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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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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 푸른물결
2013년 12월 09일 12시 46분  조회:2343  추천:0  작성자: 회령
              실화
                                                      목단강 푸른물결
                                                                                                                  회령
   왕장수아버지는 목단강시 량식창고 회계였다. 어머니는 량식배급소에서 일했는데 그때 세월로는 무척 포실하게 잘사는 집이였다. 계획경제시대 시장도 수수밥에 강낭떡을 혁명정신을 아로새기며 먹어야 했지만 장수네는 이밥에 밀가루를 먹었는데 장수는 그외에도 매일 염소젖을 한병씩 먹었고 고기반찬과 사탕과자와 과일을 별로 떨구는 때가 없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량식창고 가공창에서 나오는 내뱃겨 (보드라운겨)를 몇마대씩 빼내서는 시교 농민들에게 돼지사료로 주고 세량을 받아 먹었는데, 령도층들이 “적절한방식”으로 했기에 아무 말썽도 없었다. 그리고 통장에 남는 잡량도 보리고개에 농민들한테 뀌여주고 세량을 받았다. 집에는 콩기름도 남아 돌았다.(한달 일인분1량 공급이였음) 왕회계는 까근하고 또 조심성이 많아서 장부에서 차실이 없었고 항상 선진공작자에 뽑혔다.
   같은또래들이 “왕장수 개장수”(조선애들이 붙인것)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장수의 이름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왕회계부부는 선후로 아이를 셋이나 잃고 네번째로 장수를 보았는데, 복술에 유명하다는 늙은이가 사주와 용모 손금을 자세히 본후 장수(오래 삶)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아래로는 더 생기지 않고 장수만 잘자랐다. 장수는 하야말쑥한 얼굴에 귀였게 생긴애였는데 얌전하고 총명했다. 그는 두말할것도 없이 왕회계부부의 무녀독남 장중지보옥이고 자랑이였다.
   장수는 고중때부터 감실감실 코밑수염이 나기 시작하드니 어느새 준수한 미청년으로 성장했다. 처녀동창들이 은근히 추파를 보냈으나 그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학습에 열심했고 교규를 참답게 지켰다. 선생님들도 장수를 퍽 좋아하며 사랑했다. 반주임선생님은 로동만 있으면 장수를 쉬운일에 배치하거나 휴식을 주었다. 장수는 생산대(지금의 촌민소조)농업지원에 한번도 나간적이없다. 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로동이란건 한번 해본적없이 특수보호, 과잉보호속에서 애지중지 자랐다. 부모들이 선생님들과의 관계처리를 원활히 잘한데서 입단도 순조롭게 하였다.
   1962년 졸업을 한달가량 앞두고 시인민무장부에서는 모 공군부대와 배합하여 항공비행학원생 모집을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청년들의 참군열정은 항상 기세 높은데 공군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신비의 세계였고 부러운 곳이였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멋진가!... 장수는 3백여명 지원자들속에서 단연 일등으로 순조롭게 합격되였다. 명액은 2명인데 장수만 합격 되였든 것이다. 학교와 사회는 특대회사로 흥분하고 감탄하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장수가 부대로 떠나가던날은 목단강역전이 법석 끓어 번졌다. 그야말로 고향땅에 다녀가는 개선장군을 환송하듯 했다.
   장수는 산서성에 있는 부대학교에 도착하는 즉시 군복을 갈아입고 긴장한 입대 교육을 받게 되였다. 오줌눌새도 없이 몇시몇분으로 딱딱 짜인 작식제도, 틀에 맞춘 모든격식, 지어는 이불개이는것 모자 쓰는것까지도 규정이 엄격했다. 일요일에만 외출을 허락하는데 외출은 한개 중대에서 3명을 초과 못하며 사전에 서면으로 청시보고를하고 비준이 내려져야 외출을 하며 3명이 함께 나갔다가 함께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귀교 보고를 또 서면으로 즉시 해야했다. 3명이 차지 않으면 외출을 못하며 외출구역이 또한 제한되여 있었다. 교육은 크게 두개방면이였는데 8시간은 대렬정돈과 보법 등 행동규범 훈련이고 밤 두시간은 각종규정, 규칙과 사상정치 학습이였다. 입대교육은 이찌도 호되고 엄격한지, 눈알 한번 잘못 굴리거나 입술을 피뜩 움직여도 대뜸 불호령이 벼락같이 떨어졌다. 두번까지는 불호령이고 세번째는 벌이였다. 벌은 자기위치에서 나와 파고박은 막대처럼 차렷! 꼿꼿이 서 있는것인데 보통 30분 내지 한시간, 교관의 기분에 달린것이다. 식사는 당시로 말하면 나라님급이였다. 입쌀과 밀가루 우동이 주식이고 닭알은 이틀에 한번, 고기소만두 돼지고기 물고기는 일주일에 한번이였다. 그런가하면 신선한 각종 과일도 자주 먹었다. 목욕과 영화관람은 일주일에 한번이고 리발은 한달에 두번이였다. 훗날 “3년재해”라고 일컷은 그시기에 이런세상은 참으로 별천지였다. 사람들이 공군을 부러워한데는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씽씽날며 적들을 깔아뭉개고 조국을 지킨다는 높은차원의 각오도 있었지만 이밥에 고기랑 잘먹고 대우가 좋다는 생각에서기도했다. 신병들은 성수가 나서 교관의 명령에 번개같이 움직였다. 생기발랄하고 씩씩한 기상들이였다. 일매지게 끌글한 군인들이였다! 말그대로 “엄숙, 활발, 단결, 긴장”한 특수대오였다.
   그러나 장수는 죽을맛이였다. 처녀들까지도 부러워 죽겠다는 항공비행학원이 이렇게도 고되고 무미건조할줄은 몰랐다! 부대에 간날부터 장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는 이런 단락이 있다. 
    막심한 후회가 된다. 다른대학에 갔드라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했겠는가!... 조롱속에 같혔다. 고기먹고 좋아하는 저 농촌애들,   촌   빠위투보재(산골두더지) 우물안의 개구리…나는 넓은 세상에서 멋지게 살고싶다. 북경대학 정치계로 가는건데… 졸업하면 뜨르르한 령도가 되고.. 인생은 자기것이다. 누구의 명령에, 지휘에 복종해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노예가 아니다. 자기의 앞날은 자기가 개척해야한다. 소리치고 걸을줄밖에 모르는 왕반장!(교관) 나만 훈계해?! 아는것이 너, 몇개나있니? “앉잣! 섯! 차렷! 우로! 좌로! 보고!” 그외에 무엇이 또 있니? 게사니처럼 꽥꽥 소리나지르고. 너나 부지런히 보고해라. 꼴같잖은 주제에. 오줌누는것도 보고하고 똥싸는것도 보고하고… 잘한다. 멋있다. 오늘도 열번은 더 호통을 받았다. 왕바당! 아! 어떻게 할것인가…
   자유로운 세상이 너무도 그립다… 마음껏 나래칠수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겠다. 아! 자유여…
   그의 일기는 후회와 비애 절망, 불평과 불만 분노, 앞날에 대한 고민과 사색 이러한것들의 반복이고 련속이였다. 일기장은 그가 대화하는 유일한 벗이였고 위안이였다.
   한달조금지난 어느일요일, 장수는 깜쪽같이 사라졌다. 신병을 잃어버린 학원은 벌컥 뒤집혔다. 부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시내를 샅샅이 뒤지는한편 목단강시 인민무장부에 즉각 전화련락을 하였다. 장수는 집에 있었다. 학원에서는 간부 두사람을 파견하여 장수를 데려갔다. 그들은 선처를 거듭 부탁하는 장수부모들을 좋은말로 안심 시켰다. 장수부모들은 한턱 잘 먹였으니, 그리고 학원령도들께도 한방 잘 쏘았으니 별일없을거라고 시름을 놓으면서도 개운치는 못했다.
   장수의 도피행각은 부대와 목단강시를 들썽해 놓았다. 사람들은 장수를 한심해 하기도하고 애석해 하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의 간절한 바람대로 정말 별일이 없었다. 장수는 부대에 잡혀간후 반에서 한번 비판을 받고 지도원한테서 한차례 교육을 받았을뿐이다. 그의 자아검토도 꽤 좋았다. 아무런 처벌도 없었다. 부대의 처리는 너무도 따뜻하고 너그럽고 고마웠다. 학원령도에서는 장수네반이 년도선진반 평의에 참가하는 자격을 취소한다는 결정만 내렸을 뿐이다. 령도들은 사건을 상급에 보고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들로서의 리유가 있었을것이다.
   그후, 입대교육이 석달째 되던 어느일요일 장수는 입대교육 석달기간을 끝내 견디지 못하여 또 도망쳤다. 그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사자리사상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것이다. 그리고 적으마한 고생에도 그는 저항력이 너무도 없었다. 그런가하면 자기위주의 고집은 또한 너무도 심했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들의 신통력이였다. 그의 생각은 단순하고 유치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장수는 셈이 들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것은 후천적으로 형성된것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않을수 없다. 이번에는 학교도, 장수도 어물쩍 넘어갈수 없었다. 장수는 전 교 사생대회에서 호된 비판을 받고 군적, 단적캐출(제명 자격박탈)을 맞은후 본지로 압송 되였는데 며칠후에는 로개소로 끌려 갔다. 학원은 군단내 년도선진단위 평의 참가자격을 취소당했다. 그러나 다행한것은 이상하게도 상하어느령도도 처벌을 받지않은 것이다. 장수는 또 한번 목단강시를 들썽해 놓았다. 이번에는 장수는 두말할것도 없고 그의 부모 지어는 시고중까지도 사회여론에 올라 타매의 대상으로 되였다. 장수가 로개소로 끌려간지 넉달이 지나 그야말로 엎친데덮친격으로 왕회계는 “4청” 시점에서 경제문제로 단위에서(공직에서) 캐출당했는데 그들은 시교에 농촌하방호로 아예 쫓겨갔다.
   장수는 로개소에 끌려간후 개조표현이 좋아서 자주 표양을 받았다. 하여 3년기한을 반년 앞당겨 집으로 돌아왔다. 20여호의 편벽한 농촌마을은 사람들이 생활은 궁핍해도 인심만은 무던했다. 그들은 장수네를 차별시 하지 않았다.
   장수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되였다.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셈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시대를 따라야한다. 당시의 시대적요구는 사람마다 대공무사 (공적이고사심이없음)하며 일체를 당에 바치며 당의 지휘에 절대복종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자기는 명령에 죽고사는 군인으로서 너무도 엄청난 착오를 범했던것이다. 그는 조직의 처리가 참으로 관대하다는것을 뼈저리게 깊이 알았다. 장수는 생산대일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부지런히 고중학과를 복습하였다. 일밭으로 나갈때도 책을 갖고 다니였다. 그의 책은 어느것이나 첯장에 “북경대학으로!!!”라는 구호가 씌여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출발의 목표였고 오매불망 잊지못하는 간절한 념원이였다. 역경속에서도 피고있은 청춘의 황홀한 꿈이였다. 그는 명년 (1966년)에 대학시험을 치리라 작심했다. 그러나 장수는 자기의 뒤통수(당안)에 “육체로동 외의 다른 출로는 주지못함.”이라는 뻘건도장이 찍혀 있음을 몰랐다. 마을사람들은 장수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칭찬하고 부러워 했다.
   1966년 중국에서는 세상이 다 아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발동 되였다. 시고중홍위병들은 “파4구”(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때려부쉬는것)에 재미들어 날뛰다가 잇따라 선생님들에게 대자보 불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달가량 지났을가 그 다음은 “요물잡귀”(문제인물)를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여 총력을 집중했다. 이 고비에서 장수는 재수없게 멱살을 잡히웠다. 그의 천추에 용서못할 만악의 죄장으로는 “목단강 혁명청년 나아가서는 중국의 모든 혁명청년들의 얼굴에, 신성한 공산주의청년단 조직에, 위대한 중국인민해방군 대오에 먹칠을 한 가장 수치스럽고 비렬한 도주병, 변절자, 반혁명, 자산계급, 수정주의 후계자 전형”이라는 것이였다. 그는 학교에 끌려가서 갇혀 있으면서 고깔에 개패까지 걸고 단독으로 혹은 다른사람들과 함께 무자비한 비판두쟁을 받았다. 그리고 온갖 “요물잡귀”들과 함께 거리로 끌려 다니기도 했다. 계급투쟁 열정이 하늘끝까지 치솟은 홍위병들은 마침내 그의 부모들까지도 잡아왔다. 반혁명분자새끼를 낳은 년놈이니 그들도 뛸데없는 반혁명분자라는 론리였다. 그야말로 계급의적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철저히 소멸하는 혁명기세였다. 훗날의 평론이지만 목단강시에서 이런 봉변을 당한 가정은 유일무이 장수네집 뿐이였다.
   그해 년말부터 투쟁의 예봉은 집권파에게로 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장수네 세식구는 철저히 때려잡은, 이젠 완전히죽은, 멸망된 “요물잡귀”라고 판정 받아 공사(향)군중독재지휘부에 넘겨졌다. 그들은 공사내를 한바퀴 끌려다니며 또 혹독한 비판투쟁을 당한후 다시 대대(촌)군중독제지휘부에 넘겨졌다. 대대에서는 그들이 압송되여오자 “부르면 즉시 와야한다!”는 엄포를 놓은후 저녘켠에 집으로 돌려 보냈다. 여러차례 수색당하고 반년이나 비여있은 집은 저승굴 같았다. 마을사람 서넛이 와서 불도 때여주며 두루 위안의 말을하면서 저녘밥을 끓이자고 했으나 오래동안 비워둔 구들골에는 랭기가 차서 도무지 불길이 당기지 않았다. 그들은 집에가서 밥과 반찬을 이것저것 가져오고 어서 먹으라고 극진히 권했다. 그런데 이날밤 한끼밥은 그들의 저승밥으로 되였다. 굶은귀신은 면한 셈이다.
   이튿날 아침, 여러사람들이 장수네집에 보러 왔을때 그들을 맞아준 주인은 한장의 종이장이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씻지 못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단강 고기밥으로도 아깝지만 거기로 갑니다. 마을여러분들께 고맙고 미안합니다. 모두 잘 계십시요..” 밑에는 왕회계와 안해, 장수 이름이 차례로 씌여 있었다. 역시 훗날의 평론이지만 일가가 이렇게 죽은일은 목단강시에서 처음이였다.
   마을에서는 대대에 달려가서 독재지휘부에 보고 했는데 회의중이던 반란파와 독재지휘부 령도들은 “계급의 적들은 완고하고 악독하다!”면서 내버려 두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수야 있는가!... 마을사람들은 목단강 량안을 련 닷새나 샅샅히 뒤지였다. 그들은 10여리 내려가서 장수의 시체를 찿았을뿐 그의 부모들 시체는 찿지 못했다. 마을에서는 장수를 매장한후 그날로 장수네 집을 흉가라 해서 파가해 버렸다.
   왕장수는 이름처럼 오래 살지 못했다. 24살 청춘의 새출발, 간절한 념원, 아름다운 꿈은 목단강 푸른물결에 멀리로 흘러갔다.
   장수의 죽음은 누구의 탓이든가… 그것은 어찌 되였든, 그의 죽음은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쥔 시대의 비극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목단강 푸른물결은 인간세상희비의 온갖사연을 아는듯 모르는듯… 오늘도 출렁출렁 한대중 흘러간다.ㅡ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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