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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을 맞이하는 요즈음 경건한 마음으로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토비숙청, 주구청산, 참군참전, 전선원호, 토지개혁의 제1선에서 주력군으로 활약하면서 동북해방전쟁 나아가서는 전국 해방전쟁의 력사적 승리를 이룩하는 데 뛰여난 기여를 한 조선족인민들의 업적을 돌이켜보노라면 그 감회가 새삼스럽다.
우리 민족은 14년간의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의 행정 속에서도 줄곧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불요불굴의 정신과 분진하는 민족적 기개를 떨치면서 력사에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한페지를 남기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항전의 승리로 하여 국내의 계급관계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즉 중국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인민대중과 대지주, 대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국민당과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상승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보위하면서 평화롭고 민주주의적이며 광명한 새 중국을 건립하려고 한 반면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찬탈하고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리익을 대표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1945년 당시 동북의 조선족은 약 230만명에 달하였는데 주로 동만, 북만, 남만 등지에 크고 작은 집거구를 형성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국민당군의 ‘선견대’는 연변 5개 현의 지주, 토호, 자본가, 관료 등을 중심으로 국민당조직을 세웠는데 연길에는 국민당 길림성당무 판사처와 국민당 연길현당부 등이 설치되였고 각지에서는 토호, 특무,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치안유지회’가 조직되였다. 길림시에는 괴뢰만주국시기 조선인민회 회장이였던 리대성 등이 국민당 리종대 등과 결탁하여 길림시조선인회를 건립하고 조선족들은 국민당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복 후 할빈에서는 국민당에 투신한 권영조 등 소수의 사람들이 ‘국민당지방공작자’요, ‘국민당선견대’요 하고 자칭하면서 국민당정부의 할빈시 접수요원과 중앙군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조선족들이 비교적 집결되여있던 목단강에는 고려인협회가 나와 협해한 민족주의사상을 선전하였고 남만지역에서도 조선인회가 조선족사회의 일반사무를 장악하고 국민당을 따르도록 조선족들을 선동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있는 민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단체와 조선의용군 그리고 후에 동북행정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설립된 연변전원공서는 조선족집거구의 특수상황에 비추어 많은 지방간부들을 기층에 파견하여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해방과 발전권리를 보장하고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을 존중한다.”는 우리 당의 민족정책을 널리 선전하고 참답게 시행하는 데 모를 박았다. 할빈, 목단강과 통화 지역의 조선족인민들 속에 심입한 조선족로간부 주덕해, 방호산 등은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당의 기층조직과 각급 민주동맹 혹은 민주련맹, 조선독립동맹 등을 조직하여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을 중국공산당의 두리에 단합시켰다. 이에 대비하여 당시 국민당특파원들은 국민당을 따르도록 농민들을 강요, 선동하는가 하면 이른바 ‘정통’관념에 빠진 기타 민족들의 심리를 리용하여 민족관계를 도발하고 사건을 조작하며 민심을 교란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혼란한 사회상황에서도 우리 조선족인민은 당과 지방정부의 령도하에 협애한 민족주의자들과 날카롭게 맞서 투쟁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을 통하여 평화를 거부하고 전면적 내전을 시도하는 국민당의 음모를 남김없이 폭로, 비판하였다.
이때로부터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결히 옹호하고 공산당을 따라 국민당정부를 뒤엎는 투쟁에 앞장서 싸우며 자기의 피와 목숨으로 동북근거지를 창설, 보위하기 위하여 최대의 민족적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자기의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3성에서 조선족청장년 6만 2942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해방구 조선족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였다. 원 송강성에서는 1만 2600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고 원 료동성에서는 8753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다. 연변 5개 현에서는 3만 4855명의 조선족이 참군하였는데 연변지역 참군 총인수의 85%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동북해방전쟁의 장춘포위전, 사평해방전투, 황화산-철령 요격전, 금주성공략전, 흑산-대호산 저격전, 심양해방전투 등 주요 전투와 전역에서 민족의 기개와 영예를 떨쳤는가 하면 전국 해방단계의 평진전역, 장강도하작전, 의창-사시 전역, 대용-상식 전투,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상륙전, 상서토비숙청전 등에서도 영용완강하게 싸우면서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해 불후의 군공을 세웠다. 전방의 자제병들이 영용히 싸워 군공을 세웠는가 하면 후방의 조선족인민들도 전선을 지원하는 일에 떨쳐나섰다. 조선족집거구에서는 ‘부모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안해가 남편을 전선에 보내며 형제들이 앞을 다투어 참군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였다. 심지어 부자간과 부부간이 함께 참군하고 갓 결혼한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내는 감동적인 일도 많았었다. 연길시제2중학교 2개 초중졸업반의 91명 학생들이 몽땅 참군하였고 송강성 오상현 민락촌의 조선족 403세대 가운데서 260명이 참군하였으며 녕안현 서안촌의 조선족 300세대 가운데서 124명이 참군하였고 해룡현에서는 2525세대의 조선족 가운데서 760명이 참군하였으며 심양교외인 영수태의 20여세대의 조선족 가운데서 14명의 청년이 참군하였다…
지난 해방전쟁시기에 이룩한 우리 조선족인민들의 불멸의 업적과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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