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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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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2014년 12월 21일 19시 08분  조회:6690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번역)




 
1907년에 호남성 류양시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한 황모란(黄慕兰)은 본명이 황창정이며 황숙의, 황정혜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황모란의 첫번째 결혼은 불행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자신의 친구아들과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첫번째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도박군이며 바람둥이였다. 황모란은 결혼한지 1년도 안되여 탈가하여 도망쳤다. 당시 그녀는 18세였다.
그후 그녀는 중공중앙기관보인 《민국일보》의 주필, 중공중앙군사위원회 기요처 주임비서, 경위퇀 정치지도원직을 맡았던 완희엄을 알게 되여 1927년 “3.8절”에 결혼했다.
1927년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렬된후 황모란은 남편과 함께 지하사업을 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황모란의 잠복생애가 시작되였다.
황모란은 처음에 강서성위 비서와 기밀교통원사업을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한밤중에 성위서기 진담추한테서 성경에 미음으로 비밀문서를 쓰는 방법, 려관에 나가 련락암호를 주고받는 방법, 부두에서 교통선박을 기다리는 방법 등을 배웠다. 1928년에 아들 완창걸이 태여난지 3일만에 그녀의 남편 완희엄은 강서의 서남으로 파견되여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녀는 남편을 보내면서 다시 만날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적에게 체포된 완희엄은 4개월후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1928년 12월에 황모란은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에 들어가 중앙위원회 기요비서직을 담임하면서 중국공산당중앙특별행동과의 성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또 중앙의 기요교통원을 겸임하면서 늘 전국각지에서 중앙과 련계하러 상해로 찾아온 지하교통원들을 맞아들이군 했다.
황모란은 1929년에 주은래의 비준을 맡고 상해에서 중앙위원 하창과 결혼했다. 하창은 1931년에 비밀리에 소주에 들어가 유격전쟁을 하다가 1935년에 29살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선후로 두 남편을 잃은 황모란은 중국인민혁명 호제총회의 구조부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중공지하사업 원로 반한년과 단선련계를 가지고 체로된 동지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담임했다.
그녀가 맡은 첫번째 임무는 체포된 공회련합회 지도자 관향응을 구조하는 일이였다. 그녀는 상해조계지의 진보적인 변호사 진지고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관향응을 구조했다. 그녀는 상해 사교계에 진입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1930년 6월의 어느날 오후에 황모란은 커피점에서 진지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서 번역사업을 하고있는 조병생을 만났다. 조병생은 진지고의 동창생이였다. 조병생은 진지고를 보자 반갑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상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였는데 진지고가 조병생을 보고 물었다.
“요즘은 또 어떤 인물을 잡아들였나?”
그러자 조병생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며칠전에 현상금 10만원을 내건 공산당두목을 잡아들였네. 호북사람이고 나이는 60세정도인데 주홍코에 금이발이고 손가락이 아홉개라네.”
황모란은 긴장하게 들으면서 머리속으로 조병생이 묘사한 특점에 부합되는 인물이 누굴가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인물이 정치국주석 향충발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향충발이 당을 배반하는 경우에는 중앙의 중요인물들이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황모란은 즉시 이 정보를 반한년에게 알려주었다. 반한년은 급히 주은래한테 이 정황을 반영하였다. 주은래는  신속히 리부춘, 채창 등 사람들을 전이시켰다. 과연 그날밤에 향충발은 순포방의 경찰들을 데리고와서 직접 열쇠를 열고 주은래 등이 거처했던 방으로 뛰여들었다. 황모란이 이번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상해의 중공 중추기구가 순식간에 화를 입었을것이다. 주은래는 그녀를 “당의 백과전서”라고 칭찬했다.
1933년에 진지고가 황모란에게 청혼했다. 당조직은 당시의 복잡한 백색공포환경에서 황모란이 진지고와 결혼하면 사업에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왕모란은 조직의 말을 듣고 진지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1935년에 5월에 황모란은 상해의 중화예술사에서 진지고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42년 12월 2일에 황모란은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불행하게 요절되였다. 1950년에 진지고는 상해를 떠나 향항으로 갔는데 그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황모란의 일생은 곡절적이였다. 그녀는 여러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중 두번은 국민당감옥에 갇혔고 한번은 해방후 반한년사건에 련루되여 17년동안이나 진성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1980년에 황모란의 억울한 사건은 해명되였다. 그후 그녀는 상해시정부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 황모란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항주에 거주했다. 2011년은 황모란이 105돐을 맞은 해이며 그녀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지 85년이 되는 해였다.
최근에 기자가 황모란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의 집 가정보모가 “황로인님께서는 낮잠을 주무시고있습니다. 어떤 기자든지 로인님의 따님을 통해야만 취재를 할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얼마후 기자와 만난 황모란의 딸 진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년세가 많아서 기자의 취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일생은 당의 사업에 모든것을 바친 빛나는 일생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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