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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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글을 시작하며
2008년 07월 26일 20시 20분  조회:2750  추천:98  작성자: 곽승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꺼이 도울게. 무엇이 필요하니?”
그러나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조차 필요할 때 제대로 돕지 못합니다.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며 때로는 그가 원치도 않는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중에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아립니다. 산천은 우리의 그것과 다름없어 친근하고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처럼 다정한데도 왜 그럴까요. 그것은 연변과 조선족동포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탓인 듯합니다.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나와 일체화 시키면서 내 마음속에 가둬놓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 그들과의 인연에 갇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왜 이렇듯 연변과 조선족동포들과의 인연에 갇혀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연변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연민에 사무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요. 나의 이런 행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낱 짝사랑에 불과한 것일까요.

연변은 역사의 땅입니다. 그곳은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쳐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사의 우여곡절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고중세사는 물론 근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연변에 대한 그리움은 연변의 역사성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연변은 지독히 고독한 땅입니다. 한 때는 주인 없는 땅으로 내팽겨진 채 방치됐다가도 어느 때는 서로 주인임을 주장하는 주변 국가들의 틈새에서 아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우리와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오랜 인연을 맺고 있으면서도 시기마다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으며 지금도 그로 인한 다툼의 와중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와 맞닿아 있지만 남북으로 두 동강 난 반도의 어느 쪽과도 이어지지 못한 채 외롭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조선족은 슬픈 족속입니다. 그들은 지난 세월 우리 근현대사에 각인된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식민시대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냉전시대에는 이념의 한계에 갇혀 북한만을 조국으로 생각하였다가 탈냉전시대인 오늘에는 돈줄을 쫒아 남한을 향해 목을 길게 늘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쫒아 이쪽저쪽을 살피면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독한 탓일까요.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의 삶의 터전이면서도 그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으며, 조선족동포들 또한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만큼 마음을 잡지 못해 점점 중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골마을의 적막함은 연길시내의 화려함에 가려 있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힘 있고 여유로운 사람들 등 뒤에서 더욱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연변은 이제 백수십년동안 의지하고 살아온 삶의 터전이기 보다 그냥 어쩔 수 없어 움켜쥐고 있는 낡은 동아줄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연길시내의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는 한숨과 시름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연변과 조선족사회에는 세가지가 없었습니다. 발전을 위한 축적된 자본과 자원이 없고, 미래를 꿈꾸며 그것을 디자인할 사람이 없으며, 그래서 미래를 열어갈 비전도 없었습니다.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자리잡고 있는 연변은 개혁개방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인적 물적 자원이 빈약하여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조선족 동포 지식인들은 21세기의 도도한 역사가 빚어낼 변화의 물결에 맞서 연변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큰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스스로의 미래를 밝힐 비전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즐기며 사느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는 없고 단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만 있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은 조선족동포들에게도 고향의 푸근함에만 안주하게 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실리를 쫒아 해변을 따라 늘어선 개방도시로, 나아가서는 한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뛰쳐나가도록 등이 떠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동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기는커녕 소중히 간직해온 삶의 기본적인 가치마저 잃어버리고 체념의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국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아니라 한낱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킬 시장에 불과한 형이하학적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점점 모국에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연변을 그렇게 방치해도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가 어떻다는 등 고대 및 중세의 역사를 끌어들여 새삼 역사논쟁에 불을 붙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먼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연변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 온 삶의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변은 193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동포들의 마음의 고향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 절반에 가까운 동포들의 주된 삶의 터전이니까요.

더욱 중요한 것은, 연변이 남북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과 북을 함께 보듬어 안는 제3의 지대로 역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냉전의 세계사적 쾌거에도 불구하?우리민족은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슬픈 역사를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훈장처럼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려야 하나요. 이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우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야 합니다. 연변과 조선족동포는 우리가 남북분단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이며 매개자입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그런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통일이후에는 남북한 통합의 가교로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남북분단의 극복은 동북아시아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동북아시아시대는 궁극적으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국가와 민족이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소통의 시대를 지향합니다. 이른바 동북아시아공동체가 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연변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문화적 측면에서 이 지역의 미래를 위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한국과 중국을 두루 이해할 수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변과 조선족은 앞으로 도래할 동북아시아시대에, 동북아시아공동체가 추구될 시대에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발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변은 역사의 땅일 뿐 아니라 미래의 땅입니다. 연변은 단순히 현재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기회의 땅입니다. 당장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저개발의 낙후된 모습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지만 오히려 온갖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청정지역으로서 훗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연변은 또한 근현대 동북아시아 갈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갈등의 역사를 치유할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 약속의 땅이기도 합니다. 조선족동포들은 역사의 땅이자 미래의 땅인 연변의 가치를 현재화(顯在化)할 수 있는 중추적인 행위자들입니다.

희망은 고통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가 겪고 있는 고통은 희망을 낳기 위한 산통일 런지도 모릅니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산모라면 우리는 산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잉태하고 있는 희망을 순산하기 위해서는 산모인 그들보다도 산파인 우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연변은, 그리고 조선족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바램이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일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순산하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만 합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결코 엉뚱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연변의 산천도, 조선족 동포들의 때로는 냉소적이며 허풍스런 모습도 모두 사랑하려 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도 체험 속에서 나온 나름의 생존방식이기에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스스로를 연변과 조선족동포들과의 인연에 가둬두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현재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투영되어 있는 슬픈 역사와 함께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희망찬 미래를 가늠하며 재평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려 합니다.


                                                                    2007년 12월


                                                                     곽   승   지


*주: [...]부분은 편자가 삭제한 것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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