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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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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대 사람들
2014년 02월 07일 07시 45분  조회:2917  추천:1  작성자: 회령
               수필
                                             알미대 사람들
                                                                                                                  회령

        한뉘 연변병원에서 사업한 한고향 한반 한침실 의대동창생이 회혼례를 한다고 해서 우리부부는 세밑에, 말그대로 반세기만에 고향연변땅을 밟아보게 되였다. 친구의 안해도 동반 동창이였는데 그들은 우리반에서 유일한 한쌍이였다. 친구의 회혼례에는 수백명의 하객들이 참가했으나 동반동창은 나뿐이였다. 곡절많은 50여년 세월이 지난 오늘 동반동창들은 다 죽고 80대의 우리 셋만 남았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친구는 우리부부를 기어코 자택에다 숙식을 안배 하였다. 친구의 집은 크고 훌륭하였다. 다사다난했던 지난세월 친구부부는 모진 환난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혈기가 왕성해 보였다. 자손들도 모두 잘되고 있고 자신들도 건강장수하고 부부가 의학교수로 성과도 많았으니 친구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 보람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라 하겠다.

        회혼례가 지나서 3일후 우리가 이젠 집으로(북경) 가겠다고 하는데 불쑥 한고향 친구인 윤일이가 친구네 집으로 찿아 왔다. 원, 이런 경사가 있는가?! 하, 그것참!... 

        우리셋은 삼합구(진)사람이다. 나와 회혼례친구는 북흥촌 알미대에서 태여난 사람이고 윤일이는 삼합촌 홍경동에서 살았다. 알미대는 삼합구에서 제일 길고 깊고 큰 무서운 두메산골로서 두만강과 멀리 떨어진 오랑캐령 밑이다. 홍경동은 조선 회령시가지를 건너다 보는 두만강변의 마을로서 알미대와는 50여리 떨어져 있었다.

        광복후 우리셋은 회령에 가서 초중을 다니고 청진에 나가서 고중공부를 하였다. 초중때부터 우리는 하숙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는데 1, 2, 3등은 항상 우리셋이 번갈아 하였다. 윤일이는 집살림이 꽤 넉넉하다보니 나와 친구는 그의 신세를 자주 입었다.

        고중졸업을 한달 남짓 앞두고 조선전쟁이 폭발 하였다. 전쟁형세가 급속도로 백열화 되면서 고중생들을 그대로 집단적으로 인민군에 입대를 시키는데, 졸업생인 우리를 졸업은 시키지 않고 계속 학교로 나오게 하고는 전시동원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을 진행 하였다. 결석하면 영창에 잡아간다고 하였다. 보아하니 우리도 군대에 나가야 할 판국이였다.

        어느날 밤, 우리는 대충 괴나리보짐을 싸 메고 급급히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우리에게는 애국주의, 국제주의, 공산주의혁명사상보다 싸움판에 대한 공포심이 절대적우세였든 것이다. 우리는 철길을 따라 달리고 달리였다. 200리 거이되는 기차길을 달려 회령에 도착한것은 이튿날 점심녘이 였다. 우리는 두만강변 버들방천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후부터 비가 출출 내리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변방부대가 두셋씩 어슬렁 어슬렁 순라를 하였다. 밤이 되자 우리는 두만강을 헤염쳐 건너서 윤일이네 집으로 갔다. 요기를 한후 나와 친구는 밤도와 알미대로 떠났다. 우리가 길을 떠날때 윤일이아버지는 함부로 나 다니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는것이였다. 비법월경으로 건너 왔으니 잡히면 조선으로 도로 보낼것이고 그러면 저쪽에서는 너회들을 참군도피분자로 취급할테니 큰일이 난다는 것이였다. 듣고보니 그럴법도 하였다. 우리는 근심가득 후드둑거리는 가슴으로 달리였다. 비는 추럭추럭 더욱 줄기차게 쏟아 졌다.

       그후, 담이 작고 조심성이 많은 윤일이는 집에 며칠 숨어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도문으로 해서 흑룡강쪽으로 피신을 했다.

       우리는 이튿날부터 마을 집집을(20여호) 돌아다니며 문안인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전쟁란리판에서 용케 살아 제집으로 돌아 왔다고, 똑똑한눔들이 다르긴 다르다며 우리를 칭찬 했다. 우리가 숨어있지 않고 버젓히 나돌게 된것은, 윤일 아버지의 부탁을 부모님들께 말하니 무식한 그이들은 “중국땅 제집으루 왔는데 조선아덜이 무슨 상관이야. 흥!” 하면서 대수로와도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것을 마치도 죽다가 살아온것만키로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며칠후 아버지는 촌장을 찿어가서 물었는데 촌장은 “갸들이 거류민증이 여기에 있구 중국사람인데 무슨 그따위 소리를… 일없다.”고 했다. 과연 별일이 없었다.

       그해 나와 친구는 연변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고 윤일이는 후에 삼합초중학교에 선생으로 들어 갔다. 졸업후 친구부부는 연변병원에서 사업하고 나는 심양의과대학에 분배 받았다. 

       윤일이는 가정성분이 상중농(기편중농이라고도 함)인 데다가 남, 북조선에 친척이 많아서 반우파, 민족정풍, 교원정풍, 사회주의교육, 문화대혁명… 크고 작은 모든 정치운동에서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졸경을 치뤘다. 그러나 걸리지는 않고 모두 결국은 무사히 고비를 넘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서는 하마트면 죽을번 했다. 상중농(부농과 거이같게 관제함.), 참군도피분자라는 모자는 이미 씌운거고 주요하 게는 특무(일, 한, 조 3국특무)로 모는데, 공사독재지휘부 반란파들은 특무를 잡아내서 대공을 세우겠다고 발광 하였다. 윤일이는 공사와 현의 독재지휘부에 반복적으로 끌려가서 지하실에 갇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기를 3년여, 마지막으로 또 현에 넘겨졌을때는 페병과 위병으로 사람이 백골이나 다름이 없었다. 온몸과 관절은 어혈로 해서 사람이 기다싶히 하였다. 그때 어느날 밤, 한차례의 고문에서 윤일이는 피를 한사발이나 토하고 기절해 버렸다. 현병원에 실어다 검사해 보니 왼쪽 갈비뼈가 네대나 부러지고 혈흉, 기흉이 되였는데 심장이 위험하였다. 복강내에도 대량의 출혈이 있는데 장기파렬이 한두곳만 아닌것 같았다. 현병원에서는 손을 들고 연변병원으로 즉시 가라고 하였다.

       연변병원반란파들은 반동학술권위라는 정치모자를 쓰고 심사, 비판투쟁을 받고있는 나의친구를 불러다 윤일의 치료를 책임지게 하였다. 윤일은 수혈을 받으며 6시간이나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 났다. 두친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여러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친구는 끝내 윤일이를 살려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은 구해 줬지만 정치적생명은 구해주지 못했다. 윤일은 계속 “걸어둔 문제인물”이였다.

      4인패가 거꾸러진후 당에서는 그의 정치적생명을 완전히 철저히 깨끗히 구해주었다. 지쳐 쓰러진 윤일은 끝내 해방의 날을 맞았다. 그후 그는 특급교원, 우수교원으로 재직 마지막 날까지 사업을 잘 하였다. 유감이라면 신체가 허약하고 이곳저곳이 늘 아픈것이다.

      그날, 윤일은 부부동반으로 노루 한마리, 꿩, 송이버섯, 개암 등 토특산품을 가득 가지고 왔었다. 친구와 그들은 전화통화는 자주 하지만 70대후부터는 별로 만나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윤일의 신체상황이 주요한 애로였든 것이다. 때문에 친구는 회혼례를 알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문득 올줄이야?!...

       나와는 50여년만의 해후였다. 나는 심양에 간후 얼마안되여 일본에 가서 박사를 하고 또 북경으로 전근한후 부모님을 모셔 가다보니 연변으로 올 일이 없었다. 우리집은 조선에 친척이 좀 있었으나 전쟁후 모두 종무소식이 되고 연변에는 친척붙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세월 혁명사업을 하느라 어데 겨를이 있었든가. 경제적 사정도 사정이려니와 때거리 식량사정도 누구네집에 함부로 놀러갈 형편이 못되였다. 지금같은 세상이였드냐!…

       20대에 헤어진 홍안의 청춘들이 80의 로안으로 만났다! 우리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우리는 윤일이 한테 고향 알미대 소식을 물었다.(친구도 결혼후 인차 부모들을 연길로 모셔 왔다.) 알미대 사람들은 인민공사 초기에 버덕마을 이곳 저곳에 이사를 하고 마을은 언녕 없어 졌는데 그 후대들은 어떻게 되였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친구를 외우는 사람은 삼합땅에 지금도 많다고 하였다. 윤일이는 30여년 교원사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난한 산골 사람이라도 어떠어떠하게 학습을 잘하며 노력분투해야 한다고, 우리를 귀감으로 내세우고 우리의 옛말을 자주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를 자기의 자랑으로, 삼합땅의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윤일이 선전 때문일 것이다. 윤일이는 우리를 잊지않고 항상 지켜보며(우리는 매체에 여러번 소개된바가 있다.) 그리워 했다고 하였다. 무정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처럼 절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것도 하여준것이 없다. 지어는 편지 한장도 한적이 없지 않은가!...

       이틀후 우리는 윤일이 집으로 놀러 가는길에 알미대 마을터를 찿아가 보기로 하였다. 승용차를 골어구에 세워두고 2리남짓 골안으로 들어가다가 우리는 돌아서고 말았다. 관목과 아름드리 나무가 꽉 들어찬 골안바닥에는 오솔길 흔적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가 이럴진대 10여리를 더 들어가야할 마을터전은 보나마나 어떻겠는가. 상상할것도 없었다. 워낙 험악한 이곳은 사람이 살곳이 아니였다. 광복전에는 왜놈들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살았다. 하지만 경신년토벌(1920년)을 피하지 못했다. 그때, 마을은 페허로 되고 1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을은 다시 그 자리에 일어섯다!… 

      지금 자세히 다시 보니(과학발전관으로) 이곳은 확실히 사람이 살곳은 아니였다. 인민공사 초기에 마을을 이주시킨것만은 옳은 시책이였다. 인민공사는 어떻든간에…

      우리가 지금 알미대 후손들의 소식은 알지못해도 그들은 지금 중국의 해내외에서 나름껏 잘 나가고 있을것이다. 그것은 알미대 1, 2, 3세대 사람들을 보면 산골사람들이 우직하다고 해도 그들은 한결같이 정직하면서도 억세고 용감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근로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였다. 그들속에서는 교원, 령도간부, 의사, 전쟁판에서 공을세운사람, 모범인물 등 출세한 사람이 여러명 나왔고 혁명렬사도 셋이나 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후대들은 틀림없이 훌륭할것이라 믿는다. 전통이란 알게 모르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대를 잇는 법이다. 그것은 핏줄이 이어지듯.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얼마나 총명하고 날쌘가!...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다. 씩씩하게 자라는 젊은이들을 볼때 더없는 긍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에 의해 우리당 우리인민 우리사업 우리나라는 세계의 동방에 우뚝서서 인류의 앞길을 밝혀주며 찬란한 빛을 뿌릴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자아실현과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억세게 열심히 노력분투하여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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