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장개석의 제자 장선운
(번역)
중국력사거인과의 관계를 놓고 보아도 장선운(蒋先云)은 전기적색채를 띤 인물이다.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이 가장 총애하는 학생이였지만 그의 첫선생은 장개석의 가장 큰 적수 모택동이였다.
어떤 사람은 태여날 때부터 천재인데 “황포3걸(장선운, 진갱-陈赓, 하충한-贺衷寒)”중의 한사람인 장선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하늘의 별처럼 어디가나 빛을 뿌리는 천부적인 지도자였다. 만약 장선운과 엽정이 50년대까지 살아있었다면 공화국의 10대원수명단은 바뀌였을것이라고 어느 력사학자는 말했다.
호남성 신전에서 온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모든 과목의 시험성적이 줄곧 전교 1등이였다. 황포군관학교의 가장 우수한 인재로 불리운 장선운은 장개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학생이였다. 평소에 학생들을 매우 엄하게 대했던 장개석이였지만 장선운만은 아주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장개석이 가장 총애하는 이 학생의 첫선생은 이후 장개석의 가장 큰 적수로 된 모택동이였다. 또 장선운을 황포군관학교에 추천해준이도 모택동이였다. 장선운은 모택동이 1921년에 형양에서 당창건시기 가장 일찍 발전시킨 당원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20세도 안된 장선운은 수구산광산로동자운동을 지도했으며 로동자구락부주임을 담임했다. 안원대파업 때 그는 모택동, 리립삼의 유력한 조수였다.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후 장선운은 신속히 많은 학생들을 흡인하여 중공황포지부를 성립하고 지부서기직무를 맡았으며 좌익의《청년군인련합회》를 발기하고 지도했다. 그후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공산당원의 대부분은 장선운이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장개석은 장선운이 중국공산당의 골간지도자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인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장선운에게 매우 큰 희망을 기탁하고있으면서 “앞으로 혁명이 승리하여 내가 군복을 벗으면 이 황포의 룡과 범들은 오직 장선운만이 지휘할수 있다”고 장선운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장선운은 장개석의 총애를 받아 황포의 동학들중에서 제일 빨리 승급하였지만 장개석과 점점 멀어져갔다. 장개석이 공산당과 반목하여 《중산함사건》을 일으키자 국공량당의 2중당원의 신분을 가지고있던 장선운은 국민당에서 탈퇴한다고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자 장씨성을 가진 선생과 제자의 인연은 철저히 끊어지고말았다. 1927년4월 17일에 장선운은 무한에서 황포학생장개석성토대회를 발기하고 대회주석을 맡았다. 그는 30만명이 모인 대회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을 성토했다.
북벌기간 북벌군총부 비서, 제5퇀 퇀장으로 된 장선운은 광동, 호남, 강서, 무한으로 진군하면서 군벌을 쳐부셨다. 장선운이 무한에 도착했을 때 남창에 있었던 장개석은 장선운의 재간을 몹시 아끼면서 부하를 파견하여 장선운을 제1사의 사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선운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장개석은 신문에 자기와 장선운이 함께 찍은 사진을 실었다. 이 때문에 장선운은 공산당내부에서 충분한 신임을 얻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의 책임자의 한 사람이였던 장국도는 장선운을 의심하면서 배척했다.
이때 제26사 77퇀 퇀장 겸 정치위원으로 있던 장선운은 타격을 받고 고민하던중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제2차 북벌전쟁에 뛰여들었다. 1927년 5월 하순에 북벌군은 하남성 림영에서 아군보다 몇배나 더 많은 봉계군벌과 격전을 벌렸다. 봉계군벌 지휘자 장학량은 군장 한명을 철직하고 려장 1명, 퇀장 3명을 잃으면서 땅크, 비행기, 독가스까지 동원하여 맞서 싸웠지만 결국 장선운에게 대패하고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천재적인 군사가 장선운은 진장한 장성이 되기도전에 림영성아래에 지고말았다. 때는 1927년 5월 28일이였고 그는 향년 2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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