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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 소명출판, 2001
2009년 05월 16일 21시 32분  조회:1539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일제 하 조선의 문학인들에 있어 식민지적 현실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문학적으로 의식되고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였다. 조선에서 근대문학이 식민지화 과정과 더불어 배태되어 형성·발전했다는 사실은 당대문학인들의 근원적인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조선 근대문학의 이식성이라 이름지을 만한 이같은 현상 앞에서 당대의 문학인들은 그 근대문학의 독자적 발전이라는 명제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작가와 시인, 비평가들에게 서 그 궤적을 발견하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11)

 채만식 문학이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양상 가운데 하나로서 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지적할 수 있다.(15)

 본 연구는 채만식의 문학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상호텍스트성, 특히 패로디 경향을 조선족인 근대문학의 수립이라는 문제의식의 발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 자전적 소설에 대한분석이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작가적 수리 및 그 대응 과정을 보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문학의 패로디적 성격에 대한 분석은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조선 근대문학의 정체성 추구의 양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16)

 상호텍스트성, 좁게 말해서 패로디가 채만식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형상화 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이에 독자적인 조선 근대문학의 수립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이 집중되어 있다...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는 여러 기법들 가운데 패로디는 특히 선행텍스트와의 차이를 추구하는 의식적인 모방이다. 모방이되 차이를 통한 독자적인 주제의 추구라는 점에서 패로디는 근대문학의 서구적 모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패로디는 서구와는 다른 근대문학을 수립해가지 않을 수 없는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는 매우 중요한 기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패로디는 전유를 통한 새로운 정체성의 수립이라는 탈식민화 기획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식민화 과정은 불가피하게 문화(문학)의 이식 또는 혼합을 초래한다. 이같은 자기 위기 없이 근대적 행정에 들어설 수 없음은 식민지 문화(문학)의 운명이다. 문제는 이 운명을 거절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운명을 어떻게 처리함으로써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해 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묻고 답해져야 할 문제이다. 이때 모방하되 모방하지 않는 의식적인 모방으로서 패로디의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22-23)

 사회적으로 규정된 '나'라는 존재에의 의식이, 사회라는 것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그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것에 대한 탐구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상황, 이것은 당대 조선의 문학인들이 처한 공통적인 현실이었다. '나'라는 존재에의 몰입이 자기를 제국(帝國)의 심연으로 이끌어 가버릴 수도 있으리라는 불안은 일제 하 문학인들의 정신에 한결같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61)

 여성의 해방이 없이는 자아의 해방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72)

 부성(父性)의 상실이 조선에 있어서는 식민지화를 상징함은 상식...(83)

 그 역사적 보존의 가치가 결여된, 또는 더 이상 그 본질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할 수 없는 정신이 그 무용성에도 불구하고 실재로서 존재할 때 그것은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85)

 『태평천하(太平天下)』의 세계는 속죄의 세계가 아니라 죄 그 자체의 세계이다. 어둠의 심연에 빠진 『태평천하(太平天下)』의 인물들은 서로를 얽어맨 관계의 사슬을 끊지 못한 채 끊임없는 싸움으로 날을 지샌다.(86)

 본래 주관적 세계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소설'이라 해서 외부적 현실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이는 객관적 현실의 묘사를 지향하는 소설이라 해서 자전적 요소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진실이다. 자기 외부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내부에 그 그늘을 드리우지 않을 수 없고, 작가는 그가 원치 않는다 해도 그 외부세계를 향한 자기의 태도와 판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102)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상호텍스트성이란 하나의 텍스트를 그 외의 여러 텍스트와의 연관 속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요소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패로디, 패스티쉬, 인유, 모방 등 서로 다른 텍스트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의 변증법을 추구하는 모든 기법이 포함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주체의 부재성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게만 보지 않는 전통적인 이론 또한 무시할 수 없다.(Joseph Childers, Gary Hentzi, 황종연 역, 『현대문학비평용어사전』, 문학동네, 1999, 246면 참조.-저자 각주)](135)

 고전의 역할은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따르지 않을 것인가를 규정하는 규범을 제공하는 데 있다.(151)

 [패로디는 문학전통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거리와 차이의 기법이다. 패로디스트는 패스티쉬를 구사하는 작가와는 달리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식이 투철한 존재이다. 자기만의 개성적 스타일을 창조하는 일이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다소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경향을 보이는 패스티쉬와는 다릴 패로디스트는 선행텍스트를 보방하되 그와는 다른 별종의 세계를 창조한다. 따라서, 모방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계기일 뿐이다.-저자 각주](152)

 대부분의 패로디 작품이 제1기에 집중되어 있음은 패로디 실험이 식민지적 현실에의 대응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152-153)

 프롤레타리아문학은 과거의 문학전통을 계승함에 있어 항상적인 장애을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은 사상의 힘으로 그가 계승해야 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선별한다. 그런데 그 사상이란 언제나 문학적 이념 이전에 정치적 이념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대의 문학은 그 계승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배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되기 쉽다. 세련되고 정치한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이라면 이 위험을 어느 정도까지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의 근본적 한계에 속한다.(157)

 이처럼, 문학적 가치평가의 척도를 계급성 유무로 평가하는 것은 당파성 또는 당성을 중시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당이라는 것이 계급적 의지의 총화라면, 문학적 가치평가는 그 의지의 물질적 실체인 당의 이름으로 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당파성이 중요한 미학적 범주로 작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의 권리는 국제주의의 원리를 따라 다시 한 번 외부로 위임된다. 문학적 가치 판단의 최종의 주재자는 한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며 이는 그 문학의 주체성 결핍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은 모더니스트와 문제를 공유한다.(모더니스트가 현대성이라는 척도로 주체성과 전통의 문제를 간과 또는 폐기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척도가 되는 것은 계급성 또는 당파성이다.-저자 각주)(158)

 작가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문제가 가정으로부터의 탈출로 완결될 수 없음을, 여성들은 사회적 지배와 억압의 체계를 깨닫고 이에 저항함으로써 비로소 해방의 도정에 들어설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166)

 서구 근대문학의 유산이 가치로울 수는 있으되 무분별한 수용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채만식은 발자크를 '통한' 주체 재건 대신 발자크를 의식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시공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조선의 근대문학이라는 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KAPF와 방법적으로 단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편으로는 조선주의(朝鮮主義)의 회고 취미와도 거리를 둘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방적인 서구 편향도, 조선주의도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라면 남은 것은 양자를 지양하는 제3의 방법밖에 없다.(170)
 
 신화에 대해 신화로서 대응하는 탈식민주의 기획의 현실적 힘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자민족의 전통에 귀의하여 그 속에서 역사적 난국에 대처할 정신적 지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경향은 제국주의에 대한 응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232)

 본 논문에서 '세대' 모티프라 함은 사회 및 시대 변화의 매개로 나타나는 세대교체의 의미에 대한 관념적 탐색, 신구세대의 등장과 퇴장·상승과 몰락·갈등과 상충의 묘사, 세대적 절망과 희망에 대한 평가 등이 작품의 전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할 때 이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넓게 사용하고자 한다. 이로써, '세대' 모티프의 전체적 면모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239)

 장편소설 가운데 『태평천하(太平天下)』는 몰락을 목전에 둔 구세대의 퇴폐와 타락을 그린 작품이다.(240)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채만식의 문학활동 과정을 통해 '세대' 모티프 작품은 매우 빈번하고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리고 이는 당대의 어는 작가와도 구별되는 채만식 문학만의 특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염상섭의 몇몇 작품만이 이에 비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채만식 문학의 고유성을 ld해하기 위한 매개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세대를 문제삼음이 역사적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241)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고 이 인간들이 세대를 누적해 간다. "어떤 주어진 시대에 동일 혈족으로서 3세대 이상이 공존하기는 매우 힘들다."(Edward Shils, 김병서·신현순 역, 『傳統』, 민음사, 1992, 51면.-저자 각주) 이 한정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 문제를 물려받고 해결하며 살아간다. 어떤 문제는 한 세대 안에서 해결되는 것도 있으나, 또 어떤 문제는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적 문제인 한에서 더욱 그렇다. 역사는 특정한 세대에게는 언제나 한정된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인간 주체의 역사적 문제의 해결 능력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역사적 상황하에서는 이상선(理想善)을 향한 진보의 가능성이 전무한 지점도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영도의 좌표'라든가 '영점의 시간'이라든가 하는 말은 바로 그 같은 상황을 표현한다. 따라서 역사적 가능성이 소진된다거나 증진된다거나 하는 말이 가능하다.(241-242)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채만식의 문학에 나타나는 '세대' 모티프의 존재는 당대 조선의 역사적 가능성을 묻는 문학적 방식이었음이 드러난다.(242)

 채만식 문학의 '세대' 모티프에 어떤 질서를 부여할 수는 없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서는 채만식의 의식의 질서, 역사 감각의 질서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여기서는 채만식의 다양한 변주를 보이는 '세대' 모티프 작품을 ① 구세대의 몰락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 ② 신·구 세대교체를 통한 역사적 구원에의 기대를 드러낸 작품 ③ 세 세대 이상의 누적을 통해 역사를 초월한 전망에 접근하고 있는 작품 등으로 분류해 보고자 한다.(242)

 전위적 의식은 그 시발점에서부터 이미 과거의 그림자에 침윤되어 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볍고 명랑하게 전진해 가기에는 전시대의 유습이 작가 자신을 너무 깊게 제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근대화과정이 곧 식민지화과정이기도 했던, 아이러니컬한 조선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지배와 수탈의 의도에서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만 식민지의 선택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편의주의에 따라, 조선의 근대화는 사회 각 부문의 봉건성이 철폐되지 않고 온존되거나 부분적으로는 강화되기까지 하는 기형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근대화의 과정은 전근대적 요소의 지속과 함께, 그것을 통하여 진행되었다.(244-245)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라 해도 자기를 전세대(前世代)로부터 구별지어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병적이고 퇴폐적이다. 이들은 새로운 세계 앞에서 살아갈 방도를 알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단지 자신의 물리적인 생명을 연장해 가고있을 뿐이다.(247)

 『태평천하(太平天下)』는 이와 함께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 사라지지 않을 때 지속되는 퇴폐적이고 병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태평천하(太平天下)』는 윤직원 일가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 조락해 가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의 여분으로, 혹은 잉여물로 유지되고 있음을 여러 장에 걸쳐 드러내고 있으나, 이는 특히 윤직원 영감의 치부 수단이 전(前)자본주의적인 고리대금업이라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254)

 윤직원 영감은...전형적인 수전노 타입의 인물이다.(254)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고리대금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산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255)

 윤직원 영감 역시 법으로 금지된 고리대금업에 의존해 부를 유지해 가고 있으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그의 재산형성 방법은 그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더 큰 원리에 의해 농락 당하고 있다. 언제 어느 때인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그의 파탄은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예정된 파탄이 연기되는 상황은 병적이고 퇴폐적이다. 역사과정에서 생산적인 기능을 상실한 세대와 계급이 자기 존재를 유지해갈 때,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는 그 불가결한 구성요소를 이룬다....윤직원 영감에게도 미는 완롱의 대상일 뿐이다....그에게 남도소리로 대변되는 미의 세계는 춘심이 등으로 대변되는 여색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한갓 유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259)

 이념이 강할수록 이상주의적인 전망은 강화된다. E라서 사회주의 이념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265)

 당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세대 교체는 그 주기가 서구사회의 그것보다 짧았다(270)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현실은 정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비정상적인 인물로 간주되도록 할 뿐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정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의 의식마저도 비정상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285-286)

 역사를 실재하는 존재들만의 역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고는 '근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탈역사적' 사고는 '탈근대적'이다. 협소한 역사 자체의 맥락을 넘어서 인간 삶의 존재적 조건을 보다 우주적인 시야에서, 또는 보다 초월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때 근대가 낳은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는 해소되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310)

 종래 조선민족은 자아(自我)·가족(家族)·일가 족속의 본위로만 살아왔으되 이제는 국가·민족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바...(316)

 맑시즘과 관련된 이론에서 식민성(coloniality)은 서구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결부된 것으로, 주로 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검토되곤 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내에서 활발하게 조명되기 시작한 탈식민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식민성은 무엇보다 마음, 즉 정신의 문제이다. 일례로 난디(Nandy)는 "정신상태로서의 식민주의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시작된 식민지의 토착과정의 한 과정이었으며 그 근원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신 속 깊은 곳에 자리하였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시작된 것은 어쩌면 인간의 정신 속에서 끝나야 할 것이다."(Ashis. Nandy, 이옥순 역, 『친밀한 적』, 신구문화사, 1993, 31면-저자 각주)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식민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그 해결점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일찍이 사이드(Said)에 의해 조명되었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타자에 관한 관념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 문제라면, 식민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담론이 문학을 그 특수영역으로 삼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야말로 억압적인 담론과 전복적인 담론이 서로를 대면하는 가장 적나라하고 예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Leela. Gandhi, 이영욱 역,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Postcolonal Tbeory)』, 현실문화연구, 2000, 173~174면 참조.-저자 각주) 특히 문학과 관련된 시점에서 식민주의적 지배와 피지배라는 문제를 검토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텍스트를 통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텍스트는 다른 어떤 문화·정치적 산물에 앞서 식민권력과 포스트식민적 저항의 가장 중요한 장이다. 제국주의는 지배를 행하는 첫 단계에서, 그리고 지속적인 지배를 위한 근본적 조건으로서 직접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곤 하지만, 이같은 폭력은 텍스트적인 담론의 원조가 없이는 관철되지 못한다. 텍스트를 통한 지배의 정당화야말로 이같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피식민 상태에 놓인 이들은 식민적 지배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담론의 원조 없이는 효과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저항을 수행할 수 없다. 반복하건대, 피식민상태란 정치·경제적인 식민상태 이상으로 정신의 식민상태를 의미한다. 이같은 식민상태의 극복 없이는 비록 정치적인 해방이 달성된다고 해도 식민적 상황은 불충분하게 잠정적으로만 극복된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적인 전제이자 주장이다.(325-326)

 주제를 관념화할 위험성, 그리고 문학성의 문제를 정치성의 문제로 치환할 위험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은 식민지 사회의 문학, 또는 식민지를 경유한 사회의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 매력적인 방법으로 간주될 수 있을 듯하다. 그같은 사회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정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할 것인가이다. 영상매체가 출현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문학은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고 보존케 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음을 상기하면,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인의 고민의 중심점에, 자신이 무엇을 거억·보존해야 하며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놓여 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곧 어떤 문학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 통한다.(326-327)

 식민지 상황에 놓인 사회 또는 식민지적 경험을 경유한 사회의 문학은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구축할 수 있는가. 이는 지배자의 압도적인 근대성에 노출된 식민지·탈식민지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본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은 식민지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모국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자기확인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발전해 온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포tm트콜로니얼한 상황에 처한 문학이 자기를 확인하고 수립하는 방법으로 제출되는 것으로는 폐기(Abrogation)와 전유(Appropriation)의 두 가지가 있다. 이들은 애쉬크로프트(B. Ashcroft) 등의 최근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과정의 상호 긴밀히 결합된 두 측면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한 상호 대립적인 두 방법이다. 이때 폐기란 제국의 문화와 미학 및 그것의 적용을 부정하는 것이며 전유는 모국어가 아닌 타자의 언어로 모국어의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폐기의 전략은 포스트콜로니얼한 영어를 통해서는 진정한 자아의 구축을 이룰 수 없으므로 이를 폐기함과 동시에 모국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화적 본질주의의 입장에서 배태된다. 자기를 찾음은 지배 이전의 언어, 자유로웠던 과거의 언어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전유의 전략은 본질주의적 태도의 이데올로기적인 위험성을 지적한다. 지배 민족이 자국의 언어와 문학을 특권화시킨 것이 잘못된 일이듯이 피지배 민족 역시 자민족의 언어와 문학을 부당하게 특권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 따르면 포스트콜로니얼한 영어의 존재를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되 그것을 그 현실에 처한 이들의 자아 수립을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 전화시키는 길이 남아 있다. 이는 혼합주의(syncretic vision)라 불리는 것으로 본질주의와는 다른 탈식민문학의 방법론이다. 제국주의가 자신의 언어 및 문화를 특권화시켰다면 지배에 저항하는 방법론 역시 그와 이형동질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 수 있다.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의 신화를 경계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로의 낭만적 회귀가 아니라 현실을 수리함과 동시에 비판해 가는 현실주의적 태도이다.(331-333)

 물론 일제하의 조선문학은 여러 구속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를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유비는 가능하다. 1920~30년대의 조선문단에서 프로문학과 함께 조선문학을 양분하다시피 한 민족주의 문학은 이른바 조선주의(朝鮮主義)라는 지극히 심정적이고 생리적인 이념에 바탕한 것으로 이는 1930년대 중·후반의 고전부흥론 및 상고주의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경향은 비유하여 폐기 또느 문화적 본질주의의 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패로디를 중심으로 한 채만식의 조선적인 근대문학 수립론은 전유 또는 혼합주의적 기획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국의 언어(고전)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주체성이란 획득될 수 없다. 그러나 자국의 전통을 강조한다고 해서 곧 진정한 근대적 자아가 수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발 근대화의 길을 걷는 식민지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조선주의나 상고주의는 근대성을 선취한 문학의 경험과 자산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왜곡된 경로에도 불구하고 조선문학 앞에는 근대문학을 수립하고 이를 성숙시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놓여 있지 않다면 조선문학은 자국의 전통에서 뿐 아니라 서구 및 일본의 문학으로부터도 더 많은 것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일명 이식문학론적 사유, 즉 서구 및 일본문학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조선문학의 전통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한편에 나르시시즘의 위험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자기 몰각의 위험이 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문학은 이 두 위험한 태도 사이에 놓인 좁은 경로를 따라 자기를 수립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상대화함과 동시에 타자 역시 상대화함으로써 새로운 자기, 조선적인 근대문학을 수립하는 길이다.(333-334)

 '세대' 모티프의 문제는 역사철학의 문제이다. 즉 채만식의 '세대' 모티프에는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행정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334)

 특징적인 것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채만식의 작품에 등장하거나 포괄되는 세대의 수가 점차 확장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식민지 근대라는 질곡적 상황에서 단기간에 헤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므로 채만식의 의식의 저층에 허무주의가 가로놓여 있다고 '전통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자명하지만은 않다.(335)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서 이간이 무엇을 어디까지 가능케 할 수 있는가는 구조에 의해 제약된다. 특정한 구조는 무엇을 가능케 할 수도 있고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무엇을 염원하여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구조가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주체의 의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A가 아니라 B를 선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칫 주체에 신화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구조하에서는 A가 아니라 B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존재치 못하거나 또는 A대신에 B를 선택한다 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게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역사적 구조하에서 인간 주체에 부여된 자율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진전시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가능하다. 즉 역사에는 이상선(理想善)의 가능성이 전무한 시점이 있을 수 있다. 최선은 물론 차선조차 불가능한 지점이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영도의 좌표라든가 영점의 시간이라든가 하는 말은 바로 그같은, 가능성 무(無)의 지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시공간 속에서는 사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같은 상황하에서는 다� 역량을 조금씩 비축해 가면서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꿀 시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현실성 있는 유일한 방략이 된다. 이처럼 주체의 의지에 절대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주체의 신화'를 부정하게 되면 개화기에서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정국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근대사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논자로서는 그같은 역사적 행정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당대의 세계사적 현실은 한반도에 귀속된 사람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역할만을 할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독립들 상실하고 타력에 의해 해방을 얻고 다시 분단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구조적 힘을 능가할 만한 주체적 역량이란 존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주체들의 서로 다른 행위가 빚어낼 수 있는 결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특정한 구조적 조건하에서는 주체가 비록 의지와 열정을 지니고 성실한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도 그 바라는 바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고, 때문에 역사적으로 비극이 실재한다. 구조는 주체의 행동 및 그 목적의 실현 여부를 제약하고 한계 지운다. 그러나 역사에 내재한 이같은 숙명은 빈번하게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무시되고는 한다. 객관적 현실은 의지나 주장에 의해 쉽사리 변경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자나 교조주의자는 더 바르고 더 선명한 이념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권력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매번 폭력적인 독재를 행사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3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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