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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단편소설연구자료들
2009년 05월 16일 21시 46분  조회:3223  추천:0  작성자: 방룡남

1. 서종택/정덕준, 『한국현대소설연구』, 새문사 1990)

 

한상무, 「현진건 소설의 역사 의식 형성」

 

현진건의 작품 경향은, 여러 논자들이 대개 인정하듯이, 초기의 자전적, 신변체험적 성격의 작품에서, 중기인 1920년대 중반 경부터 시대적 현실 인식이 두드러진 작품에로 전환해 간다. 이 무렵 현진건은 흔히 인용되어 온 바와 같이,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만이 "우리 문학의 생명이오 특색"이라 강조한 평문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을 통해 그의 당시의 문학관을 집약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문학관은 근본 입장에서, 당시 '조선정신'의 추구를 주창했던 최남선의 영향도 감지케 하지만, 식민지 조국이 처한 시대적 현실 인식을 최우선적 명제로 강조한 신채호의 문학관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볼 수 있다.(187)
<고향>은 분량만으로는 단편소설로서의 불과 3, 40매 정도의 다소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당대의 한국 민중의 비참한 삶의 현실에서 취재한 그 제재는 단편보다 오히려 장편 형식에 적합할 만큼 광범하며, 직접성과 암시성의 조화로운 효과를 노려, 세련된 작가적 기법에 의해 고도로 압축·제시된 작품내의 현실 상황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극도로 황폐화된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있다.(188)
<고향>은 신채호와의 관련성에서 볼 때, 두 가지 사실이 특히 돋보인다. 첫째는 한국의 근대사를 주변 강국 특히 일본에 의한 침략 및 수탈의 역사로 보는 명확한 시대 인식이며, 둘째는 그러한 침략으로 인한 가장 큰, 직접적인 피해 계층은 가난한 한국의 민중이라는 민중 의식이다.(188)
<고향>의 서두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인 중국과 일본에 의해 차례로 침략, 지배  당한 사실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묘사로 시작되고 있다.(188)
동양 삼국의 옷을 한 몸에 감은 사내란 인물 묘사와 한 찻간에 함께 탄 삼국인이란 정황 설정은 당시이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작위적 의도를 엿보게 해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189)
현진건의 20년대 창작 활동은 대개 <고향>을 발표한 1926년 이후 뚜렷하게 감퇴된다. 이 시기 이후 그가 쓴 작품은 <新聞紙와 鐵窓>(1929), <貞操와 藥價>(1929), <서투른 盜賊>(1931) 등 3편의 단편이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러한 급격한 창작 활동 감퇴의 원인은 그의 기자로서의 활동과도 유관한 듯하나, 근본적으로는 <고향>에 그려져 있는 바와 같은 당대의 한국 민중의 절망적 상황과 가혹한 식민지적 질곡에 대하여 작가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분노와 좌절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또한 이 무렵 이후 그의 叔兄 鼎健의 受刑과 죽음, 그에 이은 형수의 자살이라는 가정적 비극도 그로 하여금 더 이상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릴 여유를 許與하지 않은 듯하다.(196)

 

2. 김열규/신동욱 편,『현진건연구』, 새문사 1989

 

김우종, 「<貧妻>의 分析的 연구」

 

<빈처>에 나타난 주제는 작가가 이 무렵부터 계속 발표해 나간 여러 작품과 함께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주제 속에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던 암담한 삶의 모습을 증언하며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판하는 민족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I-10)
<빈처>는 그 같은 현실을 내다보고 있는 한 지식인과 그 아내를 통해서 역시 암담한 현실을 증언하며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朝鮮의 얼굴"을 그려나가는 사실주의 문학의 의도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I-10)
감격적인 장면일수록 작자는 침착하고 냉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작품의 인물들만큼 흥분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인물들만 흥분하고 탄식하고 오열한다면 독자와 작품인물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그것도 함께 공감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공감을 강요하고 함께 울어지기를 애걸하는 결과가 되며, 그것은 더욱 공감도를 읽고 독자를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I-16)
新派劇의 예술성 여부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장면들 때문이며 이 작품은 때때로 이 같은 과장법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I-17)
그렇지만 아무리 적극성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천사에까지 비약한다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천사가 지니는 이미지는 '나'의 아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 작품 속의 한국의 소박한 아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는 인간을 신격화한 개념이기 때문에 과장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찬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오히려 긴장감을 주어야 할 장면을 희극화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를 끌어안고 "뜨거운 두 입술"을 포갠다는 것도 사전 설명이 그처럼 과장성을 지니고 있고, 그만큼 공감력을 잃고 있기 때문에 역시 우스운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큰 것이다.(I-19)
우리는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결함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는 수는 있지만 작자는 그의 주제를 형성시켜나가는데 있어서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즉 뒷그늘에 숨겨져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 그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지니고 있는 긍정적 삶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는데 있어서 작자는 거의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같은 여인상을 더듬어나갔다는 것도 이 작품이 근대문학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우리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도 이 같은 여인상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존여비의 그릇된 관념이 현모양처를 칭찬하고 열녀를 찬양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인 위치에 두고 관찰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I-19)
그런데 <빈처>에서는 작자가 오히려 그 같은 조강지처가 사회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선비들의 배후에서 얼마나 고통을 참고 그들을 도웁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오, 인간상의 발견이며, 이 작품은 부분적인 기교적 미숙성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있어서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I-20)

 

김영화, 「<술 권하는 사회>와 <타락자>의 세계」

 

20대 지식인이 갖고 있는 꿈과 이상이 현실사회에서 좌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좌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식민지사회가 갖는 여러 제약, 그리고 20년대 식민지사회의 지적·정신적 풍토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I-23)
1920년대 초기 현진건은 왜 이런 지식인들의 좌절을 기록하고 있을까. 3·1운동의 실패, 독립에 대한 열망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I-25)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깊은 회의와 방황 속에 빠졌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그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문제나 민족 전체의 문제를 가리지 않고 당시의 젊은이들은 꿈과 이상의 상실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있었다. 게다가 유교적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옮겨오면서 빚어진 갈등을 그들은 제대로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동경유학생이라는 선민의식, 민족을 지도하겠다는 지도자의식이 남보다 강렬한 대신 그런 의식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깨어지고 있다. 이런 좌절은 현진건 개인의 체험인 동시에 동시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체험이기도 하다. 그런 갈등과 아픔을 현진건은 소설을 통하여 표현함으로써 암암리에 자기 시대와 사회의 진상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I-26)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빈처>, <지새는 안개> 등의 주인공들은 소설을 달리하면서도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그 의식이나 사회적 처지가 비슷하다. 이들의 '아내' 들도 거의 그 점에서는 같다.
우선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것, 신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 '남편'과의 지적 수준이 크게 격차가 있다는 것, '남편'이 동경 유학 중 봉건적인 가정에 묻혀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착하고 선량하다는 것 등. '남편'은 이러한 아내에 대해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세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 때문에 실망하고 있다. 이것은 <술 권하는 사회>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I-27)
이것은 2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통적인 결혼 양상이 동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갈등을 가져왔는가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연상의 아내, 남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한 아내, 그러나 헤어질 수 없을 만큼 선량하고 착한 아내를 둔 당시의 지식인들을 좌절시킨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밖에서 겪은 갈등과 좌절을 가정에 돌아와서 해소할 수도 없었던 답답한 지식인들의 처지가 요약되어 드러난다. 20년대 전통적인 것과 외래의 문화가 충돌하는 사회가 갖는 문제점을 드러내 보인 것도 현진건의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I-28)
20년대 초 근대소설의 확립과정에 그 수법에 있어서는 현진건이 동시대의 작가들 가운데는 단연 앞서 있음을 보게 된다. 현진건은 무엇보다 소설은 묘사에 의한 표현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같다. 그리고 주관적인 요소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입장에 서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드러난다.(I-31)
중요한 것은 한국소설사를 개관해 볼 때 수법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소설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최초의 작가가 현진건이라는 점이다. 이인직 등의 신소설이나 이광수의 소설에는 설명이나 서술은 있어도 객관적 묘사가 아주 부족하다. 김동인이나 나도향의 초기소설도 그 점에서 비슷하다. 염상섭의 경우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인 묘사에 주력한 흔적은 있으나, 현진건과 비교할 때 그 세련도에 있어서 뒤떨어진다. 한국소설은 비로소 현진건에 이르러 표현기법에 있어서 근대소설적 성격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리얼리즘 정신에 부합되는 작가정신과 아울러 큰 의의를 가진 것이다.(I-31)
현진건의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서도 동시대의 작품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 많은 편이고, 전래의 이야기나 설화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소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작품에서 보여준 당대 사회와 현실의 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이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한 시대를 건너 뛰어 현진건에 이르러 계승되고, 그것이 다음 단계인 채만식 등에 이어진 것은 한국소설사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I-32)

 

윤홍로, 「불」의 상징적 의미」
-<불>·<貞操와 藥價>를 중심으로

 

빙허가 작품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리 문단의 문예사조적 경향은 사실주의 경향으로 발판을 굳히기 시작하였으며 문예쟝르상으로는 단편소설이 우위였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창기 한국근대소설을 논의하면서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는 단편소설과 사실주의와의 관련성 여부다. 근대문학의 초창기부터 사실주의를 옹호하는 소리가 점차로 증대하였으나 단편소설은 서구의 경우 코너(Franko' Conner)의 논리를 빌리면 "그 성질상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낭만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인" 문학쟝르에 속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참고하면 장르와 문예사조와의 불화가 이 시대에는 팽창하였음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우리는 단편소설을 다룰 때 작가가 아무리 사실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할지라도, 주관적인 사실의 기법 즉 비유적인 문체상의 특징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단편은 그 장르의 성격상으로 보아서도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주관적인 압축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편을 서사시에 비긴다면 단편은 서정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단편이 산문설화"라고 규정한 포오의 관점에서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에 비해 상징, 은유와 같은 상상적인 수사기법-상징적 문체를 많이 사용하게 됨은 당연하다.(I-34)
빙허는 동시대의 시대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면서 한 지식인의 내적 고뇌에 깊이 천착하여 작품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국권을 박탈당한 후 조선의 현실은  날로 쇠퇴하여 가고 경제적 후진성, 정치적 훈련의 부족, 사상적 빈곤 등으로 무수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이러한 현실을 시대의 중심과제로 형상화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I-35)
이들은 외적으로 식민지 제도의 모순에 대한 현실비판과, 내적으로는 봉건적 인습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朝鮮魂'을 주축으로 하여 근대화 운동을 촉진시키면서 민족의식을 고양시켜야 하는 이중의 사명을 창작을 통해 수행하려 하였다. 빙허를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은 일제의 노예화, 우중화 정책에 대응하면서 일제의 검열망을 피하고자 상징적인 기법을 모색, 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수사기법의 발전은 시대조건과도 상관성을 가진다. 이들 소설의 수사법-은유나 상징기법은 개인이나 시대상의 우회적인 반영이면서, 역으로 개인적 이미지나 시대정신을 형성하는데 공헌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I-36)
초창기의 작품들에서는 환상적이고 감상적인 수식어나 관념적인 유추에서 온 장식적 비유어가 많다. 빙허는 20년대 중반기 이후로는 점차 내면적인 고민을 시대와 상황의 모순으로 돌리면서, 인간의 가면과 본질의 낙차를 아이러니의 기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I-36)
빙허의 장기는 사실의 현장을 박진감 있게 그리다가도 돌연히 어조를 바꾸어 반전의 극적 수법을 사용하여 진실을 발현시키면서 문학성을 고양시키는데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아이러니 기법은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 기법과도 일치된다. 넓은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라면 낭만적 미학까지도 내포하는 것을 뜻한다. 빙허는 춘원의 도덕적 계몽주의나 동인의 煽情性, 도향의 感傷性을 극복하면서 단편소설의 본령을 찾기 시작하였다.(I-37)
빙허가 단편의 본령을 찾았다함은 단편의 특성을 살렸다는 뜻이고, 그 특성은 단편의 압축성을 살리기 위해 상징적인 유추를 통해 서정성과 상상의 폭을 넓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빙허의 소설미학은 상징과 은유 등의 비유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I-37)
우리는 빙허의 유추에서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삶과 용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주부에 내재한 반동물성과 농부에 내재한 반동물성은 <貞操와 藥價>의 비유적 문체를 분석하면 분명해진다. 그러나 타락한 동물성을 지닌 최주부의 세계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순수한 농부와 그의 아내의 자연성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유추에서 최주부의 세계에서는 생경한 본능을 볼 수 있고, 농부의 세계에서는 승화된 원초적 본능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동물적인 성욕으로 표현되었다면, 후자에서는 살아가기 위한 본능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상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I-45)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하층민들이 비천한 삶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성관계는 세속적인 윤리관으로는 풀이할 수 없다. 남편의 생명이 위급할 때 유일한 여성의 밑천을 내놓은 것은 기존 윤리관을 파기한 것이며, 그것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이 시대 사람들이 동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라는(I-45)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농부의 삶의 철학은 그러한 자연생명의 공동원리에 순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시대가 직면한 시대상황에 따른 새로운 윤리성을 제기한 것이며, 새로운 자연의 광명을 인간 생명체에 대입하여 본능의 불을 이념화시킨 주제를 가진 것이다.(I-46)

 

천이두,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
-현진건의 <고향>

 

초기의 작품들이 신변적·자전적 색채가 짙게 나타남과 아울러 대체로 일인칭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공통된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반면, 두 번째 계열에(I-49) 이르러서는삼인칭 소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며, 설사 일인칭인 경우에도 삼인칭 소설적 객관성이 짙게 나타나는 게 공통된 특색이다. 또한 시대 현실에 대한 객관적 관조자의 모습과 아울러 동정자 내지 비판자로서의 작가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I-50)

 

김인환, 「의 구조 해명」

 

실제로 작품을 읽어 나아가면서 前理解는 착오와 수정을 거쳐 적절한 "이해"로 변형되지만, 애초의 선입견 또는 직관은 언제나 객관적인 의미파악의 출발점으로서 제 몫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게 마련이다.(I-92)
어떠한 해석이나 다 가능하다는 생각은 천박한 인상주의에 떨어지며, 오직 하나의 분석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편협한 독단주의에 떨어진다. 분석과 평가라는 행위 자체가 객관적인 토론과 설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영역에 속하고 있으므로, 개인적이고 독특한 인상은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전이해는 이해로 가는 출발점이지, 이해 그 자체는 아니다. 동시에 학문의 본질은 개방적인 토론에 있으므로 연구의 세계에는 독단이 허용될 수 있는 자리가 없다.(I-94)
언어분석의 단위가 어절·형태소·음운 등으로 세분되듯이 한 편의 소설에도 의미의 단위가 있다. 이러한 최소의 설화단위를 話素라 하는데, 설화의 원소들을 추출하여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를 해석(I-94)하는 작업이 작품분석의 첫 단계가 된다.
화소 가운데 설화의 골격을 이루기 때문에 도저히 삭제하거나 변형할 수 없는 한정화소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한정화소는 소설과 민담이 공유하는 화소이며, 작품의 기저가 되지만 근대소설의 구조는 그 기저에 다채롭게 침투하여, 자유롭게 의미의 확대와 변형을 마련하는 자유화소에 의존한다.(I-95)
작품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 문장을 무시하고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한정화소의 대립구조로만 본다면 밤과 낮의 이미지가 대립되어 있는데, 그것은 각각 본능과 의식을 대표한다. 본능의 시간인 밤과 의식의 시간인 낮의 대립은 둘째 단락을 통하여 미묘한 변형을 제시한다. 화소의 대립구조는 단순히 밤과 낮의 대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밤과 낮의 통일로부터 밤과 낮의 분열로 진행되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구조 만으로써도 억압적 통일이 바로(I-96)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의식이 본능을 강제로 억압하면, 본능의 반란이 발생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I-97)
정신분석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삶은 본능과 의식의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본능의 성질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쾌락과 놀이를 따르며, 억압의 부재를 원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삶을 이러한 본능에만 맡겨 놓으면, 삶 자체의 자기 보존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삶은 본능을 변형하는 것이다. 의식은 지연된 만족을 추구하여 만족을 유예시킬 줄 알며, 쾌락의 억제와 괴로운 노동을 능히 감당하며 안전을 원한다. 의식이 하는 중요한 일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다. 본능을 억압하여 자기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구실이 의식의 임무이다. 이러한 설명을 요약하여, 본능은 쾌락 원칙을 따르고, 의식은 현실 원칙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의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I-104)
의식은 본능의 억압이므로 인간의 문화는 결국 본능의 억압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의식이 본능을 억압하는 그 정도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이러한 억압의 과정 가운데에서 언제 어디서고 부득이하여, 결코 풀어 버릴 수 없는 면을 기본억압이라고 부르고,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에 국한되어 필연적이 아닌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첨가된 면을 과잉억압이라고 일컫는다.(I-104)
삶이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이, 본능 자체에도 양면성이 하축되어 있다 본능은 화합본능(Eros)과 파괴본능(Thanatos)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기체의 원시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화합본능이고 무기체의 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파괴본능이다. 원래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이라는 이 본능의 양면은 서로 도우며 작용하여 본능 자체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직능을 하는 것이다. 사물과 타인에 대하여 존중하고 염려하고 이해하는(I-105)데에 화합본능의 일이 있고, 그러한 존중과 염려와 이해에 대하여 방해하는 세력을 부정하고 증오하고 깨뜨리는 일이 파괴본능의 임무이다. 삶의 가장 큰 목적은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의 어울림에 있다. 그런데 그 어울림은 의식의 억압이 기본적인 선에 그쳐 있을 때에 가능하다. 삶의 모든 측면을 샅샅이 유용한 노동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과잉억압이 본능에 가해지면, 화합본능과 파괴본능 사이에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진다. 이러한 위험성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문화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I-105)
과잉억압의 상태 아래서는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의 어울림이 무너질 뿐 아니라, 화합본능이 축소되고. 파괴본능이 강화된다. 파괴본능은 원래 화합본능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던 것이나, 본능의 그른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면 파괴본능 자체가 본능을 대표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능이란 의식의 어떠한 억압 아래서도 완전히 마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애의 성욕에 비교되는 화합본능은 신체의 전부에 퍼져 있으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화합본능이 잘 실현되는 전형적 상태는 예술감상에 황홀하게 도취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화합본능이 축소되고 파괴본능이 앞에 나오게 되면, 합리적인 쾌락은 대상을 잃고 사이비 쾌락으로 변질된다. 파괴본능의 실현인 증오와 부정은 어디까지나 화합본능의 존중과 염려와  이해를 돕는 것인데, 이것이 전도되어 증오와 부정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쾌락의 대상이 된다. 소위 "성기성욕"의 강화도 화합본능이 축소된 결과이다.(I-105)
낭만주의가 없다면 현실주의도 있을 수 없다.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상호작용에 파탄이 일어날 때, 현실주의는 억압의 원리로만 남아 있게 된다.(I-110)
집단적 비판과 신분의 전도는 다름 아닌 "희극적" 장르의 기본속성이다. 희극적 문학작품은 대개 완강한 배금주의자나 초자아의 표상인 엄격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중심 내용으로 삼는다. 희극적 장르는 모든 고정관념의 타파에 목적을 두고 있으므로 대체로 현학적인 지식인이나 경영간부층이나 딱딱한 이념론자들로부터 악감을 사게 된다. 희극적 장르에서는 신분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 같은 것도 전도되어 나타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겨울의 이미지로서 비판받고, 젊은 아들이 여름의 이미지로서 비판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쾌락원칙에 의존하여 현실원칙을 약화시키는 데에서 희극정신이 솟아나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무의식을 보호하는 '꿈'처럼 유용한 노동의 세계로부터 즐거운 환상을 보존한다.(I-114)
희극적 플롯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부정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구조와 부정된 인물을 용서 또는 화해로써 다시 감싸안는 구조로 나누어진다. 부정의 플롯을 따르는 작품은 풍자적 희극이 되고 부정의 부정이란 플롯을 따르는 작품은 해학적 희극이 된다. 작품 분석에 응용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조소와 공격의 색채가 비교적 강한 작품이 있고 용서와 동정과 화해의 색채가 비교적 짙은 작품이 있다. 완전한 화해란 우스개가 된 인물이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삶의 약동"에 끼어 드는 플롯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연민과 동정 또한 풍자적 희극작품이라기보다는 해학적 희극작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I-115)

 

李在銑, 「교차 전개의 반어적 구조」
-<운수 좋은 날>의 구조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1924)은 그 구조에 있어서 표제가 암시하는 행운과 서사적 사건 내용과의 상호 불일치 내지는 괴리 현상에서 비롯되는 교차 전개의 반어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이를테면 행운의 반복적인 상승화와 불행의 한 절정이 같은 시간 속에서 상호 교차하는 점이 그것으로서, 분명히 반전의 반어적인 구조의 소설인 것이다.(I-116)
반어란(Irony)란 흔히 말해서 두 개의 상호 모순되는 표리의 언술이나 태도의 동시적 표현, 또는 서로 다른 상황의 상호 병치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표리의 상호 괴리 및 미리 예상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운수 좋은 날>의 반어는 바로 이야기의 발단과 결말의 상호 관계가 기대와 현실과의 상호괴리 내지는 상충관계에서 연유된다. 그것은 행운과 불행의 반전 교차로서는 물론이지만 밀어닥칠 운명에 대한 이전의 무지 상태와 이후의 깨달음의 충돌관계의 구조에서 오는 것이다.(I-116)

 

김중하, 「현진건 문학에의 비판적 접근」

 

필자는 빙허의 사실주의가 심오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 반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자세로 문제 제기에만 그친 정도라고 말했고, 또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차원 역시 그리 철저한 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Ⅱ-41)
<빈처>는 <희생화>의 연장선 위에 놓여진 작품으로, 그 소재가 새로울 것도 없으며 더 뛰어난 비판정신이나 투철한 역사의식의 발현도 없다. 다면 그의 사실주의적 기법의 발전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사회 변동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긴 하지만 그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 민족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할 문제에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변동사회에 놓여 있는 현실의 '현상' 자체만을 객관화하거나 인식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 '실재'에까지 가 닿지 못하고 있는 빙허의 사실주의의 깊이를 드러내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재주의적 사실주의의 경향과 낭만적 기질이 한데 어울린 작품의 예라 볼 수 있다.(Ⅱ-46)
1920년대의 한국 현실이 그(<술 권하는 사회>의 '남편'-인용자)의 독백처럼 조선 사람들에 의해 자유로운 상태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고, 일제의 배후 조종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사회 부조리의 근원은 눈앞의 '현상'에서가 아니라 숨겨진 '실재'에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현상' 자체에 대해 절망하고 있으며 울분을 터뜨린다. 또 '남편'은 그의 "유위유망한 머리"를 활용할 수 없고 그의 뜻을 펼 수 없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데서 오는 좌절이다. 만일 그에게 충분한 "유위유망한 머리"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이 되는데, 이것은 현실의 불합리성, 즉 일제치하의 현실을 긍정해 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공부를 하면 "유위유망"하다는 의식과 현실 속에서, 그것도 일제치하의 현실 속에서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의 절망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동질의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Ⅱ-49)
현실 속에서 출세해 보려는 야욕과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와의 갈등,(Ⅱ-49) 그것이 정당한 사회 속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이는 높이 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제치하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서, 당시대를 대변하는 인텔리의 의식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이를 민족적·애국적 의식이라 할 수 없다. '남편'이나 '나'가 이런 모순스런 절망에 빠진 이유는 공부에 대한 기대감, 공부를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리란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현상'은 보되 '실재'를 볼 수 없게 된데서 온 것이다.(Ⅱ-50)
'남편'이나 '나', 'W군'은 뛰어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며, 또 '현상'을 넘어 '실재'를 볼 수 있는 아웃사이더(outsider)도 아니다. 때문에 그들의 절망이나 비극을 합리화시킬 민족적 차원은 있지도 않다. 다만 그들의 비극이나 절망이 대사회적이란 점과 그들의 의식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민족적 차원의 인물로 보거나 그 절망의 근거가 시대적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외적 조건을 과대 적용하고 등장인물들의 의식세계를 구명해 보지 않은 편견에 의한 것이다.(Ⅱ-50)
민며느리 제도라는 봉건적 잔재 때문에 당하기만 하는 어린 소녀의 인간적 저항이란 차원에서 다뤄질 것이며, '순이'의 육체적·성적 미숙에서 오는 불행으로 보아야 한다. 1920년대의 모든 사회적 불합리라고 해서 그 근거의 구명도 없이 모두 일제의 강권에 의한 것이요, 거기에 대한 저항도 민족주의적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Ⅱ-51)
<운수 좋은 날>의 비극적 상황도 그러하다. '김첨지'의 비극이 가난에 연유한 것이고 그 가난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란, '실재'의 파악이 투철하였다면 적어도 작품 속의 작은 장치에라도 그 의식이 반영되어 있어야 옳았을 것이다. 인력거를 타는 사람의 전부가 조선사람이었다는 점은 '실재'에 대한 의식보다 '현상'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운수 좋은 날>은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의 비극적 하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높은 경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민족주의적 의식에 투철한 저항성이 돋보인다고는 할 수 없다.(Ⅱ-51)
<불>, <운수 좋은 날>에서 보여 준 빙허의 작가 의식은 한 인간에게 기울어진 동정적 시선 또는 민족의 일원에게 던지는 인간애에 불과한 것이다.(Ⅱ-51)

 

李注衡, 「현진건 문학의 연구사적 비판」

 

논문의 기본은 독창성과 논거의 명증성이다.(Ⅱ-67)
현진건 자신이 "로만티즘도 좋다. 리얼리즘도 좋다. 상징주의도 나쁜 것이 아니요, 표현주의도 버릴 것이 아니다.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다른 아무의 것도 아닌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일 것이다"(현진건,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개벽』, 65호, p. 34-인용자 재인용)라고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외국 사조 대입적 규정을 거부하고 자(Ⅱ-73)신의 독자성을 문제삼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여기서 이즘은 수단이요, 목적과 근본이 문제임을 현진건은 말하고 있기도 하다.(Ⅱ-74)
"기법이 뛰어난 작가"라는 말이 오랫동안 현진건 문학의 규정을 대표하여 왔고, 또 그 말의 증명과정은 너무나 단순하여, 그것이 차라리 현진건을 손해보게 한다. 앞서 말한 김동인의 글이나 그와 유사한 글을 따를 때 현진건은 더 이상 문제삼을 가치가 없는 작가가 된다. 기법론은 작가의 세계인식의 태도, 작품의 내용 등과 연결되었을 때 깊이를 획득한다. 한 문제의 추구는 정면공략(추구)법으로도 가능하고 우회법으로도 가능하다. 현진건은 정공법을 주로 하여, 채만식이나 김유정은 반어와 풍자를 동원하여 우회하는 방법을 주로하여 식민지시대의 문제들을 들추며 따져 나갔다. 현진건은 항상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아이러니를 쓰면서도 채만식이나 김유정과 현진건은 다르다. 그들의 환경과 세계인식의 태도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Ⅱ-74)
현진건의 작품 내용은 크게 애정문제, 자전적 사실, 사회·역사인식 등을 담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고있지만, 그 중에서도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역사인식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현진건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대립되고 있다. 두드러진 긍정론자는 김우종, 신동욱, 이재선, 조동일, 임형택 등이고 부정론자로는 김동인, 백철, 정한숙, 김윤식, 김현, 김중하 등이 두드러진다. 정한숙이 제기한 양면의식-애정문제와 관련된 정서적 감각과 사회문제와 관련된 현실감각-의 부조화 여부문제는, 20년대 작가들에서 전반적으로 낭만적 성향과 현실의식의 양면이 나타나고 있는 만큼, 현진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여 깊이 따져져야 할 것 같다.(Ⅱ-75)
현진건은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려한 작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발전적 논의를 위하여 부정의 방법과 대상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진건 소설의 어떤 점이 "현진건은 식민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지 못했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73, p. 165-인용자 재인용)고 볼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것도 재론될만한 중요한 문제거리가 될 수 있다.(Ⅱ-76)
현진건론에서 세울 수 있는 줄거리의 하나로 작중인물이나 작가 자신의 방황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나타난 지식인의 방황이 작가의 현실인식의 태도와 관련하여 어떻게 전개·변모되고 극복되는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Ⅱ-77)

 

최원식, 「현진건 문학의 사회적 가치」

 

우리 나라에서 한 때 높이 존경받았던 "문학을 위한 문학"이란 바로(Ⅱ-79) 서구 시민문학의 자기해체의 징후에 다름아니라는 점이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인정되는 바이다. 현실을 속물적 세계로 일괄 규정하고 예술적 조탁에 각고를 거듭하며 예술의 성직자로 자처했던 이 유파의 예술가들의 태도는, 결국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객관적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유파를 대표하는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소설을 일관하는 병적 차거움과 철저한 절망적인 분위기는 이것과 연관된다.(Ⅱ-80)
한때 우리 문학의 황금시기로 과장되었던 1930년대의 순수문학도 서구의 유미주의와 그 처지는 다르지만 현실에 대한 무력감의 표현이란 점에서 일치한다. 1930년 순수문학이 1920년대 문학이 획득한 사회의식을 포기하면서 얻어진 것이라는 어느 비평가의 분석은 이런 뜻에서 타당하다. 우리는 1930년대 문학이 모두 사회의식을 포기했다고 몰아붙여서도 안되고 순수문학이 거둔 예술성을 과소평가할 수도 없지만, 문제는 30년대 문학이 거둔 예술성이 1920년대에 고조되었던 민족적 열정의 퇴색과 1930년대의 식민지적 억압의 강화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Ⅱ-80)
이처럼 소설의 예술성은 사회성을 배제할 때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힘을 잃고 기계적인 수법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것은 소설이란 장르가 현실 속에서 생동하는 인간적 삶을 문제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서 사회성이란 소설가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Ⅱ-80)
어느 서구 비평가가 주장하듯이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문학이 위대해졌다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사회성의 핵심을 이루는 작가의 세계관이 심오하거나 확고하다고 해서 그의 문학의 탁월성이 그대로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소설가의 치열한 작가정신에 의해 파악된 사회성은 일단 예술적 형상화에 의해 구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성은 사회성을 실천하는 작업이며, 이 작업을 통해 사회성은 수정되고 다시 심화되는 것이다. 사회성은 예술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탁월한 예술성에 의해서 온전한 모습을 얻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겠다.(Ⅱ-81)
자전적 형식은 사회 속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조정하려는 內省의 양식이다. 그런데 <빈처>나 <술 권하는 사회>(1921)와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작가는 여기에서,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긍정하면서 어느 곳에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젊은 지식인의 절망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Ⅱ-84)
현진건의 자전적 소설을 일관하는 갈등은 결국 개인과 사회라는 추상적 도식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과 사회는 속물적 세계에 의해 파괴되는 개인, 이와 같이 세계사적 모순의 현장인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이 외면되고 사회가 상투형으로 제시될 때 개인은 절망과 도피 이외의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초기 자전 소설은 한 자유주의 지식인의 실패의 기록으로 되는 것이다.(Ⅱ-85)
현진건은 1926년에 <<朝鮮의 얼굴>>이란 단편집을 간행하였다. 이 단편집의 제목은 자전소설을 벗어난 이후 그의 작업의 향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2기의 단편들에서 그는 식민지의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진실하게 형상화한다.(Ⅱ-85)

 

조연현, 「현진건 문학의 특성과 문학사적 위치」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진건은 그러한 단명에도 불구하고 김동인과 함께 한국의 근대단편소설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이며, 염상섭과 함께 한국의 근대사실주의문학의 기초를 확립한 선구자의 일인이라는 점이다. 한국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로서의 그의 공적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상섭의 자연주의적인 출발과는 달리 최초의 습작을 제외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주의로 일관되었다는 점이다. 현진건의 사실주의는 제3자에 대한 제3자적인 관찰이라는 사실주의의 일반적인 자세나 태도에서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와 관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Ⅱ-95)
현진건에게는 자연주의의 전형적인 방법인 실험주의적인 해부적·실증적 요소는 오히려 미약했던 것이며, 현실주의적인 객관적 묘사력만이 그의 세련된 기교력과 함께 뚜렷한 작가였다. 같은 자연주의적인 계열의 작가라고 볼 수도 있었던 김동인이나 염상섭(초기의 경향)과 비교해 보면, 이 두 사람은 현실폭로의 암흑면에 대한 분석적인 추구가 강한데 비하여, 현진건은 그에 대한 냉정한 관조가 강하며, 전자의 두 사람이 의지와 정열로써 작품을 구성해 나갔다면, 후자가 기교로써 이를 요리해 나간 것도, 전자에게는 자연주의적인 방법에 대한 적극성이 강했고, 후자에게는 순수한 리얼리즘 정신이 강했던 까닭에서이다.(Ⅱ-97)

 

林熺燮, 「현진건 문학의 사회학적 배경」

 

1920년대의 한국 식민지 사회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활동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합법적으로 추진하려고 한 소위 「僞裝文化政策」의 시기에 처해 있었다.(Ⅱ-99)
일제말기에 갈수록 지식인들은 서정·풍자·냉소·증언·비유·협력 등의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과 적응 양식을 보여주었는데, 어느 형태든 그것이 식민지 상황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없었다.(Ⅱ-105)
현진건의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식민지상황의 지식인의 고뇌,(Ⅱ-105) 빈곤 그리고 구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젊은이들의 청순한 사랑 등으로 요약되어질 수 있는 것도 192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Ⅱ-106)

 

(「墮落者」게재를 끝낸 뒤에)

끗을맷고보니 처음생각한바의半도 쓰지못하엿다. 그리고 人生의醜惡 一面을 忌憚업시 暴露식히랴든것의幾分間成功도疑問이다. 그것은 作者의無才無能한탓이리라. 有形으로無形으로 이幼穉한붓끗이나마 맘대로 못놀리게하는周圍의까닭도까닭이리라. 그런데 엇던讀者로부터 이醜惡한方面을그린點에잇서 만흔非難을들은 것은 作者로甘受하는同時에, 또 一種의 자랑을늣기는바이다.(作者)
어떤날 開闢社編輯局에 한匿名書狀이 들어왓다....(Ⅲ-73)
그 書狀의內容으로써는 다른것이아니라 우리開闢에 連載해온 憑虛生의小說「墮落者」가作者의 誤入한 廣告라는것과 또編輯局責任者의無責任하다는말로 꾸지젓다 그리고 또文藝部責任者나 作者의辨明까지 要求하엿다. ...어떠한 一部讀者中에는 小說을볼 때 곳그小說의內容이 作者自己의自敍傳이나 傳記가티생각하는이가잇스나 그것은 決코그러치아니할뿐아니라 그가티 誤解하여서는 매우잘못된일이다. 우리人間社會에 잇는醜美를勿論하고 現狀그대로 描寫하는 것이 어떠한 主義의文學이라고도 할 수가잇다. 그러면 그잇는그대로描出하여 讀者의鑑賞을바라는 것이 文藝에업는일이아니다. 文藝의作品이修身敎科書가아니고 倫理說明이아닌以上에는 우리社會에 잇는그대로描寫하는것도 과히 妄發이아닌줄안다. 그리고더구나우리開闢은 兒童雜誌나 幼年雜誌가아니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高級의 讀者와常識잇는讀者들이니까 이러한小說이반 듯이 社會를 毒한다할수는업는 것이다. 文藝의作品으로써는 어떠한나라를 勿論하고 倫理主義, 人道主義, 自然主義, 惡魔主義......其他枚擧키어려울만치여러가지가 잇는 것이다. 그리고世界的文豪의作品으로보더래도 獨逸의詩聖께테의 『젊은벗들의 설음』이 그當時에自殺者를 助長한다는큰非難을바든것과 露國의 쿠푸링의作인 『魔窟』이 賣淫을描寫하고 作者가 스스로 가로되 이作品을 世人이 破廉恥의作品이라고하겟지만은 나는이것을 만흔女子를둔人士에게 一讀을勸한다는말과 英國의 오스카 와일드의 『사로매』가튼作品이 며 더구나 佛國의 못파아산의作品全部가 이 『墮落』以上의 深曲한描寫라고할수가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어떠한 文藝國에 가지고가더래도 非文藝品이라고한소리를듯지못하엿고 어떠한사라이라도 이런 것을 傑作이 아니라는 理由를發見치못하엿다. 나는 다맛憑虛生의이作品이 더욱그 深曲味와 回轉節이未熟한것만 遺憾으로아는 同時에이만한作品이라도 우리文壇에잇는것만반가이녀겨 揭載하기에는조금도 躊躇하지안이하엿다. 우리讀者諸位는 開闢이篇이 文藝篇으로만알고 倫理講演-人造道德篇-이나 說敎篇으로나 알아주지아니하엿으며 그우에더알것이업다. 께테의말이아니나 『遊泳을몰으는者가 물에빠저죽고 물을怨望하는것과갓다』는그者되지말기를 바란다. 나는開闢學藝部責任者로써 이러한質問이있는以上에적어도어떠한 見地下에서 이作品을揭載하엿다는 責任上말로 두어字적는것이다. 만일 우리讀者中 그뜻에거슬리는이가잇거든 만히容恕하여주기바란다.......玄哲......
(이상「개벽 22호, 1922. 4월호 소재)
(Ⅲ-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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