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시 삼합진은 우리집의 고향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삼합진 강역촌의 하강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앞내 건너 북흥촌 샘물깨는 어머니의 고향이다. 나의 자식들 세 남매의 고향은 진소재지 삼합촌이다. 나는 소년, 초중시절까지 샘물깨에서 살았고 그후 17년을 삼합에서 사업했으니 삼합땅을 고향이라 할수 있겠다. 어데서 사업하고 생활했든간에 삼합땅은 잊을수 없는 그리운 고향이였다.
8월15일! 나는 큰딸의 효성에 받들려 동부인하고 고향방문을 하게 되였다. 꼭 32년만이다! 어느새 세월은 이리도 많이 흘렀는가…
차는 잘 포장된 국경도로를 따라 경쾌히 달렸다. 삼합경내에 들어서면서 첯동네는 강역촌, 아버지의 고향이다. 그런데 하강은 없어지고 뉘연한 밭이였다. 나는 섭섭한 심정을 억제하며 어머니의 고향인 앞마을 샘물깨로 향했다. 샘물깨는 아버지 어머니가 한뉘 구술땀을 흘리며 농사지은 곳이다. 사람세상은 변해도 산천은 여구하다고 했으나 그게 아니였다. 샘물깨는 산천도 많이 변했다. 마을길은 전부가 포장정리되였고 옛날의 초가집은 한채도 볼수 없었다. 우리집은 터만 있었는데 누가 집을 새로 지을거라고 하였다. 마을집들은 모두가 파랑, 빨강 지붕을 한 조선족문화주택으로 건설되고 다만, 마을가운데 앉은 고래등같은 10간 기와집만은 성급보호문화재로 남아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골동품”이라고 했는데 주택주변은 옛모습을 전혀 찿아볼수 없었다. 그네뛰던 늙은느티나무는 사라지고 마당앞에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치렁치렁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헛간터 저쯤에는 아담한 마을활동실이 있었다. 마을가운데를 째고나간 대두럭(관개수로)은 없어지고 마을앞언덕아래서 여러갈래로 흐르던 샘물도 사라지고 두곳만 남았는데 우리집샘물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잘하느라고 세멘을 발라 인공정리한것이 아주 망가지고 옛날의 자연미는 한점도 없어서 참으로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옛날의 모습에는 두무만한 큰바위돌옆으로 샘줄기가 나오고 거기를 아버지는 돌들을 쌓아 운치를 돋구었는데 윗턱둔덕에는 구기자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 하였다. 하여 푹 우거진 구기자숲속에서 샘물이 흘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 대신 여기저기에는 옛날의 애버들이 고목으로 자랐다. 마을은 키들이로 자란 강냉이숲에 싸여 지붕만 보이고 고즈넉 잠잠하였다. 옛날에 함께 살던 이웃들이 10여호는 된다고 했으나 알아볼수 있는 사람은 로인네가 대여섯뿐이였다. 32년전 내가 영영 삼합땅을 떠날때는 삼합에서 샘물깨가 제일 큰 마을이였다. 그때는 40여세대가 살던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20여호, 그것도 여러집은 빈집이라고 하였다. 어린시절 친구들은 한명도 없었다. 마을에는 로인네와 중년들 몇이 있을뿐 청년과 아이들은 없다고 하였다. 정든사람, 정든산천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으나, 과도기의 피할수 없는 현상이라고 리해는 하면서도, 서글픈 심정을 감출수는 없었다.
시가지가 고향인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번영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경탄하며 흥분해 하지만 시골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거지반 생기없이 잠잠한 고향을 안타까워 하고 서글퍼 하고 지어는 쓸쓸해 한다는데 그것은 옛정을 찿을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가라며 붙잡는 마을사람들과 작별하고 삼합으로 달리였다. 20여리의 현급포장길은 기본상 새로 뺀 것이여서 역시 옛모습을 찿아볼수 없었다. 두만강쪽으로 내려 앉은 도로량켠으로는 무성한 나무숲이 우거져 심산속을 달리는듯 하였다. 공기가 너무도 청신하였다. 얼마간 달리니 도로는 두갈래로 갈라졌다. 안내표시판에는 좌측도로는 해관, 우측은 삼합이였다. 삼합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는 옛것 그대로였으나 그젯날 꽤 크던 시내물은 없어지고 돌서덕물길만 남았었다. 시가지는 아주 몰라보게 변했다. 우선, 모든 집들이 새로 건축한 것들이고 옛날에 제일 좋고 크다던 사업단위건물은 두어채가 남아 있었으나 페기되여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중심가 량켠에는 상점 음식점 사업단위가 몇집 있었는데 너무도 한적했다. 삼합촌도 역시 생기발랄한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너무 적었다. 옛날 우리가 살던 집터들을 찿을수가 없이 변했다.
우리는 농가음식점에서 랭면을 먹은후(삼합랭면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주인씨 추천대로 먼저 “망강각”으로 갔다. 홍경동에서 시작된 포장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니 하남호옆 산정에 멋지게 건설한 “망강각”이 있었는데 남호벌과 두만강 사이섬 그리고 조선의 회령시가 지척으로 환히 전망 되였다. 나의 고향 회령시가지는 옛모습이 여전하였다. 보고 또 보아도 싫지않은 아름다운 산천이였다. “망강각”에는 유람객이 여럿있었는데 모두 탄성을 올리며 기념촬영에 열중하였다. 저쪽에서 야외식사를 하며 즐기는 패들도 여럿이였다.
잇따라 우리는 청천저수지로 향했다. 청천저수지는 대약진때부터 시작했으나 50여년 하며 말며 하다가 드디여 준공된 것이다. 저수지는 서래골 맑은물을 막아 만든것인데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음식점주인은 청천저수지물고기가 천하일미 라고 극력 찬미하며 추천했으나(특히 산천어) 우리는 아쉬운대로 귀로에 올랐다. 래일행사가 있었던것이다.
삼합땅, 고향방문은 하루로 끝났지만 나에게 깊은여운을 주었다.
삼합은 농업, 림업, 목축, 어업, 과일과 산나물(고사리와 송의버섯은 해내외에 유명하다.) 그리고 생태관광, 조선래왕…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무공해, 무오염의 청정지대다. 삼합에는 아름답고 값진 꿈이 많다. 그 꿈의 일부는 개발을 보였지만, 금방 싹이 튼 정도였다. 삼합은 꿈의 처녀지, 사업가들의 개발을 기다린다. 지금은 고즈넉, 잠자듯 조용하고 적막하기까지 하지만... 몇년을 안가서 활기로 넘칠것이다. 꼭 그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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