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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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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6)
2017년 05월 16일 14시 57분  조회:1157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6)
  1. 팔로군
 
 적공부간사
 
    류동호가 기로변군구 무공대에 랍치된 시간은 1940년 2월2일 오전이다. 기로변군구 사령부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 부장 로소한은 류동호에게 금후 간력을 쓰거나 무슨 등기표 같은걸 쓸때면 이날을 “혁명에 참가한 시간”(혹은 사업에 참가한 시간)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조직(당)의 결정이라고 하였다. 류동호는 그대로 하였다.

    그날부터 류동호는 두 적대진영에서 혁명의 진영ㅡ공산당 켠으로 넘어 섯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에 일생을 바치였다.

    여기서 류동호의 “혁명에 참가”하기 전까지의 력사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직(당)감정서의 유관 단락을 보면 이러하다.

    “류동호(조선인. 학생출신.)는 1921년9월17일 조선 개성부(시)에서 신을 만드는 가난한 수공업 로동자의 집에서 태여 났다.(부 류석진 모 송성락) 신의주상업학교 졸업.(졸업학기에 일제치안조례위반이란 억울한 죄명으로 퇴학당함. 1938년8월.) 조선 신의주에서 자유직업. 로동. 동년 10월1일 중국으로 온후 심양, 천진 등 지에서 자유직업. 로동.(이상은 본인의 자아감정에 준함.) 1939년 8월 하순 ㅡ1940년 2월1일까지 천진일본헌병대 창현분대(세가와이혼성려단헌병대) 중대배속헌병조 통역으로근무. (2년계약. 민간고용인.) 그간 부상으로 40여일 병원치료. 헌병조통역 실지근무시간은 4개월가량임. 죄악이 없음.(기로변군구 창현무공대 장준리, 공보 증명.)이것은 일반적인 력사로 문제가 아님. 1940년 2월 2일 팔로군 기로변군구 사령부에서 혁명에 참가.…”
 
    감정서는 팔로군 기로변군구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가 서명한 것으로 두말할것없이 조직(당)의 감정서 였다. 이것은 류동호의 력사를 실사구시적으로 감정하고 내린 결론이였다.

    그런데, 일본헌병대에서 4개월 근무한 이 한단락의 어린시절경력 때문에 그는 지금부터 많은 곡절을 겪게 되며 또 많은 좌절을 당하게 된다. 무엇때문인가?! 그의 경력에서 답을 찿게된다.
 
    나는 적공부에서 로소한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사업 했다. 로소한이 나에게 주는 임무는 일문재료를 중문으로 번역하고 중문을 일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였다. 대부분 내용은 반파쑈, 반전선전이였다. 반전선전의 적지않은 문장들은 로소한이 직접 작성한 것이였다. 나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사업을 부지런히 하였다. 적공부에는 일문을 아는 사람으로는 사실상 나 하나뿐이 였다. 로소한은 일본대학을 (경제과) 다녔다고는 하나 일년만에 돌아온후 인차 중국 혁명에 참가하다보니 일어를 별로 알지 못했다. 내가 적공부에서 사업하면서부터는 대 일본사병 선전이 대뜸 활기를 띄였다. 로소한은 내가 번역한 일문을 한글자 한구절 물으면서 틀린것을 세심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례하면 “네놈 새끼들은” “쫄병과 장교간나들” “미친개들”… 같은것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쓰면 안된다고 도리를 말해 주었다.  

    로소한의 지도하에 나의 사업능력은 재빨리 제고 되였다. 약 한달후에는 적공부 간사(중대장급)로 임명되여 대 일본사병 선전사업을 전적으로 맡게까지 되였다. 나는 문학도다 보니 원래 글쓰기에 흥취가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에서도 근본적인 전변을 가져와 사업에서 주동적이면서도 아주 적극적이 였다. 당시 부대는 야간이면 활동하고 낮이면 휴식 했는데 나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선전문을 창작하고 직접 등사깡판을 쓰고 등사까지 하였다. 나는 팔로군에서 줄곧 이 사업을 책임지고 하였다.

    1940년 5월 하순, 기로변군구 주력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로서군구와 합병 하여 로서군구로 되였다. 사령원은 양용, 부사령원은 소화, 정치위원에는 왕휘구 였다. 적공부 부장은 로소한, 나는 적공부 간사 였다. 로서는 진포선 넘어 7개현의 광활한 해방구 였다. 항일전쟁 형세는 들쭉날쭉 상치계단이 였다. 왜놈들의 발광적인 진공계단은 한풀 꺾기고 항일의 승리서광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팔로군 대오는 더욱 장대해 지고 사기가 더욱 높아 지었다. 부대의 생활도 많이 개선 되였다. 그때 부대에서는 진테비도 주었는데 매달 전사는 1원, 중대급 간부로부터 퇀급까지는 3원, 사급이상은 5원이였다. 사령원도 5원이였다. 나는 중대급이여서 3원을 받았다. 진테비는 비록 적었지만 우리들의 사상각오와 전투의지, 적극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해 9월 연안으로부터 리명(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간부대100여명을 인솔하고 로서군구로 왔다. 나는 처음으로 팔로군에서 동포를 만났다. 리명은 30대의 세련된 혁명가 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혁명도리를 말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민족의 혁명과업에 대비해 중국공산당을 잘 따라배우며 사업을 잘 하라고 격려 하였다. 그리고 “일제하의 조선민족혁명운동사”라는 책자를 주면서 며칠내로 보고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제 산동으로 나가서 “조선독립동맹” 훈련반 학습재료로 써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밤도와 내용을 베끼였다. 며칠후 리명은 로서군구에 50명의 간부들을 떨궈놓고 산동으로 나갔다. 우리는 작별할때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힘껏 싸우자고 약속 하였다. 훗날 우리는 그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다. 연안에서 온 간부들은 로소한이 직접 적공부에 배치를 했다. 그때 적공부는 할일이 무척 많았다. 나에게도 10여명 간부가 차례 졌다.

    12월 적공부에서는 30여명의 간부훈련반을 조직 했는데 시간은 3개월이 였다. 로소한은 나에게 일어교원을 맏긴외에 “피압박 민족의 해방과 국제적 단결”이라는 리론강의를 하라고 하였다. 교재가 없는 상황에서 이 과제는 너무도 아름찬 것이였다. 로소한은 나와 함께 제강을 짜고 참고재료를 선택해주었는데  나는 강의를 하는 한편 실로 많은 학습을 했고 안계를 넓히게 되였다. 그 재료는 후에 퇀급이상 간부들에게 학습재료로 발급하기까지 했다. 나는 군구결정으로 사령부의 표창까지 받았다. 그리고 당의 동정원(입당대상)으로 되였다. 이때로 부터 나는 류등 이라는 가명을 사용 했다. 그것은 적구에 있는 가족과 친척, 친지들의 안전을 위해서 였다. 이름은 훈련반 학원이 일어단어를 몇개 베껴 달라면서 쪽지를 써 나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류등 동무 앞”이라고 썼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조직에 보고 하였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해서 훗날 여러번 심사를 받을줄이야.

    로서군구에는 포로 했거나 의거한 일본인이 여럿이 있었다. 나는 로소한의 지시에 따라 그들에 대한 선전교육사업도 책임 지었다. 얼마후에는 다나까가즈오,(본명은 사도다께오. 연안에서 모택동의 병을 치료했음. 1993년 일본에서 해후 함.) 기느시다, 하시모도,(리명의 요구로 료남군구로 감.) 미즈노(팔로군 포병교관을 함.)등 골간으로 “일본사병각성동맹”을 건립하고 그 지도사업도 책임졌다. 또 일본인들로 무장선 전대도 조직했는데 그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일본사병각성동맹”은 후에 더욱 발전하여 “일본반전동맹”으로 되여 반파쑈전쟁에서 중대한 작용을 했다.

    로서군구의 무장선전대 활동은 다종다양하고도 맹렬 하였다. 나는 중요한 할동은 직접 지휘하였다. 활동은 일반적으로 밤에 진행 하였다. 선전대는 적진 코밑에 까지 다가가 위문품과 함께 삐라를 뿌리고 구두선전을 들이 대였다. 왜놈과 괴뢰군들은 낮이면 팔로군 전투부대를 긴장해서 경계하고 밤이면 무장선전대와 전투부대를 경계하느라 더욱 긴장해 했다. 때로는 선전만 하는것이 아니라 진짜로 들이 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포로거나 기의한 적군들은 “당신들의 선전은 도리가 옳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팔로군에서 내가 직접 참가한 전투로는 판시투전투가 가장 크고 멋드러진 전투 였다. 1941년1월7일, 나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사 3명을 이끌고 밤중에 적구로 나갔다. 판시투는 왜군대대부가 있는 운성과 중대가 있는 후집거점 중간쯤 되는곳이다. 놈들의 두 거점사이는 30여리가 되였다. 우리임무는 적구에서 적들의 전화를 도청하여 판시투전선지휘수장에게 즉각즉각 알리는 것이였다. 새벽이 거이 될때 대부대는 판시투에 매복하고 일부 병력은 후집을 포위공격 하였다. 후집의 왜놈중대장 이다는 기를 쓰고 방어하는 한편 운성에 있는 대대장 니히다에게 급보를 하였다. 이다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팔로 대부대가 왔다. 포위 되였다. 빨리 증원해 달라!”하고 고함 지르고 니히다는 “완강히 방어 해라! 팔로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었다. 이다는 “상당히 많다. 어두워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사면포위를 하고 달려드는데 저새끼들이 아주 먹자고 지랄을 한다! 빨리 오라! 빨리!”하며 목갈린 소리를 련속 질러 댔다. “이렇게 새까만데 어떻게 가니. 두시간만 버텨라.” 니히다는 되려 호통을 쳤다. 날이 밝아오자 니히다로부터 “대대가 출발한다. 저놈들이 전화선을 끊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 바보 같은것들! 이만!” 우리는 전화선을 끊어 놓고 전투위치로 갔다. 그날전투는 인차 끝났다. 판시투까지 달려온 적들을 전멸한것은 물론이고 후집과 운성에 있는 적들까지도 몽땅 섬멸 했다. 니히다 대대는 왜군에서 번호가 지워져 버렸을것이다. 우리는 많은 포로를 잡았고 자동차와 무기, 군수품을 숱해 로획 했다. 거기에는 대대포도 있었다. 포로된 사병들은 우리들이 선전을 들었기에 포로되는것이 두렵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투총결대회에서 나는 군구 결정으로 직접 양용사령원의 표창을 받았다.
1941년7월 로서군구와 기로예군구는 합병하여 기로예군구로 되였다. 사령원에는 양득지, 부사령원은 양용, 정치위원은 소진화 였다. 소화와 왕휘구는 다른곳으로 갔다. 적공부 부장은 리비, 로소한은 적공과 과장직무를 맡고 나는 그의 밑에서 여전히 간사로 사업했다. 부대가 대규모로 커지면서 부 아래에 몇개의 과가 설치 되였는데 우리의 적공과는 먼저의 부일때보다 엄청 더 커지고 사업이 더욱 많아졌다.

    적공과 간사고 당의 동정원인 나는 자기의 혁명적 사상각오 제고에 시시각각으로 노력 하였다. 혁명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더욱 확고히 수립하기 위하여 맑스주의 혁명리론 학습에 노력했고 간고한 투쟁실천속에서 단련하며 혁명과업을 적극적으로 완성 하였다. 조직에서는 또 우리들에 대한 교육과 배양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였다. 령도들은 사업임무가 그렇게 막중하면서도 우리들에게 친히 당과를 하여 주었다. 나를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이끌어 준 사람은 로소한이다.

    1942년1월 조직에서는 나를 군구교도대(부대 중,고급간부 배양)학습반에 보냈다. 그때 사업이 그렇게 많고 바쁘면서도 학습반에 보낸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조직이 나에대한 배려일 뿐만 아니라 중시이기도 했다. 학기는 6개월이고 패장이상간부들로 학원은 120명이였다. 조선사람은 나 하나뿐이 였다. 학원은 군사중대와 정치중대 두개반이였다. 나는 정치중대에 편입되고 부중대장으로 임명 되였다. 학원에서 나는 학습을 잘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다. 당의 동정원이라는 신분외에도 조선민족의 영예를 빛내야 한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할때 우수생이 모두 6명이였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우수생속에서 동정원으로는 한족친구와 나 두사람 뿐이였다. 다른 네사람은 당원들이였다. 졸업할때 우수생 우리 두사람은 입당이 비준되였다. (1942년7월) 그때의 기쁘고 흥분된 심정은 지금 이 시각도 잊을수없고 가슴 설레인다.

    학원을 졸업하고 적공과로 돌아오니 양원(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라는 조선족이 간사로 내가 하던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과장으로 제발 되였다. 나는 일본과 조선사람을 대상으로 반파쑈, 반전사업을 구체적으로 책임졌다. 1942년8월29일(이날은 조선민족의 국치일임.) 나와 양원은 “조선독립동 맹기로예분맹”을 창립하고 창립대회를 거행하였다. 분맹창립대회에는 여러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했다. 기로예군구에서는 양용 부사령원이 참석 하여 ”당신들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다”라는 제목으로 축하연설을 하였다. 분맹창립 소식을 “기로예일보”는 대서특필 하였다. 나의 사업임무는 한차원 높고 넓은 범위에서 분망하게 되였다.
 
로소한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나와 로소한은 1940년2월2일 저녘켠에 한족집 캉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로부터 1943년3월까지 만 3년을 우리는 줄곧 함께 사업 했다. 4월초 로소한은 하남성 신사군으로 가고 나는 태항산으로 갔다. 우리는 말그대로 혁명의 수요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 졌다.

    로소한은 19살 어린나를 혁명의 길로 이끌어준 다정한 동지이고 친밀한 전우다. 그는 자애로운 선생이였고 믿음직한 선배, 따뜻한 형장이였다. 키가 훨썩 크고 삐쩍 마른 몸매(팔로군 군복이 늘상 헐렁헐렁 했다.)에 훌렁 벗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내가 레닌 같지?”하고 우스개를 하던 그를 지금도 보는것만 같다. 그때 갈라진후 유감스럽게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그는 문화대혁명에서 핍박으로 죽었다.(전력부, 호남대학 등 단위에서 사업 했음.)

    로소한은 강소성 사람이다. 가정은 대지주라고 했다. 1920년대에 모택동을 따라 혁명에 참가한후 얼마 안되여 공산당에 가입 했고 2만5천리 장정까지 한 혁명간부 였다. 그는 나보다 16살 이상이였다.

    로소한은 나를 만난날 밤 행장을 메고 와서 함께 잤는데 그후에도 계속 그랬다. 조직의 의식적인 안배였을 것이다. 어찌되였든, 그와 나는 함께 자고 함께 사업하며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였다.

    팔로군 기로변군구에 처음 갔을때 부대에서는 나에게 어린전사를 통신병이라며 붙혀 주었다. 나에게 밥을 갔다주고 재료를 가져오기도 하고 번역한것을 가져가기도 하며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것이였다. 지어는 용변을 봐도 얼마쯤 떨어저 지켰다. 그럴수 밖에. 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부장 로소한이 나를 만나줄때 집으로 가겠다고 떼쓴바가 있었으니 부대에서 나를 지키며 감시하는것은 당연지사 였다. 어느날 밸이 꼬여있던 나는 통신병이 따라다닌다고 귀쌈을 쥐여 붙혔다. 그리고 물러가라고 소리를 쳤다. 통신병은 볼따구를 만지고는 히쭉 웃으며 정말 물러 갔다. 그런데 얼마안되여 두억시니 같은 털보를 데리고 오는 것이였다. 털보는 화등잔 같은 눈알을 뒤룩거리며 “왜놈들 본때를 하는가!” 하며 나를 쏘아 보았다. 나는 “너는 누구냐?” 하고 소리치며 마주 쏘아 보았다.
바로 그때 로소한이 휘적휘적 급히 걸어 왔다. 그는 털보를 가보라고 한후 나를 데리고 마을앞 시내가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너럭바위에 앉아 담화를 하였다. 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 처음에는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지만 소사령원이 안된다고 해서 그럼 있겠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 나를 믿지 못하는가. 왜서 쑈왕이 똥눌때도 붙어 다니며 감시를 하는가. 제길! 나는 거짓말을 안한다.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사람이다. 나도 왜놈을 미워한다. 싸우기로 결심했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한바탕 고와대고나니 속이 쉬원 했다. 나는 내친김에 김순사와 고등계 안경쟁이를 죽인 일까지 말하려 하다가 너무 불어대는것 같아서 그건 말하지 않았다. 로소한은 담배를 피우며 나의 말을 심중한 기색으로 들어 주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였다. 쑈왕은 자기의 통신병이고 나를 완전히 신임하지 못한건 사실이고 때문에 감시하고 지켰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나쁜사람으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신병을 안배한것은 너를 관심한 일면도 있는데 이점은 믿어 달라고 하였다. 쑈왕은 고아인데 부모가 왜놈들에게 살해되자 팔로군을 따라 왔다고 하였다. 부대에 온지 3년이나 되고 스물한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 동지고 전우고 친형제와 같다면서 이런 사이에 사람을 때린건 과분한 처사라고 말하는데 나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로 쑈왕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쑈왕은 히쭉 웃으며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다.”하며 나의 손을 잡기까지 하는 것이였다. 그날후로 쑈왕의 “감시”는 매우 느슨해 졌다.

    며칠후, 아침을 먹고 마을안을 이리저리 산책하는데 한 집 마당에서 팔로군 여럿이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것이 보이였다. 나는 호기심이 나서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나무통에 죽을 담아놓고 저마끔 공기에 떠다가는 후룩후룩 맛있게 먹는데 죽을 젓가락으로 먹는것이 신기하고 우스웠다. 거기에는 그 두억시니 같은 털보도 있었는데 그가 경위반 반장이였다. 털보는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며 “츠반! 츠반!” 하였다. 그때 집안으로부터 로소한이 공기를 들고 나왔다. 그날 나는 크게 감동했다. 그들이 먹는것은 겨가루가 껄쩍껄쩍하는 푸대죽이였든 것이다. 사령부 “장관”인 로소한도 그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쑈왕이 밥을 가져오면 나는 때론 여기서 함께 먹자고 했는데 그럴때면 히죽이 웃으면서 나는 다른데서 먹는다고 하며 나가던 로소한. 나는 사령부 간부들은 고급으로  먹는가부다 생각 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고급생활을 한게 아닌가…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단호히 경위반 전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브샨즈를 벗고 팔로군 군복을 달라고 했다. 로소한은 “각성했다!”하면서 무척 좋아 했다.

    행군할때나 사업할때나 휴식시에도 로소한은 나의 곁에 붙어 있다싶히 하였다. 아니, 내가 그를 따라 다녔다. 사령부간부들에게는 말이 있었는데 로소한에게도 밤색말이 한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체해서는 말을 타지 않았다. 그는 말등에 책과 재료를 싣고 다녔다. 그의 마대(큰 주머니 두개)속에는 혁명리론서적들이 많았는데 나더러 마음대로 보라고 하였다. 주머니에는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 그리고 모택동의 저작이 있었고 력사책과 철학서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책이 세상에 있는줄을 처음으로 알았다. 공구서들도 있었는데 “백과주해신어사전”은 특히 좋았다. 나는 거기서 많은것을 배웠다. 책에는 “강우 서”(江右 书)라는 싸인이 있었는데 그것이 로소한의 본명이다. 로소한은 그책을 우리가 남북으로 작별할때 나에게 기념으로 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소중이 갖고 있다. 로소한의 마대는 사회과학원이 였고 대학교도서관이 였다. 나는 로소한의 지도하에 열심히 학습(독서) 하였다. 그는 나에게 학습계획(독서순서)을 짜주고  심득을 묻고 의난문제를 보도해 주었다. 때로는 어떤 제목을 내여놓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례하면 공산주의는 왜서 과학인가, 공산주의와 공산당, 혁명의 당전의 임무와 장래의 임무,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국제적 단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현재와 금후의 임무,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관계, 류동호의 전도… 나는 로소한과 함께 있은 3년간 그때가 나의 대학이였고 혁명적 세계관, 인생관을 수립하게된 관건적 시기였고 나의 혁명적 인생항로가 결정된 시기라고 인정 한다.

    로소한은 인격과 사상수양면에서도 나를 많이 방조해 주었다. 다른사람을 존중하며 단결하며 관심하고 방조하며 자고자대, 교오자만을 하지말며 허심하며 간고분투, 실사구시, 원칙견지 작풍을 발휘하며 부화타락, 세화변질에 항상 자각성과 경각성을 잃지말며, 학습과 개조, 학습과 실천을 평생 견지해야 한다고 자주 이깨워 주었다.

    1942년 12월 24일, 기로예군구 조직고 고장이 나와 입당이 취소되였다며 담화를 하였다. 리유는 당성단련이 더 수요 된다는 것이였다. 동정원으로 있게해 주겠으니 단련에 더 노력하라고 하는것이였다. 말인즉 사상이 아직 당원수평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더 개조하고 단련하고 조직에서 더 고험하며 두고봐야 겠다는것이였다. 나는 억이 막혔다.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그래, 지금 당장 기관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면 나의사상을 인정해 주겠는가. 그래야 표준에 도달된다고 보겠는가. 명령만 하면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것이다. 나는 혁명에 나의 일체를 바치겠다고 언녕 맹세를 했고 나는 맹세대로 했다. 금후에도 그럴것이다. 나는 그런사상으로 사업하며 행동했다. 좋다! 그럼 무슨 단련이 더 수요 되는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더 개조하고 단련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 나는 흥분을 억제 못하고 고장과 시비를 걸었다. 고장의 입에서 끝내 실속이 터져 나왔다. 네가 일본헌병대에 있은적이 있지? 조선사람이지? 왜놈교육을 받은 지식분자지? 더 두고 봐야 너를 알수 있다. 나의 불같은 개성은 분통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헌병대에서 내가 무슨죄를 졌는가. 조선사람이 어째서? 당의교육은 안 받았는가. 싹 걷어치워라! 안한다. 동정원이구 나발이구 싫다! 다른곳으로 가겠다. 여기가 아니면 혁명을 못한다더냐?! 더러워서! 흥! 나는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적공과 사무실에서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 씩씩거리며, 잉!잉! 울며, 서성거리는데 로소한이 들어 왔다. “혁명가가 울면 되나.” 로소한은 나를 끌어다 캉에 앉힌후 어깨를 다독였다. 전후사연을 듣고난 로소한은 얼굴이 시컴해서 머리를 떨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입당 소개인의 하나였다. 그날밤, 그는 나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당을 믿고 꾸준히 혁명사업을 잘 해야 한다는둥, 우리는 명예도 지위도 바라지 않는 혁명자가 되여야 한다는둥, 혁명자의 최대의 기쁨과 행복은 혁명의 승리라는둥, 한 사람에 대한 긍정과 평가는 그 어떤 개인 한두사람이 하는것이 아니라 력사와 인민대중이 하는거라는둥, 당은 정확하다는둥… 허다한 대도리를 숱해 말하였다. 그러한 도리를 나도 그때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자도 필경은 7정6욕 5지가 있는 인간이 아닌가! 황차 나는 그때21살의 청춘이였다. 리지보다 감정이 더 많고 앞서는 때인지라 분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는 로소한에게 분풀이를 하며 막 대들었다. 그리고 당장 조선의용군을 찿아 가겠다고 잡아뗐다. 로소한은 그것도 혁명의길이 아닌건 아니지만, 다 혁명조직인데 그래도 조직적으로 행동하는것이 좋다면서 두고 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뻬쮼의 실례를 들면서 어데서 혁명하나 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거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거고 전 인류의 해방과 진보와 행복을 위한거니까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였다.(나는 로소한의 마대속에서 모택동의 문장 “뻬쮼을 기념하여”를 이미 보았다.)

    나의 동정원자격은 아닌게 아니라 취소 되였다. 인류의 해방과 혁명을 위하여 입당하려는 것보다 영예를 위하여 입당하려는 표현이 더 보이는데 입당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이였다.(조직고 고장과의 담화에서 나타난 태도를 보더라도 그럼을 충분히 알수 있다고 하였다.) 까짓거! 말라면 말지.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동정원을 하겠다고 했던가. 니들이 시켰지. 별꼴 다 보겠네… 그때 나의 성숙정도는 이랬다. 그러나 정서는 억망이였으나 사업은 여전히 힘차게 하였다. 새해 3월 나의 동정원신분을 회복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장과 다툰것을 검사하라고 하였는데 나는 입당이 취소된것이 여전히 리해가 되지 않는다고 속심을 그대로 말했다. 서기 리비(적공부 부장)와 조직고장은 입만 쩝쩝 다시였다.(로소한이 양용, 소진화에게 반영. 개성때문이니 동정원 자격을 취소할것까지는 없다고 했음.)

    4월초 로소한은 나와 한차례 의미심장한 담화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혁명에 참가한 후에 겪은 곡절적인 경력을 이야기 하였다. 로소한의 곡절은 참으로 만만치 않았다.

    “나는 혁명에 스스로 뛰여 들었지만 가정성분 때문에 항상 일부 사람들의 외눈총을 맞았다. 장정 전 까지는 “계급이색분자” “변절자”, 후에는 또 국민당 특무, 일본 특무 혐이까지 받아 여러차례 심사를 받고 반복적인 설명과 교대를 해야 했다. 1938년에는 “뜨로쯔끼분자”로 몰리워 하마트면 총살을 당할번 하였다.(그때 저명한 조선 공산주의자이며 혁명가인 장지락은 총살 당함. 1983년 명예를 회복 함.) 내가 반복적으로 곡절을 겪게 된것은 대오내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기의 그 어떤 리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수단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였다. 이런 소인은 세계 그어디에나 그어떤 단체, 정당에나 다 있다… 때문에 자아보호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당에 충성하며 혁명사업에 충성하며 광명정대 하는 것이다. 혁명가의 사명은 주관과 객관의 개인리기주의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우리당은 정확하다. 이점을 동요없이 믿어야 한다. 당은 흑백을 정확히 판정하고 정확이 처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날 나는 그의 말뜻을 다는 리해하지 못했으나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나는 평생의 경력을 통하여 그의말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그날 그는 리비와 조직고장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친한사이인데 그들은 머슴을 살다가 일찍 혁명에 참가한, 공이 많은 동지들이긴 하지만 문맹이나 다름 없는데, 혁명의 발전이 지식을 점점 더 수요하자 그들은 하급의 지식분자들을 좀 경계하는 눈친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의 사업에 변동이 있을거라고 귀뜀하는 것이였다. 아니나 다르랴. 10여일후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문화대혁명에서 로소한은 70고령의 나이에 30여년전의 그 각가지 혐의 외에도 반당, 반사회주의, 반혁명, 반모택동사상, 반혁명로선, 수정주의… 등등 수두룩한 죄명을 쓰고 갖은 박해를 받다가 유감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를 죽인 괴수는 개인리기주의분자(사상)들이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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