성이 있는가? 아니다. 고대시에도 몽롱성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시의 몽롱성에 대하여 대서특필하였다.
<<문학작품들 가운데서 정화라 꼽힐만한 명작들에는 은(隱)과 수(秀)가 있기마련이다. 은이란 글밖에 함축된 <말밖의 뜻>을 가리키며 ,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 은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의 복잡함과 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수는 한 자품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551쪽)
<<은의 특질은 글밖에 뜻을 갖고있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밀한 음향이 옆에서 들려오는것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것과 같은데, 이는 효상의 변화가 호체안에 포함돼 있는것에 비유될수 있고, 흐르는 강물속에 주옥이 숨겨져있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즉 호체안에서의 효상의 변화가 사상을 이루고, 주옥이 강물속에 깊이 감추어져있기에 물결이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것과 같다>>(553쪽)
<<작품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물결을 가리켜 수라한다. 그것은 민첩하고 교묘한 손이 아름다운 악곡을 연주하여 표일한 자태가 밖으로 드러나고 , 또 먼 산에 구름과 노을이 피여오르고 , 미녀들이 예쁜 용모를 드러내는것에 비유될 수가 있다>>(555쪽)
<<작품의 언어적표현속에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 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적표현속에 드러나게 된다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557쪽)
<<뚜렷하게 드러난 나뭇가지들은 태양을 향해 뻗어올라 가지만 함축적인 나뭇가지들은 어두운 그늘밑에 모습을 숨긴다>>(601쪽)
<<훌륭한 작품은 책궤에 가득 차 우수한 흔상자라야만이 평할수 있다.>>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할수있다는것은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가! 음은 확실히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 말가한 일이다.>>(685쪽)
류협은 이렇게 개탄하면서 노나라의 신하는 기린을 사슴으로 여겼고, 초나라사람은 꿩을 봉황이라 하였고, 위나라사람은 야광주를 괴석이라 하였고, 송나라사람은 연나라의 돌을 보석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만큼 인용하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현대시를 어떻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시적창조는 해독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리해 108쪽)라고 가르시아 로르카는 말한다.
<<시는 모르는것 속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리해 115쪽)하고 옥타비오빠스는 말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하여 산 언어에 영향을 끼친다.>>(리해 151쪽) 하고 엘리어트는 말한다.
<<불가사의한것이란 언제나 아름답고 ,그 어떤 불가사의도 아름다운것이며, 불가사의 가운데는 아름다운것만이 있을 따름이다.>>(리해 252쪽) 하고 앙드레 부르통은 말한다.
<<말을 예측 불가능으로 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게 아니겠는가!>>(리해 290쪽) 하고 가르통 바슐라르는 말한다.
어느때에 몽롱하지 않았다는 시리론이 없었던가? 1500여년전에도 있었고 현대에도 있다. 1500여년전의 <<문심조룡>>과 현대시의 시론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같은 소리를 했다는것이 이로서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시를 이미지로 쓰게 되면 당연히 몽롱하게 되는데 이는 시의 본능이자 기능이 아닐가. 시는 몽롱하기에 아름답고 시는 몽롱하기에 시가 되는것이 아니랴. 시는 몽롱하기에 읽을수록 고소하고 읽을수록 향기로운것이리라. 시를 아무나 쓰지 못하는것은 바로 시의 몽롱성에 있는것이고, 시를 아무나 읽어서 다 알지 못하는것도 시의 몽롱성에 있는것이리라. 시가 몽롱한것은 시의 장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장점을 버릴수 없다. 이 장점을 버리면 좋은 시를 쓸수 없고, 차원이 높은 시인으로 될수 없기 때문이다.
시가 몽롱해야 한다는것은 현대시의 특징의 하나일뿐만 아니라 우리 시의 전통이다. 현대시인들은 우리 시의 전통을 가져다 현실에 맞게 연구하고 세부화시키면서 한단계 더 발전시켰을뿐이 아닐가.
류협은 참 재미있는 말들을 많이 하였다. 날개가 없어도 사방으로 날아다니는것이 언어요 뿌리가 없어도 탄탄하게 응결되여 있는것이 감정이니라 하였고, 기교가 모자라는것을 일컬어 드러박줄이 짜르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어올릴수 없어 갈증을 달랠수 없고, 발에 맥이 없으면 중도에서 멈추게 된다고 하였다. 편견만 중시하면 뜰안에서 말을 타고 도는것과 같거늘 어찌 만리길을 달린다고 하랴고 하기도 하고, 만약 범의 털이 색깔이 없고 무늬가 없다면 그것들의 가죽은 개나 양과 무엇이 다르랴고 하였는가 하면 기교를 포기하면 도박군이 운수를 바라고 도박을 노는격이라고도 하였다. 시적기교를 따지면 <<문심조룡>>과 현대시의 동일성에 대하여 할 말이 많지만 이만큼하면 <<문심조룡>>과 현대시와의 혈연적관계를 알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생략한다. 총적으로 말하면 현대시는 <<문심조룡>>의 화려한 부활이다. 시를 수십년 써오고 시리론을 10여년 연구해 온 필자는 <<문심조룡>>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을 금할수 없고, 또 벌써 1500여년전부터 우리에게 훌륭한 시교과서가 있었다는것으로 하여 한없는 자호감을 느낀다.
참고서:
(1)문심조룡 -연변인민출판사.
(2)현대시 리론 -한국 지식산업사.
(3)시의 리해- 한국 민음사.
(4)현대문학비평론-한국한신문화출판사
(5)세계명언대사전-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20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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