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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편저, , 집문당, 2004.2
2009년 05월 16일 21시 54분  조회:2977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신동욱 편저, 󰡔��한국 현대문학사󰡕��, 집문당, 2004.2


머리말


이 책은 20세기 한국문학사를 장르별로 총 정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시, 소설, 희곡, 비평 등 현대문학의 주요 장르들을 망라하여 문학사를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해외의 한국문학과 아동문학을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처럼 문학사를 장르와 주제에 따라 나누어 제시한 것은 이 방법이 작가나 작품들 사이의 연관성을 좀더 정밀하게 파악하여 문학사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수용자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작품도 결국은 장르의 특질을 실현하여 문예적 가치를 이룬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학사도 개별 장르를 중심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 책을 이용하는 많은 독자들의 요구도(3) 문학 일반의 역사가 아니라 시문학이나 소설문학 같은 개별 장르사에 있다고 판단된다. 아동문학과 해외 한국문학을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동문학이 현실 사회에서 중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서는 흔히 배제되어 왔으며 해외의 한국문학과 관련된 성과들에 대해서도 좀더 포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종전의 문학사들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 한국 현대문학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한 모색의 결과가 이 문학사인 셈이다.(4)


총론


1.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과 근대계몽기의 문학


우리 근대문학의 태동은 애국계몽사상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말에서 합방까지 이른바 개화기로 부르는 시기가 그 새로운 사상과 문학의 기원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개화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애국계몽사상이 속출했던 때로서 개화라는 명칭이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근래에 개화기 대신 애국계몽기라는 명칭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계몽운동이 문학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1900년대이므로, 시기를 축소해 1900-1910년 혹은 1905-1910년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보다 최근에는 이 시기에 근대적인 인식론적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근대계몽기라는 명칭이 주장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시기에 근대적 사회를 이루려는 정치적, 문학적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근대성과 근대문학을 얻으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애국계몽기는 그 중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다양한 기획들이 출현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의 위협에 놓인 이 시기에 독립된 민족국가의 수립이 절박한 과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사상이란 그같은 위기의 상황에 대응해 독립된 민족과 국가를 확립하려는 근대적 기획이었다고 불 수 있다.

그 점에서 애국계몽사상은 다양한 근대기획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기획으로서의 애국계몽사상은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적 흐름으로 나타난다. 크게 나누면 개화(15)를 우선시하는 쪽과 민족의 독립을 중시하는 쪽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자는 다시 급진적 개화파와 온건적 개화파로 나눠지며 후자는 위정척사파와 개신유학파로 분류된다. 이중에서 문학적으로는 급진, 온건 개화파와 개신유학파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개화사상(급진, 온건)에 상응하는 문학이 신소설이라면 개신유교파의 문학은 역사전기소설이었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근대문학을 성취하는 데 있어 양자 모두 본질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개화파의 신소설은 근대화된 국민문화의 획득을 시도하지만 빈번히 외세 타협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반면에 개신유교파의 역사전기소설은 주체적인 민족의 독립을 강조하지만 근대적인 문화형식을 얻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문학적 궁지는 어떤 사상으로도 독립된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어려웠던 이 시기의 정치적 궁지에 상응한다.

그런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기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사상과 서구사상이 다양하게 어우러지는 문화적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문화적 혼성의 양상은 서사문학보다도 개신유학파와 연관된 개화가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전통과 서구가 서로 이반하는 동시에 혼성되는 그 문화 현상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 퇴색하게 된다.(16)


2. 일제 강점기의 문학


1910년대는 일제강점으로 인해 문학에서 정치적 주제가 위축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신소설이 쓰이지만 개화의 주제보다는 통속성이 우세해진다. 또한 계몽적 지식인들에 의한 근대화의 주장이 계속되는 한편 소설 속에서는 빈번히 현실에서의 좌절이 그려진다.

우선 이 시기의 계몽의 주제는 애국이념보다는 개인의 자아각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컨대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적 자아각성에 의해 문명화된 조국을 건설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민족주의는 계속되지만 애국독립보다는 신문명의 건설이 주제로 설정되(16)어 있다. 물론 이는 전 시대의 신소설의 주제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소설이 나름대로의 민족적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이었던 반면 󰡔��무정󰡕��은 그보다는 근대적 자아각성에 의해 새로운 시민공동체를 이루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ㄴ 근대적 개인의식은 문장에서도 나타났다. 신소설의 ‘~하더라’ ‘~했더라’ 등은 서술자의 책임이 없고 개인의 의지나 주장을 희석시키게 했다. 이에 비해 이광수는 사고와 행동의 묘사에서 현저히 분절화된 세련된 문장을 쓰기 시작했고, ‘~생각을 한다’ ‘~할 마음도 생긴다’ 등의 서술로 서술자의 견해와 의지, 느낌, 그리고 시제를 명료히 기술하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초기 문장 역시 ‘하더라’ 체를 습용하였으나 점차 객관화, 분절화 된 문장으로 발전했고, 이는 김동인, 현진건, 염상섭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심리적 진실에 입각한 문체로 성숙해 갔다. 말하자면 근대적 자아확립에 부합되는 문체가 수립되었다. 이광수는 이처럼 근대소설의 개척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후 󰡔��이순신󰡕�� 󰡔��원효대사󰡕�� 등의 역사소설을 통해 보편적 인격체로서의 걸출한 애국자와 사상가를 묘사하여 한국 근대소설의 거봉이 되었다.(17)

한편 전 시대와 구별되는 1910년대 문학의 특징은 현상윤의 「핍박」이나 양건식의 「슬픈 모순」 등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두 사람은 이광수와 비슷한 계몽적 지식인이었지만 소설 속에서는 계몽적 이념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현실에 대한 환멸에 근거한 그 같은 부정적 인식은 이 시기에 새로 나타난 것으로 1920년대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이어지는 요소이다.(17)

이처럼 1910년대 문학은 개인의 자아각성에 근거한 근대문학의 형식을 얻는 한편, 내용적으로는 당대현실에 대한 진정한 인식에 한발 접근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의 문학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직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본격적인 근대문학은 1920년대 가서야 이루어진다.(17)

3∙1운동 이후의 1920년대 문학은 동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점이(17) 특징이었다. 이 시기에는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를 통해 다양한 문학적 실험이 전개되었다. 󰡔��창조󰡕��를 창간한 김동인은 전 시대 작가들과는 달리 계몽주의보다는 예술 그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했다. 반면에 󰡔��폐허󰡕��의 동인이었던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만세전」에 이르는 초기소설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내면고백체를 실험했다. 또한 백조파 출신 현진건과 나도향 등은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출발해서 리얼리즘으로 변화되어 가는 소설들을 창작했다. 시의 경우에는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 백조파의 낭만주의가 초기 시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시든 소설이든 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낭만주의적 경향은 점차로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려는 문학으로 변모되어 갔다. 특히 염상섭과 현진건의 리얼리즘 소설의 발전을 주목할 수 있으며, 시에서는 김소월, 한용운 등에 의해 전통적 정서와 사상이 부활되면서 근대시의 완성으로 나아갔다.(18)

그러나 1930년대는 임화, 김남천, 안함광, 백철 등에 의한 리얼리즘의 정점기인 동시에 쇠퇴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상 중심의 문학에 대한 반발로 순수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과 일제의 파시즘적 탄압이 거세어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시에서는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등의 시문학파에서 보인 순수 서정성과 민족의식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청록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서(18)정주, 유치환 등 생명파 시인들도 형상적인 시를 이루어 서정성을 심화시켰다. 소설에서는 그런 변화가 조금 후에 나타나는데 이 전화기의 또 다른 특징은 모더니즘 문학이 나타난 점이었다. 시에서 정지용,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은 감정을 절제하고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들을 창작했고, 소설에서는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처럼 무기력한 지식인의 내면을 병렬적 영상 기법으로 조명하는 문학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문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최재서의 비평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0년대 후반은 심리적 리얼리즘이 성행했고 비평에서는  사회적 리얼리즘론이 유례없이 왕성하게 전개된 때이기도 했다. 또한 「봄봄」 「동백꽃」 등 김유정의 골계소설과 󰡔��태평천하󰡕��, 「치숙」 등 채만식의 풍자소설을 통해 우회적 전략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이 명맥을 이어갔다. 그 점에서 1930년대 후반은 적극적인 문학이 위축된 시기인 동시에 가장 다양하고 창조적인 문학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현실의 암흑 속에서 빛나던 창조적 열정도 1930년대 말엽에 이르면 허무주의에 빠지며, 1940년대로 나아가면서 친일문학의 굴욕적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 우리문학의 순결성이 완전히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 치욕의 시대에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육사, 윤동주 등의 문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19)


3. 해방기와 전후의 문학


8∙15 광복은 민족해방의 열망을 성취시켜 주는 듯 했으나 미소 양대 진영의 세력에 의한 군사적 분할로 분단을 초래했다. 1945년에서 6∙25, 그리고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해방의 소망과 분단의 좌절이 엇갈린 격동의 시기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민족문학 수립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함께 반영되어 나타났다.(19)


4. 산업화 시대와 변혁운동기의 문학


1960년대는 4∙19 이후 현실 참여론이 제기된 시대인 동시에 제3공화국 탄생 후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전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싹튼 현실비판의식은 4∙19 이후 참여문학론으로 부각되어 1960년대 중반 무렵 이른바 순수 참여 논쟁이 본격화된다. 이어령, 김우종, 홍사중 등이 현실참여론을 내세웠으며, 이에 대해 김동리, 조연현, 김상일 등이 순수론을 주장했다.(21)


5. 후기산업 시대의 문학


1990년대는 과거와 같은 독재정권이 무너진 대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모순이 개인의 일상에 내면화된 시대였다. 그에 따라 사회적 참여보다는 개인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이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1980년대 후반처럼 노동문제에 집중되기보다는 생태환경이나 여성문제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가 일고 미시적 차원에서 삶의 문제를 조망하려는 흐름도 나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 서구의 문화이론들이 넓게 소개된 점도 이와 연관이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들이 나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엄존하는 사회적 문제를 유희적으로 해소하려는 역사허(25)무주의의 반영으로 보는 관점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기획과 대서사를 폐기처분하기보다는 미시적 원리를 통해 반성적으로 재고하려는 문화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이해를 할 때에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론은 여전히 존재하는 근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1990년대 문학은 그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변증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일상성과 다양성을 통해 개인의 내면에 깃든 사회문제를 암시하는 문학이 성행했다.(26)

소설의 경우 1980년대 이후의 서사적 무력감과 그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90년대의 무력감은 단순한 주체의 붕괴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화에 의해 권력의 존재방식이 달라진 점과 연관된다. 80년대에는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체화된 대서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미시적 권력에 대한 탐구가 더 절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 대한 대응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80년대의 문제의식을 90년대 현실에서 조망하는 후일담 문학이 성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탈근대론과 연관된 메타픽션형식이 80년대 후반에 이어 뚜렷하게 부각되기도 했다. 아울러 90년대 초반에 성행했던 성적 욕망에 관한 소설들 역시 상업화되고 물신화된 성의 문제가 전시대의 정치적 문제에 못지않게 중요해졌음을 암시한다.

이런 흐름은 소설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일상성과 다양성의 문제가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권력의 일상화로 인한 일상성의 문제는 개인의 삶 속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소설들을 만들어 냈다.(26)

1990년대 문학은 한마디로 일상의 영역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아를 지키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빈번히 개인의 영역에 폐쇄되는 한계를 드러낸다. 90년대의 다양한 개성의 문학은 전시대의 거대서사나 총체화된 문학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개성이 건강한 문학에 대한 폐쇄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회적 전망을 지닌 대서사에 대한 재고는 21세기 문학을 위해 필수적이다.(27)

한국 문학사란 개연성 있는 참된 한국인의 삶의 모습이 각 시대의 역사, 사회, 문화와의 연관 속에서 예술적 형식으로 부조되는 것을 포괄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뜻에서 문학사는 우리 정신사와 사상사의 한 주류를 미(27)적 측면에서 기술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그처럼 우리 삶을 조망하는 정신의 내용과 미적 형식의 만남이며, 그 점에서 우리 예술사에 흐르는 삶에 대한 전망으로서 우리 자신의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에서 비롯한 대동사상과 낙관주의의 면면함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28)


Ⅰ. 시


Ⅱ. 소설


1. 근대계몽기 소설 1

2. 근대계몽기 소설 2

3. 일제 강점 초기 서설 1

-신지식층의 소설 문학


3) 친일복속적 신지식층의 소설과 허위의식


1920년대부터 친일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광수는 1910년대 중반부터 「신생활론」 「오도답파기」 등을 통해 친일적 제스처를 마음껏 취하기 시작한다. 실력양성, 계몽이라는 이름하에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양성론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론을 펼친다. 그의 이론이 개량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상윤과의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이광수는 실력양성에 있어 정치는 빼고 문화만 논하자는 입장을 취한바 있고 이에 대해 현상윤은 ‘독립」 등의 정치문제를 뺀 문명개화의 허구성을 지적하여 이광수를 비판한바 있다. 여기서 이광수의 구습∙구사상 개혁론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광수의 개혁론에는 반봉건적 성격은 강하게 드러나 있으나 반제적 성격은 거세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개혁론은  필연적으로 개량화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을 지닌다.(342)

1910년대 최다 단편소설 작가(총 18편0인 백대진은 1910년대에 자연주의문학을 제창하는 등 비평이론가적 면모도 일찍이 전개한바 있다. 󰡔��반도시론󰡕��과 󰡔��신문계󰡕��의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바 있는 백대진은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난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가난 때문에 발생한 비극과 그 불행의 원인인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가난 및 빈/부의 차이를 통해 인간관계가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백대진의 소설들은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을 가능케 하는 직접적 원인으로 그 자리매김이 가능하다. 이러한 양상을 드러내는 소설로 「오호박명」 「황금」 「나의 일기로부터」 「절교의 서한」 「양인의 기도」 「금강의 몽」 「과모의 루」 「생?」 등이 있다.(345)

그러나 백대진의 소설에서는 아직까지 가난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지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이 가난에 일제의 수탈과 약탈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은(346) 애써 간과하고 외면한다. 다만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즉 빈자의 계급적 시각에서 가난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을 뿐 가난을 물리쳐 줄 상대를 일제의 문명개화한 세상으로 파악하고 있어 리얼리즘적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여럽다. 이러한 점은 그의 소설을 자연주의에 머물게 한다. 자연주의 소설은 1920년대에 개화한 것이 아니라 1910년대 백대진의 소설을 그 출발점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다.(347)

김복순(명지대)


4. 일제 강점기 초기 소설 2

-1920년대 자연주의 소설의 형성


1) 예술지상파의 인생 제시


(1) 창조파의 반기

(2) 사실성 실험의 김동인 소설

(3) 시대고 증언의 염상섭 소설

(4) 분노로 추구한 현진건 소설


2) 프로문학파의 계급의식


(1) 신경향파소설의 대두

(2) 사회주의 리얼리즘소설의 형성

장백일(국민대)


5. 일제 강점 후기 소설 1

-진보적 작가를 중심으로


1) 파시즘의 대두와 진보적 문학의 위기

2) 진보적 작가의 변모와 후일담 소설

3) 예술파 작가의 등장과 모더니즘

4) 고전주의와 순수소설

나병철(교원대)


6. 일제 강점 후기 소설 2

-1930년대 후반 문학의 주체 담론과 전통주의


1) 1930년대 후반의 현실과 문학의 이념

2) 주체 문제와 새로운 개인성


1930년대 후반 비평계는 주체 재건의 중요성에 대해 절실하게 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논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그 실재성과 당위성을 인정받아 온 ‘집단 주체’의 붕괴라는 현실적이고 이념적인 사건이 놓여있다. 집단적 주체, 즉 집단에의 귀속을 전제로 존재 의미를 획득한 개인이라는 상은 우리 근대 문학 초창기에서부터 출현한다. 특히 집단 주체는 카프를 통과하면서 계급성을 얻게 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집단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혹은 근본적으로 집단성을 구현하고 있는 개(388)인 주체는 존재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 모든 문자매체를 지배하던 근대화론으로부터 이광수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집단적 추동력에 의해 생명을 얻은 개인의 상을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광수에 의해 형상화되고 이냄화된 개인은 표면적으로는 개성과 감성을 지닌 근대적 ‘개인’이었지만 당시의 이념적 장 안에서 살펴보면 ‘보편적인 권리와 쾌락적 욕망을 부여받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들의 집합’으로서의 개인이었다.

이광수는 고유한 개성과 유일한 특성을 지닌 개인을 본격적으로 제시했지만 이 개인이란 그가 ‘보편적’이라고 여긴, 그리고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근대적 인간’의 욕망, 심리, 의무, 윤리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였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인상이 근대 초기에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절대적 가치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이광수 식의 계몽주의적 개인성은 카프와 리얼리즘 담론을 통해 전복되고 이어 계급성을 표방한 새로운 집단 주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진행 과정은 우리 문학의 지배적인 관심이 결과적으로는 집단적 가치의 구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문학에서 실체화되기 시작한 개인 주체는 앞선 시기와는 달리 집단적 성격의 상실과 더불어 등장한다. 상실의 배경과 관련하여 임화는 “적극성과 희망 대산 退와 소극성과 절망의 意識이 탄생하였다. 내셔널리즘도 소셜리즘도 없어졌다”(임화, 「복격소설론」(1938.5), 󰡔��문학의 논리󰡕��(서음출판사, 1989), 225쪽-각주5)고 언급했고 김남천은 다음과 같이 절실하게 토로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운명을 집단의 거대한 운명에 종속시키고 자신의 표현을 이 속에서만 발견해 오던 시대에 있어서는 집단과 개인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문학사상상의 불일치는 표면화될 여유가 없었고 각 개인은 사소한 불일치를 실천과정 속에서 해결하여 그 곳에는 일정한 객관적 방향(389)과 영향 밑에서 일치하여 자기를 이끌어 나가는 통일된 방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 역사의 행정(行程)이 이러한 것의 일반적인 퇴조적 현상을 우리의 앞에 강요할 때에 집단성의 밑에 종속되었던 작가와 비평가는 자신의 출신 계급을 따라 일개의 독립된 자기로 귀환하고 말았다.


김남천이나 임화는 주체 문제를 바로 자기 삶의 문제로 육화했던 이론가들이었다. 비평계에서 논의된 차원과는 그 궤를 달리 하지만 소설이라는 가상 영역 역시 집단적 가치에의 귀속이 불가능한 개인, 집합적 성격을 상실한 개인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다.(389)

사실 김동리가 ‘신세대 작가’들의 의식을 ‘개성과 생명의 구경’으로 규정한 것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이들에게 고스란히 적용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신진으로 분류된 여러 작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특히 김동리가 극찬한 최명익이나 그 밖의 허준, 유항림과 같은 작가의 미의식은 김동리와는 매우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세대 논쟁에서 신세대의 입장이라는 것은 사실상 김동리 개인의 논리, 그가 의도한 차별화 전략에 포섭된 면이 강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세대 논쟁을 이해한다면 이 논의가 시사하는바 당대 작가들의 현실인식과 미의식의 변모 양상에 보다 합당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최명익과 허준, 유항림을 사로잡은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집단적 전망을 상실한 개인’이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근대의 종말, 역사의 쇠퇴, 미래의 부재라는 역사철학적 비관주의가 깊숙이 개입되어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서는 근대에 대한 생산적 비판이나 모순에 대한 포착보다는 한 시대의 종말을 감각하는 자들의 절망과 좌절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진보에의 신념, 역사 진행의 파악 가능성이라는 근대적 인식틀이 여지없이 파괴되면서 이제 의미의 유일한 거점은 이 혼돈 속에 놓여 있는 개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최명익과 유항림에게서 주체 문제는 일종의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윤리성이라는 잣대로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행위는 이성이나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라, 순결성, 진정성이라는 심정적 신념의 영역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후반은 이성의 시대라기보다는 신념의 시대였고, 마르쿠제의 논의를 빌리자면 ‘정신’의 시대라기보다는 ‘영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91)

자기 존재의 순결성을 제1의 윤리적 덕목을 삼고 있는 개인이 이 시기 작품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 당시 소설에 나타나는 주체 인식은 이성과 합리성을 향한 끝없는 열망에 근원을 두고 있는 임화나 김남천의 이념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객관 현실의 파악’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주체 재건을 역설하는 입장과는 달리 소설을 통해 형상화된 주체는 현실에서 소외된 당위적 가치들을 자기 내적을 보존,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문제가 ‘윤리’ 혹은 ‘자기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392)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가치론적으로 소외된 개인이 골몰하게 되는 것은 삶의 진정성 회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스스로를 운용하는 자기-기술이다. 이처럼 자기-기술과 윤리성의 결합 양상이 1930년대 후반 소설의 개인 주체 테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392)


3) 근대 부정과 전통주의


1930년대 후반 문학을 논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영역은 전통론과 동양담론일 것이다.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논의의 밑바닥에는 앞에서 살펴본 주체 담론의 저변에도 역시 깔려 있는, 어떤 공통된 시대 인식/감각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역사관, 진보의 시간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이다. 이는 주체의 문제에 천착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미 절대적인 전제가 되어 있다.(393)

김예림(연세대)


7. 일제 강점 후기 소설 3


1) 파시즘과 친일 문학


만주 사변이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은 일제의 세계 대전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면서 내선 일체와 황민화 정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흡수하는 통합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일제에 의해 한글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민족 언론까지 폐간되었으며 국민총연맹을 결성하여 징병제와 학병제를 시행함으로써 전 국토를 전시 체재화하였다.

작가들은 황도 문학을 선양하기 위해 일어로 창작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으며 이광수 등 일부 어용문인들은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며 친일 어용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에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행되면서 작가들이 신 체재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장지가 폐간되고 친일지인 󰡔��국민문학󰡕��과 󰡔��인문 평론󰡕��이 발간되어 시국문학과 국책 문학을 독려함으로써 조직적으로 진보적 계열의 작품 활동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파시즘의 극열화로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문학적 실천이 불가능하였다. 특히 현실의 타락한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려낼 수 없었고 서사적 전망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창작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작가 중의 일부는 근대의 부정성에 야합함으로써 현실을 이상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시즘의 전시 체제에 동조하거나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찬(397)양을 통해 파시즘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일부 작가들은 현실과 유리된 신화적 세계를 동경하거나 남녀의 통속적인 연애담을 그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시 상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안수길의 간도 문학과 전근대적인 가치 속에서 현재에 대응할 만한 이념을 모색했던 황순원의 작품 세계는 이 시기의 소설문학적 성과로 주목할 수 있다.(398)


2) 안수길: 북향 정신과 생존에의 의지


안수길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나 1924년 14세의 나이로 간도에 갔다가 다시 서울과 일본을 거쳐 1931년 간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처럼 안수길에게 간도는 조선 다음의 ‘제2의 고향’으로서 그의 북향 정신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는 북간도를 배경으로 도시적 삶보다는 자연에의 귀의 의지와 노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벼」 「새벽」 「목축기」 장편소설인 󰡔��북향보󰡕��를 발표하였다.(398)

이 작품은 간도 한인들이 중국인 지주의 지팡 살이로 살아가면서 이민지에 정착해가는 과정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작가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만주 땅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려는 조선인의 생존 의지를 그려보았다. 한인 가족의 비극적인 파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새벽」으로 설정하여 일본 통치하의 만주국에서 한인 이주민의 미래를 낙관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었다.(399)

이 작품(「벼」-인용자 주)은 일제의 식민지 국민이면서도 만주땅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일제의 만주 통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일제에 저항하는 중국인들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한인 이주자들의 생존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0)

(「목축기」-인용자 주)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찬수가 자연 친화적인 돼지 기르기를 통해 생산의 기쁨을 누린다는 이야기로서 일제 말기 전시 체재하에 벌였던 생산 증려 정책에 부응하는 주제로 볼 수 있다.(400)

󰡔��만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북향보󰡕��는 간도를 정착지로 만들려는 북향 정신에 바탕을 두고 오찬구가 정학도의 의지에 따라 성실하게 노동하며 목장을 재건함으로써 마침내 만주국에서 목장 유지에 성공한다는 낙관적 전망을 담은 소설이다. 이 작품은 부동성이 많은 조선 농민이 농업 만주에 정착하여 증산에 매진하는 것을 건국 정신으로 이상화함으로써 일제의 만주 지배를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400)

이처럼 「목축기」와 󰡔��북향보󰡕��는 생산 장면의 묘사에 역점을 두고 창조적 노동을 찬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 말기 전시 동원 체재의 요(400)구에 부응하는 것이다.(이상경, 「간도 체험의 정신사」, 󰡔��작가 연구󰡕�� 제2호, 1996년 하반기, 28쪽 참조-각주4)

이것은 만주에서 생존 의지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의 아이러니한 존재론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401)

안수길의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간도 문제는 「홍염」이나 「탈출기」에서 최서해의 계급 의식에 기초한 현실 인식이나 강경애의 「소금」에서 보여준 사회적 사실주의적인 관점과는 다르다. 안수길의 작품들은 이민세대의 생존을 위한 서사로서(김윤식, 󰡔��안수길연구󰡕��(정음사, 1986), 13쪽 참조-각주5)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지만 당대의 만주땅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의 만주 지배 정책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401)


3) 이태준: 근대 예찬과 삶의 진정성의 상실

4) 황순원: 전근대적인 가치의 재인식과 변두리적 인물들의 내면적 순수성

5) 박태원: 사적 생활 세계로의 침잠

6) 역사 소설의 등장

김혜옥(한양대)


Ⅲ. 희곡

Ⅳ. 비평

Ⅴ. 아동문학


Ⅵ. 해외문학


1. 중국조선족문학


광복 전 중국 조선인 이민사를 보면 대체로 세 차례 고봉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대기근으로 봉금령을 마다하고 두만강을 건너온 개척민이고 다른 하나는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넘어온 독립투사들과 기타 이주민이며 또 다른 하나는 1931년 위만주국의 건립에 따라 강제 또는 반강제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다. 이른바 중국 조선인문학이란 그들 또는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중국을 배경으로 영위된 문학을 가리킨다.(824)

중국의 조선인문학은 조선북부의 간민들이 이 땅에 와서 개척의 첫 괭이를 박던 그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초(824)기문학은 여기에서 새롭게 창작되였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개는 조선 전래의 문학이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괴나리보짐에 쌓이거나 쪽박에 실려온 문학이다. 이점은 특히 구비문학인 민담, 민요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이곳에서 류행했다고 하는 <<아리랑>> <<도라지>> <<에밀레종>> <<바보온달>.이 그러하며 <<신아리랑>>이나 일부 전설, 설화, 민담은 조선반도와 갈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중국의 조선문학은 조선문학의 연장선상에 서있으며 모태인 반도와 갈라놓고 운운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은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진다.

광복후 중국의 조선인문학은 전시기 문학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광복후 이 땅에서 문학활동을 하던 많은 문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갔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과 함께 중국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은 중국국적을 가지고 중국공민으로 되었다. 따라서 문학도 전시기와는 달리 중국조선족문학으로서의 특점을 과시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위주로 중국의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노래한 송가식문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재난속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민족문화혈통론>>이란 모자를 쓰고 전면적인 비판을 받다가 1976년 <<4인무리>.를 뒤엎자 다시 부흥하는 태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문학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특점을 보여주고 있다. 담장밖에서 피여나는 한 송이 꽃이라고 할까.(825)


상편


1) 재중조선인문학의 산생


일반적으로 문학의 산생에는 이러저러한 여건들이 구비되여야 하는데 중국조선인문학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큰 작용을 했다. 하나는 중국조선인사회의 형성이고 하나는 중국조선인문학의 모태인 조선반도문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1883년 어윤중의 함경도시찰은 각별한 의의를 가진다. 밤이면 두만강을 건너가 <<도둑>>농사를 짓던 함경도 사람들의 기대만큼 이 한 차례 거동은 이른바 <<월강죄>>를 무색하게 하였고 중국 조선인 사회의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生活이 있고 생활이 있으면 文化가 있고 문화가(826) 있으면 문학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심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작용을 하는 문학은 인간의 생활을 떠날 수 없다. 중국조선인문학도 례외일수 없다. 그러나 중국조선인문학의 경우, 특히 그 초창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조선이주민들의 생활보다는 조선반도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중국조선인문학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이 시기 반도의 문학을 살펴보는 것이 마땅한 절차라고 생각한다.(827)

앞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조선간민들은 19세게 60년대부터 이 지역으로 밀려들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물론 그 시기 조선 북부를 휩쓴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재해뿐이 아니였다. 여기에는 <<人災>>도 있었는바 통치자들의 수탈과 일제의 략탈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1976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로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정책을 강행해 나가면서 1905년에는 조선정부를 핍박하여 <<을사5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정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여 독립국가인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영웅적인 조선인민은 굴복하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각일각 가심화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은 중국에서, 쏘련연해주에서, 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근대조선의 력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우는 력사였으며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싸운 력사였다. 조선의 근대문학이 이러한 력사의 산물인것과 같이 중국조선인들의 력사 역시 이러한 력사의 산물이였다. 따라서 중국조선인문학은 초창기, 즉 산생기로부터 강렬한 반일성격을 띠지 않을수 없었으며 계몽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력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고구려의 넋이 분명히 숨쉬고 있는 이(828) 당에서 자기의 력사보다는 반일계몽이라는 문학을 영위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것을. 그러나 그것은 굴할줄 모르는 우리 민족의 저력의 표현이며 강렬한 애국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민족의 저력과 정신은 이 지역의 초창기문학에서도 표현되고 있다.(829)

연변 지역 학자들의 수집정리에 따르면 당시 여기에서는 수많은 창가, 시조, 자유시, 민요가 류행되고 있었는데 가장 주되는 것이 반일성향을 띤 창가, 시조이다.(829)

이러한 시가들은 철저한 반일사상과 독립자주정신으로 충만되여 있는바 이국땅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불같은 의지가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데...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적기교나 표현보다는 호방하고 강렬하며 견강한 시적기질과 힘차고 박력적인 것으로 특징적이다.(830)

민족계몽에 모를 박고 있는 시나 창가들도 이러한 특점을 갖고 있다. 반도문학에서 민족계몽이 문학의 다른 하나의 주제로 되고 있듯이 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계몽을 받지 못하고 이 땅에 밀려든 개척민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근대계몽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주요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지역에 밀려든 많은 지식인과 항일(831)투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신문잡지를 발행하면서 문화적으로 민중을 깨우쳤을뿐만아니라 민중적이고 전통적이며 통속적인 민요나 창가, 또는 시조, 자유시 등등 여러 가지 형식을 리용하여 대중적인 계몽운동을 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역시 창가가 가장 많았다.(831)

이처럼 이 시기 중국조선인문학은 창가를 중심으로 그 형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여느 나라나 지역의 문학이나 문단처럼 그렇게 우아하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수수하게 고고성을 고했다. 그래서 진솔하게 말해서 조선인문단의 형성을 고한 작가나 작품이 이것이요라고 할만한(831) 작가도 없고 작품도 없다. 그러나 반면에 그만큼 진실하고 강렬하며 또 실제적이고 효용성이 강한 특점을 갖고 있다. 작품에 반영된 기치선명한 반일사상경향과 민족계몽사상이 이런 관점을 �받침하여 주고 있다. 특히 강렬한 반일애국사상은 민족의 전통적인 애국사상과 그 궤를 같이 하는것으로서 민족수난의 시대에 외세에 굴하지 않는 민족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이 시기 문학은 물론 우리 전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재부로 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 물론 이 시기 문학 전부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지역의 그 어느 때 문학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가치있는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듯이 어떤 창가들은 소극적이거나 숙명적인 사상정서와 감정을 읊조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다.(832)


2) 1920년대 문학과 <<민성보>>


1920년대 중국조선인문학은 연변의 <<3∙13운동>>과 더불어 시작된다. 주지하다싶이 1919년 3월 지금의 연변지역에서는 룡정을 중심으로 <<3∙13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조선의 <<3∙13운동>>의 영향하에 나타난 거족적인 항쟁으로서 <<3∙13운동>>과 더불어 중국조선인력사의 새로운 한 장을 열고 있다.

<<3∙13운동>>은 중국조선인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3∙13운동>>을 계기로 이 땅에는 조선본토문학과 여러 가지 시대적인 문학 사상과 사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우리의 편지>> <<일민보>> <<신국보>> <<구국일보>> 등 신문들이 출간되면서 그것들이 더 널리 더 깊이 있게 전파될 수 있게 되었고 문학발전의 건실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항일투사들과 진보적인 문인 그리고 량심적인 지식인들은 이러한 신문과 간행물을 통하여 애국계몽활동과 민족계몽운동을 벌렸으며 또 그것을 문학창작의 진지로 삼고 널리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문, 간행물에 종종 여러 가(832)지 형식의 문학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미구에 辛酋詩社, 文友社, 藝友社 등 문학단체가 나오면서 문학적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고 <<간도일보>> <<민성보>>가 나오면서 이 지역 문학은 본격적인 발전단계에 들어섰다.(833)

<<간도일보>>는 룡정 일본령사관의 기관지로서 친일경향을 띤 신문이였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기 일부 조선인작가들은 이 신문을 리용하여 여러 가지 형식의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객관적으로 이 지역 조선인문학의 발전을 추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지역의 문단에서 이름을 지울수 없는 박계주가 이 신문을 빌어 문단에 두각을 내밀었다는 사실과(박계주는 1929년에 <<간도일보>>에 <<赤貧>>이란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이 신춘문�작으로 입선되였다. 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제68페이지 참조-각주11) 중국의 당대 유명한 시인 리욱도 이 신문에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이 이러한 론점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리욱은 1924년 17세에 <<간도일보>>에 서정시 <<생명의 례찬>>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창작을 시작한다.-각주12)(833)

1927년 2월 12일, 룡정에서 <<민성보>>가 발행되였다. <<간도일보>>가 친일경향을 띤 신문이였던것과는 달리 이 신문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지역의 유지인사들에 의해 꾸려지는 <<民報>>였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문예면도 있었는데 조선문편집은 윤화수, 김와룡이 선후로 력임했다고 한다.(<<민성보>>에 관한 것은 최상철 <<중국조선족 언론사>>(경남대학교출판부 1995년판)65-81쪽 참조-각주13)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본지에 문학작품을 게재했는데 그 때로부터 이 지역의 문학은 본격적인 발전단계에 들어선다. 자료구득난으로 현재로서는 <<민성보>>에 발표되었던 문학작품들과 작가들을 모두 집게할 수는 없지만 제한된 범위내에서 구득해본 <<민성보>>에만 의해도 당시 이 지역의 문학열이 여간만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33)

중화민국 17년 6월 30일자 <<민성보>>에는 아래와 같은 통지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발했던 문학활동의 일단을 단적으로 시사해 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 문예연구회 제4회 림총(臨總)


문예연구회는 래(來) 7월 1일 오후 8시에 간도학원에서 제4회 림시총회를 개최한다는데 본 회원 내지 일반 문학청년은 다수히 참석하기를 바란다더라.(<<민성보>> 1929 6월 30일자-각주15)


이 통지문 아래에는 이 문학연구회의 강령이 적혀 있다.


-) 우리는 민중의 필요한 문예를 연구함

-) 우리는 조선문학운동을 촉진함

-) 우리는 문인의 단결을 공고히 함(동상-각주16)


이 통지문과 강령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첫째, 이 시기 간도지역에는 민중과 조선문학운동의 촉진을 위한 문학연구회가 있었다. 둘째, 이 문예연구회는 자체의 강령이 있는 비교적 완정한 문예단체였다. 셋째, 제4회 림시총회이니 제1회, 제2회, 제3회 총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 연구회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834) 시사해 준다.(835)

이 시기의 시가 창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쏘련의 사회주의혁명에 따른 이른바 혁명가요들인데 당시 이 지역에서는 <<혁명가>>, <<10월혁명가>> <<의회주권가>> <<불평등가>> 총동원가>> <<결사전가>> <<혁명투쟁가>> <<추도가>> 등등 가요가 퍼그나 류행되였는데 거개가 드높은 혁명투쟁정신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시기 항일애국시가와 30년대에 류행되는 항일가요와 어울려 중국에서의 조선인문학의 특색의 하나로 되고 있다.(836)

이외에 또 <<파랑새>> <<경숙의 마지막>> <<학우지정>> 등등 연극들이공연되였고 <<뉘라서 간도가 좋다더냐>> <<새 아리랑>> <<헛농사>>와 같은 시들과 일부 설화들이 창작되였다.(837)


3) 1930년대 항일문학과 룡정문학도들의 동인지-<<북향>>


1931년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고 이른바 만주국을 세우고 <<오족협화>>를 부르짖으며 본격적인 식민지책응ㄹ 펴나갔는바 문학환경은 조선본토와 별로 차이가 없이 험악하였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이 지역의 문인들은 끈질진 창작으로 지역의 문단을 다채롭게 장식해 나갔다.

이 시기 문학은 광복전 이 지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한 페지를 쓰고 있는데 이 지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있는 부분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 시기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유격구나 태항산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항일문학이고 다른 한 갈래는 룡정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창작된 문학이다.

항일문학이란 동북항일유격구, 태항산을 중심으로 한 관내의 조선의용군, 또는 기타 중국에서 활약하던 광복군들속에서 창작되였거나 류행되던 가요나 연극 또는 기타 장르의 문학을 두루 일컸는것인데 주요한 것은 가요라고 할수 있는데 그 시기에 항일유격대내에는 문학작품현상모집활동도 있었다고 하니 문학창작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837)였던 것으로 보여지나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에서 나오다싶이 이런 시가들은 전쟁 가운데서 창작된 것이고 또 인쇄되여 출판된 것이 아니여서 많이 류실된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전해지고 있는것만으로도 그 일단을 넉넉히 짐작해볼수 있는데 거개가 강렬한 애국정신과 반일정신으로 충만되고 있어서 이 시기 조선문학가운데서 가장 비장한 한 장이 아니였던가 한다. 이를테면 <<최후의 결전>> <<의용군 행진곡>> <<민족해방가>> <<선봉대가>> <<9.18사변가>> <<반일가>> <<연길감옥가>> 등등은 일제에 끝없는 증오심과 더불러 그들과 혈전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망향가>> <<그리운 조선>> <<고향리별가>> <<조국부흥의 길로>> <<어머니를 그리며>> 등등은 망향의 한과 더불러 침략자에 대한 증오 그리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 당시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되 조선반도에서는 민족이나 반일을 부르짖을수 없는 상황이였다. 특히는 <<카프>>가 검거적발된후에는 일제의 문화통치가 강화되여 현실부정적인 글도 쓰기 어려웠을뿐만아니라 <<카프>>의 핵심이였던 박영희는 전향하고 리기영과 같은 작가들의 예봉도 크게 무디여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와 상반대로 중국에서는 항일 유격구를 중심으로 이러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여 망국노로서의 한을 크게 달래주고 있다. 만일 이러한 문학마저도 없었다면 이 시기 문학을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 망설이지 아닐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가요들이 세련되지 못한 약점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마땅한 자리매김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다.(838)

이와 등시에 이 시기에 <<강제징병>> <<태항산에서>> <<혈해지창>>, <<조선의 딸>>과 같은 연극들이 창작공연되였다고 하는데 그 기본적인 의식성향은 반일애국으로서 항일가요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839)

룡정, 중국조선족의 희노애락의 견증인이고 유서깊은 곳이다. 더욱이는 윤해영과 조두남의 <<선구자>>로 인하여 더 널리 알려진 곳으로 광복전 중국조선인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인문학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북향>>이다.(839)

<<북향>>이란 리주복, 강경애, 모윤숙을 위수로 한 룡정의 문인들과 학생들이 <<제2의 고향>>의 문학을 이룩하기 위해 꾸린 문학단체 <<북향회>>의 기관지인데 이 시기 룡정의 문학성과를 대표하는 문학지이다.(839)

<<북향>>은 도합 4기를 냈는데 지금까지 1935년에 발행한 제1호는(840) <<조선문단>>의 광고에서 보는 목차만 전해지고 있고 제2호는 1936년 1월에 총27면으로 발행되였고, 제3호는 3월에 총 32면으로, 제4호는 8월에 총 31면으로 되어 있다.(841)


4) <<5족협화>>와 <<만선일보>>문예란에 발표된 작품


<<5족협화>>, 이것은 위만주국건립이후 일제가 내놓은 이른바 건국리념의 하나이다. <<5족>>이란 일본인, 조선인, 몽고인, 중국인, 滿人을 가르키는것이고 협화란 화목과 협조로서 뜻인즉 만주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민족은 평등하고 화목하며 상호 협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및좋은 개살구라 할까. 일제가 위만주국에서 진행한 모든 문화활동은 이것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만선일보>>도 례외일수 없다.

<<만선일보>>는 1937년 10월에 원래 발행하던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통합되여서 나타난 신문으로서 통합되면서 창간취지가 변한 것은 아니였다.(843)

그러나 그 문예란은 이것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사라(843)져간 조선문학을 보완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844)

련재예고에 따르면 안수길의 <<북향보>>는 렵상섭이 건강관계로 련재하던 <<개동>>을 더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신으로 련재된것인데 취미나 렵기위주의 상투적인 신문련재소설과는 좀달리 이주민들의 생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는 그 어떤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에서 <<현시국의 요청>> <<만주정착문제>> 등등은 당시의 <<만주국>>의 건국리념으로도 파악되거나 해석될수도 있는것이지만 돋보이는 것은 父祖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고장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건설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우리 부조들이 개척한 이 땅을 자기의 땅으로 삼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자. 현실적으로야 어쨌든 이것은 실로 거창한 꿈이다. 안수길의 소설은 이러한 꿈으로부터 시작된다.(847)

臥牛山기슭에 리상향을 건설하려는 꿈을 안고 평생을 바쳐온 정학도와 거기에 동조하는 지식인 오찬구의 형상을 그린 이 작품에 일관하고 있는 것이 <<북향정신>>이다. 룡정에서 처음 발족된 문학회의 이름이 <<북향회>>이고 그 회에서 펴낸 잡지명이 또한 <<북향>>이다. 그럼 <<북향>>은 무엇이며 <<북향정신>>은 무엇이기에 그들을 그렇게도 집요하게 끌어당겼는가? 이것을 찬구는 이렇게 해명한다. <<...건국전을 선구시대라 한다면 그때에는 이곳에 살림터를 마련하려고 부조들이 피와 땀을 흘린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이고 오늘날은 그 피로 얻은 터전에다가 우리의 뼈를 묻고 그리고 우리의 아들과 손자와 그리고 증손자, 고손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될 시대라고 생각하시여 그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만드시는 것이 선생님의 뜻인줄 압니다.>> <<영원히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건설하자 이것이 곧 <<북향정신>>이다. 작가 안수길이 고향을 잃고 이역 땅에서 신음하는 개척민들에게 펼쳐준 유토피아요 리상향이다. 현실적으로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고달픈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개척민들에게 힘을 주고 리상을 주기에는 족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측면에 말하는바와 같은 아름다움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얼마나 깊은 줄 모르는 일개 풋내기들의 광열증이나 아닌가? 여기에서 안수길이 갈리고 작품의 가치도 갈린다.

앞에서 보았듯이 근대 조선에 있어서 반일구국이야말로 진정한 주제이며 민족독립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나아가 식민지치하에서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운운하는 그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만주국이 마련해준 현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 165쪽-각주35)일 때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그래서 장덕순은 일(847)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시작했는데 <<소위 문단에서 云謂하는 대륙문학이니 개척문학이니 하는 것은 이 일본 군벌의 대륙침략을 합리화하는 정신에서 논의해 보려는 것이지 우리 선민들의 망명과 그 개척을 뜻하는 것은 아니>>(장덕순 <<일제암흑기의 문학사>> <<세대>>1963 11월호 253쪽-각주36)라고 꼬집는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안수길은 여기에서 그 시각 <<제2의 고향>>건설이 가능했던 전제가 일제의 만주국이였고 일제의 대륙침략이였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소설에서 박병익이나 <<조선의 종달새>>라는 류행가수의 힘에도 오락가락하는 여린 농장이 일제의 대륙침략이라는 엄청난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때 그 여린 농장이 아니라 더없이 거창한 사업이라 할지라도 삽시간에 물거품으로 될것이라는 현실을 작가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전제가 틀리면 결론도 틀린다는 론리를 모를리 없는 작가였지만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과 같이 이 시각 안수길은 많이 들떠 있었다. 따라서 여거서는 현실이 무시되며 론리가 뒤틀린다. 머리가 뜨거워질 때 흔히 있을법한 일이고 랑만에 차있는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현상으로서 안수길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민족독립을 문제 삼을 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력사는 민족의 독립은 그 어떠한 장미꿈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알려주었다. 여기에 작가의 실책이 있었고 작품의 한계가 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측면에서 작가는 작품에서 <<시현실>>의 동인처럼 앓치만 않고 <<정신적 고향>>에서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개척민들에게 나름대로의 진로를 제시하며 또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할것이라고 인정한다. 이점에 대해 권녕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벼>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성립시키는 공간의 만주는, 최명익, 정비석에서와 같은 랑만적 도피처도, 최서해의 <홍염>에서 제시되는 외인지주와 소작의 갈등의 장소도 아니다. 그것은 이태준의 <농군>에서와 같이 땅에 대한 깊은 애착과 결부되여 있는 만주(848)이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정책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서, 원주민과의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쟁취하였고, 계속 원주민들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만주의 땅이 안수길의 정신적 고향인 것이다.>>(권녕민 편 <<한국근대문인대사전>> 아시아문화사 632쪽-각주37)


5)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북원>>


개화기에 꽃피기 시작한 반도의 문학은 1930년대말 194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고갈되기 시작한것과는 달리 이 북국의 땅-<<만주>>에서는 문학이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여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북원>> <<만주조선문예선>>(<<만주조선문예선>>은 강덕8년(1941년)11월에 신경의 조선문예사에서 신영철의 편으로 발행한 수필집인데 현재로는 신영철의 서문과 목차만이 전해지고 있어 론의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각주38) 등 작품집들이 속출한다. 그래서 40년대초반을 <<수치에 찬 암흑기>>, <<력사적으로 백지에 돌려야 할 브랑크 시대>>(백철 <<新文學思潮史>>(백양당) 399쪽-각주39), <<친일문학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문학을 <<일본조종의 문학>>(임종국 <<친일문학론>>(평화문학사) 18쪽-각주40)이라던 관례는 여기에서 타개되여야 한다고 오양호는 말하며 그것을 <<1930년대 민족문학의 지속>>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에 <<국문학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공백기>>이라던 40년대초반의 <<한국문학사를 보완하자>>고 한다.(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14-15쪽 참조-각주41) <<만주시인집>>이나 <<재만조선시인집>>은 40년대초의 반도문학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제기되는 당연한 론리라고 하겠다. 적어도 상식적으로 받아지던 <<친일문학>>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론의 되어야 할것으로서 그것으로 <<한국문학사를 보완하>>자는 당위성은 인정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시기 문학에 친일적인 경향이 전무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만주에서 우리의 문학이 가능했다는 사실자체가 식민치하라(849)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며 이른바 <<만주국>>도 일제의 괴뢰정권이였다는 대전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기의 작품집에 나오는 작품들을 상세히 읽노라면 거기에 우리의 생활이 있으며 우리의 정서, 감정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그것을 일괄 처리할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850)


(1) <<만주시인집>>과 <<재만조선시인집>>


<<만주신인집>>은 강덕9년(1943년)9월 29일에 길림에서 제1협화구락부문화부 발행으로 된 시집인데 여기에는 류치환, 윤해영, 신상보, 송철리, 조학래, 김조규, 함형수, 장기선, 채정린, 천청송, 박팔양 등 11인의 시가 수록되여 있다....<<재만조선시인집>>은 강덕9년(1943년) 10월 10일에 간도성 연길가 (株)藝文堂 발행으로 되어 있는데 김달진, 김북원, 김조규, 남승경, 리수형, 리학성, 리호남, 손소희, 송철리, 류치환, 조학래, 천청송, 함형수 등 13인의 작품 51편이 수록되여 있다.(850)


(2) <<싹트는 대지>>와 <<북원>>


<<싹트는 대지>>는 강덕8년(1941년) 11월 15일에 신영철의 편으로, 만주 신경특별시 <<만선일보>>사 출판부에서 펴낸 소설집인데 당시 중국조선인문학의 지도자격이였던 렴상섭의 서문과 편집자인 선영철의 跋文이 있다.(854)

현지주의 원칙에 철저히 립각하여 역은 작품집이기에 작품은 한결같이 이주민들의 각양각색의 생활을 다루고 있어서 주목되지만 적지 않은 작품들은 이러저러한 친일성향을 띠고 있어 자칫하면 론란을 일으킬수도 있어 그만큼 소심스럽게 다룰 것이 요청된다.(855)

<<싹트는 대지>>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 시기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망향이나 실향의 아픔보다는 이 지역의 생활을 문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거듭 이야기했지만 이 시기 이 지역의 간민들의 생활의 주제는 정착과 개척, 그리고 거기에 따른 수난일것이다. 그런데 <<싹트는 대지>>에 수록된 작품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작품은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영준의 작품 <<밀림의 녀인>>은 어린 시절에 共匪에게 잡혀갔다가 10여년이 지나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의해 구출된 김순이라는 녀인을 정신적으로 <<귀화>>시키기 위해 집에 데려왔다가 곡절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것외에 거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뿐만아니라 일제의 만주침략에 동조까지 되고 있는가 하면 한찬숙의 <<초원>>은 조선청년 임봉익과 저 멀리 하이랄초원에서 양치는 몽골족처녀 마루고의 사랑을 적고 있지만 작품은 애초부터 <<5족협화>>란 <<만주국>>리념에 수긍하고 있어 문제로 되고 있으며 현경준의 <<류맹>>은 아편, 흡연, 흡독을 문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왕도락토>>와 직결되고 있다. 이것을 립증하는 글이 있다. <<신흥국가 만주국에서는 그들의 그 과거에 착안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 한 사람이라도 완전히 소생시켜서 국가의 구성분자로 만들 수가 있다면 이 얼마나 뜻깊은 일이랴? 하고 이를 악물고 달려 들었다. 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국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다.>>(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27쪽에서 재인용-각주43) 이것은 이 소설이 <<마음의 금서(선?)>>라는 제목으로 1943년에 서울 홍문서(855)관에서 출판될 때 그 단행본의 머리말의 한구절이다. 아부이고 굴종이다. 수모이다. 비굴하여 가련하기까지 하다. 김창걸의 <<절필>>과는 도무지 상종할수도 없는 행위이다. 그 시기 문인들의 일단을 넉넉히 짚어볼수 있는대목으로서 우리 문학으로서는 언제나 수치이다.(856)

이와는 좀 달리 황건의 <<제화>>와 신서야의 <<추석>>은 여전히 이주민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나 상기 작품처럼 기존질서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전자는 <<나>>라는 들뜬 청년이 만주에 와 <<문학청년회>>를 조직하고 문학운동을 한답시고 들먹이다가 內訌으로 흐지브지해지게 되어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內訌의 원인이나 문학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이 있을 법하나 <<나>>의 심리만을 절망적으로 그려 문제가 있으나 그 고민이나 실망이 <<만주국>>에서 일어났다는데서, 나의 고민이나 절망이 현실과 괴리되고 있다는데서 어느 정도의 가치평가를 가능케 한다. 후자는 추석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더욱이는 생계를 위해 密賣를 해야만 하는 김서방의 딱한 처지와 이른바 교통방해죄로 순사에게 끌려가 혼줄이 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옛노래를 부르다가 설음이 북받쳐 평생에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역 땅에서 아무런 인간적 대접도 받지 못하고 설음속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치밀한 구성에 생동한 묘사마저 곁들어 가히 佳作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856)

안수길의 <<새벽>>은 만주 이주민들의 어떤 극한의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작품인데 어린 소년을 서술자로 등장시켜서 이색적일뿐만아니라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고 가치가 있는 것은 이주민들의 생활실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한편 넓은 사회화폭으로 그들이 령락되지 않을 수 없는 객관환경을 깊이있게 제시한데 있다. 소설은 소금밀수를 하다가 잡힌 나의 아버지가 박치만의 계책에 넘어가 종당에는 딸마저 �값으로 물어넣어야 하는 기막힌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아버지의 밀수, 박치만의 흉계, 복동예와 삼손의 도주 및 복동예의 자결 등등은 이 시기 이 지역의 생활이 그 어느 작품보다도 깊이 있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어서 개척민들의 생활을 리해하는데 있어서 자(856)못 중요한 인식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아니라 작품에 묘사되고 있는 장작림군벌의 횡포와 략탈도 작품에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어떤 학자는 <<간도란 명사는 어느새 <난리, 굶주림, 도독농사, 월강죄>와 같은 민족 수난을 연상시키는 말로 들>>(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11쪽-각주44)린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여기에는 流民, 逃走, 아편, 사기, 밀수, 수탈, 도둑, 화적, 토비, 군벌, 강도가 있어 간도 혹은 만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이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험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사회환경속에서의 이주민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857)

안수길의 소설집 <<북원>>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1943년에 연길 예문당에 간행한 <<북원>>은 이 시기 이 지역에서 간행된 유일한 개인 작품집으로서 의의를 가진다.(857)

<<원각촌>>은 안수길의 작품에서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다. 작품은 넓디넓은 만주벌판을 집으로 삼고 지팡살이나 목재판에서 막일로 생계를(857) 유지해 가는 억쇠 리원보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리원보는 경상도 출신이라고 하나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만주의 험악한 자연을 닮아서인지 그는 <<만주의 자연>>처럼 험상궂게 생겼고 건장한 몸집과 무진장한 힘을 갖고 있는데다가 성격마저 원시림이 우거지고 짐승들이 욱실거리는 <<만주>>처럼 거칠다. 현대적인 문명과 거의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기에 따르는 욕구가 있으며 거기에 따르는 시비판단의 표준이 있다. 이것을 김호웅은 <<자기의 생존욕구>>(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49쪽-각주45)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존욕구는 그에게 자아본능적인 생존방식을 주었는바 이러한 생존방식에 의해 그는 한생을 살아간다. 안해를 겁탈하는 한익상을 한 도끼로 쳐죽일수 있는 행위도 이것으로 해석된다. 그에게는 요즘 인간들의 시비가 근본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치장스러울지도 모른다. <<류혈의 싸움도 간곳마다였고 생명이 위태한 경우도 한두차례 아니였>>던 아짜아짜한 장면도 이것으로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이 작품은 안수길의 다른 작품과는 어느 정도 구별된다. 특히 일제의 시책에 순응한 <<토성>>이나 <<목축기>>와 같은 작품들과 비할 때 이 작품은 그만큼 돋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실로 만주에서 있을 법한 인간이며 성격도 만주에서 있어야 할 성격이다. 따라서 작품은 만주 이주민들의 생활을 다룬 안수길의 작품에서도 가장 만주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측면에서 만주에서의 그 시기 우리 이주민들의 급선무는 민족정체의 생존과 생활문제이다. 훌륭한 작가라면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것이며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도끼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작가 안수길과 이 작품의 한계가 있다.(858)


6) 김창걸의 경우


김창걸, 필명으로 추소, 황금성, 강철 등이 있다고 한다.(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220쪽-각주46) 1911년 12월에 조선 함북 명천군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고 난 여섯 살에 간도에 와서 명동촌에서 농사도 하고 후에는 소학교교원을 비롯하여 점원, 사무원노릇도 하였다. 1948년부터는 동북조선인민대학(연변대학 전신)의 교원으로 초빙되였고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가 설립되자 학부교수로 초빙되여 줄곧 교편을 잡다가 1991년에 세상을 떴다.(859)

지금까지의 연구를 돌이켜 보면 일부분을 제한외 거개가 1982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김창걸단편소설집>>(해방편)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단편소설집은 수록된 허다한 작품들은 원문과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만선일보>>에서 나온 <<락제>>와 이 소설집에 실린 <<락제>>를 대조해 보면 분명해지는데 상당한 부분이 개작, 가미되고 있다. 원문을 찾을수 없는 상황에서 노트에 메모해두었던 이야기줄거리와 기억을 더듬어 복원한것으로서 일정한 개작이나 가미는 불가피면적이라고 생각되나  김창걸문학연구의 기본 텍스트로 삼는데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859)

김창걸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상은 가난이다....김창걸은 가난과 문학은 <<사촌간>>이라고 생각했다. 즉 가난해야 문학을 할수 있고 문학은 가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창작에서 가난을 그처럼 집요하게 파고 들수 있었다.

그러나 김창걸은 가난의 근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가난을 팔자소관(<<거울>>)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락제>>) 그러나 그는 가난을 피부로 느꼈고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체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일반 의미에서의 가난, 즉 굶주림이나 추위임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굶주림이고 추위였다. 이런 굶주림, 이런 추위, 즉 가난이 그의 정감을 무르익혔고 그의 행위를 좌우지하였다. 가난이 문학이라는 아이디어, 가난제재의 소설을 꾸미는 착상, 소설을 빈부의 대립으로 짓는 발상법은 모두 여기에서 기인된다.(860)

김창걸소설의 다른 한 특점은 소박한 인간성이다. 김창걸은 이 땅에(860)서 잔뼈를 굳혔고 이 땅에다 뼈를 묻은 순 <<토배기>> 작가이다. 그래서 그러한 그의 작품은 만주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작은 풀처럼 수수하고 소박하나 자기적인 삶의 태도와 도덕성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인간성이 있다. 이런 인간성은 작품 <<청공>> <<락제>> <<암야>> 등 작품에서 잘 보여진다.(861)

동일한 시기, 동일한 지역의 동일한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류맹>>과 <<청공>>은 너무나도 다르다. 전자는 일제의 시책에 부응하면서 중독자문제를 해결하려는 반면 후자는 어디까지나 자체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뿐만아니라 사회병폐와 인간성과의 갈등과 대결을 통해 인간성과 도덕의 승리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861)


하편


7) 광복후 중국조선족문단


1945년 8월, 일제는 무조건 투항하였다. 36년의 식민통치가 결속된 것이다. 일제의 항복에 따라 조선이 해방되였고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독립이 실현되였다. 이 독립에 따라 중국조선인사회도 크낙한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인들의 대규모적인 민족이동에 따른 이 땅의 <<문화부대>>, 즉 문인들의 귀국이였다. 이역땅에서 고향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과 설음을 달래던 조선문인들은 나라의 독립과 함께 또 다시 보따리를 챙겨들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조국으로 돌아갔다. <<조선년감>>에 따르면 광복전 만주에는 216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49년 민족사무처의 집게는 1949년 현재 재중조선인의 수자는 112만이라고 하니 광복을 전후하여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이 무려 100만이나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제3차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데(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교수와의 인터뷰-각주52) 확실한 대이동이였던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여 이 지역의 민족사회가 해체된 것은 아니였고 문학도 고갈된것이 아니였다. 반면 이 지역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지평선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또 한차례의 간고하고도 보람있고도 위대한 창업을 개시하였다. 문학 역시 이 시기 이 지역의 조선인 사회와 밀착되면서 그들의 사(865)상, 감정을 대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866)

광복후 중국조선인의 문학은 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재정비를 떠날 수 없었다. 100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는 한편, 이땅의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환호하면서 새로운 자세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연길, 룡정, 목단강, 할빈, 심양, 길림, 통화 등 지역을 거점으로, 여러 가지 군중단체를 설립하(이 시기 이 지역에서는 <<연변로동자농민청년녀성총동맹>> <<민주동맹>> <<민주련맹>> 등 군중단체가 건립되여 광복후 조선인 사회의 재정비사업에 떨쳐나섰다고 한다-각주53)였다. 이러한 단체들은 잇따라 건립되는 중국공산당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동북민주련군 길림성 연길군분구의 조직지도하에 전후복구사업을 비롯하여 일제의 잔여세력과 토비숙청, 동북근거지의 건설, 토지개혁 등 사업을 본격적으로 떠밀고 나가 전사회는 긴장속에서 새로운 기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와중에 문화정비와 건설사업도 선을 보여 본격적으로 진척을 보여주었는데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신설되는 가운데 연길, 목단강, 할빈, 통화 등지에서 <<한민일보>> <<연변민보>> <<인민신보>> <<길동일보>> <<인민일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민주일보>> <<단결일보>> 등 신문이 간행되였으며(이 시기 신문관계의 상황은 최상철 <<중국조선족언론사>>(경남대학교출판부) 관련부분참조-각주54) 잡지로는 <<불꽃>> <<민주>> <<대중>> <<연변문화>> <<문화>> <<건설>> <<효종>> 등이 간행되여(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 255쪽 참조-각주55) 광복직후 중국조선인문단을 다채롭게 장식하였다. 그 가운데서 <<연변일보>>가 가장 대표성적인 신문이였고 그 시기 중국조선인 사회의 건립과 그후 중국조선족의 문화생활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는데...(866)

각종 군중단체의 출현 및 학교, 신문 등 출판물의 간행은 이 시기 문학창작활동도 자극하여 동북의 여러 지역에서 <<이쓰크라극단>> <<길동군구문공단>> <<양양극단>> <<166사선전대>> 연변문공단>> <<송강로신예술극단>> <<송강군구 제3지대 선전대>> <<164사선전대>> <<리홍광지대선전대>> 등 업여 또는 전업문예단체들이 나타나 활약적인 활동을 보여주었고 <<간도문예협회>> <<銅羅문인협회>> <<동북신흥예술협회>> <<중쏘한문화협회>> <<로농예술동맹>>가 태여나 문예평론회, 문학감상회를 개최하였을뿐만아니라 <<신춘문예현상모집>>활동도 진행하였고(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 255-256쪽-각주57)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벌렸다. 중국조선족문단은 그들에 의해 자기 발전의 길에 들어선다.(867)

왜서 이처럼 큰 변화가 생기가 되었는가? 해답은 분명하다. 사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인의 문학은 시각을 달리 한다. 그것은 단순한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아니다. 이때로부터 중국의 조선인은 이국민으로서의(869) 조선인, 또는 한인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혀 가기 시작한다.(870)

<<동북인민행진곡>>(윤해영 작사-인용자 주)은 4음 4보격과 높고 힘찬 격조외에 이(<<선구자>>-인용자 주)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전시기에 이 지역의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민족의식이 희석해진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망하고 식민통치가 결속되였다는데 그 원인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이 시기는 동서가 대립되여 있던 시기로서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이 강조되고 민족의식보다는 이데올리기가 중요시되였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의 이러한 대립은 중국조선인문학에도 반영되여 얼마전까지 지속되였다. 광복후 50여년래 중국조선인문학이 반도문학보다는 중국문학에,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을, 민족의식보다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게 된 근본원인은 사실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것을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력사 그 자신이 쓴 것이므로 중국조선인의 력사도 중국조선인들이 쓴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국조선인들의 문학의 력사는 이러한 력사상황에서 중국이라는 이 특정한 지역을 력사배경으로 자기 발전의 길에 들어서기 때문에 반도의 문학과는 좀 다(871)른 길을 걸어 왔다.(872)


8)해방후 17년의 중국조선족문학 개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은 중국이 사회주의 력사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는바 이 력사단계의 도래와 함께 중국조선인들은 지나온 력사와는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자치제도와 지역의 건립이다.(872)

1957년의 <<반우파>>투쟁의 뒤를 이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가지 정치운동, 이를테면 1958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 그리고 민족정풍운동, 1959(874)년의 <<반우경>>운동, 문예계, 학술계의 <<수정주의>>비판운동과 계급투쟁의 절대화와 확대화에 의해 문단은 살풍경이 되었으며 김학철, 최정연, 리홍규, 채택룡, 김순기, 서헌, 김용식, 조룡남과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터무니 없는 루명을 쓰고 오유적인 비판을 받았다. 사실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이러한 투쟁과 비판은 뿌리깊은것이였다. 일찍 공화국창건 전인 1946년부터 중국에서는 동북문예계를 중심으로 蕭軍(蕭軍(1907-1988) 중국현대작가, 대표작으로 <<8월의 鄕村>> <<第三代>> 등-각주64)을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빌미는 동북독립을 부르짖은것이라고 하나 후에는 오유적인 비판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거기에 덩달아 연변문예계에서 잡은 것이 설인 리성휘의 <<밭둔덕>>이다.(875)

우리 민족의 력사를 다룬 <<해란강아 말하라>>가 <<반동작품>>으로 되고 사랑이나 인정을 써도 문제가 되던 시기라 일단 걸리기만 하면 토론은 물론 변명할 여지도 없는 험악한 문화생태환경이였다. 이러한 문화생태계는 이 시기 조선족작가들에게 심리적위구심을 키워 주었는데 그 결과는 비판보다는 歌頌, 고발보다는 찬미, 부정보다는 긍정이 위주인 단색 <<송가문학>>과 단일한 가치 표준이며 비판, 고발의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선의적인 권유나 온화한 어조로 가볍게 타이르는 식에 그치거나 머물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작품가운데서 이러한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876)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사정은 한가지이였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과 1958년의 대약진 및 그 뒤로 이어진 <<좌>>적 착오를 시정하기 위하여 중공에서는 <<調整, 鞏固, 充實, 提高>>의 방침을 제기하였는데 뜻인즉 잘못된 것은 조절하고 잘된 것은 공고히 하고 충실히 하며 제고한다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가장 의미심장하였던 것은 조절이였다고 할수 있는데 중공 수뇌부에서는 전시기 일부 착오적인 시책에 편차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내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조절이였다. 당시 실정에 알맞은 조절이였다. 이번 조절은 국민경제가 위주였으나 그것은 문학령역에도 파급되여 부분적인 시정이 있게 되었다. 중국문단의 조절사업에 따라 연변에서도 1961년 11월 18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3차 회원대표대회를 열고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정확한 방침을 재확인하고 문예사업도 조절하는 한편 공고히 하고 충실히 하며 제고할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예는 진실을 써야 한다>>는 관점을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또 착오적인 비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의 극좌적인 경향은 비판을 받았지만 철저하지 못하였고 조절도 했다지만 전면적이 되지 못했고 말로만의 조절에 머물렀다. 거기에 전국적으로 인 <<중간인물론>>(극 <<좌>>적인 사상에서 나온 문학리론으로서 문학창작에서 부각된 인물도 혁명에서처럼 혁명자가 아니면 반혁명분자, 좋은 사람이 아니면 나쁜 사람이란 2분하여야 한다는 론리다. 따라서 중간인물, 즉 혁명자도 아니고 반혁명분자도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 인간을 부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한 계급대립으로 인간과 사회를 분류하던 사상의 문예계에서 반여이라고 할수 있다-각주67)에 대한 비판까지 겹띠여 작가들의 창작의욕이 사라지고 창작적극성이 여지없은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1960년대에 이르러 창작은 1950년대보다 활발하지 못했고 극소부분의 작품을 제한외 훌류한 작품이 태여나지 못했다. 작가들의 창작(877)능력이나 수준의 문제도 간과할수 없지만 주요하게는 걸핏하면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시 이런 문학풍토가 여기에서 더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878)


9) 해방후 17년의 시가 창작과 리욱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중국문단의 기본 정서와 흐름은 송가였다. 장기간 암흑속에서 헤매던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또 일제의 잔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중국인에게 있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는것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도탄속에서 구해준 공산당을 진정을 사랑했고 사회주의는 진정으로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새 삶을 준 공산당을 가송하는 시가, 1950년대 중엽에 완성된 생산수단의 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적개조에 따른 공농업생산의 전면적인 앙양을 노래하는 시가와 항일전쟁을 비롯한 지난날의 피비린 전쟁에서 표현된 애국애족 정신을 구가한 시가들이 중국문단을 휩쓸었는데 중국조선족문단도 대체로 이러하였다.(878)

이 시기에 중국조선문단에는 많은 시인이 혜성처럼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서 이 시기 중국조선족문학의 제반 특성을 가장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리욱이다.(881)


10) 해방후 17년의 소설창작과 김학철


시가 창작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17년의 소설창작도 중국문단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커다란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일부 <<문제작>>들이 나(885)타나면서 굴곡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이 시기 소설가운데서 량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새 생활, 새 인간, 새 기상을 노래한 <<새생활 만세>>식 소설들인데 이것은 1950년에 발표된 김창걸의 <<새로운 마을>>에서 선을 보인다. 건국후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332쪽-각주71) 이 작품은 농민 갑식이의 형상을 통하여 새생활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의 기쁨과 자기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해가려는 농민들의 소박한 념원과 리상을 그리고 있다.(886)

이 시기 중국조선족소설문학의 최고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김학철이다.(888)

김학철의 작품에서 가장 일찍 <<말썽거리>>가 된 것이 곧 <<괴상한 휴가>>이다. 소설은 작가 차순기의 <<괴상한 휴가>>를 적고 있는데 정치풍파나 운동이 일때마다 엇갈리는 이른바 評者와 독자들의 변덕스러운 태도를 통하여 <<좌>>적경향에 의한 작가들의 고뇌를 피력하고 있다.(889)

모두어 말해서 김학철의 초기 창작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뿐만아니라 자기의 창작으로 작가란 진실을 쓰고 참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893)


11) 문화대혁명 시기의 문학


1966년 건국이래 여러 가지 <<정치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巨軀의 중국은 진짜로 몸살을 앓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지도자가 잘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리용되여 당과 국가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이다. 중공당이 <<문화대혁명>>에 내린 결론이다. 일장 광란에 력사적인 심판을 내린 것이다.(895)

1966년 7월에 연변문련이 해산되고 <<연변>> <<장백산>>과 같은 문예지가 페간되였으며 김학철과 같은 작가들은 감옥으로, 다른 작가들은 농촌으로 갔다. 그리고 <<운동건장>>들이 나서서 <<민족문화혈통론>>이요, <<민족분렬주의언어방침>>이요, <<반당사회주의대독초>>요 하면서 지난시기의 성과를 마구 부정하였으며 문학령역에서 林彪, 江靑일당이 내놓은 모든 인물가운데서 긍정인물을 돌출히 하고 영웅인물(긍정인물?)가운데서 영웅인물을 돌출히 하고 영웅인물가운데서 주요 영웅인물을 돌출히 한다는 이른바 <<3돌출>>을 내세우고 여지없는 타격을 하였다. 그 결과 중국문단과 마찬가지로 문학창작은 철저히 고갈되였다.(896)


12) 해동과 문학의 회춘


1966년 2월 <<문화대혁명>>의 旗手로 불리우던 江靑은 상해에서 이른바 部隊문화사업좌담회를 소집하였다. 장기간 막후에 있던 江靑이 화려한 등장을 하는 시각이였다. 그번 회의에서 만들어낸 <<林彪동지께서 江靑동지에게 위탁하여 소집한 부대문화사업좌담회 紀要>>는 건국이래의 문예사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문예계에는 <<毛主席의 사상과 대립되는 한갈래 반당, 반사회주의의 검은 선이 우리에게 독재를 실시하였다>>(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449쪽 재인용-각주79)(895)

1977년 12월, 4인방이 분쇄되여 두달후, <<인민문학>>편집부의 명의로 문예좌담회가 북경에서 거해되였다. 이 회의에서는 4인방이 문예계에 뒤집어씌운 터무니 없는 죄명을 벗겨버리고 문학예술사업의 본격적인 회복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이 기초상에서 1978년 5월, 중국문학예술가련합회에서는 북경에서 제3기 제3차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문학예술계에서의 4인방의 유독을 철저히 숙청하는 회의로서 중국 문학예술의 새로운 시기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회의였다.(902)

1978년 10월에 연변문학예술가 련합회 제2기 제3차 확대회의가 연길에서 소집되였다. 4인방이 분쇄된 2년후에야 열린 회의이지만 연변문단의 재정비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문예계의 검은 로선 독재론>>과 <<좌>>적인 사상로선을 숙청하고 4인방이 연변문단에 뒤집어씌운 죄명을 청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것이 이른바 <<민족문화혈통론>>이다. <<민족문화혈통론>>이란 1969년 7월 29일자 <<연변일보>>에 발표된 연격문(필명)의 글 <<<민족문화혈통론>을 철저히 짓부시자>>는 글에서 나온것인데 그 핵심은 민족지구에서의 민족문화정책을 말살하는것이였다.(903)

여기에서 연격문은 <<같은 민족, 같은 혈통, 같은 선조, 같은 력사, 같은 감정, 같은 문화>>란 론리에 따라 조선족문단으로서의 민족적특성을 지켜야 한다는 정확한 민족문예정책을 매국투항주의로 매도하고 민족성을 운운하는것은 매국주의로, 민족언어의 사용을 주장하는것을 민족분렬주의로 규정하고 民族言語文字無用論을 고취하였다. 이 史上 전례없던 문화파쑈주의시책에 의해 연변문단은 고갈될대로 고갈되였고 민족이나 민족성은 운운할 여지조차 없게 되었다.(904)

1980년대후반으로부터 1990년대로 이어지는 중국조선족문학은 바로 이러한 력사적인 반성과 자아의 회귀속에서 새 시기를 장식해 가고 있다.(906)

1980년대말, 특히는 88서울올림픽과 1992년 중한수교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민족의 동질성확인과 삶과 인생에 대한 전례없이 깊은 인식은 중국조선족문학을 더 높은 단계에 끌어올리고 있는바 로작가들은 물론 중청년작가와 신진작가들이 거기에 가세하여 세기 교체기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전례없이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906)

1990년대 중국조선족문학에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현대의식과 민족의식의 강화, 미학경향성의 다양화와 내면화 등등이다. 현대의식은 80년대로부터 중국에 밀려든 서구모더니즘문학과 련관되기도 하나 더 중요한것은 중국조선족 삶의 현대화과정과 밀접히 련계되여 있다.(906)

이 시기 소설문학의 가장 큰 특점의 하나는 사회비판의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래의 송가와 만세식소설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고 작가들은 과감히 현실과 자기를 직시하고 현실을 예리하게 해부하였는데 이것은 소설문학이 이제 진정으로 자기의 삶에 대해 관심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으로서 소설문학이 한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섰다는 표징의 하나이다. 력사소설의 출현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것은 민족의식으로서 나는 누구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국조선족문학이 재래의 단일한 참여의식에서 인간본연으로 돌아와 진정으로 자기와 자기의 삶을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으로서 문학의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907)

이 시기 문학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것은 서구 모더니즘적 경향의 출현과 선명한 내면화 경향이다.(907)

주지하다싶이 1980년대중엽으로부터 중국문단에는 서구 모더니즘문학이 쏟아져 들어왔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서구의 여러 가지 문학사조가 한국에 한꺼번에 밀려들듯이 개혁개방이후로 중국에도 여러 가지 모더니즘문학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풍토와 생태, 그리고 문학령역에서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사회주의사실주의와 어울(907)리면서 몽롱시와 <<뿌리찾기>>문학, 신사실주의 등 중국특색과 개성이 있는 문학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서 중국전통문화의 高揚과 민족정신의 高揚에 있어서 <<뿌리찾기>>와 같은 문학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는것은 주지이 사실이다. 중국조선족문단에 나타난 모더니즘문학은 이러한 문화생태환경에서 온것으로서 1980년대 중엽에 정착되는듯하더니 한춘, 김학천, 최룡관 외 기타 시인과 특히는 리임원, 조광명, 김영건 외 소장파 시인들에 의해 모더니스트경향이 짙어가고 내면화되여 감과 동시에 시가 여물어 가고 있다. 소설령역에서는 장지민을 비롯하여 우광훈, 리혜선 등 중견작가들의 창작에서 보여지고 있으며 최홍일이나 류연산은 민족문화의 뿌리를 캐고들면서 민족의식의 高揚과 새 시기의 민족문화 高揚에 신경을 쓰고 있다.(908)


13) 새 시기의 시문학


<<4인방>>을 성토하는 타도문학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상처, 반성이란 문학도 등장한다. 상처문학이란 문화대혁명이후 문화대혁명이 인간에게 준 정신적인 상처를 비롯하여 그것의 비인간성과 비인도성을 고발하는 문학을 말하는데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농촌으로 가 청춘을 잃고 下鄕청년들이 그 주요 대표로 되고 있다.(下鄕청년이란 문화대혁명기간에 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농촌으로, 변강으로 간 청년들을 말하는데 그들의 사상감정을 대변한 문학을 상처문학이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盧新華의 <<傷痕>>인데 상처문학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온 것이다-각주93) 반성문학이란 문자 그대로 깊은 자아반성과 나아가서는 문화반성을 동반한 문학을 가르키는데 특히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후에는 더 깊은 문화근저 즉 전통적인 문화환경과 생태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이나 대안(908)을 제시하는 식으로 되고 있다. 그 뒤로 개혁이나 새 생활을 노래한 시들이 성행하다가 1980년대 중반으로부터 서구 모더니즘문학이 이입되는 한편 기타 여러 가지 문화가 문화정보 루트의 소통에 따라 중국조선족시단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김철을 비롯한 중년시인들의 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909)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시단은 내면화되고 있는 가운데 고독, 실망, 아픔, 슬픔, 비애, 우수, 번민, 불안과 좌절감, 소외감, 고달픔 등 정서로 어두워진다. 이것은 광복전 중국조선인문학에서 주되는 정서로 되고 있는 망국의 한이나 향수가 아니다. 이것은 중국조선족사회의 현실과 갈라놓을수 없는 것으로서 심각한 사회적원인을 갖고 있다.(922)

주지하다싶이 지금 중국조선족사회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변혁속에 있다. 개혁개방, 특히는 중한수교는 중국 조선족사회를 거세찬 개혁과 변화속에 밀어 넣었다. 이 거대한 변화속에서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이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걸맞는 의식형태, 즉 사상관념의식들이 눈에 띄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분명 이러한 변화는 력사상에 있어 본적이 없는것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것이다. 특히 중한 수교는 중국 조선족들의 정신문화생활과 경제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측면들도 만만치 않는 것이다. 동전의 반면같은것이라고 하겠다. 현대화의 물결은 땅에 박혀 있던 농민들을 도시로 불러들여 농촌의 전통적인 농경문화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으며 도시도 크나큰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자아의식과 민주, 자주의식이 자라남에 따라 전통적인 사상의식관념과 가치관념, 륜리도덕이 엄청난 충격에 뒤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상황은 중국 조선족사회의 지식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일련의 벼화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변화속에서 지식인들의 자아의식이 크게 제고되었다. 그들은(923) 점차 자기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덧없이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 시작하였을뿐만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상대적인 빈곤층, 지나친 기대와 바램과 현실간의 커다란 콘트라스트, 농촌의 황페화, 전통적인 도덕과 륜리의 타락, 인간가치의 급락, 기타 범죄와 사회불안정요소로 인한 분노, 실망, 비애, 좌절감, 소외감 등등은 이러한 어두운 정서를 초래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회적문제는 더 심각해질것이며 거기에 따른 작가들의 심리적 갈등도  가일층 심화되면서 이러한 정서는 더욱 짙어질것이며 허무적이나 비관주의와 같은 사상들도 나타나게 될것이다. 또 이와 동시에 시도 더욱 세련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적감각과 의식을 가진 시들이 속출하게 될것이다.(924)


14) 새 기시의 소설문학


시문학과 마찬가지로 새 시기 소설문학도 문화대혁명의 비리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하여 반성문학, 개혁문학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대서특필해야 할것은 의연히 김학철이다.(924)

윤윤진(길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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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조구호-한국근대소설연구 2009-05-16 0 2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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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안수길연구자료들 2009-05-16 0 2894
33 삼대연구자료들 2009-05-16 0 2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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