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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2008년 09월 11일 07시 07분  조회:3349  추천:66  작성자: 곽승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1. 동북아시아시대의 중심으로서 연변


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연변은 냉전체제하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변방에 위치해 주변국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그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재편시기마다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주변 국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근현대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변지역은 19세기 말 이후 주변 국가들 간의 갈등이 충돌하는 각축장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청나라의 봉금조치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로 남아있었지만 불과 수십년이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조선과 청나라는 물론 일본과 러시아까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함으로써 연변의 고단한 역사가 시작됐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시기 세계정치가 보여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즉 연변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를 평가하게 되면서 힘 있는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관계맺기를 시도한 것이다.

근현대사에서 주변 국가들이 연변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세동점의 시대상황 속에서 서양세력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제일 먼저 연변지역에 개입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1860년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지역을 할양받음으로써 이 지역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한 것이다. 부동항을 획득하기 위해 부단히 남진정책을 추진해 온 러시아가 중국이 쇠락해가는 틈을 타 흑룡강 이북 지역에 이어 연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차지함으로써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간 국경을 설정하게 됐다. 러시아는 이후에도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04-5년 러일전쟁도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함으로써 연변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을 양분하는 형태로 변했다.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독점적 위상이 약화되고 대신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대륙침략을 위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변지역은 주된 전장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부터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 간 내전에서 연변지역은 다시 성패를 좌우하는 격전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 러시아혁명을 통해 새로운 연방국가로 탄생한 소련도 과거 이 지역을 장악하려던 역사를 되새기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항복 직전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전후 동북아시아 지역의 질서 재편에 간여하는 가운데 연변지역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고 북한에 편입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2007년 6월 포스텍 박선영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1948년 7월 10일자 중화민국 외교문서 사본과 지도를 발굴․공개했다. ‘소련이 장차 길림성의 연길을 포함해 목단강․목릉 지역을 조선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제목의 보고서는 “소련대표는 장차 이 지구를 북한영토로 획정하려 한다”며 “이 지역은 현재 우리 영토 내에 있으나 북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데다 조선인들이 해당 지역의 지방행정을 주관하고 있어 실제 이 지역이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고 적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평양협정’을 언급하며 1948년 2월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 간에 체결한 이 협정에 따라 “장차 동북지역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획정해 주려한다”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안동(현재의 단동) 길림 간도 3개 자치구를 획정한 지도를 제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소련과 북한 및 중국의 공산세력이 1948년 무렵 연변지역을 한국의 영토 내지 특수관계가 있는 영역으로 인정하는 모종의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동아일보, 2007.6.27)

.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19세기 중반까지 간도지역은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따라 주인이 없는 땅으로 남아있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조선 역시 청나라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대체로 순응했다. 그러나 양국정부의 봉금정책에도 불구하고 간도지역에는 조선인들이 진출해 주로 인삼과 사금을 채집하는 한편으로 농사를 지었다. 당시의 농사는 정착단계까지는 가지 않고 봄의 해빙기에 강을 건너 평야를 태우고 파종을 하고,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돌아오는 이른바 춘경추귀(春耕秋歸)의 화전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0년대 말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두만강과 압록강 가까이에 살던 조선인들이 대거 강을 넘어 봉금지대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71년의 흉작 때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1,000호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선의 지방관은 조선의 간도개척을 사실상 묵인함으로써 간도로의 이주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청나라도 자국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면서 점차 봉금정책은 빛을 발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조정은 1881년 정식으로 봉금령을 해제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조선인을 백두산정계비에서 정한 토문강 아래로 쇄환할 것을 요구한다.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는 결국 백두산정계비의 적실성과 관련해 청나라와 조선 간에 국경문제를 재론케 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 여기서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나라가 봉금령을 통해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한 외형적 이유는 이곳이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아래 두만강 발원지 인근의 원지(圓池)가 바로 청나라 건국신화가 깃든 곳이다.

대체로 봉금령은 청나라 강희제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인 1658년경에 내려졌으며 강희제가 왕이 된 후 봉금지대가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봉금지대가 설정됐다는 주장도 있어 봉금령을 발한 시점은 분명치 않다.

계명대의 이성환교수는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한 것이 조선을 침략한 직후, 명나라를 공략하기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시점에 주목한다.(이성환, 2004) 즉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하는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선제공격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봉금지대를 “정치적으로는 양국 간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 또는 비무장 중립지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봉금지대가 지속된 것과 관련해서는 조선과 청나라가 공히 백두산을 건국의 상징으로 신성시 한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또는 건국의 상징으로서 두 나라에 의해 오랫동안 소속이 분명치 않은 상태로 방치된 부주지로서 일종의 중립지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당시에는 아직 국경을 선의 개념이 아니라 지대의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무주지 봉금지대가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봉금지대는 1881년 봉금령이 해제될 때 까지 2백년 여간 청나라와 조선의 경계를 이루는 비무장 중립지대로 역할했다. 오늘날 휴전선을 두고 남북으로 2km를 비무장지대로 두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조선과 청의 갈등
“대청국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아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하여 강이 나누어지는 고개 위 돌에 새겨 기록한다 (大淸烏喇總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錄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백두산정계비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천지 남동쪽 4km, 해발 2200m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위에 높이 72cm, 아랫부분 너비 55.5cm, 윗부분 너비 25cm의 크기로 세워졌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9월 28-29일 사이에 사라지고, 그 후 그 자리에는 대신 백두산 등산도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비석의 기록과 탁본, 사진 등이 남아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문제는 없다.

백두산정계비는 한중간 영토갈등의 중심에 있지만 이미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간에도 이 정계비 내용을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이 비문의 핵심은 세가지다. 비석을 세운 주체가 청나라의 오라총관 목극등 이라는 점,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한다는 점, 비석이 서있는 자리가 압록강과 토문강이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점 등이다. 즉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정해 이를 표시하기 위해 두 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정계비-토퇴․석퇴-토문강이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이며 그 이남은 조선의 영토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문에 적혀있는 토문에 대한 해석이다. 경계의 동쪽을 결정짓는 토문에 대해 한국은 정계비 부근에서 발원하여 만주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중국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재야학계에서는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하면서 한국의 국경선을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경계로 보려고 한다. 이 경우 한국의 영토는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함하게 되는데 연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이미 러시아에 할양됐다. 따라서 베이징조약은 청나라가 조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하며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베이징조약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가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도 있다.

.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갈등은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한 이후 본격화됐다. 봉금지대가 중립지대로서 조선과 청나라간의 사실상의 경계로 기능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곳에 이주한 조선인을 귀환조치하려 하면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봉금령 해제와 함께 두만강 북쪽지역에 살던 조선인을 귀환조치 하려는데 반발한 조선인 주민들이 직접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임을 밝혔다. 즉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은 토문강이며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방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정계비의 기록은 물론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두만강 이북과 이서지역, 즉 간도라고 불렀던 지역이 조선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이같은 사실을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보고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자격으로 이곳에 거주할 자격을 요청하였다. 조선관리들도 여러 차례 정계비와 분수령을 탐사하여 주민들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조선 조정은 도문강(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남의 중간지대는 조선 영토임을 청나라 조정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의가 있으면 다시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1885년 9월부터 2개월간에 걸쳐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 차례 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양국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회담에서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협상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양국은 이 지역에 대해 각기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청일전쟁일이 발발하고 청이 패배하여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면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서 청나라에 국경문제를 재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세변화에 따라 양국 간 회담이 개최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조선은 독자적으로 이범윤을 간도에 관리사로 파견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특히 이범윤은 조선인을 압박하는 청나라 관리와 군인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대적인 이민사업을 주도함으로써 간도 영유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간도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간의 영토갈등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미 19세기 말 이후 중국대륙 진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함에 따라 간도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05년 고종을 협박하여 맺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듬해 5월 만주문제협의회를 열어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 북부를 러시아의 세력범위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장춘 이남을 일본의 세력범위로 승인할 것”임을 언급, 간도를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정하고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시도했다. 일본의 이러한 속내는 1907년 7월 일본과 러시아간의 이른바 러‧일밀약으로 이어졌다. 결국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문제를 넘어 일본의 만주침략을 위한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과 청나라간의 국경문제를 조사하고 역사 지리 법률적 검토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권은 미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청나라의 간도영유권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이 지역을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간도지역의 영유권문제에 집착한 이유는 이 지역이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위한 요충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조선통감부는 “만약 간도를 점령하지 못하면 조선의 회령을 방어하지 못하게 될 것” 이라면서 “북부 조선에서 길림으로 진출하려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고종 명의로 중국인보다 4배나 많은 5만세대의 조선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청나라에 압력을 넣고 이를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1907년 8월 일본군을 용정촌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간도의 영토 소속문제는 미해결된 현안이다” “조선정부의 대외관계는 일본정부에 귀속되었으므로 통감부 관원이 간도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구실로 용정에 조선통감부 간도 임시 파출소를 설치했다.

임시 파출소의 주요 업무는 간도 영유권문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간도파출소는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을 답사하는 것은 물론 이와 관련된 사안들을 조사하고 관련된 인사들을 만나는 등 집중적인 조사를 펼쳐 <간도 경계문제에 관한 전말 및 의견>을 펴내고 이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제출했다. 이 조사의 결론은 간도가 조선영토이므로 청나라는 간도를 관할할 수 없고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조선인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나라 관헌이 발행하는 간도에 관한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같은 시기 청나라 역시 일본의 주장에 반발하며 이 지역이 청나라 영토임을 주장했다.

이 지역의 영유권과 관련한 일본과 청나라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의외로 쉽게 결말이 났다. 일본은 청나라에 대륙철도 건설권과 주요 지역의 탄광 채굴권 등 6개 안건을 제시하며 이에 대한 편의를 제공한다면 청나라의 간도영유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 일본이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나라는 각각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과 청나라 대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만나 간도에 대한 청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협약/ 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체결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일본이 대륙침략을 도모하기 위해 연변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이용한 결과인 셈이다.

. 북한-중국 간 국경조약
일제가 항복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반도와 중국을 나누는 경계는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지배되었다. 협약 체결 주체가 없어짐에 따라 실제로는 그 효력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선에서 묵시적 타협을 한 채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 간 국경문제가 구체화되어 효력이 발효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다. 1962년 10월 12일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평양에서 만나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의 검토과정을 거쳐 1964년 3월 20일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공식 발효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1999년 말에 이르러서야 확인됐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총 5조로 되어 있는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연합뉴스, 1999.10.20/ 중앙일보, 2000.10.16) 이 조약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 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의 산마루인 26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북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조중변계조약 체결로, 일본과 청나라가 백두산 동남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발 2200m)하고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영토를 획정함에 따라 백두산일대와 천지가 한반도에서 분리됐었으나, 백두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천지 수면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키로 합의, 천지 안에서는 양측이 모두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조약은 또 백두산,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섬 및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백두산에는 압록강 최상류지역에서부터 천지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표지비를 설치해 놓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북한이 2백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고 있다.

북한과 중국 간에 국경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백두산주변의 국경문제는 정리됐고 현재까지 현상황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글싣는 순서
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
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 자연지리적 환경
- 사회문화적 환경
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 북․중 간 국경조약
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
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
0. 한민족의 연변이주
-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
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 북한변화의 촉매자
- 남북관계의 매개자
- 한중협력의 중재자
-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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