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은 로혁명근거지로서 풍부한 홍색관광자원을 갖고있다. 홍색자원의 보호, 발굴, 개발, 리용은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발전에 갈수록 중요한 영향을 일으키고있다. “연변 2014년 국민경제 및 사회 발전 통계공보”에 따르면 2014년에 연변에서는 연인수로 1,361.2만명(국내관광객 1,298.4만명, 해외관광객 62.8만명)의 국내외관광객을 접대하였고 216.2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리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연변관광업의 이 같은 성장은 연변의 혁명유적지, 혁명전적지, 렬사릉원, 기념관, 박물관, 기념비 등을 담체로 한 홍색관광제품개발의 힘을 많이 입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최근년간 연변의 홍색관광은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고있어 연변관광업에서의 홍색관광의 비중이 갈수록 상승세를 타고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일부 홍색관광제품에는 있지 말아야 할 미비한 점, 있어서는 절대로 안될 흠집들이 나타나 관광객들의 유감을 자아내는 일도 가끔 있으니 참으로 뼈 아픈 일침이 아닐수 없다.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4월 29일에 북경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연변의 일부 홍색관광명소를 안내하던중 화룡시 두도진 북산의 정상에 우뚝 솟은 혁명렬사기념비를 돌아보다가 뜻밖의 일에 닥치여 망연자실의 궁지에 빠지였다. 손님들과 함께 10여메터의 높이로 2012년 10월에 축조된 기념비 뒤면에 새겨진 85명 렬사들의 이름을 경건한 마음으로 묵시하면서 렬사비를 첨앙하던중 놀라운 발견이라 할가, 석줄배렬의 제일 아래줄에서 宋风变(송풍변), 宋荣变(송영변)으로 새겨진 두 이름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선망의 빛이 어리였던 손님들의 기색은 급전직하로 사라지고 사람마다 이마살을 찡그리면서 촬영까지 하며 이건 완전히 오기된것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손님들의 뜻인즉 宋风变(송풍변)은 응당 宋凤燮(송봉섭)으로, 宋荣变(송영변)은 의례 宋荣燮(송영섭)으로 올려야 한다는것이였다.
얼굴이 따끔해났다. 그래도 주인자태로 나서서 혹시 한족렬사일수도 있지 않겠냐고 변명하면서 얼낌덜낌으로 궁색한 자리를 모면하였다. 사후의 자료확인결과는 더 언급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이름에는 왜서 바람 “풍(风)”자가 아니라 봉황새 봉(凤)자를 많이 사용하였는가에 대해서여 구태여 피력하기도 싶지 않다. 또한 우리 민족의 이름에 많이 포섭되고있는 불꽃 “섭(燮)”자가 규범화되지 않은 략자형태인 “변(变)”자로 민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있는 상황도 구태여 운운할 기분도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해당 부분의 통계에 의하면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지역 혁명렬사는 도합 15,970명인데 그중 조선족렬사가 14,086명이다. 이는 전체 혁명렬사의 88.2%를 차지한다. 1986년 8월 당시 중앙선전부 부부장 겸 문화부 부장이였던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연변시찰시에 남긴 제사—“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는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조선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에 뛰여난 기여를 한 연변조선족들의 혁명력사에 대한 재조명이고 대집성이며 연변지역의 특유한 홍색문화의 진풍경이다. 얼추 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하경지의 이 제사는 연변홍색관광에 대한 대홍보이자 연변홍색관광산업을 개발함에 있어서의 인기브랜드로 세인들에게 널리 전해지고있다.
물론 해방후 연변의 각급 당위와 정부에서는 혁명렬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영웅사적을 대대로 전해가는것을 력사적사명과 시대적의무로 간주하고 주야장천의 품을 들이여 렬사출생지의 마을마다 혁명렬사기념비를 세웠는가 하면 렬사들의 발자취가 남겨진 일부 유적지와 유적물을 원상복구함으로써 여기에 고스란히 깃든 혁명력사, 혁명이야기, 혁명정신의 함축적내포를 관광객들에게 발현시켜 그들로 하여금 홍색관광체험코스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렬사들의 거룩한 넋을 기리고 류다른 감회를 가지고 혁명전통교양을 받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있는건만 사실이다.
렬사들의 충혼이 담겨져있는 이런 기념비를 떠받드는것은 렬사들을 존중하는것이며 기념비를 륭숭하게 세우는것은 렬사들을 우러러 모시는것이다. 하지만 전후(战后)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지난 50년대에 작성된 렬사들의 서류를 자상히 검토, 정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토대로 후세들에게 홍색문화재를 남겨놓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의 처사가 아닐수 없다. 력사는 력사사실 그대로 반영하여야 하고 혁명렬사의 인명 같은건 추호의 문자상 오기가 없이 똑똑하게 밝여야 한다. 렬사들의 거룩한 넋을 세세손손 멀고먼 후세까지 전하는것은 매우 성스러운 사업인만큼 우리 모두가 허례허식의 사업작풍에서 철저히 해탈되여 좀더 신경쓰면서 나의 부모, 나의 일가족의 렬사비로 간주한다면 이 같은 엄청한 차질은 얼마라도 피면할수 있다고 보아진다.
예로부터 “집안허물은 밖에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집안망신을 “며느리”가 시켰든 “시누이”가 시켰든 “시모”가 시켰든간에 인젠 누구를 나무라고 누구를 핀잔을 줄 때가 아니다. 세인들에게 드러낼건 다 드러내고 보여줄건 다 보여주었기에 공개된 허물이나 다름없으니 부끄러워할 리유도 더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자기를 새롭게 알고 자기부터 시작하는것만이 옳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연변 각 현, 시의 렬사 관련 서류와 출판물에 수록된 봉(凤), “섭(燮)” 관련 렬사이름들중 오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이름의 일부를 선택한후 한어문자 그대로 올리는바이다.
李风鶴, 金学风, 裴风洙, 崔哲风, 金风哲, 金风龙, 金风录, 金风南, 李风春, 朴风吉, 李风今, 金哲变, 金东变, 徐仁变, 宋君变, 崔风石, 朴炳变, 李亨变, 李云变, 崔承变, 崔龙变, 朴长变, 东春变, 金龙风, 太凤变, 李风律, 徐宽变, 崔风学, 金春変, 南昌変, 权风云, 金风洙…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지만 고친다고 해서 향후 랑패 볼것 없다. 이제라도 선손을 써서 지역마다 혁명렬사 관련 서류와 렬사이름을 망라한 혁명렬사기념비 비문을 자상히 검토한후 즉시 수정할것은 수정함으로써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연변홍색관광산업 브랜드의 정체성을 깨드리지 말고 일사불란으로 잘 보존하는것만이 렬사의 후세다운 자세이고 적중적이며 응분의 처사라 하겠다..
연변일보 2017-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