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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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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년 자연재해” 재론
2012년 06월 20일 10시 45분  조회:3976  추천:3  작성자: 리명근

      1860년 조선반도에 유사이래 보기 드문 대수재가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에도 계속되다가 1869년과 1870년에 또다시 흉년이 발생하여 전무한 대기근이 닥치였다. 하여 19세기 60년대후 압록강북안과 두만강북안은 살길을 찾아 월강하여 괴나리보짐을 푸는 조선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당지의 황무지를 개간, 경작하면서 나중에 점차 정착이민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길림성의 면적(18.74만km2)을 조금 넘긴 섬나라나 다름없는 조선반도(약 22.22만km2)이기에 수년동안 련이어 자연재해가 닥치였다고 해도 이를 두고 의심하는 사람은 오늘도 없다.
      하지만 총면적이 960만평방킬로메터여서 세계륙지면적의 15분의 1, 아세아륙지면적의 4분의 1이나 되여 유럽의 면적과 비슷한 우리 나라가 지난 세기 5,60년대에 련속 3년동안 자연재해를 입었다는 력사에 대해서는 오늘날 반신반의하지 않을수 없다. 황차 우리 나라는 동서의 거리가 5,200km, 동서로 경도 60°를 차지하고 동서로 5개 시구(时区) 즉 동5시구—동9시구 사이에 위치하여있기에 동서 두 끝의 지방시간의 상차는 4시간도 넘는다. 또한 남북의 거리는 5,500km로서 위도 근 50°나 점하고있을뿐만아니라 남북의 태양고도각의 차이가 매우 크므로 낮과 밤의 길이도 같지 않거니와 겨울철 남북의 기온차도 50℃를 넘기고있다. 이처럼 국토가 넓고 지역마다 각이하고 복잡한 자연지리조건을 갖고있는 우리 나라인만큼 국부적지역의 “3년자연재해”는 받아들일수 있는 결론이지만 온 나라의 농촌 곳곳에서 련속 3년동안 쭉정이만 거두어들일 정도로 자연재해를 심하게 입은 흉년이였다는 결론은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1959년~1961년을 두고 우리는 “3년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곤난시기”라고 칭하고있는데 항간에서는 “대식품시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3년자연재해시기”의 비정상적사망자의 수효를 두고 상세하게 공포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적으로는 2,000만이 숨졌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국외적으로는 지어 4,000~5,000만명이 기사하였는 견해도 있다.《중국통계년감》(1983년)에 따르면 1959년~1961년사이에 식량부족으로 비정상적사망률이 전국인구의 18.08‰를 점하였는데 그중 1960년에는 25.43‰나 치달아올랐다고 한다. 우리 나라 해방전쟁시기인 1949년에도 20‰밖에 되지 않았으니 “3년자연재해시기” 대기근의 참상을 여실하게 볼수가 있다. 여죽하였으면 당시 하남성을 돌아보고난 리선념은 굶어죽은 사람이 전쟁판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고 통심까지 하였을가.
       그런데 좀 놀라운 일이라면 기아에 허덕이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숨진것은 결코 낟알 구경조차 못해서 아니라 우리의 순박한 농민들이 식량 대부분을 나라에 징구량으로 바쳤기때문이라는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당시 하남성 신양지위(信阳地委) 부서기이며 행서전원이였던 장수번(张树藩)은 그때를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신양지구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것은 해마다 흉작이 들어서가 아닙니다. 그때 크고 작은 량식창고마다 알곡이 차넘치였지만 농민들은 굶을지언정 량식창고 하나도 털지 않았었습니다.”
       3년동안 기아에 허덕인 원인을 두고 관방측에서는 선후로 여러가지 해석을 했는데 초기에는 곧바로 전대미문의 지속적인 “자연재해”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에 있은 “7천명대회(중앙사업회의확대회의)”에서 류소기동지는 그 원인을 두고 “7할의 인적재화, 3할의 자연재해”라는 실사구시적인 평판을 한적이 있었다.
       마침 1981년에 열렸던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6차전원회에서 채택된 “건국이래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3년대기근의 원인을 두고 “주로는 ‘대약진’운동과 ‘반우경’투쟁의 오유로 말미암아, 그리고 당시에 자연재해가 들고 쏘련정부가 배신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였기때문에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에 우리의 국민경제는 엄중한 곤난에 봉착하였으며 나라와 인민이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공정하게 지적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3년대기근이 주요하게 자연재해에 의해 초래된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고 “3년자연재해”를 재론할수 있게 되였다.
      국내의 이름난 기상수문과학자들이 전국의 120개소의 수문관측소 력대수문자료(1895~1979)에 기초하여 작성한 “전국각지력대한로등급자료표(全国各地历年旱涝等级资料表)”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기타 어느 재해년 또는 평년과 비교할지라도 1959년~1961년 ‘3년재해시기’의 전국의 기후는 ‘천공작미(天公作美)’의 정도로 좋아서 농사에 매우 알맞춤한 기후였다…”
        ……
     
       자연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도록 수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인자한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부터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생활에 유조하기만 하면 자연을 길들이고 개조하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것도 성차지 않아서 전례없는 기근이 주요하게 인위적으로 초래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이란 “자애로운 어머니”한테 “3년자연재해”라는 “정치적감투”까지 억지로 들씌웠으니 우리 모두가 자괴감을 가지고 깊이 반성할바라고 심심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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