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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채만식 연구』, 국학자료원, 200. 6
2009년 05월 16일 21시 30분  조회:1741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예술작품의 명백한 원인은 그 창작자인 작가 자신이라는 것, 문학작품은 작가의 관념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 그 관념은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시대의 결과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작품이 반드시 작가 자신의 표현은 아니라 하더라도 작가의 체험이 기반이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의 이해에는 작가의 전기에 대한 고찰은 필연이다. 곧 작가의 생애와 성격 세계관 등에 관한 고찰은 필수적이라 본다.(49-50)

 ...현실의 인식과 문학적 실천의 방법으로의 리얼리즘의 조류는 1920년대 말에 논리성을 갖추게 되고, 30년대 전반의 변증법적 리얼리즘, 중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후반의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변전하면서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의 어두운 현실극복이라는 대전제와 관련하여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50)

 리얼리즘은 현실의 일상적인 문제들의 복사 내지 모사가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찾아 이를 '미적 형식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본질이란, 객관적 현실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역사적 환경요소들에 대하여 깊고 넓은 이해와 전망을 드러내야 한다는, 이른바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의 논리에 착안하는 것을 말한다.(51)

크로포트킨(1842~1921)...그는 사회주의 일파 중에서 무정부주의운동 곧 아나키즘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고드윈, 브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의 근본사상은 '사회적 부의 공동소유'에 목표를 두고 있다. 경제적 공동소유와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최종 목표에 있어 이들은 다른 유파와 견해를 같이하지만, 폭력적인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는 만큼, 권력탈취를 수단으로 삼는 조직이나 정당에 의해서 평등사회가 도래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르크스 쪽에서 볼 때 분명 이상주의 쪽에 서게 된다. 또 이들은 피동적 혹은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의 양심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하여 이런 독립적인 인격체들의 집합체를 민중이라 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중앙집권적 교조주의를 고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이었던 것이다.(79)

 무지하고 순박한 농민, 노동자, 소시민의 본성은 천편일률적인 혁명논리에 따를 수 없다. 이들의 미래관은 투쟁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에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한 대가에 따른 삶에 자족한다.(88)

 사실 1936년부터 38년 말까지의 3년 동안은, 채만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맹렬한 활동기였다.
 이 시기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은, 프로문예 작가들에게는 이데올로기의 탈피를 서두로게 하였고, 대부분의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의 관심을 도시와 문명 또는 농촌과 자연으로 확대시켜 삶의 양상을 다양하게 제시하도록 하였다. '묘사론'의 대두, <<구인회>>를 통한 순수문학활동, 심리주의소설의 등장도 그러한 예였다.(109-110)

 1939년 초에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되면서 작가들이 군국주의에 동조하는가 하면 그에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일제는 급기야 언어를 말살하는 경지에 이르자 채만식의 문학에도 일관성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사건들이 1936년부터 줄을 잇는다. 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이 날로 심해지고, 베를린올림픽대회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신문이 정간되었다. 이어,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암시시켰고, 신사를 참배하게 하였다. 일본어를 국어라 바꾸어 전용하게 하자 민족의 언어가 말살되었다. 지원병제도를 실시하여 전쟁에 참가시켰고,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다. 이어 <대동아신질서운동>을 전개하여 한국민족의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어간에 일부의 지식인들은 <조선문예회>(1937.4)로부터 <황도학회>(1940.12)를 결성하여 문인으로서 일본화의 선도역할을 맡게 된다.(110)

 한편, 프로문학 퇴조 이후의 비평계와 창작계의 관심은 리얼리즘에 집약되었다. 카프의 두 차례에 걸친 검거가 겉으로 이데올로기문학의 퇴조를 보인 듯 하였지만 내용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을 통하여 창작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안막, 안함광, 김두용, 한효 등에 의한 논의가 여전히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110)

 금광은 1930년대 '조선의 사대광'(잡지 금광 미두 만주를 이름. 우석, 「현대조선의 4대광」,『제일선』, 1932. 9, 82쪽.-저자 각주)의 하나이기도 했다.(111)

 절대 권력 아래에는 절대복종만이 있게 마련이다. 즉 권력을 지향하는 가해자들, 그 아래에 굴종으로 일관하는 무리들, 이렇게 양 집단을 이루게 마련이다. 권력 주변의 존재들은, 항상 권력의 중심권에 들기 위하여 위로는 비굴한 굴종자가 되어 아부를 일삼고, 아래로는 잔혹한 학대자가 되어 남을 굴종시키기에 혈안이 된다. 이에 굴종자들은 오직 인내로써 온갖 학대를 감내하는 무한경쟁의 체제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권력 주변에는 기생하는 아류들이 다투어 그 핵심 가운데 부상하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반면, 여기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자들은 막강한 권력 앞에 온갖 학대를 감내하므로 삶을 유지하려 드는 것이다. 이로써, 양자는 서로 공생관계가 형성되고 이런 관계는 점차 열도가 심화되어 정신병적인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폭군이나 독재자의 시대가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120-121)

 ...왕성한 식욕을 쫓아 대상을 하나 하나 정복해 나가는 마신(魔神)에게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 나가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123)
 리얼리즘의 본령이, 현실의 핵심적 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할 인물창조에 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리얼리즘소설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들인 것이다.(134)

 어떻든 작가의 이런 매도는, 시대와 민족을 외면한 이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공격이었다. 수난의 현실에서 이탈한 삶에 대한 혐오이다. 곧 수용과 거부의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가 아닌 공격인 것이다.(148)

 한편, 「천하태평춘」의 탁월한 성과는 많은 지적대로 그 특유한 서술기법에 있다. 이미 당시의 김남천과 안함광이 지적한 요설체는 이를 말한다....창극의 공연장은 양반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통매의 장이었다. 종횡무진 퍼붓는 요설(饒說)은 시공을 초월하여 수난 받은 국민의 감정을 표출하는 통매장으로 연창자나 관객 모두가 대리만족을 얻어왔음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여기 작가는 판소리 연창자로서 직접 그리고 때로는 관찰자로서 대상을 독자 앞에 드러내어 끝없는 타매로써 추락시키고 끝에 이르러 자살하는 "사형집행인"의 특권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필연적 결과는, 문학이 일반 독자 대중의 이해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그의 문학관과도 일치하기 때문이었다.(149-150)

 이렇게 볼 때, 채만식의 풍자소설은,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설화문학의 특징"을 십분 발휘하여 다양한 효과를 거둬들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곧, 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고지(告知)의 경로를 통하여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설화문학의 효과는 새롭게 발휘된다. 위 작품에서 극화된 화자는 우둔한 대상을 독자 앞에 내세워 대화에 직접 참여케 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의 우행을 바라보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양자 사이에 끼어 든 화자는, 때로 일방적인 요약이나 술회로써 우행을 축소 혹은 확대시키면서 자신의 가치관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설화문학의 특질을 채만식은 이미 30년대에 되살려 자신의 세계관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채만식 소설미학의 하나로 자리잡게 도니 것이라 하겠다.(151)

 문인들의 언어를 빼앗는 일은 죽음에 대신하는 형벌이기도 하다.
 달리는 문인 모두를 외국에 추방하는 일, 이런 가혹한 형벌을 일제는 한국의 작가들에 가했던 것이다. 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칙령으로 발표하여 17세 이상의 남자들을 현역병으로 차출할 길을 터놓은 일제는, 동년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조선의 교육제도를 일본의 교육제도와 일치시켰다. 이로써 중등학교에서 한국어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라 불러 교육하게 하므로 민족의 언어를 말살시켰다. 이어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939년 초부터는 전국 각 기관과 부락의 가가호호에 단위별 애국반을 조직하여, '성전(聖戰)'이란 미명하에 국민 모두를 대륙침략에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가혹한 정책의  대리자인 미나미총독은, 1939년 5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란 임원회를 창설하는 회의석상에서 소위 '내선일체'를 주창하였다. 이른바 '내선일체는 반도통치에 있어 최고의 지도목표로서 양국의 형태는 물론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 일체가 되는 것이라"(기미지마 가즈히고[君島和彦], 「조선에 있어서 전쟁동원체제의 전개과정」,『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청아출판사, 1988, 165~178쪽 참조.-저자 각주)는 선언으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말살하는 가공한 포고였던 것이다. 이런 선언이 있던 동년 10월 29일에는, 이광수, 김동환, 사도우 기요시[佐藤淸] 등이 문인들의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춘원은 이 자리에서 "황국적 신문화창조를 위해서 용왕매진할 것을 선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스스로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어 1940년 2월에 <창씨개명>이 시행되면서 문인들이 하나 둘 이름을 바꾸었고, 8월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다. 이로써 '황국식민'이 된 작가들은, 하나 둘 일본어로 쓴 작품을 『매일신보』나 『인문평론』에 게재하여 소위 '황도문학'을 실천하고 있었다.(155-156)

 이러한 상황에서도 현실을 거부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맞섰던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김광섭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적지 않은 작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 혹은 우회로써 비끼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현진건의 「무영탑」(1939)이나 「원효대사」(1940), 김동인의 「대수양」(1941) 등은 역사의 세계로 회귀하거나, 최명익, 안회남, 허준 등의 심리소설은 자기만의 협소한 내면세계로 빠져드는 것들이었다. 계용묵, 김동리, 주요섭, 황순원, 안수길, 최태응, 최인욱 등 신진작가들은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인간성을 존중하거나 무속이나 주술적인 세계에 빠져 삶의 신비와 원형을 찾아 나서는 것들이었다.(157)
...한국문단에서의 심리소설은, 30년대 중반 문단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책으로 등장하되 풍자문학과 함께였다.(158)

 여기서 말하는 심리소설이란, ...개인적인 면에서 고립되고 유폐되어 무력한 주인공의 심리적 현상, 곧 감각, 기억, 감상, 환상, 통찰력 등의 다양한 정신적 요소를 표출해 내는 소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법에서,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의 내심에 대한 관찰과 비판 그리고 조소는 물론하고 나아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사용한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험프리가 말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정신적 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언표(言表)이전 수준의 의식상태를 탐색해 내는 소설"(로버트 험프리 저, 천승걸 역, 『현대소설과 '의식의 흐름'』, 삼성문화문고(187), 1984, 15쪽.-저자 각주)인 것이다. 또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에는 작가가 이야기 가운데 개입하는 '간접독백'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직접독백'이라는 두 가지 경우를 포함한다. 이 두 경우는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가 각기 달리 애용한 수법이기도 하다.(158-159)

 한편, 고난에 처한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벗어나 순수의 세계로 지향하는 일은 흔히 있어왔다. 적자생존의 숨가쁜 현장으로부터 후퇴하여 사생활의 협소한 공간으로 움츠러들거나 내심의 세계로 침잠이었다. 30년 초반의 순수시나 중반의 순수문학도 그러했다. 때로는 표현기교에 치중하거나 도시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복귀도 하였다. 병적이고 퇴폐적인 심리소설의 침잠도 그의 하나였던 것이다.(162)

 지식인의 진로가 자의적인 것이 아닐 때, 바꿔 말해서 순응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라 한다면, 때로는 순응 아닌 의미 없는 행동의 반추가 주체적 생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30년대 말의 지식인으로서 순응을 거부하고 끝없는 사고의 반추를 계속하는 일이야말로, 두텁고 투명한 얼음 속에서 마음과 눈알을 굴림으로 자의식의 존재를 상대에게 확인시키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168)

 당시의 문인들이 주동이 되어 활동한 공식적인 단체로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황도학회>, <조선문인보국회>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채만식은 <조선문인협회>와 <조선문인보국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위의 후자는 전자가 확대된 단체였던바,...(187)

 문인들이 대일협력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문예회>가 조직되면서부터였다. 최남선, 이광수, 김영환과 일본인 고다이 이노쓰게[高大市之助]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이 단체는, 문예와 연예활동의 정화와 선도 그리고 그 자체적인 통제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이 선도를 구실 삼아 문화계를 통제하고 총독정책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문인들은 직감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채만식의 경우에도 이 단체의 결성에 대하여 분명한 거부의 입장이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의 이상>에 반대하면서 '통제'를 거부한 글(「한 개의 사상(事象)으로 봅니다」, 백광, 1937.6.-저자 각주)이 이를 대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에 「탁류」의 연재를 계획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187-188)

 1939년 10월 29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문인협회>는, 춘원을 회장으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등을 간사로 선임한 친일 단체였다. 이 협회의 결성에 앞서 춘원은 여러 문인들 앞으로 결성 취지서를 전달하였고, ...(188)

 40년 후반은 언어가 말살되고 창씨가 개명되던 시기였다.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의 낭독을 강요받던 시기였다. 작가로서 황도정신을 실천해야만 하였던 시기였다. 이듬해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되 <매일신보>만이 간행되고 있었다. <조선문인협회>회원 중에는 창씨를 개명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춘원이 선서한 대로 "황국적 신문화 창조를 위해 용왕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189)

 여기서 '사소설'이란, 작가 자신의 신변잡사에서 전기적 세목은 물론 의식과 감정 지각 등에 이르는 내심가지를 드러내는 소설을 말한다. 또한 사소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만큼 화자인 '나'는 1인칭 소설과도 공통점을 갖지만, 1인칭소설의 주인공이 허구의 '나'일 수도 있음을 감안하면 사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또한 화자는, 작가 자신의 체험과 사고의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를 전함으로 개인의 좁은 세계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반면, 자신의 모습을 독자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문제에 성실한 해답을 주는 장점을 갖는다고 이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문제란 작가 개인을 넘어서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나아가서 민족 전체의 삶과 원리에 직결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203-204)

 1935년 1월 『조선』·『조선중앙』·『동아』의 삼대 일간지가 일제히 취급한 고전문학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문학유산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학을 건설하자는 데 뜻이 있었다. 이 논의가 점차 학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후반기에는 민속학에서도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어 1938년 6월, 『조선일보』의 「고전부흥의 현대적 의의」는, 민족말살의 현장에서 사라져 가는 자신을 수호하려는 지식인의 내면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역사소설의 유행도 그 하나의 예로 보겠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히 고전에 국한되거나 복고주의 혹은 상고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문화의 보전과 발전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특히 문단의 거대한 관심사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215)

 고래로 민족의 명절 추석은 삶을 정화하는 계기였다. 풍족한 음식과 즐거운 놀이로 삶의 자유와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는 계기였다. 안으로 가족과 친척, 밖으로 이웃과 민족 전체가 동질성을 회복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였던 것이다.(217)

  비극의 어원은 희랍어의 Tragodia 곧 '산양(山羊)의 노래'라는 합성어에서 왔다고 한다. 즉 제물로 바쳐지던 양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말이다. 즉, 인간에게 희생당하는 순진한 양의 처절하고도 비통한 절규인 것이다. 신에 바치는 제사를 위해서 무리 가운데 선발된 양은 주인에 이끌려 의기양양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제단 앞에 이르러 죽음을 감지한 양은, 처절하게 울어대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순종이 체질화된 양은 주인의 행위에 배신감을 울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한 자의 저항은 엄두를 낼 수도 없다. 비통한 울음의 호소만이 유일한 길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죽음 앞에서 절규도 무위일 뿐이다.(322)

 문학에 관하여 자기 나름의 인식 없이 출발한 작가란 있을 수 없다.(342)

 현재의 사실이나 생활의 단면을 열심히 추상하여 이를 '여실히' 묘사해 내는 데 작가의 소임이 있다고 본 것은 프로베르로 대변되는 자연주의의 작가들의 미의식이기도 했다. 이들은 미의식을 대상의 발견과 묘사에서 두고 있었다. 묘사에 있어 이들은, 대상의 움직임에 따른 성격의 해부나 심리의 묘사라던지 현실 폭로의 비애나 환멸의 비애 등의 묘사를 큰 덕목으로 삼았던 것이다.(343)

 젓의 약탈. 세상의 허구 만흔 약탈 가운데도 가장 잔인스러운 약탈일 것이다. 인간에 나온 지 한달 된 놈이 약탈을 당하고 가튼 두 달 된 놈이 약탈을 하는데 거기에 어미가 가세를 해서 저도 한 목슬 따먹고(「문학인의 촉감」(채만식-인용자 주),『조선일보』, 1936.6.6~7.-저자 각주)

 제 젖을 빼앗기고 죽은 어린 것, 이 비극의 주저옫'인공에게서 작가는 민족의 현실을 인식한다. (365)

 ...그 열정을 기법으로 위장하여 강화된 논리를 피해나가려 한 것이 풍자였던 것이다. 이는 창작불능의 '위기'를 타개하고, 아울러 자신의 파멸과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은 것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정공법'이 못되어 '문학의 정도'는 아니지만, 부득이 이런 방법이나마 쓰고자 하였던 것이다.(370)
 채만식은 당시의 '농민소설'과 '세태소설'에 대하여도 특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농민소설은, 소재와 무대가 반드시 농촌이어야 함은 물론 그 생산과정을 취급하되 농민의 절실한 생활감정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작가의 소시민적 연민에서 만들어진 농촌소설이란 영원히 닫혀진 철비(鐵扉)를 여는 일에 비유하였다.(371)

 여러 각도에서 보는 그의 풍자문학은, 요컨대 죽음의 현실 앞에서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 역설이 다름 아닌 방법이요 기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비극의 현실을 사욕과 안위를 도모하는 일에 이용하는 내적 존재들에 대해서였다. 여기 그 구체적인 세목을 대로내지 못한 점은 작가와 더불어 시대적 한계라 말할 수 있다.(371)

 사실, 자연의 미를 보편적인 가치기준으로 논할 수는 없다. 자연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을 주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때로는 한없이 냉정하고 비정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자연의 미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요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라 말할 수 있다.(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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