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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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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감옥
2014년 01월 17일 15시 23분  조회:2311  추천:3  작성자: 회령
              잡문
                                             특별감옥 
                                                                                                     회령

    고왕금래, 인간세상에는 감옥이 부지수로 많고 그 형태도 다양하다. 

    그중에서 장학량의 감옥살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일례가 된다. 장씨는 5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처음부터 “연금”이라는 징역을 살았다. 장학량은 범상죄를 지었으니 군사법정에서 죽임을 당하든지 수족을 잘리든지 아니면 정배살이를 하든지 벌을 받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억울한건 옥졸들이 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일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것은 특무대장을 한 류을광, 웅중청, 단육기의 인생이라 하겠다. 그들은 허무하기 짝이없는, 부질없는 삶을 살았든 것이다.

    장개석의 충견인 대립(강생과 배짝이 된다)은 장학량의 연금을 세겹으로 포치해 놓았다. 제일밖에층은 순찰조로 한개련의 헌병이 장씨 거주지를 둘러싸고 24시간 순찰하며 “안전”을 확보하고 3보1강, 5보1초로 보초를 세웠는데 초병들은 서로 지껄이를 하며 바라볼수 있었다. 중간층은 집둘레를 둘러 싸고 지키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개바자 같은 것이다. 안층은 출입문, 창문을 지키며 방안까지 지키였다. 그리고 장학량의 신변에는 두셋이 붙어 있었다. 안층조는 장씨가 어데로 가면 어데로 따라 다니였다. 밤에 부부가 동품할때도 창문에 매달려 들여다 보고 방문을 열고 방안을 기웃거리며 제대로 붙어 자고 있나, 이상한 기미가 없나 동정을 살피였다. 화력은 50자루의 싸창, 돌격총2대, 자동보총2대, 기관총이 한문이였다. 이들을 통칭해서 특무대라고 하였다. 장학량이 활동범위는 낮에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이 100미터고 밤에는 집안에 박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은 후일 조금씩 변동이 있었으나 장경국이 죽을때까지 대체로 비슷 했다.

         류을광

    서안사변 이듬해(1937년) 춘절직전 장학량은 절강 계구로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때로부터 류는 특무대 대장이였는데 25년을 하루와 같히 장학량을 지키였다. 그먼저 두어달은 특무대 대장을 주위룡이라는 사람이 했다. 류을광은 호남사람으로 황포군교 4기생이다. 그는 북벌전쟁에 참가한후 군통에 전근되여 장개석의 경위대 대장, 특무대 대장 등 직무를 담당했다. 1962년에 안전국으로 돌아가면서 장학량을 떠나게 되였다.

    류을광은 아주 얌전하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였지만 속대는 매우 악착하고 한치 에누리 없이 각박한 사람이였다. 그는 감독규정의 모든 세절을 엄격히 집행 하였다. 장학량을 밤낮 철통같히 둘러싸고(포위하고) 감독했을뿐만아니라 지어는 자기의 처자까지 데려다 숙식을 함께하면서 장학량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1946년 장학량은 대만 신죽시 정상온천에 옮겨져 연금 되였다. 이듬해 대만인민들이 국민당을 반대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2.28사건) 류는 “일단 장학량에게서 이상기미가 있으면 그들 부처를 즉시 죽이라.”는 특별예방조치를 특무대에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같은해 10월 장치중이 장학량을 보려 왔는데 그때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두가지 요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하나는 평민으로 살게 자유를 달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류을광을 내집에서 나가게 하여 달라고, 나의 생활을 내가 관리할수 있게 하여 달라는 것이였다. 장치중은 남경에 돌아가는 즉시 이 부탁을 장개석에게 전달 하였다. 류을광도 물론 이런 정보를 제때에 대립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장학량의 요구에 대한 답복으로 한술 더 떠서 “이제부터는 그누구도 비준없이는 장학량을 만나지 못한다.”는 밀령을 대만성 경비사령 팽맹집에게 내렸다. 장학량과 장치중은 이렇게 할줄을 생각도 못했다. 그야말로 혹을 떼려다가 덧붙이고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든 것이다.

    1949년 장개석은 대만에 쫓겨간후 고웅에 안둔한지 얼마안되여 즉시 류을광을 불러다 장학량의 정황을 물었다. 그는 류을광의 공작을 십분 만족해 하면서 장금으로 황금 300량을 주었다.

    류을광이 안전국으로 돌아갈때 장학량은 연회를 열었는데 장경국과 팽맹집도 참석했다. 연회에서 장학량은 “류을광은 나의 원쑤이기도 하고 은인이기도 하다. 원쑤라고 하는것은 그가 나를 너무도 각박하게 감시했기에 하는 말이고 은인이라고 함은 내가 급성맹장염에 걸렸을때 청시하고 비준받을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나를 병원에 보내여 수술받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떠나는 마당에 나는 한몫 돈을 주려고 한다.” 하였다. 하여 좌석이 매우 난처하게 되였는데 장경국이 완곡히 말려서 겨우 체면을 수습 했다.

     25년을 하루같히 장학량 하나를 눈박아 지켜온 류을광! 그때는 좋은세월이 다 지난 늙은이가 되여 북망산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였다. 일생동안 그가 해놓은일이 무엇이든가?!... 류을광은 그후 여생을 적막속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웅중청

    웅중청은 호북 사람으로 항주특경반 1기생이다. 그는 생기기는 말수가 적고 어리무던하게 생겼지만 무엇이나 속으로 살피는 능청스럽고 음흉한 사람이였다.

    장학량을 연금하는 첯날부터 대립은 그를 장학량의 신변에 박아 놓았다. 밤낮으로 장학량을 감시하는 이 고역을 그는 30년이나 하였다. 첯 14년은 조장이란 직급으로 공작하고 후에는 부대장으로 또 꼬박 12년을 일하다가 류을광이 떠나자 겨우 대장 벼슬에 올랐다.

    웅중청은 류을광과는 달리 장학량과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장학량을 아주 유모적이고 박람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평론하기도 했다. “그는 애국자다. 그의 출발점은 좋았다. 서안사변에서 범상죄를 지었으나 란장판을 치지 않았다. 애국충심 한가지만으로도 그는 중국에서 천고에 이름을 전할것이다.” 장학량에 대한 그의 이런 동정비슷한 호감은 훗날 진급에 치명적인 장애로 되였다.

    웅중청을 대장으로 제발시킨후 장경국은 매년 한두번씩 그를 불러 장학량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어느 한번 장경국의 물음에 그는 “장학량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후부터 태도가 비교적 겸손해 지었다.”라고 대답 하였다. 그말을 듣자 장경국은 “아ㅡ”하고 더 말하지 않았는데, 마치도 “네가 어찌 그를 두둔 하는가?” 하는것만 같았다. 눈치빠른 웅중청은 제꺽 말머리를 돌려 “그러나 여전히 잘난척하는 우월감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장으로 진급하는 일은 헛탕을 치고 말았다. 결국 웅중청은 상교군함으로 퇴역당하고 말았다. 장씨 부자에게 말그대로 한생을 다하여 충성을 했으나 그의 만년은 헌신짝만도 못했다.

         단육기

    단육기는 장학량 신변에서 23년을 하루와 같이 감시를 하였다. 그는 장경국의 지시를 한점 오차도 없이 충실히 집행했다. 그러나 수하인원의 고발로 앞당겨 퇴역 당하고 말았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번 단육기 큰딸이 장학량부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날 단육기가 며느리 진약의(작가)를 장학량부부와 만나게 안배 했다는 것이였다. 단육기 본인은 절대로 그런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안전국에서는 그를 밤중에 불러다 4시간이나 심문 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해명하지 못했지만 즉시 퇴역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단육기는 23년을 부조장, 조장질을 조금 하다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리진원

    1988년 장경국이 죽은후 특무대는 제1특근대로 이름을 고치고 조장으로는 상교군관 리진원이였다. 감시인원은 18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무장도 휴대하지 않고 가스총을 사용했다. 보고도 한달에 두번으로하고 이전에 “절밀”로 취급하던것을 “기밀”로 처리하였다. 후에는 특근대를 취소하느니 어쩌느니 했는데, 그것을 반세기가 넘도록 공포와 감시속에서 살아온 장학량 본인이 극력 회망하지 않았다. 그는 특근대가 계속 자기를 감시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안전했기 때문이였다.

    1993년 장학량부부는 비로서 국민당 손아귀에서 벗어나 미국 하와이로 가서 정착하게 되였다. 이로서 리진원의 조장소임도, 특근대의 사명도 끝나게 되였다. 장학량을 지킨 몇사람가운데서 리진원이 제일 운수가 좋았다. 그는 4년남짓 장학량을 지키다가 재수좋게 "해방"을 받았든 것이다.

    그전해 장학량부부는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만단의 준비를 다하였다. 그들은 먼저 홍콩에 있는 벗 하세례의 손자 혼례식에 참가한후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려권수속도 이미 다 하였는데 아쉽게도 하씨네 혼례식이 지연되여 계휙은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학량부부는 영영 이국타향의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장학량의 평생 유감으로 남았다.

    반세기에 걸친 국민당의 특별감옥ㅡ장학량의 감옥에서 그들부부를 비롯해서 류을광, 웅중청, 단욱기 세사람은 하나뿐인 일생을 부질없이 허송했다. 장학량이 무슨 호랑인가, 마귄가 … 감시해서 생긴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허무한 인생비극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은 세상에 지금도 많다. 개인독재정권은 나라를(사회를) 그대로 감옥화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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