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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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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2015년 07월 05일 18시 49분  조회:7122  추천:3  작성자: 넉두리

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청나라초기의 황제들은 혼인에서 정략결혼의 색채가 충만했다. 청태조(清太祖) 누르하치(努尔哈赤)의 처첩중 사서에 기록된 녀인은 모두 14명이다. 그중 7명의 처첩은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나머지 처첩들도 대부분 서로 다른 부락에서 왔다. 청나라초기에는 만족과 몽골족의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청황실사보》 2권의 기록에 따르면 청태종(清太宗) 황태극(皇太极)은 몽골족 처가 7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순치황제 복림의 몽골족처는 6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1/3을 차지했다.

청나라의 황제중에 청태종 황태극의 혼인은 가장 기이했다. 황태극의 처첩중 명호가 있는 후비는 15명이였다. 이 15명의 후비들중에서 7명이 몽골초원에서 왔다. 후비들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숭덕오궁후비(崇德五宮后妃)”는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게다가 두명은 과부였다. 나머지 3명은 커얼친(科尔沁)부의 망구스집안의 고모조카관계인데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을 왔다. 황태극의 혼인에서 기이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그는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은 적이 있는 측비인 보얼지지터씨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적도 있다.

그렇다면 천자의 고귀한 자리에 있던 청태종이 왜 과부를 두명이나 부인으로 받아들였을가?
원래 이 두 녀인은 신분이 특수했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부락의 맹주인 차하얼(察哈尔)의 린단칸(林丹汗)의 부인들이였다. 그녀들은 남편 린단칸이 죽은후에 청태종에게 투항하였고 천총8년과 천총9년에 차례로 청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1632년(후금천총6년)에 청태종은 8기대군을 이끌고 몽골의 여러부락을 공격했다. 린단칸의 차하얼로 진격하여 격전을 벌린 끝에 린단칸의 부대를 거의 절반이나 소멸했다. 린단칸은 대패후에 청해초원으로 도망갔다. 2년후인 1634년에 민심을 잃은 린단칸은 청해에서 병사했다. 그의 부하들은 점차 와해되였고 그의 부인들도 새로운 살길을 찾아나서게 되였다.

1634년 8월에 린단칸의 후비중 하나인 떠우투먼(窦土门) 푸진(福晋)이 도니쿠루크의 호송하에 일행을 이끌고 청태종의 군영으로 찾아와서 귀순했다. 그리고 무후르 이지야르지방에 머물며 목축을 했다. 사실 당시 떠우투먼은 청태종에게 시집을 가고싶어했으나 스스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대패륵 다이샨이 그녀가 온 뜻을 알아차리고 청태종에게 말했다.

“이 녀인은 하늘에서 내린 녀인이니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하옵니다!”

청태종은 그녀가 아주 예쁜것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았다는 악명을 들을가봐 우려했다. 그래서 계속 사양했다. 대패륵 다이샨은 이렇게 권고했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몽골사람들의 투항을 얻어낼수 있고 몽골이 우리의 동맹군으로 될수 있사옵니다.”

다른 패륵들도 그렇게 하는것이 린단칸의 부하들의 투항을 받아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전에 마음이 움직였던 청태종은 사흘간 생각하는척 하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청태종은 패륵들에게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도  얘기했다.

“짐이 행군도중에 나리트강에 주둔했는데 꿩 한마리가 짐의 군영막사안으로 날아들었소. 짐이 보기에 이는 미인이 들어올 길조였소. 떠우투먼 푸진이 짐에게 개가하는것은 바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생각되오.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수밖에 없소.”

떠우투먼 푸진을 모시고 청태종에게 귀순했던 도니쿠루크는 아주 기뻐하며 “신들이 온 목적은 바로 떠우투먼 푸진을 황상께 바치는것이였나이다”하고 아뢰였다. 도니쿠루크는 사명을 완수했고 청태종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했다.

청태종이 떠우투먼 푸진(窦土门福晋)을 받아들인후 1년도 되지 않은 1635년 3월에 린단칸(林丹汗)의 다라대푸진(多罗大福晋) 즉 정실부인인 낭낭태후(囊囊太后) 나무종(娜木钟)이 1500호의 무리를 이끌고 귀순했다. 그해 4월에 린단칸의 또 다른 다라대푸진인 소태태후(苏泰太后)가 그녀의 아들 어저(额哲) 즉 린단칸의 계승자를 데리고왔다. 또 1000호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면서 전국옥새를 바쳤다. 두명의 존귀한 태후와 함께 온것은 또다른 두명의 측실인 백기푸진(伯奇福晋), 아이철의도(俄尔哲依图)푸진 그리고 린단칸의 녀동생인 태송공주(泰松公主) 등이 있었다.

이 녀인들중에서 자격이나 지위로 보면 낭낭태후가 가장 높다. 그녀는 몽골군왕의 집안에서 태여났을뿐만아니라 린단칸의 “정실부인”이였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존귀한 낭낭태후를 취해야 하는가? 당연히 지위가 가장 높았던 청태종이다. 청태종은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는척 했다. 그러다가 여러 패륵들이 여러번 권하자 청태종은 그녀를 안해로 맞아들였다.

나무종의 지위가 고귀했으므로 청태종 숭덕원년인 1636년에 후비를 책봉할 때 그녀를 서궁 인지궁귀비에 봉했다. 그녀보다 1년이나 먼저 청태종에게 개가했던 두토문 푸진은 지위가 나무종에 미치지 못하여 차동궁연경궁숙비에 봉해졌다. 일찌감치 1625년에 이미 청태종에게 시집와있던 서궁비 부무부타이는 차서궁으로 밀려나서 영복궁 장비에 봉해졌다.

청태종의 후궁들중에서 지위가 가장 존귀한것은 “숭덕오궁후비”들이였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상술한 두명의 린단칸의 미망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몽골 커얼친부 망구스집안에서 나왔다. 이 세명의 비는 친고모조카간이다.

몽고의 커얼친부는 후금에 가장 먼저 귀순했다. 커얼친부 좌익의 수령인 밍안 패륵의 형인 망구스는 1614년에 딸을 청태종에게 보내여 처로 삼게 했다. 그녀가 바로 청태종의 중궁황후 효단문황후이다. 저저황후(哲哲皇后)로 불리운 녀인이다. 만몽간의 혼인은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1629년에 청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쳤는데 커얼친부의 23명 패륵이 무리를 이끌고 뒤따르면서 명나라군대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25년(천명10년)에 커얼친 패륵 자이상의 아들인 오극선(吴克善)은 녀동생 부무부타이를 청태종의 비로 보냈다. 이 녀인이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장비(庄妃)로 된 인물이다. 장비는 중궁황후의 친조카딸이며 순치황제 복림의 생모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청나라의 세 황제를 거쳤는데 바로 란세에서 태평성대로 들어서는 력사적 시기였다. 그녀는 황제를 보좌하여 청나라궁중내부의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여 청나라초기에 사회질서의 안정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후세에 그녀는 청나라의 국모라고 불리웠다.

1634년에 우크샨은 다시 녀동생 하나를 심양으로 보내여 청태종의 비가 되게 했다. 이번에 보내온 녀인은 장비의 친언니인 하이란주였다. 청태종은 그녀를 신비(宸妃)로 삼았다. 이렇게 되여 멍구스의 집안의 고모부터 조카까지 3명의 녀인이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가게 되였다.

신비 하이란주는 청태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청태종은 《시경》에서 애정을 노래한 시구인 “관관조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에서 이름을 따서 하이란주가 거주하는 궁을 “관조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이란주의 지위를 5궁중에서 2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미인을 시기해서인지 신비 하이란주는 3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녀를 잃은 청태종은 비통해하며 침식을 페했다. 그러다가 혼절하기까지 했다. 청태종은 신비를 위하여 륭중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혜공화원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녀는 청나라의 후비들중에서 시호가 가장 긴 녀인이다.

신비를 잃은후부터 청태종은 조석으로 비통해하며 음식도 얼마 먹지 못했다. 신체가 갈수록 나빠졌고 하는 말에도 두서가 없어졌다. 나중에 여러 왕과 대신들이 그를 사냥하러 나가도록 권했다. 그런데 사냥터로 가는 길에 신비의 묘를 지나게 되였다. 청태종은 다시 가슴이 아파져서 대성통곡을 했다. 신비가 죽은후 2년도 되지 않아 청태종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청태종의 신비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는 력대황제들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청나라 초기에 통치자들은 유가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다. 청태종의 후비중에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둘이나 낳은 측비가 있었다. 그 측비는 바로 몽골 자루트부의 다이칭 패륵의 딸 보얼지지터씨였는데 청태종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켰다. 에허부의 더얼거이 타이지의 아들인 난추의 안해로 보낸것이다. 일대의 제왕인 청태종이 자신의 후비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사실은 정말 리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중국의 봉건왕조에서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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