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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형성과 사회적 억압, 그 존재론적 인식
2009년 05월 16일 15시 47분  조회:3261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이청준 소설 「소문의 벽」을 중심으로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전짓불’, ‘소문의 벽’, 그리고 작가의 숙명

3.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작가 이청준의 문학작품을 대하면 대개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하는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욕망과 지배의 사이에서 ‘전짓불’에, ‘소문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 때로는 치열하게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체념적으로 체질화하여 억압되고 결박당한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아니면, 적어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그냥 쇠창살 속의 생활에 적응시키려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의 기억 속에 감추어진 ‘일기’를 새삼스럽게 들춰내어서(물론 작가의 ‘일기’도 그 속에 들어있겠지만) 세상에 공개해버리는 것이 작가이다. 그래도 독자들은 좋은 것이다. 익명으로 공개되는 만큼 자신은 안전하면서도 일종의 대리적인 ‘심리배설’ 내지 ‘정감조절’은 되는 셈이니깐. 그렇지만 작가한테는 항상 위험과 위협이 뒤따르게 된다. 그만큼 작가는 만인을 대신하여 ‘마음의 금선’을 튕기는 모험가이다.

그냥 상업주의에 물젖은 ‘상품생산자’로서의 계산적인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은 대개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것은 사회 제도적이고 실천 규범적인 도덕, 질서, 법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쟁취하는 ‘해방’이 아니라, 독자들의 정감세계에 호소하고 문화의 자아조절기능에 의한 변이 내지 변화를 통하여 획득하는 ‘해방’이다. 그리고 정감과 이성을 상상력(허구)에 의해 매개하는 것이 문학의 미학원칙이라고 할 때, 설령 오락성을 띠는 문학텍스트라 해도 그것이 즐거움을 통해 억압된 인간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이러한 미학원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적인 욕망 내지 동기가 이청준한테서는 누구보다 강렬하게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청준의 문학세계를 두루 돌아보면,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이념이나 구체적인 역사사건을 기표로 하여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라는 영원한 인간문제들에 대한 기의를 향해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사명감에 투철한 작가는 그만큼 고단하고 심지어는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명분이고 숙명이라면, 작가이기를 포기하기 전에는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청준, 그는 황무지에서 날아오르는 영혼의 비상학(飛翔鶴)을 꿈꾸는 작가이다. 그런 그는 언제나 무척 고단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고단한 것과 역비례하여, 그의 소설적 언어의 미로 위로 날아오르는 영혼의 비상학을 응시할 수 있는 독자들은 매우 행복하다.”1)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 등 <언어사회학서설> 연작들이 작가의 창작 동기 내지 욕망을 묻고 있다면, 「소문의 벽」은 그러한 확인 위에 작가의 명분에 따르는 책임과 숙명적인 모험정신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작가가 인간문제를 다루는 ‘전문직’임을 의심치 않았기에 그 ‘전문직’의 ‘직업의식’과 ‘직업윤리’를 분명하게 ‘규범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가적 이념과 성찰을 문학적인 상상력에 의하여 형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현실적인 인식가치를 미학원칙으로 하는 리얼리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문재원은 「소문의 벽」을 내적서사와 외적서사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이른바 액자소설 형식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소설에서는 일반적인 액자형식의 구조와는 달리, 작중화자는 내부적인 이야기에 대해 성찰적인 시각과 자기반성적인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내적서사와 외적서사는 역동적인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2)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내부적인 이야기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화자의 감성과 이성의 정화를 통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현재화시킴으로써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전형화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라캉의 네 가지 담론형식을 방법론으로 제시한 엄미옥의 연구가 흥미롭고 의미 깊다. 그는 대타자의 응시로서의 '전짓불'을 주인의 담론으로, 김박사와 안형에 의한 대타자의 지식의 강요를 대학의 담론으로, 대타자에 대한 박준과 ‘나’의 의심을 히스테리 담론으로, 그리고 작가의 글쓰기를 분석자 담론으로 확인함으로써, “이청준의 글쓰기는 욕망의 대상, 은폐된 실재를 향해 현실 속에서 늘 반성하고 회의하면서 문학적 진실, 개인적 진실을 찾아가는 윤리적 행위”가 됨을 증명하고 있다.3)

이 글은 이런 기성 연구의 연장선에서, 「소문의 벽」이 나타내는 주제와 그것을 직조하는 의미담론에 대해 재론해보려 한다.



2. ‘'전짓불'’, ‘소문의 벽’, 그리고 작가의 숙명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단지 소설형식의 측면에서만 볼 때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적서사구조는 화자인 ‘나’의 내부시점에서 박준을 두고 ‘나’와 안형, 그리고 김박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보여주고 있고, 내적서사구조는 ‘나’의 외부시점에서 박준이 쓴 세 개의 소설을 단서로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소설은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 같다. ‘나’에 의해 만들어진 액틀 안에 박준에 의해 만들어진 액틀이 있고 박준의 액틀 안에 또 세 개의 소설에 의해 세 개의 액틀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그 세 개의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하나하나 억압 요인으로 되는 사건에로의 점진적인 접근을 보여주면서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박준이 ‘전짓불’ 공포증에 걸리게 된 원인을 밝혀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를 세 개의 소설내용에 대한 논리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풀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플롯인 듯하다.

「소문의 벽」을 변용 추리소설과 현대소설이 만나는 지점에 놓인 탐색소설로 보는 관점도 이 소설의 ‘수수께끼→논리적 추리과정→수수께끼 풀기’라는 공식이 추리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4)

여기서 잠간, 세 개 소설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소설 <괴상한 버릇>의 주인공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거나 부끄럽거나 난처한 일이 있기만 하면 광 속 같은 데로 들어가 숨는다. 그런 버릇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하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오히려 생활이나 주변이 전보다도 훨씬 복잡해지고 낭패스런 일도 많아져서 그 가사의 잠을 자는 일이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길어져 갔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막 가사의 잠에 들 때 아내가 정말 한번 죽어 보기라도 하지하는 무심한 말이 그만 효험을 보고 만다.

두 번째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에서 주인공 ‘그’가 다니는 회사에는 사장 차 운전수들이 얼마 안 가서 그 사장 차 운전수 자리뿐 아니라 종당에는 회사에서마저 쫓겨나는 이상한 관례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운전수들이 회사를 쫓겨 나갔지만, 한 번도 그 이유가 밝혀진 일이 없고, 다만 몰라도 좋을 일을 알아 버린 것이 죄라는 뒷소리뿐이다. 그런데 그 내키지 않은 일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에게서 발생한다. ‘그’는 어느 날 사장을 어떤 곳에 모셔갔고 결국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되는, 실수 아닌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사장의 당부대로 순종을 맹세했음에도 종당에는 신경과민 증세가 생기고, 주의력 결핍 때문에 운전수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회사를 쫓겨나고 만다.

세 번째 소설 <G와 심문관>에서 주인공 ‘G'는 어느 날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좌석버스를 탔는데, 환상 속에서 어떤 음모의 피의자로 체포당하여 정체불명의 심문관으로부터 취조를 받는다. 그러나 심문관은 음모사건과는 관계없이 그의 생애에서 기억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식 없이 진술할 것을 강요한다. 진술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G’의 과거고백은 온통 ‘전짓불’과 관계된 일들뿐이다. 6·25전란 때에 ‘전짓불’의 공포가 생긴 이래 그의 과거의 기억은 온통 ‘전짓불’투성이였다. 대학시절, 군영생활, 가정생활, 교우 관계 모두가 그랬다. 심문관은 진술을 중단하고 심판을 내렸는데 말할 것도 없이 유죄였다. ‘전짓불’만 이야기하는 ‘G’의 진술은 자신에 관한 정직한 진술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술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술 태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유죄 심증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짓불’과 자기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G’가 받고 있는 형벌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는 ‘나’의 하숙집에 느닷없이 나타나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자처하는 박준이가 사실은 소설가 박준일임을 알게 되고, 또 바로 그의 소설이 문학담당인 안형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는 데로부터 ‘나’의 박준의 공포증에 대한 수수께끼풀이 탐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소설은 그냥 어릴 때부터의 괴상한 버릇이라고 하였으니 공포증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두 번째 소설도 현대판 ‘임금님의 귀’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박준의 공포증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혀낼만한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소설에 와서야 그의 공포증은  6·25전란 때 생긴 정체불명의 ‘전짓불’에 대한 공포로부터 생긴 것이고 그것이 작가로서의 진술공포증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이라는, 추상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에로의 점진적인 추리를 통하여 ‘나’는 마침내 박준의 진술공포증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야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인 추리의 결과는, 이 소설의 주제가 6·25전란의 소재, 1970년대의 창작연대라는 설정에 의하여 특정시대에 대한 정치적 반발에 있는 듯이 보이게 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소설의 생명도 특정시대의 정치참여소설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액자소설형식을 갖춘 듯한 「소문의 벽」의 구조를 다시 곰곰이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소설의 구조가 이른바 규범적인 액자소설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다른 점이 이 소설의 서사담론의 특징임을 보아낼 수 있다.

이 소설의 내적구조에서 ‘나’는 외부적 관찰자의 신분으로 박준의 세 소설을 찾아 그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이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갈등과 정신적인 자각증상을 앓는다. 그리고 외적구조에서는 플롯의 전개를 이끌어가면서, 내부적 행위자의 위치에서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이다. 이와 같은 텍스트의 이중구조는 외적구조가 주로 내적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역할만 하는 일반적인 액자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김동인의 「배따라기」나, 훨씬 고전으로 올라가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 소설의 구조는 중층구조 또는 이중플롯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인 ‘나’가 다만 사건진술에서 사슬고리를 연결하는 역할만 하는 ‘서술자’가 아니라,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이라는 확인이야말로 소설의 주제를 포착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에서는 이른바 일반적인 액자소설과는 달리 두 개의 플롯을 교차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는데, ‘나’를 주인공으로 확인할 때, 내적구조가 호응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되고, 반대로 외적구조가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작중인물이 신변적인 변화 내지 성격적인 발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는 계기로서의 사건을 말한다. 이 소설에서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은 ‘나’와 안형, ‘나’와 김박사의 갈등으로 구성된 외적구조에서 전개된다. 이 외적구조의 서사담론에서 플롯의 발전을 동기화하는 그런 신변적인 변화 내지 성격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박준이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화자인 ‘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와 발전의 결과가 나의 사표로 이어고 있는 것이다.

박준의 경우, 그의 현재 행위는 어떤 신변적인 변화나 성격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수수께끼풀이는 이미 진술공포증에 걸리고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과거에 대한 추적에 다름 아니다. 즉 그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수수께끼풀이는 탐정소설의 연역추리과정과 다르지 않다. 물론 탐정추리소설에서는 이러한 연역추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발전과 인물의 성격변화는 기본플롯을 구성한다. 탐정추리소설에서 논리적인 추리 내지 해석을 담당한 탐정은 해설자의 역할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문의 벽」의 화자인 ‘나’는 그러한 해설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박준의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는 애초에 ‘나’와 안형과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나’는 안형과의 문학관 차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편집장인 ‘나’와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 그리고 작가 박준이라는 인물구도는 합리적인 대응관계를 성립한다. 그리고 이런 ‘삼각관계’에서 보면, 박준과 그의 작품을 두고 편집장인 ‘나’와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기본 플롯을 이루고 있음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할 것이다. 플롯의 발전과 함께, 과거적인 결과물인 박준에 대한 수수께끼풀이 과정에서 마침내 사표에까지 이르는 것이 바로 화자인 ‘나’인 것이다. 말하자면 소설의 시작도 그랬지만, ‘나’의 신변 변화나 성격 발전의 발단은 광인행세를 하면서 불쑥 나타난 박준이 ‘나’의 편집장 일과 무관하지 않은 소설가 박준일이고, 그의 소설이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의 서랍 속에 세월 모르고 잠자고 있다는 사실이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박준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은 결국 안형과의 갈등, 김박사와의 갈등 속에서 겪고 있는 ‘나’의 심리적 방황과 정신적인 고민이 자각과 각성에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박준의 과거들이 ‘나’의 발견을 통하여 다시 박준의 성격발전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찰을 통하여 ‘나’의 신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는 동기가 될 때, 박준과 그의 세 개의 소설이야기는 이러한 갈등과 변화에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호응적인 사건임에 다름 아니다.

단지 박준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는 시각에서 보면, 사건의 발전은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이라는, 모호하게 추상적인 것에서 투명하게 현실적인 것에로의 점진적인 추리과정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은 자칫 우리의 사유를 특정시대에 대한 비판이라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이 작품을 한정시킬 수 있고, 역시 통속적인 추리소설의 오명을 쓰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나’가 소설의 주인공이고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라고 확인하면, ‘나’와 안형의 갈등이 중심적인, 동기적인 사건이 되고 그 발단의 초점은 안형의 서랍에 갇힌 박준의 소설 <괴상한 버릇>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와 안형은 <괴상한 버릇>에 대한 문학 관념과 태도에서 이미 갈등을 빚고 있다는 말이 되며, 바꾸어 말하면 ‘나’나 안형 모두 이 작품의 진가에 대해 이해하고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안형의 말 못하는, 이른바 사회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말썽, 그의 특정한 문학관념이나 태도, <괴상한 버릇>이 괴상한 버릇이 생기게 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압박 요인들을 말해줬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가 이 작품의 알레고리적인 수법의 의미를 그 나름대로 잘 알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중의 두 작품은 결국 이를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결국 안형은 그러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권력적인 폭력이라는 상징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 소설을 발표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징성은 소설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기법에서 확인되기 전에 벌써 안형의 특정한 문학관념과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고, 또한 박준이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안형이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 앞에 문학적인 양심을 지킬 수 없었거나 문학작품의 주제를 언제나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용속한 사회정치학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괴상한 버릇>이 그러한 버릇이 생기게 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압박 요인들을 말해주지 못했다는 주장이 그의 특정 문학관념을 말해준다면, 그것이 연재중단 된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의 작가 박준이 쓴 것이기에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은 이기적인 계산에 의해 변질된 그의 문학적 양심을 말해준다. 아무튼 <임금님의 귀>에 해당하는, 연재중단 된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과 <괴상한 버릇>의 작가가 동일한 작가라는 사실이 이러한 정치적인 문학관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안형의 신경을 자극했음이 분명하다. 즉 정체불명의 심문관이 ‘G’에 대한 심문에서 진술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가 문제라는 식으로, 안형도 <괴상한 버릇>이 어떤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나타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썽 있는 인터뷰와 연재중단 된 소설의 작가 박준이 쓴 작품이라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또 그러한 선입견이 그로 하여금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의미가 독자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거나 ‘시대양심’을 배반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한 것이다. 편집인 그로서는 ‘공연한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소설을 서랍에 감금시켜버리는 것이 그냥 당연한 처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상징성을 실존적인 주체의 형성에 가해지는 사회적인 억압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특정시대담론을 넘어서서 주체와 타자, 인간과 사회라는 보다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인간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본 후, 아직 다른 두 소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벌써 이와 같이 안형과는 전혀 다른 보편적인 상징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 더욱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박준의 공포증에 대한 ‘나’의 ‘수수께끼풀이’ 과정은, 결국 ‘나’와 안형의 의식 대결에서 ‘나’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증적인 논거를 찾아 나선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나’와 안형과의 갈등이 박준의 소설 <괴상한 버릇>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의 발견, 발굴과정은 ‘나’가 주장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상징의미를 논증하는 귀납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귀납과정을 통해 확인되는 <괴상한 버릇>의 의미담론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의 맥락 위에, 다시 이념적인 성찰의 여과를 통해 초월적으로 지각하는, 사회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나’에 의해 확인되는 박준이라는 작가의 의식층위의 비약에 따르면, 세 개 소설의 순서는 <G와 심문관>→ <벌거벗은 사장님>→ <괴상한 버릇>으로 재배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을 도출해내는 작가의 상상력에도 부합되는 결론이다.

그런데 만약 <괴상한 버릇>이 과연 박준의 진술공포증을 밑그림으로 하였고, 박준이 진술공포증에 걸리게 된 원인이 6.25전란의 상처 때문이라면, 이 소설은 안형의 말처럼 그러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억압 요인을 말해주지 않음으로 하여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6.25전란의 상처는, <괴상한 버릇>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인공포증 해석에는 하나의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사례로 될 수도 있겠지만,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원인으로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박준은 6.25전란의 상처로 진술공포증에 걸려 작가로서의 진술행위인 창작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작한 소설이 문학 담당 편집에 의한 발표중단, ‘서랍 속의 감금’, 인터뷰 기자에 의한 언론의 억압 등에 부딪치면서 진술공포증후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진술욕망은 어릴 때에 받은 6.25의 상처가 무의식 속에 응어리져 생긴 진술공포증에 의해 스스로 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가시화된 후에 사회로부터의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한 사회적 억압에 의해 그는 마침내 진술공포증에 걸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6.25의 ‘전짓불’이 준 상처가 박준의 진술공포증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체불명의 ‘전짓불’이 박준이로 하여금 6.25에 겪은 ‘전짓불’에 의한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상처가 오늘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불행이 과거의 상처를 되살아나게 하는 경우이다. 그렇게 되살아나는 상처는 오늘의 불행에 대하여 그냥 오늘의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인간문제에로 인식의 비약을 가져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인 비약이 6.25의 ‘전짓불’을 정체불명의 ‘전짓불’로 추상화시킬 때, 이 소설에서의 ‘전짓불’은 박준이 6.25때 겪은 구체적 상처의 잔존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때 그것은 이미 기의가 확장되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자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회억압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실제작가 이청준에 의해 소설 속의 작가 박준이 현실에서 그러한 ‘전짓불’에 부딪치고 있다면, 박준에 의해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도 일상생활에서 늘 그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에 부딪치고 있다. 대학시절, 군영생활, 가정생활, 교우관계 모두에 걸쳐 온통 ‘전짓불’투성이인 것이다.

그런데 추상화, 상징화 된 이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억압 요인으로 작용하려면 그러한 ‘전짓불’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작가의 상상력은 막연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문의 벽」에서 그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을 반사하는 반사체는 바로 ‘소문의 벽’이다. 박준의 진술욕망은 번번이 이러한 ‘소문의 벽’에 부딪쳤고, 그것은 마침내 진술공포증을 유발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괴상한 버릇>이 발표될 수 없는 원인, <벌거벗은 사장님>이 발표중단 되는 이유, <G와 심문관>을 꾸러미 채로 동생한테 맡겨둘 수밖에 없는 억압 요인은, 일찍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박준의 말 속에 예언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역시 ‘소문의 벽’이었다.

여기에서 ‘소문의 벽’은, 엄미옥이 앞의 연구에서 제시한 라캉의 네 가지 사회적 연대의 담론방식 중 대학의 담론을 차용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담론은 주인담론이 안정화된 상태에서 계속 확장되고 정교화 되는 과정, 완성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여기서 행위자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다. 반면 그 행위의 대상은 아직 체계밖에 남아있는 잔여, 잉여지대이다.5) 그러니깐 대학의 담론은,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행위자가 주인의 담론을 담당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의한 주인의 담론이 그 폭력성을 은폐하고 상징계에 들어갈 때, 이러한 전문적인 행위자들이 지식과 기술의 제도화 된 장치를 이용하여 그것을 대리 수행하는 것이다. 「소문의 벽」의 문학담당 편집 안형, 신경병원 원장 김박사, 신문사 기자 등이 이러한 행위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제도적인 장치에 의한 전문적인 위치에 선택된 것만큼이나 주인의 담론을 정당화하고 사회화시키고 있다. 이들이 쌓아가는 ‘소문의 벽’에 의해 주인의 담론은 ‘체계밖에 남아있는 잔여, 잉여지대’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괴상한 버릇>은 주인의 담론이 지식과 기술에 의해 제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소문의 벽’을 통하여 주체의 형성을 억압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해서 무리하진 않을 것이다. 괴상한 버릇이 생긴 것에 대해 꼭 구체적인 압박요인을 밝힐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압박요인들이 흔히 ‘소문의 벽’에 가리어서 그 정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 마침내 사표를 쓰게 된 것도 결코 특정한 권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소문의 벽’을 쌓고 있는 안형이나 김박사, 그리고 R사 기자와 같은 인물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특히 문학 담당 편집인 안형에 의하여 ‘소문의 벽’은 작가 박준의 소설을 서랍 속에 가두어 넣고 그더러 진술공포증에 시달리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직접적으로는 편집장인 ‘나’의 권리마저 무력하게 하고 이른바 시대적인 문학적 양심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들이 쌓은 이른바 ‘소문의 벽’에 부딪친다는 것은 특수한 개인과의 모순과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제도화 된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들을 대행자로 하는 지식담론과의 충돌이지만, 그 지식담론이 폭력성을 띠게 되는 것은 그것을 제도화하는 권력의 폭력성이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나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전짓불’을 외면하고 ‘소문의 벽’은 해석되지 않는다. 지식담론이 주인담론을 대리 수행하듯이 ‘소문의 벽’이 언제나 ‘전짓불’을 반사하는 것이라면, 그 ‘소문의 벽’은 아무래도 ‘전짓불’이 비춰야만 반사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반사체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전짓불’이라는 광원이 없이는 반사체로서의 ‘소문의 벽’도 사회에서나 소설에서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문의 벽’에 대한 해석은 작품의 의미를 내재적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짓불’의 복사 면에로 끊임없이 의미를 확장해가는 작업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문의 벽’이 보편적인 사회적 억압의 상징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우선 ‘전짓불’이 보편적 의미에서의 제도나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할 때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문의 벽」에서의 ‘전짓불’이 6.25나 창작연대라는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을 때 ‘소문의 벽’도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상징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소문의 벽’에 반사되어 사회적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은 정체불명의 ‘전짓불’이다. 정체불명의 ‘전짓불’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반사체인 ‘소문의 벽’에 의해 굴절되었기 때문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자일지라도 그들에게 비추는 ‘전짓불’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준과 화자인 ‘나’, 그리고 실제작가 이청준은 정직한 진술을 하려는 욕망에서 복수로 묶인 자유의지의 ‘주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비추는 ‘전짓불’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술의 욕망을 억압하는 ‘전짓불’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의미에서만 동일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확장에 의하여 ‘소문의 벽’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주인담론만을 의미하지 않고,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과의 충돌은 훨씬 보편적이고 시대초월적인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갈등과 고민과 선택은 특정시대를 초월하여, 존재론적으로 존재자와 사회적인 억압이라는 보편적인 인간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소문의 벽’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적인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특정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의한 폭력일 수 있지만, 존재론적인 존재자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의 영원한 부산물인 ‘소문의 벽’인 것이다. 그리고 ‘소문의 벽’이 사회의 영원한 부산물이라면, 작가는 숙명적으로 ‘소문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작가인 박준과 화자인 ‘나’의 히스테리담론을 통한 내포작가의 분석담론은, 실제작가 이청준의 작가의 숙명에 대한 자각과 리얼리즘적인 창작이념으로서의 정직한 진술에의 욕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3. 나오는 말


이청준은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작가와 글쓰기에 대해 다루고 있거니와, 「소문의 벽」에서도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전짓불’이 제도적인 억압이나 권력적인 폭력이라면, ‘소문의 벽’은 그것을 익명화하고 지식·기술화하는 사회적인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욕망도 다만 특정시대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는 ‘소문의 벽’을 쌓는 사회적인 폭력과의 대결 속에서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숙명적으로 ‘전짓불’을 마주하고 ‘소문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의 존재론적인 모순은 근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와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요, 파시즘이요 하는 것은 다만 특정시대에 의한 갈등의 특수표현일 따름이다. 오히려 존재자와 사회적인 ‘소문의 벽’과의 갈등은 영원한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든 어쩔 수 없이 틀 속에 갇힌 존재이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면 또 새로운 틀에 갇힌다기보다는, 기존의 틀을 깨드리기 위해 새로운 틀을 만든다. 그래도 그것을 원점의 회귀가 아니라 나선형의 발전이라고 본다면, 인간은 그런대로 자유와 해방을 향해 발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때로는 직접 ‘전짓불’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소문의 벽’을 허무는 것이 진정 작가의 숙명이라면, 작가 이청준은 글쓰기를 특정한 시대를 초월하여 현실의 존재론적인 인식가치를 확인하려는 문학의 리얼리즘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소문의 벽」, 󰡔눈길 外󰡕(한국소설문학대계 53), 동아출판사, 1995.

문재원, 「이청준의 <소문의 벽> 연구」, 󰡔국어국문학󰡕(33), 1996.

엄미옥, 「󰡔소문의 벽󰡕 연구-라깡의 네 가지 담론을 중심으로」, 󰡔시학과 언어학󰡕, 2002.

우찬제, 「‘틈’의 고뇌와 종합에의 의지」, 󰡔눈길 外󰡕(한국소설문학대계53), 동아출판사, 1995.

이윤옥, 󰡔다시 태어나는 말-이청준 소설 읽기󰡕, 문이당, 2005.

임성래·이정옥, 「변용 추리소설의 소설적 의의-󰡔최후의 증인󰡕과 「소문의 벽」의 비교를 중심                 으로」, 󰡔대중서사연구󰡕(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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