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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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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채전
2013년 11월 25일 08시 58분  조회:2879  추천:1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대채전
                                                       ㅡ한 부정부패간부의 고백과 참회
                                                                                                                           회령
    고향땅에서 한뉘 편안히 살다가 죽을줄로 알았는데 인생이 무상하여 북경에서 숨어살줄 이야!... 하나뿐인 녀동생의(우리는 부모 형제가 모두 죽고 남매만 남았다.) 무녀독남 귀한아들이(동생은 자식 여럿을 잃었다.)잔치를 한다고 하여 우리부부는 21년만에 고향에 다녀오게 되였다.
   자동차가 구비구비 령길을 내리며 100여리 긴산골을 빠져나가니 활ㅡ열린 고향땅이다. 두만강 건너 조선산발이 정겹게 안겨오고 저 멀리 남쪽 오성산밑에 내가 태여났다는 조선의 시가지가 아스라니 바라보이였다. 다섯살나든해 아버지목마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왔으니, 조선의 저 시가지도 나의 고향인 셈이다. 그후 40여년을 이곳에서 자라고 사업했으니 중국의 이 산골도 틀림없는 나의 고향이다. 나는 이곳도 저곳도 이 일경을 통털어 나의 고향땅이라고 생각한다. 타원형의 새강벌은 두만강때문에 두쪽이 되였을뿐이다. 오래간만에 고향땅을 보니 눈물이 쑥 나왔다.
   긴 산골을 빠지면 새강벌 초입이된다. 여기서부터 사방 10여리는 민흥촌구역이다. 우리조상들이 민흥에 터를 잡을때 붙힌 원래의 마을이름은 “솔은테미”였는데 왜놈들이 주제에 문자를 쓰느라고 “복흥”이라고 부르게했다. 그것을 광복후 새중국이 되면서 정치성이 좋고 선명한 “민흥”으로 이름을 고쳤다.
   1급 포장도로는 민흥마을 서쪽변두리로 빠졌는데 남쪽으로 30여리를 곧게 달리면 진소재지에 이른다. 도로 동쪽켠은 몽땅 두만강 연안까지 쫙ㅡ 펼쳐진 수전벌이고 서쪽켠은 비스듬히 산기슭에까지 닿은 한전벌이다. 산기슭에서 신작로까지 한전벌의 경사도는 심한 필지래도 10도를 넘지 않았고 거이 모두가 평전이여서 고향사람들은 새강벌을 신작로를 계선으로 수전벌, 한전벌이라고 불렀다. 이런지형은 진소재지까지 쭉ㅡ펼쳐지었다. 민흥촌앞에(남쪽)있는 두개의 촌도 민흥촌과 비슷한 지형이다.
   민흥촌 한전벌을 지나가면서 지금도 기본상 그대로 있는 대채전을 보니 저도 모르게 지난날을 회고하며 참괴함을 금할수 없었다. 상해에서 산다고 하기에(동생에게도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할수 있겠지만 래력을 따진다면 량심상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사는것이 고통 그 이상이다. 동생네며 일가친척, 친구들을 비롯해서 고향사람들과 만날일이 즈레 민망해 났다. 그러나 무슨수가 있는가… 그저 옛날일은 없은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괜찮게 사는듯이 젊잖게 우선우선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과 상면할수밖에.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광복후 우리집이 이고장에 이사를 온후 나는 여기서 자랐다. 소학교는 민흥마을에 있는 민흥소학교에 다니고 초중은 구정부(지금은 진정부)마을에 있는 13중에 다니였다. 초중을 졸업하자 나는 초급사 사원으로 되여 호미강댕이를 쥐게 되였다. 공부는 잘했으나 그럴수밖에 없은것은 너무도 가난한 집형편이 현성에 있는 고중으로는 도무지 갈수없는 상황이여서 나는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30여명이 졸업하면 두셋이 고중으로 갔다. 그때 사회에서는 영광스럽게도 우리를“귀향지식청년”이라고 했다.
   일손을 쥔후 얼마안되여 민흥촌 다섯개 초급사는 하나로 통합되여 고급사로 되였다. 고급사성립 며칠후 사(촌)에서는 귀향지식청년회의를 하였는데 당지부서기겸사주임, 부사주임, 단지부서기, 치보주임, 민병련장, 부녀주임, 회계 등등 모모한 높은간부들이 회의에서 격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들의 정치사상리론은 수평이 비슷해서였는지 아니면 들은소리가 모두해서 그것뿐이여선지 중점이 똑 같은 말을 하였는데 “사회주의새농촌 건 설에서 청춘을 남김없이바쳐 억세게싸우라! 앞장에서라! 당을따르라!”라는 세마디뿐이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설은 나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며 힘이 솟구치게 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령도의 지시라면 무조건 받들어 모시였다. 부모의 말은 듣지 않을때도 있었지만 령도의 말은, 지어는 개인적 심부름도 달갑게 선뜻 들었다.
   고급사로 된후 우리마을은 제3생산대로 되였다. 마을이름은 상강이지만 그때로부터 3대, 3대 하였는데 지금도 민흥촌3대(촌민소조)라고 부른다. 민흥촌 상강마을이 어딘가고 물으면 당지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머리를 기우뚱거린다. 상강이라는 마을이름은 아마도 력사에서 사라질것같다. 그러나 당년의 일들은 나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돌이켜 보면 영욕이 점철된 나의전반생이다.ㅡ
   나는 “사회주의새농촌건설을 위하여 청춘을 남김없이바쳐 억세게싸우며, 앞장에서며, 당을따른다!”는 인생좌우명을 세우고 항상 자기를 편달하였다.
   처음시작하는 농사일은 무척 고되였다. 일밭으로 나가라는 종소리만 울리면 세상모르고 고꾸라져서 자다가도 뛰쳐 일어나 일터로 갔다. 학교때 종소리만 들으면 교실로 달려가든 그모습 그대로였다. 아침밥을 먹지 못해도, 코피가 터지고 온몸이 시큰거리며 쏴나도, 목낭지(편도선염)로 아프고 열이나도, 감기나 속탈, 웬간한 병은 계속 벋세우며 고된일을 줄기차게 해내였다. 몸이 풀리고 일이 몸에 배면, 이 고비만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어도 나는 이악스레 일을 하였다. 온돌수리를 하거나 지붕이영을 이느라고 아버지가 일손을 거들라고 호통을 하여도 나는 대꾸질을 하면서 기어코 생산대일을 나갔다. 하여 “출근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귀향지식청년”이라고 차츰 평판을 듣게 되였다. 나는 다른사람들이 뜨직해 하는 어렵고 힘든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곧잘 자원해 나섯고 생산대일에 결석하는법이 없었다. 하여 해마다 모범사원이 되군하였다. 농민이 되여 이티후에는 청년단에 들었고 얼마후부터는 단지부서기라는 중책까지 걸머지게 되였다.
   향이 인민공사(전 향이 하나의 집체로 되는것)로 되면서 민흥고급농업사는 민흥대대라고 부르고 우리 상강마을은 그냥 3생산대라고 했다. 대대판공실(촌정부), 위생소, 공소사(상점), 정미소, 야장간, 소학교는 민흥마을에 있었는데 상강은 민흥과 8리나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지금도 대체로 그렇지만 모택동시대에는 농촌간부들이 보수도 없이 대단히 수고를 했다. 궂은일과 간고한 일에서는 앞장에 서야하고 좋은일과 향수에서는 뒤에 물러서며 회의는 여유시간에 즉 일을 못하는날, 쉬는날과 주로는 밤에 했다. 인민공사후 농민들을 사회주의건설에로 이끌며 공산주의로 달리는 속도를 다그치다보니 정치사상교육을 심입진행하고 계급투쟁을 고리로 계획경제를 바싹 틀어쥐게 되였다. 하다보니 정치사상학습, 문건전달학습, 생산포치, 수리공정, 치안, 삼림방화 등등 각종사업에 대한 층층의 령도간부회의는 두말할것도 없고 사원대회도 뻔질나게 자주 하였다. 일은 일대로 잘 해야하고 회의는 또 회의대로 어느것하나 계급투쟁성, 정치사상성을 띠지않은것이 없다보니 중대한 정치적임무로, 혁명적임무로 중시해야 할뿐만이니라 잘하여야했다. 그때의 간부들에게는 일보다 회의가 오히려 더 고된일이였다. 대대판공실에만 전화기 한대가 있던 세월이고보니 (민흥 촌은 지난80년대중반까지 줄곧 그랬다.) 대대의 크고작은 각종회의통지는 거지반 내가 뛰여다니며 해야했다. 저녘때까지 사원들과 함께 일은 일대로 하고 다섯개 마을에서 세개마을은 내가 뛰여가서 회의통지를 내야했다. 그 다리품은 적어도 20여리를 팔아야 한다. 비가 쏟아지거나 눈보라치는 날에는 꽤나 고생스러운 소임이였다. 누가 회의에 결석하면 다시가서 데려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 꾀병을 하며 회의에 오지않는 사람은 정말로 괘씸했다. 회의를 될수록이면 밤중전에 끝내기위하여(이튿날 일을 해야 하니까) 저녁에 통지를 빨리내야 한다. 그래야 빨리들 와서 회의를 하겠으니, 나는 저녁을 먹지않고 일밭에서 곧장 회의통지를 떠나기가 일수였다. 그리고 단지부서기다보니 거의 모든회의에 참가해야 했다. 하여 밤중이라야 집으로 와서 둥세(밤참)를 먹거나 때로는 그대로 꼬꾸라져서 잤다.
   인민공사화에 이어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자 그해가을 탈곡후(초겨울) 심경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대대들에서는 꾸물거리며 호응해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수전을 반미터이상 파고 북데기며 토비를 깔고 다시 덮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토지비옥도를 높히고 세작을 하여 무당 만근을 낸다는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무당 천근도 안뒬때임.) 하지만 지구, 현, 공사령도들은 심경세작을 하여“황하 장강을 뛰여넘고 만근관을 돌파하라”고 내리 먹였다. 당초에 성에서는 “그랬으면 좋겠으나…” 하였다는데, 성3급간부회의에서 지구와 현의 령도들이 버쩍 열이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기어이 한다고 우기며 창의서를 내고 붉은마음을 표달하였든 것이다. 각 공사령도들은 만근관돌파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군령장을 놓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월급을 타먹는 국가간부들의 대약진신생사물ㅡ 심경에대한 태도고 관건적인, 정작 춤을춰야할 대대간 부들이 “우경보수사상”이 엄중했다. 하여 현의 령도는 찌프를 타고 달려와 긴급히 공사3급간부확대회의(생산대, 대대, 공사)를 밤도와 소집하고 정치사상기압을 먹였다. 만약 심경에 대하여 뜨뜨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거나 꾸물거리면 대대에는 “백기”(락후단위)를 꽂고 대대서기와 주임은 모가지가 날아날(철직, 출당)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공사급까지의 간부들은 주먹을 굳게 틀어쥐고 땅땅치며 이발을 으드등으드등 갈며 맹세를 내렸으나 대대이하 간부들은 울상을하고 근심이 태산같아 하였다. 그들은 간부긴 하지만 우선은 농사군으로서 농사가 잘 되여야 먹고살겠는데… 이건 아무리 신생사물이요 혁명적산물이요 해도, 계급이니 로선이니 정치사상이니 하며 을러메도 농사를 망칠것이 번연한데, 이를 어쩌는가 말이다. 심경후 봄에 물을실으면 논판은 수렁판으로 될것이고 사람도 소도 들어설수 없을게 아닌가?! 그리고 벼뿌리가 반미터 밑에 있는 비료를 먹는가?! 하지만 당의 지시고 령도의 지시라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중들은 령도의 말을 잘 듣는다. 농민들은 생산대대장의 말도 법처럼 어려워하며 복종했다. 나는 더구나 그런 사원이였다. 대대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거지상을 하고 속은 여하간에 심경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여 다녔다. 이렇게 심경대회전이 시작되였다.
   어느날, 대대서기(대대주임 겸직)는 나에게 극히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혁명임무를 주었다. 심경대회전(전투처럼 막 밀어부치며 해제끼는것)을 하겠는데 민병련(대대는 민병련임)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전쟁터”는 5대의 찬물배기 논배미라고 하였다. 민병련장이 대장을 맡고 나는 지도원을 맡으라고 하였다. 이 찬물배기는 샘이 많아 버리다싶이 취급하는 논배미다. 공사에서 내려온 하향간부가 왜서 모든 생산대가 일시에 왁! 일떠나서 전쟁을 하지않고 이런식으로 하느냐고 아기뚱해하니 서기는 “유생력량을 집중해서 한뙈기 한뙈기씩 섬멸전을 한다.”고 둘러댔다. 공사하향간부는 신통한 전술이라고 칭찬하면서 어서 위성을 쏘라고 격려하며 좋아했다.
   까풀치기심경은 속도를 냈다. 우리는 대대령도의 “비밀작전”지시대로 북데기며 우사두엄을 논배미 이곳저곳에 무져놓고 논바닥은 반삽깊이로 파는둥 마는둥 하고는 흙을 고루 덮어 놓았다. 논판으로 들어와 파보지 않고는 까풀치기 한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찬물배미를 거이 “심경”하는 어느날, 공사령도간부들이 현장을 시찰하려 내려왔다. 그들은 붉은기가 날리고 400여미터 늘어서서 심경을 하는 장면을 보고 흡족해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공사심경대회전현장회의가 열리였는데 200여명의 회의군들은 논배미옆으로 난 수레길을 따라 유체고별식이라도 하듯 논판과 우리를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리고 소학교에 가서 반나절 회의를 하고는 뿔뿔히 돌아가 버렸다. 후에 생각해보니 비록 대대령도들의 까풀치기심경리유가 정당한것 같기는 했으나 그따위로 심경을 한것이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였다. “총로선파괴”, “대약진파괴”, “생산파괴”… 등등 정치모자를 씌우 는 날에는 감옥으로 가는길밖에 없었든 것이다. 다행이 아무말썽도 없었고 땅이 얼면서 부터는 심경대회전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현과 공사에서는 논판에 우등불을 피워 땅을 녹이면서, 남포질을 해서라도 동삼내 계속 심경을 하라고 우뢰처럼 소리를 질렀으나 비꼬치는 아예 끊어져 버렸다.
   얼마후 심경나팔소리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농민도 강철을 생산할수 있다!”는 괴상한 나팔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랜강”(강철제련)을 해서 영국을 따라잡고 릉가한다고 하였다.
   어느날 대대서기는 나를 불렀다. 랜강대회전을 해야겠는데 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지… 이번에는 유생력량을 진짜로 농업에 돌려야하는데… 10명 단원들로 묶은 전투대를 줄테니 랜강을 하라는 것이였다. 농촌일이라면 인분뇨로 영양단지 만드는 일까지, 이젠 막힘이 없는 한다하는 감농이 되였지만 랜강이란 전혀 감이서지 않는 임무였다. 지금까지 령도의 지시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해도 “예. 그럽지요.”하든 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난처해하니 서기는 “농사군이 랜강은 무슨 뚱딴지같은 랜강!... 궁냥껐 해 보아라. 뒷근심은 하지말고.”하는것이였다.
   나는 우선 초중학생들이 한다는 “투꼬루”(토용광로)를 견학하고 물리선생, 화학 선생에게 물은후(리론은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다면서 후과책임은 지지못하겠다고 하였다.) 대대철공소 야장쟁이를 스승으로 투꼬루 두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습깨진것, 무드러진 호미, 낫, 곡괭이, 쟁개비, 밥가마(집체식당이여서 쓰지않는 가마는 많았지만 한참씩 선전해야 뽑아 주었다.), 주전자, 양철물동이, 바게쯔며… 하여튼 쇠붙이라고 인정되는건 다 주어들였다. 랜강장에는 두어 자동차는 되게 페철무지가 생기였다. 우리는 망치와 메를 휘둘러 될수록이면 페철을 쪼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투꼬루가마에 집어넣고 풍구질로 석탄불을 땠다. 3ㅡ4일 밤낮 불을때며 역사를 하였더니 가마안의 쇠쪼각은 녹는것 같았다. 야장쟁이가 된것같다고하기에 달려들이 투꼬루를 마스고 랜강덩이를 뽑아 냈는데 어떤쪼각은 녹고 어떤쪼각은 바로 녹지 않아서 랜강한 쇠덩어리는 우죽뿌죽 붉지무레 검스레 한것이 마치도 집체식당에서 무우 시래기며 감자, 열콩을 그득놓고 지은 타번진 꼬량밥누룽지덩이 같았다. 신기해서 랜강을 자주 들여다보던 농민들은 “그것참! 언 돼지똥덩어리 같은게… 되게 무겁군. 랜강이 다르긴 다르다니.” 하며 감탄을 했다. 공사에서는 “인민공사 붉은사원 강철위성 쏘았네!”라는 절목으로 련며칠 유선방송을 하였다. 우리가 또 투꼬루를 만드는데(투꼬루가마는 일회용이다.) 공사에서는 이곳에서 랜강대회전현장회의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것이 갑자기 전화통지가 오기를 농민들이 랜강하는것을 잠시 중지하고 전면적으로 춘경생산대회전을 하라고 하였다. 그후 페철과 랜강덩이 두개는 현 강철창에서 실어가고 다시는 랜강하라는 말이 없었다.
   얼마후 집체식당을 취소하고“공산풍”을 시정할때 나는 쟁개비며 돼지뜨물가마, 밥가마, 숱가락… 령수증을 써주며 아낙네들과 할머니들 한테서 빈정거리는 욕사발을 실컷 먹었다. 그들은 나를 “랜강아주바이”, “랜강대장”하고 부르며 “랜강으로 비행기도 만들고 기차대가리도 만든다더니… 우리두 한번 앉아보기우.”“대포알을 만들어 영국을 깔아뭉개고 미국아덜 대가리를 부순다더니 다 죽였수?”하며 시까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하는짓인즉 전탕 개지랄만 맡아 한다느니, 고지식하고 우둔해서 서기 꾀임에만 든다느니, 약진인지 개방귄지, 식당인가 돼지굴인가… 만근관은 무슨놈의 죽어자빠질 만근관이야! 제길, 심경?! 개소리라구 해라. 위성은 또 무슨 개코같은 위성이! 흥! 랜강인지 개불알인지(가마를 뽑아다 두드려 마슨데 대하여 특히 격분하면서), 랜강이 어쩌구 저쩌구 밑궁기 벌개서 황연석탄을 다 퍼다가 때며 개지랄을 하더니… 인민공산지 인민고생인지 개지랄이 났어… 하고 때를 만났다는듯 말끝마다 “개”자를 넣어 침을 퉤!퉤! 뱉으며 모든 불만과 역증을 나와 해내였다. 사람들이 하하하 웃거나 맞장구를 쳐주면 더욱 기고만장해서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올렸다. 그후 내가 입당을 하고 대대당지부부서기, 대대부주임벼슬을 하게되여서야 별명이 사라지고 아버지 “반동언론”도 즘즉해 지었다.
   나는 3년재해 두번째해에 입당하고 “4청”이 끝난후 대대당지부부서기 대대부주임으로 되였다. 서기, 주임은 원래의 토개당원아바이가 그냥 하였다. 그는 나를 민흥대대의 믿음직한 후계자로 배양하려고 세심하게 왼심을 기울였다. 그의 일편단심은 민흥의 빈하중농들을 하루빨리 잘살게 하려는것 뿐이였다. 나는 로서기의 일거일동을 본보기로 따라 배우며 사업을 잘하여 공사와 현의 모범당원, 모범간부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의 나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공무사”하고 군중을 관심하는 당원다운 당원이였고 기층간부(인민의 공복)였다. 나는 간부들에게 주는 생산탈리보조공수도 사절하며 억척스레 로동을 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민흥소학교 처녀선생과 결혼을 하고 꿀같은 신혼의 행복을 누리였다. 그러나 밀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반란파들은 서기에게 불질을 했는데, 처음에는 가정성분문제를 걸고들었다. 해방전에 소수레가 있고 자작지도 몇뙈기 있은것이 부농 혹은 적어도 틀림없는 상중농일텐데 하중농으로 성분이 획분된것은 틀렸다는 것이였다. 당시 토개공작대에 붙어 다니며 교활한 작간을 피운거라고, 이실직고 탄백을 하라고 구호를 부르며 족치였다. 공사내 반란파들은 함께뭉쳐와(그들은 시종 극소수였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느니, 진리는 소수인에게 있다느니… 웨치면서 기세를 올리였다. 그들은 세상물정을 알지도 못하는 홍위병애들까지 끌고와서는 어록을 웨치고 구호를 부르며 서기를 투쟁하였다. 밤이면 골간분자들이 단지곰을 들이대며 박해를 하였다. 반란파들이 며칠동안 기세등등해서 날뛰며 서기를 못살게 굴자 무던한 농민군중들이 격분했다. 그들은 투쟁대회장에 몰려와 반란파들과 시비를 걸었다. 즉 그때말로하면 변론을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보황파라고하는 군중조직이 생겨났다. 보황파라는 이름은 반란파들이 몰아주며 붙힌것이다. 관점이 같은 대다수 군중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파라고 주장했다. 언귀정전, 많은 빈하중농들은 서기의 성분은 하중농이 옳다고 증명하고 나섯다.(서기네는 줄곧 민흥에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도대체 무얼하는 사람들인가? 왜서 생사람을, 좋은사람을 잡자고 들며 공산당의 간부를 잡자고 드는가? 너희들의 심보를, 목적을 말하라!” 하고 들이댔다. 반란파들은 입이막혀 부옇게 몰리우다가 부시시 물러갔다.
   며칠후 반란파들은 기세등등해서 다시 서기를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반란파인 민병련장과 부주임(경제문제와 작풍문제로 해서 4청에서 떨어졌다.)이 그때의 “비밀 작전”지시를 적발했던것이다. 그리고 3년재해후 극빈호에서 부업으로 송아지를 키워 생산대에 들여놓고 빚을물게한것도(당의 정책임) “류소기를 키웠다!”면서 죄장으로 덮어 씌웠다. 서기가 아무리 정당성을 변호하여도 반란파들의 궤변을 당할수 없었다. 그들은 “경하게 말한다면 까풀치기심경은 당과 상급령도를 기만한것이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총로선, 대약진, 생산을 파괴한것이다!”라고 했다. 송아지부업에 대해서는 “류소기를 키운것은 경하게 말하면 물질자극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소자산계급인 농민을 자본주의복벽의 길로 유인해가는 악랄한 수작이며(때문에 주자파다.) 류소기수정주의로선을 적극 추종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식으로 궤변을 고도의 높히에 끌어올리며 분석하고 정치모자를 만들어 씌우다보니 죽이지 않으면 아니될 죄가 몇십가지는 되는것 같았다. 반당, 반사회주의, 반혁명, 주자파(자본주의로 가는), 반모택동사상, 3반(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분자, 팽덕회의 앞잡이(항미원조에 갔다왔음)… 아무리 엄중하고 큰 정치모자라도 다 들어 맞았다. 그야말로 귀에걸면 귀걸이요 코에걸면 코걸이가 되는 판국이였다.
   서기는 공사에 틀고앉은 반란파들의 무산계급독재지휘부로 끌려가고 며칠후 나도 반혁명졸개라느니 수정주의 효자현손이라느니 하면서 잡아갔다.(나는 “보황파”를 이끌고 서기를 보호한 두목이였다.) 몇년전에 웨친 아버지의 “반동언론”에도 련루되여 말하자면 “련좌죄”로 졸경을 치루었다. 아버지도 무사치는 못했다. 대비판을 할때마다 거명되여 나왔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련루 되였다. 나를 철저히 잡자는 수작임을 간파한 아버지는 적비상장으로 반란파들과 대항 하였다. “그때세월 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어?! 저 부농령감네 말고는.(상강에서 한집뿐인 부농령감네는 아이고 어른이고 언행을 매우 조심했다.) 이동네 빈하중농치고 불평불만이 없은 사람이 누구야? 흥! 우리가 떠들었기 때문에 후에 많이 고쳐진거야. 니들이 뭘 개뿔이나 알구 아가리질이냐?! 다시 한번 나를 거들면 그때는 도끼쏸장일줄 알어!”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의아버지 말을 긍정한데서 아버지는 투쟁까지는 맞지 않았다. 되려, 무식하고 성질이 과격해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 좋은 령감이라고 칭찬까지 하였다. 그중 한가지 근거로는 아버지가 소를 구한것이 회고되기도 했다. 그것은, 3년재해 이듬해 갑자기 쏟아지는 골물에 뛰여들어 강변에 매여놓은 소 두마리를 끌어낸 사적이였다. 사람들은 소는 소고 사람은 사람이라며 큰일 난다고 아우성을 질렀지만 아버지는 바위돌이 우둥퉁 우둥퉁 굴러 내리는 골물에 뛰여들었든 것이다. 능청스러운 어떤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소를 살릴때두 그랬지만 저 령감은 말하면 말한대루 한다니. 조심해야 하우.” “늙은이들은 살만큼 살았다구 그러는지 무서분게 없다니. 저 령감이사 늙은이래두 기력이 여북하우.”하고 맞장구를 치며 은근히 반란파들을 위협 하였다. 반란파들은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그후부터는 나의아버지를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말로는 목이 터지게 붉은정권을 목숨으로 사수한다느니, 목숨으로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한다느니… 숱한 혁명적인 구호를 웨쳤지만 사실은 야심달성이 목적인데 그것보다 우선은 목숨이 더 중했든 모양이다.
   서기와 나는 “공사9 종인학습반”(일명 잡귀신학습반)에 갇혀 여섯달을 투쟁받았다. 그때 고깔모자, 개패, 비행기, 걸,책상위에올려세우기, 유둬(끌고다니며 투쟁), 물매까지… 온갖 모욕과 유린, 행패를 기껐 당했다. 나중에 서기와 나는 약속하고 모든 죄장을(정치모자) 몽땅 승인하고 모주석께 수백번을 청죄(비는것)한후 풀려 났는데 “비켜선간부”(결론을 내리지 않은 간부)로 되여 제방공정에 가서 로동개조를 했다. 넉달후 겨울이 되여 제방공정을 못하게 되자 공사반란파들의 무산계급독재지휘부에서는 우리를 집으로 돌아가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홀쭉해진 안해가 눈물로 반겨 주었다. 10달동안 그는 무척 마음고생을 했든것이다. 그것은 주로 나에대한 근심과 자기의 앞날에 대한 고민이였다. 학교에는 공사적으로 제일처음 반란의 기치를 들고나선, 공사반란파맹장(골간)인 녀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나의 안해를 리혼하라고 여러차례 담화하며 구슬렸다. 군관(부패장)으로 있는 아주 리상적인 좋은 대상자가 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 주었다. 그때는 군인들의 위신이 대단하였다. 여북하면 처녀들이 모택동사상, 주덕성격, 주은래인물, 해방군총각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였겠는가. (그 먼저는 해방군총각이 아니고 류소기리론이였다.) 녀선생이 이렇게 까지 나오자 가타부타 말이없든 나의안해는 처음으로 태도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는 격분한 목소리로 “나는 선생과 다른사람이니(부부가 모두 바람을 피우다 리혼했다.) 이런 너절한 짓거리를 더는 하지말고 선생의 앞건사나 잘하오.”하고 쏘아 주었다. 그러나 이악스럽고 창피를 모르는 녀선생은 집요했다.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번 끝까지 해 보자는 심보였다. 후에 그 군관은 일부러 휴가를 맡고와서(공사마을에 집이 있었다.) 나의안해를 보기까지 했다. 그날, 녀선생은 공사독재지휘부에서 보잔다고 하며(이런일이 여러번 있었다. 나의문제를 적발하며 계선을 가르라고 하였다.) 나의안해를 꾀여 군관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말하자면 선보기를 시키는 판인데 그런줄은 꿈에도 모르고 따라간 나의안해는 더없는 모욕감에 격분하며 선자리에서 침을 뱉고 나왔다고 한다.
   10달만에 만난 그날밤 내가 만약 반혁명으로 처리를 받는다면, 감옥으로 간다면 어쩌겠느냐고 물으니 안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게 아닌가! 그에게는 이미 확고한 주대가 있었든 것이다. “무기도형이면 생활의 핍박을 접수해야겠지요. 하지만 상처는 한평생 나를 괴롭힐 겁니다. 그외의 경우는 모든것을 감내할겁니다.”나는 안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를 꼭 행복하게 하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하였다.
   그날밤, 나는 획기적인 기적적인 발견을 하였다. 그것은 나도 꼭 국가간부로(월급쟁이) 되여야하며 령도자로(적어도 그군관을 초과하는) 되여야한다는 깨도였다. 반란파골간들을 아래로부터 위까지 아는데까지 하나하나 짚어보니 모두가 자기들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혈안이되여 날뛰였고 한자리 씩(벼슬)하였고 득세하였든 것이다. 깃발은 보기좋게 당과 혁명을 내 들었다. 나라고 왜서 그렇게 못하겠는가!... 나는 갑자기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것 같았다. 내가 나가야할 앞길이 환히 보이였다. 그야말로 순간의 발견이였고 순간의 전변이였고 비약이였다.
   이때로부터 나의 좌우명은 “사회주의새농촌건설을 위하여”가 일약 “일체는 나를 위하여”로 바뀌였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하여 분투하는” 내가 되였다.
   나는 자진해서 대장과 토론하고 똥수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다니며 마을과 학교의변소를 치고 인분뇨로 토비를 만들었다. 생산대에 두사람을 붙혀달라고하여 “상년적비조”를 만들었는데 토비료무지가 집체우사 두엄무지보다 더 컸다. 이것이 신생사물로 인정되여 대대, 공사의 현장회의까지 하게되였다! 비켜서 처리를 기다리던 문제인물은 대뜸 령도의 긍정과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되였다. 첯작전이 멋드러지게 성공 하였다. 그후, 군중파벌은 모주석의 교시대로 대련합을 하고 “혁명과 생산을 틀어쥐는 지휘부”(일명 생산지휘부)를 건립하게 되였는데 나를 주임으로 추천하였다.(전쟁판에 갔다온 서기는 부상당한것과 풍습, 위병이 도지여 병석에 누웠다.) 추천할때 반란파였던(녀선생도) 사람들은 나의정치사상각오를 촉동해 주었다고. 혁명적간부를 배양한 저들의 공로가 크다고하고 보황파였든 사람들은 원래부터 좋은간부였다고 시비아닌 시비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에게 좋게 보이자고 하는 그들이 모두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량심상 미안하였다. 그러나 할수 없는일, 나는 엉큼한 량면파로 되여 야심을 꾹 품고 달려들었다. 이제부터는 전형적인 야심가로, 량면파로 될것이다. 나는 군중의 비위도 맟추고 상급의 환심도 사기위하여 의식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꺼리지 않고 반란파 이상으로 날뛰며 노력분투하기 시작했다. 일체의 비무산계급적인것들을 철저히 박멸한다는 전례없는, “위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대풍대랑속에서 림표, 강청같은 야심가들의 출현은 더 말할것도 없고 나와같은 일개 농촌청년도 되려 능히 야심가로 비약될수 있었다는것은, 그 시대적배경과 무대가 문화대혁명이였다는것은 그야말로 어찌보면 응당한것으로 문화대 혁명에 대한 풍자이고 력사적희극이였다.
   이듬해, 대대혁명위원회가 성립되면서 나는 주임, 서기로 당선 되였다. 그리고 잇따라 공사혁명위원회부주임, 공사당위부서기를 겸하여 맡게되였다. 정식국가간부로 넘는것은 시간문제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표현기교에 달린문제였다. 나는 예리하게 기회를 포착하며 “업적”을 쌓기에 더욱 혈안이 되여 맹활약을 하였다. 크고작은 기회를 만나기만 하면(만들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도금칠을 하기에 기를 썼다.
   혁명위원회는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 배우라”는 모주석의 지시를 억세게 틀어 쥐였다. 상급에서는 대채를 따라 배우는 아주 중요한 일환과 표징으로 제전건설(다락밭.보통 대채전이라고 함.)을 강력히 추진할것을 요구 하였다. 기회가 왔다! 나는 신작로 서쪽켠에 10여리 펼쳐진 민흥대대 한전벌을 몽땅 대채전으로 만들것을 결심하였다. 상급의 요구는 매개 생산대에 대채전이 꼭 있어야하고 만들밭이 없으면 우정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것은 “위대한 모택동사상…”(20여가지 위대가 있었다.)에 대한 립장, 태도, 각오문제로서 정치적, 혁명적 임무라고 하였다. 또 “공산주의혁명의 수요…” 등 무슨 무슨(역시 20여가지가 됨) 수요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나에게있어서 그것은 동풍이였고 급시우였다. 나는 평전이나 다름없는 민흥대대 한전벌을 몽땅 대채전으로 만드느라고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였다. 제전과 제전의 층차를 한미터 이상으로 만들었으면 더욱 그럴듯 하겠으나 그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일이고, 하여 반미터 층차로 내리 먹였다. 남포로 바위를 까서 돌을 실어 들이고(한사람이 사고로 죽기까지 했다.) 소학생과 부녀들을 내몰아 강변에 가서 돌을 주어오게 했다. 자판이 그렇게 좋은 민흥의 한전벌에는 끝내 구렝이같은 돌둑이 50미터 간격으로 10여줄 뻗고야 말았다. 간부와 군중들의 비난과 의견은 정치방망이를 휘둘러 압제하였다. 서기는 나를 불러 “이렇게 하면 앞으로 기계화에 불리하고, 수전으로 풀수도 있겠는데… 이건 민흥의 빈하중농과 후대들에게 큰 죄를 짓는것이다.”고 하면서 상급에 잘 청시해서 그만두라고 하였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였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서기와 다른 당원이였고 간부였다.
   대채전대회전을 절반쯤 한후 전 공사의 3급간부들을 불러다 현장확대회의를 요란하게 하고 총동원을 호령했다.(그러나 대채전건설은 극히 미미했다. 린접 대대들에서는 대항하며 끝내 하지 않았다.) 현에서도 잇따라 이곳에 와서 현장회의를 했다.
   민흥의 대채전이 다 된후 군복을 입은 지구와 성 혁명위원회 주임께서 친히 시찰을 왔었는데 높은분들이 다르긴 달랐다. 찌프차를 신작로에 줄느런히 세워놓고 새하얀 위생수갑을 낀 손에 망원경을 들고 시찰을 하는데, 그렇게 풍채름름하고 멋있을 줄이야! 나는 침을 한발이나 흘리며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좌우명을 더욱 되새기며 윽별렀다. 령도들은 풍채뿐만 아니라 정치안광도 높고 예리했다. 그들은 “대채전도 잘 만들었지만 기층당원과 간부들, 빈하중농들의 혁명적정신, 대채정신이 민흥에 뿌리박은것은 더욱큰 성과다.”라고 높히 찬양했다. 내가 “원래는 평전이나 다름이 없는것을, 손실은 일정하게 보면서도 사상상 인식상의 저애를 물리치고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견지하여 대채전을 일떠 세웠다!”고 하니 수장들은 “옳다! 우리는 사회주의풀을 요구할지언정 자본주의곡식은 요구하지 않는다. 모택동사상과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드팀없이 따르면 승리한다.”고 말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숱한 사람들이 강박에 끌려나와 엄동의 호된추위에 떨며 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면서 모진고생을 하여 만들어 놓은 민흥의 대채전은 나의 빛나는 “정치업적”이 되였다. 하지만 민흥의 대채전은 두고두고 비난의 화제에 오르고 타매의 대상은 두말할것 없이 나였다. 민흥 앞마을 대대주임인 로궈는 나만보면 “어이! 티탠대장, 티탠대장”(제전. 밭을 차 버린다는, 못쓰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악용.)하며 이죽거렸다. 그것이 나의 별명으로 되여 널리 “애용”되며 오래동안 붙어 다녔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코웃음을 치며 야심을 하루속히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 박차를 가했다.
   두달후 나는 현혁명위원회 농업주관 부주임으로 벼슬이 올라가고 국가간부로 넘었다. 현의 령도에서는 집까지 현성으로 이사를 하게 하였다. 안해는 산골소학교의 보통교원 으로부터 일약 현성 중심소학교의 교도주임으로 되였다. 아버지는 현병원 온수방일을 하게 되였는데 국가공인으로 되였다. 나는 어머니도 도시호구로 상품량을 타게 하였다. 돌이켜 볼때 이쯤에서 나는 응당 자률해야 했다. 그런데 단맛을 본 나는 오히려 “일체는 나를 위하여!”라는 좌우명을 더욱 가슴속에 새기게 되였다. “나를 위하여 억세게싸우고, 앞장에 서고, 당을따르게” 되였다. 사람들은 나의 표면현상에 미혹되여 초유록식간부라느니 하기까지 하였다.
   부정부패의 길에서 처음에는 피동적으로 콩자루며 닭마리 술병을 받아 먹고 하루에 두끼는 연회를 얻어 먹었는데 얼마후부터는 주동적으로 뢰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을 요구하면 무엇이 곱절로 생기고 무슨일을 부탁하면 무슨일이 해결되였다. 탐욕은 재빨리 팽창하며 하루가 다르게 담이 커졌다. “집이 협착해서…”하고 혼자말처럼 넌짓히 말하니 250평의 새집이 고급장식까지 겯들여 헐값으로 생기였다. 삼성액정텔레비가 좋더라고하니 그날로 객실에 우사대문짝 같은 텔레비가 놓이였다…. 부정부패가 좋긴 좋았다. 부정부패의 단맛에 은이 박힌 나는 그것에 습관화가 되였고 더욱 탐욕이 팽창하게 되였다. “담이 작은 놈은 굶어죽고 담이 큰 놈은 배가 터진다.”는 말을 나는 좋게만 풀이하며 웃음집이 흔들흔들해 하였다.
   사람이란 무슨일에 골몰하면 “도”가 트는 법이다. 말은 잘해도 글이 짧은 나는 게다가 나이도 먹었기에 벼슬길에서는 크게 쳐다볼것이 없다는 판단이 섯다.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 되면서 현정부에서는 돈벌이 구멍수로 무역공사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거기에 은근슬쩍 3산업도 경영케했다. 살펴보니 먹을알이 상당한 기름진 노다지였다. 나는 상, 하급과 인맥관계 건립에 신경을 써 왔기에 쉽게 노다지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무역공사 총경리로 된후 나의 탐욕의 주의력은 돈에 쏠리였다. 정부이름을 건데다가 나의 수완 또한 좋아서 세상천지에 거침이 없었다. 공사의 경제효익은 나의 생각보다 놀랍게도 훨씬 높았다. 사무청사, 다공능호텔을 짓고, 3산업을 확대하고, 직원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장금을 풀고, 승용차, 화물차를 사 들이고, 지방무역을 벌이고, 유관부문과 관련인사들에게 금일봉을 넣어주고… 이러는 행각에서 나는 기껏 사복을 채울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녀자들도 은밀히 가까이 하였다. 5년여, 나는 온갖 기교를 다 발휘하여 백만장자로 되였다. 그러나 항상 뒤가 켕기는 불안을 떼여 버릴수 없었다. 일단 걸리는 날에는 그 어느”형제”도 나를 도와줄수 없는거고 일락천장, 패가망신, 감옥행을 할뿐이다. 부정부패는 무서운 고통이였다. 도둑놈 죄진놈이 발편잠을 잘수 있는가. 작작먹고 가는똥을 누라는 말이 그토록 심각히 느껴질줄을 몰랐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당초에 그러지 말것을!...후회막급이였다. 그러나 멈추지 못했다. 탐욕과 요행심리는 나를 번마다 꼬드기였다. 지금까지 별일이 없지 않았는가... “배경”과 “울타리”가 든든하지 않는가… 기로에서 나는 너무도 멀리 나갔다. 때론 생각해보기도했다. 내가 왜서 이렇게 타락하였는가? 그것은 사회풍기도 아니였고 그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도리를 몰라서도 아니고 법과 규률을 몰라서도 아니고 당의 교육이 적어서도 아니였다. 경종은 우렁차도 나는 듣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하나 나의 악렬한좌우명ㅡ “일체는 나를 위한다.”는 “사심”과 “탐욕”의 작간이였다. 나는 더는 당의간부, 정부의 령도간부가 아니였다. 인민의 공복이란 더욱 운운할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후안무치하고 철면피한 철두철미한 량면파로서 교활하고 능청스러운 위군자였고 가증한 부정부패분자였고 엄중한 탐오분자, 범죄자였다. 나는 완전히 타락하였고 변질하였다.
   재미나는 골에서 범이 나온다. 죄가 차면 벌을 받기 마련이다. 끝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뒤를 캐자는 눈치가 보인다는 귀뜀이 들어왔다. “형제”들은 나를 빨리 사라지라고 독촉했다. 쉬ㅡ쉬ㅡ할때 얼른 손을 쓰라는 것이였다. 나는 주동적인교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죄가 너무도 컸고 “물어넣어야 할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다른사람은 다치지 말라는 “은근한 충고”도 자주 있었다. 배반에는 징벌이 따른다는 “섬뜩한경고”도 있었다…. 법이 무섭고 죽기도 감옥도 싫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 주동적인교대를 단념하였다. 나는 “사라지기로” 출로를 잡았다. 부랴부랴 달아다니며 퇴직수속을 하였다. 퇴직은 순조롭게 비준되였다. 안해도 퇴직을 하였다. 그리고 북경으로 “잠적” 했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 보태자면 세태염량에 대한 군소리다. 나에게는 “요물”(화냥년), 어중이 떠중이 “개동무”, 진짜배기 부정부패분자 “형제”가 한둘이 아니였다. 내가 비밀리에 퇴직수속을 서두를때 그들은 모두 똥묻은개를 꺼리둣 나를 피하며 꺼려했다. 벌거벗고 먼저 달려들던 “요물”들은 나만보면 낯짝을 반짝 쳐들고 쌩! 지나가지 않으면 싸이나 먹은 까투리새끼처럼 외목을 탈고 피해 버렸다. “개동무”들은 머리를 한번 끄떡하거나 눈을 한번 찔끔하면 그것이 전부였다. “형제”들은 아예 생면부지로 싹 변해버렸다. 부정부패의 시궁창에서는 구데기처럼 상호간의 리용만 있을뿐 추호의 인간성도 없다. 그들은 서로 믿지 않는다. 일단, 자기에게 불리하면 외면하고, 함정을 파고, 죽여버린다. 이것이 부정부패시궁창의 구데기생리다.
   먹지말아야할 술은 먹지말며, 가지말아야할 곳은 가지말며, 가지지말아야할 돈은 가지지말며, 친하지말아야할 사람은 친하지말며… 당에서 거듭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사람은 누구나 다 해야할일과 하지말아야할일, 원칙과 비원칙, 시비곡직을 모르는바가 아니다. 이것은 후천적 본능이다. 사람은 자률력이 있으며 정의를 주장하고 따른다. 인간세상은 바로 그래서 발전한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은 리기와 탐욕의 유혹, 요행심리를 물리치지 못한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번연히 알면서도 요행을 믿으며 칼물고 뜀질을 했든것이다.
   나는 탐오한 거액의 돈을 밑천으로 북경에서 “은둔”하고있었다. 그러면서 면목있는 사람들을 만날가봐 항상 쥐처럼 조심하며 살았다. 마음은 늘 사냥군에게 쫓기는 노루였다. 영 불안해서 견딜수 없었다. 우리부부는 외계와의 련락을 일체 두절하고 출입을 극력 삼가하며 숨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했다. 산해진민들 살로가며 시몽스침댄들 잠이오랴. 나갈데도 없고 말동무도 없었다. 감옥이 따로 없었다. 신경성고혈압, 완고한 두통, 당뇨도 나타나고 심장은 쇠꼬챙이로 쑤시는듯 아팠다. 악몽과 실면, 심한변비, 오장륙부 성한곳이 없었다. 고급명약이며 비싼 보건품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안해도 같은 상황.) 전문가 교수들도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우리의 병은 근원이 마음속에 있었든 것이다… 제구실하는 자식 한놈 없고… 가끔 안해가 가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못된놈 곁에 앉은것으로 해서 벼락을 맞은거 아닌가! 그는 나를 만류하며 근심하며 애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속이였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모든것을 알았을 때에는 너무도 늦었든 것이다. 하여 나와 함께 도망을 치고 이런 처지가 되였다. 정직하고 내성적인 안해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려났다. 내가 그를 해쳤다. 우리는 두집 부모님들이 사망해도 얼굴 한번 내밀지 못했다. 지금 우리부부는 누가 누구를 돌볼 경황도 못되였다. 머리를 끈으로 동이고 온하루 서로 말한마디 없이 누워있는것이 업이다. 우리에게는 때론 치매현상도 나타났다… 생각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어느때 어디서 덥석 덜미를 잡히우겠는지, 그 한가지 공포 뿐이였다. 누가 알랴!... 후회하고 참회한들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후회와 참회를 금할수 없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끝없이 후회하고 참회한다. 나를 이끌어 주던 로서기에게 미안하다. 연약한 안해에게 미안하다. 당과 인민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비참한 말로였다. 응당한 것이다. 제손으로 자기의 일생을 망치였다. 누구를 탓하랴!...
   고향사람들은 나의 내막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총명하다. 군중의 귀와 눈은 밝다. 비밀이란 없다. 잠시 말하지 않을뿐, 밝히지(고발) 않을뿐이다. 지금세월에(정보화시대에) 누가 다른사람의 내막을 넘겨짚지 못하고 짐작하지 못하랴… 고향사람들은 반갑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들과 만나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동생네 잔치때문에 할수없이 뻔뻔스레 얼굴을 쳐들고 요행을 바라며 모험을 하였다. 그리고 죽던지 살던지, 죽기전에 고향산천을 한번 보고 싶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수건을 감고 굵은테안경과 마스크를 걸고(안해도) 길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심했다… 잔치가 끝나면 인츰 도망치리라. 사람들은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할것이다.ㅡ
   참! 이거, 도대체 무슨 꼬락서닌가?!... 이렇게 사는것도 사는 것인가?!... 지금 나는 법과 규률과 도덕이 얼마나 고맙고 귀중한가를 그리고 또 얼마나 무서운가를 수시로 느끼고 있다. 떳떳하게, 광명정대하게, 깨끗하게, 자유롭게, 마음껏 활개를 치며 사는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절히 느끼고있다. 그것은 당의 말대로 살면 어렵지않게 이루어지는것이것만!!... 법률과 규률 아니, 최저의 도덕선만 지켜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것을!!… 내마음(사상)하나 먹기에 달린것을!!... 량심만 지키면 되는것을!!... 오호애재.(아아슬프도다.) 나는 늦었다! 나의 한생은 이렇게, 수치스럽게, 공포속에서, 고통속에서, 고독과 적막속에서, 소리없이 끝날것이다. 요행 잡히지만 않는다면… 소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도 하지만 나에게는 고칠 외양간도 없다. 부처님, 하느님께 용서 빌 체면도, 용기도 없다. 이제 와서 그들인들 무슨수가 있겠는가. 선에는 선보가 있고 악에는 악보가 있는것이다. 누가 비렬한 짓거리를 하라고 했든가!... 탐오한 돈도 바닥이 난다. 어서 죽기를 고대한다…
   지금하는 모든소리가 행차뒤 나발인것은 알지만 그래도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혼자서 넋두리를 자꾸한다. 정신이 나드는건가…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나의 전철을 절대로 밟지 마시소. 진심으로 권고 합니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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