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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트먼, 이야기와 담론
2009년 05월 16일 21시 57분  조회:3229  추천:1  작성자: 방룡남
󰡔����이야기와 담론󰡕����(S.채트먼/한용환 옮김)

제1장 서론(요약)


문학 이론-넓은 의미에서 시학-과 관련하여 대두되는 많은 긴급한 요구들 가운데는 서사의 구조와 스토리텔링의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과 조합 체계를 다루는 합당한 항목이 들어 있다. 그 작업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된 바 있으나 그것은 단지 초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시학󰡕����은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더 많은 문제점들을 던져 주고 있다.


서사와 시학

형식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시학의 주체가 문학 텍스트 그 자체이기보다는 오히려-로만 야콥슨의 어투에 따르면-그것의 ‘문학성(lierariness)’이라고 주장한다. 시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문학 비평과는 달리) ‘󰡔����멕베드󰡕����를 위대한 문학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비극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 이론이란 문학의 본질에 관한 연구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문학 작품 자체에 대한 기술이나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현대 언어학과 마찬가지로 문학 이론은 통상적인 경험론적 접근보다 합리주의적이고 연역적인 접근을 중시한다. 그것은 정의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문학적 개념들의 연역적 방식이 그것의 귀납적 방식보다 더 시험성이 높고 그러므로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한다...노드롭 프라이는󰡔����비평의 해부󰡕����에서 명백히 연역적인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의 작품에서 우리가 설정한 범주들의 순수한 예를 찾을 필요는 없다. 개개의 작품들은 그 범주들이 짜는 추상적인 그물 속에 속해 있다. 개개의 어떠한 작품도-그것이 소설이든 희극적 서사시이든, 혹은 그 이외의 다른 무엇이든-한 장르의 완전한 표본이 아니다. 모든 작품들은 다소간 혼합된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장르들은 여러 특성들의 복합적 구성체이다...우리는 텍스트들이 필연적으로 혼합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 점에서 텍스트들은 가장 유기적인 물체들과 흡사하다. 텍스트들이 지닌 일반적 경향들은 합리적인 탐구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서사 이론은 비평적인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서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특성들을 밝혀냄으로써 가능성의 한 극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극점 위에서 개개의 텍스트들의 그물을 짜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 극점을 조절할 필요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탐색한다.



서사 이론의 요소들


구조주의 이론은 각각의 서사물은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사건들(행위, 돌발사 등)의 내용과 그 연쇄 및 사물적 요소(등장인물이나 배경을 구성하는 것)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합쳐진 이야기가 그 하나라면, 표현, 혹은 내용이 전달되는 방식인 담론이 그 다른 하나이다. 단순화시킨다면 이야기란 묘사된 서사물 속의 ‘무엇’이며, 담론이란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다.


               

 

 

 

 

 

 

 

 

 

행위

 

 

 

 

 

 

사건적 요소

 

 

 

 

 

 

 

 

 

 

돌발사

 

 

 

이야기

 

 

 

 

 

 

 

 

 

 

 

 

 

 

 

 

 

 

 

 

 

 

 

등장인물

서사시적 텍스트

 

 

 

 

 

사물적 요소

 

 

 

 

 

 

 

 

 

배경

 

 

 

 

 

 

 

 

 

 

 

 

담론

 

 

 

 

 

 

 

 

 

 

 

 

 

 

 


이야기의 전이 가능성은 서사란 실제로 어떠한 매체로부터도 독립된 구조라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장 피아제는 수학이나 사회인류학, 철학, 언어학, 물리학과 같은 여러 학문 분야들이 구조의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각각의 경우에 전체성, 변형, 자기규정의 세 핵심 개념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특수한 성질들이 없다면 사물들의 어떠한 모임도 단순한 집합일 뿐 하나의 구조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세 가지 성질에 관련시켜 보면) 분명 서사물은 하나의 전체이다. 왜냐하면 사건적 요소들 및 사물적 요소들 자체와, 그러한 요소들로 구성된 서사물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들은 고립적이며 불연속적인 반면, 서사물은 하나의 연속적인 구성체이다. 더군다나 서사물 속에서 사건들은(우연한 편집과는 달리) 상호 관련적이거나 상호 수반적인 경향이 있다...진정한 서사물에서 사건들은 피아제의 말처럼, ‘이미 정리된 것으로서 무대 위에 올려진다’. 임의적인 사건들의 덩어리와는 달리 그것은 뚜렷한 유기적 조직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서사물은 변형과 동시에 자기규정(self-regulation)을 수반한다. 자기규정은 구조가 그 자체로 지탱되고 완결되는 것, 피아제의 말에 의하면 ‘하나의 구조 속에 내재된 변형들은 결코 그 체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언제나 그 체계에 속한, 그리고 그것의 법칙을 보존하는 요소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나의 사건이 표현되는 과정은 그것의 ‘변형’을 의미한다...그러나 이러한 변형-예를 들어 작가가 인과적인 연속에 따라 사건들을 기술하거나 혹은 플래쉬 백의 기법으로 그 연속을 뒤바꾸는 것 등-은 단지 어떤 가능성이 발생할 경우에만 일어난다.


서사물은 기호학적 구조인가?


서사물은 하나의 구조이다. 우리는 곧 이어서 그것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인가, 즉 그것이 말하는 이야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저절로 의미를 운반하는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기호에 대한 일반적인 학문인 언어학과 기호학은 우리에게 표현과 내용 사이의 단순한 구분만으로는 전달이 일어나는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가르친다. 그 구분을 횡으로 잘라내면 거기에서 질료와 형식 사이의 구분이 생겨난다.

   

 

. 표   현  

내   용

 

 

 

 


표현의 수평 단위들은 의미, 즉 내용의 수평 단위들을 가져온다.

서사물에서 표현의 영역은 무엇인가? 정확히 그것은 서사적 담론이다. 이야기가 서사적 표현의 내용인 반면, 담론은 그 표현의 형식이다. 우리는 담론과 그것의 물리적 발현-말과 그림 및 기타에 의한-사이를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명백히 서사적 표현의 ‘질료’이며, 그것은 그 발현이 독자적인 기호적 약호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보통 약호와 약호들은 서로에게 질료로 봉사한다...서사물은 전달의 구체적인 언어적 매체, 혹은 다른 매체들의 표층구조(paroles)를 통해 운반된 심층구조(langues)인 것이다.

 

. 표   현  

내   용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들(어떤 매체는 기호적 체계를 타고난다)

∙작가가 속한 사회적 약호들을 통해 걸러진 것으로서, 서사적 매체를 통해 모방될 수 있는 대상과 행위들의 실제적인, 혹은 상상적인 세계 속에서의 재현.

∙어떤 형태의 매체에 의한 것이든 서사를 공유하고 있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서사적 담론(서사적 전달 구조)

∙서사적 이야기 구성요소: 사건적 요소들, 사물적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



서사적 내용도 마찬가지로 질료와 형식을 가진다. 사건적 요소들과 사물적 요소들의 질료는 우주 전체이며, 더 정확히는 가능한 대상들, 사건들, 관념들, 그리고 작가(영화감독 등)에 의해 ‘모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서사물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의미 구조를 타고난다는 말은 곧 ‘주어진 모든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물 자체(또는 어떤 텍스트를 서사화하는 것)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시니피에(signifies or signifieds)는 정확히 세 가지-사건, 인물, 배경적 요소들-이다. 시니피앙(signifiants or signifiers)은 서사적 진술(그 매체가 어떤 것이든) 속에서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대표할 수 있는 요소들로서, 첫째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행위의 모든 유형을, 둘째는 모든 인물들(혹은 인격화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셋째는 장소를 환기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 정확한 이유는 서사구조가, 달리는 무의미했을 초기 텍스트(ur-text)에, 통상적인 일 대 일의 표상 관계를 통해 사건과 인물, 배경의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사실들은 우리의 첫 번째 도표를 다음과 같이 다시 그리도록 한다.

              

 

 

 

 

 

 

 

 

행위

 

 

 

 

 

 

 

 

사건적 요소

 

 

 

 

 

 

 

 

 

돌발사

 

 

 

 

 

이야기

(내용)

 

 

 

 

 

 

 

 

 

 

 

 

 

내용의 형식

 

 

 

 

 

 

 

 

 

등장인물

 

 

 

 

 

 

 

 

사물적 요소

 

 

 

 

 

 

 

배경

 

 

 

 

 

 

 

 

 

 

 

 

 

 

 

 

작가의 문화적 약호들에 의해서 수용되기 이전의 사람과 사물들

기타

 

 

 

 

 

내용의 질료

 

 

서사물

 

 

 

 

 

 

 

 

 

 

 

 

 

 

 

 

 

 

 

서사적 전이의 구조

 

표현의 형식

 

 

 

 

 

 

 

 

 

 

 

 

 

 

 

 

 

 

 

 

담론

 

 

 

 

 

언어

 

 

 

 

 

 

 

 

 

 

 

 

 

 

 

영상

 

 

 

 

 

 

 

 

발현 매체

 

 

발레

 

 

표현의 질료

 

 

 

 

 

 

 

 

 

 

 

 

 

판토마임

 

 

 

 

 

 

 

 

 

 

 

기타

 

 

 

 

 

 


발현과 물리적 대상


이야기와 담론, 그리고 발현은 서사의 단순한 물리적 처리-책의 실제적인 인쇄, 배우나 무용가, 꼭두각시 인형의 동작,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려진 선 등-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현상학적인 미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박물관이나 도서관, 극장 등에서 부딪히게 되는 ‘실제적 대상’과 ‘미적 대상’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밝혀낸 바 있는 로만 앙가르덴에 의해 해결되었다. 실제적 대상이란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대리적 조각, 그림물감이 굳어있는 캔버스, 규칙적으로 울리는 공기의 진동파, 한 덩어리로 제본된 인쇄된 종이뭉치-이다. 반면 미적 대상이란 관찰자가 그러한 사물들을 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찰자의 마음속에 구축(또는 재구축)되는 것이다. 미적 대상은 실제적 대상의 부재 속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순수한 상상 속의 대상들에서도 어떤 미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

매체들-언어, 음악, 돌, 캔버스 등등-은 서사를 실제화하고 그것을 책이나 악보(녹음기나 디스크를 통해 진동하는 소리의 파장), 조각, 그림 등의 실질적인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독자는 그 매체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사실상의 서사물을 찾아내야만 한다.


서사적 추론, 선별, 일관성


담론이 이야기를 다루는 가능한 모든 매체(일상 언어, 발레, ‘프로그램’, 음악, 마임 등등)에 의해 이루어진 표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발현된 모든 서사물에 공통된 특징들만을 포함하는 추상적인 수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주요한 특징들은 질서와 선별(selection)이다...(질서는 사건의 인과적인 연속이나 그 뒤바뀜의 변형을 의미할 것이고 선별은-인용자) 사건과 대상들에 관해 실제로 진술할 것과 단지 암시만 할 것을 선택하는 담론의 선택적 수용성을 의미한다.

서사물이 공연을 통해서든 텍스트를 통해서든 경험될 때 수용자들은 반드시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반응하게 된다. 즉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을 처리해야 한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해서 언급되지 않은 채 지나치는 틈새들을 필수적인, 혹은 그에 준하는 사건들과 특징들, 물질들로 메꾸어야 한다...그럴듯한 세부적 사건들을 보충하는 독자의 능력은 기하학자가 두 개의 점 사이에 공간 분할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처럼 실제로 무한하다...또 인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선별과 추론에 이은 또 다른 규제는 일관성이다. 서술에 있어서 사물적 요소는 사건들의 이동 속에서 동일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 따른 설명(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이 있어야만 한다...일정한 일관성의 원칙, 즉 서사물 속에 나타나는 대상들의 정체가 고정되어 있으며 연속적이라는 일정한 감각이 작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사구조의 개요


담론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진술들에는 누가 무엇을 했는가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따라서, 혹은 단순히 이야기 속에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구별되는 두 가지 유형-‘경과(process)’와 ‘정체(stasis)’-이 있다. 경과진술은 ‘하다’나 ‘일어나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영어나 그 외의 일상어로 된 구체적인 단어들(표현의 질료를 형성하는)로서가 아니라 더 추상적인 표현 범주로 존재한다...정체진술은 ‘있다’나 ‘이다’의 형태로 나타난다. 완전히 정체진술들로 이루어진 텍스트, 즉 단지 사물들의 일련의 존재만을 진술하는 텍스트는 하나의 서사를 다만 함축할 수 있을 뿐이다.

경과진술은 하나의 사건이 명료하게 제시되는가 아닌가의 여부, 즉 화자에 의해 그 자체로 표출되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건을 ‘자세히 설명한다’거나 ‘실연(實演)한다’고 말해진다...서사 행위 자체와 실연 사이의 대조는 인물의 말을 전달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형식, 즉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속에서 예시된다.

마찬가지로 정체진술은 중개를 거치지 않기도, 즉 ‘드러내기’도 하고, 중개를 거치기도, 즉 ‘제시하기’도 한다.

사건적 요소들은 사물적 요소들을 함축하거나 그에 대한 ‘색인’이 되어줄 수 있다. 역으로 사물적 요소는 사건적 요소를 ‘투사’할 수 있다...결국 하나의 사건적 요소는 다른 사건적 요소를 함축하고, 하나의 사물적 요소는 다른 사물적 요소를 함축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진술은 ‘중개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대화조차도 작가에 의해 창안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서술자나 화자, 즉 지금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작가, 즉 이야기를 최초로 고안해낸 동시에 이를테면 화자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둔다면 그의 존재를 얼마만큼 내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은(이론과 비평에서 잘 확립되어 있는 바와 같이)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소홀이 취급되어도 화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인 관습이다...모든 서사물은, 전적으로 ‘보여지는’것이거나 혹은 중개를 거치지 않은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을 고안해낸 사람, 즉 작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화자’란 말이 그러한 의미로 쓰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화자란, 화자의 음성을 최소한도로 억제하려는 경우에도 수용자에게, 혹은 수용자의 청각적 기능에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사람이든 어떤 존재이든-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은 존재에 대한 느낌을 부여하지 않는 서사물, 즉 두드러지게 화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서사물은 ‘비서사적인 것’ 또는 ‘서사화 되지 않은 것’으로 불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제2장 이야기

-사건적 요소들

전통적으로 하나의 이야기 속의 사건적 요소들은 ‘플롯’이라고 불리는 배열을 구성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미토스)을 ‘사건들의 배치’라고 정의했다. 구조주의적 서사이론은 그러한 배치가 엄밀하게는 담론에 의해 행해지는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야기 속에서 사건적 요소들은 그것의 표현 방식인 담론에 의해 플롯으로 전환된다. 담론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현될 수 있지만 그것의 내부구조는 가능한 어떠한 발현형태와도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즉 담론화된 이야기로서의 플롯은 주어진 영화나 소설 등, 특정한 객관화된 형태보다도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존재한다. 그것의 표현순서는 반드시 이야기의 본래적인 논리적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특정 이야기-사건적 요소들을 강조하거나 악화시키고, 어떤 사건들을 해석하거나 추론의 대상으로 남겨놓으며, 보여주거나 말하고, 논평을 가하거나 침묵하며, 또한 사건이나 인물의 어떤 상양들에 초점을 맞추는 기능을 한다.

사건적 요소란 ‘행위(행동)’이거나 ‘돌발사들’이다. 양자는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행위란 행위 주체에 의해 야기된, 혹은 행위객체에 미친 상태의 변화이다. 만약 그 행위가 플롯화된다면 행위 주체와 행위 객체는 등장인물로 불려 지게 된다. 따라서 등장인물은 서사적 술어에 대한 서사적 주어-반드시 문법적 주어가 아닐지라도-가 된다.

인물, 혹은 다른 사물적 요소들이 수행하는 행동의 주요한 유형들에는 비언어적인 물리적 행위(‘존은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언술 행위(‘존은 말했다, ‘나는 배고파”나 ‘존은 그가 배고프다고 말했다’), 사고 행위(‘존은 생각했다, ‘나는 가야 해”(혹은 ‘존은 그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와 같은 정신상의 언어적 발음), 그리고 느낌이나 인지, 감각(발음되지 않는-‘존은 불안했다’나 ‘존은 차의 앞부분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등이 있다. 서사 이론에서 이러한 것들은 따로 정의가 필요 없는 기초적인 용어들로 사용되기 쉽다.

돌발사는 등장인물이나, 혹은 초점이 맞추어진 다른 사물적 요소가 서사적 객체가 되는 술어 형태를 수반한다. 되풀이한다면, 서사에 관한 일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언어적 발현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의 논리이다.


계기성, 우발성, 인과성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사물에 있어서의 사건적 요소들은 상호 관련적이고 구속적이며 수반적인 관계에 있다고 논의되어 왔다. 그것들의 계기성은, 전통적인 논의에 따르면 단순히 선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과적인 것이다. 인과성은 공개적인, 즉 분명한 것일 수도 있고 숨겨진, 즉 암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사건들은 선조적으로 일어난다. 즉 사건들은 서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결과들은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다른 결과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두 개의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명백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후에 발견하게 될 어떤 더 포괄적인 원리를 통해서 그 관계를 추론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중간’, ‘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실제적인 행위 자체보다는 오히려 모방된 것으로서의 이야기-사건들, 즉 서사물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용어는 담론화된 이야기로서의 플롯을 구획 짓기 위한 것이다.

분명히 현대의 작가들은 엄격한 인과성의 개념을 거부하거나 수정할 것을 주장한다. 장 푸이용은 현대적 텍스트들을 한데 묶는 것으로 ‘우발성’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있다. 이 용어는 ‘불확실성’이나 ‘우연’의 의미가 아닌, 오히려 더 엄격한 철학적인 의미에서 ‘그 존재, 사건, 인물 등에 있어서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아메리칸 칼리지 사전󰡕����)을 뜻한다. 우발성의 개념은 매우 넓다.

플롯이 없는 서사물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플롯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플롯이 뒤얽힌 사건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 사건들이 ‘아무런 비중도 가지지 않는’ 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전통적인 서사물에서의 사건들의 해결에는 문제가 풀려가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들이 완결되어 간다는, 혹은 일종의 추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감각이 존재한다.


핍진성과 동기 부여

사건들이 하나의 서사물을 형성하기 위해 상호 관련되는 방식-그 원칙을 ‘인과성’이나 ‘우발성’, 혹은 그 외의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방식이 관습적인 것이며 그런 관습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어떤 서사물에서든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관습은 사건들의 상대적 비중에서부터 플롯의 거시 구조를 성격화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이 장의 다른 모든 논점들(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나머지 부분까지)안에 동일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핍진성에 의한 ‘채워 넣기’의 관습이 우선적인 논제로 선택된 것은 그것이 바로 서사적 일관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논의는 뒤에 다루게 될 다른 서사적 관습들에 대한 논의의 한 시사적인 본보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서사물의 수용자들은 관습들을 ‘자연화함(naturalizing)’에 의해 그것들을 인식하거나 해석한다. 서사적 관습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관습적 성격 자체를 ‘망각’하고 그것을 심층적인 독서 과정 속으로 완전히 끌어 들여서, 언어나 무대와 같은 발현 매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 관습이 의식되지 않은 채로 수용자의 해석적 그물망 속에 섞여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화’의 개념은 실제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그럴듯한 것에 호소하는 오랜 전통, 즉 핍진성의 개념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재생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개념은 독자가 텍스트 내의 틈새들을 ‘채우고’,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들을 일관된 전체로 조화시켜 나가는-일상생활에서는 그와 같은 예측이 의문시될 수 있는 경우에까지도-수법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서사구조의 이론에서 서사적 사건들이 현실 세계에서의 제 현상들이나 가능성들로 자연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는 것은 서사물의 잘 짜여짐(즉 서사물을 탁월하거나 조잡하게 만들고, 그것이 다른 어떤 유형의 텍스트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그와 같은 문제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서사적 허구가 그 제작자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질지라도 ‘사실성’, 혹은 ‘유사성’을 이루는 것은 엄격한 문화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물론 ‘자연스러운 것’은 사회에 따라, 또는 같은 사회 내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인위적으로 가능한 것, 있을 법한 것의 바탕이 되는 것, 즉 핍진성의 개념은 쥬네트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플라톤적인 것으로서 우연히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핍진성의 기준은 이전의 텍스트들-실제의 담론들뿐만 아니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적절한 행위 ‘텍스트들’까지 포함하여-에 의해 확립된다. 핍진성은 ‘집체 효과(effect of corpus)이거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rality)’(그러므로 상호 주관성)이다. 그것은 결과에서 원인까지 가리키는, 그리고 하나의 금언(maxim)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일종의 설명의 형식이다. 더군다나 금언들은 널리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즉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 암시적이거나 배경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명백한 설명은, 단지 행위의 널리 알려진(공공연하고 일반적인) 규범들에 비춰볼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들에 대해서만 취해질 뿐이며, 그런 경우에도 엄격성이 요구된다. 그것은 필자가 ‘일반화’라고 일컫는 서사적 논평의 형태를 취한다. 외관상 기이한 현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어떤 ‘일반적인 진실’이 자세히 설명되기도 한다. 위의 말에서 필자가 인용부호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경우들에서 ‘진실’은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입증되는’ 관점에 따라서는 완전히 전도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화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유일한 요구는 그럴듯함(plausiblity)이다. 개연성 없는 행위들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거나 동기 부여가 된 상태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 고전적인 허구물에서 일반화된 논평은 납득하기 어려운 동기들을 표준적인 이해의 단계로 이동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명백한 설명은 단지 극단적인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며 그 기준이 되는 것은 핍진성이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모든 사람’(즉 상당한 수준의 모든 독자들)이 이러저러한 일이나 사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역사가 불가사의했기에 대부분의 사실주의적 소설가들 또한 불가사의해져버렸다. 극히 자의적인 서사물이 19세기 동안 점점 대중화되어 갔다.


핵사건과 주변사건

서사적 사건들은 관계의 논리뿐만 아니라 서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건들은 다른 것들보다 중요하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연쇄적 흐름을 이루거나 우발성의 틀을 결정짓는 것은 단지 주요한 사건들뿐이다. 하찮은 사건들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핵사건은 사건들에 의해 취해진 방향으로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서사적 계기들이다. 그것은 한두 가지(혹은 그 이상의) 가능한 길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서사적 진전을 이끌어 나가는 분기점, 즉 구조 안의 마디나 관절과도 같은 것이다. 핵사건은 서사적 논리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거될 수 없다. 고전적 서사 텍스트에서는, 주어진 어느 지점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뒤에 나타나는 핵사건을 앞의 사건들의 결과로 보면서, 그와 같은 계속적인 선택의 상황들을 뒤따라갈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

주변사건(satellites)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제거될 경우, 그 서사물을 미학적으로 빈약하게 할지라도 플롯의 논리는 혼란시키지 않는다. 주변사건은 선택을 수반하지 않으며, 다만 핵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선택을 완결 지을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핵사건을 내포하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의 기능성은 핵사건을 보충하고 다듬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뼈대에 살을 부여한다. 핵사건의 뼈대 내에서는 이론적으로 무한한 세공(細工)이 허용된다. 모든 행위들은 무수한 부분들로, 그리고 그 부분들은 더 작은 부분들로 하위 분할될 수 있다. 주변사건들이 반드시 핵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인접해 있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담론은 이야기와 등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핵사건들을 앞서거나 뒤따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적 요소들과 사물적 요소들, 혹은 이야기와 담론은 매체와는 별개로 더 깊은 구조적인 단계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 속에 있는 실제의 말들(혹은 이미지들이나 기타)을 통해 그들 사이의 경계를 관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분석자의 초언어(metalanguage), 즉 서사물에 대한 일종의 의역(paraphrase)을 통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

                    

이야기와 반이야기(Anti-stories)

고전적 서사물에서 핵사건들의 조직망(혹은 ‘연쇄’)이 가능한 길들 가운데 단 하나의 선택만을 허용한다면 현대적 반이야기는 모든 선택들을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다룸으로써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일종의 공격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는 모순되는 용어라기보다는 보완적인 용어이다. 양자는 서사물 안에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함께 작용한다. 사건들의 연쇄는 서프라이즈로 시작해서 서스펜스의 유형을 이루다가 일종의 ‘비틀림’, 즉 예측된 결과의 좌절-또 다른 서프라이즈-로 끝난다.


시간과 플롯

독서의 시간(reading-time)과 플롯의 시간(plot-time), 혹은 필자가 더 선호하는 구분법으로는 담론의 시간-담론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야기의 시간-서사물에서 의미화된 사건들의 지속 시간-이 있다.

공개적인 서사물의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두 개의 현재(nows), 이를테면 화자가 위치하고 있는 현재시제의 시간(‘나는 여러분에게 다음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즉 담론의 시간과 보통 과거시제를 취하는, 행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간, 즉 이야기의 시간이 있다. 화자가 전혀 부재하거나 감춰져 있을 경우, 단지 이야기의 현재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대화나 내적, 외적 독백의 현재성을 제외하면 이 경우 서술의 시간은 과거이다.


순차, 지속, 빈도

A. 순차 이야기의 순서가 식별 가능한 한 담론은 만족한 상태로까지 이야기의 사건들을 재배열할 수 있다.

쥬네트는 이야기와 담론이 동일한 순차(1234)를 가진 표준적 계기성과 ‘시간 변조적(anachronous)’ 계기성을 구분한다. 시간변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담론이 이전의 사건들을 회상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플래쉬백(analepse)과 담론이 사건들 도중에 뒤이어 일어나는 사건들로 앞질러 가는 플래쉬 포워드(prolepse)가 그것이다.

과거에 대한 전통적인 요약적 구분들이 ‘플래쉬 백’으로 지적되는 것은 옳지 않다. 플래쉬 백과 플래쉬 포워드는 단지 소급 제시(analepsis)와 사전 제시(prolopsis)의 더 포괄적인 분류와 관련된 특정 매체(영상적 매체)상의 보기들일 뿐이다.

쥬네트는 시간변조의 ‘거리(distance)’와 ‘크기(amplitude)’를 구분한다. ‘거리’는 현재(now)로부터 시간변조가 시작되는 부분까지 앞으로, 혹은 뒤로 걸쳐 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크기는 시간변조 사건 자체의 지속 기간이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시간변조를 결합시키는 데에는 외부적, 내부적, 혼합적인 상이한 방법들이 있다. 외부적인 시간변조는 그 시작과 끝이 현재 이전에 일어나는 것이며 내부적인 시간변조는 현재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혼합적 시간변조는 현재 이전에 시작해서 현재 이후에 끝나는 것이다.

B. 지속 지속은 서사물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야기-사건들 자체가 지속되는 시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다섯 가지의 가능성이 고려될 수 있다. ① 요약: 담론-시간이 이야기-시간보다 짧다. ② 생략: 담론-시간이 0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④와 같다. ③ 장면: 담론-시간과 이야기-시간은 동일하다. ④ 연장: 담론-시간은 이야기-시간보다 길다. ⑤ 휴지(休止): 이야기-시간이 0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④와 같다.

① 요약: 담론은 묘사되는 사건들보다 짧다. 서사적 진술은 일군의 사건들을 요약한다. 언어적 서사물에서 이것은 반복적 형태(‘그 회사는 파업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되풀이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를 포함하는 지속의 동사나 부사를(‘존은 7년 동안을 뉴욕에서 살았다’) 수반하기도 한다.

요약은 담론과 이야기의 정확한 동시간대가 필수적인 대화와 같은 곳에조차 존재한다.

영화는 요약이 없기에, 감독들은 종종 기계장치에 의존한다. ‘몽타주’는 오래 전부터 인기를 끌어왔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계기의 선택된 국면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모아서 보통 계속적인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 거기에는 또 달력이 넘어가는 것, 화면 위에 전설처럼 나타나는 날짜들, 또는 화면 밖의 화자 등과 같이 더 격이 낮은 여러 해결책들이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상의 문제해결을 위해 고안된 몽타주기법이 언어적 허구물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부득이한 이유로 어떤 서사적 매체의 기법이 개발된 뒤, 그것이 자체적으로 대등한 형태적 기법을 갖지 못한 다른 매체들에 의해 새롭게 흥미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② 생략: 이야기의 시간은 계속되더라도 담론은 멈춘다. 이야기의 일부 세부적인 사실들은 기록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략’과 ‘커트’는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 차이점은 단계상의 그것이다. 생략은 이야기와 담론 사이의 서사적 불연속성과 관계된다. 반면 ‘커트’는 인쇄된 지면에서의 빈 칸이나 별표 표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 특정 매체상의 생략의 명시적 형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커트는 생략을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단순한 공간상의 이동, 즉 연속 촬영 A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당기는 남자를 보여주고, 그것이 커트된 후에, 연속 촬영 B가 카메라를 향해 열려 있는 같은 방의 내부를 복도를 통해 들어가면서 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완전한 혹은 사실상의 연속적인 두 행위를 연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담론은 이 경우 이야기에 못지않게 연속적이다.

③ 장면: 장면은 서사물에 극적 원리를 결합시킨 것이다. 이야기와 담론은 여기서 상대적으로 동등한 지속성을 가진다. 일반적인 구성요소는 대화와, 비교적 짧은 지속성을 갖는 뚜렷한 물리적 행위들이며, 그 행위는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소하지는 않는다.

④ 연장: 여기에서 담론-시간은 이야기-시간보다 더 길다. ‘고속 촬영(overcranking)’-즉 카메라를 나중에 영사할 때보다 더 빨리 돌리는 것-에 의해 영화는 잘 알려진 ‘슬로우 모션’을 통한 연장을 나타낼 수 있다. 언어적 표현은 사건들 자체보다 더 오래(적어도 인상주의적인 척도로는) 지속된다. 정신적 사건들의 경우는 특히 흥미롭다.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며, 또한 그것을 써내려가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 담론은 등장인물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특히 갑작스런 인지나 통찰 등을 전달하는 데에서 더 느려지게 마련이다.

⑤ 휴지: 묘사적 문구에서와 같이 담론은 계속될지라도 이야기는 멈춘다. 그러나 서사물은 본질적으로 시간예술이기에 이때는 또 다른 담론 형태로 교체되는 것이다.

현대의 서사물은 극적 양식을 선호해 명백히 드러난 기술적 휴지는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기술(記述) 자체가 불가능하며, 이야기-시간은 영상이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한, 또 카메라가 계속해 돌아감을 우리가 느끼고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순수한 기술의 효과는 실제로 영화가 소위 ‘freeze-frame’ 효과(영사기는 계속 돌아가지만 필름은 계속 똑같은 영상만을 보여주는 것)를 지닌 채 ‘멈출’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전적인 소설들은 장면과 요약간의 비교적 일관된 교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비평가들(퍼시 러보크 같은)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반대로 현대소설들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준수했던 것처럼 요약을 피하고, 독자들이 채워 넣어야 할 생략에 분절된 일련의 장면들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대 소설은, 필자가 그 변화를 영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보다 영화적인 것이다.

C. 빈도 담론-시간과 이야기-시간 사이의 세 번째 가능한 관계는 빈도이다. 쥬네트는 그것을 ① 단일적(singularly), ‘어제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단일한 이야기적 계기의 단일한 담론적 재현, ② 복수 단일적(multi-singularly), ‘월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 화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 목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여러 개의 이야기적 계기들 각각에 대한 여러 개의 담론적 재현, ③ 반복 나열적(repetitive), ‘어제 나는 일찍 잤다. 어제 나는 일찍 잤다. 어제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동일한 이야기적 계기들에 대한 여러 개의 담론적 재현, ④ 요약 반복적(iterative), ‘일주일 동안 내내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여러 개의 이야기적 계기들에 대한 단일한 담론적 재현으로 구분하고 있다.


서사적 거시구조와 플롯의 유형학

지금까지 논의한 주제는 서사물의 미시구조, 즉 플롯의 분자화된 단위들의 형태적 특성과 부정적인 가능성들(반이야기들)을 포함하는 그 조직 원리들에 대한 것이었다. 서사물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은 또한 분명히 거시구조, 즉 플롯의 일반적인 구도에 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거시구조는 다시, ‘플롯들은 구조적인 유사성에 의해 어떻게 묶여질 수 있는가’라는, 플롯의 유형학에 관한 이론을 내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학연구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토대로 플롯의 거시구조에 대해 분석을 계속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의 상황이 향상되는가 쇠퇴하는가에 따라서 행복한 플롯과 운명적인 플롯을 구분했다.

운명적인 플롯의 경우에는,

① 무조건적으로 선한 주인공이 실패한다. 이것은 개연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격적이리만큼 납득될 수 없는 것이다.

② 사악한 주인공이 실패한다. 정의가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그의 몰락에 대해서 뿌듯한 만족감을 느낀다.

③ 고귀한 주인공이 오산으로 실패하며 그것은 우리의 동정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한 플롯의 경우에는,

④ 사악한 주인공이 성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개연성에 대한 감각과 위배되기 때문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⑤ 무조건적으로 선한 주인공이 성공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만족감을 준다.

⑥ 고결한 주인공이 일시적으로 오산하지만 결국은 만족할 만한 설욕에 이른다.

노드롭 프라이나 로날드 크레인, 노만 프리드만 등에 의해서 행해진, 거시구조와 유형학을 분석하려는 현대적인 시도에서는 변수의 수가 증가하고, 따라서 가능성의 그물망이 더욱 더 새로운 서사유형들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내용에 근거한 플롯유형의 분류법에서 우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화적 전제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선’이나 ‘행위’와 ‘사고’ 사이의 구분에 기초한 이론들은 이런 것들이 사실상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며, 기본용어들로 합의될 수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실일 수도 있으나, 어떤 부류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에 대해서만 사실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독자들이 그와 같이 가정된 배경을 어떻게 인지하며, 상상을 통해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론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문화적 전제가 되는 이러한 현상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수용행위의 흥미 있는 복합적 체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을 이루는 일련의 특성들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주어진 어떤 특성이나 행위가 선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 외에 전통에 대한 친밀한 상상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서사물들에 내재되어 있는 상대성은 그것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깊이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마땅히 실제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구조주의자들의 분류법은 서사물의 내용상의 질료보다는 오히려 그 ‘형식’에 의존한다. 그 점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프롭이었다. 그는 상호 무관한 생물학적, 물리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등장인물들-말하자면 늙은 여인, 곰, 숲의 정령, 또는 어느 암말의 머리-이 각각 다른, 그러나 연관된 이야기들에서 ‘동일한’ 행위, 즉 주인공을 시험한다거나 그에게 보답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요컨대 단일한 기능을 가진 유사한 ‘기능인’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이것을 러시아민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각각의 이야기 자체에 내재된 약호를 발견해내어 증명하는 방식으로 인식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자들에게 부여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들 상호간의 대체 가능성이다. 사실상 옛것이 주는 편안함(기능 그 자체인)이나 새로운 것이 주는 상상의 즐거움(화성인 또한 악당이 될 수 있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 장르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호 대체 가능성인 것이다.

프롭(그리고 다른 최근의 서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토도로프는 󰡔����데카메론󰡕����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플롯상의 재현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보여준다. 우선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의역의 형태로 환원시킨다. 의역된 문장으로부터 그는 세 개의 바탕이 되는 상징들-명사로 된 서사물의 주어(인물을 위한), 서사적 형용사(그들의 특징 혹은 상황), 그리고 서사적 술어(수행된 행위)-을 추출해낸다. 등장인물과 자질들, 상황들, 행위들은 상징으로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 상징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배치로부터 달리는 보이지 않을 유형들이 나타나고, 그 유형들은 다시 연구 자료상의 다른 이야기들에 의해 검증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분류는 검증되어야 할 더 많은 가설들을 제공해 준다. ‘새로운’ 데카메론식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롭과 토도로프의 방법을 모든 서사물의 거시구조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회의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서사물들은 전형화된 어떤 필연적인 반복 형태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소설과 영화의 세계는 러시아 민담이나 󰡔����데카메론󰡕����처럼 검은색과 흰색의 양가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문화는 대체로 대부분의 서사물들, 또는 적어도 문학적 자질을 가진 서사물들을 위한 인물이나 행위의 상투형을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예술로서의 서사물은 어떤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거시구조적인 분석에 대한 형식주의 및 구조주의 이론들이 무가치한 것이며, 어떤 곳에서도 그것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개개의 서사물이 그곳에서 잠들 수 없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서사물에 있어 핵사건을 지칭하는 기술용어들이나, 일군의 핵이 되는 말들(mots-defs) 또한 모든 이야기들을 환원시킬 수 있는 일련의 범주들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핵사건은 플롯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분리될 수도 있으며, 마땅히 명칭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서사물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환원이 지니는 강력한 단순성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분석의 느슨한 복합성이다. 컬러나 다른 이론가들은 어떤 주어진 사건은 그것의 전후 문맥, 특히 최종적인 사건과 분리되어 분류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죽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자비행위나 희생, 애국적인 행동, 우발적 사고, 또는 다른 12가지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기존의 어떠한 확정된 범주도 서사물 전체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것을 읽기도 전에 서사물을 성격지울 수는 없다. 문학이론가는 가능한 한 서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존의 의미론적 범주화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류학자와는 반대로(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인 관심을 거부하지 않고서도) 그는 어떤 주어진 사건이 ‘복수’나 ‘거부’, ‘이탈’, 혹은 다른 기존의 용어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에 대한 강요된 결정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결국 플롯을 거시구조와 유형학으로 성격 짓는 것은 문화적 약호에 대한 이해 및 그것과 문학, 예술적 약호나 일상생활의 약호와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핍진성에 크게 의존한다. 우리가 문화적 약호 ‘전부’를 공식화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논의는 프롭이나 토도로프와 같은 사람들의 연구에 비하면 인상주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플롯의 유형학자들은 그들의 기초적인 단위들이 지니고 있는 관습적인 본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현재에 있어서 모든 서사물들이 소수의 플롯-내용상의 형태들에 따라 성공적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형식적인 관점에 따라 서사물들을 비교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므로 그 작업은 장르별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제3장 이야기

-사물적 요소들


이야기-공간과 담론-공간

이야기에 있어서 사건적 요소의 차원이 시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적 요소의 차원은 공간이다. 그리고 이야기-시간을 담론-시간과 구별하듯이 이야기-공간을 담론-공간과 구별해야 한다. 그 차이는 시각적 서사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드러나는 이야기 공간은 분명히 화면 위에 실제로 보여지는 세계의 일부분인 반면, 함축된 이야기 공간은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등장인물에게는 보이거나 들리는 범위 내이며, 또한 등장인물의 행동에 의해 암시되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시간이 사건적 요소를 포함하듯이 이야기-공간은 사물적 요소를 포함한다. 사건은 공간에서 일어나나 공간적이지만은 않다. 즉 공간이라는 것은 사건들을 수행하거나, 혹은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 실재물이다.


언어 서사물에 있어서 이야기-공간

언어 서사물에 있어서 이야기-공간은 독자로부터 이중으로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들이 제공해 주는 화상(icon)이나 유사물들은 언어 서사물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적 요소들과 그 공간이 조금이라도 ‘보여진다면’ 그것은 상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며, 언어로부터 정신적으로 투영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화에서처럼 사물적 요소에 대한 표준적 영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폭풍의 언덕󰡕����을 읽는 동안 개개인은 자신의 정신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윌리암 와일러가 영화로 각색한 󰡔����폭풍의 언덕󰡕����은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언어 이야기-공간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비존재물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추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구조물에 가까운 것이다.

일반적인 자질로서 담론-공간은 ‘공간적 관심의 초점(focus of spatial attention)’으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내포독자의 관심이 담론에 의해 정해지는 구조화된 영역이다. 전체적인 이야기 공간 속의 담론 공간은 매체의 요구에 따라 화자나 카메라의 눈을 통해-영화에서는 명시적으로, 언어 서사물에서는 비유적으로-‘드러나거나’ 감추어진다.

우리는 화자나 등장인물, 내포작가가 보는 눈에 의지하여 사물을 보게 된다.

등장인물은 인지 가능한 서사적 술어를 통해서 이야기의 세계 내에 있는 것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서술 대상은 등장인물에게 지각된 이야기 공간 내에 나타난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머무는 이야기-공간으로부터 그의 시점이 존재하게 된다.

일단 언어 서사물이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하나의 장소를 확정지으면 그것은 명시적인 지각 동사의 도움 없이도 그가 지각하는 공간을 전달할 수 있다.

반면에, 화자는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묘사를 통하여 이야기-공간의 한계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 인물이나 장소를 소개하거나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는 주의 깊은 관찰을 할지도 모른다. 화자는(전지전능한 힘으로) 어디에든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전지전능한 힘은 등장인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유리한 지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거나,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비약하거나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 화자의 능력이다.

언어 이야기-공간은 등장인물의 감각을 기초로 하거나 화자의 정보를 기초로 하여 독자가 상상력 속에서(그의 능력이 가능한 정도로) 창조할 수 있도록 고무되는 어떤 것이다.

담론-공간이 서로 유사한 영화 서사물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의 장점 중의 하나는 장면이 어떻게 바뀌며 등장인물이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등등을 확실히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언어 서사물과 영화 서사물들은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전통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기민한 유동성을 보여준다.

언어 서사물과 영화 서사물 사이의 유사성은 자주 논의되어 왔다. 실제로 ‘카메라의 눈’은 전통주의자들의 문학비평 속에서 비유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언어 이야기-공간과 영화 이야기-공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남아 있다. 언어적 묘사 문장이 마음속에 환기하는 이미지들은 틀에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 서사물은 완전히 비장면적일 수 있으며, 장소보다는 오히려 ‘특별히 어느 곳이 아닌’ 관념의 영역에서 전개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이러한 유형의 비장소적 영역을 환기하기 어렵다.

결국 영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묘사’할 수 없다.


이야기-사물적 요소: 인물

인물이 실제로 책 속에, 또는 무대나 화면 위에 등장하는 배우에 의해서 형상화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무언의 원리인 것이다. 아마도 그 원리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케네드 버크가 얘기하는 것처럼, ‘등장인물’과 보통 사람이 ‘동일하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구분’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서사이론은 적어도 그 관계를 심시숙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심리 법칙을 등장인물에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특성’의 개념은 등장인물에 관해 논의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허구적 존재로의 전이가 갖는(필연성이라기보다는) 관례성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문학이론은 서사구조에 관한 더 적합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하여 개방적 자세를 필요로 한다.


인물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시학󰡕���� 제2장은 ‘예술가는 행위를 수반하는 인간을 모방한다’는 진술로 시작된다. O.B. 하디슨에 의하면, ‘그리스 이론에서 강조되는 것은 행위를 수행하는 인간이 아니라 행위 자체이며...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먼저 나타난다.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agents)는 그 다음에 온다’.

이처럼 특성의 근원으로서 행위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자와 인물을 구별하는 것이 꼭 필요한가? 플롯과 인물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과, 인물 특성이 행위자에게 부여되는 방법과 시간을 설명함에 있어 어색함을 극복하는 문제를 논의해 보자.


인물에 관한 형식주의자와 구조주의자의 개념

형식주의자와 (소수의) 구조주의자들의 견해는 주요한 방법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하다. 그들은 인물이란 플롯의 산물이고, 인물의 지위는 ‘기능적’이며, 즉 인격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참여자(participants) 또는 행위자(actants)로서, 인물을 실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사 이론은 심리적 본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물의 국면은 단지 ‘기능’일 뿐이다. 그들은 인물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하는가만을 분석하고자 한다-즉, 심리학적 또는 도덕적 기준 밖의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더구나 그들은 인물들의 ‘행위영역들’이 ‘숫자적으로나 특징적으로나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적게’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서사학자들은 ‘인물은 이야기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단’이라고 하는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대체로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형식주의자 그리고 구조주의자들은 인물을 플롯의 하위에 두고, 그것을 플롯의 한 기능으로, 즉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시간 논리에서 파생되는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nothing happens)’, 즉 사건적 요소들 자체가 예컨대 수수께끼 등과 같이 흥미를 유발시키는 독자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는 현대적 사서물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물이 가장 주요하고 플롯은 부차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있어서 ‘우선(priority)’과 ‘우세(dominance)’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적 요소와 사물적 요소가 함께 존재할 때만 가능하게 된다. 사물적 요소 없이는 사건적 요소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텍스트가(인물 묘사나 묘사적 수필과 같이) 사건적 요소 없이 사물적 요소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서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인물에 관한 토도로프와 바르트의 견해

󰡔����데카메론󰡕����, 󰡔����아라비안나이트󰡕����, 그리고 또 다른 일화적 서사물들에 관한 연구에서, 토도로프는 인물에 관한 프롭적인 견해를 지지하기도 하나 동시에 두 개의 중요한 범주-구성 중심적인(plot-centered), 즉 비심리적인 서사물과 인물 중심적인(chracter-centered), 즉 심리적 서사물을 구별하고 있다. 심리적 서사물에서 행위들은 인물 특징에 대한 ‘표현’이거나 ‘징후’이며, 따라서 ‘종속’적인 것이다. 반면에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행위는 쾌감의 독자적 요소로서 그 자체로 존재하며 따라서 독립적인 것이다. 서사 문법용어에서 전자의 관심은 주어부(subject)에 있게 되고, 후자의 관심은 술어부(the predicate)에 있게 된다.

나아가 토도로프는,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인물의 특성이 언급될 때에는 그 결과가 곧 뒤따르게 된다(즉 하짐이 욕심이 많다면, 그는 즉시 돈을 찾기 위해 출발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의 그 특성은 사실상 결과적 행위와 합치된다. 그 관계는 ‘가능성/실현’의 관계가 아니라, ‘지속적/간헐적’ 관계이거나 ‘요약 반복/보기’의 관계이다. 일화적 서사물의 인물특성은 항상 행위를 유발하며, 동기(motives)나 욕망(yearnings)에 언제나 영향을 주게 된다. 다음으로 심리적 서사물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물특성을 드러낸다. 만약 ‘X는 Y를 시기한다’라는 서사적 진술이 심리적 서사물에 나타난다면, X는 (a) 은둔자 되거나 (b) 자살하거나 (c) Y를 고소하거나 (d) Y를 해치려고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X는 오직 Y를 해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주어부의 성질이자 가능성으로서) 전 단계에서 암시된 것은 행위에 종속되는 부분으로 모아지게 된다. ‘인물’은 선택의 여지없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플롯의 단순한 자동적 기능으로 변하게 된다.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인물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 즉 ‘사실상의 이야기’ 그 자체이다.

롤랑 바르트는 협소한 기능적 관점으로부터 인물의 심리적 관점과 유사한 견해로 옮겨가고 있다. 1970년 무렵에 바르트는 ‘특성’이나 ‘인물성’과 같은 용어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즉 그는 서사물을 읽는 것은 ‘이름을 붙이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며 이름 붙여진 하나의 요소가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읽는다’고 하는 것은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싸움이며, 텍스트의 각 문장들에 의미론적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이 변형은 불규칙하며, 여러 개의 이름들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열려진 구조물인가, 닫혀진 구조물인가?

인물에 대한 또 다른 제한은 담론의 언어적 표현과 이야기 사이의 혼란으로부터 기인한다. 어떤 질문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모든 의문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우리가 좋아서 인물에 대해서 추측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생득적인 권리까지 억제해야 하는가? 그러한 어떠한 억제도 미학적인 경험을 저하시킨다고 생각한다. 암시와 추측은 플롯과 주제와 다른 서사물의 요소들에 속하는 것과 같이, 인물의 해석에도 속한다.

인물을 단지 ‘단순한 어휘들’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수많은 무언극들, 수많은 자막 없는 무성 영화들, 수많은 발레 연주회들은 그러한 동일시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빈번히 우리는 허구적 인물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텍스트 내의 각각의 어휘들에서 허구적 인물 그 자체를 생생하게 환기한다.

세련된 서사물에서 인물들은, 마치 실제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그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신비스러운 부분들을 가지고 있듯이 열려진 구조물로 존재한다. 그 점에서 영화는, 잘 알려진 인물들을 고정된 시각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한계가 있다.


배경

인물들은 심층 서사단계 속에 추상화되어 있는 공간에서 존재하거나 움직이는데, 그러한 심층 서사단계는 이차원의 영화 화면, 삼차원의 무대, 그리고 마음의 눈에 투사된 공간과도 같은 어떠한 유형의 물리적 실현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다. 추상적 서사 공간은 양극단 속에서 인물과 배경을 함축한다. 우리가 초상화에서 남자나 여자가 자리 잡고 있는 배경으로부터 인물을 구별해내듯이, 하나의 이야기에서도 배경으로부터 인물을 구별해낼 수 있다. 배경은 표현의 일방적인 비유적 의미에서 ‘인물을 돋보이게’ 한다. 즉 배경이란 인물의 행위와 열정이 ‘그 안에서’ 적절히 드러나는, 대상들의 장소와 집합이다.

그러나 배경을 이렇게 자세히 분석하는 데에는 어떤 의문들이 야기된다. 배경을 이루는 단순한 성분에 불과한 인간 존재들-‘단역들’-과 부차적 인물을 구별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있는가?(이것은 비평적 경계를 형성하며, 어떤 엄격한 범주화의 가능성도 그것의 명료한 구별에 의존해 있는 것 같다.) 최소한 세 가지 가능한 기준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그 세 가지란 ① 생물학(biology), ② 신원확인(identity; 즉 이름 붙이기), ③ 비중(importance)이다.

① 생물학적 기준은 명백히 그것 자체로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단역들이나 엑스트라들을 등장인물로서 취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사물의 주인공이 이솝 우화처럼 동물이거나 혹은 심지어 무생물일 경우를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과학 공상이야기에서는 친절하거나 적대적인 로봇도 인물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 바람과 폭풍우, 해와 달 같은 원시적인 힘까지도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 지구가 주인공이 되어 태양계의 역사를 들려주는 서사물을 생각해볼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인물들이 인격화될(대부분 그렇지만)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가 않다.

② 인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적합지 않게 명명된 인물을 가진 소설의 예는 너무나 많다. 그런 인물이란 단순히 분위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③ 비중이라는 것은 플롯에서 가장 내실 있는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비중이라는 말을 사물적 요소들이 플롯상의 의미 있는 행위를 수행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즉 핵사건을 수행하거나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정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대의 예들은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플롯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명백히 소도구나 심지어는 숨겨진 장치들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치코크는 이것들을 ‘맥 쿠핀(Mac Guffins)’이라고 부른다. 맥 쿠핀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이 든 커피잔, 우라늄 원석이 든 포도주 병, 성채(보루, 요새)의 설계도면, ‘비행기 엔진 또는 폭탄실의 문 등등’이다.

위의 것들은 인물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들로서는 적당하지 않으나 자질로서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즉 분명히 서사물의 요소들은 자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자질들이 특징적일수록 인물은 더욱 더 완전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인물성이란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격적 존재는 이름이 붙여지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어떤 물체, 혹은 이름이 붙여진 채 등장하지만 비중은 없는 인격적 존재 등보다 ‘더욱 더’ 인물(그가 조역일지라도)에 ‘가깝다’.

배경의 정상적인, 그리고 아마도 주요한 기능은 서사물의 분위기에 대한 기여일 것이다.

배경의 요소들은 복합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자연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던 로버트 리들은 배경이 플롯과 인물에 관련될 수 있는 방법을 다섯 유형으로 범주화했다.

첫째, 공리적, 혹은 실용적 배경은 단순하고 중요성이 적고 행동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치고, 일반적으로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배경이다.

둘째는 상징적 배경인데, 행위와 밀접한 결합을 강조한다. 즉 여기서 배경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와 ‘유사’하다.

셋째는 무관계한 배경이다. 즉 풍경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특별히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넷째는 ‘마음속의 배경’, 즉 등장인물의 내면풍경이다.

다섯째는 만화경적인 배경인데, 물리적인 외부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재빨리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다.


제4장 담론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들

모든 서사물은-그래서 이 이론이 전개되는데-‘이야기’라고 불리는 내용의 국면과 ‘담론’이라 불리는 표현의 국면을 가진 하나의 구조이다. 표현 국면은 서사적 진술들의 모임인데, 여기서 ‘진술’이란 어떤 특정한 발현보다 독립적이며 추상적인 표현형식의 기본적인 구성요소, 즉 예술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는 표현의 질료이다. 발레에서의 어떤 자세, 일련의 사진화면, 소설에서의 전체 단락이나 각각의 단어들은 어느 것이나 하나의 서사적 진술을 나타낼 수 있다. 필자는 서사적 진술을, 심층 서사술어(표층언어가 아닌)가 존재 양식이냐 행동양식이냐에 따라 두 가지 종류-경과 진술과 정체 진술-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제안했었다.

이런 분류법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진술이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는가 혹은 화자라고 부르는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는가 하는 것이다. 직접전달은 독자에 의한 일종의 엿들음을 전제로 한다. 반면, 중재된 서술은 화자로부터 독자에로의 다소간 명확한 전달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현대적 용어로는 보여주기(showing)와 말하기(telling)이다. 말하기가 있으면 거기엔 반드시 말하는 사람, 즉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화자의 존재는, 어떤 전달에 대한 독자의 논증할 수 있는 지각에서 나온다. 만약 무엇인가가 이야기된다고 독자가 느낀다면 그것은 화자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란 그 행동을 ‘직접 목격하는’ 일이다.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실제독자, 내포독자, 수화자

작가와 화자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문학이론의 상식이 되었다.

게다가, 웨인 부드에 의해 ‘내포작가’라고 편리하게 불리어진 제3의 분류가 있다.

화자와는 달리 내포작가는 독자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줄 수 없다. 그는, 아니 ‘그것’은 목소리가 없고, 직접적인 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전체적인 구상과 모든 목소리, 그리고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모든 수단에 의해 말없이 독자를 가르친다.

내포작가는 서사물의 규범들을 세운다. 우리가 내포작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미학적인 면에서이지 윤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다. 하나의 구조적 원칙은, 내포작가와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존경할 수도, 존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역사적 인물을 혼동하면 우리의 이론적 작업을 심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내포작가의 상대 개념은 ‘내포독자’-책을 읽으며 거실에 앉아 있는 실체로서의 나, 혹은 당신이 아니라 서사물 그 자체에 의해 전제되는 수용자-다. 내포작가와 마찬가지로 내포독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반면, 화자와 마찬가지로 수화자(narratee)는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작품 세계 안에 등장인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수화자로서의 등장인물은 내포작가가 실제독자에게 내포독자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어떠한 세계관을 채택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명시된 수화자가 없는 사서물들에서는 내포독자의 위치가 보편적인 문화적 도덕적인 관계 위에서 추측될 따름이다.

화자, 내포작가, 실제작가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화자, 내포독자(서사물의 내재적인 부분들), 그리고 실제독자(서사물의 외재적이고 우발적인 부분들) 사이의 구분은 필요하다. 내가 소설의 관계 속에 들어감에 따라, 나는 또 하나의 자아를 추가한다. 나는 내포독자가 된다. 화자가 내포작가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독자에 의해 제공되는 내포독자도 수화자와 관계를 맺을 수도, 맺지 않을 수도 있다.

수화자의 위치는 화자의 위치와 대등하다. 그의 영역은 완전히 성격화된 개인으로부터 ‘아무도 아닌’ 존재에 걸쳐 있다.

 

                                        서사텍스트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수화자)→ 내포독자

→ 실제독자

  


위의 도표는 내포작가와 내포독자만이 서사물에 내재하고 화자와 수화자는 임의적(괄호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궁극의 실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서사적 전달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작가와 실제독자는 서사적 전달의 바깥에 있다.


화자들과 등장인물들의 발화행위

우리는 먼저 언술, 사고, 일반적인 물리적 행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언어 서사물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화자인지 작중인물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수용자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이론기초가 최근에 존 오스틴에 의해 발전된 ‘화행이론’의 학문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언어학이 아니다. 그것은 한 언어권에서의 문장들의 문법적 구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화자에 의한 실제적인 행동과 같은 소통 상황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문장들이 의도하는 것-오스틴이 그것들의 ‘언표내적(illocutionary)’ 국면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문법적인, 혹은 ‘언표적(locutionary)’ 국면과, 그것들이 실제로 전달되는 것, 즉 청자에 미치는 영향 혹은 ‘완전언표적(perlocutionary)’ 국면과 날카롭게 구분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화자가 영어로(혹은 다른 자연언어로) 한 문장을 말할 때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어쩌면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1) 그는 문장을 만들고 있다. 즉 영문법의 규칙에 의하여 문장을 형성하고 있다(‘언표화 하기’). (2) 그는 그러한 언어 행위의 ‘내부에서’, 비언어적 수단에 의해서도 똑같이 수행될 수 있는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언표내화 하기’). 예를 들면, 만일 그가 ‘물속을 뛰어들어’라고 말한다면, 그는 (1) 명령법 구문에 관한 표준 영어 규칙에 의해서 ‘물속으로 뛰어’라고 하는 어법을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2) 물웅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드는 시늉을 함으로써 전달될 수 있는 행동인, ‘명령하기’의 언표내화를 수행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하여금 물웅덩이에 뛰어들게 함으로써 언표내화의 의도를 달성한다면 (3) 그는 설득이라는 완전언표화를 성취한 것이다.

하나의 언표내화는 매우 다양한 언표화와 완전언표화를 수반할 수 있다. 예언하기의 언표내적 행동에 대한 실례가 되는 표는 다음과 같다.

언표화

언표내화

가능한 완전언표화

‘존은 틀림없이 미칠 것이다’

‘존은 결국 미칠 성싶다’

‘존의 정신이상은 아마도 자명해질 것이다’

‘존은 머리가 돌고 있다’

 

 

예언하다

 

 

 

 

 

 

가르치다

설득하다

속이다

초조하게 하다

놀라게 하다

즐겁게 하다

 

예언하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언표내화도 다른 통상적, 어휘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언표화로 다양하게 나태 내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뒤 문맥에 의존하여 수화자에게 매우 폭넓고 다양한 완전언표화를 초래할 수 있다.

화행이론은, 서사물의 수용자와 마주보는 화자의 언어와 작중 인물의 언어를 구별하는 데 하나의 유용한 수단을 제공해준다.

화행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기초 서사단위들-이야기 진술들-이 그것의 표면이든 그 아래의 심층구조이든 문장들과 동등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작가에게는 관계상 자신의 서사물에 필요한 모든 실재물들과 행위들을 배치할 권리가 부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자의 견해인 진술들은 이러한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진술들은 이야기의 내부 세계가 아닌 실제 세계에 대한 화자의 견해를 언급한다. 엄격한 화행적 의미에 있어서 ‘의견을 말하기’는 외관상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근거 위에서 화자가 옳은지 그른지를 합당하게 물을 수 있다.

작중인물의 발화행위는 논리상 화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떤 인물이 중심적인 이야기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말 할 때도 그의 발화행위들은 항상 전체적인 담론보다는 오히려 그 이야기 속에 머물게 된다. 그의 다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수화자나 혹은 내포독자가 아니라 다른 작중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그래서 화자보다는 작중인물들에게 광범위한 언표내적 범주가 개방되는 것이다.


‘서술되지 않은’ 일반적 재현

화자 존재(narrator-presence)의 부정적인 극점-‘순수한’ 보여주기의 극점-은 작중인물들의 행동이 원상 그대로 전사(轉寫)되기를 추구하는 서사물들에 의해 표현된다. 반면에 화자가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수한 말하기의 극점에선 대명사 ‘나’와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해석을 하거나 일반적 혹은 도덕적인 관찰 등을 한다.

관례상 행위에 대한 중립적인 말들은 화자 개입의 의도적인 회피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주제에 대한 명백한 해석 없이, 물리적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화자가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진다. 독자는 순수한 외부 행동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보고로부터 주제를 추론해야 한다.


서술되지 않은 유형들: 문자화된 기록들

화자 개입의 최소치에서 최대치까지, 즉 화자의 목소리가 가장 적게 드러나는 것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일련의 서사적 형태들 가운데서, 발견된 편지나 일기들에 의해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서사형태들은 화자를 거의 전제하지 않는다.

편지나 일기 내용이 서술적이 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될지라도 그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문장이 단지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그때 그 자리에서의 관계만을 표현하는 서간체 형태로도 이야기는 전달될 수 있다. 그 경우에 그것은 인용부호로 구별된 순수한 대화만큼이나 ‘극적’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순수한 화자와 달리, 서신 교환자나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일이 결국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일이 중요한지의 여부조차 알 수 없다. 그는 이야기의 미래가 아닌 과거만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단지 이해하거나 예측할 뿐이다. 지속적인 서스펜스는 그의 희망이나 두려움이 실현되어질지의 여부에 관한 우리의 호기심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서간체 서사물은 일종의 연기이며, 화자가 개입되지 않은 서사텍스트다-비록 이차적인 개입이 언제나 가능하고 실제로 그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말이다.


순수한 발화 기록

극적 독백들은 한 인물이 다른, 침묵하는 인물에게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의 본질적인 제한은 발화자의 중심 활등이 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그는 하나의 화자일 수 있고, 그 장면은 단지 제2의 서사를 위한 하나의 틀일뿐이기 때문이다.


독백

서사물에서 독백은, 사실상 그것이 생각이 아닌 말로서, 혹은 단순한 생각이나 말을 넘어서는 양식화된 표현주의적 형식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소박한 이유 때문에 결코 자유롭지 않은, 인용부호가 붙는다는 조건 하에 가능한 것이다.

독백은 아마도, 사물들을 형식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하며 논평하는 등장인물들이 유발한 정보의 원천이 되는 비자연주의적인, 혹은 ‘표현주의적인’ 서사물들과 관련된 용어로서 가장 유용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형식적인 낭독-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둘의 양식화된 혼합-이다. 극적 독백이나 대화에서와 같이 이와 같은 독백은 누군가에 의해 ‘들려지고’ 기록된 텍스트로 변형되는 것이 관례적이다.


사고의 기록: 자유 직접화법=내적 독백

인물의 의식의 재현 역시 매개되지 않을 수 있다(비록 그것이 드러내진다는 사실 자체는 엄격한 발화의 기록보다 더 짙은 매개성을 내포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서사적 개념으로서의 ‘의식’은 신중함과 제한성을 요구한다.

심리학에 의거하지 않고도 우리는 정신행위의 두 가지 유형을 분리할 수 있다. 즉 ‘언어화’를 수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거칠게 말해서 인식(cognition)과 지각(perception)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식이란 이미 언어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또는 쉽사리 언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언어적 서사물로의 전환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각의 전달은 언어로의 변형을 필요로 한다. 영화와 같은 시각적 매체는 붉은 장미를 직접적이고 비언어적으로 모방할 수 있으며,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 다음에 장미 자체의 커트 된 화면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간단한 관례를 통해 그 장미가 등장인물의 지각대상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언어적 매체는 반드시 본질적으로는 언어적이 아닌 것의 언어화를 전제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언어화에서 그 언어적 역할은 화자에게 할당된 몫인가, 아니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인가의 여부이다. 비언어적 지각 내용들은 ‘지정되지 않은’ 언어적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가? ‘내적 독백’에 의해 그것은 가능하다.

등장인물의 사고 내용을 다루는 가장 명백하고 직접적인 방식은 그것들을 ‘비언표적 언술’로 취급하는 것, 즉 ‘그는 생각했다’와 같은 인용 표현과 더불어 그것들을 인용부호로 묶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올수록 인용표현 또한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직접 자유 사고(direct free thought)이다. 그 기준이 되는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① 등장인물의 자기 언급은 어떠한 것이든 1인칭이다.

② 현재의 담론-순간은 이야기-순간과 같다. 그러므로 현재의 순간을 언급하는 모든 술어는 현재시제를 취할 것이다. 이것은 과거 시간을 묘사하는 ‘서사시적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행위의 동시간대를 언급하는 실재적 현재이다. 기억과 과거에 대한 다른 언급들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단순 과거로 나타날 것이다.

③ 언어-관용어, 어투, 단어나 문장의 선택-는 화자가 그 외의 곳에 끼어들든 아니든 등장인물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④ 등장인물의 모든 경험에 관한 암시들은 이를테면 그 자신의 생각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⑤ 생각하는 사람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청자도 설정되지 않으며 수화자의 무지, 또는 해석의 필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의식의 다른 재현 방식들로부터 내적 독백을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등장인물이 실제로 생각하거나 지각하고 있는 것을 화자의 진술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한다는 것이다. 사고 내용이 곧 지각 내용일 경우, 말들은 오로지 그, 혹은 그녀의 마음속을 스쳐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식의 흐름=자유 연상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 사이의 차이점은, 이전의 논의에서는 단순한 어원적인 것이었다. 두 용어는 처음에는 동의어로 취급되었다가 후에 다양한 구분들이 만들어졌다.

로렌스 보울링은 ‘내적 독백’은 인식, 즉 스스로에게 침묵으로 ‘말하는’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모사, 혹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언어적 형태로 존재하는 사고 내용에 대한 기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로 옮겨지지 않는 마음의 순수한 지각이나 영상들’을 그는 ‘감각인상’(필자의 ‘지각’에 해당하는)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보울링에게 있어 ‘의식의 흐름’은 ‘작가가 ‘정신의 직접적인 인용’-단순히 언어의 영역만이 아니라 의식 전체를 포함하는-을 제시하기 위해 시도하는 서사적 방법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의식의 흐름’은 언어화된 사고(고유한 의미의 ‘내적 독백’)의 기록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일어나지만 말로 형성되지는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에 의한 내적 분석의 산물은 아닌 ‘감각 인상’의 기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확실히 ‘직접 인용’과 ‘내적 분석’의 구분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각이나 감각 인상이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말을 포함할 수 있는가? ‘인용’은 누군가의 실질적인 말을 옮겨오는 것이다.

‘감각 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식의 흐름’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보울링의 가치 있는 구분법을 역으로 받아들여만 한다. 즉 ‘내적 독백’은 분류 용어로 두고, 다른 두 용어는 ‘개념적’이고 ‘지각적’인 두 개의 하위분류를 지시하게 하는 것이다. ‘개념적인 내적 독백’은 등장인물의 마음속을 스쳐가는 실질적인 말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것이고, ‘지각적인 내적 독백’은 관례적인 언어적 변형에 의해 등장인물의 발음되지 않은 감각 인상들을 전달하는(화자의 내적 분석 없이) 것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은 따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에서 자유롭다. 즉 그것은 생각과 인상들을 임의로 배열하는 것이다. ‘흐름’이라는 말은 그것을 적절히 암시한다. 이 경우 정신은 ‘어떤 목적을 가진 생각과는 정반대의 극을 이루는 연상의 일상적인 흐름에 몰두하는 것이다.

보통 내적 독백과 의식의 흐름이 텍스트 내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을 명료하고 날카롭게 하려면, 그 두 개념을 따로따로 검토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지나치게 얽어매놓아서는 안 된다. 변별점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이는, 새로운 윤곽, 새로운 일련의 특성들을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문학(그리고 미학)이론들을 흥미롭고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예견하는 능력인 것이다.

의식의 흐름의 관례는 외부적으로 등장인물의 사고에 동기를 주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론 화자가 그러한 사고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 효과는 사고에 대한 끊임없이 목적화된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제5장 담론

-숨은 화자와 드러난 화자

화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 주는 특징들을 식별하는 것이, 화자들의 유형을 결정짓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다음 세 가지 문제가 우선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간접 담론의 본질, 숨겨진 서술 목적을 위한 텍스트의 외면적 조정, 그리고 특정한 인물 또는 인물들에 대한 시점의 제한 등이 그것이다.


숨은 화자들

숨은, 혹은 눈에 띄지 않는 서술은, ‘비서술’과, 명백하게 들을 수 있는 서술간의 중간에 위치한다. 숨은 서술에서 우리는 사건, 인물, 배경을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소유자는 담론의 그늘에 숨은 채로 남게 된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와는 달리 숨겨진 채 서술된 이야기는 작중인물의 말 또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서술되지 않은 서사물에서의 단순한 마음을 읽어내는 속기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중개자나 해석적 장치를 포함한다. 어떤 해석자는 인물의 생각들을 간접표현으로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신의 관점이 단어 뒤에 숨어 있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없게 된다.

화자가 숨어 있는 서술 부분이 어디인지는 알아내기가 힘들고 항상 헛갈리기 쉽다. 등장인물이 내적 독백 속에서 고유한 개성적 목소리를 내는 것에 화자라는 명칭을 부여한 잘못은 등장인물의 생각이 숨은 화자에 의해 표현된 곳에서 확실해진다.


간접 인용구와 자유 형식

등장인물의 발화행위와 화자의 발화행위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는 의사소통 발화(외적 목소리), 또는 생각(내적 목소리)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용과 보고(report), 혹은 보다 전통적인 용어로 ‘직접’ ‘간접’ 형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수세기 동안 일반적인 것이었다. 서술 시점에서 가장 흥미 있는 제한은, 단지 직접 형식만이 발화자의 정확한 언어들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접 형식은 그런 보장을 할 수 없다. 간접 형식은 화자에 의해 미묘한 간섭을 받는데, 왜냐하면 보고절에 사용된 단어들이 발화자에 의해 정확히 말해진 것이라는 점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직접 간접 발화와 사고(thought) 사이를 가로질러 또 다른 구별이 ‘인용화법’과 ‘자유화법’이라는 차이를 나타냈다. 자유화법에는 인용부문 표시들이 제거된다.


 

인용화법

자유화법

직접화법

발화

‘나는 가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가야 한다.

사고

‘나는 가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가야 한다.

간접화법

발화

그녀는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야 했다.

사고

그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야 했다.

 

자유양식의 발화와 사고는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문맥이 분명하지 않는 한 모호하게 남아있다. 필자는 직접 자유화법들은 내적 독백을 형상화한다고 주장했다. 간접 자유화법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화자가 3인칭 대명사로 제시되고 앞선 시제에 의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 자유화법의 의미는 간접 인용구 형식에서 인용구 부분을 뺀 단순한 나머지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접 인용구 형식보다 높은 정도의 자율성을 지니며, 비록 애매함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인용구 부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 같은 것들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분명히 등장인물의 언어라 하더라도, 최근에 고안된 이것에 대한 적절한 호칭은 서술된 독백(narrated monologue)이다. ‘서술된’이란 말은 간접화법적 특징-3인칭과 앞선 시제-을 의미하며, 반면에 독백이란 등장인물이 사용한 바로 그 언어들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서술된 독백은 서술된 보고(내적 분석)와 분명히 다르다. 서술된 보고에서는 등장인물의 생각 또는 발화가 분명히 화자의 것이라 인식되는 말로 전달된다.

때로 자유간접화법 속의 단어들이 등장인물의 것인지 화자의 것인지 결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둘 다 고도의 문학적 방식에 의해 말해졌을 때 그러하다. 이것은 성격 묘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두 개의 목소리를 합한 것이 의도된 미적 효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누가 이것을 생각하거나 말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장들은 인물과 화자 모두에게 적합한 것이다’하는 것이 문장의 함축된 의미이다. 애매함은 그 둘 사이의 결합을 강하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화자의 권위를 훨씬 더 믿게 해준다. 아마도 우리는 애매함에 대해서보다는 ‘중립화’나 ‘단일화’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숨은 화자는 명백하게 드러난 유리한 외적 관점에서 작품을 묘사할 수도 있고, 그 자신의 언어나 등장인물의 언어를 사용하여 등장인물의 생각을 인용하는 데 깊이 빠질 수도 있으며, 혹은 어법의 사용, 불분명한 말하기와 보여주기, 등장인물의 내적 삶을 재현하거나 서술하기 같은 것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애매함을 조성할 수도 있다


서사 목적을 위한 문장의 조정: 하나의 예로써의 ‘전제’

언어란 극히 다양한 도구이며, 따라서 현명한 작가들은 언어의 드러내기와 감추기, 주장과 속임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우리는 문장의 요소가 좀 더 적절한 위치, 혹은 자신의 강조를 위해 이동하는 화제화(topicalization)라는 용어를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그리고 다른 표현들의 유용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이른바 ‘전제’라는 것이다. 숨은 화자는 스스로를 노출하여 드러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그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직접적 언급 같은 것을 피해야 한다. 전제란 이런 회피를 위한 편리한 장치이다. 전제는 하나의 자료로 제공된 문장의 일부이며(다른 부분은 주장이지만), 이미 이해되고, 청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말할 필요도 없는 어떤 것이다.


서사 소통에서의 권위의 제한

화자가 가지는 말할 능력은 그의 ‘권위’로 종종 언급된다.

‘제한’의 개념이 늘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립되는 하나는 ‘전지적’인 것, 즉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모든’이란 모든 사건적 요소의 결과와 모든 사물적 요소의 본질을 포함한다. 물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자는 규칙적으로 정보를 숨긴다. 그것이 담론의 정상적인 선택 기능이다. 그러나 전지적 화자(숨은 화자이더라도)는 소설 속의 일들이 어떻게 판명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위에서 논의했듯이, 편지나 일기의 화자는 예외이다).

대부분의 논의에서, ‘전지성’이라는 것은 등장인물의 의식에 들어갈 능력이라는 면에서, ‘제한’에 대립되는 것이다. 전지성은, 등장인물의 심리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권위’를 일정한 기능으로 묶어두는 효과와 관련될 때 사용하는 술어이며 이와 다른 능력에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체를 확인하는 중심이 되는 의식이 없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건너뛰는 능력은 ‘전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필재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때는 논리적으로 양자 사이에 어떤 필연적 관계가 없다. 하나의 서술은 화자에게 전지적인 것이 아니라 편재적인 존재가 되도록 허락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화자의 특권의 다른 영역은 시간과 관련된다. 즉 화자는 현재의 이야기 순간에 엄격히 제한될 수도 있고, 혹은 특별한 장면이나 요약을 통해서 오랜 기간 지속된 사건을 단 한 두 문장으로 말해버리거나 그와 반대로 사건이 실제 일어난 것보다도 더 오랫동안 읽혀야 되는 방법으로 사건을 확장시키면서, 과거와 미래를 조정하는 것이 허락될 수도 있다.


제한적 이동과 전지적 심리 접근

화자는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그의 심리적 접근을 이동하면서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숨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제한된 이동식 접근은 지속적인 ‘전지’와는 다르지만, 이것은 화자의 침투시간이 더 짧다든가, 보여주기와 말하기 사이의 차이점, 구체적 세부묘사와 요약, 단순한 제시와 설명, 자유 간접담론과 인용 간접담론, 보고와 해석의 차이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동시 발생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보조적인 특징들이다.

주요 기준은 심리적 움직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의도’이다. 의식의 흐름처럼, 제한된 이동식 접근은 어떤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며 플롯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 사고의 서로 떨어진 집단을 환기하지, 어떤 일반적인 목적에 기여하는 게 아니다. 즉 그것의 변화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건의 외적 전개를 도와주지 못한다.

‘제한적 이동’이란, 문제의 해결 없이, 또는 인과적 사슬을 푸는 일이 없이 다음 단계의 심리로 움직여가는 전환을 뜻한다. 이런 문장 속에서 화자는 해석학적 문제점의 답을 찾기 위해(벌이 꽃을 찾듯) 여러 심리를 샅샅이 찾아다니지 않는다. 심리적 접근은 우연한 문제로 보여 지고 일상생활의 무작위성을 반영한다.

갑작스런 시점의 이동은, 밀접한 육체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등장인물의 얇은 피부에도 불구하고, 단 1인치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완전히 다른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 화자는, 등장인물의 심리가 각각으로 다를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들이 전체적인 플롯에 적합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즉 의식에서 의식에로의 변화를 규정짓는다.


드러난 서술: 복합적 묘사

복합적 묘사는 드러난 화자가 가장 미약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화자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에도 묘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묘사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닉은)화물차의 빛을 받은 채 커브를 그리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철로를 바라보았다’(헤밍웨이의 󰡔����전사󰡕����The Battler)에서 커브를 그리는 철로와 화물차는 문장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들은 중심적인 것이기보다는, 다만 닉이 우연히 본 대상들로서 그 장면에 잠시 끼어든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문장 상 두드러지지 않은 채로 행위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옴으로써, 그것들이 화자의 독립된 장면환기, 즉 복합적 묘사를 이루는 것을 억제한다.

언어 서사물과 영상 서사물에서의 사물적 요소의 재현에는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필름에 찍혀진 대상들의 모든 속성들-형태, 색깔, 크기 등등-은 ‘즉각적인 복합성’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 파악되기에, 대상들은 일종의 ‘강한 자율성’을 지니게 된다(개별적인 속성들을 분석해내고 그것들을 대상들 각각의 유사성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보통 클로즈업이나 편집을 통한 특정 단계가 취해져야만 한다). 반면에 언어로 묘사된 대상들은 더욱 느린 방식으로 독자의 의식 속을 지나간다. 우리는 그것의 속성들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만 한다. 묘사가 더 풍부해질수록 다루어지는 내용도 길어진다. 더 많은 세부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단어들이 필요해진다. 리카르두는 이와 같은 확장된 ‘구분적 복합성(differentiated)’을 통해, 언어로 묘사된 대상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적출해낸다. 즉 그러한 속성들이 연속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그 분절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드러난 서술: 시간의 요약

언어는 공간보다 시간을 다루는데 더 적절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직접적인 요약, 예컨대 생략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요약은 그 자체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 이유는 세부묘사를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시간의 어떤 기간을 메우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생략은, 바로 논평 없이도 시간의 구분을 발생시킨다. 요약은 누군가가 ‘전이의 문제’,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감지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요약은 보통 시간적인 생략과 관련된다. 2장에서 그것은 이야기-시간이 담론-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지속되는 하나의 구조이며, 본질적으로 지속적(또는 요약 반복적)인 의미의 동사들을 갖고 있는 언어 서사물에서 그 효과가 더 쉽게 이루어진다고 정의 내린 바 있다.

요약의 세 번째 유형은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의 자질을 발췌하는 것이다. 직접적 성격부여는, 어떠한 유형이든 화자의 목소리에 대한 주의를 불러오지만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하나의 단어, 혹은 짤막한 구문으로 포장하는 것은 훨씬 더 큰 힘, 따라서 훨씬 더 큰 가청력을 함유하고 있다. 텍스트를 통틀어 간간이 암시처럼 나타나는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이라는 말은 화자가 그의 개요에 대한 통어력을 통해 적용하려는 말, 즉 ‘한마디로 그것이 명백히 무엇과 같은가 하면’이 된다.


등장인물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고

어떤 화자들에게는 실제로 등장인물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고하는 능력이 부여된다. 가능하면서도 불확실한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서사적 과정 자체의 인위성에 보다 더 주목을 하게 된다. 어떤 화자는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일어나지는 않은 많은 일들을 들려주며 심지어 등장인물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까지 알고 보고한다.


에토스와 논평

에토스는 허구적 서사물-진실성이 아닌 핍진성이 그 기준이 되는-에서 믿을만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믿을만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시대와 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서사물은 내포작가의 직접적인 발화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에토스는 다만 화자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핍진성은 단지 허구와 관련된 그럴듯함일 뿐이다(드러난 화자가 때로 그와 같은 착각을 외부세계에 대한 공인된 진실, 즉 ‘철학적 일반화’로 받치고 있을지라도). 달리 말해 화자의 수사학적 노력은 이야기에 대한 그의 해석이 ‘진실’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반면 내포작가의 수사학적 노력은, 화자의 활동을 포함하여 이야기와 담론의 전체적인 묶음을 흥미롭고 수용 가능하며 내적 일치를 이룬 예술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화자의 에토스는 그가 주장하는 핍진성의 유형에 의존한다. 자서전적이거나 증언형식의 허구 서사물에서 도덕적 신뢰성은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라는 원칙에 기대고 있다.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허구물에서 ‘나는 내 자신의 귀로 그것을 들었다’는 이미 그보다 미약해진 것이다.


논평

서술, 묘사 혹은 신원확인을 넘어서는 화자의 발화행위를 일컫는 최선의 명칭은 논평이다(비록 이런 발언이 언술행위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더라도). 논평은 직접적인 것이기에 명백한 자기 언급이 결핍된 어떠한 특징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화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준다.

논평은 함축적이거나(즉 아이러닉하거나) 혹은 명백하다. 명백한 논평은 해석, 판단, 일반화, 그리고 ‘자의식적인’ 서술을 포함한다. 이중 앞의 세 개가 이야기의 요점, 적절성, 혹은 비중에 대한 개방된 설명이다. ‘판단’은 도덕적이거나 다른 가치 판단에 관한 의견을 표현한다. ‘일반화’는 보편적 진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간에 허구적 세계의 밖에 있는 실제 세계를 언급하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서술은 진지하든 익살스럽든 간에, 이야기보다는 담론에 대한 논평을 묘사하기 위해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함축적인 논평: 아이러닉한 화자와 믿을 수 없는 화자

등장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수화자 사이에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아이러닉한 화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만약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사이에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 내포작가는 아이러닉하며 화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내포작가는 실제로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해석

‘해석’은 명백한 논평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해석은 다른 영역들을 포함한다. 즉 ‘해석’의 본질이 모든 설명이라면, ‘판단’은 도덕적 가치판단에 기초한 설명이고, ‘일반화’는 이야기 속의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를 비허구적인 세계에 있는 실제의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어떤 상대적인 의미-이야기 자체의 관점에서 이야기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무엇을 설명해 보려는 자유로운 시도-로 제한하면서 이 세 가지 방식의 구분을 고수할 것이다.

이러한 제한 안에서라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해석’의 문장이 가능하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판단

우리는 문장의 세부, 그것들의 법칙, 언표내적 상태에 대한 검증을 통해 판단이 전달되는 체계적인 구조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일반화

비평가들은,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일반적 진실’에 대한 빈번한 인용, 즉 허구적 작품의 세계를 뛰어넘어 실제 세계와 관련된 철학적 관찰들에 대해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과학적 사실은 단지 일반화의 한 종류일 뿐이다. 보다 일반적인 것은 (적어도 19세기의 소설에서는) ‘철학적’ 형태의 관찰들이며, 그것은 보다 불확정적인 방식으로 진실의 조건과 관련을 맺는다. 한 예로 사람들은 텍스트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은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곤란을 겪을 사람에게는 절대로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7은 가장 좋은 숫자이다’와 같은 말들은 논박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과학적 세계보다는 오히려 수사학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의 논쟁과 마찬가지로 서사물에서 그러한 말들의 적용 가능성은,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성이 아니라, 작품의 허구적인 문맥 속에 그것들이 얼마나 적합하게 들어맞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실제적 일반화와 수사적 일반화는 동일한 근본적 기능, 이를테면 장식적이며 특별히 핍진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우리는, 혼란한 역사적 과정에서 약호들이 현실적인 외관을 갖출 만큼 충분히 확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반화와 논평들이 행해졌었는지에 주목해 왔다. 그래서 임의로 주조된 표현이나 작가들 특유의 핍진성이 보다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일반화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플롯의 요구에 따라, 서로 대립되는 각각의 진술들이 쉽사리 즐겨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실수는 패배가 아닌 승리를, 성취는 성공이 아닌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러한 일반화의 과도한 사용은 분명히 역사상의 불안정한 과도기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사용은,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사실성에 대한 적절한 일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필요로 하는 스타일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자체의 정형화된 표현을 제공한다. 전통적 규범이란 항상 역사에 의해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확실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발자크와 대커리는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더 이상 묵인될 수 없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핍진성을 구축했다. 작가들은, 이미 알려진 규범으로는 자신의 의도가 분명해지지 않기 때문에 일반화를 필요로 한다.

일반화는 능숙한 명인의 손으로 행해지는 모든 논평과 마찬가지로, 표현의 경제적인 효과를 위한 정밀한 도구이며,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용 불가능한 통찰법이다.

현대 영화는 일반적으로 공개적인 논평을 삼가는 편이다. 어떤 종류이든 화면 밖의 서술적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못하며, 특히 도덕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설할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담론에 대한 논평

담론에 대한 화자의 논평은 수세기 동안 일반화되어 왔다.

담론에 대한 논평이 허구적 내용의 결을 방해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근본적인 이분법이 생겨난다. 전자의 것은 ‘자의식적인’ 서술이라 불려 왔다.

자의식적인 서술에 대해서 로버트 알터가 한 것 이상으로 더 나은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자의식적 소설은 자체의 인위적 조건을 조직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실성과 사실처럼 보이는 인위성 사이에 관련되는 문제를 탐색한다···. 완전히 자의식적인 소설은 문체와 서사적 관점의 취급, 등장인물에게 부과된 이름들과 어휘들, 서술의 유형들, 등장인물의 본성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허구적 세계가 문학적 전통과 관습의 배경에 맞서서 세워진 작가의 구조물이라는 감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것은 ‘일종의 허구물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규명’이다.

기본적인 서사적 관습들을 희롱하는 것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의미에서 아이러닉하다. 그러나 어떤 자의식적인 서술은 훨씬 더 나아가, 단순히 그러한 관습들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외관상 파괴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수화자

‘드러난/숨은’과 같은 구분이 수화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 프랭스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수화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서사물’과 ‘반대로 그를 특정한 개인으로 규정하는 서사물’을 대립시킨다. 우리는 또 내적 말하기의(intradiegetic) 수화자와 외적 말하기의(extradiegetic) 수화자, 즉 이야기 틀 안의 수화자와 이야기 밖의 수화자 사이의 더 근본적인 이분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단순한 소통

1.드러난〔작가〕-화자

 

 

대상이

되는→

이야기

 

1. 드러난 화자〔독자〕- 수화자

 

 

 

2. 숨은 화자

 

 

 

2. 숨은 수화자

 

 

 

3. 비화자

 

 

 

3. 비수화자

 

 

 

                                             대

                                         구조 소통

이야기 구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드러난 화자

 

 

 

 이야기 구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드러난 수화자

 

 대상이 되는 이야기

→ 

 

 

 

 

 

서사물이 진행되면서, 화자처럼 수화자도 바뀔 수 있다는 것-한 사람의 개인이 발전되어 가는 것이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든-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화자는 성격이 다른 개인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인물로 대치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고리오 영감󰡕����에서처럼, 화자가 그의 수화자를 놓쳐 버려서, 어느 주어진 상황에서 수화자가 명백히 누구인지를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화자와 수화자가 동일해지거나 그들의 기능이 서로 교환되는 경우일 것이다. 󰡔����구토󰡕����의 로깡땡은 다른 일기체 소설가들처럼 바로 그 자신이 수화자가 된다. 󰡔����캔터베리 이야기󰡕����나 󰡔����데카메론󰡕����에서는 수화자들이 번갈아 화자가 되는데, 그것은 이들 작품의 이야기 구조가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이야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장난기 어린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화자가 수행하는 서사적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본적인 이분법에 따라 필자는 내적 말하기 기능을 외적 기능과 구별한다. 내적 말하기의 경우, 이야기 틀 속에서 수화자는 화자를 위한 수용자로서, 즉 서사의 다양한 수사적 기교가 그를 위해 활용되는 수용자의 역할을 한다. 허구적 작품에서 ‘수사적’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핍진성과 관련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수화자의 묵인은 화자가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려는 노력이 사실상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는 가장 단순한 경우에는 수화자의 승인은 화자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수화자가 잘 속는다는 점을 의심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더욱 더 어려워진다.

화자는 수화자와 작품 세계, 특히 그것의 등장인물들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에, 거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이 세 사람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깝고’ ‘먼’ 두 가지 기본적인 거리를 상정한다면, 다섯 가지 종류의 상이한 관계 유형이 인정될 수 있다.

① 화자와 수화자는 서로에게 가깝지만 작중인물과는 먼 경우

② 화자는 멀리 떨어져 있고 수화자와 등장인물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경우

③ 화자와 등장인물은 가까우나 수화자로부터 멀리 있는 경우

④ 세 사람 모두가 친밀한 경우

⑤ 세 사람 모두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화자에 의해 발언된 직접적인 판단이나 해석은 수화자의 묵인(침묵일지라도)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 화자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하지 못하는 수화자의 목소리는 그것의 신뢰성을 시인하는 것이다. 수화자가 ‘그래요, 이해해요’라고 말한다면, 그 진술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다. 가치판단과 견해들에 대한 화자와 수화자 사이의 이러한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텍스트가 요구하는 태도들을 내포독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확실하고 경제적인 방법이다.

수화자가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능은 화자를 좀 더 명료하게 구분해 주는 것이다.

수용자의 다양성은 서사적 구조 자체의 정상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한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그에 대한 단 하나의 적절한 예도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그러한 예가 드문 것은, 대부분의 서사물들이 실제로 이름 붙여지거나 혹은 암시되어진 화자에게 긴밀하고 특수한 초점을 맞추는 기능상의 요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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