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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연변리프트-주석
1. P.10 첫문단
지정학(地政學/ geopolitics)의 의미변화
지정학이란 일반적으로 지리적 조건이 국제정치 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근현대 국제정치 질서 하에서 지정학은 국가중심의 관점에서 정치와 지리의 결합에 따른 ‘공간의 정치학’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탈냉전적 국제질서가 형성되면서 지리중심의 새로운 관점에서 지정학의 가치가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지정학은 국가차원에서만 적용하던 공간을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s) 다국적기업, 테러단체 등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하고 구조와 행위자 간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정학은 국가주의적이고 구조결정론적인 데서 벗어나 비판적이고 구성주의적인 것으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최근 지리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지리적 관계가 정치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지정학은 물론 지리와 다른 분야를 결합한 지경학 및 지문화 등으로 그 관심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2. P.12 연변에 대한 연민 첫 문단
한반도 국제질서의 이중구조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대통령은 1989년 12월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서 만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양국을 축으로 하여 시작된 냉전체제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도미노현상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로써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자유민주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나뉘어 반목․대립하던 냉전적 세계질서는 공식적으로 탈냉전체제로 전환됐다.
이제 지구상에는 불과 4-5개의 사회주의국가만이 존재하며 이들 중 북한을 제외한 나라들은 모두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있다. 북한을 재외하면 세계는 사실상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로 재편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질서 하에서 한국은 과거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한데 이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 역시 미국 및 일본과도 수교를 추진하는 등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적어도 한반도 밖의 상황은 탈냉전적 새로운 세계질서가 유지되고 있으며 남북한 공히 그러한 상황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안의 상황은 냉전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북한의 변화지체로 남북한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며 대립하고 있다. 한반도는, 반도 밖에서는 탈냉전적 새로운 질서가 작동하고 있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냉전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이중구조 속에 있다.
3. P.12 연변에 대한 연민 두 번째 문단
한(韓)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
디아스포라는 오늘날 하나의 민족이 어떤 민족(혹은 나라)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발적 이주가 아니라 외압에 의한 비자발적 이주를 일컫는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분산 혹은 이산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헬레니즘시대 및 초기 그리스도교시대를 통해 유대민족이 겪은 이산의 아픔을 담고 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20세기 초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1800년대 중엽 한반도에서의 극심한 기근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한 사람들의 경우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범주에 포함된다.
4. P.12 연변에 대한 연민 세 번째 문단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 비동양인,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동양을 인식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대체로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부정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미국영화에서 동양사람들은 범죄자나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한 유형이다. 최근 한국인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주변을 경시하려는 경향에 대해 이른바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제기되고 있다.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고정되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사회에도 다른 문화, 다른 사회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데 대한 자기반성의 표현이다. 그러한 현상은 최근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조선족이나 북한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 P.19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국제질서를 보는 3가지 시각
세계정치사에 존재했던 정치체제는 세계제국체제(world imperial system), 봉건체제, 무정부국가체제(anarchic state system) 등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이 세 가지 중 무정부국가체제라는 전제위에서 인식되어져 왔다.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이들이 영토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중시하게 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그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절의 역사가 구체화된 것이다.
국제정치를 무정부국가체제, 즉 자연상태로 인식함에 따라 이를 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던 토마스 홉스와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로 인식했던 존 로크가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며 약육강식의 상태로 인식했던 홉스는 국제정치를 보는 현실주의적 시각을 낳았다. 자연상태에서 공동의 주권자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로크는 자유주의적 시각을 이끌었다.
현실주의적 시각은 20세기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지배적 전통이 되었는데 국가를 주요 행위자로 하고 전쟁과 무력의 사용에 초점을 맞춘다. 자유주의적 시각은 국가와 함께 작동하는 지구적 사회와 국가의 역할을 분리하여 인식한다. 국제기구의 역할이나 국가 간 인적 물적 교류 등을 통해 국제질서가 완전한 무정부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가 간 상호의존과 초국가적 국제사회의 발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주의 시각은 연속성을 강조하는 반면 자유주의 시각은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 가지 시각에 더해 최근 구성주의라는 새로운 시각이 주목받고 있다. 이 시각은 앞의 두 시각이 국제정치의 장기적인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국제질서를 바라본다. 왜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아이디어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국가 주권 등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국가는 물론 부족 비정부기구 등에 주목한다.
6. P.20, 첫문단
연성권력(soft power)
미국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Jr.) 교수가 1990년 만들어낸 권력 개념의 하나. 경제력‧군사력‧인구‧과학기술 등 물적 자원의 총합으로 기존의 권력개념을 지배해온 경성권력(hard power)에 대한 대척 개념으로 제시됐다.
권력이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경성권력의 측면에서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 통상 채찍(물리력)과 당근(경제적 보상)이 이용된다. 그러나 연성권력은 이들과 다른 제3의 권력 행태로서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즉 물리력이나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보편적 문화‧가치‧아이디어와 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매력적인 그 무엇이다.
연성권력은 문화적 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점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게 된다. 나이교수는, 한국의 사회문화적 잠재력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매력은 21세기의 새로운 상황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게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7. P.22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
레고문화 및 유목문화
덴마크 목수가 만든 세계적인 어린이 완구업체인 레고에서 차용한 용어. 개개의 조각을 짜 맞추어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레고와 같이 개개인이 취향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선택해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여 향유하는 새로운 문화유형을 일컫는다.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한 것으로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유목문화 역시 유목인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물이나 목초지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문화현상에서 차용한 용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원하는 것을 찾아 자유롭게 옮겨 다닌다는 점에서 오늘날 신세대들의 자유분방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레고문화와 일맥상통한다.
레고문화와 유목문화 모두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상황이 가져온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이다. 자크 아탈리는 이러한 문화현상을 단절을 넘어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려는 인간 욕구의 발현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체현자로서 노마드(유목민)의 존재에 주목한다. 그는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로 규정한다.
8. P.23 동북아시아의 개념
- 그래픽 A = 동북아협력공간
- 동북아시대위원회, 2006.4.28
9. P.33,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간도 유래와 범위
간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간도(間島) 간도(墾島), 간토(墾土) 등의 표현도 다양한 설과 관련있다. 두만강 상 사이섬(間島)이 간도의 유래와 관련해 가장 널리 회자된다. 북한의 함경북도 종성과 온성 사이에 분파되어 흐르는 두만강 중간에 매우 비옥한 삼각주가 있었다. 1800년대 중엽이후 부근 주민들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강 사이에 있다고 하여 간도라 불렀다. 이후 함경도지역 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봉금지대로 까지 개간지역을 확대했는데 이 지역을 모두 간도로 불렀다. 즉 두만강 상의 작은 삼각주에서 시작됐지만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에 개간한 모든 땅을 통칭해 간도라 불렀다.
따라서 간도의 범위는 두만강은 물론 압록강 너머 지역과 송화강까지의 광범한 지역을 포함한다. 논자에 따라서는 산해관 이동에서 북쪽으로는 유조변책을 따라 길림 북쪽의 송화강선으로 이어져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간도의 범위가 이와 같이 확장됨에 따라 지역을 나누어 서간도 북간도 동간도로 불렀다. 통상 백두산을 기준으로 하여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누고 북간도는 다시 북간도와 동간도로 나누었다. 서간도는 압록강 이북지역을 가리키고 북간도는 두만강 이북의 흑룡강성까지를 포함한다. 동간도는 북간도의 동북지역을 가리킨다.
10. P. 33
- 사진 = 사잇섬
11. P.33 연변의 유래와 범위
- 그래픽 B = 간도지역 위치도
- 간도찾기운동본부 (www.gando.or.kr) 인용
12. P.33 연변의 유래와 범위
연변조선족자치주 약사
- 1945.8 중국공산당, 연변에 간도성정부 명칭의 인민정권 수립
- 1945.11 인민정권을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로 개칭
- 1948.3 연변전원공서 설립
- 1952.9.3 연변전원공서를 페지하고 연변조선족자치구 설립
- 1955.12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편 (1시5현)
- 1958 돈화현 편입
- 1965 도문시 편입
- 1985년, 1987년, 1993년에 돈화 용정 훈춘 화룡을 현에서 시로 승격
13. P.34 자연지리적 환경
- 그래픽 C = 연변조선족자치주 현황
- 동북아연구회 카페
14. P.37 봉금정책과 봉금지대
- 사진 = 원지
15. P. 37 백두산정계비의진실
- 사진 = 백두산정계비
16. P.40 북중국경조약
- 사진 = 백두산 21경계석
17. P.41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만주의 지역적 범위 및 구분
만주의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대체로 현재의 중국 동북3성 지역을 뜻하지만 하북성 북쪽지역을 역사적 만주지역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이 지역은 일본의 만주사변으로 수립된 만주국 영토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와 함께 흑룡강(아무르강)과 우수리강 동북쪽 지역을 러시아령 만주(외만주)로 칭하기도 한다. 러시아령만주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에 의해 청나라에 귀속됐으나 1858년 아이훈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할양됐다. 고지도에는 사할린과 인근섬도 만주의 일부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만주국의 범주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정부와의 내전과정에서 동만주, 남만주, 북만주로 나누어 부르면서 만주지역에 대한 명칭이 세분화됐다. 통상 동만주는 북간도지역을 지칭하는데 현재의 연변지역이다. 남만주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현재의 요녕성과 길림성 동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북만주는 길림․창춘과 흑룡강성 지역을 지칭한다. 중국공산당은 1935년 말 만주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침을 구체화하면서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그때까지 지역 사회주의운동을 지도해왔던 만주성위원회를 없애고 대신 만주지역을 4곳의 유격구역으로 나누었다. 동만주 남만주 북만주 길동지방의 성위원회와 유격대 사령부를 결성한 것이다.
18. P.41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 그래픽 D = 만주지역 위치도
- 동북아역사재단,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 p. 28
19. P.42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
- 도표 = 북한․중국 간 국경지역 주요 출입구 현황
- 홍익표, p. 206 표8 참조
20. P. 43 단동-신의주간 철로
- 사진 = 압록강철교
- 북한쪽에서 중국 단동을 향해 다가오는 기차
21. P. 45 광복 후 정착한 조선인들
광복 당시 중국거주 조선인 수
해방 직후 중국 및 연변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정확치 않다. 통계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항복하기 전 만주국의 인구조사와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의 통계자료 등이 당시의 인구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기술된 문헌에 따르면 해방 당시 중국동북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약 2백16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인구 2천5백만 명의 1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이중 절반 가까운 조선인이 일제가 항복한 이후 한반도로 돌아갔다. 그 결과 1940년대 말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대략 1백11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일부 문헌은 해방 당시 중국 내 조선인 수를 1백60만 내지 1백70만 명 정도로 추산하기도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에 따르면 1949년 자치주 전체인구는 83만5천2백78명이며 이중 조선족(인)은 52만9천2백58명이었다.
22. P. 51 연변의 경제현실
- 사진 = 연변야경 등
- 검색
23. P.55 주민생활 수준
- 사진 = 조선족 생활상
- 검색
24. P. 58 관광 소비향락 산업
- 사진 = 관광산업 실태
- 검색
25. P. 59 인구감소 문제
연변 및 조선족 인구 통계
연변 및 조선족 인구에 대한 기술은 제각각이다. 관련된 몇 가지 통계자료가 있지만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인구통계가 호구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실제 거주 여부가 아니라 기록상 거주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탓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연변 및 조선족 인구에 대한 기술은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을 기준으로 하고 다른 통계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듯하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변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판 자치주 통계연감에 따르면 2005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인구는 2백17만5천명이며 이중 조선족은 81만6천명이다. 조선족 비율은 전체 인구의 37.5%이다. 그러나 길림성 인구 및 계획생육심사조가 조사한 한 통계는 2007년 9월 현재 조선족자치주 인구를 2백23만3천1백44명으로, 조선족 인구를 전체인구의 36.75%인 82만6백92명으로 발표했다. 중국 내 조선족 전체인구는 55개 소수민족 중 12번째로 많은 1백92만5백97명이다.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통계 자료가 제시한 것이다.
26. P. 60 조선족인구 문제
해외거주 조선족 수
2007년 말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외에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 약 10만 여명이 살고 있다. 40만 명 이상의 조선족동포들이 해외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중국 내에서의 이동이 급증하여 연변 등 조선족 집거지역에서 연해도시로 이주한 조선족 수는 대략 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체 조선족의 45% 이상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27. P. 65 재외동포정책 추진과정
재외동포 구성 및 개념
재외동포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민족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한국 국적이나 거주국 영주권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해외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사람은 모두 해당된다.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재외동포는 재외국민과 외국국적동포로 나누어진다.
재외국민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으로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자 또는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말한다. 한국 국적을 소지하고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은 물론 영주권을 취득하려고 준비하는 장기 체류자들이 포함된다. 영주권을 취득할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학생이나 사업가 등 단기 체류자들도 넓은 의미의 재외국민에 해당된다. 재외국민은 헌법 제2조 2항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외국국적 동포는 한국국적을 보유하지는 않았지만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범위는 부모는 물론 조부모 중 어느 한쪽이 한국국적을 가진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해당된다. 이들은 국적 소지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헌법상 보호를 받지는 못하며 대신 재외동포법의 적용을 받는다.
28. P.66 재외동포정책의 내용과 특징
재외동포 관련 규정 변천사
- 1999.8.12 재외동포법 국회 통과
- 1999.8.23 재외동포법에 대한 헌법 소원 제기
- 2001.11.29 헌법재판소, 재외동포법 헌법불일치 판결
- 2002.3.12 불법체류자 종합방지대책 발표;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기간(2002.3.25 - 5.29) 내에 신고한 사람에게 2003년 3월 31일까지 출국 유예 (전체 불법체류자 27만6천 여명 중 93%인 25만6천 여명이 자진 신고하고, 8천78명이 자진 출국. 이중 중국국적자 15만1천 여명이 신고했는데 조선족동포가 10만명을 넘었다)
- 2003년 초 불법체류 외국인중 체류기간이 3년 미만인자에 한해 출국기한을 2004년 3월 30일까지로 연장
- 2003.5.10 취업관리제 도입; 중국동포에 대한 고국방문 및 취업기회 확대 조치
- 2003.8.17 외국인고융허가제 국회 통과
- 2004.9 외국인고용허가제 본격 실시
- 2005.3.15 법무부 제1차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 실시
- 2005.11.9 노무현대통령 방문취업제 적극 검토 지시
- 2006년 법무부 제2차 동포 귀국지원프로그램 실시
- 2007.3.12 방문취업제 실시
29. P.66 재외동포정책
국내거주 외국인 수
2007년 5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주민등록상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72만2천686명이다. 2006년 53만6천627명보다 35%나 증가한 것이다. 2007년 10월 외교통상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국내거주 외국인은 이미 1백만명을 넘었다.
주민등록상 국내거주 외국인을 유형별로 보면 근로자가 35.9%인 (25만9천805명)로 가장 많고 국제결혼이주자 12.2%(8만7천964명), 국제결혼가정 자녀 6.1%(4만4천258명) 등이다. 특히 외국인중 국적취득자는 전체의 7.5%인 5만4천51명에 이른다.
이와 같이 외국인주민이 크게 늘어난 것은 각 지방자치단체의 국제결혼 지원 등에 따른 국제결혼이주자, 외국인 유학생과 상사주재원 등이 급격히 증가한데 따른 것이다. 외국인근로자는 남성이 70.7%인 반면, 국제결혼이주자는 여성이 86%를 차지해 대조를 이뤘다.
국적별로 보면, 중국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52.4%로 가장 많고 동남아국가 23.7%, 미국 3.4%, 일본 3.3%, 대만 2.9% 등 순으로 중국과 동남아국가의 비중이 늘어난 반면 기타 국가의 비중은 낮아졌다.
30. P.66 재외동포정책
- 그래픽 E = 외국국적동포 현황
- 외교통상부
31. P. 69
모국과 조국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한국(남한과 북한)은 모국이고, 중국은 조국이다. 조국은 또 고국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사람들에게는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이 단어들이 조선족에게는 각각 분리되어 특별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조선족동포들은 흔히 자신을 며느리에 비유하며 중국을 시집으로, 한국을 친정으로 묘사한다. 남북한 관계에서도 북한이 본래의 친정이라면 남한은 집나간 친정아버지가 부자가 되어 돌아온 상황으로 묘사한다. 정서적으로 볼 때 북한이 더 친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국과 모국이라는 말의 연원은 공맹시대로 올라간다. 오랜 세월 여러 나라를 떠돌던 공자가 고향인 노나라를 떠날 때 특별히 느리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맹자가 훗날 그 까닭에 대해 “부모국을 떠나가는 걸음이기 때문 (是去父母國之道也)” 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서양에서도 조국이라는 말은 이미 그리스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다.
32. P. 80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나
한국전 참전 조선족 수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의 전체 규모는 대략 10만명에 이른다. 독립투사 김동삼선생의 손자이며 직접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김중생씨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 개전 이전 북한의 주력부대에는 이미 6만5천 여명의 조선족 동포들이 포함되어있었다. 항일투쟁과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쌓은 전투경험을 활용하기 위한 북한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북한인민군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하얼빈 연길 목단강 등 조선족 집거지역에서 이들을 상대로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모병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입대한 사람도 1만 여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한국전쟁기간 중국은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에 보냈는데 이들은 모두 한족이었기 때문에 조선족 통역요원을 동행토록 했다. 이때 동행한 통역요원이 무려 2만5천명에 이른다.
일러두기
1. 중국의 조선족동포를 지칭하는 표기는 ‘조선족’으로 통일하였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중국 소수민족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에서는 민족적 동질성을 염두에 두고 재중동포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중국동포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고 이미 그들의 삶에 깊이 용해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선족이라는 용어를 일관되게 사용했다. 조선족 명칭이 사용되기 전 중국에 거주한 한민족에 대해서는 당연히 ‘조선인’으로 표기했다.
2. 연변지역과 조선족의 지명과 이름은 원칙적으로 한국어 표기법을 택했다. 조선족동포는 물론 한국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중국어 표기방식의 부적절성이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친숙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유용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다른 지역 지명도 가능한 중국어 표기방식을 지양했다. 다만 조선족이 아닌 중국사람의 경우 중국어 표기방식을 택했다.
3. 연변 및 조선족과 관련된 통계는 가능한 2006년판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을 활용했다. 앞서 출판된 저술들마다 이에 대한 수치가 제각각이어서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었다는 점을 의식, 일관된 통계수치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보다 최신 정보가 필요할 경우 수치와 함께 출처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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