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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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2] 85년,비닐하우스의 봄
2008년 12월 03일 11시 10분  조회:3611  추천:48  작성자: 이승률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프롤로그-2]

85년,비닐하우스의 봄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내가 동국대학 불교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75년 3월. 결혼을 하고 첫 아들까지 낳은 뒤였다.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조숙하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남들처럼 공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게 그리 시답지 않게 보였고, 그래서 극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는 가운데 연거푸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간 것은, 오랫동안 스스로 정상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아온 듯한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즈음, 뜻하지 않은 생활고를 겪게 됐다. 당시 차남 동헌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세들어 살던 갈현동의 집 주인이 사채를 값지 못해 집달리가 들이닥치는 통에 갓난 아이와 산후 몸조리도 채 하지 못한 아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것이다. 다급했던 나는 채권자와 협상을 해 그 집을 다시 450만원에 구입하기로 했다. 수리를 해서 팔면 8백만원은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돈을 빌려 집을 사들인 뒤,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인부들을 데리고 집을 수리했다.

그리고 목표했던 대로 집을 8백만원에 팔고 나니 빌린돈을 갚고 날릴 뻔한 전세금 100만원과 공사비를 제하고도 1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그 다음 해인 1978년에 강남 영동시장 앞에 12평짜리 사무실을 임대해 아내의 전공분야를 살려 회사를 차렸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반도환경개발의 전신인 반도조경 & 종합환경계획연구소였다. 사업분야가 내 전공(불교철학)과는 전혀 다른데다가 나는 공부를 마치면 교수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아내 혼자서 사업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한국전력, 현대건설 등에 근무하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경설계 및 시공관련 업무를 맡을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그렇게 발로 뛴 결과 개업 후 2년까지는 좀 고전을 했지만 3년째가 되던 해 평택화력발전소의 설계 및 시공에 턴키베이스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돼서 이후 국내 원전 및 각종 발전소 부지의 공원화계획을 우리 회사의 기술력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을 지금도 회사의 큰 실적과 보람으로 삼고 있다. 여하튼 그 일을 계기로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나는 시장경제의 돈 맛과 사업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3년간 아내는 주로 조경공사를 진행했고 나는 주택건설사업으로 영역확장을 시도하며 순탄하게 사업을 키워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짓기로 한 주택공사 현장을 점검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택시기사가 도로변에 있는 화단 분리대를 보지 못하고 들이받는 바람에 차가 순식간에 전복되는 대형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아내는 얼굴 전체를 80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수을 받았으며 나는 머리두피가 심하게 깨졌다. 3개월간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해있는 동안 나는 별여놓은 주택공사를 중단할 수가 없어 아내의 동창인 강남의 부동산 업자에게 일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그해 말 우리가 퇴원을 했을 때  현장공사는 도중하차 상태였고 인건비와 자재비는 고스란히 외상으로 남겨져있었으며, 그 여자는 종적을 감추고 난 뒤였다. 하루아침에 힘들게 발전소 공사를 해서 번 돈을 다 날리고 빚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아내와 나는 그 이듬해 봄 모든 것을 채권자들에게 내주고, 역삼동에 있는 빈 땅을 빌려서 지은 다섯평짜리 비닐하우스로 이사를 가야 했다. 도로변에 조경수를 심어 행인들의 눈에 비닐하우스가 띄지 않도록 가리고 전기와 상수도는 담장 너머에 있는 연립주택의 한 마음씨 좋은 주부의 도움으로 공급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부부와 세 살 난 딸 현주까지 세 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어린이날이 됐다. 아내는 봄철이라 한창 조경공사가 바빠 현장에 나갔고 나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으로 놀러나갔다. 뚝섬에 애들을 풀어놓고 노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그늘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며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강물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데, 무심히 그 물결을 보고 있던 나는 그 물결 위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며 흘러가는 게 아닌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에서도 싯달타가 젊은 시절,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수많은 얼굴들과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싯달타는 그것을 영겁의 흐름으로 윤회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현재의 내 참담한 상황을 생각하며 허탈하게 강물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한 얼굴이 희죽희죽 웃으며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는 15년 전에 자살한 내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온 몸이 떨리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갖고 있던 술병을 깨서 그 조각을 손목에 갖다 댔다. 죽고 싶었다. 손목을 긋고 그 손목을 흘러가는 강물에 담근 채 5분만 지나면 나는 조용히 이 모든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살충동!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자살충동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손목을 그으려고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병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찌를 수가 없었다. 맘 속에선 찌르고 모든 것을 끝내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그렇게 혼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딸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큰 아들이 달려오며 현주가 넘어졌어요 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딸아이에게로 달려가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나서 한참 뒤 마음을 진정한 후, 강가로 다시 돌아온 나는 깨진 병조각을 주워모아 부근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그 강가를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 아들 놈이 조금만 더 놀다오겠다고 보챘다. 그러라고 하고선 딸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갑자기 옆집 담장 쪽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듯한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난 도둑들이 들어왔나 싶어 빗장을 올려 밖을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놀러나갔던 두 아이가 담장을 넘어온 것이었다. 호통을 치며 까닭을 묻자 아이들이 시무룩해지며 이렇게 말했다. ‘앞쪽으로 들어오기가 싫어서요.......’

아이들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는 게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으면 담장을 타고 들락거렸을까. 두 아이는 마치 옆집 연립주택에 사는 아이들처럼 행세 하려 했던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공사장에서 돌아온 아내를 붙들고 밤새도록 울었다. 그 비닐하우스는 나의 현실적인 무능한 삶의 밑바닥이었다. 또한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부모와 친구를 비롯한 모든 지인들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오면서 지푸라기 잡듯 남몰래 지켜온 일말의 자존심마저 무참히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밑바닥에서 현실의 참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비애를 느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한가운데서 나는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내게 교회를 나가 하나님께 어려움을 의탁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존심과 철학적 의지를 상처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인내하며 살아오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신앙을 권해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업부터 살려야 할 것 아니냐고 버럭 화를 냈다. 교회 가는 건 막지 않을 테니 나에게도 강요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시켰다. 이후 오년간, 나의 완강한 태도로 우리 가족은 매년 연초부터 이산가족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내는 오랜 관습대로 기도로 한해를 시작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고 나는 그런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89년 연말, 나는 스키장으로 여행갈 준비로 바빴는데 세 아이가 내 방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올해는 스키장을 가지 말고 엄마와 함께 신년금식기도회를 가자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상황앞에서 나는 일단은 그러자고 대답을 해놓고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도 아닌 기도원을, 그것도 금식기도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래 한번 굶어보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1월 1일 새벽 일찍 가족들과 함께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 기대없이 기도원에 갔던 나는, 둘째날 오후 쉬는 시간에 어느 장로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 척박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내가 찾아 헤맸던 진리의 주체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나의 영혼을 구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불교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그토록 원했던 해탈의 찬란한 극점을 통과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100살의 나이에 눈이 멀고 나서야 심안이 열려 평생을 찾아오던 진리를 깨닫고 천상으로 인도되어진 파우스트처럼 “저 밑바닥에서 벽공으로”라는 외침을 토하면서 나는 거듭나는 부활의 기쁨을 깨닫게 되었고, 그 다음날 기도원을 내려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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