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령과 송미령은 왜서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는가
(번역)
송경령편
송경령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원인을 말하려면 먼저 그녀가 손중산과 함께 험난한 혁명의 길을 걸어온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1916년 3월에 송경령과 손중산이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상해로 돌아온후부터 근 10년동안 손중산은 계속 중국혁명을 령도했다. 그 기간에 상해에 있으면서 책을 집필하기도 하고 상해에 가서 정무를 돌보기도 했는데 그들 부부는 늘 함께 사업했다. 송경령의 탁월한 머리는 손중산의 두뇌를 더욱 풍부하게 하여 그의 인격을 더욱 위대하게 완성시켰다.
그들이 귀국한후 손중산은 광주로 가서 대원수로 되여 제1차호법운동을 령도했다. 군벌과 정객들의 배척을 받은 손중산은 화가 나서 대원수직을 사직했다. 그 시기에 손중산은 상해에 거주하면서 어찌할 방도가 하나도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절망에 빠져있었다. 송경령은 생활상에서 손중산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고 정신상에서 고무격려하며 손중산을 분발하게 했다.
손중산이 독서를 즐기는것을 잘 알고있는 송경령은 가치가 있는 서적과 신문잡지를 수집했으며 손중산을 도와 자료를 열람하고 저서를 편찬했다. 1918부터 1919년사이에 손중산은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고 문장을 지으면서 현상태를 개변하려고 결심했다. 그 시기의 저작에는 모두 송경령의 심혈이 깃들어있었다. 그녀는 손중산을 도와 많은 초안을 작성했으며 영문번역도 했다.
1920년 11월 25일에 송경령은 군정직무를 회복한 손중산을 따라 상해를 떠나 광주로 다시 돌아갔다. 1921년 4월에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회의를 열고 중화민국정식정부를 성립하기로 결정하고 대통령부를 월수산 남록에 설치했다. 1921년 5월 5일에 손중산은 림시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24일에 손중산은 계림에 가서 북벌계획을 세웠다. 송경령은 뒤에서 적극적으로 손중산의 군사행동에 배합했으며 녀성들을 동원하여 출정군인위로회를 조직했다. 동시에 송경령은 각계인사들을 동원하여 거액의 위문경비를 모금했으며 위로대를 조직하여 전선에 가서 전투에 나설 전사들을 위문했다.
북벌군이 순리롭게 진군할 때 손중산이 친히 배양한 부하 진형명이 혁명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22년 6월 16일 새벽 2시에 손중산은 진형명의 부대가 월수산을 공격하는데 정세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손중산은 깊은 잠이 든 송경령을 흔들어 깨우며 이 곳이 위험하니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송경령은 위험에 직면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전반 국면을 돌보기 위해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녀까지 떠나면 반란군에게 철군의도가 쉽게 발견될수 있기때문에 그녀는 남아서 손중산이 비밀리에 철수하는것을 엄호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송경령은 손중산을 보고 “중국에 내가 없어서는 되지만 당신이 없어서는 안돼요!”하고 말했다. 경호원들도 함께 떠나자고 권고했지만 송경령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손중산은 하는수없이 50명의 위병들을 남아서 송경령과 대통령부를 지키라고 하고는 혼자서 떠났다. 손중산은 두번이나 반란군의 눈을 피해 황포의 영풍함에 올랐다. 그는 사전에 약속했던대로 례포 세방을 쏘아 안전하게 영풍함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밤공기를 째며 울려퍼진 세방의 포소리는 월수청사에까지 들려왔다. 그 세방의 포소리를 들은 송경령과 위병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손중산이 떠난지 반시간이 되여 갑자기 포성이 울리더니 반란군들이 월수청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산지를 점령하고 높은곳에서 좌우협공하면서 “손문을 죽여라, 손문을 죽여라”하며 미친듯이 웨쳐댔다. 사방이 어두워 적들을 볼수 없었기때문에 위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위병들은 보총과 기관총으로 반격하여 반란군의 공격을 30여차나 물리쳤다. 반란군들은 월수아빠트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목욕실이 포탄에 맞아 무너졌지만 위병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아침 8시가 되자 탄알이 모두 떨어졌다. 손중산이 이미 영풍함에 도착해 이 곳에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기때문에 송경령은 산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두명의 위병과 요대장은 손경령을 호위하면서 천교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탄알이 두번이나 송경령의 귀밑으로 스쳐지났다. 그들이 방금 천교를 지났을 때 천교가 반란군의 포격에 붕괴되고 요대장도 탄알에 맞아 넘어졌다. 두 위병은 요대장을 대통령부의 후원으로 업고가서 상처를 감싸주었다. 그들이 대통령부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포화로 뒤덮여있었다. 송경령이 방금 대통령부에서 나왔을 때 건물의 지붕이 무너져버렸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송경령 등은 포화가 계속되는 지옥속에 로출되여있었다.
오후 4시에 광주위수구 사령 위방평은 부관을 대통령부에 파견하여 손중산의 위병들과 담판했다. 위병들은 첫째로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부관은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두층의 철문이 모두 열리면서 반란군들이 와아 소리를 지르며 밀려들었다. 혼란중에 송경령은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급한중에 꾀가 생긴다고 손경령은 손에 들고있던 가방속의 물건을 땅바닥에 흩어지게 던져버렸다. 그녀는 반란군들이 서로 패물과 돈을 빼앗는 기회를 리용하여 도망쳤다. 송경령은 그 시기에 임신한 몸이였기때문에 행동이 불편했다. 대문을 빠져나온 송경령은 기지와 용감성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여러번이나 반란군을 피해 아는 사람의 집에 가서 휴식하다가 배를 타고 령남대학 교장 종영광의 저택으로 갔다.
그런데 과도한 피로때문에 송경령은 종영광의 저택에서 그만 류산을 하고말았다. 이것이 송경령의 일생에서 유일한 한번의 임신이였다.
그 한번의 류산때문에 송경령은 평생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 이는 녀성에게 있어서 건강방면에서나 정신상에서 지대한 고통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송경령은 필경 일세의 위인이였다. 그녀는 크나큰 도량과 진심어린 깊은 사랑을 가지고있었기에 그후의 혁명생애에서 수천수만의 어린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녀성아동복리사업에 종사했다.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송경령은 전 중국아동을 위해 모성애를 바쳤다.
송미령편
대만 《련합보》의 보도에 따르면 장위국은 대계도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부양하여 친아들로 간주했다. 장위국은 형님의 압제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늘 불괘하게 여기고있었다. 장위국을 키워준 요치성은 장위국에게 “너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조심하지 않아 음낭이 난로에 데였는데 왕대부인이 아들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돼지기름을 발라주었단다. 그런데 그 때문에 개에게 물려서 생육능력을 잃게 되였단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니 장위국은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1927년 12월에 그와 송미령이 결혼한후 1928년에 송미령이 임신을 해서 그는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객이 뛰여드는 바람에 송미령이 놀라서 류산을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원 곽대군은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그해 8월에 어떤 자객이 한주일내에 두번이나 장개석이 거처하는 아래층의 위병을 돈으로 매수하여 웃층으로 올라와 암살하려고 했다.
첫번째는 24일 야밤인데 자객이 위병을 돈으로 매수한후 웃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송미령을 놀라서 깨여나게 했다. 장개석은 25일의 일기에 “안해가 병으로 인공류산을 했다”고 썼다. 27일의 깊은 밤에 두명에게 돈으로 매수당한 위병이 침실에 침입하여 총을 쏘려다가 장개석이 돌아눕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났다. 그후 장개석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조사했고 그일이 있은 후 송미령은 더는 생육을 하지 못했다.
송미령이 류산을 했다는 장개석일기의 기재는 요치성이 장위국에게 했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것을 말해주었을뿐만아니라 영문으로 저술된 《진결여회억록》에서 언급했던 “장개석이 생육을 할수 없는 원인이 젊었을 때 매독에 걸렸기때문이다”라는 설을 뒤엎어놓았다.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장개석은 젊었을 때 욕정에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씨가문을 대표해 미리 장개석의 일기를 읽은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斯坦福大学胡佛研究院)의 객원연구원 반방정은 “장개석은 송미령과 결혼한후 딴 사람으로 되였고 경건한 기독교신자로 되였다”고 말했다.
반방정은 또 “장위국은 젊었을 때 쏘련에 가서 류학하면서 12년동안 묵어있었는데 그 기간에 장개석이 쓴 일기를 보면 장개석이 장위국을 매우 좋아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송미령이 장개석에게 장위국의 출생에 대해 솔직히 말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장개석은 도리여 대계도와의 의리를 지켜 대답하지 않았고 그 일로 송미령은 화가 나서 향항에 체류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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