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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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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의 결혼생활과 그의 가족
2014년 01월 19일 13시 15분  조회:7332  추천:2  작성자: 넉두리

등소평의 결혼생활과 그의 가족


 
 
등소평은 개인적으로 세번이나 결혼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치무대에서 “세번 밀려났다가 세번 일어선”것과 함께 결혼생활에서도 세번의 파란곡절이 있었다. 그가 세번째복권으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였다고 한다면 세번째결혼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룩한 성공적인 가장이 되였다.

등소평의 첫번째 부인은 장석(또는 장천원)인데 하북성 방산현출신이다. 장석의 아버지 장경해는 철도로동자로서 1922년 “2.7대파업”때 로동자대표로 지명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1925년 장석은 모스크바중산대학 류학생으로 추천되였다. 그때 그녀는 프랑스에서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모스크바로 와서 류학하고있던 등소평을 만났다. 1927년에 두 사람은 중국에 돌아가 상해의 중앙비서처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사랑이 싹터 1928년초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2년후인 1930년에 장석은 난산으로 상해에서 숨을 거두고말았다. 그때 등소평은 광서에서 한창 “백색봉기”를 조직하고있었다. 장석의 사망으로 등소평의 첫번째 결혼생활은 불과 3년도 못되여 끝나고말았던것이다.

등소평의 두번째 결혼도 비극으로 끝났다. 비극의 녀주인공은 김유영으로서 사람들은 그녀를 아김(阿金)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절강성 대산출신으로서 등소평과는 동갑내기였는데 두 사람은 상해에서 서로 알게 되여 1931년에 함께 강서로 간후 결혼하였다. 김유영은 쏘베트구의 도현과 승리현에서 현위원회 서기를 력임한 당시에 많지 않던 녀성간부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러나 1933년에 등소평이 강서 회창현 현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김유영도 함께 타도되여 신변에 위험이 닥치자 그녀는 그만 등소평과 리혼하고 당시 등소평을 책임지고 조사하던 조직부장 리유한(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중앙통전부장 력임)과 가까운 사이로 되였다. 리유한과 김유영은 그 이듬해에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국무위원을 력임한 리철영이다.
1935년에 등소평은 김유영과 함께 홍군장정에 참가하여 같은 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유영은 1936년에 연안에 도착하여 리철영을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병에 시달리다 못해 모스크바로 가서 정신병치료를 받았다. 그후 1941년에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독일군비행기가 폭발되였을 때 실종되였다.





 

등소평의 세번째 결혼상대자는 그의 마지막 동반자 탁림이다. 탁림의 본명은 포경영으로서 1916년 4월에 운남성 선위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1936년에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운남성 최초로 북경대학에 입학한 녀성이 되였다. 등소평의 딸 등용의 말에 의하면 등박방, 등남과 등질방이 모두 어머니 탁림의 영향으로 북경대학 물리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1937년 7월에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탁림은 그녀의 언니 석영과 함께 혁명성지 연안으로 찾아갔다. 연안에서 탁림은 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섬북공학에 들어갔다. 1939년 여름에 탁림은 다른 사람의 소개로 등소평을 알게되여 그해 9월초에 결혼을 하였다. 모택동, 강청, 류소기, 장문천부부, 왕명 등 중국공산당 군정핵심요원들이 모두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등소평은 36세, 탁림은 24세였다. 탁림은 등소평이 이끄는 북방국 부녀촉진회에서 일하고있었다.

등소평과 탁림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녀 등림, 장남 등박방, 차녀 등남, 3녀 등용(모모라고도 함)과 막내 등질방이 있다. 등소평의 자녀들은 모두 산아제한정책의 옹호자들이다. 등박방은 불구의 몸이 되여 후사가 없지만 그 나머지 네사람은 모두 한명의 자녀만 가지고있으며 그중 등질방만 아들이 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등소평은 당시 국가주석 류소기의 당내주자파 2인자로 지목되여 모든 당직에서 파면된후 강서성의 뜨락또르공장으로 추방되여 육체로동에 종사하였다. 이때 그는 부인 탁림과 계모 하백근만 데리고갔다. 그의 다섯 자녀들도 모두 각지로 추방되거나 남아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 중에서 장남 등박방의 운명이 가장 비참하였다.

1944년에 태여난 등박방은 1962년에 북경대학 물리과에 입학하여 문화대혁명초기에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1968년에 등소평이 비판받은후 그도 반대파에 의해 방사성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된 실험실에 갇혔다. 그곳에 오래있다가는 꼼짝없이 죽을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4층에서 수도관을 따라 탈출하려 하였지만 불행히도 땅에 굴러떨어져 그만 척추에 중상을 입고말았다. 그러나 등소평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그는 당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결국 반신불구의 몸이 되였다.





 

1981년에 카나다로 가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여있던 상태에서 별효과를 보지 못했다. 귀국한후 등박방은 중국의 장애자복지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83년에 “중국장애자복지기금협회”를 설립하였다. 중국 장애자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시킨 그의 공헌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현재 등박방은 흉부이하가 완전히 마비되여 휠체어에 의존하고있으나 다행히도 정형외과 전문의사 고소녕이 그와 결혼하여 함께 가정을 꾸려가고있다.

등질방은 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다. 그는 북경대학 물리과를 졸업한후 뉴욕 맨체스터대학에서 양자물리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1988년에 생물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안해 류소원 그리고 미국에서 태여난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중신(中信)의 부사장을 력임하였다. 1992년에 상해 사방부동산실업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업에 종사하고있다.

장녀 등림은 수묵화화가이면서 중국 “동방미술교류협회” 회장이다. 1941년 산서성 태항산군부대에서 태여났으며 후에 북경중앙미술대학 중국화과에 입학하여 화조도를 배웠다. 문혁시기에는 남창으로 추방되여 남편 오건상을 만났다. 그후에 등소평을 따라 북경에 돌아가서 “동방미술교류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였다. 등림은 여러차례에 거쳐 해외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녀의 남편 오건상은 중국 유색금속수출입회사와 여러개의 상장회사를 관리하고있다.

현재 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으로 있는 등남은 1992년에 등소평의 남방순시를 기획한 인물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등남은 1964년에 북경대학 물리학부에 입학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안휘성 황산으로 추방되였다.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후에 그녀는 다시 과학위원회 과학기술정책국 부국장으로 되였다. 그녀의 남편 장굉은 국가과학위원회 과학기술개발국 국장이다.


지난 수년동안 등소평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자녀는 셋째딸 등용이다. 등소평의 개인비서인 그녀는 등소평의 귀와 입이 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등소평을 대신하여 정보를 듣고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명이 모모(毛毛)이기도 한 등용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령리하여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북경사범대학 부속고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녀는 섬서성 부현으로 추방되였다. 당시에 그녀는 갖은 랭대를 받았으나 현재의 남편 하평만은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등소평이 두번째 복위되였을 때 등용은 북경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77년에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해방군총정치부로 발령받았다가 1979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였다. 그녀는 4년후에 귀국하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되였다. 등용은 등소평의 개인비서를 충실히 리행하였다. 그녀의 남편 하평은 해방군 최대의 무기회사인 보리회사 사장을 력임하였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 등소평 - 문화대혁명세월》이란 책을 출판하여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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