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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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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2017년 02월 12일 15시 30분  조회:5724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1929년 7월에 중쏘간에 중동철로권익의 귀속문제때문에 무장충돌을 초래한 《중동로사건》이 폭발되였다. 전투는 주요하게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扎赉诺尔)지역에서 벌어졌다. 그해 7월부터 11월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수십차 벌어졌다. 처음에 중국동북정부가 중동철로의 전보와 전화를 되찾고 쏘련인들을 본국에 돌려보내려고 하면서 쏘련군과 동북군의 무장충돌이 일어났고 잇달아 전쟁으로 번졌다. 처음에 전쟁에서 승리의 단맛을 보던 동북군은 11월에 들어서자 대패를 당했다. 쏘련군이 선후로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海拉尔)을 점령했다. 동북군은 2000여명이 사망되고 7000명이 포로되였다. 쏘련측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군은 143명이 사망되고 4명이 실종되였으며 665명이 부상을 당했다.

1929년 5월 27일에 할빈특구 경무처장 미춘림은 쏘련이 할빈령사관에서 원동당원해회를 연다는 비밀정보를 접수했다. 장학량은 비밀전보를 보내 할빈특구 장관 장경혜에게 군대와 경찰을 파견해 할빈주재 쏘련령사관을 수색해 총령사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중동철로쏘련종업원련합회를 봉인하고 중동로 쏘련측의 정, 부 국장의 직무를 중지시켰다. 5월 29일에 장경혜는 또 명령을 내려 할빈, 치치할, 하이라얼 등지의 쏘련령사관을 봉쇄해버렸다. 5월 31일에 쏘련정부는 중국 남경정부에 항의를 제출하면서 할빈령사관의 체로인원을 석방할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쏘련은 변경지구에 병력을 증강해 외교교섭이 실패하면 무력으로 해결할 준비를 했다. 《5. 27사건》의 폭발은 《중동로사건》의 도화선으로 되였다.

장학량이 28살에 발동한 《중동로사건》으로 하여 중국지도에서 닭의 볏인 흑룡강과 우쑤리강사이의 흑할자도(黑瞎子岛)를 쏘련군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원수(老帅) 장작림이 1928년 6월에 일본군의 음모에 의해 렬차폭발로 사망된후 젊은 원수(少帅) 장학량이 동북3성 보안 총사령직을 맡았다. 얼마후 장학량은 국민정부에 의해 륙해공군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그 시기에 그는 28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장학량은 이 전쟁을 통해 쏘련군의 수중에 있는 철로권, 전화권, 전보권을 모두 찾아서 중국의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때는 레닌이 10월혁명승리후에 전세계에 향해 “제정로씨야가 중국에서 빼앗은 땅을 전부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선포한지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쓰딸린시기가 된 쏘련은 1689년 9월 7일(강희 28년 7월 14일)에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条约)》을 체결할 때 중국에 속하는 령토라고 확인했던 이 땅에서 동청철로, 전화, 전보, 광산, 삼림 등의 권리를 행사했다.

1928년 6월에 국민정부가 통일된후 외교부장을 담임했던 왕정정은 남경에서 불평등조약수정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외교”를 발동했다. 통일을 옹호했던 장학량은  이런 형세에 고무되여 쏘련측에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990년 봄에 장학량은 당덕강앞에서 구술할 때 “내가 로씨야사람과 싸운것은 자신을 과대평가한것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혈기왕성했던 장학량은 세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장학량은 1929년 7월부터 시작해 중동철로의 쏘련인을 쫓아냈고 할빈시내의 쏘련기구를 차압했다. 그해 7월 18일에 쏘련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길림의 중쏘변경에 쏘련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중국군은 처음에 승세를 보였다.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지역에서 1929년 7월부터 11월초까지 동북군은 충분한 준비가 있었기에 적지않은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도 이 전쟁은 져서는 안될 전쟁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쏘련은 지휘관을 가륜(加伦)으로 바꾸었다. 가륜은 중국명이고 본명은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였다. “원동군의 령혼”이라고 불리우는 가륜이 온후 동북군은 한개 려가 전멸되는 처참한 참패를 맛보았다.

가륜은 장개석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을 맡은적이 있었고 중국대혁명과 북벌에도 참가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발동한 남창봉기도 지도했다. 쏘로국내전쟁시기에 장군으로 성장한 그는 한개 보병사로 대량의 땅크, 장갑차와 같은 장비를 갖춘 기계화부대 자위군을 보기좋게 쳐부신 기적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 쏘련에서 처음 군사계급을 수여한 5대원수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38년 11월 9일에 스탈린의 숙청명단에 들어 일본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비밀리에 처형되였다가 1956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었다.

동북군의 장비가 중국에서 두번째에 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였지만 쏘련군과 비할수는 없었다. 쏘련군함이 40발의 포탄을 발사할 때 상업선박을 개장한 동북해군은 한발의 포탄밖에 발사하지 못했다. 한광제려장이 지휘한 제17려는 전군이 전멸했고 량충갑려장이 지휘한 제15려는 만주리에서 전부 포로되였다.

하이라얼을 잃은후 할빈과 흑할자도도 쏘련군이 점령했다. 새 군벌을 대처하기에 바빴던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도움을 줄수 없었다. 1929년 11월하순에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은 이미 쏘련에게 함락되였다. 장학량은 부득불 패배를 승인하고 1929년 11월 26일에 정전을 요구했다. 장학량은 채운승을 파견하여 쏘련과 담판하게 했다. 1929년 12월 20일에 장학량은 미국측의 조정하에 쏘련과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중동로사건》이다. 중국측에서는 중동철로를 중쏘에서 공동히 관리하던 원래상태를 회복하자는 쏘련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쌍방에서는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결속을 선고했다. 결과는 철로를 빼앗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쏘련군은 철군한다고 했지만 중국령토인 흑할자도에 간후 섬에 눌러앉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흑할자도는 쏘련의 하바롭스크와 린접했고 흑룡강, 우쑤리강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때문에 제정로씨야때부터 로씨야는 줄곧 흑할자도의 전약의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29년 당시의 쏘련정부도 흑할자도의 전략의의를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것은 정전후에 체결된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에 체현되였다. 이 협정에 대해 국민정부는 승인하지 않았다. 장학량을 위수로 하는 지방대표는 국가와 국가지간의 담판에 참여할수 없다. 이 담판은 동북군대표의 권한을 초월한 담판이였다. 장개석도 이 담판을 승인하지 않았다. 송미령의 큰 언니 송애령이 곁에서 장개석을 보고 “협정을 승인하세요. 그래야 쏘련에서 장경국을 중국에 돌려보낼수 있어요”라고 권고했지만 장개석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전을 위해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협정은 쏘련이 중동철도에서 소유했던 권익을 회복시켰다. 그 대가로 쏘련군이 동북에서 철군하게 되였다. 그러나 쏘련군은 협정에 따라 동북에서 철군하지 않았다. 쏘련군은 다시 철로의 권익을 얻은후 수상요충지 흑할자도를 강정했는데 그렇게 점령한것이 줄곧 79년동안이나 점령하고있었다.

장학량이 《중동로사건》을 일으켜 쏘련이 우리 나라의 령토 흑할자도를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그후 중로의 령토분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다가 2004년에 체결한 《중로국계동단보충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의협정》에 따르면 중국은 174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흑할자도의 절반주권을 되찾았다. 2005년에 로씨야의 두마(의회명칭), 련방위원회와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선후로 이 협정을 비준했다. 그때로부터 흑할자도 더 나아가서 중로변계문제의 최정해결에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흑할자도는 중로변계 무원현경내의 흑룡강과 우쑤리강이 합류되는 주항도 서남측에 위치해있는데 중국에서 태양을 가장 일찍 볼수 있는 지방이고 흑룡강류역중 최대의 강섬이다. 면적은 350평방킬로메터로서 오문의 12배, 진보도의 500배에 달한다. 《정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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