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지 않아 「식목일」이 다가온다.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이날을 맞을 때마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반성과 회오의 감정이 진하게 일어난다.
이 날이 되면 지방의 정부기관이나 관련 사회단체에서 삽과 괭이를 들고 헐벗은 산야에 나무를 심는 장면이 저녁 TV뉴스에 방영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현수막을 내걸고, 머리에는 대회명을 새긴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구호를 제창하며 「보란듯이」 나무를 심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기보다 「행사」를 치루는 일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높은 분이 뜨면 심던 나무를 팽개치고 그에게 먼저 달려가 인사하기에 급급하다. 또 높은 분은 취재진 앞에서 나무 심는 포즈를 잠깐 취해주고는, 주위의 관계자들에게 몇마디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 얼른 그 자리를 떠나게 마련이다. 일정상 또 다른 행사장으로 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식목일 행사」는 대충 그렇게 끝이 난다. 우리 인생의 산야에 심는 「식목의 작업」도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Ⅱ
앙드레 말로가 “20세기의 프랑스 작가 가운데 세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지오노, 몽떼를랑, 그리고 나 자신인 말로를 꼽고 싶다”고 말한 그 세 사람중 한분인 장 지오노 (1895~1970)가 지은 아주 작은 책이 하나 있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한국에서는 김경온 박사(연세대 불문학과 교수)가 번역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지 벌써 2판 3쇄를 거듭한 책이다.
‘어린이의 동화책 보다 얇은 이 책이 왜 그토록 여러나라 말로 옮겨져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공동의 선(善)을 위해 일하는, 그러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사람의 불굴의 정신과 실천이 이 땅에 기적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기와 물과 땅과 나무와 그밖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오늘의 병든 물질 문명 의 시대에, 이 위기의 시대에, 생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가꾸는 숭고한 한 인간을 통해 오늘의 절망을 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편집자는 풀이한 다.
그러면, 대체 「나무를 심은 사람」그는 누구인가?
Ⅲ
장 지오노(JEAN GIONO)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은 알프스 산맥이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내린 해발 1,200-1,300미터의 고산 산악지대 황무지에 혼자 살면서 35년동안이나 계속 나무를 심어왔던 한 평범한 농부 「엘제아르 부피에」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뒤이어 아내마저 잃은 후에도 30여마리의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던 골짜기에는 원래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의 마을이 있었으나 과도한 벌목으 로 인해 숲이 사라지고 나무가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샘이 마르고 헐벗은, 죽은 마을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달리 해야할 중요한 일도 없었으므로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하고 떡갈나무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52세가 된 그는 자신의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 황무지에 홀로 생명의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오노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난 당시(1913년) 그는 3년동안에 이미 십만개의 도토리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십만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고, 들쥐나 산토끼들이 나무를 갉아 먹거나, 태풍의 피해를 입는다 해도 최소한 절반 가량인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신념」과 「노력」이 그 황무지를 변화시켰다. 그 후 지오노가 부피에를 만난 지 3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 동안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지나갔지만) 그 골짜기는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죽은 마을너머 멀리 회색빛 안개 같은 것이 융단처럼 산등성이를 덮고있는” 숲으로 되살아났다.
단 한사람의 「의로운 신념」과 「외로운 노력」으로 프로방스의 황무지가 거대한 생명의 숲으로 바뀐 기적같은 이야기 ― 한 늙은 양치기의 이야기가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Ⅳ
“마침내 그가 살고 있었던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공동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중략) 1913년에 보았 던 폐허의 땅 위에는 잘 단장된 아담하고 깨끗한 농가들이 들어서 있어 (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와 눈이 숲 속에 스며들어 옛날의 말라버린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로 물길을 만들었다.(중략) 마을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땅값이 비싼 평야지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젊음 과 활력과 모험정신을 가져다 주었고,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밝은 웃음을 터뜨리 며 시골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즐겁게 살아가게 된 뒤로 몰라보게 달라진 옛 주민들과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합쳐 1만명이 넘는 사람들 이 알제아르 부피에 덕분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장 지아노는 또 이렇게 그를 회고하며 기록했다.
“한 사람이 오직 육체적․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神)에게 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장 지아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의 시작이 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Ⅴ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 미국 잡지 「Reader's Digest」지에 처음 발표된 후 1954년 미국의 「Vogue」지에 의해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이 책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많은 지성인들 과 정책입안자들과 환경운동가들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지오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 으키면서 시청되어 왔는데, 세계적인 화가 「프레데릭 바크」가 그림을 그리고, 캐나다 국영방송(CBC)이 제작한 동명의 이 영화는 제60회 아카데미상에서 단편상을 받을만큼 유명한 작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환경보호운동, 지구 재녹화운동과 청소년들 의 정신(도덕)교육자료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무엇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는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와 같이, (농부인 자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고결하고 거룩한 생각을 품고 굽힘없이 목표를 추구해 나간다면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희망의 나무」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 것은 권력이나 부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공동의 선(善)을 위해 침묵속에서(고독속에)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숭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들 이며, 굽힘없이 선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었다.(편집자의 말 참조)
오! 이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 일인가!
Ⅵ
이제 엘제아르 부피에도 떠났고(1947년) 그를 기록했던 장 지아노도 갔지만(1970년) 우리에게 「희망」의 숲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와도 같은 자기 자신을 향한 반성과 결단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희망의 나무」를 심어야 겠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지아노는 본문에서 가르친다. 우리 한국사회 속에 이와 같은 창조적 생명의 역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각 분야와 각 계층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신바람이요 생수의 물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여정부의 각종 정책적 대안들이 이러한 개척적인 창조정신의 기반 위에 뿌리내리는 「희망의 나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그 나무들이 마침내 거대한 「생명의 숲」으로 자라나 한반도의 골짜기를 덮을 때, 그때 그 속에 생존해 있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며 거듭날 때, 그때 이 나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새시대의 금수강산이 되지 않겠는가?
신정부가 처음 맞이하는 이번 「식목일」행사가 바로 이와 같은 꿈과 희망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로 꽉 찼으면 좋겠다.
1970년대 이후 난개발의 악순환으로 매년 여의도 크기 20개 가량의 숲이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엄청난 산림훼손의 실태를 눈앞에 두고서, 이제 또 한번의 「식목일」을 맞는다.
현수막을 내걸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보란듯이」요란을 떠는 행사요원으로서의 근무태도가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외롭고 힘들지만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오늘 심는 이 한 그루의 도토리 같은 작은 나무가 내일의 국운을 떠받치는 동량의 목재로 자라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각 계층에서 열심히 수고하며 노력 하는 「엘제아르 부피에」와 같은 일꾼들의 「식목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런 선한 일꾼들을 찾아내고, 키워 주고, 도와드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숨은 일꾼들이 우리들의 생각보다 더 많이 실존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Ⅶ
1999년 10월, 미국 L.A.의 흑인폭동사태 때 희생당한 한국교민 「홍정복」아줌마의 미담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만하다.
미국으로 이민간지 15년동안 그는 「South Central」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자신이 가졌던 「소유와 소득」을 함께 나누며 살았던 아줌마다. L.A.흑인들로부터 「Mama」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당시 폭동사태 때 흑인들이 오히려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었던 아줌마다.
그런 아줌마가 불행하게도 Hispenic계의 강도로부터 총을 맞아 죽었을 때, 그때 비로소 미국의 언론과 시민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알고 대서특필하며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의 뜻을 보여주었다. 당시 52세였던, 한 이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는 미국의 각계 저명인사들과 지역사회 리더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미국이라는 다인종사회로부터 오는 갈등과 알력을 극복하는데 있어 「홍정복」아줌마가 보여준 「사랑과 희망의 나눔」은 미국의 양심을 새롭게 되살리고, 곤경에 처한 한국이민 사회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2,000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는 한국교민들이 세운 교회가 800개가 넘었고, 또 거기에 1,300여명의 목회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인기독교사회가 이룩해온 모든 노력의 결과보다 이 한 여인의 희생적인 「나눔의 실천」이 더 큰 역사를 이루었다는 고백을 나는 그때 LA에 살았던 한 목회자로 부터 직접 들어본 적이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민 100년사를 통하여 한인사회가 결코 얻어내지 못한 「미국으로부터의 인정」을 이름 없는 한 분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고결한 인격과 올바른 신앙을 기초로 한 진실된 이웃 사랑의 실천이 그것을 얻도록 이끌어 내준 셈이 되었다.
한 영혼의 위대한 승리는 이와 같이 「보란듯이」행하는 외식에 있지 않고, 숨겨져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그 속에 내재하는 강한 생명력의 확신을 갖고 꾸준히 「사랑과 희망의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통하여 달성된다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 위대한 신념을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가?
이와 같은 선한 일꾼들을「연우포럼」이 찾아내서 모델링을 하고, 격려하고, 협력하며 함께 동역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Ⅷ
벌써「4月」에 접어들었고 이제 며칠후면 「식목일」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불굴의 정신과 신념을 본받아 나의 인생이라는 산야에도 한그루 「희망의 나무」를 정성스럽게 심어보고 싶다. 또한 「참여문화」의 비전을 갖고 기경하는 우리 「연우포럼」의 대지에도 왕성한 식목의 작업이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칼럼」나무들이 심어지고, 그들이 자라나서 이루는 「連友」의 숲 속에 도란도란 「토론 문화」가 꽃피고, 메말랐던 샘에서 터져 나온 물길이 숲 속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나눔의 정신」으로 새로운 생명을 일깨우는 일이 왕성하게 생겨났으면 좋겠다.
우리 한국 사회를 위하여, 남북한 및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위하여, 나아가 세계 시민으로서의 우호적인 연대를 위하여 이「나무를 심은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을 본받아 우리도 이번 「식목일」에는 다시 한번 푸른 희망의 「나무를 심는 사람 들」이 다 되어보자.
장기전으로 치닫는 이라크전쟁과 「반전」여론의 소용돌이 속에 하루도 편할날이 없는 이 지구촌의 언덕에 「자유」와 「평화」의 꿈나무를 심어보자. 불의와 부패와 이기주의 가 판을 치는 물질만능시대의 동산에 「정의」와 「양선」과 「자비」의 꿈나무를 심어보자.
세상은 끝없이 변화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변하는 세상속에서도 결코 변치 않는 하나의 복음(?)이 있다. 그것은 이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 생명을 섭리하는 보이지 않는 힘(Unvisual Power)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통하여 드러나고,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달성되는 가치개념이다.
그것을 파악하고 기획하고 실천할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옛 철학자의 신앙고백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프로방스의 황무지가 거대한 생명의 숲으로 바뀐 기적 같은 이야기 ― 한 늙은 양치기의 전설같은 식목의 이야기를 「4月의 복음」 으로 믿고 묵묵히 실천하는「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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