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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7)
2017년 05월 17일 14시 55분  조회:1609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7)
  1. 조선의용군
 
태항산
 
    1943년4월 중순, 로소한이 하남성에 있는 신사군으로 떠나간(정치위원으로 제발되여 감.) 이튿날 나는 태항산 “조선청년혁명학교”로 떠나 갔다. 며칠전 태항산에서 진한중(김한중.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무정(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의 파견으로 “조선독립동맹기로예분맹”의 사업을 시찰하려 왔는데 그가 돌아갈때 나를 데려가기로 조직에서 결정 했던것이다. 나의 심정은 날듯이 기뻤다. 조선혁명대오에서 자기의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직접 싸울수 있게 되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항일전쟁 형세가 들쭉날쭉 상치상태여서 우리는 이리저리 에돌며 여러날을 걸었다. 5월초 우리는 드디여 태항산 근거지인 섭현 하남점에 도착하였다. 하남점에서 조선의용군 사령원이며 “조선독립동맹” 책임자인 무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5리길을 걸어와서 우리를 마중했던 것이다. 하남점에서 나는 조선의용군에서 꾸렸다는 상점, 리발관, 신수리, 병원을 참관 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리화림(호사) 등 조선의 녀성혁명가들을 만나보게 되였다.

    조선청년혁명학교는 하남점에서 8리 떨어진 곡원촌의 절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에는 고급반과 초급반이 있었다. 고급반에는 년령이 많고 학식과 혁명경력이 풍부한 로혁명가들이 편입되고(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 초급반은 젊은 혁명가들 이였다. 초급반은 학원이 많았는데 문화수평이 높은 사람은 1대에 편입되고 낮은 사람들은 2대에 편입 되였다. 교장은 무정이고 교무주임은 정률성, 교육간사에 리인철(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였다. 무정은 나를 1대 대장으로 임명하며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학습을 잘하며 사업을 잘하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고급반은 문건, 정치리론학습과 토론, 정풍이 위주고 초급반 1대는 정치리론, 군사리론학습이 기본이였다. 2대는 문화학습을 중점으로 하였다.

    팔로군과 근거지인민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전해 5월 반소탕전에서 학원 몇명이 회생된후 팔로군은 우리들을 전투행동에 일률로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부대를 파견하여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하여 나는 학원에 간후 전투에는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다. 근거지 인민들은 우리를 물심량면으로 지지 했다. 태항산에는 소금이 매우 귀했는데 우리가 먹는 소금은 인민들이 적후로부터 생명의 대가를 치르면서 몇등대 교통참을 거쳐 날라온 것이였다. 우리는 인민들이 먹는 “쿠얜”을 먹으며 소금을 힘껏 아꼈고 인민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노력 하였다 우리는 팔로군을 본받아 자급에 노력했다. 탠캉(태항산에는 야생감이 많다. 그것을 썰어서 겨에 버무려 말린후 다시 가루내여 죽을 쒀 먹는다.)을 만들고 채소를 심고 목탄구이를 하고 농망기에는 일손이 딸리는 농민들을 지원했다. 조선사람들은 무슨일을 하나 불이 번쩍나게 하기를 좋아한다.  팔로군과 근거지 인민들은 “조선혁명가들이 다르긴 다르다!”하며 우리를 칭찬하고 열애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우리들의 목전의 임무는 조선민족의 해방과 조선공산주의 혁명을 위하여 학습하는것이라고 명확히 지적 하였다. 말그대로 혁명을 위하여 학습하며 학습이 곧 우리들의 혁명과업이 였다. 우리의 학습열정은 대단히 높았다. 토론을 할때면 앞다투어 자기의 일가견을 발표하는데 때로는 갑론을박 열띤 변론이 붙기도 했다. 한번은 중국혁명의 장래를 놓고 토론을 하였는데 다수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피를 많이 흘리게 된다고 주장 하였다. 그 리론적 근거는 혁명이란 이계급이 저계급을 뒤엎는 것이기에 총을 들고 싸우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모택동의 리론을 인용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은 경제건설이 중심이고 건설은 전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계급투쟁의 형식은 여러가진데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가서는 사상개조를 위주로 할것이고 총으로 소멸하는 형식은 사용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간단한 문제도 몰라서야 되겠는가 고하였다. 그런데 교육간사 리인철이 변론에서 진후 오히려 나를 불러다 “류등은 좀 안다고 자고자대 하면서 다른 동지들을 부옇게 잘 까는데 단결에 주의하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자고자대 한건 아닌데… 하며 그의 비평이 접수되지 않아 정률성을 찿아 갔다. 정률성은 나의 견해가 옳다고 긍정한후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하여 통일된 사상인식을 마땅히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서로 차이가 있을수 있고 단시일에 통일될수 없을수도 있다. 때문에 조급성을 삼가하며 동지들과 단결에 주의하며 감정을 손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해방구 공작에 나갔을때 군중들과 단결하기 위하여 치솔질 하는것을 그만둔 적도 있다며 단결하여 함께 사업하는 가운데서 통일과 제고를 가져와야 한다고 사업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이 말이 옳다고 수긍되였고 명심 하였다.

    태항산에서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은 하지 않았으나 생활은 매우 간고 했다. 특히 먹는것 때문이였다. 사람이 겨를 먹을수 있는가? 먹을수 있다. 그러나 먹지 않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변비증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목숨을 달갑게 내여 놓은 혁명가들이긴 하지만 변비증 때문에 남녀 로 중 청 혁명가들이 울때가 많았다.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변비는 여전했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굶기도 했으나 혁명을 위해서는 결심하고 다시 먹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은 혁명적 락관주의로 항상 활기에 넘쳤다. 변비에 울면서도 익살을 하고 떠들고 웃어댔다. 웅변회, 오락만회, 군중선전, 문예연출, 체육회, 장기시합… 우리가 있는 곳에는 혁명적 랑만과 약동하는 혁명적 생명이 있었다.(련애, 작풍문제는 한건도 없었다!) 곡원촌 상공에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리정호 사 곡. 현재 미국에서 생활.) 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씩씩하게 성장 했다.
 
연안
 
    중국의 항일전쟁은 상치계단에서 반공계단으로 전환하기 시작 했다. 승리의 서광은 더욱 밝아 왔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중앙은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모든 혁명력량을 연안에 집결하여 사상상 조직상에서 대오를 더욱 공고, 제고 하기를 건의 하였다.

    1944년2월, “조선청년혁명학교”는 태항산 곡원촌을 떠나 연안으로 행군 했다. 대오는 박효삼(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과 정률성의 지휘하에 합치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하며 세겹의 봉쇄선을 둟고 1000여리를 행군하여 연안에 도착했다. 행군은 팔로군에서 부대를 파견하여 안내와 호송을 하여 주었다.

    4월7일 오전, 쾌청한 날씨, 우리가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저 멀리 아래로 연안시가지가 펼쳐지고 연하는 흰띠처럼 구불구불 늘여 놓이고 보탑산은 그 건너에 숙연히 바라 보였다. “연안이다!” 함성을 지르며 우리는 산아래로 내리 달리였다. “산밑에 가서 총 집합할것!” 박효삼이 다급히 소리 쳤다.

    우리는 연안 동관에 집결한후 세개대로 편성하여 행동 했다. 농업대는 감천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메밀과 기장을 심었다. 나는 농업대에 편입 되였다. 건축대는 라가평에서 학교와 숙사(요동)를 건설 하였다. 후근대는 채소를 재배하고 축산을 하고 목수, 리발, 상점 등 다종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들은 엿도 만들어 팔았다. 농업도 하고 벽돌, 기와도 굽고 집도 지으며 억척스레 일하는걸 보고 중국동지들과 인민들은 “조선동지들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며 찬탄 했다. 중공중앙과 팔로군에서 우리를 백방으로 보살펴 주었지만 우리는 가급적 자력갱생 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해 가을 추석날이다. 우리 세개대는 라가평에서 성대한 문예경연대회를 하였다. 농업대에서는 10여명의 대원으로 표연창을 한절목 만들었는데 부른 노래는 “호메가”였다. “호메가”는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널리 불리우는 민요곡에다 가사를 붙인 것인데 그 가사는 내가 창작한 것이다. 원래는 8절로 되였는데 지금 기억되는건 5개절 뿐이다. 1944년도에 연안에서 우리가 부른 노래가 광복후 동북각지 조선족들에게서 애창 되는걸 보고 나는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홍색주선률로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호메가

                류동호 사, 평안도호메가민요곡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여 온다.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애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일하면서도 배울수 있는 즐거운 일터로다 배움터로다.
 
    무찌르자 일제놈들을 삼천리 조국으로 진군해 가자.
 
    붉은기를 높히 날리며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리라.
 
       후렴: 에라 에라 에라 호호메야
                 호메 호메를 메고 가자.
 
    세개 대는 모두 풍만한 성과를 올렸다. 12월 총결표창대회를 성대히 거행 했는데 60세에 나는 김백선 등 9명의 로동모범인물들을 표창 하였다. 그속에는 영광스럽게도 나도 들어 있었다.

    이듬해 1월 5일! 드디여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라가평에서 탄생 하였다. 이날 대회는 부교장 박일우의 사회하에 애국가 열창으로 시작 되였다. 이어 교장 김두봉이 연설 했는데 그는 연설에서 학교의 교육방침은 조선혁명에 수요되는 중,고급 정치간부와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잇따라 중공중앙과 팔로군사령부를 대표하여 주덕 총사령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이 민족통 일전선을 어떻게 결성하는가를 연구하며 전체 조선인민을 묶어세우며 자기의 무장대오를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정치와 군사를 배우며 경제와 나라건설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면에서 중국공산당의 경험은 조선동지들에게 참고가 될것이라고 하였다. 림백거는 중국공산당과 인민은 조선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할것이라고 하였다. 오옥장의 연설은 의미가 심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혁명가들이 수양문제에 중시를 돌리기 바란다. 개인영웅 주의, 종파주의 등 개인주의를 반대하며(당시 그런현상이 있었다.) “일체는 인민을 위하여”라는 관점을 수립하며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서특립은 남의 경험을 학습하되 자기의 실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령도동지들이 축하연설을 한후 중공중앙조직부, 중앙당교, 섬감녕변구정부, 연안의 여러대학 대표들이 축하를 하였다. 끝으로 “일본해방동맹”(일본반전동맹)과 일본공산당을 대표하여 오까노스스무가 연설하고 월남 벗 황중광, 미국래빈도 축하연설을 하였다. 나는 오까노스스무의 연설을 감명깊이 들었다. 그는 일제파쑈분자들은 일본인민에게 막심한 고통을 주었을 뿐만아니라 조선인민, 중국인민에게도 커다란 재난을 가져다 주었는데, 한줌도 못되는 이런 망나니들로 하여 더없는 수치와 원통함을 금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민족의 이름으로 사죄 한다고 하면서 파쑈반동들은 이제 길어야 1년반을 넘지못하고 멸망할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인민은 조선,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여러나라 인민들과 꼭 사이좋게 지낼것이라고 하였다. 대회는 우렁찬 “조선의용 군행진곡” 합창으로 끝났다. 이튿날 “해방일보”는 대서특필로 “조선혁명군정학교” 개교성황을 세상에 알리였다.

    개학 당시의 학교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교장: 김두봉
    부교장: 박일우(조직과장, 교육과장을 겸임.)
    대대장: 박효삼
    조직과부과장: 주춘길
    교육과부과장: 허정숙
    총무과과장: 주덕해
     (주덕해 허정숙외의 이상 동지들은 광복후 조선으로 나간후 모두 실각했다.)

    학원은 150여명이였는데 3개 구대로 편성 했다. 그리고 매개 구대는 또 3개 분대로 나누었다.

    1구대 구대장: 조렬광  협리원: 방호산
    2구대 구대장: 왕자인  협리원: 장복
    3구대 구대장: 전우    협리원: 채국범

    나는 1구대 3분대 분대장이 였다. 구대 간부들은 광복후 모두 조선으로 나간후 실각당했다. 분대의 많은 간부들도 광복후에 조선으로 나갔는데 후에 절대대부분이 실각당했다.

    교원은  군사과: 박효삼, 각구대의 구대장, 협리원.
                  정치과: 김두봉, 최창익, 박일우.
                  철학과: 한빈
                  쏘련공산당사, 레닌주의기초: 허정숙
                  사회과, 정치경제학, 조선어문: 리홍염, 양민산, 류문화.
                  국제형세: 박일우, 오까노스스무

    학습은 과목이나 교원들이 고정불변이 아니였다. 때로는 중공중앙의 문건을 학습하기도 하고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 “련합정부를 론함” 등 저작을 하습하기도 했다. 박일우가 중공7차대회에서 발표한 “조선독립동맹의 제반과업”을 하습하고 열렬한 토론도 하였다. 나는 중공중앙 문건과 모택동의 저작들을 이미 로소한의 마대속에서 많이 보았기에 학습이 더욱 잘 되였다. 군정학교에서 나의 혁명리론 수평과 사상각오는 매우 현저한 제고를 가져 왔다.

    1945년8월15일! 우리가 저녘을 먹고 휴식하는데 “해방일보”편집부에서 사업하는 고동무(김창덕.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가 헐떡이며 쓰러질듯 우리에게로 왔다. 그는 숨을 톱으며 연신 중얼 거렸다. “왜놈들이 망했다! 투항 했다!” 그는 10여리를 뛰여오다보니 이순간에는 기진맥진 해서 소리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소식을 듣자 동포들에게 알려야 겠다고 벌떡 일어선것이 라가평으로 갔더라고 훗날 감명깊히 말하였다. 라가평은 30여호의 조선족 마을로 그때는 300여명의 조선혁명가들이 살고 있었다. 연안시가지와는8,9리 떨어져 있었다.

    그날밤, 연안은 온통 끓어 번졌다. 얼싸안고 환호하고 만세를 부르고 북과 꽹가리를 치고 횃불행진은 장밤 끊을줄 몰랐다. 교장 김두봉은 환호로 들끓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왜놈들때문에 조국으로 가지 못하던 동무들아! 조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하고 연신 높히 소리 쳤다. 우리는 횃불을 추켜들고 연안으로 나갔다…

    중공중앙과 팔로군 총부에서는 주덕총사령의 명이로 8월11일 낮 12시에 6호 명령을 하달 하였다. 우리에게 전달된것은 12일 오전이였다. 6호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안총부 명령 제6호

    중국 및 조선경내에 진군하여 싸우고 있는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리고 있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 부대를 통솔하여 동북으로 출병하며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함과 아울러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

    총사령 주덕
                             중화민국 34년8월11일12시
 
    우리가 명령을 받고 출발준비를 긴장히 다그치고 있는데 왜놈들이 투항하고 말았다.

    우리는 9월17일 아침, 연안을 떠나 조국으로 출발했다. 팔로군과 연안인민들은 우리를 열렬히 환송해 주었다. 우리는 출발에 앞서 부대를 4개 구대로 재편을하였다. 4구대는 증설한 것인데 구대장은 김극(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 협리원에는 윤공흠(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였다. 나는 이때 4구대12분대에 편입되고 분대장을 책임졌다. 우리는 기쁨과 흥분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조선의용군행진곡”과 정률성이 밤도와 창작한 “조국향해 나가자”를 목청껏 우렁차게 부르며 씩씩하게 행진 하였다.
 
    그날의 그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 본다며 류동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였다. 로안에 그득하던 눈물은 주루루 주름진 볼로 흘러 내렸다. 그의 무량한 감개를 어찌 다 헤아리랴!...

                    조선의용군 행진곡
                                                      리정호 사, 곡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맞춰 나가자. 다앞으로.
              지리한 어둔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속에
             의용군 기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쑤의 철사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넙고
             피묻은 만주벌 결승전에
            원쑤를 동해로 내여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앞으로
 
                     조국 향해 나가자
                                                     정률성 사, 곡
             하낫, 둘, 셋 발맞춰 조국 향해 나가자.
             씩씩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
             오늘은 화북걸쳐 래일은 만주지나
             앞의장애 물리치며 조국 향해 나가자.
             진리로 굳게 뭉친 우리는 강철대오
             모든 정신 행동 인민위해 노력해
             용감히 싸우리라 조국의 해방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인민의 자유위해
             하낫, 둘, 셋 발맞춰 조국 향해 나가자.
 
    “… 대오가 등성이를 넘어가자 노래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껴 울었다. 땅에 쪼그리고 앉아 섧게 울었다. 얼마후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동지들이 사라진 등성이를 이윽히 바라본후 발길을 돌리였다. 학습을 마치고 곧 조국으로 가겠는데, 뭘?!... 나는 스스로 위안하며 학교로 돌아 왔다.…”(무정의 지시에 의하여 연안의과대학에서 계속 학습 함.)

    은실백발에 말쑥한 리화림은 조선의용군 대오가 연안을 떠나가던 그때를 회고하며 긴 한숨을 쉬였다. 우렁차게 부른 노래도 좋고 걸음도 씩씩 했으나 류동호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리화림도 그랬다.)
 
    우리는 매일 5,60리씩 행진 하였다. 숙영지에 이르면 팔로군에서 미리 안배하여 놓아 유쾌한 려행길 그대로 였다. 연청, 청화평, 수덕, 미지를 지나 황하를 건너서니 산서성땅이 였다. 우리는 계속 동북쪽으로 행진하여 대동을 지난후 장가구 기차정거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태항산에서 나오는 조선의용군 전우들과 감격적인 회합을 하였다. 장가구역광장에서 진찰기군구 사령원 섭영진과 팔로군 총참모장 등대원이 우리들에게 열정적인 환송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중국혁명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귀국하는 조선동지들을 열렬히 환송 한다. 조선혁명의 승리를 축원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차로 회래까지 간후 다시 행군으로 고북구까지 갔다. 거기서 만리장성을 넘은후 승덕을 지나 금주까지 행군하니 이젠 동북땅에 들어섯다. 금주에서 부터는 심양까지 기차로 나가는데 우리의 기쁨과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기차가 역에 이르면 서로 세상구경을 하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기차가 신민역에 이르니 바깥에는 기차를 타려는 조선동포들이 와글와글 하였다. 우리는 너무도 반가워 저마끔 소리를 질렀는데 동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급기야 마구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였다. “조선 군대다!” “조선의용군이다!” “조선 팔로다!” 함성을 지르고 팔을 휘둘렀다. 우리는 “조국 향해 나가자”를 목청껐 불렀다. 만세소리 환호소리 들썽하는 가운데 기차는 역을 떠났다. 우리들은 “조국에서 만나자!”고 소리지르며 오래오래 서로 손을 저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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