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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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소리 랑랑했던 그 시절
2013년 08월 28일 16시 40분  조회:1991  추천:1  작성자: 홍천룡
글소리 랑랑했던 시절

홍천룡

지난 세기 70년대초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대학교입시제도가 페지된지 여러해 되였다. 나는 맥주공장의 림시로동자로 들어가 건축일을 하였다. 고된 로동에 지쳐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대학교문앞을 지나 갈 때면 대학생이 되여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군 했다. 허나 림시로동자로서는 그런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그때 삼도탄광에서 로동자모집을 하였는데 나는 부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불짐을 싸가지고 삼도만으로 갔다. 당시 탄광으로 가면 두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정식로동자로 빨리 전이될수 있었고 한가지는 로임이 높은것이였다. 우리 작업반의 십오명가량 되는 일군들가운데서 나 혼자만 조선족이였다.

어느날 오후, 왕반장이 반원들을 불러 학습회의를 열었다. 왕반장이 신문을 약 십분간 읽고는 반원마다 돌아가며 발언하라고 재촉하였다. 련이어 몇사람이 열기 띤 발언을 했다. 내차례였다. 그때까지 나는 한어를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고 한어로 발언하기는 처음이였다. 처음 몇마디는 한어로 나갔지만 그다음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나갔다. 그때 나와 사무상을 사이두고 마주 앉았던 로씨가 야멸차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니 쩌거 꼬리빵즈, 지리와라디 쟝썬머? 워먼 팅부둥. 깐추이 베쟝라(이 조선놈새끼야, 뭐라고 씨부렁거리는지 알아못듣겠어. 그만해!)"

나는 대뜸 밸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맞받아 한마디 내쏘았다.
"마세이, 니 쩌거 싼뚱빵즈!(너 누굴 욕하고있어? 이 산동놈새끼야!)"

"쩌 쑈투짜이즈, 쩐 뿌샹화. 까이따스타!(요 빌어먹을 새끼, 덜돼먹었어. 잡아쳐!)"

로씨가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의 주먹이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팔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나도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그 자식의 면상에서 코피가 탁 터져흘렀다.
"쩌 쑈즈, 따런나!(이 자식, 사람을 친다!)"

내곁에 앉았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내 입술을 쳤다. 나의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사무상우로 풀쩍 뛰여올라 발길로 나의 턱을 걷어찼다. 나는 걸상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이어 숱한 사람들의 주먹이 나의 면상으로 날아들었고 숱한 발길이 나의 배며 하신을 걷어찼다. 사지가 얼얼해나며 숨이 꺽 막히는것만 같았다… 다행히 왕반장이 그들을 뜯어말려냈다.
이튿날 나는 매를 맞고도 "리론학습회"를 파괴했다는 죄로 비판까지 받았다. 더는 탄광에 붙박혀 있을수가 없었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시정부의 통일배치로 시량식국산하 의 "숙식품가공공장"에 정식로동자로 들어가게 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서 당지부에 바쳤다. 당지부 최서기가 나를 찾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사상회보를 제때에 써낸것을 높이 치하하며 한어를 잘 배워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오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 말든 한자로 썼고 누구와 말을 하거나 회의발언할 때면 꺽꺽거리면서라도 한어로 했다. 그래서 웃음거리를 자아낸 적이 많았다.

1975년도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1월 달에 정식로동자로 되였고 그달 중순에는 제2직장 제2조의 조장이 되였으며 4월달에는 공장건축시공대 대장이 되였다.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그해 12월 28 일에 나는 입당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상장과 영예증서만 해도 대여섯개를 수여받았다. 그해 겨울은 눈바람을 타고 둥둥 떠서 다녔다.

인젠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대학생추천지표만 내려오면 당상인것이였다. 그야말로 "만사구비에 지결 동남풍(万事俱备, 只欠东南风)"인 셈이였다.

헌데 그해도, 그 이듬해에도 대학생지표는 우리 공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1977년도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시험치기 사흘전에 말미를 맡고 이틀동안 복습제강을 대충 훑어보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문제가 별로 바쁜것 같지 않았다. 헌데 쉽게 여겼던 시험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는 몇점차이로 락방되였다. 77년도 겨울은 날씨도 혹독하게 추웠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니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78년도 봄은 봄바람도 거세찼고 봄물도 빨리 녹아내렸다. 대학시험바람에 사회적인 공부열이 끓어번졌다. 아마 중국의 5천년 문명사에도 그 전례가 없었을것이다. 10년간 대학시험을 쳐보지 못한 중청년세대들이 모두 복습제강을 들고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하루 아침새에 배움의 천당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실안개 감도는 이른 아침이면 어디 앉아 책을 볼 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였다. 거리에도 강둑에도 숲속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로 공간이 다 메워졌다.

만민이 대학생이 되고 만천하가 교정이 된것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여서 책을 쥐고 나서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 가운데는 학교문을 금방 나온 초중졸업생도 있었고 "로싼제(老三届)"고중졸업생도 있었으며 혼자 나온 사람도 있었고 부부동반하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챤스를 잘보는 "못된 송아지"들도 있었다. 공부도 할겸 련애도 할겸 슬금슬금 처녀애들의 뛰꽁무니를 따라 이 나무 저 나무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창 나이라 나도 그런 유혹에 빠져들었다. 당시 부르하통하수원지(지금의 연길호텔주변임)에 가면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개울가곁에 큰 비술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아침마다 그 비술나무밑에 가서 복습하군 했다. 어느날 아침에 한 처녀애가 그 비술나무에서 얼마쯤 떨어진 백양나무밑에 와서 공부하는것이였다.

날씬한 몸매라든가 갸름한 얼굴이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총각들의 눈길을 끌만한 처녀애였다. 댕금하니 서서 책을 보는 자태나 앙증맞게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이였다. 더구나 량어깨를 사선으로 이어놓은 두가닥의 쌍태머리가 몸매의 움직임에 따라 한쌍의 깜장나비처럼 어깨우에서 춤을 출 때면 률동미가 시각조화를 이루어주어 더욱 눈뿌리를 뺐다. 아늑한 아침에 미묘한 화면분위기에 매달려 일렁이는 감정파문이랄가! 아무튼 혼쭐이 방향없이 둥둥 떴다. 출근시간때문에 언제나 내가 먼저 아쉬운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하루아침이였다. 내가 거의 한시간이나 복습제강을 외웠는데도 저쪽 백양나무 밑은 그냥 비여있었다. 허전한 감이 들며 별로 근심스럽기도 했다. 아침복습을 포기했을가 아니면 앓아누웠을가? 시간이 되여 일어나 강뚝길에 올라섰다. 헌데 웬걸, 마침 그 처녀애도 저쪽켠으로부터 강뚝길에 올라서고있었다. 어쩔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 띠우게 되였다. 처녀애가 낯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였다.

“문과를 복습하죠?”
“양. 거긴?”
“저도 문과예요. 집체호의 일때문에 늦게 시작하다보니 복습제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그럼 이걸 가져다가 보오.”

“아니 그럼 거긴?”
처녀애는 뒤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대범해지는 것이 남자다.
“일없소. 난 또 얻을수 있다니까.”

기실 그 복습제강은 힘들게 얻은것이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복습제강을 처녀애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애가 그걸 받아쥐고 훑어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어문이구만요. 전 한어로는 안돼요.”

그러면서 처녀애는 복습제강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갈라질 때 우리는 서로 복습을 잘해서 대학에 붙기를 기원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웬 녀석이 내 자리에 앉아 제법 소리를 왕왕 내며 무엇을 외우고있었다. 수시로 백양나무밑에 앉은 처녀애쪽으로 눈을 흘끔거리며… 괘씸했지만 쫓을수도 없어 좀 떨어진 다른 비술나무밑으로 찾아갔다. 한 처녀애와 두 남자애가 갈라져앉은 세곳을 점선으로 이어놓는다면 아마도 직각삼각형쯤은 될것 같았다. 나는 먼저 주동이 되여 보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그 처녀애한테 줄 복습제강도 얻어놓았다. 헌데 그날 아침부터 그 처녀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은 무엇을 잃어버린듯 마음이 허전해서 복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후 한번도 그 처녀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갸름한 얼굴에 새물거리는 실눈이 인상적이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백양나무밑에서 공부하던 그 처녀애의 동탕한 모습이 떠오른다.

시험날을 한달 남겨두고 복습을 다그쳐야겠다고 청가를 달라고하니 아예 부결당했다. 이튿날 나는 예나 다름없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공장으로 나간것이 아니라 공원뒤산으로 올라갔다. 배나무밑에 앉아 복습제강을 외웠다. 배가 고프니 도시락을 꺼내 먹고는 계속 외웠다. 지껄이는 놈이 없어 좋았다. 날씨가 무더우니 옷을 활활 벗어 배나무에 걸어놓고 팬티바람에 앉아 외웠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단위로 안나가고 어디로 갔댔냐?"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단위에서 요주석이라는 분이 왔다갔네라. "

요주석이란 우리 공장의 공회주석이다. 요주석의 가정방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시해준다. 이튿날 공장회의실에 가보니 20여명 남녀청년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공장의 "열혈학도"들이였다. 우리 20여명 직공수험생들의 무조직, 무규률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경제손실이 빚어졌다고 한다.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이 일어나서 책상을 치며 대성질호했다. 비판의 초점은 점차 나에게로 돌려졌다. 당원으로서 반면적인 솔선작용을 놀았다는것이다. 혁명의 리익과 개인전도를 두고 관건적인 시각에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다시 출근해서 나는 될수록 오전에 사무를 보고 오후엔 사무실문을 꾹 닫아놓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려고 하였다. 허지만 일은 삐뚤게만 나갔다. 제일 신경질나는것은 전화벨소리였다. 전화가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 공장에 전화가 몇대 없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통지였다. 전화가 서너통만 와도 그날 오후복습은 엉망이 된다.

어느날 오후였다. 금방 전화를 받고나서 복습제강을 펼쳐들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송수화기 를 들었다가 콱 놓아버렸다. 이어 련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네번째로 울릴 때 방정맞게도 진주임이 들어서면서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몇번 "오오, 예예"하더니 송수화기를 놓고 내앞에 와서 장승처럼 뚝 박아섰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받지 않았소?"
"금방 시험문제를 푸느라…"
"시험, 시험, 그래 이곳이 시험공부만 하는 장소요? 이따위로 공작하려면 당장 이 자리를 내놓소."
"진주임이 내놓으라면 내놓을 자리입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대들었다. 둘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말다툼을 벌렸다. 그 소리에 저쪽 사무실사람들이 나와 말렸다. 우리 아버지년세와 비슷한 진주임은 평상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분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버르장머리없이 놀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드디어 시험칠 날이 돌아왔다. 시험치는 세날동안 날씨가 특별히 무더웠었다. 시험지를 바치고 밖에 나오면 눈앞이 아물거릴 지경이였다.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우리 사무실은 왁짝 들끓었다. 20여명가운데서 나만 붙었던것이다. 숱한 사람 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그 가운데는 진주임도 있었고 요주석도 있었다. 진주임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는 돼지를 엎어놓고 환송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군용멜가방과 사지옷 이래웃벌을 선사했다. 진주임 한테서 그걸 받아안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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