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강룡운
지난겨울 나와 안해는 작년에 새로 이사 온 아빠트에서 추운 고생을 전혀 모르며 따뜻하게 한겨울을 잘 보냈다. 아들덕에 호강한 셈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석탄값이 엄청나게 뛰여오르면서 겨울 집중난방 열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아빠트가 많아졌는데 원래 우리가 살던 아빠트 실내온도는 섭씨 15도에서 머뭇거리다가 13도까지 내려간 때도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작년에 설 쇠려 집에 왔던 큰아들애가 집안에서 모직세타우에 솜옷까지 걸쳐입고 덜덜 떨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하도 가긍스러웠던지 우리한테 시설이 좀더 구전한 온돌난방 새 아빠트를 사주어 마침내 인테리어까지 마치고 이사를 오게 되었던것이다.
부르하통하강반에 자리한 새 아빠트의 북쪽 창가에 서서 호수처럼 넓어진 수면우로 유유히 노니는 뽀트들과 강변 유보도에서 산책하는 련인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마냥 펼쳐진 수려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노라면 똑 마치 큰 호수가 유원지 근처의 관광호텔에 투숙한듯한 착각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사를 도와주려 왔던 고종사촌동생이 그 긴 두다리 콤파스로 집안을 두루 재여보더니 북쪽 창문에서 남쪽 창문까지의 거리가 무려 15메터나 된다고 했다. 거실외에도 침실 두칸과 서재까지 달린 휑하니 널다란 이 큰집에서 만년을 보내게된 우리 부부는 뙤창문 하나 없던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그때가 자꾸 뇌리에 떠올린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전까지도 뙤창문 하나 없는 초가집에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를 간 다음에도 그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안도현 명월진 명안가 북쪽 기차역으로 가는 한 큰길목 우물가에 위치해있던 그 집은 팔간짜리 두집 사이 틈바구니에 이어지은 보잘것없이 헐망하고 초라한 오막살이집이였다. 이 초가집 앞과 뒤, 두 출입문 사이의 거리가 6메터도 채 안되고 방너비는 겨우 2메터 남짓, 면적이 12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였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우리는 할머니,아버지,어머니 그리고 나와 녀동생 다섯 식구가 같이 살았고 이 작은 집에서 나의 형님과 나 그리고 녀동생 삼남매가 모두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다.
집이 작은 것도 불편했지만 뙤창문마저 하나 없어 집안이 늘 어둑컴컴한것이 더욱 사람을 미치도록 갑갑하게 만들었다. 유리문도 아니고 창호지를 밖으로 붙인 출입문으로는 겨울이면 랭기가 들어온다고 바깥쪽에 포장용종이상자를 뜯어 붙이고 또 그 우에 세멘트포장지까지 덕지덕지 두껍게 붙여놓아야 추운 한겨울을 지낼수 있었므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했다.
1959년 국경10주년 때 할빈공업대학을 갓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받은 형님이 이 초가집에서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집 식구들은 며칠간 다른 집들을 전전하면서 잠자리를 찾아다녀야 했고 형님이 북경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금방 시집온 형수님까지 여섯식구가 이 작은 집에서 같이 살아야 했다. 1962년 가을,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이 초가집을 떠나게 된것은 나로 말하면 그야말로 오래동안 학수고대하여 오던 해방이였고 그 지긋지긋한 오막살이 생활과의 작별이였다. 그런데 모든것이 다 타고난 운명이라고나 할가. 나의 신혼생활도 바로 이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시작되었다.
미닫이를 사이 두고 좁디좁은 아래 가마목은 나와 안해의 잠자리가 되였고 그 보다 조금 더 넓은 웃방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팔순이 된 할머니가 비좁게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다.
집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그후 내가 공인계급의 “재교육”을 받던 안도방직공장에서는 건평 24평방메터 되는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여섯식구가 같이 살아야했고 1980년 여름 내가 자치주인민정부에 전근되어 왔지만 집이 없어서 하는수없이 코구멍만한 연길방직공장 “모자숙사”에서 1년을 살아야 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주정부에서 배치해주는 “사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로소 3대 다섯식구가 여전히 단칸방 한구들에서 살아야했다. 이 집은 옛날 왜놈들이 쓰던 낡은 집으로서 동서 량쪽 입구로 들어가면 기다란 복도가 있고 북쪽벽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한낮에도 눈앞이 캄캄하였다. 여덟세대가 한칸씩 차지하고 사는 이 “사택”에서는 어느 문이 자기집 문인지 찾기가 힘들어 복도에 들어서서 몇발작만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예 장님처럼 벽을 더듬어야 가까스로 자기집 문을 찾을수가 있었다.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이것은 나의 오랜 소망이였다.
고생끝의 락을 고진감래라고 했듯이 1983년에는 나도 드디여 56평방메터짜리, 절반만 온돌인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됐고 1989년에는 78평방메터짜리 집중난방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몇십년전 안도현 명월진 그 12평방메터밖에 안 되는 초가집에서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던 우리 삼남매는 지금 모두 100평방메터가 넘는 집에서 살고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하여 그렇게 비좁고 그렇게 헐망하고 그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을가?
그것은 그때 그 시절에 오륙십원밖에 안되는 아버지의 박봉으로 가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열여덟살 꽃나이까지 곱게 키워오던 나의 누나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그 몹쓸놈의 립파선암이라는 병을 고쳐보려고 모든것을 몰부어야했으므로 가난에 쪼들리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게다가 두 아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시느라 다른 집을 마련할 엄두도 못내시였고 또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을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처럼 궁핍한 살림살이는 우리 집만의 사정이 아니였고 나의 부모님이 남들보다 무능해서도 아니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아들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낸 분들이셨지만 아들덕에 호강 한번 못해보시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였다. 그때 그 시절은 계급투쟁의 시기였고 온나라가 “사람잡이”에 열을 올리던 동란의 시기였으며 나라경제가 붕괴의 위험에 빠져 가난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형님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의 가난은 떨쳐버릴수있고 부모님을 호강시킬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제아무리 대학을 졸업했어도 우리 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소하여 가난의 현실을 개변시킬수 없었다. 1978년 가을,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께서 당의 사업중심을 계급투쟁으로부터 경제건설에로 전이시켜야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중화의 대지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개혁개방의 물결은 점차 온 나라의 모습을 몰라보게 바꿔놓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달라졌다.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나의 아들애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류학을 나갈수 있었고 또 해외취직도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 세대와는 달리 자기가 번 돈으로 집을 사서 부모님께 효도할수도 있게 된것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 이 모든것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일이였다.
작년 국경절에 북경에 계시는 형님과 형수님이 연길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시였다. 그때 우리 삼남매는 안도방직공장 부근에 모셔진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마치고 부모님을 추모하는 심정으로 명월진에 올라가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옛집을 찾아가보았다. 그런데 옛집터에 있던 나지막한 초가집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는 층집들이 즐비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우리 집 옛터뿐 아니라 명월진 전체가 천지개벽이나 한듯 완전히 몰라보게 변모돼있었다. 형님과 형수님은 명월진의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시고 “고향이 변하기는 많이 변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초라하던 명월구가 이처럼 몰라보게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해마지않는것이였다.
명월구뿐아니라 지금 연변의 각 현 시, 더 나아가 전국 각지 그 어데라 없이 가는곳마다 모두 거대한 건설장으로 변하여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고있다. 최근년간 우리 나라가 건설에 소모한 강재(钢材)만해도 전세계 강재 생산량의 3분의 1을 웃돌고, 세멘트 소모량이 전세계 세멘트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웠다고 하였으니 그 건설규모를 가히 상상할수 있으리라.
그 누가 말했던가? “집은 참으로 그 누구에게나 소중한 삶의 둥지이고 마음의 항구이다.”라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을 다그치고 있는데 항간에는 “초요사회냐 아니냐의 분수령이 바로 주택이라”는 말까지 있다.
우리 나라는 금년부터 제11차 5개년계획이 개시되고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에 더욱 세찬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인 발전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후대들도 다같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주택에서 살게 될 날이 멀지 않아 우리앞으로 성큼 다가오고있다.
2006. 3. 5.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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